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의 시조는 고려 충신 집안이라 조선시대 파문 당해서 족보를 숨겼습니다. 괜히 패널티 받을 까봐 조상들이 굳이 오픈 안하고 내부적으로 조용히 족보를 만드셨답니다. 어차피 우리는 당시 씨족중심의 사회구조에서 집안자체가 이성계한테 찍혀서 조선 중기 이후까지 과거도 못봤거든요. 왜란때 활약한 무관이나 몇 명 있을까. 그게 풀리고 나서도 급제를 해도 중앙 정계로 진출 못했죠.
崇禎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다스리던 시절의 연호입니다. 紀元이란 건 그 연호가 선포된 해를 기점으로 연월을 세는 방식이니 숭정제가 즉위하여 연호를 선포한 1628년부터 세시면 되겠고, 己卯年이라 함은 말그대로 갑자가 기묘인 해에 발간했다는 뜻이니 1628년 이후의 기묘년인 1639, 1699, 1759, 1819, 1879, 1939, 1999년 중 하나가 되겠군요. 족보에 그런말이 쓰여있다면 숭명의식이 강했던 조선 후기 족보이거나 혹은 그때 풍을 내기 위해 일부러 현대에 와서 사용한 것이라 생각되네요..
재미있어 잘 들었는데 한가지 의문이 있어 질문합니다. 설명중에 우리나라에서 자의 칭호를 받은 사람은 퇴계선생과 다소 의외지만 우암선생 두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근거가 무엇인지요 제가 알기는 자의 칭호를 공식적으로 받은 분은 우암선생 한분인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퇴계선생이 이자라고 불리는 것은 들은 바가 없는데 근거를 말씀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근거가 있다면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우암선생이 송자라고 하는 것은 정조께서 공식화 했습니다.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일기는 학계에서도 자의 칭호는 우암선생 한분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유교국가에서 자의 칭호를 붙이는 것은 학문이 뛰어난 사람으로 그 인물을 성현으로 모신다는 뜻이다. 정조가 양현전심록을 저술할때 주자와 송자의 칭호를 썼다. 영조 50년(1774) 정조께서 東宮으로 계실 때 편찬한 책이 「兩賢傳心錄」이다. 朱子와 宋子 두선생의 心法이 같은 글을 모아 그 양현의 마음을 전하는 글을 類選해서 편찬하였다. 조경이 평안감영에서 문집을 중간할 때에 정조의 명에 의해 「송자대전」이라 명명했다. 원래 「우암집」이었는데 정조가 「송자대전」이라 명명했다. 정조가 “비록 대현이 쓰다가 버려진 글이라도 다 수집하여 대전을 만들어라.” 명해서 문헌을 다 수집해서 수록했다. 「송자대전」은 우리나라의 책 중에서 격이 가장 높다. 「전서」가 우리나라에는 셋이 있는데, 「홍재전서」와 「율곡전서」「퇴계전서」가 있다. 대부분은 문집이라고 부른다.
성씨의 사용과 족보는 전혀 연관이 없구요ㅎㅎㅎ 성화보는 3대 동안 벼슬을 지낸 가문을 기록으로 남겨 자랑하려 남긴 겁니다 성씨는 지금의 주민번호 같이 사람을 특정해서 세금 걷고 군역 부과하려 중앙정부에서 강요한거구요 성이 없었다고요? 박혁거세 김알지 고주몽은 뭐죠?ㅋㅋ 왕족들은 혈통 확인을 위해서 왕권 국가 들어서기 시작할때 부터 썼구요 지방호족이 걷는게 아닌 중앙에서 세금 걷기 시작한 고려 부터는 종, 노비 까지 다 쓰인게 성씨 입니다 조선 3대 도적 장길산 임꺽정 홍길동 전부 광대 백정 서얼 천민 이지만 전부 성씨가 있습니다 관청에 성씨가 있어야 본인 특정 가능 하기 때문에 무등록자는 기본적으로 세금도 군역도 안지는 불법체류자 인데 가만 뒀겠어요?
족보에 대해서 잘 들었습니다.
편안한 주일 되십시오
👍🔔🎁 계속 듣고 응원하겠습니다 😊
본인의 시조는 고려 충신 집안이라 조선시대 파문 당해서 족보를 숨겼습니다. 괜히 패널티 받을 까봐 조상들이 굳이 오픈 안하고 내부적으로 조용히 족보를 만드셨답니다. 어차피 우리는 당시 씨족중심의 사회구조에서 집안자체가 이성계한테 찍혀서 조선 중기 이후까지 과거도 못봤거든요. 왜란때 활약한 무관이나 몇 명 있을까. 그게 풀리고 나서도 급제를 해도 중앙 정계로 진출 못했죠.
진주강姜씨는 구석기 시절 1세 염제신농씨로부터(지금은 중국) 이어져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때부터 강씨성을 사용 하였 습니다 지금까지 전하여 내려우는 성씨 가운대 제일 오래된 첫 성씨입니다
두번째 자세를 가지고..
남은 이야기들도 재미나게 듣겠습니다.^^
가족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싶은 사람들도 많을텐데 흥미로운 주제네요
얼마전에 족보를 뒤져본 적이 있었는데 너무나 흥미롭습니다
종중모임에서 조상님들 이력을 보게 되었는데... 역대 반정에 꾸준히 이름이 있더군요 ㅎ
성씨의 유래에 너무 관심많아요
👍
평소 궁금했던 부분입니다~^^
우리집안은 신라시대 노비출신 장보고(궁복)의 후손 임.(어찌 운동을하지않았는데 힘이 좋더라....) ㅋㅋㅋㅋ
집안에 전해오는 족보 중에 崇禎紀元後 己卯年에 만들어진 족보가 있는데 이는 언제 만들어진 걸까요?
崇禎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다스리던 시절의 연호입니다. 紀元이란 건 그 연호가 선포된 해를 기점으로 연월을 세는 방식이니 숭정제가 즉위하여 연호를 선포한 1628년부터 세시면 되겠고, 己卯年이라 함은 말그대로 갑자가 기묘인 해에 발간했다는 뜻이니 1628년 이후의 기묘년인 1639, 1699, 1759, 1819, 1879, 1939, 1999년 중 하나가 되겠군요. 족보에 그런말이 쓰여있다면 숭명의식이 강했던 조선 후기 족보이거나 혹은 그때 풍을 내기 위해 일부러 현대에 와서 사용한 것이라 생각되네요..
조선의 양반들은 희한하게도
청나라가 생긴 이후에도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연호를 썼습니다.
그러다보니 기묘년이라 해도
어느 기묘년인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이름은근히 어렵네요~ 지금이 참 편해진건가요~^^
필(Pil)씨가 있었을까요? 😅
이황, 송시열, 붕당의 수괴들이 그 . .
감사합니다
송시열이 송자라니
지나가는 🐕도 웃을 호칭입니다.
족보의고향 대전.
재미있어 잘 들었는데 한가지 의문이 있어 질문합니다.
설명중에 우리나라에서 자의 칭호를 받은 사람은 퇴계선생과 다소 의외지만 우암선생 두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근거가 무엇인지요
제가 알기는 자의 칭호를 공식적으로 받은 분은 우암선생 한분인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퇴계선생이 이자라고 불리는 것은 들은 바가 없는데 근거를 말씀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근거가 있다면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우암선생이 송자라고 하는 것은 정조께서 공식화 했습니다.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일기는 학계에서도 자의 칭호는 우암선생 한분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유교국가에서 자의 칭호를 붙이는 것은 학문이 뛰어난 사람으로 그 인물을 성현으로 모신다는 뜻이다.
정조가 양현전심록을 저술할때 주자와 송자의 칭호를 썼다.
영조 50년(1774) 정조께서 東宮으로 계실 때 편찬한 책이 「兩賢傳心錄」이다. 朱子와 宋子 두선생의 心法이 같은 글을 모아 그 양현의 마음을 전하는 글을 類選해서 편찬하였다.
조경이 평안감영에서 문집을 중간할 때에 정조의 명에 의해 「송자대전」이라 명명했다. 원래 「우암집」이었는데 정조가 「송자대전」이라 명명했다. 정조가 “비록 대현이 쓰다가 버려진 글이라도 다 수집하여 대전을 만들어라.” 명해서 문헌을 다 수집해서 수록했다.
「송자대전」은 우리나라의 책 중에서 격이 가장 높다. 「전서」가 우리나라에는 셋이 있는데, 「홍재전서」와 「율곡전서」「퇴계전서」가 있다. 대부분은 문집이라고 부른다.
송시열이 학문으로 일가를 이루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헛된 학문으로 조선을 피폐하게 만든 장본인임은 분명합니다
고려사 전공이면 국경선이나 정확하게 밝혀주시죠
고구려, 발해, 고려,조선 국경선도 모르는 우리 후배들에게 ....
제일 오래된 족보는 성경책 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성경책은 족보책 입니다
성씨의 사용과 족보는 전혀 연관이 없구요ㅎㅎㅎ 성화보는 3대 동안 벼슬을 지낸 가문을 기록으로 남겨 자랑하려 남긴 겁니다
성씨는 지금의 주민번호 같이 사람을 특정해서 세금 걷고 군역 부과하려 중앙정부에서 강요한거구요
성이 없었다고요? 박혁거세 김알지 고주몽은 뭐죠?ㅋㅋ 왕족들은 혈통 확인을 위해서 왕권 국가 들어서기 시작할때 부터 썼구요
지방호족이 걷는게 아닌 중앙에서 세금 걷기 시작한 고려 부터는 종, 노비 까지 다 쓰인게 성씨 입니다
조선 3대 도적 장길산 임꺽정 홍길동 전부 광대 백정 서얼 천민 이지만 전부 성씨가 있습니다
관청에 성씨가 있어야 본인 특정 가능 하기 때문에 무등록자는 기본적으로 세금도 군역도 안지는 불법체류자 인데 가만 뒀겠어요?
필이 아니라 피씨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