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준비하면서 중세 신유학자들이라는 새롭게 등장한 지식인들의 출현이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남북조 시대에는 무장들이 출세하던 시대였고 당 이후 5대 오십여년 간도 난세였는데 송나라 황제권이 안정되면서 사대부 계급들의 관점에서는 이국적인 불교와 하류계층의 도교와는 다른 관점에서 세계를 설명하는 이론을 원했다고 보여졌습니다. 결국 남송은 원나라에 망했지만 남송의 사대부들은 격렬하게 저항하다 어린 황제와 장렬한 최후를 마쳤는데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전쟁다운 전쟁없이 소리없이 흡수된 것이 너무나 아쉽게만 느껴졌습니다. 이념보다는 현실을 택한 조선의 지식인들보다는 자신의 이념에 충실한 시대였다고 보여졌습니다.
서양 학자들은 중국 사상에서 철학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성리학 하나뿐이라고 평가한다고 하네요. 우주와 인간 본성을 '이'와 '기'로 설명하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수백년간 학파를 나누어 '주리파'와 '주기파'로 목숨 걸고 싸웠는데 지금은 눈 녹듯 관심이 사라지고 금융과 신기술에 대한 지식 만이 엘리트들의 주목을 받고 있죠. 성리학에 대해 좀 더 다루어 보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불교와 연꽃은 석가모니 탄생설화부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어머니 마야왕비가 잉태했을 때 하늘에서 여섯 개의 이빨을 황금으로 치장한 하얀 꼬끼리가 내려와 코로 연꽃을 들고 왕비 주변을 세 바퀴 돈 다음 연꽃송이를 건네주고 몸 속으로 들어왔다고 전해집니다. 아버지 숫도다나 왕이 꿈의 의미를 64명의 현자들에게 해몽토록 하니 태몽이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연꽃은 진흙 속에서 자라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도리어 아름답고 성스런 꽃을 피우는 것이 어려운 조건에서도 선업을 쌓아 깨달음의 꽃을 피울 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과 연결됩니다. 셋째로 연꽃의 송이가 군락을 이루는 모습이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위해 정진하는 수행자들의 모습과 연꽃 가득한 연못의 모양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일본 국화가 벚꽃이지만 벚꽃 자체의 아름다움을 대한민국 사람들도 좋아해서 해마다 벚꽃을 즐기는 행사에 많은 인파들이 모이고 있으며 벚꽃을 좋아한다고 일본을 좋아한다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돈이도 연꽃이 진흙에서 자라났지만 깨끗함을 간직한 모습에서 군자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주돈이가 생존한 시기는 유교 보다는 불교와 도교가 극성을 이루던 시기였습니다. 주돈이는 불교와 도교의 비현실적인 이론은 버렸지만 주요한 인식과 개념들은 받아들였습니다. 불교와 도교의 개념들을 유교적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새로운 철학세계를 수립하려고 고민한 지식인 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희도 젊은 시절에는 불교와 도교에 심취했다가 어느 순간에 불교와 도교에서 논리적 모순을 발견하여 이를 비판하며 성리학적 체계의 완성을 고민했던 것입니다. 그 취지가 사상사적으로 타국인 인도의 사상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을 것이고 삼국지의 장각이나 한중의 오두미교의 장로처럼 대중들을 혹세무민한다고 보았던 도교적 관점에서 벗어나 공맹의 논리를 재정립하려는 지식인의 사명감으로 발현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후한 멸망이후 중국은 수나라가 통일하기까지 삼국시대에서 잘알 수 있듯이 관우, 장비, 허저, 장요, 주유, 감녕과 같은 장수들이 출세하는 세상이었습니다. 난세의 연속이었죠. 당나라 이후 양,당,진,한,주의 5대 50여년도 난세이다보니 장수들이 주도권을 잡아 황제가 되고 실력자가 되어 국정을 좌지우지하던 시절의 연속이었습니다. 송태조 조광윤이 무장들의 군권을 억제하고 과거제를 통해 체제에 순응하는 인재를 양성하다보니 지주계층들이 과거에 응시하면서 유학이 출세의 기본이 되었고 호학의 새로운 전통이 정립되면서 공자와 맹자의 사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지식계급들의 발언권이 커지게 된 것입니다. 송대의 지식인들이라고 하여도 수백년간 중국 사상을 주름잡았던 불교와 도교에서 갑자기 벗어나기는 어려웠고 당연히 불교적 흔적과 도교적 관념의 홍수 속에서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는 후생가외의 새로운 시대변화가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는 고려에 성리학의 체계를 세운 이색이 수많은 불교 승려들과 밀접한 교분을 맺었고 많은 사찰에 문장을 남겼으며 이성계도 불교를 비판하는 유생들에게 이색도 불교를 믿었는데 네가 이색보다 나은 존재냐 며 질책했읍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제정한 뒤 가장 먼저 불경을 언해했고 아들 세조도 석보상절을 편찬했습니다. 조선에서도 유교적 가치관으로 교육을 마친 최초의 임금은 성종으로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p8o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역시도 k-문화의 위상에 높아짐에 자긍심을 느끼고 잘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전봉준의 마지막 시에 "때를 만나니 하늘과 땅이 힘을 합치더니" 하던 구절이 생각납니다. 지금 시점이 바로 그런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변방의 몽골족이 시운을 만나니 세계에서 가장 넓고 강력한 제국을 건설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전봉준의 둘째 구절은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입니다. 원제국을 건설한 몽골족은 다시 변방으로 돌아갔습니다. 대항해 시대 이후 스페인, 영국에 이어 미국이 패권을 잡고 있는데 역사에서 패권은 영원할 수는 없다는 것이 불변의 법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에 존재하는 구심력과 원심력을 조화시켜 지금의 기회를 오래 유지하고 융성시켜 나가는 것은 현 시대 우리의 사명일지도 모릅니다. 전진에서 고구려로 전파된 불교가 고려시대에 권력에 영합하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에 밀려났고 주자학은 일본을 통해 다가오는 신문명에 주도권을 잃었습니다. 조선시대 어두운 시대를 밝히던 기독교는 지금은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중국은 시진평의 장기집권을 정당화하면서 세계 무대에서 보편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봅니다. 일본의 독특한 문화도 갈라파고스화되면서 보편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문화도 세계 문화에 정당성을 주장하기는 힘듭니다. 미국 문화가 가지는 아메리카 제1주의가 아직 영향력이 있지만 부럽기는 하지만 존경의 대상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봉준호의 기생충이 세계적인 영화로 인정받은 것은 '양극화'라는 시대적 문제를 한국적 문법으로 재해석하였고 그것이 세계시장에서 공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한국의 음악이 세계적 흐름에 올라탔지만 다시금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고 보여집니다. 한국 문화를 주도하는 몇몇 엘리트들의 선택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정치깡패 유자광이 영화계에 힘을 발휘하고 중앙정보부에서 축구부를 관리하고 전두환이 일본의 세지마 류조의 조언을 듣고 통행금지를 해제하고 3s 정책으로 국민의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는 권력자들의 시대로 돌아간다면 안된다는 것은 자명하다고 생각됩니다. 미국의 대기업 ceo 들은 지금도 주차장에서 열정을 불태우는 20대 젊은이들이 두렵다고 하는데 한국 기업인들의 주된 고민은 기업상속시 상속세가 너무 많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쪼록 한국의 문화가 세계적인 보편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발전하여 유사이래 처음 찾아온 이 호기를 이어나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신선한 내용에 신지식적 가치를 느꼈네요. 아주아주 감동입니다.
재미있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준비하면서 중세 신유학자들이라는 새롭게 등장한 지식인들의 출현이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남북조 시대에는 무장들이 출세하던 시대였고 당 이후 5대 오십여년 간도 난세였는데 송나라 황제권이 안정되면서 사대부 계급들의 관점에서는 이국적인 불교와 하류계층의 도교와는 다른 관점에서 세계를 설명하는 이론을 원했다고 보여졌습니다. 결국 남송은 원나라에 망했지만 남송의 사대부들은 격렬하게 저항하다 어린 황제와 장렬한 최후를 마쳤는데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전쟁다운 전쟁없이 소리없이 흡수된 것이 너무나 아쉽게만 느껴졌습니다. 이념보다는 현실을 택한 조선의 지식인들보다는 자신의 이념에 충실한 시대였다고 보여졌습니다.
크학 술 째리뽕돼서 이제 봤습니당 ㅋㅋㅋㅋ 역시 책상을 탁 치고 갑니다
서양 학자들은 중국 사상에서 철학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성리학 하나뿐이라고 평가한다고 하네요. 우주와 인간 본성을 '이'와 '기'로 설명하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수백년간 학파를 나누어 '주리파'와 '주기파'로 목숨 걸고 싸웠는데 지금은 눈 녹듯 관심이 사라지고 금융과 신기술에 대한 지식 만이 엘리트들의 주목을 받고 있죠. 성리학에 대해 좀 더 다루어 보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실례지만 분서갱유 관해서 도 좀 올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예 잘알겠습니다. 자료를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관심보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연꽃은 불교의 상징 아닌가요?
부처님이 연꽃위에 앉아 있는 그림도 많던데 ...
성리학은 불교를 시기질투해서 만든 학문 아닌가요?
그당시 불교가 너무 성행해서, 중화사상이 강한 중국인들이 만든 것이라 배웠습니다.
불교와 연꽃은 석가모니 탄생설화부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어머니 마야왕비가 잉태했을 때 하늘에서 여섯 개의 이빨을 황금으로 치장한 하얀 꼬끼리가 내려와 코로 연꽃을 들고 왕비 주변을 세 바퀴 돈 다음 연꽃송이를 건네주고 몸 속으로 들어왔다고 전해집니다. 아버지 숫도다나 왕이 꿈의 의미를 64명의 현자들에게 해몽토록 하니 태몽이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연꽃은 진흙 속에서 자라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도리어 아름답고 성스런 꽃을 피우는 것이 어려운 조건에서도 선업을 쌓아 깨달음의 꽃을 피울 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과 연결됩니다. 셋째로 연꽃의 송이가 군락을 이루는 모습이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위해 정진하는 수행자들의 모습과 연꽃 가득한 연못의 모양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일본 국화가 벚꽃이지만 벚꽃 자체의 아름다움을 대한민국 사람들도 좋아해서 해마다 벚꽃을 즐기는 행사에 많은 인파들이 모이고 있으며 벚꽃을 좋아한다고 일본을 좋아한다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돈이도 연꽃이 진흙에서 자라났지만 깨끗함을 간직한 모습에서 군자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주돈이가 생존한 시기는 유교 보다는 불교와 도교가 극성을 이루던 시기였습니다. 주돈이는 불교와 도교의 비현실적인 이론은 버렸지만 주요한 인식과 개념들은 받아들였습니다. 불교와 도교의 개념들을 유교적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새로운 철학세계를 수립하려고 고민한 지식인 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희도 젊은 시절에는 불교와 도교에 심취했다가 어느 순간에 불교와 도교에서 논리적 모순을 발견하여 이를 비판하며 성리학적 체계의 완성을 고민했던 것입니다. 그 취지가 사상사적으로 타국인 인도의 사상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을 것이고 삼국지의 장각이나 한중의 오두미교의 장로처럼 대중들을 혹세무민한다고 보았던 도교적 관점에서 벗어나 공맹의 논리를 재정립하려는 지식인의 사명감으로 발현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후한 멸망이후 중국은 수나라가 통일하기까지 삼국시대에서 잘알 수 있듯이 관우, 장비, 허저, 장요, 주유, 감녕과 같은 장수들이 출세하는 세상이었습니다. 난세의 연속이었죠. 당나라 이후 양,당,진,한,주의 5대 50여년도 난세이다보니 장수들이 주도권을 잡아 황제가 되고 실력자가 되어 국정을 좌지우지하던 시절의 연속이었습니다. 송태조 조광윤이 무장들의 군권을 억제하고 과거제를 통해 체제에 순응하는 인재를 양성하다보니 지주계층들이 과거에 응시하면서 유학이 출세의 기본이 되었고 호학의 새로운 전통이 정립되면서 공자와 맹자의 사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지식계급들의 발언권이 커지게 된 것입니다. 송대의 지식인들이라고 하여도 수백년간 중국 사상을 주름잡았던 불교와 도교에서 갑자기 벗어나기는 어려웠고 당연히 불교적 흔적과 도교적 관념의 홍수 속에서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는 후생가외의 새로운 시대변화가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는 고려에 성리학의 체계를 세운 이색이 수많은 불교 승려들과 밀접한 교분을 맺었고 많은 사찰에 문장을 남겼으며 이성계도 불교를 비판하는 유생들에게 이색도 불교를 믿었는데 네가 이색보다 나은 존재냐 며 질책했읍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제정한 뒤 가장 먼저 불경을 언해했고 아들 세조도 석보상절을 편찬했습니다. 조선에서도 유교적 가치관으로 교육을 마친 최초의 임금은 성종으로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leetv5832 우문현답에 감사드립니다.
요즘 k-문화가 전세계적으로 대세인가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저변에 유불선의 가르침이
내재되어 있다고 봅니다.
선생님같은 분이 많이 나오셔서 우리 문화가 널리 고양되기를 바랍니다 ^^
@@자연스럽게-p8o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역시도 k-문화의 위상에 높아짐에 자긍심을 느끼고 잘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전봉준의 마지막 시에 "때를 만나니 하늘과 땅이 힘을 합치더니" 하던 구절이 생각납니다. 지금 시점이 바로 그런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변방의 몽골족이 시운을 만나니 세계에서 가장 넓고 강력한 제국을 건설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전봉준의 둘째 구절은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입니다. 원제국을 건설한 몽골족은 다시 변방으로 돌아갔습니다. 대항해 시대 이후 스페인, 영국에 이어 미국이 패권을 잡고 있는데 역사에서 패권은 영원할 수는 없다는 것이 불변의 법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에 존재하는 구심력과 원심력을 조화시켜 지금의 기회를 오래 유지하고 융성시켜 나가는 것은 현 시대 우리의 사명일지도 모릅니다. 전진에서 고구려로 전파된 불교가 고려시대에 권력에 영합하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에 밀려났고 주자학은 일본을 통해 다가오는 신문명에 주도권을 잃었습니다. 조선시대 어두운 시대를 밝히던 기독교는 지금은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중국은 시진평의 장기집권을 정당화하면서 세계 무대에서 보편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봅니다. 일본의 독특한 문화도 갈라파고스화되면서 보편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문화도 세계 문화에 정당성을 주장하기는 힘듭니다. 미국 문화가 가지는 아메리카 제1주의가 아직 영향력이 있지만 부럽기는 하지만 존경의 대상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봉준호의 기생충이 세계적인 영화로 인정받은 것은 '양극화'라는 시대적 문제를 한국적 문법으로 재해석하였고 그것이 세계시장에서 공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한국의 음악이 세계적 흐름에 올라탔지만 다시금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고 보여집니다. 한국 문화를 주도하는 몇몇 엘리트들의 선택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정치깡패 유자광이 영화계에 힘을 발휘하고 중앙정보부에서 축구부를 관리하고 전두환이 일본의 세지마 류조의 조언을 듣고 통행금지를 해제하고 3s 정책으로 국민의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는 권력자들의 시대로 돌아간다면 안된다는 것은 자명하다고 생각됩니다. 미국의 대기업 ceo 들은 지금도 주차장에서 열정을 불태우는 20대 젊은이들이 두렵다고 하는데 한국 기업인들의 주된 고민은 기업상속시 상속세가 너무 많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쪼록 한국의 문화가 세계적인 보편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발전하여 유사이래 처음 찾아온 이 호기를 이어나가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