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설명 감사드립니다. 그러니까 고려판 왕자의 난이라는게 고려사에서 왕규의 난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요, 소 두 왕자에 의한 왕자의 난을 말하는 거죠? 그리고 나중에 말씀해 주시겠지만 조선초 태조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게 "능력" 원칙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어린 것 같은데요. 상식적으로 왕비나 대신의 입김 같아 보이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설명을 주실지 많이 기대됩니다.
유럽의 왕조들은 의외로 일부일처가 엄청나게 강했고 사생아(?)들에 대한 처우도 그닥인 편이었습니다. 봉건제라는 게 땅이 쪼개지면 곧바로 힘의 약화로 이어졌기 때문에 왕실의 재산을 보존하고 정치적인 혼란을 최소로 하는 데 집중한 편이었죠. 합스부르크 왕가는 정략결혼으로 영토를 넓히고 전성기를 맞이한 케이스라서 사실 고려시대와 비교하긴 힘듭니다.
혜종은 진짜 불행한 후계자 였다고 봅니다 혜종은 어린시절 부터 왕건따라 전쟁터를 누벼서 공을 치면 다른 왕건의 아들들 보다 우위에 있어서 능력은 인정 받았습니다 게다가 적장자 혈통으로 보면 장남이기 때문에 후계자로서의 아무런 흠이 없었습니다만 출신외가 가문의 혜택을 받지 못한 불운의 왕이었습니다...다들 자기 지역에서는 한딱가리 하는 외가 가문을 가진 호족세력을 등에업은 동생들이 계속 왕위를 노렸기 때문에 전쟁터에서 수많은 공을 세우기도 했고 무력도 장난 아니었던 혜종이 왕위쟁탈전과 자객의 위험등 수많은 위험이 도사렸기 때문에 스트레스 때문에 제위 2년만에 병사했을거라 생각합니다..자객도 맨손으로 때려잡을만한 왕이었느데....외척세력이 너무 미약해서...ㅠㅠ
왕건이 무슨 얼굴마담이라고 말도 안되는 말을 하는거임? 역사를 제대로 공부를 했으면 그런말을 할수가 없음. 왕건은 오랫동안 기반을 다져온 송악의 패서 지역 대호족의 집안 사람이었고 태봉국의 장수가 되면서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성장하면서 태봉국의 왕인 1인자 궁예 다음에 2인자이자 권력자가 된게 바로 왕건임. 애초에 궁예마저도 경계할정도로 왕건은 2인자이자 권력을 지닌 실세였는데 어떻게 얼굴마담이라고 하는거임? 918년에 왕건은 역성혁명을 일으켜서 궁예의 태봉국을 멸망시키고 고려를 건국해서 왕이 되었음. 왕건은 자신의 정치력, 외교력, 통치력으로 호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후삼국을 통일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고 여러 정책을 만들면서 왕건 본인이 죽을때까지 호족들이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통제를 한 뛰어난 군주임. 그리고 호족들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했다고 흔히 알려져있는데 실제 역사기록을 보면 전혀 아님. 918년에 왕건이 역성혁명을 일으켰을때 실제로 호족들은 한 일이 별로 없음. 왕건의 역성혁명을 적극적으로 도운건 호족들이 아니라 군부의 장수들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김락, 염상, 견권 같은 장수들임. 왕건은 이 장수들을 이끌고 궁예를 몰아내어 태봉국을 멸망시키고 고려를 건국했음. 실제로 고려의 개국공신 명단을 보면 1등과 2등 자리를 대부분 군부의 장수들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김락, 염상, 견권 같은 장수들이 차지하고 있음. 1등과 2등 자리에 호족들의 이름이 별로 없는걸 보아도 호족들은 왕건이 궁예를 몰아낼때 실질적으로 한 일이 별로 없다는 뜻임.
@@milchholstein884 역사공부를 제대로 안한건 내가 아니라 그쪽이겠지. 왕건은 혼인으로 권력을 겨우 잡은게 아니라 태봉국 시절 장군이였을때 나주 정벌이나 여러 전쟁을 치르면서 전공을 세우고 입지를 다지면서 시중까지 오를 만큼 크게 성장해 권력을 잡은건데 무슨 소리를 하는거임? 1인자이자 왕인 궁예마저도 경계할정도로 태봉국에서 가장 강한 세력으로 성장한게 바로 왕건임. 혼인같은건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나라를 안정시키며 호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동시에 후삼국통일을 좀 더 안정적으로 이루려고 선택한 정치적 선택이야. 실제로 효과도 있었고 참고로 공산전투에서 후백제에게 패배한 후에 자기를 배신한 호족들을 처단하면서 기강을 바로 잡기도 했어. 그리고 왕건은 여러정책들을 만들면서 자기가 죽을때까지 호족들이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통제했어. 왕건이 죽은 후에 일어난 고려판 왕자의 난은 흔히 어느나라에서나 일어났던 왕이 죽은 후에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일어난 권력 싸움일 뿐이야. 그런건 고려뿐만 아니라 어느나라에서든 일어난일들이야.
이성계의 방석 세자 책봉은 부인의 속삭거림이 작용했다고 봐야 할 겁니다 좀 더 근본적으로 보면 본인이 왕들을 폐하고 왕이 된 만큼 허약한 왕권의 왕들만 봤을 것이고 ... 그러니 왕권 자체에 대한 생각도 짧았다고 봐야겠죠 마치 동북면의 가주 자리 처럼요 .... 가주야 누가 되든 상관 없고 안 된 자식들에게는 한 몫 주면 되지 않겠냐 생각했을 터이니 부인의 속삭거림이 잘 넘어 갔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이방원은 그 차이점을 너무 잘 안 거죠 ...
무슨 이성계가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한게 부인의 속삭거림이 작용했다고 지어내는 거임? 방금 영상에서 교수님이 설명한거 못들었음? 그런건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얘기고 실제로는 왕의 후계자를 결정했을때 그런게 아니라고 설명하잖슴. 역사 기록 어디에도 신덕왕후가 이성계에게 속삭거려서 이방석이 세자가 되었다는 기록은 없음.
감사합니다 교수님
고려. 역사 너무 재미있네요
이익주 교수님 감사합니다
개꿀잼인데 아직 본내용은 시작도 안한 ㅋㅋㅋ 다음편 기다리겠습니다
구독자도 늘어나고 조회수도 늘어나고 그와 더불어 댓글도 늘어나고 불편한 사람도 늘어나고...
항상 응원하고 흥미롭게 잘 보고 있습니다.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히 시청😀하겠습니다
제생각은 셋째부인 신명순성왕태후 유씨의 후손은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까지이고 현종부터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까지 5째부인 신성왕태후 김씨의 아들 왕욱의 후손들이니... 5째부인 신성왕태후 김씨가 가장 성공한 왕후인것 같습니다.
좋은 설명 감사드립니다.
그러니까 고려판 왕자의 난이라는게
고려사에서 왕규의 난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요, 소 두 왕자에 의한 왕자의 난을 말하는 거죠?
그리고 나중에 말씀해 주시겠지만 조선초 태조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게 "능력" 원칙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어린 것 같은데요. 상식적으로 왕비나 대신의 입김 같아 보이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설명을 주실지 많이 기대됩니다.
저 어렸을 때 동네의 가난한 아저씨도 마누라
두 명 있었어요
둘째부인 아들들이
월토 와 또식 이라고 불렸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만 추가합시다.과거 왕이나 세도가 여유있는 귀족들이 부인 첩을 많이둔 이유는 위내용 이외의 사실이 있어요.이것이 책으로만 부분적으로만,과거 전쟁때 소실된 이유때문이겠지요.즉 그당시 전쟁패배,가난,병고사망등으로 생활고를 겪는 아녀자들들을 거둔다는 측은지심도 있어요.
당시 봉건제때는 유럽왕들도 그러지 않았나요 합스부르크 왕가도 그렇게 했고
유럽의 왕조들은 의외로 일부일처가 엄청나게 강했고 사생아(?)들에 대한 처우도 그닥인 편이었습니다. 봉건제라는 게 땅이 쪼개지면 곧바로 힘의 약화로 이어졌기 때문에 왕실의 재산을 보존하고 정치적인 혼란을 최소로 하는 데 집중한 편이었죠. 합스부르크 왕가는 정략결혼으로 영토를 넓히고 전성기를 맞이한 케이스라서 사실 고려시대와 비교하긴 힘듭니다.
혜종은 진짜 불행한 후계자 였다고 봅니다 혜종은 어린시절 부터 왕건따라 전쟁터를 누벼서 공을 치면 다른 왕건의 아들들 보다 우위에 있어서 능력은 인정 받았습니다 게다가 적장자 혈통으로 보면 장남이기 때문에 후계자로서의 아무런 흠이 없었습니다만 출신외가 가문의 혜택을 받지 못한 불운의 왕이었습니다...다들 자기 지역에서는 한딱가리 하는 외가 가문을 가진 호족세력을 등에업은 동생들이 계속 왕위를 노렸기 때문에 전쟁터에서 수많은 공을 세우기도 했고 무력도 장난 아니었던 혜종이 왕위쟁탈전과 자객의 위험등 수많은 위험이 도사렸기 때문에 스트레스 때문에 제위 2년만에 병사했을거라 생각합니다..자객도 맨손으로 때려잡을만한 왕이었느데....외척세력이 너무 미약해서...ㅠㅠ
계유정난 중종반정 인조반정
이시애나 이괄이 성공했다면
이인임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아이고
한달에한명씩
현종의 할머니가 가장 잘 된것 아닌지?
모두 현종의 후손이 고려왕위를 이루었는데
흰종의 할머니는 황보 씨
반효정 배우님의 연기하셨어요
@@윤경주-c6o 현종의 어머니가 황보씨 이고
아버지가 왕욱(안종)인데
왕욱은 왕건과 신성황태후 ; 경순왕사촌누이(신라)사이에서 태어 났습
왕건은 그래도 되지... 삼국 다 통일하고 코리아를 세계에 인식시킨 500년짜리 전무후무한 강국을 건국한건데... 말이 500년이지 거의 이집트급이잖아... 단군도 왕건만큼 영향력이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단군 조차도 지방에 분권장군같은게 많았던걸로 보이거든...
왕권의 안정을 위해 그 많은 여자와 결혼 했지만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내부 분열로 왕권이 약화되는 결과로 이어졌지
궁예는 개혁을 추진했던 왕이고 자신들의 특권이 위협받을 걸 우려한 호족들이 궁예를 몰아내면서 얼굴마담으로 내세운게 왕건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얼핏 드네요. 아들을 잘 둔 덕에 그 호족들 한번 싹 정리하고 고려의 전성기가 오긴 했지만
처와 자식을 잔혹하게 죽이는 것이 개혁이라면 하지 마라!
@@13무명씨 권력을 사유화 하고 공보다 사를 우선할거면 정치는 꿈도 꾸지마라. 저혼자 잘처먹고 잘살자고 정치를 생계로 하니까 나라가 망하는거다
왕건이 무슨 얼굴마담이라고 말도 안되는 말을 하는거임?
역사를 제대로 공부를 했으면 그런말을 할수가 없음.
왕건은 오랫동안 기반을 다져온 송악의 패서 지역 대호족의 집안 사람이었고
태봉국의 장수가 되면서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성장하면서
태봉국의 왕인 1인자 궁예 다음에
2인자이자 권력자가 된게 바로 왕건임.
애초에 궁예마저도 경계할정도로
왕건은 2인자이자 권력을 지닌 실세였는데 어떻게 얼굴마담이라고 하는거임?
918년에 왕건은 역성혁명을 일으켜서 궁예의 태봉국을 멸망시키고 고려를 건국해서 왕이 되었음.
왕건은 자신의 정치력, 외교력, 통치력으로 호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후삼국을 통일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고
여러 정책을 만들면서 왕건 본인이 죽을때까지 호족들이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통제를 한 뛰어난 군주임.
그리고 호족들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했다고 흔히 알려져있는데
실제 역사기록을 보면 전혀 아님.
918년에 왕건이 역성혁명을 일으켰을때 실제로 호족들은 한 일이 별로 없음.
왕건의 역성혁명을 적극적으로 도운건 호족들이 아니라 군부의 장수들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김락, 염상, 견권 같은 장수들임.
왕건은 이 장수들을 이끌고 궁예를 몰아내어 태봉국을 멸망시키고 고려를 건국했음.
실제로 고려의 개국공신 명단을 보면
1등과 2등 자리를
대부분 군부의 장수들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김락, 염상, 견권 같은 장수들이 차지하고 있음.
1등과 2등 자리에 호족들의 이름이 별로 없는걸 보아도 호족들은 왕건이 궁예를 몰아낼때 실질적으로 한 일이 별로 없다는 뜻임.
@@kaiser1679 혼인으로 겨우 권력 잡아서 똥을 거하게 싸지르고 가서 그거 처리하는데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역사로 공부 안했나보네
@@milchholstein884 역사공부를 제대로 안한건 내가 아니라 그쪽이겠지.
왕건은 혼인으로 권력을 겨우 잡은게 아니라 태봉국 시절 장군이였을때 나주 정벌이나 여러 전쟁을 치르면서 전공을 세우고 입지를 다지면서 시중까지 오를 만큼 크게 성장해 권력을 잡은건데 무슨 소리를 하는거임?
1인자이자 왕인 궁예마저도 경계할정도로 태봉국에서 가장 강한 세력으로 성장한게 바로 왕건임.
혼인같은건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나라를 안정시키며 호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동시에 후삼국통일을 좀 더 안정적으로 이루려고 선택한 정치적 선택이야.
실제로 효과도 있었고
참고로 공산전투에서 후백제에게 패배한 후에 자기를 배신한 호족들을 처단하면서 기강을 바로 잡기도 했어.
그리고
왕건은 여러정책들을 만들면서 자기가 죽을때까지 호족들이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통제했어.
왕건이 죽은 후에 일어난 고려판 왕자의 난은
흔히 어느나라에서나 일어났던 왕이 죽은 후에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일어난 권력 싸움일 뿐이야.
그런건 고려뿐만 아니라 어느나라에서든 일어난일들이야.
이성계의 방석 세자 책봉은 부인의 속삭거림이 작용했다고 봐야 할 겁니다
좀 더 근본적으로 보면 본인이 왕들을 폐하고 왕이 된 만큼 허약한 왕권의 왕들만 봤을 것이고 ...
그러니 왕권 자체에 대한 생각도 짧았다고 봐야겠죠
마치 동북면의 가주 자리 처럼요 ....
가주야 누가 되든 상관 없고 안 된 자식들에게는 한 몫 주면 되지 않겠냐 생각했을 터이니 부인의 속삭거림이 잘 넘어 갔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이방원은 그 차이점을 너무 잘 안 거죠 ...
무슨 이성계가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한게 부인의 속삭거림이 작용했다고 지어내는 거임?
방금 영상에서 교수님이 설명한거 못들었음?
그런건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얘기고 실제로는 왕의 후계자를 결정했을때 그런게 아니라고 설명하잖슴.
역사 기록 어디에도 신덕왕후가 이성계에게 속삭거려서 이방석이 세자가 되었다는 기록은 없음.
안죽으려고
마니둔거지?
호족들한테
아니. 호족들에게 안죽으려는게 아니라 왕건이 후삼국을 좀 더 빨리 통일하려고 조금 더 쉬운 방법인 정략혼인이라는 정치적 선택을 한거야.
호주에서도 우리를 '한국'이라고 안 부르고 코레아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그 나라를 호주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user-wm6iy9rz1g 그래도 호주 입장에서는 그게 자국어죠. 호주는 우리 입장에서 자국어고요. 이해가 안되서 딴지를 걸 생각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