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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가방TV
Южная Корея
Добавлен 27 июл 2020
중국 역사상 가장 잔인한 악녀 여태후, 여씨천하의 몰락과 참혹한 최후
한고조의 부인 여치, 여태후가 만든 여씨천하는 어떻게 순식간에 무너졌는가?
1. 유방이 남긴 비장의 숨은 한수 '백마지맹'
2. 여태후의 도륙계획과 역상의 반대
3. 백마지맹을 어기고 '여씨천하'를 만든 여태후
4. 여태후가 여씨 가문에 남긴 유언
5. '여씨천하'는 붕괴되고 여씨들의 참혹한 최후
1. 유방이 남긴 비장의 숨은 한수 '백마지맹'
2. 여태후의 도륙계획과 역상의 반대
3. 백마지맹을 어기고 '여씨천하'를 만든 여태후
4. 여태후가 여씨 가문에 남긴 유언
5. '여씨천하'는 붕괴되고 여씨들의 참혹한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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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의 품격, 간섭하지 않는다. 손권은 왜 노년에 판단력이 흐려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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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는 현군, 늙어서는 암군이 된 오나라의 손권 1. 리더의 인재활용 능력의 중요성 2. 손권의 미래를 예언한 관상가 유완 3. 장소의 반대에도손권을 선택한 손책 4. 내우외환에 리더가 된 19세 손권 5. 형의 친구 주유의 도움을 얻다 6. 노숙을 통한 장기비전을 얻다 7. 손권과 제갈근의 끈끈한 믿은 8. 주유와 육손을 통해 조조와 유비를 막다 9. 유장,유포, 황조가 버린 감녕을 활용하다 10. 여몽을 병사에서 장군으로 세우다 11. 노년에 노망으로 오나라를 기울이게 한 손권
삼국지 조비의 라이벌 조식, 절대권력 앞에서 형제간의 권력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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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의 3남 시인 조식 1. 삼국지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은 조식 2. 추락한 금수저의 삶을 살아내다 3. 왕자의 난과 패배자들의 삶 4. '7보시'를 지은 조식 5. 황제가 사는 궁궐과 백성들의 농막을 모두 목격한 조식의 삶
최후의 승자 사마의, 어떻게 진나라 창업자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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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와 사마의 1. 살얼음판의 정치인생을 산 사마의 2. 조예에게 대권을 위임 받은 사마의 3. 사마의 편에 선 유방과 손자 4. 오락가락했던 조예 5. 위나라의 권신에서 진나라 창업자가 된 사마의
제갈량의 선봉장, 그는 왜 반역자가 되었나? 반골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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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선봉장인 위연은 어떻게 반역자가 되었나? 1. 진수가 기록한 정사 속의 위연 2. 나관중이 드라마틱하게 그린 위연 3. 위연과 앙숙인 양의 4. 유파, 위연과 사이 나쁜 양의 5. 유비의 총애를 받은 위연 6. 나관중이 묘사한 위연 7. 성품보다 전공이 너무나 뛰어난 위연
삼국지연의. 400년 난세의 문을 열다, 군웅할거의 시작을 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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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적의 난 의미 1. 황건적의 난에서 비롯된 삼국시대 2. 400년 난세의 문을 연 황건적의 난 3. 장각 태평요술 책 3권을 얻다 4. 황건적의 난과 태평천국의 난 5. 36만명이 일어난 황건적의 난 6. 63대로 이어진 오두미교 7. 붉은색 한나라를 이은 노란색의 시대 8. 황건적의 난은 복권될 수 있겠는가
제갈량은 왜 5번이나 실패했을까? 북벌 추진을 멈출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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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탐한 제갈량 1. 충신의 대명사 제갈량 2. 유비와 유선이 바라존 제갈량 3. 야망이 사라진 유비의 아들 유선 4. 허수아비의 길을 선택한 유선 5. 제갈량보다 법정을 좋아한 유비 6. 제갈량을 견제한 유비 7. 황제 유선을 넘어서는 권력자 제갈량
몽골제국의 분열. 몽골에 투항한 이성계 가문, 쿠빌라이 칸의 특별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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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조선 건국과 만주의 웃치긴 가문 1. 원명교체기 명군의 북경 점령 2. 원나라의 방파제 나하추의 명나라 투항 3. 나하추 투항과 명의 대고려 강경책 4. 이성계의 4대조 목조 이안사 천호장에 임명 5. 칭기스칸의 막내동생 웃치긴의 분봉 6. 만주일대를 분봉받은 막내동생 웃치긴 7. 오고타이 칸 즉위식에서의 웃치긴 위상 8. 쿠빌라이를 지지한 웃치긴 가문 9. 7대 무종은 충선왕을 웃치긴 가문의 견제 도구로 사용 10. 원제국 멸망 명.조선 건국
유비의 비극, 민심은 왜 항전보다 투항을 선택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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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의 한계 1. 유비의 빛과 그림자 2. 출세지향적 인물 유비 3. 유비의 의리로 맺은 인간관계 4. 유비의 판단착오 5. 촉의 백성들은 유비에게 어떤 의미였나?
중국의 치욕 포로가 된 황제, 오이라트와 결사항전을 선포한 충신은 왜 처형 당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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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비운의 명장 우겸(1398~1457) 1. 토목보의 변을 진정시키고 탈문의 변으로 처형된 우겸 2. 영종의 이복동생 대종, 후계구도가 흔들리다 3. 탈문의 변, 핵심인물 서유정 원한을 품다 4. 우겸과 석형 원수지간이 되다 5. 환관 조길상을 믿고 우겸을 의심한 대종 6. 믿음을 주지 못한 대종, 권력을 되찾은 영종
명나라 황금기 인선의 치, 어떻게 멸망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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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인선의 치(1424 ~ 1435) 1. 명나라 황금기 인선의 치 2. 황제제도를 비판한 명말청조의 황종희 3. 주원장 - 주윤문 - 주체의 정권 교체 4. 주원장, 주체와 달리 부드러웠던 인종 5. 선정을 펼친 선종과 환관정치 6. 조선의 비극적 공녀
진나라 천하통일을 위한 비극의 주인공 상앙, 그는 왜 거열형 죽임을 당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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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상앙의 개혁 1. 진효공의 개혁과 상앙 2. 공숙좌의 인정과 위 혜왕의 무관심 3. 진효공을 설득한 상앙 4. 오가작통법을 만든 상앙 5. 상앙의 비극적 최후
최초의 황제 진시황. 460여 명의 유생들을 왜 매장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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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서갱유 1. 분서갱유, 진시황의 약점 2. 노장 왕전에게 고개숙인 진왕 정 3. 울료자의 책략을 받아들인 진왕 정 4. 이사의 건의를 받아 군현제 분서를 시행한 진시황 5. 유생들을 파묻어 공포정치를 펼친 진시황
성리학의 탄생, 송 유학의 첫 주자 주돈이 그는 왜 연꽃을 사랑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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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의 영웅 조조, 천자를 영접한 권신이 왜 서주 대학살로 명망이 실추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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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 황제의 최후, 철없는 황제의 쾌락은 어디까지 인가? 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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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벌 삼국지. 삼국지부터 근대사까지, 동탁과 원세개 사마의와 등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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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부터 마지막황제 푸의의 기구한 일생까지, 황제들의 시작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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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난징 대학살의 진상, 일본이 중국에서 저지른 가장 잔혹한 학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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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군벌들의 패권전쟁. 장제스는 왜 조선독립을 언급하였나? 위안스카이, 쑨원, 장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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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관동군, 만주국 도대체 어떻게 탄생하였나? 만주사변 세계최종전쟁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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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을 구금한 시안사건, 장학량은 애국자인가? 매국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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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최악의 배신자. 황제와 제국과 공화국을 배신한 그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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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중국과 일본에 배신 당한 만주족, 청나라는 왜 멸망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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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유목민족 최고의 책사, 누가 더 뛰어난 책사였나? 칭기스칸의 야율초재, 아골타의 양박, 거란의 한연휘, 흉노선우의 중행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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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고려거란전쟁, 현종 리더십의 그림자 분노한 무신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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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 나오는 드라마 제목 아세요?
ตอนที่ 07 | จอมใจจักรพรรดิ - Rule the World《独步天下》| (ถังอี้ซิน,หลินเฟิง,จางรุ่ย) | 【ซับไทย】 <독보천하> 검색해보시기 바랍니다.
👍👍👍👍
ㅎㅎㅎㅎ
권력농단 절대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역사를 정확하게 좀더 깊이 있게 아는것이 중요함을 다시한번 더 느끼네요. 영상 감사합니다~
권력이 주는 달콤한 향기에 취하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나올 것이고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이 진리라면 역사는 계속 조금은 변형된 모습으로 무한반복할 것이라 보여집니다.
권력 넘나 무서운 것... 현존하는 왕가들도 참 지금껏 생존해있는게 대단하네...
서양에선 권력은 '디모클레스의 검' 처럼 호화로워 보이지만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칼 밑에 있는 것으로 표현하였고, 동양에서는 권력을 잡은 것은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에 비유하였죠. 현재 중국과 러시아는 정치권력이 경제권력을 지배하는 사회다보니 알리바바의 마윈도 하루아침에 추락하고 러시아 올리가리키들도 하루 아침에 순번이 바뀌는 정치권력 우위의 사회이지만 미국은 현직 케네디 대통령이 백주대낮에 총에 맞아 죽어도 범인이 잡히지 않는 경제권력이 정치권력을 누르는 사회라고 보여지죠. 그래도 권력은 화려하고 달콤하기에 불빛을 찾아 달려드는 존재들로 과거에도 미래에도 불야성을 이루게 되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인간세상의 철칙이 아닌가 합니다.
@leetv5832 정치권력, 경제권력이 협동하는 정경유착의 나라 대한민국은 어떻다고 생각하세요? 이게 가장 이상적인 국가일까요? 참고로 동조선이라고 불려지는 일본은 정경유착의 대한민국과는 다르게 정치권력이 지배하는 국가 맞나요?
@@Snowflake_tv 세조의 제갈량으로 불렸던 양성지는 조선은 대가세족들이 있어서 간웅들이 감히 발호하지 못한다고 자랑스러워 하였습니다. 중국은 당요로부터 명나라까지 23번이나 왕조가 교체되었지만 양성지가 볼 때 조선은 영속적이라는 시각이었다는 것이 도이힐러의 <조상의 눈 아래서>에서 강조한 주장이었습니다. 이덕일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에서는 노론의 힘이 국왕마저 통제하였고 마지막 노론 당수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해방 이후 친일 청산에 실패하면서 그들이 이 사회를 이끌어나간다고 보았습니다. 기득권들의 입장에서는 '마태의 법칙'으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당연한 법칙으로 보여지지만 한국의 높은 자살율과 낮은 출산율을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언제까지 버티고 나갈지는 미지수입니다. 다른 외국의 전문가들은 경고를 하지만 국가 내의 엘리트들은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일본은 대표적인 세습사회이고 국회의원이 지역구를 세습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대한민국은 재벌그룹이나 대형교회는 세습이 당연시 되지만 아직 국회의원직은 세습이 어렵습니다. 불교국가인 고려는 중국이 원에서 명으로 교체되는 과정에 유교국가인 조선으로 변신하였고 명청교체기에 조선의 엘리트들은 대외적으로는 청에 복속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유일한 중화문명의 수호자로 유교질서를 더욱 강력하게 내면화하였습니다. 신문물로 무장한 일본세력이 쳐들어오자 조선왕조의 왕족들과 사대부들은 일본의 귀족질서에 편입되어 중추원 참의로 대표되는 일본지배질서에 편입되었고 그 노력이 이등박문의 장례식에 참석한 조선의 엘리트들입니다. 해방 이후에는 재빨리 미군정에 협력하면서 새로운 질서에 편입하였고 현 재벌 창업주 가운데 현대의 정주영을 제외하면 모두 일제와 연고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한국의 기득권들은 외부세력에 저항하면 체제유지자체가 어렵습니다. 앞으로도 미국과 중국의 헤게모니 갈등이 한반도와 일본의 운명에 중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과정에서 부상하는 세력과 몰락하는 세력이 등장하겠고 이승만의 몰락이나 박정희의 암살도 미국의 손바닥 안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대내변수보다는 대외변수가 더 의미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leetv5832 와 통찰력 공유에 감사드립니다!
지금 정부를 보세요. 그냥 이바타로 쫙깔았는데..
유시민이 명언을 남겼죠. A급이 책임자가 되면 다른 A급들로 조직을 채우지만, B급은 자신이 B급인 것을 감추려고 D급과 등외로 조직을 꽉 채운다는 어록을 남겼습니다.
누군가 너에게 반골의 상이라고 한다면 그 ㅈ같은 반역을 꼭 해줘라
<연의>에는 제갈량이 위연을 처음 보고 반골의 상이라며 죽이려고 하다 유비의 만류로 그만 두고 북벌 과정에서는 잘 사용하다 죽기 직전 앞으로 반란이 확실시되어 마대에게 비책을 맡겨서 결국 제거한다는 내용인데 <정사>에서는 진수는 위연이 양의하고 사이가 나쁜 것이지 반란을 일으킨 것은 아니라고 본다며 억울하게 죽은 것 같다고 변호하는 말을 <위연전> 마지막에 적었습니다. 어느 글에 보니 마속은 형주 출신으로 공명의 남만 정벌에 공을 세웠고 익주에서도 공명의 보좌관으로 출세하였습니다. 형주, 남만, 익주의 공통점이 물이 풍부한 곳이었습니다. 근데 가정은 진령산맥 너머의 중국 서북부로 물이 부족한 건조기후입니다. 마속은 식수가 필요한 상황을 접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마속에게 가정이라는 요충지를 맡긴 공명의 결정적인 실책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촉나라의 최영장군같은느낌
고려말 무패의 전공을 기록한 장수 2명이 최영과 이성계인데 이성계는 변방인 함경도 출신으로 개경에 연줄이 없다가 향처 한씨 부인 외에 경처 강씨 부인과 혼인하면서 개경 명문가들과 인맥을 형성하였지만 최영은 개경의 명문가인 동주 최씨 가문으로 부친 최원직은 사헌부간관을 지냈고 5대조는 집현전태학사를 지낸 최유청이라는 문신 집안 출신이었지만 무관의 길을 걸은 인물이었습니다. 공민왕의 아들 우왕의 왕비인 영비 최씨가 최영의 첩의 딸이었는데 우왕이 하도 졸라서 우왕의 장인이 된 가문으로 당대 누구에게도 당당한 가문출신이었지만 위연은 유비의 부곡병 출신으로 정규군도 아닌 사병 집단 출신의 낮은 신분 출신으로 개인적 전투 역량이 뛰어나 벼락 출세를 하였고 그러다보니 주변의 질시와 푸대접을 받았음. 당시 유비가 총애하던 문관 유파는 장비가 말을 걸어도 대꾸를 하지않아서 공명이 그러지 말라고 충고해도 내가 장비와 말을 나눌 수준인가 하며 거절할 정도로 문관들은 무신들을 낮게 보는 신분관념이 강하게 작동하던 시대임. <정사>에 관우, 장비, 위연 등은 아버지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던 낮은 가문의 인물이었지만 난세에 뛰어난 무공으로 이름을 남겼다고 보여집니다.
위연 실드를 이렇게 치네 자오곡계책은 유투브에서 검색만 해봐도 가능성이 얼마나 낮은지 알수 있고 계책을 거절한 총사령관 제갈에게 앙심을 가진다? 그자체가 반골상 맞음 결정적으로 제갈량 사후 철수 때도 잔도를 끊고 본대를 공격한것만 봐도 반역자 확정임 단지 제갈량과 관계가 안좋았다고 하기엔 능력에 비해 고평가된 사례라고 봄 선봉장으로서의 능력은 최상급이었으나 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은 의심받기 충분함
<정사 위연전>에 보면 위연은 양의가 자신과 선봉 부하들은 버리고 철군하려는 것을 알고 지나친 길에 불을 질러 다리를 끊었으며 위연과 양의가 각각 상대가 반역했다는 표를 올려 유선이 신하들에게 질문하니 장완과 동윤 모두 양의를 보증하였다고 진수는 기록하였음. 진수는 <위연전> 말미에 위연이 반역자가 아님을 특별히 강조하기도 하는 기록을 첨부하였음은 위연에게 억울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여짐. 공명의 북벌은 위와 촉의 국력을 비교한다면 모두 현실적으로 성공가능성이 희박하였고 사마의가 동생 사마부에 보낸 편지에서는 공명이 전쟁을 좋아하지만 내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그다지 두려워하지를 않고 있음. 후세의 평가도 자오곡 계책이 가장 초반에 위나라가 미처 대처하지 못했던 상황을 감안한다면 가장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 그나마 북벌을 안한다면 몰라도 현실적으로 강국인 위에게 기습작전을 벌이는 것이 실날같은 여지라도 있다고 보여짐. 유비는 사람을 볼 때 과거의 명성에 구애받지 않았고 위연, 왕평 모두 출신 신분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유비가 발탁한 인재이지만 맹달이나 마속과 같이 많이 배우고 말을 잘하지만 허풍이 많은 인물들은 저평가했지만 공명의 인물을 보는 안목은 맹달과 마속의 경우에서도 상대방의 신분을 감안하는 성향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공명이 촉을 다스리는 상황에서 매우 작은 일까지 자신이 직접 처리할 정도로 촉의 인재풀은 매우 협소했던 것으로 보여짐. 위연은 부곡병 출신인데 당시 가장 천한 신분의 하나에 속했지만 유비는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장비 대신에 임명하며 중용되었지만 유비가 죽으면서 자신을 믿어주는 상사가 사라지면서 비극의 주인공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됨. 전투력은 막강한데 통제가 잘안되면 두려운 존재가 되버림. 벼가 논에 있으면 양곡이지만 다른 곳에서 자라면 잡초 취급을 받고 불태워지는 것은 아닌가함.
경쟁에서 밀리면 털리는 거죠.. !!
제갈량은 죽음이 가까와 오자 자신이 사라진 이후 촉한에서 위연을 누구도 통제할 수 없다고 봤고, 위연과 양의의 힘을 빼고 장완에게 촉한의 운영을 맡긴 것으로 보여집니다.
억까를 당한 거지... 촉이 망할만 했음.
'촉한에 대장이 없으니 요화가 선봉에 선다'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촉한에 쓸만한 장수가 없었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강유, 왕평 모두 위나라에서 투항한 장수였죠. 어쩌면 공명은 뒤끝이 있는 리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위연 네가 감히 내 작전을 갖고 뒷담화를 하냐? "
자오곡 계책을 낼때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제갈량이 겁이 너무 많아 내 재주가 다 쓰이지 못 하는구나." 라고 떠들었다죠😂
@@원펀만 예, 위연의 작전이 가치는 있지만 군대에서 위험한 하극상의 발언이겠죠. 무능한 장수는 적군에 의하여 죽고, 유능한 장수는 아군에 의하여 죽는 사례가 역사에는 너무나 많이 나타나죠.
위연의 경우 그냥 출신성분이 미천해서 벌어진 비극이라고 보여집니다. 왕평과 같이 제대로된 인재였으나, 쓰임을 제대로 쓰이지 못했죠.
위연 입장에서 생각하면 억울하다고 생각할 만합니다. 촉한의 최고 맹장으로 전투력 최강인데 공명이 죽자마자 덫에 빠져 양의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위연이 처음 제시한 자오곡 계책도 후대의 전략가들에게 최초의 북벌에서 위가 경계하지 않았던 호기에 해볼만한 작전이라고 평가되지만 공명은 그런 불확살한 전략을 기피하였죠. 옛날이나 지금이나 직속 상사를 잘만나야 출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가진 용병술에 비해 성격적 결함이 있었던 아까운 인재 ...그래서 그런지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는 아예 인디안 추장 느낌의 가면을 쓰고 말더듬이 캐릭터로 나오곤 했었죠 ㅜㅜ
위연은 유비의 부곡병이라는 낮은 신분에서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벼락 출세를 하며 능력을 인정받았죠. 위연, 왕평, 등지는 유비에게 인정받아 파격적으로 승진이 된 인물입니다. 왕평도 글자를 모르는 투항한 장수였지만 촉한에서 인정받는 장수가 되었습니다. 제갈량은 지식인 출신들만 총애하는 경향이 있었죠. 성격도 차분한 인물만 선호했구요. 부하들의 능력을 개발해주기보다는 비단주머니에 지시사항을 주면서 자신의 명령만을 수동적으로 수행하는 판단능력없는 허수아비 부하들로 만든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17살에 즉위한 유선에게도 실무능력을 개발할 기회를 주지않았지만 역사는 제갈량을 만고의 충신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낙상지=명나라판 밴 플리트
제갈량은 거품인게 적벽(주유) 입촉(방통>법정) 한중(법정)에서 전략을 짠게 1도 없습니다 국력차이로 장기전이 절대 불리함에도 정공법을 택하고 가정은 본대가 와서야 막을 수 있는 허허벌판이라 마속이 산으로 올라간건 시간끌기 전략으로 할 수 있는게 그것 뿐이었죠 그마저도 제갈량 본대 도착이 늦어 전멸한겁니다
사마의가 제갈량이 후퇴한 오장원의 진영을 살펴보고 천하의 기재라고 평가했다고 알려졌지만 그 이전 진중에서 동생 사마부에 보낸 서한에는 제갈량은 병사를 움직이는 것은 좋아하지만 임기응변에 능하지 못해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자신하였습니다. 당시 제갈량은 촉에서 황제 이하 누구의 눈치도 보는 입장이 아니었지만 사마의는 전선에서는 제갈량을 대적하면서 후방에서 황제와 자신을 질시하는 위나라 귀족들의 견제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했습니다. 제갈량과의 대치 국면을 끌어가면서 위나라에서 자신의 입지를 높이려는 커다란 전략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당시 대세는 누구나 언젠가는 위나라가 천하를 통일할 것이라고 예측했고 제갈량도 그 점을 인정했기에 초조하게 여기면서 어쩌면 무의미한 북벌을 진행한 것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힘들었던 것은 항상 전쟁준비에 몰두해야 했을 촉의 백성들이 아니었을까요?
이게 다 관우 때문이죠 아닌가 공이 없어도 가절을 줘서 공을 부추긴 유비 잘못일지도ㅋㅋㅋ
관우, 장비는 만인지적이라고 조조 휘하의 참모들이 인정할 정도로 무공이 뛰어났지만 오만한 성격으로 지휘관으로는 문제가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런 관우를 요충지인 형주 책임자로 맡겨 결국 위와 오의 협공으로 천하3분지계의 핵심지역인 형주를 빼았겼죠. 하지만 역대 중국의 모든 왕조는 관우 우상화에 진심이었습니다. 한족 왕조이건 북방 이민족 왕조이건 관우를 통해 왕조에 대한 충성을 유도했죠. 지금 성도에 남아있는 삼국지 유적들은 대부분 청나라 황실에서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피지배민족인 한족 민중들의 열망을 달래가면서 지배하려는 생각이었다고 평가하죠. 유비, 관우, 장비가 우상화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삼국지연의. 400년 난세의 문을 연 사람은 나관중!
나관중의 업적은 유비, 공명, 관우, 장비, 조자룡은 착한 능력자로 조조는 간웅으로 그리면서 정사에서 하늘이 낸 장수라는 평가를 받았던 조인을 찌질한 장수로 만들고 적벽대전의 영웅 주유를 공명을 시기 질투하는 찌질한 지휘관으로 만들고 말았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사에 초선관을 관리한 여인이라는 구절 하나를 부풀려서 여포와 동탁을 이간질시키고 주인공으로 캐스팅하여 중국 4대 미인의 하나로 등극시키는 놀라운 글솜씨를 발휘한 소설가였지만 반면 관우의 오관참장에서 드러나듯 중국 전체의 지리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진수의 <삼국지>는 위를 정통으로 하면서 촉서, 오서의 순서로 편찬되었지만 나관중이 유비는 선, 조조는 악으로 재편성하였죠. 이후 일본의 요시카와 에이지가 중일전쟁(1939~1943) 와중에 삼국지를 마이니치 신문에 연재하면서 조조를 영웅으로 격상시키며 일본군의 남경대학살도 조조의 서주대학살처럼 불가피하다는 시각으로 넘어갔다고 합니다. 이후 편찬된 삼국지들은 요시카와 삼국지를 밑바닥에 깔고 스토리를 진행해가다가 근래에 와서야 이문열, 황석영, 장정일 삼국지 등 비슷하지만 새로운 삼국지 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지 않았나 보여집니다.
제갈량 이녀석, 내 고추 빌려가서 대통령됨.
당 은 선비족 이다. 당이 한족 ㅎㅎㅎㅎ
당의 이씨는 수의 양씨와 혼인관계로 얽혀있으며 북위의 한화정책이후 호한연합정권으로 볼 수 있어 청나라 고증학자 조익과 중국 역사학자 진인격이 관농집단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당은 스스로 한족이라고 주장하였고 도교의 창시자 노자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면서 기존의 불교보다는 도교를 장려하였으며 고구려에 도사를 파견하기도 하였고 훗날 몽골족과 만주족이 한화를 경계하며 한족을 탄압한 것과는 달리 스스로의 정체성을 한족으로 설정하였기에 원, 청과 같이 정복왕조로 분류하지 않고있습니다.
제갈량은 충분히 휼륭한 인물임. 인사 행정이 평시에 전쟁 보다 더 중요한 능력치고 그 토대가 기반에 돼서 전쟁을 하는 거여~ 문제는 전쟁에 관련 된 경험 부족이 가장 컸지 그런데도 북벌을 보면 점점 능력치가 성장해 가는게 예사롭지 않음 아마 경험만 충분했음 좋은 군제 능력을 가지지 않았을까 추측 해 봄. 그리고 위연 자오곡 계책 이딴 건 말이 안되는 전략임. 해 보지 않고 어떻게 아냐? 그냥 삼국지 좀만 알려고 뭐 좀 읽어 본 사람이면 다 아는 사살임. 아무리 뭐 아니면 도여도 그건 사실상 불가능 했던 작전이고 장안 다이렉트 뛰는게 전략적으로 얼마나 리스크를 앉고 가야 하는 건지 대부분 삼국지 관심있는 사람들은 다 알걸 ~ 제갈량처럼 완벽을 추구하며 신중하게 했던 북벌이 초반에 더 효율있던 건 당연한 사실임
제갈량이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 높은 평가를 받고 있고 받을만한 능력자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통념과는 다르게 유비는 제갈량을 전적으로 신임하기 보다는 견제와 균형을 추구하였고 유선은 현실을 인정하고 자신은 조용히 뒷전에서 침묵하며 눈치나 보고 살았다는 것도 사실로 보입니다. 제갈량이 충성을 절대시하는 시대의 지식인으로 한실부흥을 추구한 것도 이해는 가는데 <삼국지연의>와는 달리 <정사 삼국지 위연전>에는 진수가 나서서 위연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아니라는 변명을 해주는 마무리를 보면서 위연의 일족은 모두 죽임을 당했지만 위연이 조금 억울하겠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위연은 <삼국지연의>에서 처럼 촉에 항복한 장수가 아니라 유비의 부곡병 출신이고 유비가 발탁하여 촉의 수도방위사령관에 임명할 정도로 유비의 신임을 받은 인물인데 반란군이라는 비판과 함께 일족이 처형된 인물이었고 당시 촉이 가장 의지하는 최고의 맹장이었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이 너무 높았는데 비하여 주변과 원만하지 않은 관계를 형성하다보니 같은 편이 없는 인물로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인데 위연 입장에서는 충분히 부당한 평가라고 생각할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제갈량이란 캐릭터가 삼국지 연의라는 창작을 통해 부풀려진 건 영락없는 사실입니다. 소설 연의가 지어진 시점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해야겠지요.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었을까? 선황에게 유지를 물려받았다는 자부심, 아비와 너무나 비교되는 못난 후계, 한중 공방전이 이후 갑작스레 삭제되다시피한 계한의 인재풀, 본인 스스로 모든걸 할 수 밖에 없다는 그 자격지심에 이엄 같은 탁고 대신 배제하고, 형주 출신 호족이 아니면 홀대하고, 본인과 성향이 다른 위연을 중용하면서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사회생활하다보면 만나는 본인의 기준이 너무 확고해서 부하직원 조언 모두 무시하고 혼자 닥돌하는 꼰대 부장같은 사람이었던 듯
제갈량 말년에 문관으로는 양의, 무관으로는 위연을 중용했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었습니다. 오나라 손권이 걱정을 했다는 기록이 등장하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제갈량이 죽자마자 두 인물은 죽임을 당하고 마는데 진수의 정사 <위연전>에도 위연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는 진수의 평가가 등장합니다. 공명은 자신이 죽으면 위연이 자신이 총사령관이 되어 계속 북벌을 진행할 것을 예상하고 대비책을 세워둔 것이고 <양의전>에는 양의가 비의에게 불만을 토로했다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촉은 공명이 죽자마자 2인자들이 사라지고 안정적 성향의 인물이 요직에 등용되는 것인데, 제갈량의 관점이 과연 옳았는지는 의심하게 되었고 과연 제갈량이 무오류의 선택을 이어갔는지는 결과상으로 볼 때 재평가가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들게됩니다.
관우의 오만으로 형주를 상실하고 유비의 독선으로 수십만을 효정숲 에서 태워죽였을때 이미 촉의 운명은 결정되었다고 봐야겠지.... 오히려 제갈량이란 칱키가 있었기에 그의 생존시 공세적 방어를 했다라고 보는게 옳지 않을까??
제갈량이 융중대에서 유비에게 제안한 3분지계에는 형주와 익주 2군데로 위나라를 공격하자는 청사진이었는데 관우가 형주를 빼았겼고, 이릉대전에서 촉과 오가 싸우면서 사실상 위를 공격해서 이기는 작전은 무산되었다고 보여집니다. 촉의 백성들은 타지 사람인 유선을 황제로 모시면서 북벌을 외치는 공명을 승상의 명령대로 전시동원체제를 유지하였는데 과연 그것이 익주에서 대대로 살아온 백성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지 위와 오의 지식인들과 백성들이 얼마나 그 주장에 공감했을지는 잘모르겠습니다.
욕심은 끝은 존망!
후한 말기 한실 부흥이라는 이념은 유비와 촉한의 정치적 슬로건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통일한 진나라가 가남풍의 전횡으로 혼란에 휩싸이다 북방민족의 침략으로 동진으로 쫓겨가면서 중원은 수나라가 재통일하기까지 400년간의 혼란을 겪으면서 한나라라는 한족 정권에 대한 향수가 새로워졌을 것입니다. 더구나 송나라이후 거란, 여진, 몽골족에게 시달리다 명나라로 다시 한족 정권을 세우자 어쩌면 익주의 궁벽한 변방에서 천하통일의 시대흐름에 어긋나는 백일몽을 꿈꾸었던 촉한의 이야기가 한족들의 심금을 울리고 사실과는 다른 <삼국지연의>라는 환타지 문학으로 부활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제갈량 = 중국의 아지태
나관중이 과도하게 제갈량을 신격화하는 것은 수정해야 겠지만 아지태 수준으로 격하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갈량을 권력을 탐한 사람으로 묘사하시는데 그건 좀.. 그런 사람들은 권력을 잡고 보상심리 때문에 사익을 추구하기 마련인데 제갈량은 죽기 직전까지 검소했고 본인의 책무에도 최선을 다한 사람입니다. 죽은 원인도 과로사구요. 그리고 전략이나 전쟁부분은 저도 의문이지만 내치나 외교는 상당히 잘 했다는건 인정해야 합니다. 관우의 죽음과 유비의 이릉대전 패배로 국력 대부분을 날려먹은 나라를 단기간에 위나라에게 선제공격 할 정도로 키워낸건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넘어서 전략부분까지 추켜세워서 아주 신으로 만들려는 촉빠는 저도 극혐이지만 그렇다고 대책없이 깎아내리는것 역시 바람직한건 아닌것 같습니다. 제갈량은 충분히 위대했던 재상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제갈량 사후 유선이 사당 짓는걸 안한건 유선 입장에선 당연합니다. 자신이 아닌 죽은 이를 그렇게 추앙받게 만드는건 본인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행위라서 고대 시대 제왕들이 모두 꺼리는 일입니다. 최소한 유선은 정치가 무엇인지는 아는 인물이었다는거죠.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갈량은 <출사표>에도 언급한 것처럼 부정축재도 하지 않았고 늦동이로 태어난 아들도 제갈량 사후 충성을 다해 충신으로서의 죽음을 맞이 하였습니다. 제갈량이 유선을 몰아내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어렵지 않았을 것이지만 죽는 날까지 사마의처럼 고평릉의 난을 일으키는 행동도 없었습니다. <후출사표>에 나온 표현처럼 '국궁진췌, 사이후이'에 걸맞는 생활을 하였던 것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제갈량이 당대 최고의 인재임은 당대 누구나 인정했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제갈량이 너무나 많은 관직을 독점한 것은 기이한 일입니다. 흔히 아프리카 독재자들이 장관과 군대 장군을 여러 자리 겸임해서 웃음거리가 되었던 것처럼 당대 충성을 강조하던 제갈량이 수많은 관직을 독점한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제갈량의 사신을 만난 사마의가 사자와의 대화를 통해 제갈량이 대소사를 모두 전결하면서 식사량이 너무나 적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제갈량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자신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중소기업 사장에 적합한 자세를 일국의 승상이 보여준다는 것은 제갈량이 총명한 인물이지만 지혜롭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세도 그런 행동을 하다 아내 십보라의 아버지인 이드로가 중간관리자를 세우라는 말을 듣고 이에 따르는 사례를 보여줍니다. 제갈량에게 충고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충고를 들어도 제갈량은 남의 말을 듣기보다는 자기 확신이 강했습니다. 제갈량은 왜 당대 최고의 권력자 조조에게 가지 않았을까요? 대부분 서주 대학살 시절에 제갈량이 서주에서 그 참상을 목격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제갈량은 왜 형인 제갈근이 있는 오나라에는 왜 가지 않았던 것일까요? 오나라는 주군인 손견, 손책, 손권 가문을 우습게 아는 오의 4대 명문가를 비롯한 대호족들의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제갈근과 손권이 친밀한 것은 제갈근이 대호족이 아니었기에 이러한 주군의 고민을 상담할 수 있었지만 제갈근의 아들 제갈각이 총명만을 믿고 그 선을 넘으려는 것의 위험성을 살아생전 제갈근이 경계했다고 합니다. 손권은 젊은 시절에는 호족들을 참고 참다가 늙어서는 마침내 그 감정을 폭발한 것이 '이궁의 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갈량은 오나라에서는 절대권력을 행사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제갈량은 자신이 거주하는 형주의 유표에게 미래를 걸기 보다는 오히려 객장에 불과한 유비에게 자신의 미래를 걸었습니다. 유비는 제갈량의 보좌로 기반을 잡아나갔지만 촉을 차지하고 나서는 자수성가한 중소기업 사장 마인드를 보여주었습니다. 장예를 죽이려 하자 제갈량이 말렸지만 향기나는 난초도 문 앞에 있으면 베어버릴 수 밖에 없다며 참수하였습니다. 과거 자신을 놀린 것도 주요한 이유였습니다. 유비는 전쟁 중에는 방통과 법정과 더불어 작전을 논의했습니다. 제갈량이 군권을 장악한 것은 유비가 죽은 이후부터이지만 요즘 출판된 사마의 관련 서적에서는 사마의는 제갈량의 북벌에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촉의 1차 북벌 당시 맹달의 반란을 예견한 사마의는 그 이후의 전투에서도 전쟁에 관해서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보여줍니다. 요동의 공손씨 반란을 진압할 수 있겠느냐는 조예의 질문에 가는데 1달, 싸우는데 1달, 돌아오는데 1달로 충분하다고 대답합니다. 어쩌면 촉한이라는 변방의 작은 변수를 나관중이 유비, 관우, 장비를 강조하느라 너무 부각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갈량은 재물과 여색에 있어서는 아주 담백했었다고 합니다. 프랑스 대혁명의 과격파 로베스피에로를 정적들이 죽인 뒤 부정축재로 몰아갈려고 재산을 조사하니 변호사였던 그가 재산이 너무나 적어서 놀랐다고 합니다. 제갈량과 그의 후손들의 삶은 담백했습니다. 하지만 제갈량은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처리해야 하는 강박적인 성격이었음도 틀림없었다고 보여집니다. 고려대 홍윤기 교수의 2017년 논문 <출사표에 나타나는 제갈량의 독재 정치>를 참고하였음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전략도 행정전문가답게 일단 틀을 완벽하게 만들어놓고 하나하나 해결하는 스타일 전쟁을 못한다라기 보다는 행정방식을 싸움에 도입한 신패러다임이었으나 주변 조건이 불충분했음
제갈량이 열악한 촉의 국력에도 불구하고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신념을 가지고 북벌을 추진한 것은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국력에서 너무 차이가 나는 여건이었습니다. 제갈량과 촉의 법률인 촉과를 제정한 유파도 유비를 피해다니던 인물인데 촉에 붙잡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촉의 관리로 봉사했습니다. 장비조차도 무시하여 제갈량이 충고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갈량이 오나라나 위나라를 선택했다면 그정도 전권을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터이니 제갈량도 어쩔 수 없지않았나 생각합니다.
@@leetv5832 이릉대전때 죽은 고위급관리가 300명정도인데 그 사람들이 죽지 않았다면 온전히 북벌에 집중할수 있었을텐데 아쉬워요
@@mansubrotherman9680 진(秦) 나라 목공은 낙후된 진나라를 개혁하여 동서로 국경을 확장시킨 유능한 군주로 유능한 신하 백리해와 건숙을 발탁하고 유여를 등용시킨 명군으로 인정받은 인물인데 죽으면서 (B.C. 621) 당시 진나라 풍습에 따라 117명을 순장하였습니다. 유능한 신하들도 관례에 따라 순장당하다보니 진나라가 갑자기 국세가 기울어졌다고 하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유비는 젊은 시절에 감찰나온 독우를 구타하는 모습부터 한성질이 하는 타입인데 너무나 인자한 모습으로 묘사되다 몇 차례 상식을 벗어나는 장면이 등장하곤 합니다.
나관중이가 일종의 소설가로서 선을 넘은 건, 소설가로서의 재능인 재밌는 이야기를 지어내서 덧 붙이는 것도 아니고, 역사 속의 실재하던 타인들의 실제 전공들을 빼앗아 자신이 거품을 한창 치던 중인 제갈량과 관우에게 붙인 것.
한족은 송나라의 문치주의로 무장들이 약화되면서 거란, 여진, 몽골에게 시달림을 당하여 결국 남송이 멸망하고 북방민족의 지배를 당했습니다. 괴롭힘을 당하던 한족은 주원장의 명나라가 원을 몰아내면서 한족 정권을 수립합니다. 당시 시대분위기는 한족 국뽕이 절정이던 시기여서 민중들에게 인기있던 삼국지이야기도 그런 정서에 맞추어 스토리가 달라집니다. 원나라 시절 <삼국지평화>에서는 장비의 비중이 높았었는데 명나라 이후 관우가 제후, 왕, 황제에 이어 천상계로 진출하여 신으로 격상되었는데 이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명나라의 그러한 분위기는 임진왜란을 통하여 선조 시절 관우의 관동묘가 조선 각지에 설치되면서 관우 신앙이 조선에도 퍼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족 민족주의 열기에 의하여 실제 역사와 스토리가 너무가 달라진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보다는 팩트를 찾아가면서 역사적 교훈을 얻어가는 것이 소설에 심취하는 것보다는 더 의미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삼국지에서는 조인이 삼국지연의 관우 포지션이였고, 관우가 삼국지연의 조인포지션이였음.
@@한도경-n2i 정사에서는 조인을 진교가 말한 '하늘이 내린 장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강릉 전투에서 주유가 수만의 병사로 쳐들어오자 우금에게 3백 군사로 싸우도록 했습니다. 오군에 의해 포위되자 조인은 진교가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기병 수십 기를 거느리고 공격하여 우금을 탈출시켰습니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병사들이 있음을 발견한 조인은 돌이켜 나머지 병사들도 구하려고 포위망을 뚫자 놀란 오군은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진교는 조인을 하늘이 내린 장수라 극찬했고 삼군이 조인의 용맹에 탄복했다고 합니다. 역사서에는 조인을 평가하여 그의 용맹은 고대 맹분과 하육도 미칠 수 없으며 조조의 맹장 장료도 조인에게는 견주지 못한다고 비교하였습니다.
한고조 유방처럼 천하 인재들이 모였음 모를까.. 제갈량 옆에는 위연정도 말고는 s급이 없었음
당시 촉의 명장이라 불리는 왕평도 투항해온 장수이고 제갈량이 가장 아끼는 장수인 강유도 위의 장수였다가 넘어온 전력을 생각해보면 변방인 익주에서 장군감으로 활용할 무장들이 얼마나 위와 오나라에 비하면 열악했을지 짐작이 됩니다. 유선의 신하 중에서 유일하게 초주만이 항복을 말했지만 이미 촉의 바닥 민심은 오랜 전쟁준비로 피로감이 높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릉대전때 다 죽거나 투항함 황권같은
@@leetv5832 그래서 1차 북벌 실패가 치명적이었죠
@@너이이-u3l 촉한을 세운 주역도 유비고, 촉한을 망쳐놓은 주역도 유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고집불통 유비
@@모과라이스 진수의 <정사 삼국지>의 위연전에는 한신의 사례를 따라 기습할 것을 건의했지만 제갈량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기록했습니다. 가정 전투에서 유비가 그렇게 경계하라고 했던 마속을 세운 책임자도 제갈량이었습니다. 진수는 별다른 비평을 하지 않았지만 후대로 갈수록 자오도로 기습하자는 위연의 제안은 해볼만하지 않았나 하는 평가가 있습니다. 혹시 잘못되었다면 제갈량 생전에 촉한이 망했을수도 있겠지만 힘이 열배가 넘는 나라를 정정당당한 정공법으로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여집니다.
나관중이 제갈량을 마법사로 각색해놓았음. 무결점의 신으로 만들었음. 즉 제갈량은 정치력 만렙의 우수한 행정가였지 한신처럼 군재가 특출난 국사무쌍은 아니었음
원나라에서 태어나 몽골족의 지배를 체험한 나관중과 명나라 사람들의 분위기는 한족 민족주의의 열광적이었을 것입니다. 삼국시대 이후 진나라가 북방의 오랑캐로 불리는 5호에게 밀려나 동진으로 쫓겨나서 수나라가 통일하기까지 400년이 걸렸고 송나라도 거란, 여진, 몽골족에게 시달린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한고조가 한나라를 세웠고 광무제 유수가 후한을 세웠듯이 유비가 촉한을 성공시켰으면 하는 바람이 위, 촉, 오 3국중 가장 열악한 촉의 유관장 3형제와 제갈량을 실제보다 과도하게 우상화시키는 정신승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여집니다. 제3자인 우리로서는 거품을 빼고 실제 역사적 전개를 통하여 배울 것은 배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비록 본인이 군사전문가는 아니나 그것을 배우고 노력해서 나가서 활로를 뚫기 위해 할수 있는건 다 하자가 당시의 제갈량 마음이었을듯.
제갈량이 5차에 걸쳐서 북벌을 시도했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았던 것은 처음 1차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위연이 주장한 자오도로 기습하는 것은 위험성이 높은 반면에 위나라의 허를 찔러 예상치 못한 효과를 거둘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험을 싫어하는 제갈량의 성향상 받아들이기 어려운 작전이었고, 기대했던 마속이 형편없는 작전으로 가정을 빼았기면서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2차에는 진창성의 학소가 버티면서 시간을 잡아먹었고, 3차 때는 위나라 40만 대군을 막아내는 수비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4차때는 병력이 월등한 사마의가 지휘부를 구성하고 수비로 나서는 한 승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5차 오장원에서 결국 결론이 나는데 촉의 익주는 진령산맥 등의 지형상 방어하기가 좋은 만큼 밖으로 나가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제갈량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죽으면 촉의 형세는 곧 위나라에 흡수될 것이 분명하기에 살아있는 동안에 위를 멸망시키려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촉의 백성들의 입장에서 중앙에서 파견된 유장과 유장을 몰아내고 유비, 유비 아들 유선 3대 동안 익주에서 중국을 정복하겠다며 전시체제를 이어가는 병영국가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의 고생도 이만저만 여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갈량이 촉의 비단산업을 진흥시켜 위나라에서도 귀족층의 필수품이 되어 촉의 재정을 풍족하게 만들었다고 하였지만 전체적으로는 대만이 대륙을 쳐들어가겠다는 야망처럼 현실성은 지극히 떨어진다고 보여집니다. 대부분의 삼국지 판본들이 제갈량이 죽으면서 마무리 짓는 것은 뒷역사는 이어지겠지만 유방의 한나라를 후한 광무제가 후한으로 이어가는 기적이 촉한에서는 무산되었다는 점에서 실날같은 기대감을 버리게 되는 것이고 남은 등장인물로는 긴장감을 유지시켜가며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어렵기 때문으로 보여집니다.
@@leetv5832 그래서결국 제갈량은 실패했다......제갈량 이름값만 높여놨지
@@사랑해-2007Love 어쩌면 제갈량은 북벌이 결국에는 실패할 것임을 알면서도 계속 시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leetv5832 화양국지랑 후대의 다른 지리지.. 그리고 여러 주석 등등 까지 참고해서 보면.. 지 말고는 해낼 사람이 없다라고 판단했다기 보다... 제갈량 집권기시절의 촉은 건위, 강양 이남 이민족들에 대한 유지군과 대 사섭 방어 전력을 메인 전선으로 보지 않는다면... 대위 전선 하나만 존재해 전력을 오롯이 다 퍼부을 수 있는 상대적 잇점이 있었죠.. 위는 조비, 조예 때까지도 대오, 대촉 말고도 북방 이민족에 대한 경계를 완전 다 풀 수 없던 시절이였습니다.. 조예대 이후부터 독발수기능의 난 터지기 전까지를 보면 남흉노, 선비, 오환 등등 대부분이 인질 보내고 입조하는 형태로 정리된 외교라인을 조직하게 됨... 사마소가 대촉정벌전 벌일 때 병주등에서 병력을 차출한 기록도 남아있고요.. 거기다가 원술 이후 초토화 됐던 회남과 대학살 이후의 서주까지 생산력이 회복되기 시작하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국력은 더 벌어지는 게 자명하니... 가능한 한 서둘러야 한다... 라는 판단을 했다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일 겁니다...
@@아이돈노우-b9f 명제 조예 시절 관구검이 요동 정벌에 실패한 뒤에 사마의가 나서서 3달만에 요동에 경관을 세우는 장면이 생각나네요. 삼국시대에 비하면 현재 중국은 엄청나게 영토가 넓어졌죠. 촉은 형주세력, 동주세력, 익주토착세력과 서량세력 등 4세력이 중심축인데 당시 2인자인 위연은 용맹은 가장 뛰어나지만 성격이 독고다이하는 기질이라 제갈량의 시각으로는 맡기기에 불안불안했다고 합니다. 결국 제갈량 오른팔, 왼팔이었던 위연과 양의는 제갈량이 죽자마자 모두 사라지고 제갈량의 후임자들은 모두 차분한 성격의 인물들로 채워졌고 무난하게 있다 무난하게 망했고, 성품에 관계없이 능력위주의 인사를 펼쳤던 조조의 위나라는 결국 능력이 탁월하고 낭고의 상이었던 사마의 일파에게 나라가 넘어가는 것은 결국 창업 이후의 인사정책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제갈량은 군사전략가가 아니라 행정전문가이고 그래서 방통이 죽지 않고 법정이 오래 살고 이릉대전때 황권이 불가피하게 위에 항복하지 않고 그대로 익주에 남아 있었다면 북벌성공 가능성이 있었을텐데 익주는 나가서 싸우기엔 불리하고 물러서 지키기엔 유리한 지형인데다가 병력.군량보급 그를 지휘할 인재가 턱없이 작았음 이엄도 탁고대신으로써 어느정도 병법에 밝고 무예도. 출중했다고 하는데 유비 사후 제갈량 권력 욕심에 밀려나서 재능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견제만 받다가 끝났으니 일을 맡길 인재가 부족한것도 있으나 자기 권력을 뺏길까 다 경쟁상대로 보였겠죠 우리가 아는 제갈량의 모습은 나씨 아저씨가 만들어낸 허상일뿐입니다
통일신라에 인재들이 경주로 모이고, 고려시대에는 개경에, 조선시대 이후로는 한양에 모였듯이 당시 후한의 인재들은 낙양 주변에 운집했습니다. 조조에게 대항한 순욱이 죽은 이유가 위나라 조정의 인재들이 대부분 순욱의 연줄로 줄줄이 들어온 사람들인데 순욱이 삐딱하게 나가면 골치아프기에 순욱이 조용히 죽어주길 원했을 정도였고 순욱이 죽은 이후에 순욱의 후손이나 인맥은 조금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너무 덩치가 큰 엘리트 집단이었다고 보여집니다. 제갈공명의 젊은 시절의 인맥은 촉으로 향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형주에 있다가 위나라 백성이 되었고 관료가 되었다는 것은 제갈량의 한실중흥이라는 이념이 형주 지식인들에게도 절실한 구호는 아니었다고 보여집니다. 처가인 황승언 인맥도 누나들이 시집간 방씨 집안도 그대로 형주에 남아있었습니다. 어차피 익주는 중국 지식인들이 보기에 너무나 궁벽한 시골로 보여집니다. 제갈량이 출사표에서 유선에게 추천한 인재들은 내조관 5명과 외조관 2명입니다. 시중 곽유지, 중부독 상총, 상서령 진진, 승상참군 장완은 모두 제갈량의 출신인 형주에서 익주로 넘어온 사람들입니다. 시중 비의, 시랑 동윤, 류부장사 장예는 유장을 따라 익주로 들어온 동주 집단 출신 가운데 형주 출신과 사이가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갈량이 훗날 자신과 같이 동문수학한 학우들이 위나라에서 낮은 벼슬에 머물렀던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위나라에는 인재풀이 차고도 넘쳤지만 제갈량이 있는 촉의 익주는 변방이라 그다지 변변한 인재들이 부족했다고 보여집니다. 장개석이 모택동에게 패하여 대만으로 갔을 때 대만 출신들을 신뢰할 수 없는 사이이면서 대륙 출신보다 아무래도 수준이 떨어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여집니다. 제갈량이 노력을 많이 했겠지만 고려 역사에서 삼별초가 진도에 가서 진도와 제주도에서 새로운 왕족을 추대하고 독립을 선언하여도 원나라 군대도 포함되었지만 변방에서 노력해도 한계가 존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전지전능한 지략가의 모습은 팩트가 아닙니다. 나작가님이 다 창작한 캐릭터죠. 유비 생전 정사에서 모습은 유비가 전쟁에 나가면 내정과 행정, 병참과 군량 보급 등의 후방 지원을 담당하는 분야의 행정 전문가였으니까요. 당연히 유관장 사망 후 야전 지휘 경험이 없는 자가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는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됩니다. 그게 삼국 중에 인재풀이 작은 촉의 한계죠. 영상 설명 감사드립니다 ^^
<세설신어>에서는 당시 제갈가문의 촉의 제갈량, 오의 제갈근, 위의 제갈탄을 평가하면서 "촉은 용을 얻었고, 오는 호랑이를 얻었으며, 위는 개를 얻었다."고 평가했다고 전합니다. 순욱 가문이 조조와 원소로 나누어 출사하듯이 제갈량과 제갈근도 위험분산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제갈가문 출신들이 3국에서 다 출세한 것은 출중한 능력이 전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삼국지>와 <삼국지연의>를 비교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교훈들이 혹시 윤색되어 가공된 진실이 아닌가 하는 궁금증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갈대와 같은데 파편처럼 전해지는 역사의 조각들 속에서 진실은 무엇일지 해결되지 못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관우가 우상화되어 신격화되었듯이 제갈량도 인간계와 천상계 사이에서 오가는 신선같은 존재로 보여지는데 당대의 현실은 과연 어떠한 모습이었을지 좀더 진실에 다가가고 싶어집니다.
난 차라리 조조가 나은듯
반동탁 연합군 시절 실제로 동탁과 전투를 벌인 인물은 조조와 손권 밖에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의기의 조조가 점점 한실을 위협하는 권신이 되어가는 과정이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유비도 오랜 유랑 속에서도 꿈을 버리지 않고 달려가던 유비는 황제가 되고 부터는 완고한 꼰대가 되어갔다고 생각됩니다. 고집불통 유비가 된 것은 아닌가 여겨집니다. 뛰어난 인물임에는 동의하지만 <정사 삼국지>와 <삼국지연의>만 비교해도 차이가 발견되는 유비에 대한 지나친 미화와 이를 후대의 역대 중국 왕조에서 이용한 것에서는 벗어날 필요가 있지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비도 조조못지않게 용병술과 강력한 리더십이있었음. 하지만 유비의 단점은 관우,장비처럼 거만했음. 유비는 자기 용병술만 믿고 결국 이릉에서 말아먹었음
황제의 후손이라지만 실질적으로 흑수저에서 황제까지 올랐던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황제에 오른 다음에는 이전까지의 모습은 가식이 아니었나 싶게 오만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안타까왔습니다. 물론 공적인 자리에서 사적인 의리에 집착한 것이 후대에도 많은 대중들의 마음을 흔들어서 삼국지연의의 트리오이며 의리의 대명사로 전해졌지만 오만한 관우에게 형주를 전담시킨 것과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육손을 무시하며 이릉대전을 일으킨 것은 자신의 종말을 앞당기는 자가당착의 악수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재밌는 강의 감사합니다!!
관심 가지고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더운 날씨에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ㅎㅎ
삼국지 결시의 마지막 시구가 생각납니다. 후인이 이를 조상하며 이러쿵 저러쿵 뇌까릴 뿐이다.
사실 삼국지의 세 군주들 모두 평가가 케바케로 많이 갈리지. 유비만 호평과 혹평이 크게 갈리지는 않음. 당장의 조조는 서주대학살 포함해 욕먹을 게 많아서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눈부신 업적도 많아 칭송하는 사람들도 많음. 유비와 조조는 둘 다 일단 50:50프로 비율로 좋아하는 사람과 혐오하는 사람이 크게 갈리는 편임. 그러나 손권만큼은 오빠들도 쉴드를 유독 치기 제일 힘든게 가장 많아 선호보다 혐오 쪽이 더 많음. 특히 이궁의 변 사태 일으키고 멀쩡한 충신 육손을 토사구팽시키는 개삽질하는 바람에 오나라 패망의 단추를 눌러버림 ㅋㅋㅋㅋㅋ 그래서 손권은 아무리 좋게 잘 쳐줘봐야 30:70프로. 혐오하는 사람이 더 많음 ㅋㅋㅋㅋㅋㅋ 욕쳐먹을 게 유비와 조조보다 압도적으로 더 많아서 ㅋㅋㅋㅋㅋㅋㅋ
좋은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조는 뛰어난 시인이며 다정다감한 권력자였습니다. 자신의 느낌을 숨기지 않지만 내심 냉혹한 성향입니다. 초기 어려운 시절 자신에게 협조했던 동소나 인사권을 맡겼던 최염 모두 제거했죠. 능력있고 바른말을 한 것이 거슬린 것이었죠. 양수도 능력이 있다고 보았으나 후계구도의 문제를 제거하기 위해 미리 싹을 제거했다고 보여집니다. 손권의 장점은 인재를 잘보고 발탁할 수 있는 능력에 실행력을 갖고 있는 것이죠. 초기에는 손씨가문의 위세가 오나라 호족들에 비해 눌리므로 참고 있었지만 점차 후계구도를 정리하면서 중신들을 조금씩 제거하며 스스로 오나라 기둥들을 제거하는 자충수를 두었다고 평가됩니다. 유비는 겉으로는 온화하지만 난세에 적수공권으로 남의 밥을 오래 먹은 관계로 말을 적지만 현실파악은 확실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비슷한 캐릭터가 노태우 같은 인물로 어린 시절부터 눈치밥을 오래 먹고 2인자 생활을 오래 하여 참는 것이 일상화되어 보여므로 순해보이지만 내면은 전혀 다르고 권력을 잡으면 달라지는 케이스라고 봅니다. 훗날 유비가 장유를 죽이자 제갈량이 무슨 죄로 죽였느냐고 질문하자 ""향기로운 난초라도 문앞에 피어나면 제거하지 않을 수 없지. 그 난초가 무슨 죄가 있느냐고? 그 죄는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는 것이지.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권력을 가진 유비와 객장이던 시절의 유비는 다른 것이겠죠. 그 조짐은 백문루에서 이미 보여졌다고 생각합니다. 조조에게 묶인 여포는 유비의 도움말을 청했지만 여포를 선봉장으로 쓸 것인가를 고민하는 조조를 유비는 한방으로 생각을 정리해줍니다. 정원, 동탁의 말로를 생각해보라는 말이지요. 여포는 거칠었지만 유비를 믿었고, 유비는 공손했지만 여포를 전혀 믿지 않았던 것이지요. 유비를 믿은 여포를 아무도 동정하지 않듯이 리더에게 맹종하는 팔로우들도 교주에게 맹종하는 신도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유비가 재조명 될수 있는 딱 하나의 사건 형남 4군을 먹고 상용 촉과 한중을 차지할때였죠. 막판에 관우의 북벌로 인해서 이미 모든걸 차지한 위를 흔들뻔했음 그 다음부터는 가망성이 없지만
유표 밑에서 비육지탄을 말하던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고 황제로까지 등극한 것은 가히 영웅의 풍모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촉을 차지하고 추진한 인사권의 결과를 보면 촉 출신인사들은 찬밥 신세고 형주 출신과 이전부터 유비의 가신들로 인재풀이 채워지는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장개석이 대만을 점령하고 대만 출신들을 홀대한 것과 비슷해보입니다. 결론적으로 명나라 나관중이 주희의 역사관에 영향을 받아 촉한을 정통으로 보고 조조를 비판하는 역사관에 동이족 입장에서 동조할 의무는 없어보입니다. 유주 출신의 유비가 촉의 익주를 지배한 것으로 보면 유비는 당대의 효웅이었고 적수공권으로 일어나 황제까지 오른 능력자로 인정할 수는 있지만 관우, 장비 시절 지역 갱스터 시절의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한 한계로 인하여 좌절한 홍콩 느와르의 주인공 정도의 미학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leetv5832 맞는 말입니다. 예전 유방도 그랬지만 성공했죠. 그런데 유비는 그 상대가 조조라서
@@mansubrotherman9680 그쵸 상대를 누구로 만나느냐는 시대를 선택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죠. 장개석도 손문의 최측근 후계자인 왕정위를 누르고 좌익에서 우익으로 노선을 갈아타면서 북벌 대업에도 성공했지만 모택동을 만나면서 대만으로 쫓겨갔죠. 유비, 조조 모두 얼굴가죽은 두껍고 마음은 시커멓다고 청말의 이종오가 주장했는데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봅니다. 유비나 유방이나 도망칠 때는 처자식을 나몰라라 했는데 항우는 우미인을 항상 곁에 두었고 무적의 전투력을 가졌지만 조물주는 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다 주지는 않았는가 봅니다. 체면을 중시해서 다시 강동의 부모들의 얼굴을 보기 부끄러워한 인물이었지만 유방은 아버지를 솥에 삶겠다는 말에도 한 그릇 달라고 할 정도의 인물이면서 도망칠 때는 자식도 마차에서 차버려서 마부 하후영이 다시 챙겨오는 수준의 인성이었다고 하죠. 현실의 이익에 민감한 친일파들이 성공하고 정의를 추구했던 독립운동가들이 현실에서 패배하는 것은 그러려니 하는데 국립묘지에서도 친일파들이 무덤까지도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은 좀 그렇쵸. 더불어 미국도 대통령과 졸병 국립묘지 무덤 사이즈가 동일한데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그런 이야기가 전혀 먹히지 않으니 앞으로 백년이 지나도 현실의 기득권자들이 살기좋은 세상인 것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작금의 현실에서도 많은 부분에 공감이 갑니다. 특히 리더가 갖춰야 할 인간관계, 판단력, 결단력 등 유비를 통해 많이 배우네요. 삼국지 좀더 알고 싶어요 다양하게 올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군대 시절 상병때까지의 모습과 병장 왕고참이 되어서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황제가 된 이후의 유비는 인자하고 덕이 있는 모습과는 차이가 많아 보입니다. 명말청초를 살았던 왕부지도 유비의 모습에서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고 보여집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삼국지는가짜입니다 나관중 삼국연희 그당시 활약 장수없었다고 발표했습니다 단지. 허구소설 일뿐이라고요
진나라 시절 진수가 작성한 정사 삼국지가 존재하고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도 삼국시대의 역사가 기술되어 있습니다. 원말명초의 나관중이 시대 분위기상 주희의 명분론에 입각하여 유관장의 촉을 정통으로 기록하여 당시 이민족 몽골에 지배당한 한족의 원통함을 씻으려고 하였을 뿐입니다. 물론 모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표현처럼 왜곡도 존재하지만 인간의 한계로 인정하여야 할 것이지 실존하였던 위, 촉, 오의 삼국시대를 가짜라고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시대 배경 영상들은 대부분 대명풍화네요
시청해 주셔서 감사하니다.
토목보의 변은 알고 있었는데 우겸은 처음 들어봅니다 감사합니다~
국난을 극복시킨 장수는 전장에서 죽지 않으면 임금의 손에 죽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생각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인간 세상의 일이 다 예측하기 어렵지요. 댓글 항상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어요!!
좋은 주제를 알려주셔서 저도 공부하면서 만들어보았습니다. 우겸에 관해서도 곧 올리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ㅎㅎ
대진제국 -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정리 내용인데, 내용이 너무 부족한 듯 - 1. 성선설, 성악설 - 사람은 악하기 때문에 악을 제어를 해야 한다. 2. 농업을 장려한다. 3. 법앞에 평등하다. - 귀족과 왕족이라 하더라도 법대로 행한다. 4. 노예제 폐지 - 조선시대에도 못한것을 2000년 전에 하다니. 대단하다. 5. 공이 없다면, 제물이 있더라도, 의식주에 대한 제한을 가진다. 6. 신상필벌 - 과거에는 신분이 낮으면, 전쟁에 나가서 공을 세워도 공이 없고, 귀족들만 보상을 받으니, 이를 개혁한다. 7. 수도를 장안으로 이동. 8.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 9. 나라를 평가하는데, 한가지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 국방, 상공업, 농업, 문화, 수로, 다양한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10. 권력이 이동은 말로 평가할 순 없다.
중국이 유럽연합 같은 다국 체제가 아니라 단일 국가 체제로 존재하는 가장 큰 원인은 진시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영웅 상앙 ㅠㅠ
ㅎㅎ
감사합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선생님 !! 명나라 인선의치. 우겸에대해 올려주세요!!!!!
항상 감사합니다. ㅎㅎ 자료를 잘 정리해서 곧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울증아닙니다. 뇌출혈로 급사했습니다 영웅이 여자하나때문에 중국 입관 직전 우울증으로 자포자기했을까요?
청태종문황제실록에는 1643년 황제가 병이 없는데 해시(21~23시)에 단정하게 앉아 죽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재위 17년, 나이 52세입니다. 별다른 이상이 없다가 갑자기 사망했는데 급사의 원인은 복합적이지 않았을까 생각이 되네요.
👍👍👍👍😊
ㅎㅎㅎ
마지막으로 오죽하면, 소하가 한신을 죽이겠습니까.... 오죽하면..... 이건 대단한 겁니다.
소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로 보입니다. 장량처럼 신선이 되려는 생각도 없고 충성심도 보이고 일부러 이자놀이하여 자신의 명성을 추락시키기도 하면서 정치적 생존을 도모합니다. 현실감각이 뛰어난 소하의 관점에서 이미 판이 정돈된 마당에 한신의 움직임은 너무나 때늦은 헛발질로 보였을 것입니다. 한신을 무대에 등장시킨 인물도 소하이고 무대에서 끌어내린 인물도 소하입니다. 후세의 제왕들은 소하를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북방의 오랑캐 출신 황제들의 입장에서도 소하와 소씨는 충성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한신의 관점에서는 소하는 인생의 은인이지만 소하의 관점에서는 한신은 장기판의 말이었지 생사를 나누는 동지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한신은 믿을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김계원이 김재규의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어서 김재규는 김계원을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했지만 당시 증언을 살펴보면 김계원은 김재규를 그렇게 의미있게 생각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김재규의 실패에는 그가 믿을 사람을 평가하는 점에 있어서 판단을 착오했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한신의 잘못6 -기타 다양한 반역죄: 이후 유방이 늙은 나이에 직접 반역자들을 토벌하러 간 사이 다시 반역하려하다가 신고가 들어와 잡힌 것을 비롯하여, 기타등등 매우 많은 것으로 추정됨.
사마천의 <사기>에는 한신이 진희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하여 기회를 엿보다가 소하의 책략으로 여후에게 제거되는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한신은 배신할 수 있었을 때 충성을 지켰으며 반란의 성공 가능성이 가장 적었을 때 반란을 도모하였습니다. 형세판단에서 착오가 컸다고 보여집니다. 왕에서 제후로 추락하고 모욕감을 참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여지지만 탁월한 전장에서의 전략가 임을 감안한다면 정치감각이 너무나 부족해 보인다고 할 것입니다.
@@leetv5832 한신이 그 당시 항우의 명령에 따라 유방에게 바로 반역했다면, 그 당시 한신 수하의 조참, 번퀘 등에 의하여 한신이 어이없이 참수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봅니다. 그 당시 군부내 한신을 진심으로 따르는 수하들은 별로 없었다고 봅니다. 그러니 한신도 자기 수하들을 만들기 위해 제나라 왕이 되어 자기 이름으로 관직을 주어 유방이 아니라 자기사람들로 조직을 만들려고 하였지요. 이런면에서 괴철 보다는 한신이 반역의 고수라고 봅니다. 그리고 한신보다는 여치가 더욱 노련한 반역의 고수 이고요. 한신이 젊은 나이에도 사람다루는 기술이 상당하고 노련한 자였습니다.
@@leetv5832 오죽하면 조직내 자신을 추천한 소하 조차도 한신을 죽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겠습니까... 그만큼 한신을 진심으로 따르는 자들이 별로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한신의 의도가 처음부터 불순했기 때문이라 봅니다. 그래서 한신도 향후 반역을 위해서는 괴철과 같은 인물들을 자기 이름으로 관직을 주어 만들려고 했겠지요. 이게 상식적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