조선시대 인구의 절반이 노비였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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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 янв 2025

Комментарии • 410

  • @user-be2ru9su3e
    @user-be2ru9su3e Год назад +86

    퇴계이황 신사임당 이런애들 지폐에서 빨리 퇴출시켜야됨

    • @이삼순-p7m
      @이삼순-p7m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그러니 그렇게 키울수있었겠지
      여.유..

    • @진보는없다공산주-c3l
      @진보는없다공산주-c3l 5 месяцев назад

      북잡이개새끼들

    • @리엥-s5f
      @리엥-s5f 3 месяца назад +5

      지금도 그 세력들의힘이 느껴지지 않나요?

    • @Kirakirahikaru_
      @Kirakirahikaru_ 3 месяца назад

      친중국 사대주의자들임

    • @foobarbaz1055
      @foobarbaz1055 2 месяца назад +2

      지금도 지식인 계급이 계급독재를 하고 있지.

  • @boringpeanut
    @boringpeanut 2 года назад +36

    유렵처럼 원양기술과 정복전쟁이 발달했었다면 아마 중국, 일본, 동남아, 러시아에서 잡아와서 노예를 부렸겠지만 빌빌대는 조공국이라 같은민족만 괴롭히는 추태를 벌였군요.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 @호기심에답해봐
      @호기심에답해봐  2 года назад +1

      감사합니다🫶

    • @SuperWonder
      @SuperWonder Год назад +3

      서양국가들이 지금까지 욕얻어먹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노예무역했다는건데 사고는 조선사람이 치고 사과는 현대한국인이 하는 상황을 원하시는 겁니까?

    • @user-ow6ry2ks4x
      @user-ow6ry2ks4x Год назад +3

      @@SuperWonder 사과를 왜 함? ㅋㅋ 지금 유럽사람들이 노예무역으로 사과 하나? 솔직히 과거에 노예무역 하고 사과 퉁 칠 수 있으면 하고싶은데 ㅋㅋ

    • @user-ow6ry2ks4x
      @user-ow6ry2ks4x Год назад +4

      @@SuperWonder 약해서 얻어쳐맞기만 한게 자랑인가

    • @SuperWonder
      @SuperWonder Год назад +3

      @@user-ow6ry2ks4x 옆집사람 살인마니까 나도 사람죽이고 다니겠다는 논리 잘들었다.

  • @libertybellliberty6096
    @libertybellliberty6096 3 месяца назад +6

    비교적 긍정적 평가를 받는 조선 21대 임금 영조의 어머니는 궁중에서 청소 및 허드렛일을 맡았었던 무수리(여자 종) 출신입니다. 숙종의 눈에 띄어 承恩을 입고, 숙빈 최씨에 봉해집니다. 지금의 관점으로 조선 시대 노비가 어떠했느니 논하는 것은 그 당시를 살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노비들의 삶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으며, 노비가 매매 되었다고는 하나 극히 이래적인 경우이고 관청이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대부분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허가를 받아 노비를 매매해도 인근 사람에게 팔리므로 가족이 생이별 당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주인과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外居奴婢 대부분이고 외거노비는 재산을 모을 수 있고, 재물로 노비가 노비를 거느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공노비는 관청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에 비록 신분은 낮을 지라도 절대 무시 할 수 없었고, 가난한 소작농 평민의 경우, 공노비와 혼인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너무 편향되게 바라보지 맙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시간이 지나 서기 2500년이 되어서 우리 후손들이 대한민국 시대 국민들이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았는지 불쌍하다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는 조선 시대이고 지금은 대한민국 시대이니, 그 시대에 맞게 살아갑시다.

  • @전지효-i2s
    @전지효-i2s 3 месяца назад +10

    노비 이름부터 소똥이 말똥이 이런식으로 지음 그냥 노비를 사람말 할줄 아는 짐승으로만 본거임

    • @shinshinshin9043
      @shinshinshin9043 2 дня назад

      @@전지효-i2s 노비 면천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도적을 잡으면 면천될 수 있었다.
      국경을 넘는 자를 잡는 경우에는 1명만 잡아들여도 면천되었다.
      반역음모를 고발하면 면천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노비가 면천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군공, 사민, 포도, 납속, 공사천무과, 참급무과.
      조선 정부는 재원과 군역 자원 확보를 위해 면천을 제도화하였습니다. 17세기 이후 면천법의 확대로 인해 신분제가 동요하는 계기가 되었고, 1894년 갑오개혁의 시행으로 노비제가 철폐되었습니다. 군공 면천(軍功免賤)은 국내외적으로 전란이나 변란을 당하여 국가가 곤경에 처하게 될 때 군사적 공로에 의해서 면천종량을 허락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 왕조는 건국 직후인 1405년(태종 5) 「영위준수노비결절조목(永爲遵守奴婢決折條目)」을 반포하면서 노비는 일시적인 공로에 의해서 ‘기신방역(其身放役)’이 될 수 있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이러한 규정은 조선시대 내내 준수되었는데, 일례로 1460년(세조 6) 여진정벌에 대한 공로를 논하면서 천인을 면천하여 주었고,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참여한 노비 역시 모두 면천하여 주었다.
      사민 면천(徙民政策)은 북변 지역의 국방 내지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천인을 이주시키는 대신, 그 보상으로 면천해주는 방법이다. 사민은 세종 대에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세종 대 대여진(對女眞) 정책의 일환으로 북변 지역, 특히 함길도의 방어체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사민을 실시하면서 노비의 면천을 공인하여 주었다. 사민 면천은 성종 대까지 시행되었으나, 그 이후로는 거의 실시되지 못하였다.
      한편 강도(强盜)를 잡은 것에 대한 포상으로 주어지는 포도 면천도 있었다. 포도 면천은 세종 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고, 『대전속록(大典續錄)』의 반포로 법제화되었다. 그러나 『속대전(續大典)』이 반포되면서 강도를 잡은 천인은 면천되지 못하고, 면포를 시상으로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명화적(明火賊)을 5인 이상 잡은 천인에게는 면천의 특혜를 주었다.
      납속 면책(納粟免策)은 국가에 곡식을 헌납하면, 그 반대 급부로 천인의 경우 면천을 허락해주는 정책이었다. 납속은 군수 납속과 진휼 납속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군수 납속은 전란이나 변란시에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하여, 진휼 납속은 기근시에 진휼곡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납속 면천은 조선 전기에는 널리 시행되지 못하다가 양란을 겪은 17세기부터 널리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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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황
      17세기 이후 가장 널리 적용된 면천 방법은 납속이었다. 납속은 임진왜란 때 군량미를 보충하려는 의도에서 실시되었는데, 그 이후에도 국가에 흉년에 들면 진휼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하였다. 따라서 재력이 있는 노비는 누구나 납속책에 수응하여 면천을 허가받고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다. 조선 후기 노비 속량가는 쌀 160석에까지 이른 경우도 있었으나, 1662년(현종 3)에는 50석으로 낮아졌으며, 1718년(숙종 44)에는 납속 속량가를 1530세는 50석, 3140세는 40석, 4150세는 30석, 5155세는 20석, 56~60세는 10석으로 차등 지정하였다. 영조 대에 들어와서는 납속과 함께 납전(納錢)을 통한 면천도 실시되었다. 『속대전(續大典)』에는 공사천의 속량하는 가격을 동전 100냥 이하로 규정하고 있다.
      접기/펼치기
      의의와 평가
      조선왕조는 엄격한 신분제를 바탕으로 운영되는 사회였다. 더구나 노비의 신분 세습은 ‘일천즉천(一賤則賤)’으로 부모 중 한 명만이 천인인 경우에도 자녀는 노비로 귀속되고 있어서 이들의 면천과 종량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조선왕조에서 노비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는 면천법을 성문화하여 일정한 제한 속에서 노비들에게 면천의 혜택을 주었다. 이는 조선왕조 신분제의 폐쇄성을 방지하고자 한 조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17세기 이후 전개된 노비 면천의 확대는 신분제를 동요시켰고, 결국 1894년 갑오경장 때 신분제가 폐지되는 데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 @마우스-q9s
    @마우스-q9s 3 месяца назад +12

    일제강점기가 되서야 노비제도를 국가차원에서 없애고,
    6.25전쟁을 개기로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실제 노비가 없어졌다고도 함.

    • @dolgum826
      @dolgum826 3 месяца назад +1

      돼서야 계기

    • @dolgum826
      @dolgum826 3 месяца назад +2

      일제강점기-->일제시대

    • @Adam-v1r7z
      @Adam-v1r7z 2 месяца назад

      종모법이 무서운게 영상에선 모계가 양인이지만 현실은 모계쪽이 노비면 자식도 노비라서 ㄷㄷ

  • @김창환-b9x
    @김창환-b9x 2 года назад +8

    오랜만에 영상! 영상 감사합니다!

    • @호기심에답해봐
      @호기심에답해봐  2 года назад +1

      늘 기다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코로나 확진으로 한달을 아프고 났네요ㅠㅠ 늘 건강 조심하시고 앞으로도 쭉 성실히 찾아뵙겠습니다😊

  • @애초에미친놈은브레이
    @애초에미친놈은브레이 Год назад +5

    삼정의 문란으로 죽은사람 병역 군포 세금도 대신 내던 시절인데 어쭙잖게 양인으로 살면서 개인돈으로 군복사고 창사고 군대가고 세금내느니 노비로 들어간거 ..

    • @hmjeon8609
      @hmjeon8609 4 месяца назад +1

      @@애초에미친놈은브레이 맞아요..굶어죽는것보다 노비가 되자..

    • @누하-h3j
      @누하-h3j 2 месяца назад +1

      자발적으로 체인점 점주..

  • @MT7-KHW
    @MT7-KHW 2 года назад +31

    조선의 유교는 참…
    양반 만을 위한 나라인 듯…
    그러다 일부 양반들은 나라가 망해도 강한 나라에 빌붙어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 듯.
    인종이 달라도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하물며 동족을 노비로 두는 나라라니…

    • @호기심에답해봐
      @호기심에답해봐  2 года назад +11

      참 부끄러운 역사죠ㅠㅠ

    • @HTLM519
      @HTLM519 2 года назад +10

      같은 인종을 노비로 두지 않은 인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프리카에서 타인종을 매매해 노예로 부린 근대 서양식 노예제가 인류 역사 전체를 보면 굉장히 특이한 제도입니다

    • @dinos119
      @dinos119 Год назад +7

      애초에 전근대 시기에 온 민중을 위한 나라라는 개념은 애시당초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건 산업화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에요. 산업화 이전에 현대와같은 전 국민을 위한 나라라는건 존재하는거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아니, 현대에도 완벽하게 전 국민을 위한 나라라는건 존재할수 없는건데 (요즘도 법으로는 평등하다지만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의 권리가 실질적으로 다 평등하지는 않는것처럼) 전근대에 그런걸 바라는거 자체가 모순이지요.

    • @SuperWonder
      @SuperWonder 7 месяцев назад +5

      중국, 일본, 태국, 티베트 등 다른 나라들도 동족을 노예로 부렸는데. 아니더라도 그 시절에는 세계적으로 이름만 자유민인 사람들 널렸던 시절임.

    • @rocketmelon
      @rocketmelon 5 месяцев назад

      백인이 같은 백인을 흑인처럼 노예부힌 것도 사실. 특히 아일랜드인들을 화이트 니그로라고 경멸하면서 매매함

  • @진보는없다공산주-c3l
    @진보는없다공산주-c3l 5 месяцев назад +34

    내가 이래서 이승만대통령을 위대하고 고귀한 천재라고본다

  • @DEADSTAR-f9z
    @DEADSTAR-f9z День назад

    일본에게 나라를 뺏기고도,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많이 없었습니다.
    자유시 참변으로 녹아내린 독립군 수는 2800명 정도 입니다.
    하지만, 프랑스가 독일에게 침략 당하고 나서 저항운동을 한 레지스탕스는 20만명 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는가 하면, 조선말의 관리들의 악랄한 약탈은 거의 상상 이상 이였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들어오고 나서 노비들은 신분의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당신이 노비였다면, 과연 일본인들을 미워했을까요?

  • @redpig3209
    @redpig3209 Год назад +19

    지금과 비교하면 고려는 대한민국 조선은 북한.......... 이성계와 사대부는 북한 공산당과 같은 최악이고 당시 문명국과 비교해도 최악....

    • @SuperWonder
      @SuperWonder Год назад +2

      고려보다 나아진 사회가 바로 조선이야.

    • @토미베스트
      @토미베스트 5 месяцев назад

      ​@@SuperWonder염병하고 있네. 조선시대는 소빙하기라 기온자체도 고려보다 10도이상 낮아서 사람살기가 극악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산이 민둥산이 된 이유죠. 그리고 조선 530년간 굶어죽은 숫자가 1억이 넘습니다. 븽.신님아 😂😂😂

    • @토미베스트
      @토미베스트 5 месяцев назад +1

      ​@@SuperWonder염.병한다. 고려가 훨씬 살기 좋았다 😂😂

    • @SuperWonder
      @SuperWonder 5 месяцев назад

      @@토미베스트고려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발전한게 조선이야.

    • @권태진-h6d
      @권태진-h6d 4 месяца назад +3

      역사는 시간이 흐른다고 발전이 되는게 아니란다
      후퇴하는경유가 조선, 그리고유럽의중세 뭐이런것도 모르는 분들은

  • @libertybellliberty6096
    @libertybellliberty6096 3 месяца назад +2

    가난한 소작농이 투탁(投託)하여 형식상 노비가 늘어난 게 원인 입니다. 노비는 군역의 의무가 없고 납세의 의무도 없으니, 평민 가난한 소작농의 경우 그 苦役에서 벗어나고자 평민이 노비로 가장하여 노비행세를 했습니다. 평민은 16살 부터 60살까지 거의 한평생 육군의 경우 1년에 2개월 복무하거나 군 복무하는 자의 경제적 도움을 주는 봉족이 되어 거의 평생을 병역의 져야 했으며, 또 세금까지 내야 하니 병역과 세금의 의무가 없는 노비는 하층 신분이라 그렇지 양인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소작농은 대지주 양반에 투탁하여 스스로 노비로 위장한 후 땅을 빌려 농사 짓고 소작료만 지불하면 끝이니 양반들이 노비 수백명 거느렸다는 것은 대부분 소작료를 내는 형식상 노비였을 겁니다. 대부분이 外居奴婢이고, 주인과 같이 사는 率居奴婢는 아주 극소수로 조선시대 고관 대작 벼슬이 아니고는 집 구조가 노비와 같이 살만큼 크지 않았습니다. 조선시대 관리 녹봉은 매우 박하여 겨우 굶주림을 면하는 정도인데, 노비를 거느리면 노비도 먹여야 하므로 관리 녹봉으로 노비를 거느릴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를 직접 살아보지 않았으니 현대적 시점에서 조선시대 노비제도가 어떠했으니 국민 절반이 노비였느니 하는 것은 무의미 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이라도 신분제가 없어졌다고 생각합니까?
    지금은 신라시대 골품제와 같은 신골품제 사회입니다. 眞骨. 聖骨은 인구 상위 1%이고, 6두품은 상위 2~10%이며, 나머지 90% 檀骨(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지역을 통일하고 그 지역에 살던 백성을 지칭)로 어업 ,농업, 상공업, 중견 중소기업 근로자. 비정규직 근로자, 건축근로자, 하위직 공무원, 자영업자. 일용직 근로자. 프리렌서 등 직업군에 종사하는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민입니다. 결론적으로 조선 시대 노비제도를 그 당시에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시점으로 말하는 것은 무의미 합니다. 지금은 조선 시대가 아니고 2024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 @user-fz3fd9tk4z
      @user-fz3fd9tk4z 3 месяца назад

      양민으로 살기보다 노비로 사는게 더 나았다는 말이네요.
      지금도 마찬가지로 자영업자보다는 월급쟁이가 살기 편하지요.

    • @myongdong
      @myongdong 3 месяца назад +1

      @@user-fz3fd9tk4z 근데 왜 난리 나면 노비문서 불사르고 난리여.. 그냥 편하게 살지...ㅉㅉㅉ

    • @READ0630
      @READ0630 2 месяца назад +1

      @@myongdong 노비들이 종류가 여럿임. 노비도 사유재산이 있어서, 노비가 노비를 거느리고 주인 행세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임. 그리고 군역 등 회피하다가 적당한 때 되면 돈 내고 속량해서 양인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문에 조선 후기에 노비 비율이 10% 미만까지 떨어짐.
      종모법으로 떨어지는 것도 크고, 속량이 가능해져서 돈 좀 내면 다 노비 신분 벗기가 가능해지니 돈 좀 모아둔 노비들은 그냥 다 쉽게 속량해버려서.

  • @유주연-i2n
    @유주연-i2n 2 года назад

    멋진 영상 항상 좋아요~~

  • @seongki1003
    @seongki1003 Год назад +21

    조선이 무슨 정복국가도 아닌데 그 노비(노예)들이 어디서 생겼을까?
    짐승들처럼 교배시켜서 만들었단 이야기밖에 안 나옴. 그걸 보고 애민정신 운운하는 것보면 기가 차서

    • @SuperWonder
      @SuperWonder 7 месяцев назад +4

      옛날에는 동서를 막론하고 노예부렸고 노예를 안부렸어도 이름만 자유민인 사람들이 널린 시대였는데.

    • @solla3130
      @solla3130 3 месяца назад +2

      애초에 노비가 노예도 아니거니와 그런식이면 통일신라 고려시대 노비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ㅇㅇ?

    • @화살-q3h
      @화살-q3h 3 месяца назад +4

      @@solla3130 영상에도 나옵니다. 고려 이전 시대에는 노예가 인구 대비 아주 소수였는데 조선에서는 인구의 40%가 노비... 이것이 문제라는 것임... 짐승처럼 교배시켜서 늘렸다는 것임...

    • @solla3130
      @solla3130 3 месяца назад

      @@화살-q3h ??? 미국의 한국학의 대가인 제임스 팔레 교수는 고려 중기 무신정권 시절 노비가 폭증해서 전체 인구의 약 30%가 노비가 되었으며 이런 비율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으며 대부분 가난한 평민들이 고려시대 호족들에게 자발적으로 몸을 의탁하면서 투탁노비가 된 것이라고 설명했는데요? ㅇㅇ?

    • @cijjeehh2302
      @cijjeehh2302 3 месяца назад

      @@solla3130 노비가 노예가 아니라는 변명 ㅋ
      세상에 노예없는 사회가 있음?
      그럼 조선은 전세계에서 유래를 찾을수 없는 노예없는 국가임? ㅋ 제발 생각을 하고 살자 ㅋㅋㅋ

  • @agm1144
    @agm1144 3 месяца назад +1

    노비가 늘어난 이유는 양천교혼이 아니라 '투탁'임.
    노비는 군역과 세금이 면제였기 때문에 빈곤층 양인보다는 생존에 유리했음. 그래서 빈곤층으로 몰락한 양인들이 스스로 유력가의 노비가 되었는데 이를 '투탁'이라고 함. 조선 중기에 빈곤층으로 몰락한 양인들이 투탁을 하는 사례가 크게 늘었고 특히 왜란과 호란으로 조선 경제가 박살난 시점에 노비 비율은 정점을 찍었음.
    설상가상으로 가짜 노비도 성행함. 세금과 군역을 면할 계획으로 일부 양인들이 지방관리와 양반에게 뇌물을 주고 가짜로 노비로 등록시키는 일도 많았음. 당시 양인들에게 승려로 출가하거나 가짜 노비로 등록하는 것은 가장 널리 실행된 탈세 수법이였음.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조선시대 노비는 90%이상은 외거 노비였기 때문. 외거 노비는 주인 집에서 살지 않고 자기 집을 가지고 가정을 일구며 소작농으로서 사는 노비들로 실생활은 일반 양인과 별 다를게 없었던 것. 그냥 주인에게 주는 정해진 납공만 내면 주인 얼굴 볼 일도 없이 살아감. 거기다 군면제 혜택까지 있으니 형편 어려운 양인들이 주저없이 투탁을 해버린 것.

  • @agm1144
    @agm1144 3 месяца назад +1

    조선시대 노비 폭증은 수요와 공급으로 이해해야함.
    조선시대에 들어 노비 수요가 고려시대보다 폭증하게 됨. 고려시대엔 향리를 중심으로 하는 향촌공동체의 자치권이 강해서 사실상 지방의 향리, 귀족들이 왕노릇하며 양인들을 노비마냥 부릴 수 있었음. 그래서 노비 수요가 크지 않았지만, 조선시대 각종 제도가 정비되고 중앙집권이 강화되면서 더 이상 양인들을 사사로이 부릴 수 없게 됨. 그래서 맘대로 이용할 수 있는 노동력을 제공할 노비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음.
    그에 맞춰 노비 공급도 폭증함. 이걸 '양천교혼' 탓이라고 오해하는데 양천교혼은 노비제가 존재할 때부터 이루어진 일이고 조선시대 이전에 양천교혼으로 인해 노비가 폭증했다는 기록도 없음. 애시당초 혼인이란게 제3자가 강제해서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신분을 초월한 사랑이 있어야 양천교혼이 가능한데 이런 경우가 노비 폭증을 불러일으킬 만큼 흔한 일일 수가 없음.
    노비 공급의 폭증의 근본 원인은 양인들의 권리가 강해진 만큼 그 책임(군역, 세금) 또한 무거워졌기 때문. 과거엔 향촌공동체에서 세금이나 군역문제를 공동 해결했는데, 이제는 각 개인이 책임지고 해결할 문제가 되어버림. 세금과 군역에 따른 개개인의 부담이 그만큼 커졌고 이를 감당 못한 빈곤층이 군역과 세금을 면제받을 방법으로 노비가 되는 선택을 함으로서 노비 공급이 늘어남. 이들은 스스로 유력 양반의 노비가 되길 청하여 노비가 되었는데 이를 '투탁'이라고 함.
    투탁으로 노비가 되려는 노비 공급이 늘고, 양반층에서도 노비 수요가 늘어나면서 노비수는 지속적으로 늘어남.
    이런 추세는 노비에게도 각종 군역과 세금이 부여되면서 노비가 되는 잇점이 사라져 투탁이 줄면서 노비 공급도 줄고, 과전법 체제가 붕괴되고 개인의 토지 소유가 허용되면서 이리저리 관리가 어려운 노비 대신에 양인에게 소작을 주는 지주전호제가 선호되어 노비 수요 역시 감소하여 조선 말기엔 노비 %가 1자리 수 정도로까지 감소함.

  • @엘든링은내인생갓겜
    @엘든링은내인생갓겜 9 месяцев назад +11

    삼국시대때까지는 정복전쟁들이 하도 많았다보니 타국에서 약탈해오거나 납치해온 전쟁 노예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아무래도 조선시대는 그런 정복전쟁이 아예 없다보니까 자국민들을 노예로 계속 세습해서 부려먹었어야됐기 떄문에 이런 악습이 생겨난 것이라고 합니다. 참... 암울하죠. 조선의 후기는 진짜 암울한 암흑기임. 게다가 조선이 부유한 선진국이었다면 외국의 노예시장들에서 노예들을 구입하거나 했을텐데 조선이 돈많은 국가도 아니었고 조선은 집권층들이 자신의 폭압적인 권위주의적 지배를 사상적으로 정당화하기위해 성리학을 이용한 국가이다보니까 무조건 노예들이 최대한 많이 필요한 사회였고 결국 이런 악행들이 겹쳐 노예국가로 성장(?)한듯..

    • @solla3130
      @solla3130 3 месяца назад

      애초에 노비는 노예도 아니고 동시대 일본처럼 조선에는 노예시장도 없었어요 ㅇㅇ 자국민들을 노예로 부려 먹은거는 동시대 일본임 ㅇㅇ

    • @hmjeon8609
      @hmjeon8609 3 месяца назад

      ​@@solla3130 노비는 노예..

    • @solla3130
      @solla3130 3 месяца назад

      @@hmjeon8609 노비는 노비임 노예라는 의견은 소수학설임 ㄹㅇ

    • @hmjeon8609
      @hmjeon8609 3 месяца назад

      @@solla3130 노비가 서양의 농노의 개념인가 노예의 개념인가.. 노예에 가깝다.

    • @solla3130
      @solla3130 3 месяца назад

      @@hmjeon8609 학계에서는 외거노비들은 일반 소작농들과 다를 바 없다고 보고 있음 ㅇㅇ

  • @SuperWonder
    @SuperWonder Год назад +6

    그 시대에는 동양이고 서양이고 하층민들 인권은 바닥이던 시절이니까요.

    • @SuperWonder
      @SuperWonder 3 месяца назад

      @@rtlkfcb 그러니까 내 말은 일본이든 유럽이든 지배층이 횡포를 부리면 피지배층이 법적으로 저항할 수단이 있냐는거지.

  • @korcandoit
    @korcandoit 2 года назад +3

    사대부... 지금도..

  • @시얀-r2f
    @시얀-r2f 4 месяца назад +2

    이 노비들과 양민들이 일본 합병 이후 조선의 시대가 그리워 독립운동을 했다는 개 소리가 있다는 소문이...

    • @solla3130
      @solla3130 3 месяца назад +1

      실제로 일제에 검거된 독립투사들은 노비 양민들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음 ㄹㅇ

    • @myongdong
      @myongdong 3 месяца назад

      @@solla3130 흠.. 범죄자들이나 마적질 한 넘들도 나중에 다 독립운동했다고 썰 풀더군요..

    • @solla3130
      @solla3130 3 месяца назад +1

      @@myongdong 흠.. 독립운동가들이 전부 도적이었다고 일본인들이 열심히 외치더군요 ㅇㅇ

    • @myongdong
      @myongdong 3 месяца назад

      @@solla3130 걔들은 별 관심 없었을듯.. 실제로 한줌도 안돼니..

    • @solla3130
      @solla3130 3 месяца назад

      @@myongdong 당대 조사에 따르면 의병들 대부분은 노비와 양인들이었다고함 ㅇㅇ

  • @solla3130
    @solla3130 3 месяца назад +1

    애초에 조선시대 인구의 절반이 노비라는 주장 자체가 근거가 없음 ㄹㅇ

  • @99arther
    @99arther 2 месяца назад

    순전히 국가 세금과 군역을 위해 노비로 만들었다가 양인으로 만들었다가... 우리나라 기득권들이 뿌리깊게 존경을 못받는 이유, 2030들이 탈조선하는 이유

  • @최정권-j8b
    @최정권-j8b 2 дня назад

    왜 조선에는 노비가 많았을까?
    첫째 조선은 건국이념으로 성리학을 채택했고 나라는 왕권과 신권이 밎서는 엘리트주의 국가로 사대부라는 신분이 존재했음. 이들은 일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게 하기위해 노비 같은 제도를 도입했음.
    둘째 왜 노비가 많았을까?
    사대부가 시대를 거듭할수록 자손이 늘어나니 당영히 노비 수요도 늘어났다고 봄.
    하지만 시간이 지나 농사짖는 백성보다 노비로 살면 굶어 죽을 염려없고 군역이나 세금도 없어 좋은 주인 만나면은 끌쨈임.
    세째 조선의 노비제는 정말 나쁜제도일까?
    다른나라의 노예와 비교해보면 나라에서 잘과리했다고 봄.
    즉 주인이 노비를 사사롭게 죽이면 처벌도 가능했고 공노비 경우 출산휴가등도 있었음.
    다른나라 노예는 인간취급도 받지 못하고 주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사로이 죽여도 국가가 처벌하지 못했음.
    그래서 조선의 노비는 좀 더 인간적이고 좋은 주인 만나면 양천도 해고 아니면 외노비가 되어 가족과 오소도손 살고 소작료 어느정도 받치고 굶어 죽을 염려 없으나 가난한 양반은 체면 때문에 농사도 앗짖고 책만 읽다가 그렇게 늙어감.
    네째 신분제도에 따른 폐해
    가끔 노비 출신중에도 뛰어난 유전자로 천재가 태어나는데 신분제로 인해 양인이나 관직에 나갈 수 없어 불행한 삶을 살아가야 함. 현대사회라면 기회가 주어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신분제는 그런 가능성을 업애버림. 그래서 유자광 같은 비운의 천재는 이런 신분제의 한계를 뛰어 출세를 위해 밀고도 서슴치 않았음. 갑오경정으로 신분제가 없어졌으나 일제강점기 6.25 그리고 산업화를 거쳐없어졌음.
    하지만 산업화를 통해 새로운 계급사회로 진행중임. 나라가 성장을 멈추고 나누어 먹을 것이 한정되면 계급을 만들려는 경향이 커짐.
    서울공화국에서 강남공화국으로 심화되고 있음이 그 단편임.

  • @누하-h3j
    @누하-h3j 2 месяца назад

    양인하고 결혼해서 양인되고, 양반하고 결혼해서 양반되면, 양반이 여자 독식한다. 애비를 애비라 부르지 못하는 설움만보지 말고, 자식을 자식이라 부르지 못하는 애비의 피눈물도 보거라

  • @SKYBLUE-oo2ld
    @SKYBLUE-oo2ld 2 года назад +16

    인구의 절반이상은 일본이 해방시켜준것
    최초 일본에 대해 거부를 덜했던것도 이런것이고 산업화를 추진하려면 노비말고 자유시민이 필요했으니 일본도 나름 계산이 있었음

    • @HTLM519
      @HTLM519 2 года назад +5

      조선 후기 인구 중 노비 비중: 3%

    • @HTLM519
      @HTLM519 2 года назад +7

      일본은 조선 산업화엔 관심이 없었고 뜯어먹기 바빴습니다. 산미증식계획으로 쌀 플랜테이션 농업 진행해서 일본 본토 식량부족 문제 해결하려고 했죠.

    • @SuperWonder
      @SuperWonder Год назад +4

      자기네 부라쿠민 문제도 방치한 일본이 자기 식민지의 신분제 문제에는 왜 관심을 가지겠나. 일본이 조선의 신분제 타파를 위해 한건 뭣도 없다.

    • @아름다운도사-f4j
      @아름다운도사-f4j 6 месяцев назад +1

      ​@@SuperWonder ㅇㅇ맞음 관심은 없었는데 결과 해방된건맞자나

    • @SuperWonder
      @SuperWonder 6 месяцев назад +2

      @@아름다운도사-f4j 노예가 자유민으로 이름만 바뀌면 신분해방이 되겠나. 일제가 한 짓이 딱 이 수준인데.

  • @애국자-n6r
    @애국자-n6r 3 месяца назад +5

    조선이 망해서 정말 다행임

  • @피캉3세
    @피캉3세 Год назад +5

    인도 불가축 천민 보면 이건 덜 심해보일정도로 인도는 지금도 신분제도를 유지하고 있음

    • @딩고-c4t
      @딩고-c4t 3 месяца назад

      그러니 나라가 그모양이죠
      인도를 보면 과거 조선시대 보는것 같네요

  • @fuuspj-zn5rg3uo9t
    @fuuspj-zn5rg3uo9t Месяц назад +1

    조선인구 절반 노비설은 임란때 잠깐 폭발적으로 늘어난것이고 그 이후는 10% 내외를 유지하였습니다. 조선역사 전체를 노비절반 노예제 국가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 @푸른하늘아래서-k7w
    @푸른하늘아래서-k7w 6 месяцев назад +9

    같은 민족을 노예로 삼은 세계 유일의 이씨 조선을 미화하지 말라

  • @hmjeon8609
    @hmjeon8609 4 месяца назад +2

    세종대왕 때문에 늘었다기 보다.. 가난한 양민이 노비로 전락한 경우가 많은듯 함.
    그리고 종모법은 어미의 신분를 따르는것인데 일천즉천과는 차이가 있슴.
    조정의 입장은 양인의 숫자가 늘어나는게 이익인데 노비가 필요했던
    양반 기득권 집단과 이때문에 갈등이 있었던듯 함.
    결국 양반의 뜻대로 되어 중기로 가면서 노비가 급격히 늘어나 상당히 문제가 된듯한데...

    • @hmjeon8609
      @hmjeon8609 3 месяца назад +1

      사실은 내가 더 관심이 가는것은 후기로 가며 노비 숫자가 어떻게 줄어들었나. 늘어난 것도 줄어든 것도 결국은 경제적인 이유일거다..

  • @사이퍼-j1y
    @사이퍼-j1y 2 месяца назад +1

    지폐의 위인들은 독립운동과와 의병대장등으로 바꾸어야겠네요
    아님 교육자나. 발명가도 좋을듯

  • @후사경-g7l
    @후사경-g7l 3 месяца назад +4

    1907년, 일제가 노비제도 폐지시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전지효-i2s
      @전지효-i2s 3 месяца назад

      1907년이면 아직 조선임

  • @shinshinshin9043
    @shinshinshin9043 6 месяцев назад +5

    노예와 달리 노비는 일부 관직 진츌. 돈내고 납속 가능. 여러 사유 면천 가능. 재산 소유 가능. 흉년 만석꾼 노비 기부 후 면천 기록 다수. 군공 면천 기록 다수. 노비 출신 형조 판서. 서당 훈장 등 노비 다수. 서양 중세 농노 근접. 일종의 신분제. 신분제 없는 국가 근대 이전 부재. 아예 중앙집권 역사 거의 부재하다시피한 존재 자체가 국가로서 의미없던 일본 이나 그 아래 위도 지역은 신분제 강고 하지 않고 중앙집권적 법률 체계 결여로 사무라이 등 무법적 즉결 처분 횡행. 최근 일 우익 등 댓글 부대 우리 역사 비하 위한 프로젝트 중 하나가 식민지근대화론 과 조선시대 노예제 사회론. 완전 말도 아니되는 왜곡. 일본이야 말로 전국민 사무라이 제외 모두 성노예. 사무라이 노리개. 조선 왕조 전체에서 노비 죽이고 처벌 되지 않은 양반 숫자 9명도 되지 않는 다는 황현필 교수 비난하던 조선일보 사과.

    • @xingpark6956
      @xingpark6956 2 дня назад +1

      오. 다수의 출처 좀 알려주세요. 널리 퍼트려야겠어요.

    • @shinshinshin9043
      @shinshinshin9043 2 дня назад

      @xingpark6956 노비 면천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도적을 잡으면 면천될 수 있었다.
      국경을 넘는 자를 잡는 경우에는 1명만 잡아들여도 면천되었다.
      반역음모를 고발하면 면천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노비가 면천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군공, 사민, 포도, 납속, 공사천무과, 참급무과.
      조선 정부는 재원과 군역 자원 확보를 위해 면천을 제도화하였습니다. 17세기 이후 면천법의 확대로 인해 신분제가 동요하는 계기가 되었고, 1894년 갑오개혁의 시행으로 노비제가 철폐되었습니다. 군공 면천(軍功免賤)은 국내외적으로 전란이나 변란을 당하여 국가가 곤경에 처하게 될 때 군사적 공로에 의해서 면천종량을 허락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 왕조는 건국 직후인 1405년(태종 5) 「영위준수노비결절조목(永爲遵守奴婢決折條目)」을 반포하면서 노비는 일시적인 공로에 의해서 ‘기신방역(其身放役)’이 될 수 있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이러한 규정은 조선시대 내내 준수되었는데, 일례로 1460년(세조 6) 여진정벌에 대한 공로를 논하면서 천인을 면천하여 주었고,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참여한 노비 역시 모두 면천하여 주었다.
      사민 면천(徙民政策)은 북변 지역의 국방 내지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천인을 이주시키는 대신, 그 보상으로 면천해주는 방법이다. 사민은 세종 대에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세종 대 대여진(對女眞) 정책의 일환으로 북변 지역, 특히 함길도의 방어체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사민을 실시하면서 노비의 면천을 공인하여 주었다. 사민 면천은 성종 대까지 시행되었으나, 그 이후로는 거의 실시되지 못하였다.
      한편 강도(强盜)를 잡은 것에 대한 포상으로 주어지는 포도 면천도 있었다. 포도 면천은 세종 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고, 『대전속록(大典續錄)』의 반포로 법제화되었다. 그러나 『속대전(續大典)』이 반포되면서 강도를 잡은 천인은 면천되지 못하고, 면포를 시상으로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명화적(明火賊)을 5인 이상 잡은 천인에게는 면천의 특혜를 주었다.
      납속 면책(納粟免策)은 국가에 곡식을 헌납하면, 그 반대 급부로 천인의 경우 면천을 허락해주는 정책이었다. 납속은 군수 납속과 진휼 납속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군수 납속은 전란이나 변란시에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하여, 진휼 납속은 기근시에 진휼곡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납속 면천은 조선 전기에는 널리 시행되지 못하다가 양란을 겪은 17세기부터 널리 시행되었다.
      접기/펼치기
      현황
      17세기 이후 가장 널리 적용된 면천 방법은 납속이었다. 납속은 임진왜란 때 군량미를 보충하려는 의도에서 실시되었는데, 그 이후에도 국가에 흉년에 들면 진휼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하였다. 따라서 재력이 있는 노비는 누구나 납속책에 수응하여 면천을 허가받고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다. 조선 후기 노비 속량가는 쌀 160석에까지 이른 경우도 있었으나, 1662년(현종 3)에는 50석으로 낮아졌으며, 1718년(숙종 44)에는 납속 속량가를 1530세는 50석, 3140세는 40석, 4150세는 30석, 5155세는 20석, 56~60세는 10석으로 차등 지정하였다. 영조 대에 들어와서는 납속과 함께 납전(納錢)을 통한 면천도 실시되었다. 『속대전(續大典)』에는 공사천의 속량하는 가격을 동전 100냥 이하로 규정하고 있다.
      접기/펼치기
      의의와 평가
      조선왕조는 엄격한 신분제를 바탕으로 운영되는 사회였다. 더구나 노비의 신분 세습은 ‘일천즉천(一賤則賤)’으로 부모 중 한 명만이 천인인 경우에도 자녀는 노비로 귀속되고 있어서 이들의 면천과 종량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조선왕조에서 노비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는 면천법을 성문화하여 일정한 제한 속에서 노비들에게 면천의 혜택을 주었다. 이는 조선왕조 신분제의 폐쇄성을 방지하고자 한 조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17세기 이후 전개된 노비 면천의 확대는 신분제를 동요시켰고, 결국 1894년 갑오경장 때 신분제가 폐지되는 데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 @영시미-f1x
    @영시미-f1x 3 месяца назад +1

    뭔소리여 종모법은 세종때 만들어졌는데..,

  • @t알고리즘-p9y
    @t알고리즘-p9y Год назад +14

    햐.. 절반이 노비 ㄷㄷㄷ 저게 나라가 유지됐다는게 신기할지경이다.

    • @dinos119
      @dinos119 Год назад +3

      저것도 시대마다 달랐습니다. 500년 내내 똑같을수가 없었어요.

  • @CarrotLA
    @CarrotLA 2 года назад +44

    세종대왕의 어두운 면이기도 하죠 조선의 노비 수는..

    • @HTLM519
      @HTLM519 2 года назад +15

      세종대왕의 노비종모법으로 노비 수가 증가했다는 것은 뉴라이트발 낭설로, 노비종모법은 오히려 노비 수를 줄이는 조치입니다. 실제로 노비 인구 수 비율은 15세기 30%, 17세기 10%, 19세기 3% 수준에 불과합니다.

    • @esperanza5872
      @esperanza5872 2 года назад +30

      @@HTLM519 뭔 말도 안되는소리를 이렇게 뇌피셜로 싸지르시는건지요? 종모법이 노비의 수를 줄이기위함이라는 신박한 쌉소리를 다 듣네요ㅋㅋㅋ 아니 무슨 뇌구조를 가졌기에 이런해석이 가능한거죠? 양반남자가 노비여자를 건들지 노비남자가 양반마님을 건드는 수가 얼마나 되겠냐ㅋㅋㅋ

    • @esperanza5872
      @esperanza5872 2 года назад +20

      @@HTLM519 그리고 말도안되는 노비 인구비율 미친ㅋㅋㅋ지멋대로 백분율 써제껴놨노ㅋㅋ

    • @모래고래
      @모래고래 2 года назад +12

      @@HTLM519 대체 어디서 나온 레퍼런스죠?

    • @HTLM519
      @HTLM519 2 года назад +4

      @@모래고래 저희 학교 교수님이요

  • @임민수-r3w
    @임민수-r3w 3 месяца назад +3

    세종조는 조선초기엿기때문에 고려의 풍속이 전습되서 비교적 노비의 숫자가 많지않앗는데 조선의 사대부가 신진세력으로 정치적 입지가 막강해지면서 사대부들이 노동력을 조달할 목적으로 틈난나면 세종을 졸랏는데 결국 세종이 노비종모법을 부활시켜서 노비가 증가하는 추세가 됫으나 사대부들이 너도나도 노비늘리기에 혈안이되서 이후 성종때 분격적으로 노비양산체제에 들어가 일천측천이라는 천하에 둘도없는 반인권적 반인륜적 제도를 시행,전세계에 유래가 없는 세습노비국가 로 등극, 여기에는 세종과 성종의 혁혁한 공로가 잇음

  • @ju-yeonkim244
    @ju-yeonkim244 3 месяца назад +3

    만원짜리 주인공 최악의 업적 노.비.종.모.법

  • @sangolman4785
    @sangolman4785 6 месяцев назад

    하층민착취는 한국인 디폴트값인데

  • @blackmask8152
    @blackmask8152 2 года назад +27

    이러한 노비제를 폐지한건 일본인건 이악물고 쉬쉬하는 조선의 후예들

    • @HTLM519
      @HTLM519 2 года назад +9

      순조: ....?? (공노비 해방 1801)
      고종: ....?? (궁노비 해방 1864, 노비 세습제 폐지 1886, 신분제 폐지 1894)

    • @ルカリオ-v2j
      @ルカリオ-v2j 2 года назад +4

      @@HTLM519 고종 신분제 폐지는 일본이 하라고 해서 한 것도 있음

    • @HTLM519
      @HTLM519 2 года назад +3

      @@ルカリオ-v2j 이미 갑신정변 때 신분제 폐지를 시도했었고 정변이 성공했다면 그때 이미 폐지됐을 수 있었던 제도입니다. 갑오개혁은 1차와 2차가 구분되며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1차 갑오개혁은 동학 농민운동 이후에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고자 하면서 진행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경복궁 점령 이후에 진행되긴 했으나 일본의 영향력이 적습니다. 신분제 폐지는 1차 갑오개혁의 내용입니다.

    • @blackmask8152
      @blackmask8152 2 года назад +3

      @@HTLM519 앵? 무슨 역사서를 보고 하는 말인줄 모르겠는데 조선때 노비제 폐지는 시도조차 없었습니다.

    • @성시창-v8g
      @성시창-v8g Год назад +2

      이병철회장이 일본유학을 다녀와서 노비문서를 다 태워버리고 노비들을 내보낼려고 했더니 떠나는 이도 남겠다는 이도 있었다고 .. 일제시대에도 노비 있었습니다. 심지어 625이후 정도 없어졌다고 하네요 일제시절 형평운동이라는 백정운동도 있었어요 어느날 관공서에 백정이 갔다가 왜 내가 따로 관리되고 있냐고 따지니까 백정이라서 따로 관리한다고 일제시대에도 똑같았어요 그시절 사람들 수준이 딱그랬어요

  • @버퍼링남
    @버퍼링남 3 месяца назад +3

    일본이 신의한수지

  • @추억속으로-z5x
    @추억속으로-z5x 2 года назад +13

    지금도 비정규직 만들어서 노비화 시키고 있음

    • @foreverlions2911
      @foreverlions2911 Год назад +2

      먼소리여

    • @Hls-yt9mk
      @Hls-yt9mk 3 месяца назад +1

      맘에안들면 퇴사라도 가능하죠 ㅋㅋ
      그때는 도망도 못칩니다 ㅋㅋ

    • @전지효-i2s
      @전지효-i2s 3 месяца назад +1

      퇴사한다고 하면 못하게 막나요?

    • @xingpark6956
      @xingpark6956 2 дня назад

      노비보다 머슴에 가깝지 않을까요?

  • @211st4
    @211st4 4 месяца назад +2

    유사국가

  • @EyuMichael
    @EyuMichael Год назад +1

    지금도 뭐 다를바는 없지 문명의 발달로 수준이 올라갓을 뿡...

  • @user-be2ru9su3e
    @user-be2ru9su3e Год назад +3

    노비에서 해방된다고해서 그들이 가난에서 탈출할수있었을까..?가진 재산이 없는데

  • @dinos119
    @dinos119 Год назад +2

    노비와 양인간의 결혼 자체는 이미 고려시대에도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중 한쪽이 노비면 자식도 무조건 노비인 일천즉천법은 이미 고려시대때 생긴 법이었어요. 근데 당시 노비의 주인인 호족들이 자신들의 사병을 늘릴수 있도록 꼼수질의 하나로 법이 악용되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꼭 조선시대만의 일이라고만 볼수는 없어요.

  • @평창동-f8z
    @평창동-f8z 6 месяцев назад

    삼성은 수십만 노비를
    부리고 있구만ㅋㅋ
    서로 노비가 되려고
    경쟁률 100대1

  • @jisunghak
    @jisunghak 16 дней назад

    노비가 많았으니 나라의 세수가 적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