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cess Gyeongjeong" the second daughter loved by King Taejong of th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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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8 апр 2022
  • Princess Gyeongjeong (1389-1455) was the daughter of King Taejong, the third king of the Joseon Dynasty, and was born in 1389 (1st year of King Changjo's reign), the second of four sons and four daughters of Taejon Lee Bangwon and Queen Wonkyung.
    The Ming Dynasty (1402), King Taejong rushed to marry Princess Gyeongjeong, who was at the age of marriage at the time, to avoid the demand for marriage to Joseon from them. As a result, Cho Daerim, the only son of Cho Joon, was decided to marry the princess, and he had one son and four daughters between the two.
    After Princess Gyeongjeong got married, the place where she lived was called "Small Gongjugol" because it was the place where a small princess lived, "Small Gongjugol" was changed to Chinese characters and became Sogong-dong.
    #Taejong Lee BangWon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History

Комментарии • 86

  • @HistoryKoreastory
    @HistoryKoreastory  2 года назад +15

    0:30 다섯 번째 아들 조대림 (x) 아들 조대림(ㅇ) 조대림은 조준의 외아들입니다. 자료수집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네요. 다음부터 더욱 꼼꼼히 살피겠습니다.

    • @user-ft3vb3iq5b
      @user-ft3vb3iq5b 2 года назад

      역사패치님 업로드가 많이 늦어지네요

  • @user-dk5sl6no1e
    @user-dk5sl6no1e 2 года назад +7

    소공동의 유래를알게되었네요
    재밋게들었습니다

  • @cocoyahappy
    @cocoyahappy 2 года назад +7

    매번 잘 보고있습니다
    좋은 영상 감사해요😊

  • @kb-ke5je
    @kb-ke5je 2 года назад +6

    늘 잘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genhalee2365
    @genhalee2365 2 года назад +2

    유익한 역사공부를
    재미를 곁들여 했네요
    감사합니다

  • @user-yy7mj2hq4r
    @user-yy7mj2hq4r 2 года назад +8

    역시 태종 이방원 진짜 대단한 사람이고 대단한 임금임..

    • @user-gv3bl6zk2i
      @user-gv3bl6zk2i 2 года назад +3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우리 조상님도 정도전쪽에 줄섰다가 몰살당하심

    • @user-gu5hr5yw3f
      @user-gu5hr5yw3f 2 месяца назад

      뭐가 대단함? 대단하다는 말은 좋은 뜻으로 말하는 때 하는 말임.

  • @js6542
    @js6542 11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저의 윗대 할머님들중 한분이신 조씨할머니는 경정공주와 조대림의 따님이신데, 그 손주며느리인 이씨할머니는 계양군의 딸이자 한확의 외손녀십니다. 이 영상을 통해 경정공주 대신 명 황제 후궁으로 시집간 분이 한확의 여동생이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네요. 두 할머니께서는 왕실에서 5촌숙질간이면서 시댁에서는 조손간이면서 각각 모친과 외대고모의 운명의 바뀜을 겪으신 역사를 지니신 분들이었군요…

  • @SSONGTAEWON
    @SSONGTAEWON 2 года назад +27

    세종대왕의 딸들인 정소공주, 정의공주에 대해서도 다뤄주세요!

  • @user-hw8gk7nm5o
    @user-hw8gk7nm5o 2 года назад +4

    잘보고 있습니다.

  • @phdogy
    @phdogy 2 года назад +11

    경정공주가 명황실에서청혼해서
    급히 혼인시킨공주였던가.
    정선공주에비하면 태종딸들은
    경안까지는무난히 잘살았나봄
    정선공주는 자손까지..ㅡ.ㅡ

  • @user-fl6oj8pm1e
    @user-fl6oj8pm1e 2 года назад +6

    원경왕후나 원경왕후 친정입장에서는
    태종에게 제대로 토사구팽
    당했다는거 ~

  • @user-ft3vb3iq5b
    @user-ft3vb3iq5b 2 года назад +14

    역사패치님 영상 오랜만이네요 기다렸는데.
    경정공주에 대해 잘 들었습니다. 이번엔 경정
    공주의 막내여동생이자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
    의 막내딸 정선공주에 대해 부탁드립니다.
    그녀가 언니들에 비하면 삶이나 출생과정,성장
    과정 등이 불쌍합니다.

  • @NurBota-su2om
    @NurBota-su2om Год назад

    장희빈이랑 인현왕후에 관한 역사 패치 도 또 따로 해 주세요^^ please

  • @mcplayer8158
    @mcplayer8158 2 года назад +3

    이번 영상에 사용한 사극은 무슨 작품이었나요??

  • @sj-vo5ug
    @sj-vo5ug 2 года назад +4

    4:16 이 인수대비 한씨를 왕과 비에서 채시라가 맡게되었다..

    • @SKnights94
      @SKnights94 2 года назад +3

      채시라 인수대비 안재모 연산군 재밌었죠 ㅋㅋ

  • @user-kq2vn9jb4d
    @user-kq2vn9jb4d 2 года назад

    자주 동영상 올려주세요^^

  • @chc5592
    @chc5592 2 года назад +2

    재미있게 감상했습니다^^ 강안공께서는 외동아들입니다. 다섯번째 아들로 나오네요.

    • @HistoryKoreastory
      @HistoryKoreastory  2 года назад +2

      지적 감사드립니다. 자료 수집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나 보네요. 다음부터 더 꼼꼼히 살피겠습니다.

    • @chc5592
      @chc5592 2 года назад +1

      @@HistoryKoreastory 수정감사합니다^^

  • @user-re8uh9vi4i
    @user-re8uh9vi4i 5 месяцев назад

    뭐야 이거 공주 타이틀 걸고 기록이 거의없다고¿ 어이가 좃나게 없네

  • @user-uo6ih8ur1t
    @user-uo6ih8ur1t 2 года назад +11

    한데 참 혼인 문화 보면 동서양이 극명하게 갈려요. 서양 쪽은 유럽이 한 대륙으로 묶여있다 시피해서인지 각 나라간 통혼이 오히려 일반적이었죠. 이 땐 근친혼도 하던 시절이라 각 국가 왕실이 이중/삼중으로 혈연 관계로 얽혀 있었어요. 그래서 그 유명한 합스부르크립, 혈우병 같은 유전병으로 고생했고요.
    한데 한중일은 통혼 문화가 있기는 했지만 서양만큼 일반적이지는 않았죠. 삼국 시대 나제 동맹을 맺은 사례 (오늘날 우리들 관점에서나 삼국 시대가 "우리" 역사이지, 이 시대 신라와 백제는 엄연히 서로간에 외국이었습니다), 이 영상에서 이야기하듯 중국에 시집간 여성들 (영락제의 후궁, 훗날의 도르곤에게 시집 간 의순 공주, 의순 공주가 시집 갈 때 서로 딸을 안 내놓으려고 했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얼마나 통혼에 부정적이었는지 알 수 있죠) 그리고 이건 통혼이라기보다 사실상 부마국으로 전락해서 원나라 공주를 상전으로 모시기 위해 혼인한 고려 말기, 이렇게 드문드문 역사 속에서 이례적으로만 나타나요.

  • @jennyha7833
    @jennyha7833 2 года назад +7

    이번 영상은 유난히 재밌네요
    소공동 이름의 유래도 알게되고 아주 즐거운 감상이었습니다

  • @tojimari23
    @tojimari23 2 года назад +3

    앗, 경감도 아니고 경정이군요!

  • @moon-th4fj
    @moon-th4fj 2 года назад +12

    역사를 배우다보면 중국이 일본보다 더하면 더했다라는 말이 이해가 되네요

    • @user-lv7us6mt5h
      @user-lv7us6mt5h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애초에 고려부터 조선끝까지 고려말공민왕때를제외하면 어느순간 도 중국의 식민지가아닌적이없엇으니까

  • @inyeobseo9369
    @inyeobseo9369 2 года назад +22

    외척인 민씨, 심씨에 대하여는 없는 죄도 만들어서 숙청한 태종이 조대림을 철저히 믿고 비호하는 모습을 보면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사위이거나 조준과의 의리를 생각한 게 아닌가 봅니다. 1415년 경안공주가 죽자 외손자 권총을 데리고 살고 만행을 싸고도는 모습에서도 태종의 이중성은 보입니다. 평양 조씨는 충선왕비의 집안으로 유명한 집안입니다. 태종이 버린 황희, 맹사성은 세종대 명재상이니 태종과 세종이 사람을 보는 눈이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 @ISAMIT-18
      @ISAMIT-18 2 года назад

      조준은 자기보다 늙었고 민씨 심씨는 젊었으니

    • @zzang-mathis
      @zzang-mathis 2 года назад +2

      권총이 태종 생전에 만행이라고 할만한 행동을 한 적이 있을 수가 있나요
      태종이 왕위에서 물러났을 때 6살 밖에 되지 않았던 1413년생인데
      그리고 조대림을 비호한 것은 정치적인 목적도 있겠지만 그냥 사위라서..이게 제일 큰 이유죠.
      사헌부 관원들에게 대노한 것은 우리 사위에게 내 허락도 없이 형을 집행했다는 것도 화나는데, 더 나아가 내 사위에게 주범이니 종범이니를 따지게 해???
      맹사성등이 태종의 이런 생각을 읽지 못하고 행동했다가 된통 당한 것 같습니다.
      목인해의 고변 사건 당시 태종의 행동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조대림과 더 나아가서 역모에 연관될 수도 있는 경정공주를 보호하려는 것이 보입니다.

    • @HyperNetakor
      @HyperNetakor 2 года назад +3

      사위의 만행을 감정적으로 싸고 돌았겠습니까. 딱 보니 정치적으로 이용한 거 이상도 이하도 아니구만요. 왕권강화를 위한 도구로 썼네요.

    • @inyeobseo9369
      @inyeobseo9369 2 года назад

      ruclips.net/video/ujGtpyzO6BY/видео.html
      권총이 태종 생전에도 방자하여 노신의 수염을 뽑아 숭례문 밖으로 유배를 갑니다. 수염을 자른 것은 당시에는 대단한 모욕이고 태종이 죽기 직전에 사면합니다. 권총은 외숙 세종대에도 관비, 궁녀를 첩으로 삼아 비난을 받고 실록에서도 어려서 부모를 잃어 정상인인 아니라고 기록합니다. 평민 같으면 엄벌을 받아야 하는데 태종, 세종이 감싼 기록이 명확합니다. 1404년 장녀 정순공주의 시아버지 이거이는 숙청하고 목숨만은 살려줍니다. 딸 사돈에 대하여는 관대하고 처가, 아들 사돈에 대하여만 선택적 숙청입니다.

    • @js6542
      @js6542 Год назад +1

      외척은 훗날 왕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자리이고 사위의 집안은 전혀 그렇지가 않기 때문에 너그러울 수 있는거 아닐까요

  • @user-zh4xx9nf7k
    @user-zh4xx9nf7k 2 года назад +1

    태종 (조선 제3대왕) ~ 원경왕후 민씨
    왕세자 (양녕대군) ~ 세자빈 (훗날의 부인)
    효령대군 ~ 정씨 ~ 충녕대군 ~ 심씨

  • @user-fl6oj8pm1e
    @user-fl6oj8pm1e 2 года назад +12

    원경왕후는 이방원만나
    친정 멸문지화 당하고
    궁궐에서 평생 속만 썩다 간
    한 많은 여인이죠.
    왜 민제는 이방원을
    사위 삼아서는 ㅠ
    참으로 안타깝죠 ~

  • @SSONGTAEWON
    @SSONGTAEWON 2 года назад +3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자녀들은 아들들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딸들은 유명하진 않지만 저 부부에게 있어서 유의미하지.
    공주들은 이방원 부부의 첫 아이들이면서 가장 행복한 시절을 함께 한 딸들이라서 첫째 아들인 양녕만큼이나 소중하겠지.
    첫째인 정순공주, 둘째인 경정공주는 실록에 기록이 없지만 셋째인 경안공주는 총명과 지혜가 보통사람들과 남달라서 태종과 원경왕후의 사랑을 한데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경안공주와 충녕대군이었던 세종은 천성과 기품이 서로 닮아서 궁중에서 그 어짊을 함께 일컬었다고 하네요.

    • @zzang-mathis
      @zzang-mathis 2 года назад +2

      경안 공주는 태종 부부가 아들 셋을 아기 때 연달아 잃고 나서 그 다음에 얻은 딸이기 때문에 특별히 더 애지중지 할 수 밖에 없었겠죠
      그 연년생 동생인 양녕대군과 함께
      그냥 숨만 쉬고 있어도 너무 고마울 자식이었을 겁니다

    • @user-ft3vb3iq5b
      @user-ft3vb3iq5b 2 года назад +2

      양녕대군은 세명의 형들이 아기 때 요절하고 겨우 다시 얻어 태종과 원경왕후가 끔찍하게
      아꼈다고 합니다. 태종은 양녕대군을 업어주고
      무릎에서 떼어놓지 않을 정도로 그를 너무 이
      뻐했습니다.

  • @user-tj6pv9kx5o
    @user-tj6pv9kx5o 2 года назад +7

    한확의 누이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지

    • @phdogy
      @phdogy 2 года назад +3

      경정공주 대신 간택된이가 후일 장숙여비 인수대비고모죠

    • @whylive3471
      @whylive3471 2 года назад +1

      드디어 끝판왕 등장 세종 세조 성종을 왕으로 등극시킨 권력자 선덕제의 공비 한씨
      조선왕 워에 끝판왕 위에 명황제

  • @ericyoon956
    @ericyoon956 2 года назад +5

    한국인이여, 역사적 피해의식을 버려라 한국 역사는 유례없이 평화롭고 안정적 -마크 피터슨 박사
    나는 미국 대학에서 한국 역사를 가르칠 때 처음에는 정설대로 가르쳤다. 침략에 시달린 역사라고 말이다. 그런데 한국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칠수록 정설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생 연구한 바에 따르면, 한국 역사는 유례없이 평화롭고 안정적이었다. 왕조를 보자. 신라 1000년, 고려 500년, 조선 500년 동안 왕조를 유지했다. 사회가 안정적이지 않으면 그렇게 오래 왕조를 유지할 수 없다.
    중국과 일본은 물론 세계 대부분 왕조의 역사는 250년 안팎이다. 신라-고려-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된 시기도 평화로웠다. 보통 왕조가 바뀌기 전에 수십 년 동안 전쟁과 혼란을 겪는다. 그런데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후 정권을 잡기까지 불과 몇 시간이었다. 또 왕조는 변해도 지배층엔 변함이 없었다. 중국·일본 등은 왕조가 바뀌면 지배층이 뒤집히다시피 한다.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중국 유방은 하인 출신이지 않나. 한국의 왕조가 바뀔 때는 세상이 뒤집힌 것이 아니라 지배층만 수평 이동했다. 노비도 혼란을 틈타 혁명을 일으켜 왕조를 뒤엎은 적이 없다. 신라 노비의 후손이 고려 노비가 됐고 그 후손이 조선의 노비가 됐다. 심지어 나라를 흡수할 때도 평화적으로 해결했다. 신라는 가야의 지배층을 몰락시키지 않고 오히려 흡수했다. 《삼국사기》를 보면, 김춘추는 가야 사람인 김유신의 누나와 혼인한다. 신라엔 골품제라는 엄중한 계층이 존재했는데도 가야 지배층을 품음으로써 평화적으로 가야를 흡수했다.
    오래전 강릉에서 만난 한 퇴직 고등학교 교사는 실록·문집·야사 등에서 침략의 사례를 헤아려보니 9000번이 넘는다고 했다. 망치를 들면 모든 게 못으로 보인다(If all you have is a hammer, everything looks like a nail)고, 그 시각은 편견이다.
    나는 한국 역사에서 침략은 2차례 있었다고 본다. 원나라의 침입과 임진왜란이다. 일본 해적이 우리 땅에 와서 돼지와 쌀을 훔친 것까지 침략으로 볼 수는 없다. 그것은 해적질이고 도둑질이다.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도 한국을 멸망시키려는 게 아니고, 조선 왕의 항복을 받아 우방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원수를 만들려고 했던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 외에 자잘한 전투는 국경 분쟁 정도였다.

    • @ericyoon956
      @ericyoon956 2 года назад

      사이버 외교 사절단 반크는 해외 유명 방송국, 세계사 교과서, 국제기구, 대학교 등이 한국을 '중국과 일본이라는 고래 사이에 낀 새우'로 묘사하고 있다면서 "이를 바로잡는 동시에 긍정적인 한국의 역사를 알려 나가겠다"고 17일 밝혔다. "한국인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라는 속담처럼 종종 자신들을 강대국의 희생양으로 묘사한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박기태 반크 단장은 "이런 비하적 표현을 방치한다면 세계인들은 한국을 약소국으로 여기고, 한국 역사도 독립성과 주체성을 갖지 못한 것으로 인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역사를 대하는 외국인에게 한국인은 자기 비하에 빠진 못 난 나라에 사는 열 등한 국민으로 비출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이런 편견은 21세기 한국 역시 주체적이고 능동적이지 못하고 주변 강대국의 의지로 휘둘리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낳게 한다"며 "한국의 역사가 '고래 사이에 낀 새우'라 비유할 만큼 주변 강대국에 휘둘리는 약소국, 무 능력한 국가가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역사 속 다양한 사례를 찾아 적극적으로 세계에 알려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 @beomyongkim475
    @beomyongkim475 2 года назад

    영락제는 고추도 잘 안서는게 조선여자를 왜 이렇게 좋아했는지...

  • @user-pp7oy4ub9m
    @user-pp7oy4ub9m 2 года назад +4

    한확은 뭐 거의 포주네 ㅋㅋㅋ

  • @user-uo6ih8ur1t
    @user-uo6ih8ur1t 2 года назад +10

    공주들의 삶을 보면 최고 권력자의 딸/누이로 태어났다는 특성상 꼭 평탄하지만은 않은 인생을 사는 경우가 많은데 영상에서도 이야기하시듯 상당히 무난하고 평탄한 인생을 살다 간 공주네요.
    1. 최고 집안 태생: 아버지가 왕이고 엄마가 중전이니 말해 무엇합니까. 심지어 아버지가 카리스마 짱짱인 최고 능력자 왕이었죠. 이런 아버지이니 딸바보 아버지가 보나마나 시집 갈 때 엄청난 혼수를 챙겨주었었겠죠.
    2. 남편과의 금슬: 자녀 수만이 전부는 아니지만 1남 4녀나 낳았을 정도면 사이가 좋았죠.
    3. 해로: 남편이 세종 12년에 죽었다고 나와요. 이렇다면 사실상 오래 같이 살았죠. 평균 수명이 짧았던 시절에...
    1. 최악으로 치달은 부모님 사이;;; (아버지가 태종이고 엄마가 원경왕후입니다;;;)
    2. 영상에서 이야기하는 조대림 사건으로 인한 남편의 고초
    3. 동생의 기행, 그로 인한 폐위 (누나로서 본인인들 마음 편했겠습니까)
    자식들의 재산 분쟁이야 공주 사후 일이니 몰랐다 치고... 전 이런 공주들 재산이 어느 정도였을지 정말 궁금함. 근대화 이전, 특히 조선 왕실처럼 왕권이 탄탄한 국가에서 왕실 재산은 오늘날의 재벌가와도 비교가 안 되는 수준으로 많았을 겁니다. 오늘날로 치면 결혼할 때 펜트하우스 1채 받고 그 안을 다 최고급 가구와 가전으로 채우고 현금 20억 원 정도 가지고 간 수준이려나요... ㅎㅎ

  • @user-sw7jf5yr8l
    @user-sw7jf5yr8l 2 года назад

    조준 저리 올라가고 이성계가 다른 평양조씨들 오지게 죽여버렸지.. 도망가면 찾아내서까지 죽였지..

    • @chc5592
      @chc5592 2 года назад +1

      처음듣는 들어요. 어디서 나온 이야기인가요?

    • @user-sw7jf5yr8l
      @user-sw7jf5yr8l 2 года назад

      족보에 나오는 이야기..

    • @inyeobseo9369
      @inyeobseo9369 2 года назад

      1차 왕자의 난에 반발한 신덕왕후의 친척 조사의의 난을 말하나 봅니다. 조사의는 횡성 조씨임.

    • @user-sw7jf5yr8l
      @user-sw7jf5yr8l 2 года назад

      @@inyeobseo9369 먼소릴하는거임? 평양조씨 족보에 나온다니까

    • @chc5592
      @chc5592 2 года назад +1

      @@user-sw7jf5yr8l 저는 평양조씨 첨추공파 조충호입니다. 말씀하신 이야기는 처음 듣는건데 출처를 어디서 볼 수 있나요?

  • @HaJungWoo7
    @HaJungWoo7 2 года назад +1

    이방원이 자기딸과 근친까지 했다는게 사실인가요

    • @inyeobseo9369
      @inyeobseo9369 2 года назад

      태종은 그런 기록이 없고 연산군이 월산대군 부인 박씨, 휘숙옹주와 염문이 있는데 선물을 많이 내려 모함일 가능성이 큽니다. 세조가 덕종의 상중에 후궁 권귀인을 가까이 했다는 소문이 무오사화때 문제가 되었으나 가능성이 낮습니다. 양녕대군이 아들 서산군의 첩을 성폭행한게 가장 큰 근친입니다. 서산군이 충격을 받아 비행을 했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