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당나라로 유학 간 의상대사 /선묘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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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2 дек 2024

Комментарии • 6

  • @jaehonglee2017
    @jaehonglee2017 4 года назад +4

    의상대사님도 선묘에게 호감이 있었던듯 합니다. 어쩌면 고백을 받고 속으로 그 순간만큼은 스님이 되신걸 후회하셨을지도.. 근데 선묘가 자신을 위하여 희생하신건 아셨을지.. 결말이 좀 애틋하군요.

    • @hoho-qv1en
      @hoho-qv1en  4 года назад +3

      저도 의상대사가 선묘를 특별히 생각했었을것 같은 생각이예요.그리고 그랬으면 좋겠구요.^^
      해피엔딩이 행복한데.....이런 결말은 슬프죠~
      댓글 감사합니다.*^^*

  • @한결-l1n
    @한결-l1n 4 года назад

    감사합니다.

  • @강대봉-e9d
    @강대봉-e9d 4 года назад

    의상 대사가 671년 "당나라가 신라를 공격할 것"이란 1급 군사기밀을 탐지하여 급거 귀국" 한 사실은 역사학적으로 많은 시사를 줍니다^^
    당시 신라에서 당나라에 유학한다는 건 지금 미국 유명 대학으로 유학 가는 것 보다 더 어려웠을 겁니다.
    6두품인 원효는 화랑대회에서 1등을 하였다는 전설이 있고, 의상은 진골 출신이고 화랑대회 1등은 아니더라도 꽤 유망한 화랑이었을 것입니다.
    '가설'을 세워본다면, 두 사람은 007 제임스본드 같은 특수임무를 띠고 유학을 명분으로 당에 입국했던 듯 보입니다. 나이는 원효가 5살 정도 손위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효의 '해골물 빽도 사건'은 정황상 후대에 스토리텔링 된 내용으로 추정됩니다(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가 온갖 바람 피우는 식으로요^^ 아시다시피, 제우스는 단 한번도 바람 피운 적이 없거든요).
    '가설'의 근거는, 1. 김춘추가 대야성에서 딸 고타소를 잃고 고구려. 왜를 거쳐 당 태종을 만나 군사동맹을 성사시킨 건 648년이고 다음해인 649년 당태종이 죽었고 650년 원효. 의상은 고구려를 경유하여 당으로 가다가 천리장성 쯤에서 체포되어 억류되기도 했었습니다.
    김춘추는 648년 당나라 장안에 가서도 당태종을 만나지 않고 시내 구경만 다니다가 당 태종이 불러서야 갔다고 합니다. 저는 이 동안에 김춘추는 신라와 교역을 해왔던 사산조페르시아. 로마 상단 등을 둘러보고 그들과의 유대 쌓기에 주력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게 후에 엄청난 자산이 된 듯 보입니다 ^^
    당시 한반도 정세와 3국 간의 정세가 요동치고 백제가 신라를 침공하는데 사력을 다하는데는 실은 당시 중동과 로마의 정세가 요동치면서 마치 지금의 코로나19팬데믹 마냥 무역길이 막혀 다들 IMF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할 만큼 경제가 파탄 직전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역사 연구하는 분들이 이런 당대 국제정세엔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이민족을 끌여들여 같은 민족을 멸망시켰다~"는 둥 엉뚱한 이야기에만 열을 올리는 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2. 서기 651년엔 로마와 자웅을 겨루던 강대국 사산조페르시아가 마호메트 후계자 칼리프에게 멸망 당합니다(우마이아 왕조).
    이슬람교는 이교도와는 교역을 하지 않고, 게다가 로마와 통하는 길목까지 막아버려서 3국의 경제는 아사 직전까지 갔었습니다. 당시는 아이엠에프도 없었잖아요?^^
    3. 서기 654년 김춘추는 무열왕으로 신라 왕에 오르고, 나당동맹군이 먼저 백제를 공격해서 불과 일주일 남짓 사이에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서기 660년).
    4. 원효. 의상은 백제 멸망 다음해인 661년 2차 당 유학?을 시도했습니다. 백제는 멸망했다지만 661년은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죽은 해이기도 합니다.
    명목은 국비 유학생들이지만 실제는 특수요원들이었을 두 사람은 전쟁통이라서 여러가지 제약이 따랐을 겁니다. 유학자금(공작금)에다, 두 사람이 움직이면 좋은 점도 있겠지만 첩보활동엔 눈에 쉽게 노출되는 등등등~ 그래 두 사람은 바다를 건너기 직전에 술을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시면서 밤새껏 토론을 했겠지요? 그러다 원효가 6두품인데다 나이도 많아 돌아오게 된 걸 '해골물 사건'으로 포장(일체유심조)해 면피 겸 위장 목적으로 신비화시켰겠지요^^
    두 사람은 헤어지면서 '뒤끝'이 있었던 듯 보입니다. 의상이 671년 귀국하고서도 원효를 단 한번도 만나주지도 않았거든요.
    '강원도 낙산사 창건 설화'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들을 두 사람의 '뒤끝'으로 해석하여 서울대 발행 '박사학위 논문'이 나온 걸 읽은 적이 있거든요^^
    5. 이 영상에서 소개된 '선묘설화'의 선묘 집안은 당시 사산조페르시아의 중국무역상사 낙양지사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선묘는 사실상 007제임스본드를 호위하고 시종하는 특수 여자 호위무사였을 겁니다. 드라마 '해신'에서, '수애' 등이 맡은 역이지요^^
    의상의 제자로 위장해야만 뭇 시선을 피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선묘가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선묘는 '제거' 되었을 개연성도 큽니다. 의상에 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기에, 당연히 당나라 첩보대에 붙잡혀 가서 고문을 당하면 다 탄로날 가능성이 크니까요 ㅜㅜ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 때 붙잡힌 김현희가 자살을 시도했듯이 '자살'한 것일 수도 있겠죠. 왜냐면 그 무렵에 사산조페르시아가 망한 후 중국으로 망명했던 페르시아 태자가 태종 무열왕의 주선으로 '황금보검'을 가지고 유민들을 데리고 경주에 임시정부를 차린 시절이었기에, 그럼 선묘는 '순국'한 것으로 봐야겠네요.
    제 이런 가설은 몇년 후엔 역사적 사실이란 사료들이 쏟아져 나오리라 확신합니다. 이란(고대 페르시아)에 전해오는 '쿠쉬나메'에 신라 이야기만 500페이지에 이른다니깐요^^
    AI가 활성화되고 빅 데이터가 실용화 되면 이런 고대사의 비밀이 다 풀리게 되겠지요? 저는 사산조페르시아 망명정부가 경주에 설치되었고, 나라는 망했지만 최소한 인도ㆍ중앙아시아ㆍ중국ㆍ신라 등에 있었을 무역지사들은 다 건재했을 테고요('한국은 망해도 삼성은 망하지 않는다'는 말처럼ㅡ다국적기업의 속성), 그런 네트워크를 통해 들어오는 자금들은 3국통일의 통일자금으로 쓰여지고, 처용가 등에 흔적이 남아있는 페르시아의 유민들 수십만명 내지 100여만명은 대개 과학기술자였을 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통일 신라 무렵 경주 인구가 100만명에 이르러 당나라 장안보다 인구가 많았다는 썰도 있고, 숯으로 밥을 해 먹을 정도로 호화로웠던 건 이런 페르시아 유민들의 영향이 컸을 것이란 방증으로 보입니다.
    지금도 보는 '봉산탈춤'. 종묘 아악에 남아있는 음악 등에도 페르시아 유풍이 많이 남아 있는 것, 1402년 제작된 조선의 세계지도(혼일강리~지도?)에 아프리카 대륙 모양이 정확히 그려져 있고(당시 유럽은 사하라 사막까지만 알았다합니다) 아프리카는 물론 남북아메리카ㆍ인도ㆍ중앙아시아ㆍ중국 곳곳의 나라이름ㆍ지명ㆍ산 이름까지 정확히 기재되어 있는 게 케이비에스에서 '달의 산'이란 이름으로 최근에 유튜브에 공개되었습니다^^
    이 영상은, 의상 대사가 실은 '신라판 007제임스본드' 였음을 100% 입증하는 것으로 저는 봅니다^😍^
    훌륭한 영상에 감사드립니다💓

  • @moonpdkoreatv9701
    @moonpdkoreatv9701 4 года назад

    너무 귀여운 척 하네 짜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