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유리왕이 해명은 자살시켰으면서, 정작 강대국인 부여에게 무례를 저지른 무휼은 그냥 놔둔 점을 언급했죠. 후대 사람들이 보기엔 유리왕과 해명 태자 이야기는 의문이 많긴 합니다. 황룡국 사건은 핑계고 실상은 고구려 왕 내의 갈등 내지는 권력 다툼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합니다.
@@한소리-v1o 진짜 운도 겁나좋았던게 ㅋㅋ 망할위기도 놓였지만 개국공신과 그아들 대무신왕덕에 다시 재기. 그리고 하늘이 진짜 고구려를 엄청 도왔음. 당시 중국은 후한말기여서 힘이 약했고 결국 조조 유비 손권 삼국지 시대(위촉오)시대 오고 위신하 사마의의손자 사마염이 위나라 완전히 뒤엎고 진세워 통일하긴하지만 팔왕의난이 터져서 다시 나라 쪼개지고 중국 역사의 막장시대 오호십육국 남북조 분열기가와서 오히려 고구려가 광개토대왕 영토정복정책땜에 강대국되는 계기가됨 ㅋㅋ
어떤면에서 보면 고려 공민왕 포지션 같기도. 총명했고 원 속국 백년사 청산한 영웅이었지만 시대가 시련을 주고 가장 의지하던 왕비도 죽자 결국 기이한 비행을 일삼다가 결국 시해 당했으니. 만약 아마 공민왕이 일찍 아들이 있었다면 과연 온전히 살아 남았을까 싶을 정도로 특히 측근을 총애하다가 숙청했던 무서운 왕 이기도
저는 유리왕이 고구려 초기 발전을 위한 왕이라고 생각합니다 ^^ 고구려 초기 유리왕이 발전을 위한 기틀은 다졌고 다음왕이 대무신왕이 아버지의 초기 발전을 더욱 빛나게 하엿고 그 다음으로 유리왕의 손자 태조왕께서 고구려가 강성하게 하도록 삼국 중 먼저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했다고 봅니다 ^^
시청 감사합니다~! 그렇죠. 그래도 다음 왕들(대무신왕, 태조왕 등)이 흥하려면 그 전대에서 기반이 있어야할 것이며, 그러한 것을 다지는 정도의 업적은 이룩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다만, 기록에 남은 유리왕의 일화들을 떠올려보면, 그러한 업적이 정말로 그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인가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남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도 아버지로부터 의심을 받아 자결함. 자세한 사서가 남아있지않아 간략한 내용만 남아있으니 너무 답답함. 호동은 낙랑국을 무너뜨리는 공을 세웠으나 2번째 부인의 아들이라 첫번째부인이 자신을 호동이 덮치려고 했다는 식의 누명을 씌워 자결하게 만들었다는데 아버지 유리왕이 그런 멍청한짓을 했으면 무휼은 그러지 말았어야될텐데....
★수정사항★ 이미 올린 영상은 수정할 수 없는 것 같아서 (또는 방법을 몰라서...) 수정사항 댓글로 고정해놓겠습니다. (오류 지적 항상 감사드립니다.) 1. 7:23 여진 왕자를 여섯째로 소개했는데, 넷째 또는 다섯째라는 이야기도 있어 말씀드립니다. 저도 다시 알아보았지만 확실하게는 알 수가 없어서 관련 증거 자료가 있으신 분은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0:54 두 사진 모두 선비족 참고 사진입니다. 고구려 기마궁수 사진 올린단게 저걸 올린지 이제 알았네요. ㅠ
어쩌면 유리왕이 고구려의 시조라는 설도 있습니다. 고구려의 시조 추모성왕(鄒牟聖王)은 부여의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과 너무나 닮아있어, 고구려의 시조 유리왕이 조상을 세탁한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 부여의 동명설화와 비슷한 것을 넘어 노골적인 표절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똑 같습니다. 부여에서 이주하여 졸본에 정착한 세력이 유리로 대표되는 세력이었고, 토착화 과정에서 소서노와 비류, 온조, 협보가 축출당했다고 보는 견해인데, 사실 이 시대의 사료가 너무 없어 맞다, 아니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그저 수많은 설 중의 하나로 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후 고구려의 국내성을 침입하여 고구려인 포로 1만5천과 고국원왕의 어머니, 그리고 미천왕의 시신까지 탈취하고, 광개토왕 이전까지 고구려에게 엄청난 굴욕을 안겨준 고구려의 천적 모용선비의 도읍을 "황룡성"이라고도 합니다. 후세에 모용선비에 대한 감정이 쌓여 이런 설화를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Min_JK-x5i 강들의 이름이 시대에따라 바뀌듯이, 지명도 시대에 따라 바뀝니다. 여기서 역사적 다툼이 생기는 것이죠. 서로 유리한 포지션대로 주장을 하니 말입니다. 여튼 평양이라는 이름이 지금의 평양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Joel-ux6bn 현 평양에는 낙랑군 유적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점제현 신사비에, 현지 현장이 쓰던 봉니, 토성동토성(낙랑토성)에서는 낙랑예관이 명문된 와당도 출토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기원전 1세기~4세기에 해당되는 낙랑군 유물이 평양지역에서 다수 출토되었습니다. 그 외의 지역(특히 요서)에서 낙랑군 유적이라고 발굴된 것들은 삼국사기에서 미천왕이 낙랑군을 축출한 4세기 이후의 것만이 출토되었습니다. 따라서 낙랑군은 현 평양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것이 기정 사실입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유리왕이 해명은 자살시켰으면서, 정작 강대국인 부여에게 무례를 저지른 무휼은 그냥 놔둔 점을 언급했죠. 후대 사람들이 보기엔 유리왕과 해명 태자 이야기는 의문이 많긴 합니다. 황룡국 사건은 핑계고 실상은 고구려 왕 내의 갈등 내지는 권력 다툼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합니다.
6:43
유리왕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주몽이 다시 환생하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 그러게요
소서노 아들시키지
에휴 주몽 친아들 맞나 협보를 내치고
그냥 온조가 왕 했어야 함
애초에 유리왕이 왕이 된게 기적
월래 소서노 아들이 왕이 돼는거 였는데 주몽실제부인 아들이 유리였음 유리가왕돼는것 알고 소서노 빡쳐서 백제 만듬
유리왕은 아들 6명 중에 3명이 죽음 그 이후
셋째 아들 무휼 : 3대 무신왕
다섯째 아들 해색주 : 4대 민중왕
여섯째 아들 재사 : 6대 태조왕, 7대 차대왕, 8대 신대왕의 아버지
+물에 빠져죽은 여진왕자는 넷째아들입니다
근데 그 아들놈인 대무신왕 해(고?)무휼 역시 지 아들인 호동왕자에게 한짓을 생각하면......
2:08 이 사람은 금와잖아요.......
아...ㅋㅋㅋ 금와왕 역할을 ㅎㅏ셨네요 저 배우가... 몰랏습니다 ㅋㅋ
배우 전광렬님은 금와왕부터 구암 허준 선생님까지 연기하셨습니다 ㅎㅎ
@@sunnyangel-v9z 그 구암허준말씀하시는거라면.. 구암허준(2013)에서는 배우 김주혁님이 2013년에 허준역활하셨습니다.. 허준 1999년에 방영한 허준 주인공역활하신게 배우 전광렬님입니다..
영조는 세자의 상태가 어쩔수 없었던거고 유리는 이유가 안되죠. 물론 기록상으로요.
우리왕이 왜 한일이 없습니까?
시조를 만들어서 고3수험생을 천년이 넘은 시간후에도 괴롭히는데
새가 정답던 말든 내알빠 아닌데 징징이 극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ㄹㅇ황조가
?? 황조가는 시험 나오면 개꿀인데ㅋㅋㅋ
황조가는 지금 중공의 동북공정에 제대로된 반박자료임ㅋ 그당시에도 민족간 정체성이 달랐으니 한족출신 후궁이 핍박받지
이황 이이도 ㅈ같음 윤리에 자주 등장하는데 이가 발하고 기가 타고 어우 뭔 개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태자생활도 워낙짧게하고 거의 반어부지리급으로 왕에 올랐으니.. 생각이 깊을리가없지
유리가 찿아오고 추모는 몇달도 더 못살고 40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승하함. 소서노가 19년동안 지켜왔던 왕후의 자리를 6개월만에 뺏기다니 예씨부인의 힘은 진정 위대했었나봄.
@@한소리-v1o 진짜 운도 겁나좋았던게 ㅋㅋ 망할위기도 놓였지만 개국공신과 그아들 대무신왕덕에 다시 재기. 그리고 하늘이 진짜 고구려를 엄청 도왔음. 당시 중국은 후한말기여서 힘이 약했고 결국 조조 유비 손권 삼국지 시대(위촉오)시대 오고 위신하 사마의의손자 사마염이 위나라 완전히 뒤엎고 진세워 통일하긴하지만 팔왕의난이 터져서 다시 나라 쪼개지고 중국 역사의 막장시대 오호십육국 남북조 분열기가와서 오히려 고구려가 광개토대왕 영토정복정책땜에 강대국되는 계기가됨 ㅋㅋ
3대인.. 대무신왕 역시 아들에게 자살을 명령하는...
어떤면에서 보면 고려 공민왕 포지션 같기도. 총명했고 원 속국 백년사 청산한 영웅이었지만 시대가 시련을 주고 가장 의지하던 왕비도 죽자 결국 기이한 비행을 일삼다가 결국 시해 당했으니. 만약 아마 공민왕이 일찍 아들이 있었다면 과연 온전히 살아 남았을까 싶을 정도로 특히 측근을 총애하다가 숙청했던 무서운 왕 이기도
아마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긴 것도 소서노와 비류 온조 등 토착 정치적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도 있어보임
그 당시 주변국가들이 강대국이니 유리왕으로서는 나약한 이름없는 왕으로 될수밖에
아들에게 열등감을 느낀거 맞네
0:54 왼쪽그림 선비족 벽화 인데요
어, 그렇네요? 지적 감사합니다.
그럼 호동왕자 죽인게 유리왕?
유리왕 이후로 막강해지잖아.
그건 대무신왕입니다
손자 호동왕자는 아버지 대무신왕에게 죽어요..
저는 유리왕이 고구려 초기 발전을 위한 왕이라고 생각합니다 ^^
고구려 초기 유리왕이 발전을 위한 기틀은 다졌고 다음왕이 대무신왕이 아버지의 초기 발전을 더욱 빛나게 하엿고 그 다음으로 유리왕의 손자
태조왕께서 고구려가 강성하게 하도록
삼국 중 먼저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했다고 봅니다 ^^
시청 감사합니다~! 그렇죠. 그래도 다음 왕들(대무신왕, 태조왕 등)이 흥하려면 그 전대에서 기반이 있어야할 것이며, 그러한 것을 다지는 정도의 업적은 이룩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다만, 기록에 남은 유리왕의 일화들을 떠올려보면, 그러한 업적이 정말로 그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인가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남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주몽은 1대초기왕이고 유리왕은2대왕이고 대무신왕 무휼이 3대왕인데 스토리 다틀립니다 해명이 1대왕자인데 도진이겠지 대소왕 후계자 스토리 개판이고 해명이 유리왕 첫째아들이고 무휼이 아들중 둘째인데 뭐래
@@김두한-z3h 1대 왕자 도절아님?
도절이첫째아들 해명이 둘째 무휼이 셋째입니다
유리왕 은 유리멘탈
유리왕 유일한 업적 : 황조가
대무신왕은 주몽의 손자보단 유리왕의 아들이죠 아들 죽임ㅜ
온조가 왕 했어야 했다
북연(모용선비)의 수도가 황룡으로 황룡국으로 불리웠고 ,북주(탁발선비)에의해 연나라가 북연과 남연으로 갈라지게됩니다. 북연 즉 황룡국은 광계토대왕시절때 고구려에 투항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로 다음대인 대무신왕도 추가요
그렇죠 호동 ㅠㅠ
바람의 나라 주인공이 무휼이었나?
맞아요 대무신왕 무휼이 주인공임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도 아버지로부터 의심을 받아 자결함. 자세한 사서가 남아있지않아 간략한 내용만 남아있으니 너무 답답함. 호동은 낙랑국을 무너뜨리는 공을 세웠으나 2번째 부인의 아들이라 첫번째부인이 자신을 호동이 덮치려고 했다는 식의 누명을 씌워 자결하게 만들었다는데 아버지 유리왕이 그런 멍청한짓을 했으면 무휼은 그러지 말았어야될텐데....
차라리 비류나 온조한태 왕위를 줬으면....
비류나 온조한테 나라줬음 고구려는 없었음 부여한테 먹히고도 남았다 비류는 지가나라 만들고 망해서 자살했고 온조는 소서노가 만들어준 백제 왕자리에 안친거고 유리가 왕이여서 아들 무휼이 부여 멸망시켜 고구려를 강국으로 가는 기초를 잡은게 다행이지
주몽 -> 추모 , 유리 -> 유류
넵 추모, 유류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것으로 알지만, 좀더 대중적으로 '주몽', '유리'가 잘 알려져있어 이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ggae-al_history 주몽이 대중적인 이름이긴 하나 고구려의 광게토대왕릉비에는 추모왕이라고 적혀있으니 추모로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k-374 모르는 사람들을 배려하기위해서라면 괄호나 각주를 사용해도 좋을거 같아요
★수정사항★
이미 올린 영상은 수정할 수 없는 것 같아서 (또는 방법을 몰라서...) 수정사항 댓글로 고정해놓겠습니다. (오류 지적 항상 감사드립니다.)
1. 7:23 여진 왕자를 여섯째로 소개했는데, 넷째 또는 다섯째라는 이야기도 있어 말씀드립니다. 저도 다시 알아보았지만 확실하게는 알 수가 없어서 관련 증거 자료가 있으신 분은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0:54 두 사진 모두 선비족 참고 사진입니다. 고구려 기마궁수 사진 올린단게 저걸 올린지 이제 알았네요. ㅠ
태자가 하는짓거리가 이웃나라를
업신여기는 겁니다 부여의대소가
호시탐탐 고구려를 먹으려고 하는판에
이웃 나라와 화평은 못할망정 저런
애세끼 같은 맨탈의 태자를 믿을수는
없지요
도절의갑주 생각 나네
부분노는 주몽때 장수아닌가
유리왕이 원조 ㅋ
그렇죠. 거의 1800년이나 앞선...
3:28 낙랑군이 왜 한반도에 있슴꽈????
ruclips.net/video/N2WO_36SXwY/видео.html 참조
사신이 국왕의 선물을
가지고 왔는데 그걸 부숴버리고
힘자랑하는건 너무 유아틱하지않나요?
저런 등신에게 뭔 나라를 다스리게 합니까
약소국? 이건 아니지
어쩌면 유리왕이 고구려의 시조라는 설도 있습니다. 고구려의 시조 추모성왕(鄒牟聖王)은 부여의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과 너무나 닮아있어, 고구려의 시조 유리왕이 조상을 세탁한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 부여의 동명설화와 비슷한 것을 넘어 노골적인 표절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똑 같습니다. 부여에서 이주하여 졸본에 정착한 세력이 유리로 대표되는 세력이었고, 토착화 과정에서 소서노와 비류, 온조, 협보가 축출당했다고 보는 견해인데, 사실 이 시대의 사료가 너무 없어 맞다, 아니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그저 수많은 설 중의 하나로 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후 고구려의 국내성을 침입하여 고구려인 포로 1만5천과 고국원왕의 어머니, 그리고 미천왕의 시신까지 탈취하고, 광개토왕 이전까지 고구려에게 엄청난 굴욕을 안겨준 고구려의 천적 모용선비의 도읍을 "황룡성"이라고도 합니다. 후세에 모용선비에 대한 감정이 쌓여 이런 설화를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 황룡성을 결국 나중에 싹싹 털어버리는 장수왕
제발 역사 지도를 보여 줄때 평양에 있었다는 낙랑군 표시를 빼고 하지 않을래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으니까 평양에 넣지ㅋㅋㅋㅋ
@@Min_JK-x5i 문제는 그 평양이라는 지명이 흔히 우리가 아는 그 북한의 평양과는 다른 지역일 것이란 설이 있죠.
@@Min_JK-x5i 강들의 이름이 시대에따라 바뀌듯이, 지명도 시대에 따라 바뀝니다. 여기서 역사적 다툼이 생기는 것이죠. 서로 유리한 포지션대로 주장을 하니 말입니다. 여튼 평양이라는 이름이 지금의 평양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Joel-ux6bn 현 평양에는 낙랑군 유적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점제현 신사비에, 현지 현장이 쓰던 봉니, 토성동토성(낙랑토성)에서는 낙랑예관이 명문된 와당도 출토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기원전 1세기~4세기에 해당되는 낙랑군 유물이 평양지역에서 다수 출토되었습니다. 그 외의 지역(특히 요서)에서 낙랑군 유적이라고 발굴된 것들은 삼국사기에서 미천왕이 낙랑군을 축출한 4세기 이후의 것만이 출토되었습니다. 따라서 낙랑군은 현 평양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것이 기정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