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천민 출신이어도 정충신은 권율, 이항복 등 당대 명문가들과 연줄이 닿았고 이항복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문리가 트인 인물이 되어 외교사절로도 활약하는 등 인맥이 넓었으나 한명련은 무공에만 뛰어났을 뿐 학문적 기반도 인맥도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반란을 일으킨 이괄도 같은 평안도에 배치되는 운명으로 이어졌습니다. 아쉽게 죽음을 당하였으나 정묘,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한명련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여론이 기록되었고 정충신도 그의 재능을 아쉬어하는 목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라는 저서에서 '민족' 개념은 근대 이후 역사적 과정에 의해 만들어진 '상상적 공동체' 라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고(故) 김자현 미국 컬럼비아대 석좌교수는 그의 남편이 미완성 유고를 모아 펴낸 신간 '임진전쟁과 민족의 탄생'에서 한국인의 민족 담론이 1592년 임진왜란을 계기로 형성되었고, 1636년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공고화됐다고 분석하였습니다. 왜란과 호란이라는 고난을 통과하면서 민족의식이 공고화되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문제는 왜란 당시 전국토에서 일어났던 의병의 열기와는 달리 호란에서는 광해군에서 인조라는 정권교체 과정을 거치면서 국경의 방어보다는 한양의 국왕과 서인들을 지켜야 한다는 모순된 정책이 현실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전방의 장수들이 적을 지키기보다는 후방의 의심을 의식하여 몸을 사리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이미 비극이 잉태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인조와 서인들은 이괄의 난으로 전방의 장수들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남아있던 광해군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북인들을 학살하면서 더욱 강경한 정국운영을 하였습니다. 후금으로 도주한 잔당들로 인하여 여진족과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반면에 명나라에는 더욱 종속적인 관계가 되었습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의 상태를 파악하고 협박을 가하기도 하였고 내부적으로 성리학적 교조주의는 더욱 강력해지면서 유연성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인조는 반정을 통해 왕이 되어 명나라와 모문룡 눈치를 보면서 국력을 낭비했습니다. 후금에 강경책을 할 계획이면 군비를 철저하게 하여 국경선을 철저하게 방어하던지 아니면 외교적으로 화친을 해야 하는데 최악의 선택을 하여 전쟁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척화 명분론에만 사로잡히다 보니 백성들의 고통은 극심해지는 도탄에 빠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신종욱-z4e 그렇쵸. 인조 자신은 이괄을 신임하여 의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조 입장에서는 이괄의 아들 이전만 조사해서 별일이 없다고 마무리하면 될 것으로 판단했지만 이괄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들이 반역죄로 심문받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운명도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조선 최정예 부대를 거느리고 있는 이괄에게 결과적으로 반란을 강요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보여집니다. 인조의 형세판단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도 국왕이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인조 자신도 후금의 군사력이 만만치 않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광해군을 몰아낸 입장에서 후금에게 유연하게 하기도 어렵고, 군비를 강화하여 전쟁준비를 철저히 해야 하는데 당시 조선의 국력이 여의치 않았던 상황이다보니 힘은 없으면서 명분만 찾는 모습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그 피해는 모두 백성들의 고통으로 전가되어 비극적인 삶을 강요당하는 현실이 되었다고 보여집니다.
같은 천민 출신이어도 정충신은 권율, 이항복 등 당대 명문가들과 연줄이 닿았고 이항복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문리가 트인 인물이 되어 외교사절로도 활약하는 등 인맥이 넓었으나 한명련은 무공에만 뛰어났을 뿐 학문적 기반도 인맥도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반란을 일으킨 이괄도 같은 평안도에 배치되는 운명으로 이어졌습니다. 아쉽게 죽음을 당하였으나 정묘,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한명련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여론이 기록되었고 정충신도 그의 재능을 아쉬어하는 목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라는 저서에서 '민족' 개념은 근대 이후 역사적 과정에 의해 만들어진 '상상적 공동체' 라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고(故) 김자현 미국 컬럼비아대 석좌교수는 그의 남편이 미완성 유고를 모아 펴낸 신간 '임진전쟁과 민족의 탄생'에서 한국인의 민족 담론이 1592년 임진왜란을 계기로 형성되었고, 1636년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공고화됐다고 분석하였습니다. 왜란과 호란이라는 고난을 통과하면서 민족의식이 공고화되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문제는 왜란 당시 전국토에서 일어났던 의병의 열기와는 달리 호란에서는 광해군에서 인조라는 정권교체 과정을 거치면서 국경의 방어보다는 한양의 국왕과 서인들을 지켜야 한다는 모순된 정책이 현실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전방의 장수들이 적을 지키기보다는 후방의 의심을 의식하여 몸을 사리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이미 비극이 잉태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인조와 서인들은 이괄의 난으로 전방의 장수들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남아있던 광해군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북인들을 학살하면서 더욱 강경한 정국운영을 하였습니다. 후금으로 도주한 잔당들로 인하여 여진족과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반면에 명나라에는 더욱 종속적인 관계가 되었습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의 상태를 파악하고 협박을 가하기도 하였고 내부적으로 성리학적 교조주의는 더욱 강력해지면서 유연성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가도 주둔 모문룡은 훗날 명의 명장
원숭환에게 죽임을 당하고 모문룡의
부하중 상당수가 후금에 홍이포를
가지고 투항함
인조는 반정을 통해 왕이 되어 명나라와 모문룡 눈치를 보면서 국력을 낭비했습니다. 후금에 강경책을 할 계획이면 군비를 철저하게 하여 국경선을 철저하게 방어하던지 아니면 외교적으로 화친을 해야 하는데 최악의 선택을 하여 전쟁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척화 명분론에만 사로잡히다 보니 백성들의 고통은 극심해지는 도탄에 빠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TV-fd6pz 그견해에 동의합니다
반정으로 왕에 올라 왕권이 약하니
신하들에게 휘둘린 결과인듯
@@신종욱-z4e 그렇쵸. 인조 자신은 이괄을 신임하여 의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조 입장에서는 이괄의 아들 이전만 조사해서 별일이 없다고 마무리하면 될 것으로 판단했지만 이괄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들이 반역죄로 심문받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운명도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조선 최정예 부대를 거느리고 있는 이괄에게 결과적으로 반란을 강요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보여집니다. 인조의 형세판단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도 국왕이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인조 자신도 후금의 군사력이 만만치 않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광해군을 몰아낸 입장에서 후금에게 유연하게 하기도 어렵고, 군비를 강화하여 전쟁준비를 철저히 해야 하는데 당시 조선의 국력이 여의치 않았던 상황이다보니 힘은 없으면서 명분만 찾는 모습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그 피해는 모두 백성들의 고통으로 전가되어 비극적인 삶을 강요당하는 현실이 되었다고 보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