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우 교수님. 페친이신데 페북에서는 거의 못 뵈어요. 기독교 신학에서 일반계시의 차원으로 철학을 접근하는 저로서는 교수님의 이렇게 진정성있는 강의에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철학을 뛰어넘어 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제자로 살았기에 그의 이러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시는 교수님의 강의가 많은 호소력이 있습니다. 특히 철학과 신학의 관계를 잘 설명해 주셔서 더 고맙습니다. ^^
성서. 그 글들은 누구나 읽어낼 수 있는 글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 누구도 볼수 없다 왜? 절대신,즉 창조주의 명령이 있기에. 그누구도 볼 수가 없는 글이 성경. 봉해놓았고, 가려놓았고 감춰놓아 오로지 절대자,절대신만 볼수 있다. 단지 보고자 한다면 신의 계시가 있어야 가능한 책이 성경이다. 본다고 하면 너희죄가 그저 있을뿐. 보는자가 본다고하면 창조자를 거짓말장이로 몰아세우기에 저주다 인간에서 창조주가 되는건 기적이다. 그누구도 예외는 없다. 그게 헌실이고 성경이고 진실이다. 참고하길 빈다.
그건 마르틴 루터가 95개조반박문을 선포하고 루터성경을 쓰기 전까지의 scriptura(라틴어 사본)에 대한 중세 카톨릭 성직자들의 견해입니다. 지금은 서점에서 푼돈으로 한글로 번역된 것들 중에서 골라 구입해서 누구나 읽어요. 타임머신으로 과거에서 오셨나보네요. 21세기를 살고있는 카톨릭 성직자들 중에는 일반에 성경을 금지하는 놈 하나도 없어요.
늘 급한 일과 귀한 일 사이에서 급한 일을 우선 택하다 보니 귀한 강의 듣는 시간을 겨우 만듭니다. 그래도 시간날 때마다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교수님의 강의실이 있어 참 감사하답니다. 강의마다 댓글을 달지는 못합니다만~^^ 키르케고어의 종교적 실존은 기독교인으로서 당시 국교회의 종교권력자들의 교리나 성경 해석, 종교적 요구에 대한 강한 비판과 저항으로 종교의 개체성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2장 2절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령한 이삭 번제 명령은 기독교인으로서도 늘 왜 이런 인신제사 명령을~?거두었다고는 하지만 늘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로움과 의로움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의로움을 행한 것이라면 종교적 실존은 자식을 살해하는 윤리적 실존을 포기해야 하는 것인지~??? 키르케고어도 종교적 실존은 의구심을 가지며 종교권력자들에 의해 해석되는 신이 아닌 온전히 단독자로서 주체적인 신을 마주할 것을 강조한 듯 합니다만~ 얕은 철학지식(오해, 오독일수도^^)을 가진 전 의구심이 생깁니다~그래도 당시 종교권력자들에게 휘둘리는 선한 성도들의 종교적 실존에 대한 키르케고어의 깊은 사랑이 느껴집니다. 귀한 강의 늘 감사한 마음으로 경청합니다~^^
헤즐루님.... 정말 좋은 질문입니다. 신이 자식살해를 명령했다는 것은 정말 이해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그래서...그러니...상징입니다. 이사악은 그저 이 세상의 가치를 상징합니다. 세상가치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은 자식이 아닐까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의 어떤 가치에도 유혹되지 않는 강인한 신앙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이해한다면,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간혹 신앙과 윤리가 충돌할 때 있지만, 인간이 만든 제도와 법보다 더 상위의 종교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위대한 삶이라는 것은 비단 키에르케고어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최상의 옳음을 살아야 하는 것이지 현재의 옳음과 좋음을 절대적으로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특히 신앙인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졸업 후 실패만 하고 살았습니다ㅠ 삶에 대한 확신이 없고 나약함과 나태함, 절망 가운데 있는 요즈음 갑자기 다시금 문학이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면서 듣게 된 교수님의 강의를 통해 예전 학부 때 배웠던 것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눈물이 다 나네요ㅠ 교수님 이런 귀중한 강의 올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ㅠ 가능하시면 많이많이 올려주세요 ㅎㅎ
키에르케고어란 의로움(절대적인 진리)을 위해 이로움(상대적인 진리)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신앙의 자세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것을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라고 말하고 있어요. 쉽게 신적인 정의와 인간의 법률이 충돌한다면, 더 높은 차원의 정의를 위해 인간이 만든 법률의 위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후에 시민불복종을 옹호하는 이들의 논변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인간계에는 진리가 존재치 않는다. 성서와 성경. 성서는 죽은 글이다. 성경은 산자들이 성취된. 글 성경이다. 인간은 절대자 앞에서는 짐승일뿐이다. 인간,인생,사람이라 기록된건 모두 절대자를 지칭하는 언어일 뿐이다. 절대신. 창조신이 보기엔 모두 짐슴들이다. 그게 성경의 실체이다. 짐승과 인간. 사람과. 신. 거짓신과 참신. 비진리와 진리. 죽음과 영생. 육과 영., 모두가 나뉴인다. 그게 진리의 속성이다. ㅎ
에릭시걸님 좋은 말씀입니다. 인간이 만든 보편적인 윤리의 체계로부터 벗어나는 신앙의 결단이 자유의 시작이라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아울러 키에르케고어는 신의 뜻이라는 것이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상대적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신앙은 주관적이다!" 각자는 다양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동일한 신적 명령(양심의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취할 수 있는 정의의 길을 살아간다는 내용으로 이해합니다. 키에르케고어가 당시 헤겔의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교리의 문화를 받아들인 덴마크교회와 평생 싸웠던 이유도 신앙은 개별적이라는 신념에 있었습니다. ^^
사랑이라!!!! 서양 속담에 이런말이 있습니다.. "악덕 기업주도 천국을 간다" 고 기도해주는 100명의 성직자들보다 기업주가 주는 작은 월급봉투가 우리 가족을 웃게하고, 살리니까요 기업이 무너지면 거리엔 수천수만의 장발장들이 서성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적 사랑은 언제나 가진자들은 불순한 자로 보고 빈자나 약자들을 순결한 사람들로 만들어 세상을 양분화 시키고, 극화시키는 역학을 했왔습니다. (예수가 제일 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종교적 사랑은 인정은 하나, 그다지 환영하지는 않습니다.
사랑으로 위장된 독선의 이념. 그 사랑이 증오 학살 전쟁의 신념이 됐다. 가장 잔인하고 폭력적인 신념을 강제하고 미화한 개소리. 종교니 철학이니 현학적인 위선적 사랑 말고 진짜 사랑부터 실천하자. 신의 노예에서 해방된지 오래됐다. 신은 속박이고 권력이고 거대한 이념일뿐이다. 신을 버리는 과정이 문명화의 과정이다.
오늘 발견(?)했는데 우와!!! 하면서 듣고 있네요. 감사합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창세기3장을 언급하며 본디 선한 율법을 죄가 왜곡하여 유혹으로 만들고 결국 선악과가 되어 인간을 죄의 법에 묶인 죄의 노예가 되게끔 (실존적인 죽음에 이르게끔: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결국 윤리(율법)는 본래 의도와는 멀어져 필연적으로 인간을 묶어놓는 속박이 될 뿐이라는 점이 소개하신 키에르케고어의 관점과 동일한 시각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종교갈등/전쟁에서 계속적으로 증명되었고 이 시대에도 기독교계에서 동성애에 대한 정죄나 극단적인 혐오시각을 보내는데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심지어 예수도 첫째되는 계명이라고 한)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보다 율법 자체에 대한 천착에 집착하는 것 같아... 많이 아쉽습니다. 이데아(물자체)가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윤리/규범으로 환원되면서 오히려 대부분의 인간이 본질로 보고 있는 것은 진짜 본질이 아닌것 이고 탈본질 (Ex-ist)을 통해 오히려 본질에 더 다가갈 수 있다로 이해했습니다. 교수님 강의를 제대로 이해한게 맞나요?
이런 강의를 방구석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니 현대문명의 승리입니다 ㅜㅜ감사합니다 교수님!
과찬의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듣고 싶을 때마다 듣습니다
쏙쏙 들어오는 강의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이로움과 의로움 사이에서... 키에르케고어는 믿음으로 의로움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라 말합니다. ^^
정진우 교수님. 페친이신데 페북에서는 거의 못 뵈어요. 기독교 신학에서 일반계시의 차원으로 철학을 접근하는 저로서는 교수님의 이렇게 진정성있는 강의에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철학을 뛰어넘어 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제자로 살았기에 그의 이러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시는 교수님의 강의가 많은 호소력이 있습니다. 특히 철학과 신학의 관계를 잘 설명해 주셔서 더 고맙습니다. ^^
과찬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명료하게 간단히 잘설명해주시네요 감사합니당 😆
계순님 감사합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실존주의 사상에 대하여 올바른 강의에 감동합니다.
감사합니다.
빛과 소금이 되는 삶에 대한 철학적 강의, 교수님 덕에
철학이 좋아지네요.
감사합니다. 부족한 강의 좋게 봐주신 덕분입니다~!!^^
지금까지 유튜브에서 들은 철학강의중에서 최고인 것 같아요. 무료로 들을 수 있어 넘 좋네요~ 키에르케고르에 대해 짧고 알찬 강의 감사합니다
김군님.,..감사합니다. 오래전 강의라 부끄럽기도 하네요...언젠가 키에르케고어 심화편을 준비해 볼까 합니다. 영상 중 궁금하신 점은 질문 올려주시면 답변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너무 감사합니다.
현님 고맙습니다~^^
유신론.
유물론.
무신론.
무물론.
신,영원,영혼,절대자.
인간중생들은 결코 모른다.
마치 인학을 신학이라고 하는것과
똑같다.
신.
잡신.
절대신.창조자.
그 누구도 모른다.
모르고 믿으면 자신의 믿음을 믿는 광신주의에 빠지지 않나요?
키에르케고어, 매력적인 철학자네요...^^ 강의 감사합니다.
곧 키에르케고어의 실존주의 사상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
지난달 Copenhagen 방문때 그분 동상앞에서 사진을 찍어왔어요/알기 쉽게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양심, 정의 이웃 사랑 실천
어떻게 할것인가?
교수님 강의를 통해
많은 의문이 풀렸습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성서.
그 글들은 누구나 읽어낼 수 있는 글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 누구도 볼수 없다
왜?
절대신,즉 창조주의 명령이 있기에.
그누구도 볼 수가 없는 글이 성경.
봉해놓았고, 가려놓았고 감춰놓아
오로지 절대자,절대신만 볼수 있다.
단지
보고자 한다면 신의 계시가 있어야
가능한 책이 성경이다.
본다고 하면 너희죄가 그저 있을뿐.
보는자가 본다고하면 창조자를
거짓말장이로 몰아세우기에 저주다
인간에서 창조주가 되는건 기적이다.
그누구도 예외는 없다.
그게 헌실이고 성경이고 진실이다.
참고하길 빈다.
표상을 통해 이념으로 나아가는거지요.
그건 마르틴 루터가 95개조반박문을 선포하고 루터성경을 쓰기 전까지의 scriptura(라틴어 사본)에 대한 중세 카톨릭 성직자들의 견해입니다. 지금은 서점에서 푼돈으로 한글로 번역된 것들 중에서 골라 구입해서 누구나 읽어요. 타임머신으로 과거에서 오셨나보네요. 21세기를 살고있는 카톨릭 성직자들 중에는 일반에 성경을 금지하는 놈 하나도 없어요.
항상 잘보고있습니다. 좋은 강의 감사합니다
항상 격려의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좋은 강의 감사히 잘 들었습니다
리쿠님 감사합니다. ^^
가끔 교수님이 목회 하면 참 잘할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정말 웬만한 목사님보다 훨씬 감동적 입니다.ㅎㅎ
늦으막히 철학에 관심갖고 공부하는데 교수님 강의가 정말 도움이 많이 됩니다.
그런 말을 많이 듣긴 했는데… 철학강의도 목회라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김춘만선생님 감사합니다~^^
@@philosjw 목회자인가?
목사 음성인듯 하다.
감사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다시한번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멘~!!^^
정말 최고입니다
ㅎㅎㅎ감사합니다~!!^^
늘 급한 일과 귀한 일 사이에서 급한 일을 우선 택하다 보니 귀한 강의 듣는 시간을 겨우 만듭니다. 그래도 시간날 때마다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교수님의 강의실이 있어 참 감사하답니다. 강의마다 댓글을 달지는 못합니다만~^^
키르케고어의 종교적 실존은 기독교인으로서 당시 국교회의 종교권력자들의 교리나 성경 해석, 종교적 요구에 대한 강한 비판과 저항으로 종교의 개체성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2장 2절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령한 이삭 번제 명령은 기독교인으로서도 늘 왜 이런 인신제사 명령을~?거두었다고는 하지만 늘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로움과 의로움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의로움을 행한 것이라면 종교적 실존은 자식을 살해하는 윤리적 실존을 포기해야 하는 것인지~???
키르케고어도 종교적 실존은 의구심을 가지며 종교권력자들에 의해 해석되는 신이 아닌 온전히 단독자로서 주체적인 신을 마주할 것을 강조한 듯 합니다만~ 얕은 철학지식(오해, 오독일수도^^)을 가진 전 의구심이 생깁니다~그래도 당시 종교권력자들에게 휘둘리는 선한 성도들의 종교적 실존에 대한 키르케고어의 깊은 사랑이 느껴집니다. 귀한 강의 늘 감사한 마음으로 경청합니다~^^
헤즐루님.... 정말 좋은 질문입니다. 신이 자식살해를 명령했다는 것은 정말 이해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그래서...그러니...상징입니다. 이사악은 그저 이 세상의 가치를 상징합니다. 세상가치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은 자식이 아닐까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의 어떤 가치에도 유혹되지 않는 강인한 신앙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이해한다면,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간혹 신앙과 윤리가 충돌할 때 있지만, 인간이 만든 제도와 법보다 더 상위의 종교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위대한 삶이라는 것은 비단 키에르케고어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최상의 옳음을 살아야 하는 것이지 현재의 옳음과 좋음을 절대적으로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특히 신앙인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
아 상징이군요 그것이...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인신제사에 놀랐고 궁금했었거든요~ 강의 잘 듣겠습니다!^^
진정한 신앙의 기사가 될것을 다짐하게 하는 강의 감사합니다 ~^^
홀리그레인님 감사합니다.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각자의 의로움을 살아가는 세상이 키에르케고어가 꿈꾼 진정한 신앙의 이상이 아닐까 합니다. 아래 영상이 도움되시면 좋겠습니다. ruclips.net/video/CNcMGgcbA80/видео.html
좋아요
훌륭한 강의
감사합니다.
도약된 신앙은 더이상 우울 하지 않고 가장 아름다운 낭만의 경지에서 .... 교수님의 웃음이 담기신 얼굴의 강의 어떤 연기자보다 매력적이세요. 하하하하 ~~~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기를..
과찬에 부끄럽습니다. ㅎㅎㅎ
키르케고르만큼 멋있으십니다 최고세요 좋은강의 감사합니다
주농이님 감사합니다. 영광인걸요~^^
교수님 안녕하세요?
영화 듄 보고 들렀습니다
좋은 내용 알아갑니다 감사합니다
듄이라는 영화가 궁금하네요. 저도 찾아볼게요. developer님 감사합니다~
유신론적 실존철학은 기독교인들에 큰 영감을 줍니다 훌륭한 설교를 들은 느낌입니다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의로움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때로는 "미움 받을 용기"마저도 각오해야 합니다. 나는 세상의 인정이 아니라 의로움의 삶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가장 고귀한 실존이라는 것이 키에르케고어의 말입니다.
모든 강의마다 언제나 어렵게만 여겨지는 철학을 이렇게 쉽고 깔끔하게 정리해 주면서 진지함과 진정성이 느껴지는 삶의 철학함을 느끼게 합니다.
철학의 대중화에 이토록 수고하시는 교수님께 감사드리며 더 많은 양질의 강의 기대합니다.
철학의 대중화에 도움되면 정말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philosjw 교수님, 공포와 전율을 정독하면서 비극적인 영웅과 아브라함의 믿음, 마리아의 믿음 설명부분에서 그야말로 전율을 느꼈습니다.
고전의 매력에 다시한번 흠뻑 젖어들었습니다.
젠틀하신 교수님 감사합니다.
@@cskim7153 공포와 전율.... 어렵지 않지만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작품입니다. 직접 고전을 읽으셨다니 정말 훌륭하십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
보다 낮은 곳으로,
감동의 보상,
키에로케고어의 실존주의
좋은 강의 감사드립니다
이웃사랑....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그래서 귀한가 봅니다.
철학 수업을 듣는 대학생입니다. 교수님 덕분에 키에르케고르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시간상 부족한 강의입니다. 깊이 들어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 교수님, 진지하면서도 유연성을 가지시고 철학자들의 핵심을 그들의 입장에서 전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순영님 감사합니다. 철학을 일상적인 언어로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좋은 강의에 감사드립니다.
글 남겨 주셔서 감사해여~!!^^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졸업 후 실패만 하고 살았습니다ㅠ 삶에 대한 확신이 없고 나약함과 나태함, 절망 가운데 있는 요즈음 갑자기 다시금 문학이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면서 듣게 된 교수님의 강의를 통해 예전 학부 때 배웠던 것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눈물이 다 나네요ㅠ 교수님 이런 귀중한 강의 올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ㅠ 가능하시면 많이많이 올려주세요 ㅎㅎ
많이많이 올리겠습니다. 문학에 도전하시길 바래요~
@@philosjw 감사합니다 교수님ㅎㅎ
작년 강의실에서만 뵙다가 여기서 보니깐 신기합니다! 역시 교수님은 현장강의에서 최고인거 같아요!
이름이 뜨지 않아 누군지 모르겠네... ㅎㅎ 오랜만이야... 나도 현장강의가 훨씬 좋은데.... 영상강의는 시대의 대세이니 따라가야지.... 연습 중이니 이제 곧 잘하게 될거라고 희망하면서....
저는 대학원에서 사회과학 쪽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일년전부터 유튜브 를 통해서 여러 채널을 구독하고 봤는데 정교수님 강의는 제 가슴에 가장 빨리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이해력을 높혀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계속 구독하고 인문학을 조금 더 이해 하는데 활용하고 싶습니다
강희천님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
"신 앞에서 선 단독자" 그냥 멋진 말로만 생각했는데,
"두려움과 떨림으로써 의로움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이라는 부분에서
종교적인 신념이라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를 알게 되네요.
늘 감사드립니다.
종교적 신념의 숭고함... 공감합니다~!!
잘 들었습니다. 앎에는 책임이 따르는 것 같습니다.
정확한 말씀입니다. 책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예속을 택하기더 한답니다. ^^
@@philosjw 벌써 1년여 전에 본 영상이네요~댓글을 달아주셔서 다시 보았습니다! 의롭게 살고 싶으면서도 종종 그게 무거운 짐 같아 차라리 외면해버리고 싶은 마음도 드는데..무엇이 자유이고 예속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기독교적 철학은16세기 이후에 시작 되었게네요, 정확히 언제 부터 인지 알고싶네요, 기독교 기원후 3백년에 서구에 받아들여졌으니까요.
넓은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은 4세기부터 이후 줄곧 이어졌지요.
감사합니다
신 잎에서 단독자란 맹신겠지요 주관적으로 받아드렸을뿐, 양심이란것도 보 편 주관적인거일뿐 진리라는 말을 할순 없지요. 목사님 목사님이시군요, 골돌이( 세뇌).
@@youngjung7266 키에르케고어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인간의 자유를 찾고자한 골수 종교인입니다.
아케다의 상징성, 우왕~ 너무 좋군요!
돌아가신 어머니로부터 교회 가기를 하도 강요당해서 기독교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데, 목사님들이 독선을 내려놓고 쌤처럼 융통성 있게 설교를 한다면 지금이라도 교회를 다니고 싶어질 것 같습니다. 감동 주셔서 고맙습니다! ^_^
키에르케고어란 의로움(절대적인 진리)을 위해 이로움(상대적인 진리)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신앙의 자세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것을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라고 말하고 있어요. 쉽게 신적인 정의와 인간의 법률이 충돌한다면, 더 높은 차원의 정의를 위해 인간이 만든 법률의 위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후에 시민불복종을 옹호하는 이들의 논변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강의 감사합니다 귀에쏙쏙들어오고 기독교인으로 정말말씀이 쉽게이해되네요 혹시 교수님은예수님을 믿으시나요?
인간계에는 진리가 존재치 않는다.
성서와 성경.
성서는 죽은 글이다.
성경은 산자들이 성취된. 글 성경이다.
인간은
절대자 앞에서는 짐승일뿐이다.
인간,인생,사람이라 기록된건 모두
절대자를 지칭하는 언어일 뿐이다.
절대신.
창조신이 보기엔 모두 짐슴들이다.
그게 성경의 실체이다.
짐승과 인간.
사람과. 신.
거짓신과 참신.
비진리와 진리.
죽음과 영생.
육과 영., 모두가 나뉴인다.
그게 진리의 속성이다.
ㅎ
전투적인 확신을 가지고 계신 것 같군요. ㅎㅎ
종교적실존/정의/
핵심입니다.
종교적,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신의뜻에 따른다는 건데 주체적 삶을 산다는 실존주의의 범주에 들어간다는게 의아합니다.신학과 어떤 차이가 있을지요??
에릭시걸님 좋은 말씀입니다. 인간이 만든 보편적인 윤리의 체계로부터 벗어나는 신앙의 결단이 자유의 시작이라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아울러 키에르케고어는 신의 뜻이라는 것이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상대적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신앙은 주관적이다!" 각자는 다양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동일한 신적 명령(양심의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취할 수 있는 정의의 길을 살아간다는 내용으로 이해합니다. 키에르케고어가 당시 헤겔의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교리의 문화를 받아들인 덴마크교회와 평생 싸웠던 이유도 신앙은 개별적이라는 신념에 있었습니다. ^^
사랑이라!!!!
서양 속담에 이런말이 있습니다..
"악덕 기업주도 천국을 간다" 고
기도해주는 100명의 성직자들보다
기업주가 주는 작은 월급봉투가 우리 가족을 웃게하고, 살리니까요
기업이 무너지면 거리엔 수천수만의 장발장들이 서성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적 사랑은 언제나 가진자들은 불순한 자로 보고
빈자나 약자들을 순결한 사람들로 만들어
세상을 양분화 시키고, 극화시키는 역학을 했왔습니다. (예수가 제일 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종교적 사랑은 인정은 하나, 그다지 환영하지는 않습니다.
시장의 논리를 부정하지 않더라도 시장에서 배제된 타자들을 시장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아가페적 사랑이 필요하지요. 시장의 공익성도 때로는 독점을 위한 기만으로 사용되고 있어요.
그렇죠 때론
종교적 실존주의 설명은 예배를 듣는 느낌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철학을 공부하면 신앙과 멀어지는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종교의 종말 이후의 종교는 바로 철학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 서구의 철학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사랑의 신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해 없이는 철학도 쉽지 않습니다. ^^
종교적 신념은 일종의 관념 아닌가요? 이게 왜 실존주의인지 모르겠네요
실존주의는 자신의 실제적인 삶의 자리에서 삶의 의미와 자유를 발견하는 철학입니다.
이삭을 바치라며 시험하는 하느님은 참으로 나약한 신 같습니다.나약한 인간이 상상한 그런 신이라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신이 된 것 같군요.
이번 편은 철학강의라기보다는 설교처럼 들렸습니다.
키에르케고어의 철학 전체가 거의 그리스도교 설교랍니다.
법에는 위배되지 않지만 정의에는 어긋나는.... 요새 정치인들의 편법행위가 떠오르네요.
옳은 말씀입니다. 키에르케고어는 의로움이란 지금 나에게 개별적으로 주어지는 의무를 따르는 삶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신 앞에 선 단독자가 됨으로써 그것을 들을 수 있고, 살 수 있다는....
교수님!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여기서 니체가 말한 신이란 표상으로써의 신이 아닌 진리를 뜻하는 말인 건가요? 즉, ex ist 실존주의적인 말이었던 것 아닐까요?
니체가 말하는 신이란 좁게는 그리스도교의 신이며, 넓게는 인간 세상을 지배하는 하나의 거대한 가치체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
강의 잘 들었읍니다. 독단자가 돼야 자유로워진다 였나요 단독자가 돼야 자유로워진다 였나요. 헷갈리네요.
단독자~!!^^
종교철학에는 개신교신학에 대한 이해는 특별히 없나보네요
키에르케고어만 듣고 종교철학 전체를 논하시다니. 그리고 헤겔 읽으면서 칸트 없다고 말하는 것 같군요.
사랑으로 위장된 독선의 이념. 그 사랑이 증오 학살 전쟁의 신념이 됐다. 가장 잔인하고 폭력적인 신념을 강제하고 미화한 개소리. 종교니 철학이니 현학적인 위선적 사랑 말고 진짜 사랑부터 실천하자. 신의 노예에서 해방된지 오래됐다. 신은 속박이고 권력이고 거대한 이념일뿐이다. 신을 버리는 과정이 문명화의 과정이다.
자신의 주관을 강요하지 마시고, 공개적인 글은 높임말을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philosjw 강요요? 그런다고 누가 듣기나 합니까. 여긴 강의실이 아닙니다.
평생 사랑을 실천해보지 못한 자의 궤변
아브라함은 신의 생각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임
인간이 헤아릴 길이 없다는 말을 나이들어 깨닫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알고 있었다면 자신의 앎을 믿는 것이니 그것은 신앙보다는 이성을 신뢰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 발견(?)했는데 우와!!! 하면서 듣고 있네요. 감사합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창세기3장을 언급하며 본디 선한 율법을 죄가 왜곡하여 유혹으로 만들고 결국 선악과가 되어 인간을 죄의 법에 묶인 죄의 노예가 되게끔 (실존적인 죽음에 이르게끔: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결국 윤리(율법)는 본래 의도와는 멀어져 필연적으로 인간을 묶어놓는 속박이 될 뿐이라는 점이 소개하신 키에르케고어의 관점과 동일한 시각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종교갈등/전쟁에서 계속적으로 증명되었고 이 시대에도 기독교계에서 동성애에 대한 정죄나 극단적인 혐오시각을 보내는데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심지어 예수도 첫째되는 계명이라고 한)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보다 율법 자체에 대한 천착에 집착하는 것 같아... 많이 아쉽습니다. 이데아(물자체)가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윤리/규범으로 환원되면서 오히려 대부분의 인간이 본질로 보고 있는 것은 진짜 본질이 아닌것 이고 탈본질 (Ex-ist)을 통해 오히려 본질에 더 다가갈 수 있다로 이해했습니다. 교수님 강의를 제대로 이해한게 맞나요?
강의보다 훨씬 더 탁월한 이해이십니다. 내용을 넘어 통찰에 이르셨으니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진정한 인문학자의 태도이십니다. 감사합니다~!!^^
@@philosjw 어휴~ 대가의 어깨에 올라 겨우 조금 보게되었다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구독 꾹!
박 재영님 목사님의 길에 계신지요?
신앙의 자세가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