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하는 삶의 고민을 철학적으로 풀어낸 저의 책 📖 서점 링크 교보문고: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4578919 예스24: www.yes24.com/Product/Goods/135744489 알라딘: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0426887
그냥 지나가려다 댓글들 보니까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한마디 하자면 .. 도덕경에서의 도덕이라는 것은 .. 유학에서 말하는 도와 덕이 아니에요 .. 도가사상 노자 장자가 대표적이지요 .. 도가 사상에서의 도와 덕의 의미는 도 = 우주의 원리 본질 법칙 즉 하늘의 이치야 .. 덕은 = 어짊 군자 뭐 이런게 아니고 자아의 본질을 말하는 거에요 .. 그래서 도와 덕은 하나라는 거야 .. 즉 이 세상의 돌아가는 법칙과 나 자아의 본질 또한 같다는 얘기임 .. 세속적인 삶을 추구할 때 어떠해야 한다는 것은 유학이에요 인의예를 강조하지 즉 형식을 강조해 ... 그와 반대로 노자나 장자는 탈속적인 삶을 추구했단 말이에요 .. 수유칠덕 물처럼 살아라 이 말은 물처럼 통치를 하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즉 사람들을 바꾸라는 얘기가 아니라 니 자신과 만물의 원리는 같기 때문에 공동체가 요구하는 구속 속박에서 벗어나 도와덕이 일치되는 삶을 살면 된다는 얘기입니다
최고의 지도자는 세상을 깊이 이해해야 하므로, 오히려 가장 세속적인 인물이어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 나니 이상만을 쫓아 현실을 외면한 사람들이 떠오르네요. 확실히 현실에 맞닿아 있는 삶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도덕경에서 물 흐르듯이 살라고 한 것도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를 비유한 것이지 실제로 자연만을 추구하는 삶을 말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충코님을 보면서 다음 세대에 대한 우려를 많이 내려놓을 수 있는 꼰대입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배를 채운다는 의미는 나혼산의 주인공들 보다는 부모님과 아이들의 배를 채워주기위해 나를 희생했던 경험이 있었던 분이라면 아주 잘 이해하실 것 같습니다. 그 방법이 정당하고, 극단적이지 않기 위해 철학이 필요한 것이죠. 길들이지 않은 날것의 자연은 매우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도 자연과 비슷하지요. 한발 한발 지도 없는 길을 걸어갈 때, 이 길이 맞는 길인지 의심스러울 때 철학은 희미하지만 소중한 등불이 될겁니다. 항상 응원할게요
노자의 사상이 가진 강한 능력은 충코님이 일전에 말씀하신 "겸손한 믿음"을 주류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 봅니다. 세속과 비 세속이라는 개념으로 욕망을 분류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하나에 상상된 도덕성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겸손하지 못한 독선이 되기도 하니까요. 노자에 자연과 물이란 어쩌면 하나에 강한 정의를 두지 않고 이를 총체적이게 연결해서 세속적인 가치나 다른 이념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이들이 시너지를 일으킬 사건을 안배하고 유도해서 목적을 달성하게 만드는, 말씀하신 작은 것들의 누적과 분별을 두지 않는 자세로 큰 대의에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것을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감자를 국민들이 먹게 만든 어떤 왕처럼 목적이 있다면 그 목적에 도달하는 기회를 제공하지, 명령하는 것은 하책이 되는 것 처럼 말이죠. 우리의 삶 역시도 욕망을 부정하고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외려 도덕성을 넘어 욕망을 명확히 인정하고 그 욕망의 기저를 잘 해체해서 천천히 충족해 나가고 어느새 그 욕망에 실현들에 건전하게 다가가는 삶이야 말로 비로소 악과 욕망을 부정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삶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노자는 아니지만 논어에서 말하기를 소인은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하며 군자 대인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한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결국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선에서 개인적인 욕망을 합당하게 추구하는 행위 역시 자연스럽고 정당하지만 진정으로 남을 위하고 봉사하는 가장 신성하고 대아적인 수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또한 소인에게 용기만 있고 의로움이 없다면 도둑질을 한다고 하더군요.
저도 어리고 잘 모를땐 소박하게 살아라 라는걸 자본주의에 반한다 생각했었는데 속뜻은 고요한 소박함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일상과 겸손과 겸허함을 배우고 그 속에서 차분하게 자기 중심을 잘 잡고 자기가 누군지 잘 알아라 라고 해석했습니다. 사람마다 제각각 해석이 다르고 저도 다른걸 받아들이면 또 해석이 바뀔 수 있겠지만 내가 좋아하고 하고싶은것 바라는것과 '대중' 이 이끄는 유행이란것이랑은 엄청난 차이가 있더라구요 돈을 쫓겠다 돈을 쫓지 않겠다 라는 말도 이상하구요 그냥 있는 그대로 자기가 무엇이고 뭘 하려는지 알고 열심히 살면 자본이 따라오는거 같습니다 신용이라는게 무엇인지 대출 받을때 진지하게 생각해봤었는데 프로테스탄티즘에 저의 생각은 가까워지고 있더라구요 돈을 쫓으려고 하면 돈은 도망가고 돈을 쫓지 않으려해도 돈은 도망가고 그렇던데 새는 잡으려하면 도망가고 여유를 갖고 때를 기다리면 언젠간 다가온다 라는 말을 들은적있는데 늘 마음속에 새기며 살고있습니다 건강도 건강을 위시한 잿밥을 격렬히 쫓다보면 무리를 해서 어딘가 망가지거나 약을 접해 이전보다 더 망가지지만 진득하게 건강히 들러붙을때까지 장기간 꾸준히 하면 진짜로 건강해지듯 대부분 생리가 비슷한건 아닌가 싶어요 대부분의 철학자와 위인 자본가들이 항상 강조하는게 자기 중심을 잘 잡아라 라는 가르침에서 기인해 해석해봤습니다
한 때 깨닫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깨닫는다, 라는 개념조차 나의 분별이고 환상이란 걸. 그저 한 인간으로서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내 자리에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면 그게 깨달은 삶입니다. 허기심 실기복도 거창한 것이 아닌 삶의 본질에 충실하라는 간결한 핵심 그 자체라고 생각해요. 거기에 뭘 더 추가하거나 해석을 가하거나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삶은 삶입니다. 거기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고 갈구하고 분별하는 순간 본질에서 벗어나 껍데기만 거창해질 뿐이죠.
노자의 도덕경에 한때 빠져본적이 있는데, 요약하면 물과 같이 살아라, 이게 관건인데 이게 욕망과 열망을 줄이라는 게. 알고보면 욕망과 열망을 진짜로 줄이는 라는 말이기보다는 상황에 맞게 행동을 하면, 내가 내 삶에서 중요한 나머지를 잃어버리지 않고 균형있게 욕망과 열망을 얻을수 있다는 역설이었음. 분명한건 노자가 말하는 억지스러운 자연인을 말하는게 아니라. 순응하는 자연인을 말하는 거임
오 평소보다 충코님의 관점이 드러나는 영상이네요^^ 요즘은 참 까칠한 시대라,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고 무언가를 주장하는게 참 어렵다 여겨지는데, 용기를 갖고 좋은 의견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노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충코님의 의견에 동감하고 갑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저자의 의도가 어떻든 우리는 모두 각자의 생각으로 글을 읽고 해석합니다 그러니 하나의 글, 천가지 만가지 해석이 있겠지요 해석도 내가 처한 상황, 나의 경험, 나의 연륜에 따라 다 달라지겠지요 그래서 세상은 요지경 인가 봅니다 늘 감탄하며 잼있게 보고 있습니다 충코님의 오십에는 어떤 해석이 있을지 기대됩니다만 그때 이세상에 존재하게 될런지 아니 그때도 충코님의 해석이 기대될지 모르겠습니다 삼십년만 젊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사는 것에 정답은 없습니다 지금에 충실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아도 누군가는 안주에 머물지만 누군가는 그 시간을,성장의 시간으로 역량을 키워 기회가 올때까지 기다리다 기회의 시간을 포착하여 더 큰 성장을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다림의 깨우침을 통해 과정을 즐기는 즐거움과 함께 합니다.
안녕하세요 늅늅이입니다. 도덕경 읽어보지 않았고 풀어주신 내용 기준으로 허기심실기복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사람은 배를 채워야함이 당연한 원리이고 그렇게 설계되어있습니다. 그것이 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부분에서 복잡한 마음이나 생각은 비우고 우선 배를 채우라는 뜻으로 느껴졌습니다. 현대사회에 대응하면 이상보다는 실익이 우선이라는 뜻으로 느껴졌구요.
모든생명체는 자신만의 원형이 있고 그원형은 유인무이하기에 어느것을 해하기보다 그안에 조화롭다. 인간또한 각자 영이 가진 원형이 다르지만 전체가 조화로울수있는데 인위적인 관념에 자기자신을 억압하다보면 본래의 원형이 아닌 가면(ego)로 살아가면서 번뇌와 갈등이 빚어진다. 이분법적인 사고는 자기안의 지옥과천국을 구분하는 잣대와 같은데 자기자신을 무조건 사랑하고 수용하면 지옥과 천국이 아닌 사랑하는 나자신의 존재 일부가 된다. 노자는 자기자신의 존재를 사랑하고 그존재가 전체를 해하기보다 그존재의 필연적인 소명을 다하는일이 나로존재하며 전체를 유지하는것이다고 느끼는것같습니다. 돌이 돌이어야 하고 나무가 나무인것처럼 어린아이처럼 꿈꾸고 웃고 사랑하며 진실하게 말하고 느끼며 자기답게 물질적으로 표현하며 누리는 삶 누구의 인정이아니라 자기자신 영혼의 기쁨을 추구하는삶 영혼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리셋시스템이란 말을 듣고 나서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어떻게보면 제 학창시절에는 절대적인걸 추구해야 되는 것처럼 얘기했던 것 같아요. 의사가 되라. SKY를 입학해라. 대학가면 연애한다 지금은 참아라. 그런데, 대학가서도 또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취업걱정하고... 결국 어디를 합격하게 되더라도 또 다시 경쟁하게 되는 리셋시스템이었는데도 말이에요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깊이 빠져들다 보면, 종종 속세의 번잡함과 멀어지게 됩니다. 그 사유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결국 '태어났으니 살아간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가다 보면, 마침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최선이라는 단순한 진리에 도달하게 됩니다. 자본주의의 현실 속에서는 속세적인 생각을 떨쳐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사회가 변화하는 것에 적응하며 순응하는 것이 하나의 도라고 생각이 되어요...물론 이 해석이 맞을지는 모르는 것이나 자연을 따라가라 보다는 사람들이 인식을 할 수준 보단 우리 스스로가 시대가 흐름에 따라 변화하며 있는듯 없고 없는듯 있는 그런 식으로 가는 것이 좋은거 같습니다
하늘(신)에 닿고자 차곡차곡 쌓은 바벨탑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제가 바라보는 서양 이성 철학의 한계가 이와 비슷하다 생각합니다. 뜬구름같은 道의 추구가 더 허망하다 할 수 있으나, 완전히 포기하거나, 온전히 받아들이면 오히려 실기복한 삶을 살게 된다는 아이러니가 존재하더군요..
잘 들었습니다. 무식한데 나이만 늘어가는 제가 할 말인진 모르겠지만 도가도 비상도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봅니다. 수많은 석학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노자사상이나 도덕경을 연구하거나 분석했겠지만 결국 그 핵심은 직접 익히고 숙성시켜 먹어본 만큼만 알 수 있는 홍시맛과 다르지 않겠지요.
절학자는 아닙니다만, 체험적으로 이야기해보면, 도덕경 제목 자체가 이미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람은 도를 공부하고 체험하여 얻고, 도를 세상에 펼쳐내면서 덕을 쌓으라는 뜻이라고 저는 봅니다. 노자의 제자인 공자의 말을 빌리자면, 성 을얻으면(천명을 앎), 세상에 도(성을 따르는 도)를 지속적으로 펼치다 보면 덕이 쌓이고, 천명을 좀더 쉽게 펼칠 수 있게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천명지위성의 성을 체험하면, 사람의 욕심이 천심(성)에 의해서 제어되고, 천심에서 지혜가 나오면, 이 세상에서의 성취도 자연이라는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노자의 말은 깨달은 자의 말로, 깨달음을 체험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게 들리는 말입니다.
철학자들이 방향성을 제시한 거지 특정한 상태를 제시한 게 아니기 때문에 또 말이 되는 거 같아요. 이상적 통치 ‘상태’로 통치자가 아예 드러나지 않는 것이 가능한지와는 별개로 그런 이상향으로 가야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통치자가 하나 하나 결정할 때 ‘나를 드러내기보다는 백성들이 이것을 편안하고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하려면 어떤 고민과 결정을 해야 할까’라는 고민을 하라고 제시하는 것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도덕경.. 어려운 책이지만, 저도 노자가 말하는 자연성이라는 건 가공하지 않은 인위의 반댓말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아요. 그보다는 삶과 세상에 있어 정말로 본질적인 부분은 인위로는 바꿀 수 없는 다소 결정주의적인 요소에 맡겨져 있고, 세상에 발맞추어 이 사실을 잊고 이것에서 나오는 유리를 놓치지 말라는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자의 자연이란 인위의 반댓말이 아니라, 액세서리 없이 존재하는 어떤 원래적인 흐름을 말한다고 생각해봅니다.
노자의 ‘물 흐르듯 살아가라’라는 의미는, 충코님께서 이해 하신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세상은 ‘긍•부정’이 동시에 혼재하는 ‘곳’이라는 뜻 같습니다. 예를 들어, ‘도’라는 ‘정의’는 ‘정의’를 내리는 순간 더 이상 ‘도’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더 깊게 이해 하기 시작한다면. 만약, 사회의 ‘부정’을 ‘부정’ 한다면, 그 하나의 ‘단어•정의•도의’는 이미 ‘도’라고 설명이 불가능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정의를 내리기 시작하는 순간; (1). 한 집단에게는 ‘긍정’이 되지만 (2). 반대의 집단에게는 ‘부정’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항상 세상이 발전 하면서 점차적으로 새로히 생겨나고 갈라지는 두 가지 이상의 각기 다른 전문 단어•정의들은 항상 ‘두가지 도의인 긍•부정‘이 동시에 존재 중이기에, 우리가 ’하나의 정의‘를 내리는 순간부터는 더 이상 ‘도의’라고 설명이 불가하게 되는거죠. 같은 의미로는, 서양 국가의 ‘기독교 철학 종교’가 있습니다. “‘신’이라는 존재를 규정 하는 순간, 더 이상 ‘신’이라는 존재는 우리가 알고 있던 ‘존재’가 아니다.” 와 같은 의미 입니다. 그러므로, ‘도덕경’의 ‘도’라는 단어는 한국 과거에 어느 집단들이: “도를 믿으십니까?”라는 설명은 ‘틀린 문구’가 되는거죠. ‘도’라는 한 단어를 본인들 색깔로 정의 후 ‘믿음’을 가진다는 의미는, 이미 ‘도’가 아니게 됩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역시 ’도‘의 ’깨달음‘의 단계이지 않을까요? 그리고, ‘덕’의 의미는 사회성•인류애로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방구석 사파계의 독학의 학자 일반인 젊은이 이기에, 자세히는 모두 완독을 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제가 읽은 ’한문‘의 의 함축 단어들 속에서는, 노자는 사회의 ’도덕‘을 강조하였지, 자연 속에서 ’도‘를 닦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노자와 공자는 비슷한 시대의 사람이며, 그들의 은 닮은 부분이 많습니다. 추가로, 힘든 시기에 ’아무것도 하지 말아라~‘라고 이야기 해 준 사람은 오히려 ’장자‘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호접몽의 “나비는 ’나‘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존재인가? 아니면 ’나‘라는 존재는 나비의 세상에 살아가는 존재인가?” 라는 ’호접몽‘의 질문도 던진 사람이구요. 저는 완벽하게 모든 것들을 알지는 못 하지만, 그래도 제 와이프가 ‘대만 번자체 한자 중문 정식 교사’ 였었기에, 그녀를 통해서 ‘중국어’로 원본 자료를 한번씩 찾아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우리 인간들의 ‘기억력’에는 항상 긴 시간이 지나면 ‘오류’가 생기기에, 현재까지 제가 알고 있는 ‘동양 철학’의 기초 지식은 여기까지 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노자의 말씀은 현재 충코님께서 설명하시는 “물처럼 사회에 순응하여 살아라.” 가 더 정확한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도덕’이라는 단어•정의는 마치 종교의 예수의 말처럼: “왠쪽 뺨따구를 맞으면, 오른쪽 뺨따구도 내주어라.” 라는 말과 비슷 하니까요. “왜 상대방이 나에게 ‘화’라는 감정을 내는지 ‘도덕적’으로 우리들은 고민을 하여야 한다.” 와 비슷하다고 봅니다. 단지, 세상을 ‘외부 세상’에서 ‘내부 세상’으로 가는 과정의 관찰자인가; 반대로, ’내부 세상‘에서 시작하여 ’외부 세상 영향력‘으로 넓혀지는 관찰자인가; 두 부류의 ’관점•시야•각도•단면’에 따라 설명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관측되는 ‘사실’은, (1). 현재 ‘서양 철학’ 역시 우리들의 ‘내면’을 이해하고 공부하기에 매우 적합하고 아주 체계적인 이론서가 갖추어져 있으며. (2). 현재 ‘동양 철학’ 역시 우리들의 ‘외면’을 이해하고 사회라는 불균형 한 시공간•지역 등을 공부하기에는 매우 적합한 상태 같습니다. 그리고, 현실의 물리적인 현상을 ‘머리 속‘에 그리며 상상을 하기 시작하는 방식은 ’과학적 논리적 사고‘로, 결국은 우리 인류는 ’시각적 한계‘에 갇힌 존재이기에, ’시각적‘인 ’표현 방식‘인 ’물리학적•물질주의적‘으로 우리들은 세상을 그리고 표현하고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 입니다. 예를 들어) 불 빛 한 점 없는 깜깜한 방에서, ’불 빛‘이 없다면 점차적으로 야간의 시야에 우리들의 ’시각‘이 적응이 되어, 완전 검은색 -> 짙은 명도로 아주 살짝 보임 상태로 흘러가게 되는데; 만약, 어느정도 보이기 시작하는 ’암흑 상태‘에서, 다시 밝은 빛을 On/Off를 시키면, 우리들의 ’눈•상상력‘은 순간적으로 ’완전 어둠•암흑‘에 잠시나마 잠식이 됩니다. 그러므로, ’도‘라고 하는 ’정의•존재‘는 더 이상 ’도’라고 이름을 붙힌 순간부터는 ‘도’가 될 수 없게 되는 의미 입니다. 자연은 그냥 자연 그 자체인 것이고, 우리들은 ’덕‘을 배우고 가르치고 공유하며, ’도덕‘의 사회•현실 또는 을 읽으며 지속적으로 ’도덕‘을 배우며 ’단체주의‘와 ’개인주의‘의 어느 한 중간 지점에서 마치 아인슈타인이 설명 한: “우주의 고정된 비연속적인 단편적인 시각 현재와 흘러가는 연속적인 영상 시공간의 시각의 평형 자전거를 ‘좌•우’ 페달을 밟으며, 천천히로부터 균형을 잡고 점차적으로 전진 방향(미래라는 한 점 또는 한 사람의 꿈)으로, 마치 어린아기가 물리적인 자전거를 배우듯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인생의 중간 지점 실패를 할 지언정 나아가며, 노자의 ‘도덕을 생각하며 물처럼 흘러가리라 살아가리라’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왕이면, 엄마가 내 모습 보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공개하는 것도 있어요. 우리 모두는 ‘화’라는 감정을 내고 살죠. 단지 ‘도덕’이라는 ‘가면’을 ‘사회적’으로 쓰고 살아야 하는거고. 난 ‘밑바닦’까지 자진해서 나를 K-조커로 만든 다음에, 다시 ‘도덕’의 ‘중요성’을 나는 ‘행동‘으로 걍 ’실천‘ 중인거에요. 필요한 ’도덕‘은 더 잘 살리고, 필요없거나 필요한 ’부정의 비판적 관점에서부터 긍정의 하나의 미래의 방향성 나열’까지를 계속 시도 중인거구요. 실패로부터 반복적으로 포기하지 않아야지, 하나의 성공이라는 ‘인생 중간점’에 도달이 가능하구요. 그 ‘중간점’ 역시 ‘인생의 과정’에 불과하며,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한가지’로 정의를 내릴 수 없다. 입니다.
이것이 저의 ‘도덕의 공개 다짐’ 인 겁니다. 즉, 나는 이제 밑바닥 인성론자로부터, 점차적으로 ‘도덕적’으로 살도록 노력을 한다면, 진보를 할 것이며; 우리 인간의 ‘인생의 전체’가 이러한 구동 방식으로 작동이 된다. 그러므로, 반성으로부터, 실수•실패로부터 우리들은 항상 배우기에, 우리들은 ‘성공’이라는 존재의 ‘오만함•자만심’을 자제하고, ‘실수’로부터 투명하게 본인들의 ‘암흑’을 관찰하며 이해하고 배우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결국, ‘돈•자본’이라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도구‘는 역사적으로 다른 ’철학•종교‘에 비하여 짧다~ 현재 ’스마트폰•AI LLM MODEL’들처럼. 그러므로, ‘돈•자본’의 근본점에는 역시 철학과 경제학의 이해력과 자본주의에 대한 공부 및 결국은 다시 더 먼 과거의 하나의 특이점 암흑 속으로 자진해서 본인들을 내려놓고 들여다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물리적’으로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들은, 다른 사람들을 메타 인지를 하여, 그 사람들이 그 행동들을 하는 이유를 내 자신이 그 사람•집단이 된 것처럼 시도를 한 뒤에, 여기서 발생되는 ‘장점•단점’이 무엇인지 배우며, 여기서 추가로 발생되는 ‘외면’의 ‘사회 시공간 세상’의 반응들로, ‘나’라는 인간의 완성도를 높혀나가면 그만이다. 즉, ‘실패’의 ‘경험치’가 쌓이면, 그 때 부터는 ‘이세계의 먼치킨•환생자’들처럼, 깊은 ‘도의•도가•도덕’에 대한 기본적인 인류의 지식의 끝 점을 이해 가능하게 된다. 추가로, 모든 ‘철학’은 모든 것들의 시작이자, 배움의 끝이다. 이것이 나의 개인적인 21세기의 새로운 정의의 함축 가설 제시다.
나는 갑자기 이러한 생각도 해 본다. 현재 내가 거주중인 호주라는 시공간 속의 국가 속에서는, 약 5여년 전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나는 역시 ‘서양인’들이 의외로 ‘개인주의적’이지만, 역설적으로 ‘총기 사고 및 복수를 물리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의 개인주의의 정당화’라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기에; 내가 겪어본 바로는 2024년 현재 ‘남한 사람들 집단’이 내가 겪은 ‘동•서양’의 각기 다른 문화 국가들의 사람들과 비교를 하여 본다면, 약 10-15여년전의 젊은 20대 초반 시절에도 열심히 설파 하였던;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조오금 오만하고 집단 이기적이다. 우리는 반성해야한다.“ 라는 말을 자주 하였는데, 현재까지 내가 겪은 다중 국가 속에서 ’남한‘이라는 국가 민족성의 일종의 상상력의 프레임 구조가, ’나‘라는 개체 또는 존재의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아닌, 역시나 ’집단 이기주의이지만 본인들은 이타적’이라고 판단 오류하는 집단들이 되어 있지… 반성합시다. 좀… 10년간 같은 말 반복 중이다. 이기적으로 살면, 사회 전체가 에 따라, 이기적인 ‘매 파‘가 시뮬레이션 상으로 돌여봐도, 한 시기에는 ’많아짐 상태’로 흘러간다니까요? 그 것을 거시적•거시계의 국가 구조랑 대입을 시켜본다면, 의외로 우리 인간들이 ‘다중 프레임 구조’에 항상 겹겹히 쌓여서 살아갑니다. 그 모든 것들을 깨뜨린 자들을, ‘도의•도가•깨달음•열반’ 등의 본인들이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새로운 개념의 단어의 정의들로, 나열을 하는거죠. 을 한 단어 단어 나누어서 각각의 한자 단어들의 고대 ‘정의’를 찾아가다 보면, 결국 웃긴 것들이 이 모든 ‘하나의 단어’에서 나누어져, 이렇게 복잡하고 어렵지만 21세기인들은 어느정도만 유튜브에서 독학으로 취미 삼아 공부를 한다면, 어느정도는 이해가 가능할 정도로, 마치 과거 종교 에서 예수인가? 그 사람이 설명한(예수 본인이 본인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설명까지 함. 걍 본인을 간단하게 ’수식‘하고 ’상상력‘으로 이해를 시켜주기 위하여, 일종의 ’신의 사자‘ 또는 ’신의 아들‘이라고 지칭을 한 것이고.) =”21세기에는 모든 인류들이 하나 둘씩 내가 설명한 이야기들을 진정 이해를 하기 시작 할 것이다.“ 라는 ‘비유’처럼, 그냥 21세기에는 인류 전체의 ‘인구’ 역시 많으니까, 노스트라무스처럼 뭘 본건지 걍 대충 때려맞추기 한건지는 모르겠는데, 현실 속에서 현재 2천년 이 후의 ’디지털 초연결 공간 온라인‘이 연결되고 나서부터는, 우리 인류들이 정말로 하나 둘씩 진짜로 깨어나는 중인거죠. 단지, 그 깨어남은 ’긍•부정‘의 혼합체이며, 우리는 거기서 ’부정‘을 ’실패‘로부터 배우며, 거기 ’부정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긍정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더 인류애•사회적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다는 뜻 이겠죠. 결국은 일종의 ‘깨달음’이라는 것은 ‘앎’이라는 것과도 연결이 되어 있는 단어이니. 소크라테스는: “우리는 모두 알지만 모두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 또는, 어느 누군가의: “우리는 모르는 것을 아는 순간 ‘지피지기’의 ‘백전불패’이다. 즉, 지는 법을 경험•실패들을 하여 보았기에, 이기는 방법을 더 많이 안다.” 와 비슷한 의미 같습니다. 지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더 일찍 태어난 부처마냥, 어느 날 현실 경험들을 통하여, 핸즈업 하면서, 본인이 깨달은 것 또는 서양은 ’신‘이라는 ’존재‘로 묶어버림. 아무튼. 그 것은 이 예수 이 전 부터, 아주 고대부터 일종의 ’구전‘ 같은 이야기 방식으로, 세대간 전파가 됬겠죠.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들이 무슨 ’존재들‘인지. ”세상의 자연 속에서 무엇이든 ‘에너지’를 본인들만의 색깔•단어 등의 지식들의 다중 결합으로 ‘새로운 도구 또는 것들‘을 만들어나가는, 우리 모두는 ‘자유 의지’를 가진 ‘신의 아들•딸’들이 맞는거지.“ 단지, 예수도 깨지고 부딛히고 넘어지고 실패하면, 양 쪽 뺨 다 내 주고, 깨달았겠지. 아 ㅅㅂ. 욕하면 안되나부다~ ㅋㅋㅋㅋㅋ 그러므로, 결국 이나 무슬림 및 모든 종교•철학적 역시 결국은 ’하나의 같은 의미‘를 모두 각기 다른 ‘상상력’의 방식으로 나열하여 설명하는 ‘기록물’들이 되는거죠. 추가로, ‘과학’은 우리 모두가 ‘동의’를 하고 교육 과정 속에서 모든 ‘단어’들의 기본 기초•개념들을 논리적•이성적•실험학적으로 측정하여 동의를 한 하나의 다중 인간 집단의 ‘팩트 체크’ 같은 검증을 거친 후에, 하나의 같은 가설에서 이론으로 그리고 법칙 같은 것으로, 굳어지는 것 이라고, 저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방식으로 세상을 그리며 관찰하며 생각 합니다. 그러므로, = Is correct? or Non? 😂🎉
옛날 사람들은 지금 시대의 사람들과 다르게 살았을 것이라는 기본 전제가 잘못되지 않았을까요? 옛날 사람들도 지금처럼 현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았고 통치자들 역시도 너무나도 현실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쏟고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간다는 말처럼 사람들은 소셜미디어가 없어도 말로써 끊임없이 서로간의 정보를 전달하면서 공유하고 사회의 일들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살았어요.
불교를 철학으로 다루기 보다 검증과 증명의 종교이지요. 도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서이지 철학서로 접근하면 수행의 의미가 희미해지기도 합니다. 도덕경도 불경처럼 스스로 검증하고 증명해야하지요. 깔라마 경, Kalama-sutta, 앙굿따라니까야 3.65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덮어놓고 믿어라가 아니라 스스로 검증해야 합니다. 수행자이자 대도인의 노자를 잘 알고 싶다면 소요 이기주 선생이 쓴 노자의 길을 보시길 바랍니다.
문명과 자연의 이분법의 허구성을 간파했다면, 그 논리를 더 밀고 나가보시는 게 좋겠다는 의견 남길게요. 지금 충코님의 논의 전개에서 또 다른 이분법들, 검증되지 않은 크고 작은 믿음(선입견)들이 많이 보이는데, 문명과 자연 이분법에 의문을 제기한 태도로 그러한 선입견에도 질문(의문)을 던지고 해체해 나가다보면, 노자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거의 이해하지 못하신듯해요. 아직 젊으셔서, 시간이 더 필요하실 듯 합니다. 교수님과 인터뷰하신 영상 보니까, 서두에 교수님께서 선입견을 내려놓으라는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이 핵심입니다. 앎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 말은 쉽지만 이거 잘 안되는 것입니다. 도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한 것은 그것이 모든 이분법 너머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언어의 기본 구조는 이분법입니다. (true or false, 있음 또는 없음). 서양철학 전공이라 하시니, 포스트구조주의로 지칭되는 근대성 비판 사상가들의 작업과 노자가 만나는 지점을 보게 되신다면, 노자의 이야기로 진입할 수 있는 하나의 경로가 될 수도 있어 보입니다.
먹고 만족하면 별문제가 없을 텐데... 미래를 보려는 인간은 먹을 것을 훗날 배고플까봐 잔뜩 쌓아둠으로서 충분한 만족보다는, 결핍에 대한 걱정으로 오히려 축적의 과잉이 일어난 것 같다. 물흐르듯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인간의 불만족은 미래를 보려고 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유물론자로서 인간은 세계의 물질에 불구하며 인간 또한 자연에 종속되어있고, 그런 인간의 문화 및 사회 또한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위는 자연이 아닌것에서 온것이 없고 인간의 행위는 모두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생각하고요. 자연과 문명을 구분지을 수 없고 인간과 이종을 구분짓는것을 문명과 자연을 구분짓는다고 착각한다고 생각되기도하네요.
@@pigeon1091 인간적인것이 자연적이기는 하지만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반드시 옳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도둑질이나 폭력이 자연적으로 발생할수는 있지만 결코 옳다고 할수는 없는것처럼요 인간의 행위가 자연적이기 때문에 모두 옳다면 법과 처벌은 왜 존재하며 어떤 개인이 부당한 일을 하면 사회적으로 비난받고 지탄받는 일이 왜 존재하겠습니까. (물론 단지 어떤 개인을 질투하기 때문에 끌어내리기 위해 부당한 비난을 일삼는것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적으로 옳은 일이 있고 옳지 않은 일이 있기 때문이며 인간은 누구나 양심에 의해 자명한 판단을 내리고 실천할수있는 능력이 있지만 이를 부정할수 있는 선택권도 동시에 지니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자연적이지만 옳지 않은 행위도 할수 있는 가능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발생했다고 반드시 바람직한것은 아닙니다.
@@user-er92 어디서 이런 오해가 나온지 잘 모르겠으나 '인간적, 사회적, 문화적 이라는것 모두 자연적인것이다' 라는것은 절대 사회에서 용납하지 못한것을 하였을때 처벌하지 못하거나 하는 그런것을 뜻하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사회자체가 자연적인것이니 사회 내 규칙도 자연적이라는 말입니다. 본인께서는 제 말을 제대로 오해하였습니다. 자연과 문화를 나누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user-hi2fr5xm5p 자연이 정당하다는 생각이 오해를 불러온것 같군요. 하지만 인간 또한 자연에서 살며 자연에서 나며 죽고, 자연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이 말은 인간의 행위 또한 자연의 거울이라는 말이되고, 이건 절대 이 세상에 정당하다든지 하는 편합한 생각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인간의 문화, 문명 모두 자연스러우며 자연의 것이라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더 이상의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pigeon1091 문화와 문명이 자연적으로 발생했다고 하여 반드시 높은 수준의 문화를 반영하는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비양심적이고 저열한 문화나 문명도 얼마든지 존재하며 뜯어 고치고 개선해야 하는 불의로 가득찬 악한 문화도 존재할수 있습니다. 본인은 자연적으로 발생된 문화 문명 제도 등은 반드시 옳다는 왜곡된 사고방식을 가진것 같네요. 지금은 아무런 오해도 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정당한것이 편협한것인지 이해할수 없네요 본인은 본인이 하는 말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말하고 있나요? 그것이 진실이냐와는 무관하게요
@@user-er92 당신은 제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문화와 문명을 자연과 분리하지 말라는것이 어찌 문화와 문명의 수준으로 거론되는겁니까? 문화, 문명 등은 자연에서 비롯됬고 자연안에서 돌아가니 자연의 것이라는것입니다. 비열한 문명이 쇠퇴하든 부강하든 그것 또한 자연적이라는말입니다. 본인께서는 뛰어난 도덕성을 가지신거 같고, 자연이라느건 저능한것이라 생각하시는것 같지만, 저는 유물론적 시각을 말씀 드린것이고, 생명의 씨앗은 자연에서 난것이고 자연에서 발전했으며 자연에서 돋아나 인간이라는 것을 낳았고 인간은 그 자연을 보고 번창하며 문화와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말한 자연이란 수풀이나 바다 같은 생태적 자연 외에도 우주 등등을 통합하여 말하는 겁니다.
태고시대 : 환국시대 상고시대 : 배달국시대 태상 불지유지 : 태고 및 상고시대에는 (도와 하나가 되어) 도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는 뜻 기차 친이예지 : 그 다음시대(중고시대; 단군조선/요, 순, 하)에는 도와 친하여 찬양하였다 기차 외지 : 그 다음시대(하고시대; 상, 주)에는 도에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기차 모지 : 그 다음시대(춘추전국시대)에는 도를 믿지 않고 모멸하였다(노자 당대)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고, 인간을 자연 외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이 저도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어차피 인간은 자연이 낳은 존재들이고 자연 안에 포함되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와 산출물들은 어차피 원래 자연이 가지고 있던 가능성의 표출이고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문명을 더 발전시키고 결국 지구를 완전히 소모시킨후 더 큰 우주로 나아가 다른 행성을 찾아 나서거나 우주에 머무는 존재가 된다고 해도 그 역시 우주의 여러 잠재된 가능성의 표출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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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지나가려다 댓글들 보니까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한마디 하자면 .. 도덕경에서의 도덕이라는 것은 .. 유학에서 말하는 도와 덕이 아니에요 .. 도가사상 노자 장자가 대표적이지요 .. 도가 사상에서의 도와 덕의 의미는 도 = 우주의 원리 본질 법칙 즉 하늘의 이치야 .. 덕은 = 어짊 군자 뭐 이런게 아니고 자아의 본질을 말하는 거에요 .. 그래서 도와 덕은 하나라는 거야 .. 즉 이 세상의 돌아가는 법칙과 나 자아의 본질 또한 같다는 얘기임 .. 세속적인 삶을 추구할 때 어떠해야 한다는 것은 유학이에요 인의예를 강조하지 즉 형식을 강조해 ... 그와 반대로 노자나 장자는 탈속적인 삶을 추구했단 말이에요 .. 수유칠덕 물처럼 살아라 이 말은 물처럼 통치를 하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즉 사람들을 바꾸라는 얘기가 아니라 니 자신과 만물의 원리는 같기 때문에 공동체가 요구하는 구속 속박에서 벗어나 도와덕이 일치되는 삶을 살면 된다는 얘기입니다
말하시는 바가 참이라는 증거의 참고서적이 있을까요.
도덕경이 정치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은 많은 학자들과 주석가들이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도덕경에는 수유칠덕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한국 인터넷에만 떠도는 낭설이죠.
맞아요. 주역을 보시면 더 개념이 확실하게 알수있어요.
감사합니다 좋은 설명
@@야간편돌이-h8x 노자는 도와 덕의 관계가 아니라 도와 명의 관계입니다. 왕필 등 노자를 이해못해 여기서 한구절 저기서 한구절 떼어와서 주석을 단 게 지금 통용되고 있지만 이성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그렇게 쓰지 않습니다. 예를들어 무위자연..노자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도와 덕..또한 노자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죠.
노자는 한문이 아니라 기호입니다. 음양이자 수학이죠. 또한 모든 개념들은 문장안에서 증명됩니다.
道可道也 非恒道也 名可名也 非恒名也
[5 4 5/9 7, 3/2 6 5 7, 3 4 3/7 7, 5/2 6 3 7]
无名 萬物之始也 有名 萬物之母也
[5 4, 7 5 5 2 7, 3 4, 7 5 5 4 7]
恒无欲也 以觀其眇 恒有欲也 以觀其所噭
[6 5 2 7, 9 7 3 2, 6 3 2 7, 9 7 3 4]
兩者同出 異名同胃 玄之又玄 衆眇之門
[8 4 7 9, 8 8 7 7, 2 5 3 2, 7 5 5 4]
시대적 배경에 따라 물 흐르듯 살아가는 것도 바뀐다는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뭔가 구분 짓고 나누려는 인위적인 태도가 아니라 지금 우리 주위에 나타나는 현상에 집중하는 삶. 좋은 인사이트 감사합니다!
행복 마케팅 때문에 오히려 불행해진 면도 있는 것 같아요. 행복도 경쟁하듯 전시하기 바쁘고.. 인생이 고인데 마치 불행없이 살아야만 정상인 것 처럼 여기는 면도 있는 것 같네요.
저도 걍 제 생각입니다. ㅎ
님의 해석은 탁월한 해석입니다.
인간의 삶이 성장하기 위해선 시대에 맞게 유동성 있는 해석과 적용이 필요 하지요.
또한 나이듬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네요.😊
생각(일체가망상)에 빠지지 말고
배고플때 먹고 졸릴때 자라♥
최고의 지도자는 세상을 깊이 이해해야 하므로, 오히려 가장 세속적인 인물이어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 나니 이상만을 쫓아 현실을 외면한 사람들이 떠오르네요.
확실히 현실에 맞닿아 있는 삶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도덕경에서 물 흐르듯이 살라고 한 것도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를 비유한 것이지 실제로 자연만을 추구하는 삶을 말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무당벌레-u8c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강도가 아니라 빈도 ~~ 이렇게 여기고 살아가고 싶어지는 영상입니다. ^^
문명과 자연을 이분법으로 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제 사고의 지평을 넓혀줬네요
절대적으로 둘로 나눠져 있는 이질적 부분이 아니라는거죠
당장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들, 해야 할 일들을 하는것.
가슴에 새기고 갑니다
충코님을 보면서 다음 세대에 대한 우려를 많이 내려놓을 수 있는 꼰대입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배를 채운다는 의미는 나혼산의 주인공들 보다는 부모님과 아이들의 배를 채워주기위해 나를 희생했던 경험이 있었던 분이라면 아주 잘 이해하실 것 같습니다. 그 방법이 정당하고, 극단적이지 않기 위해 철학이 필요한 것이죠. 길들이지 않은 날것의 자연은 매우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도 자연과 비슷하지요. 한발 한발 지도 없는 길을 걸어갈 때, 이 길이 맞는 길인지 의심스러울 때 철학은 희미하지만 소중한 등불이 될겁니다. 항상 응원할게요
응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세대에 대한 걱정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글이 멋지시네요
어쩌라고 딱딱아
노자의 사상이 가진 강한 능력은 충코님이 일전에 말씀하신 "겸손한 믿음"을 주류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 봅니다. 세속과 비 세속이라는 개념으로 욕망을 분류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하나에 상상된 도덕성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겸손하지 못한 독선이 되기도 하니까요. 노자에 자연과 물이란 어쩌면 하나에 강한 정의를 두지 않고 이를 총체적이게 연결해서 세속적인 가치나 다른 이념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이들이 시너지를 일으킬 사건을 안배하고 유도해서 목적을 달성하게 만드는, 말씀하신 작은 것들의 누적과 분별을 두지 않는 자세로 큰 대의에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것을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감자를 국민들이 먹게 만든 어떤 왕처럼 목적이 있다면 그 목적에 도달하는 기회를 제공하지, 명령하는 것은 하책이 되는 것 처럼 말이죠. 우리의 삶 역시도 욕망을 부정하고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외려 도덕성을 넘어 욕망을 명확히 인정하고 그 욕망의 기저를 잘 해체해서 천천히 충족해 나가고 어느새 그 욕망에 실현들에 건전하게 다가가는 삶이야 말로 비로소 악과 욕망을 부정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삶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해설이 명확하고 논리적입니다.감사합니다.
와~~ 생각이 높으시고 글 또한 너무 훌륭하십니다. 👍
노자는 아니지만 논어에서 말하기를 소인은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하며 군자 대인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한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결국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선에서 개인적인 욕망을 합당하게 추구하는 행위 역시 자연스럽고 정당하지만 진정으로 남을 위하고 봉사하는 가장 신성하고 대아적인 수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또한 소인에게 용기만 있고 의로움이 없다면 도둑질을 한다고 하더군요.
저도 어리고 잘 모를땐 소박하게 살아라 라는걸 자본주의에 반한다 생각했었는데
속뜻은 고요한 소박함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일상과 겸손과 겸허함을 배우고
그 속에서 차분하게 자기 중심을 잘 잡고 자기가 누군지 잘 알아라
라고 해석했습니다. 사람마다 제각각 해석이 다르고 저도 다른걸 받아들이면 또 해석이 바뀔 수 있겠지만
내가 좋아하고 하고싶은것 바라는것과 '대중' 이 이끄는 유행이란것이랑은 엄청난 차이가 있더라구요
돈을 쫓겠다 돈을 쫓지 않겠다 라는 말도 이상하구요 그냥 있는 그대로
자기가 무엇이고 뭘 하려는지 알고 열심히 살면 자본이 따라오는거 같습니다 신용이라는게 무엇인지
대출 받을때 진지하게 생각해봤었는데 프로테스탄티즘에 저의 생각은 가까워지고 있더라구요
돈을 쫓으려고 하면 돈은 도망가고 돈을 쫓지 않으려해도 돈은 도망가고 그렇던데
새는 잡으려하면 도망가고 여유를 갖고 때를 기다리면 언젠간 다가온다 라는 말을 들은적있는데 늘 마음속에 새기며 살고있습니다
건강도 건강을 위시한 잿밥을 격렬히 쫓다보면 무리를 해서 어딘가 망가지거나 약을 접해 이전보다 더 망가지지만
진득하게 건강히 들러붙을때까지 장기간 꾸준히 하면 진짜로 건강해지듯 대부분 생리가 비슷한건 아닌가 싶어요
대부분의 철학자와 위인 자본가들이 항상 강조하는게 자기 중심을 잘 잡아라 라는 가르침에서 기인해 해석해봤습니다
한 때 깨닫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깨닫는다, 라는 개념조차 나의 분별이고 환상이란 걸. 그저 한 인간으로서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내 자리에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면 그게 깨달은 삶입니다.
허기심 실기복도 거창한 것이 아닌 삶의 본질에 충실하라는 간결한 핵심 그 자체라고 생각해요. 거기에 뭘 더 추가하거나 해석을 가하거나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삶은 삶입니다. 거기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고 갈구하고 분별하는 순간 본질에서 벗어나 껍데기만 거창해질 뿐이죠.
@@user-sv4xy4fh5u 참 단순하고 소박하시네요 ^^ 동물적이기도 하구요 동물도 아마 그렇게 잘먹고 잘자고 잘 싸며 살아가겠지요. ㅎㅎ
동물과 인간의 차이가 먼지 님을 보며 의아한 순간입니다.
@@user-er92 ㅋㅋㅋㅋㅋㅋ 이것이 신문명 "비꼬기"
충코님의 관점 너무나 공감되는게.많고 많이 배웁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한때 빠져본적이 있는데, 요약하면
물과 같이 살아라, 이게 관건인데
이게 욕망과 열망을 줄이라는 게. 알고보면 욕망과 열망을 진짜로 줄이는 라는 말이기보다는
상황에 맞게 행동을 하면, 내가 내 삶에서 중요한 나머지를 잃어버리지 않고 균형있게 욕망과 열망을 얻을수 있다는 역설이었음.
분명한건 노자가 말하는 억지스러운 자연인을 말하는게 아니라. 순응하는 자연인을 말하는 거임
너무 좋은 해석 들려주셨네요! 현실에 발을 딛고 하늘을 보고 살아가라는 말이 생각났어요. 구독 누르고 갑니다 ^_^
오 평소보다 충코님의 관점이 드러나는 영상이네요^^ 요즘은 참 까칠한 시대라,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고 무언가를 주장하는게 참 어렵다 여겨지는데, 용기를 갖고 좋은 의견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노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충코님의 의견에 동감하고 갑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매일 매일 할 수 있는 것을 해라
저자의 의도가 어떻든 우리는 모두 각자의 생각으로 글을 읽고 해석합니다
그러니 하나의 글, 천가지 만가지 해석이 있겠지요
해석도 내가 처한 상황, 나의 경험, 나의 연륜에 따라 다 달라지겠지요
그래서 세상은 요지경 인가 봅니다
늘 감탄하며 잼있게 보고 있습니다
충코님의 오십에는 어떤 해석이 있을지 기대됩니다만 그때 이세상에 존재하게 될런지 아니 그때도 충코님의 해석이 기대될지 모르겠습니다
삼십년만 젊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고이지 않고 흐르듯이 살고 싶습니다.
노력 중입니다.
다른 내가 될 수 없으니
열심히 공부 중입니다.😊
말씀하신 허기심 실기복 과 현대에서의 적용에 대해 매우 공감합니다.
응원합니다.
영상 두번 반복해서 청취하고나서 중간중간 영상 멈춤 생각도 하게되는 순간을 가지고 나서야 비로서 말로만 듣던 노자 도덕경을 10만분의 1만큼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내가 이해는 제대로 했는지 전혀 장담할수는 없지만요
최근 유튜버들 대부분의 말 사이사이 간격 잘라서 빠르고 산만하게 만드는 편집이 없이 직접 나오셔서 차분하게 설명하시는게 정말 좋다고 생각합니다
정말이지 격공합니다~
사는 것에 정답은 없습니다
지금에 충실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아도 누군가는 안주에 머물지만
누군가는 그 시간을,성장의 시간으로 역량을 키워 기회가 올때까지 기다리다 기회의 시간을 포착하여 더 큰 성장을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다림의 깨우침을 통해 과정을 즐기는 즐거움과 함께 합니다.
그렇죠.
과정을 명료하게 설명하진 못하셨지만 결론은 잘 도달하신 듯 합니다.^^
참 이런 얘기 할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늅늅이입니다.
도덕경 읽어보지 않았고 풀어주신 내용 기준으로 허기심실기복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사람은 배를 채워야함이 당연한 원리이고 그렇게 설계되어있습니다. 그것이 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부분에서 복잡한 마음이나 생각은 비우고 우선 배를 채우라는 뜻으로 느껴졌습니다.
현대사회에 대응하면 이상보다는 실익이 우선이라는 뜻으로 느껴졌구요.
중국에서 이것을 활용한 사람이 덩샤오핑이 아니었을까... 그렇게까지 생각해보고 마칩니디 ㅎㅎ
정말 깊이 있는 통찰이네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젊은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부분을 적절하게 짚어주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심신일원론에 굉장히 동의하는 사람인데, 도덕경에서 말하는 내용이 굉장히 공감이 가네요.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모든생명체는 자신만의 원형이 있고
그원형은 유인무이하기에
어느것을 해하기보다 그안에 조화롭다.
인간또한 각자 영이 가진 원형이 다르지만
전체가 조화로울수있는데
인위적인 관념에 자기자신을 억압하다보면
본래의 원형이 아닌 가면(ego)로
살아가면서 번뇌와 갈등이 빚어진다.
이분법적인 사고는
자기안의 지옥과천국을 구분하는
잣대와 같은데 자기자신을 무조건
사랑하고 수용하면 지옥과 천국이 아닌
사랑하는 나자신의 존재 일부가 된다.
노자는 자기자신의 존재를
사랑하고 그존재가 전체를 해하기보다
그존재의 필연적인 소명을 다하는일이
나로존재하며 전체를 유지하는것이다고
느끼는것같습니다.
돌이 돌이어야 하고
나무가 나무인것처럼
어린아이처럼 꿈꾸고 웃고 사랑하며
진실하게 말하고 느끼며
자기답게 물질적으로 표현하며
누리는 삶
누구의 인정이아니라
자기자신 영혼의 기쁨을 추구하는삶
영혼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마지막 말씀 기억에 남습니다.. 한편으로는 기대하고 한편으로는 경계하고 한편으로는 감사하면서 하루를 지내자,,, 장사하는 사람으로서 매일매일이 고민에 걱정 연속인데 항상 그런 마음으로 지내야겠습니다.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에서의 자연은 속세를 포함한 우리의 환경이다.
허기심실기복 = 음식먹을때 잡생각없이 먹어라 이말인듯 - 무엇을 배속에 넣을때 특히 잡생각이 없어야 부작용이 덜하다는 의미
리셋시스템이란 말을 듣고 나서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어떻게보면 제 학창시절에는 절대적인걸 추구해야 되는 것처럼 얘기했던 것 같아요. 의사가 되라. SKY를 입학해라. 대학가면 연애한다 지금은 참아라. 그런데, 대학가서도 또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취업걱정하고... 결국 어디를 합격하게 되더라도 또 다시 경쟁하게 되는 리셋시스템이었는데도 말이에요
체력은 국력 🤗 아는 것이 힘이다
도뎍경에서 말하는 '도'는 본질에 가깝게 살아라, 본질 = 로고스 = 하늘의 이치입니다. 소박하라고 하는 것도 복잡하면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거든요. 어떤 시스템이든 그 시스템의 본질에 충실하게 살아라고 이해하면 될 듯해요.
오히려 본질=로고스=언어=보편=이데아=하늘의 이치=시스템에서 멀어지는 것, 혹은 넘어서는 것, 혹은 전도하는 것이라고 봐야할 듯.
본질, 로고스, 시스템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이름 붙이고 만든 것이기 때문에 '도'라는 것과 이항대립을 이룬다고 봐도 되겠죠.
도의 원래 의미는 길이 아니라 이끌다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리더쉽에 관한 것이라 할수 있는데 사실 노자는 음양입니다.
너무 공감이 가서 흥미롭게 잘 봤습니다!!
충코님이 문제에 다가설 때 프럼스다일을 알 것 같아요.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축복이 과연 저주엿을 까
혹 축복은 아니엇을까 질문을 던지실 때 알아 보았어요 .ㅎ
허기심 실기복. 인간의 기본 욕구인 식욕 조차 충족하지 못하고 사는 자들이 세계에 수두룩함. 가장 중요한 건 식욕을 충족시키는 거임.
제가 이해하는 도덕경, 특히 도경은 ‘직관력을 훈련하는 방법’이라 봅니다. 즉 어떻게 하면, 머리가 좋아질지를 적어놓은 거라 봅니다. 어떻게 하면, 실력이 좋아질지를 적어놓은 거라 봅니다.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깊이 빠져들다 보면, 종종 속세의 번잡함과 멀어지게 됩니다. 그 사유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결국 '태어났으니 살아간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가다 보면, 마침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최선이라는 단순한 진리에 도달하게 됩니다. 자본주의의 현실 속에서는 속세적인 생각을 떨쳐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갑다 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솔직히 사회가 변화하는 것에 적응하며 순응하는 것이 하나의 도라고 생각이 되어요...물론 이 해석이 맞을지는 모르는 것이나 자연을 따라가라 보다는 사람들이 인식을 할 수준 보단 우리 스스로가 시대가 흐름에 따라 변화하며 있는듯 없고 없는듯 있는 그런 식으로 가는 것이 좋은거 같습니다
하늘(신)에 닿고자 차곡차곡 쌓은 바벨탑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제가 바라보는 서양 이성 철학의 한계가 이와 비슷하다 생각합니다.
뜬구름같은 道의 추구가 더 허망하다 할 수 있으나,
완전히 포기하거나, 온전히 받아들이면
오히려 실기복한 삶을 살게 된다는 아이러니가 존재하더군요..
허기심 실기복은 허기가 지면, 밥을 먹어 포만감을 느껴서 세로토닌이 나와 긍정적이 되라 라는 것입니다. ㅋㅋㅋ
가끔씩 보는데 좋은 영상 고맙습니다 ^^
흐름에 맞게 유하게 살라는 뜻 아닐까요??ㅋㅋㅋ그냥 제가 느끼기엔 그렇네요.
잘 들었습니다. 무식한데 나이만 늘어가는 제가 할 말인진 모르겠지만 도가도 비상도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봅니다. 수많은 석학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노자사상이나 도덕경을 연구하거나 분석했겠지만 결국 그 핵심은 직접 익히고 숙성시켜 먹어본 만큼만 알 수 있는 홍시맛과 다르지 않겠지요.
명가명 비상명이 더 중요한 가치죠. "제발 명분싸움 하지 마라 영원한 명분은 없으니" ...
어제는
청바지에 체리색 체크무늬 티를 입었다.
지금은
검은색 반바지에 오랜지색 티를 입고 땀 범벅이다.
있다 오후엔
오랜지색 바지와 빨간색 티를 입고 외출 할꺼고...
언제 어떤 옷을 입더라도
항상 변함없는건
나는 나다!
절학자는 아닙니다만, 체험적으로 이야기해보면, 도덕경 제목 자체가 이미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람은 도를 공부하고 체험하여 얻고, 도를 세상에 펼쳐내면서 덕을 쌓으라는 뜻이라고 저는 봅니다. 노자의 제자인 공자의 말을 빌리자면, 성 을얻으면(천명을 앎), 세상에 도(성을 따르는 도)를 지속적으로 펼치다 보면 덕이 쌓이고, 천명을 좀더 쉽게 펼칠 수 있게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천명지위성의 성을 체험하면, 사람의 욕심이 천심(성)에 의해서 제어되고, 천심에서 지혜가 나오면, 이 세상에서의 성취도 자연이라는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노자의 말은 깨달은 자의 말로, 깨달음을 체험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게 들리는 말입니다.
안녕하세요?
무척 덥네요
건강유의하세요^^
매우 훌륭한 해석입니다~~~~~~
호기심 실기복
순간을 감각하며 살고자 노력합니다. 영상 잘 봤습니다.
노자에 대해 알아보려고 들어왔다가 빌렘 플루서라는 철학자의 논리에 머리를 한대 맞고 가네요. 내가 당연하다고 믿는 것들 중 정말로 당연한 것은 한 줌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고 갑니다.
너무 재밌고 유익하게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노자를 이해하길려면 외계인 인터뷰를 읽으면 해답을 알수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진화가 삶의본질이라걸
정말 좋은 해석인거같아요 정답이 어딨겠습니까 세상이 변하고 철학도 변하고 해석만있을 뿐이죠 허무함과 이상의 경계에서 좋은 해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좋은 영상 감사해요 !
철학자들이 방향성을 제시한 거지 특정한 상태를 제시한 게 아니기 때문에 또 말이 되는 거 같아요. 이상적 통치 ‘상태’로 통치자가 아예 드러나지 않는 것이 가능한지와는 별개로 그런 이상향으로 가야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통치자가 하나 하나 결정할 때 ‘나를 드러내기보다는 백성들이 이것을 편안하고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하려면 어떤 고민과 결정을 해야 할까’라는 고민을 하라고 제시하는 것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제 보니 눈빛이 반짝 반짝 빛나네요. 조명 때문인가? ㅋㅋㅋ
역시 내 눈은 생각보다 괜찮은 듯. 20만 무난히 갈 거라 초창기부터 생각했거든요.
아마 40만까지는 시간문제지. 충분히 가능할 듯. 그 이상은 분야의 특성상 모르겠지만...
도덕경.. 어려운 책이지만, 저도 노자가 말하는 자연성이라는 건 가공하지 않은 인위의 반댓말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아요. 그보다는 삶과 세상에 있어 정말로 본질적인 부분은 인위로는 바꿀 수 없는 다소 결정주의적인 요소에 맡겨져 있고, 세상에 발맞추어 이 사실을 잊고 이것에서 나오는 유리를 놓치지 말라는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자의 자연이란 인위의 반댓말이 아니라, 액세서리 없이 존재하는 어떤 원래적인 흐름을 말한다고 생각해봅니다.
도는 여러가지 가능성 =非常중에서 그 상황에 맞게 적절한 한가지로 고정=常되는 것
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므로 도가도 비상도는 도를 정의한 것 말 한 것=道으로 봐야
도는 목적과 방법이 겹치는 것이라 할 수있어
상무욕=常을 무욕함
非는 원래의 뜻이 "날다"입니다. 새의 날개를 그린 것이지요. 非恒道의 非는 名을 의미하고 非恒名의 非는 道를 의미합니다. 날개란 옆에 달려있으니 옆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노자의 ‘물 흐르듯 살아가라’라는 의미는, 충코님께서 이해 하신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세상은 ‘긍•부정’이 동시에 혼재하는 ‘곳’이라는 뜻 같습니다.
예를 들어, ‘도’라는 ‘정의’는 ‘정의’를 내리는 순간 더 이상 ‘도’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더 깊게 이해 하기 시작한다면.
만약, 사회의 ‘부정’을 ‘부정’ 한다면, 그 하나의 ‘단어•정의•도의’는 이미 ‘도’라고 설명이 불가능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정의를 내리기 시작하는 순간; (1). 한 집단에게는 ‘긍정’이 되지만 (2). 반대의 집단에게는 ‘부정’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항상 세상이 발전 하면서 점차적으로 새로히 생겨나고 갈라지는 두 가지 이상의 각기 다른 전문 단어•정의들은 항상 ‘두가지 도의인 긍•부정‘이 동시에 존재 중이기에, 우리가 ’하나의 정의‘를 내리는 순간부터는 더 이상 ‘도의’라고 설명이 불가하게 되는거죠.
같은 의미로는, 서양 국가의 ‘기독교 철학 종교’가 있습니다.
“‘신’이라는 존재를 규정 하는 순간, 더 이상 ‘신’이라는 존재는 우리가 알고 있던 ‘존재’가 아니다.”
와 같은 의미 입니다.
그러므로, ‘도덕경’의 ‘도’라는 단어는 한국 과거에 어느 집단들이: “도를 믿으십니까?”라는 설명은 ‘틀린 문구’가 되는거죠.
‘도’라는 한 단어를 본인들 색깔로 정의 후 ‘믿음’을 가진다는 의미는, 이미 ‘도’가 아니게 됩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역시 ’도‘의 ’깨달음‘의 단계이지 않을까요?
그리고, ‘덕’의 의미는 사회성•인류애로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방구석 사파계의 독학의 학자 일반인 젊은이 이기에, 자세히는 모두 완독을 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제가 읽은 ’한문‘의 의 함축 단어들 속에서는, 노자는 사회의 ’도덕‘을 강조하였지, 자연 속에서 ’도‘를 닦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노자와 공자는 비슷한 시대의 사람이며, 그들의 은 닮은 부분이 많습니다.
추가로, 힘든 시기에 ’아무것도 하지 말아라~‘라고 이야기 해 준 사람은 오히려 ’장자‘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호접몽의 “나비는 ’나‘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존재인가? 아니면 ’나‘라는 존재는 나비의 세상에 살아가는 존재인가?”
라는 ’호접몽‘의 질문도 던진 사람이구요.
저는 완벽하게 모든 것들을 알지는 못 하지만, 그래도 제 와이프가 ‘대만 번자체 한자 중문 정식 교사’ 였었기에, 그녀를 통해서 ‘중국어’로 원본 자료를 한번씩 찾아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우리 인간들의 ‘기억력’에는 항상 긴 시간이 지나면 ‘오류’가 생기기에, 현재까지 제가 알고 있는 ‘동양 철학’의 기초 지식은 여기까지 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노자의 말씀은 현재 충코님께서 설명하시는 “물처럼 사회에 순응하여 살아라.” 가 더 정확한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도덕’이라는 단어•정의는 마치 종교의 예수의 말처럼: “왠쪽 뺨따구를 맞으면, 오른쪽 뺨따구도 내주어라.” 라는 말과 비슷 하니까요.
“왜 상대방이 나에게 ‘화’라는 감정을 내는지 ‘도덕적’으로 우리들은 고민을 하여야 한다.”
와 비슷하다고 봅니다.
단지, 세상을 ‘외부 세상’에서 ‘내부 세상’으로 가는 과정의 관찰자인가;
반대로, ’내부 세상‘에서 시작하여 ’외부 세상 영향력‘으로 넓혀지는 관찰자인가;
두 부류의 ’관점•시야•각도•단면’에 따라 설명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관측되는 ‘사실’은,
(1). 현재 ‘서양 철학’ 역시 우리들의 ‘내면’을 이해하고 공부하기에 매우 적합하고 아주 체계적인 이론서가 갖추어져 있으며.
(2). 현재 ‘동양 철학’ 역시 우리들의 ‘외면’을 이해하고 사회라는 불균형 한 시공간•지역 등을 공부하기에는 매우 적합한 상태 같습니다.
그리고, 현실의 물리적인 현상을 ‘머리 속‘에 그리며 상상을 하기 시작하는 방식은 ’과학적 논리적 사고‘로, 결국은 우리 인류는 ’시각적 한계‘에 갇힌 존재이기에, ’시각적‘인 ’표현 방식‘인 ’물리학적•물질주의적‘으로 우리들은 세상을 그리고 표현하고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 입니다.
예를 들어) 불 빛 한 점 없는 깜깜한 방에서, ’불 빛‘이 없다면 점차적으로 야간의 시야에 우리들의 ’시각‘이 적응이 되어, 완전 검은색 -> 짙은 명도로 아주 살짝 보임 상태로 흘러가게 되는데;
만약, 어느정도 보이기 시작하는 ’암흑 상태‘에서, 다시 밝은 빛을 On/Off를 시키면, 우리들의 ’눈•상상력‘은 순간적으로 ’완전 어둠•암흑‘에 잠시나마 잠식이 됩니다.
그러므로, ’도‘라고 하는 ’정의•존재‘는 더 이상 ’도’라고 이름을 붙힌 순간부터는 ‘도’가 될 수 없게 되는 의미 입니다.
자연은 그냥 자연 그 자체인 것이고,
우리들은 ’덕‘을 배우고 가르치고 공유하며, ’도덕‘의 사회•현실 또는 을 읽으며 지속적으로 ’도덕‘을 배우며 ’단체주의‘와 ’개인주의‘의 어느 한 중간 지점에서 마치 아인슈타인이 설명 한: “우주의 고정된 비연속적인 단편적인 시각 현재와 흘러가는 연속적인 영상 시공간의 시각의 평형 자전거를 ‘좌•우’ 페달을 밟으며, 천천히로부터 균형을 잡고 점차적으로 전진 방향(미래라는 한 점 또는 한 사람의 꿈)으로, 마치 어린아기가 물리적인 자전거를 배우듯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인생의 중간 지점 실패를 할 지언정 나아가며, 노자의 ‘도덕을 생각하며 물처럼 흘러가리라 살아가리라’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왕이면, 엄마가 내 모습 보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공개하는 것도 있어요.
우리 모두는 ‘화’라는 감정을 내고 살죠.
단지 ‘도덕’이라는 ‘가면’을 ‘사회적’으로 쓰고 살아야 하는거고.
난 ‘밑바닦’까지 자진해서 나를 K-조커로 만든 다음에, 다시 ‘도덕’의 ‘중요성’을 나는 ‘행동‘으로 걍 ’실천‘ 중인거에요.
필요한 ’도덕‘은 더 잘 살리고,
필요없거나 필요한 ’부정의 비판적 관점에서부터 긍정의 하나의 미래의 방향성 나열’까지를 계속 시도 중인거구요.
실패로부터 반복적으로 포기하지 않아야지, 하나의 성공이라는 ‘인생 중간점’에 도달이 가능하구요. 그 ‘중간점’ 역시 ‘인생의 과정’에 불과하며,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한가지’로 정의를 내릴 수 없다.
입니다.
이것이 저의 ‘도덕의 공개 다짐’ 인 겁니다.
즉, 나는 이제 밑바닥 인성론자로부터, 점차적으로 ‘도덕적’으로 살도록 노력을 한다면, 진보를 할 것이며;
우리 인간의 ‘인생의 전체’가 이러한 구동 방식으로 작동이 된다.
그러므로, 반성으로부터, 실수•실패로부터 우리들은 항상 배우기에, 우리들은 ‘성공’이라는 존재의 ‘오만함•자만심’을 자제하고, ‘실수’로부터 투명하게 본인들의 ‘암흑’을 관찰하며 이해하고 배우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결국, ‘돈•자본’이라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도구‘는 역사적으로 다른 ’철학•종교‘에 비하여 짧다~
현재 ’스마트폰•AI LLM MODEL’들처럼.
그러므로, ‘돈•자본’의 근본점에는 역시 철학과 경제학의 이해력과 자본주의에 대한 공부 및 결국은 다시 더 먼 과거의 하나의 특이점 암흑 속으로 자진해서 본인들을 내려놓고 들여다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물리적’으로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들은, 다른 사람들을 메타 인지를 하여, 그 사람들이 그 행동들을 하는 이유를 내 자신이 그 사람•집단이 된 것처럼 시도를 한 뒤에, 여기서 발생되는 ‘장점•단점’이 무엇인지 배우며, 여기서 추가로 발생되는 ‘외면’의 ‘사회 시공간 세상’의 반응들로, ‘나’라는 인간의 완성도를 높혀나가면 그만이다.
즉, ‘실패’의 ‘경험치’가 쌓이면,
그 때 부터는 ‘이세계의 먼치킨•환생자’들처럼, 깊은 ‘도의•도가•도덕’에 대한 기본적인 인류의 지식의 끝 점을 이해 가능하게 된다.
추가로, 모든 ‘철학’은 모든 것들의 시작이자, 배움의 끝이다.
이것이 나의 개인적인 21세기의 새로운 정의의 함축 가설 제시다.
ㅋㅋㅋㅋㅋ 소설 재밌넼ㅋㅋ
나는 갑자기 이러한 생각도 해 본다.
현재 내가 거주중인 호주라는 시공간 속의 국가 속에서는, 약 5여년 전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나는 역시 ‘서양인’들이 의외로 ‘개인주의적’이지만, 역설적으로 ‘총기 사고 및 복수를 물리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의 개인주의의 정당화’라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기에;
내가 겪어본 바로는 2024년 현재 ‘남한 사람들 집단’이 내가 겪은 ‘동•서양’의 각기 다른 문화 국가들의 사람들과 비교를 하여 본다면, 약 10-15여년전의 젊은 20대 초반 시절에도 열심히 설파 하였던;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조오금 오만하고 집단 이기적이다. 우리는 반성해야한다.“
라는 말을 자주 하였는데, 현재까지 내가 겪은 다중 국가 속에서 ’남한‘이라는 국가 민족성의 일종의 상상력의 프레임 구조가, ’나‘라는 개체 또는 존재의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아닌, 역시나 ’집단 이기주의이지만 본인들은 이타적’이라고 판단 오류하는 집단들이 되어 있지…
반성합시다. 좀…
10년간 같은 말 반복 중이다.
이기적으로 살면,
사회 전체가 에 따라,
이기적인 ‘매 파‘가 시뮬레이션 상으로 돌여봐도,
한 시기에는 ’많아짐 상태’로 흘러간다니까요?
그 것을 거시적•거시계의 국가 구조랑 대입을 시켜본다면, 의외로 우리 인간들이 ‘다중 프레임 구조’에 항상 겹겹히 쌓여서 살아갑니다.
그 모든 것들을 깨뜨린 자들을,
‘도의•도가•깨달음•열반’ 등의 본인들이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새로운 개념의 단어의 정의들로, 나열을 하는거죠.
을 한 단어 단어 나누어서 각각의 한자 단어들의 고대 ‘정의’를 찾아가다 보면, 결국 웃긴 것들이 이 모든 ‘하나의 단어’에서 나누어져, 이렇게 복잡하고 어렵지만 21세기인들은 어느정도만 유튜브에서 독학으로 취미 삼아 공부를 한다면, 어느정도는 이해가 가능할 정도로, 마치 과거 종교 에서 예수인가? 그 사람이 설명한(예수 본인이 본인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설명까지 함. 걍 본인을 간단하게 ’수식‘하고 ’상상력‘으로 이해를 시켜주기 위하여, 일종의 ’신의 사자‘ 또는 ’신의 아들‘이라고 지칭을 한 것이고.)
=”21세기에는 모든 인류들이 하나 둘씩 내가 설명한 이야기들을 진정 이해를 하기 시작 할 것이다.“
라는 ‘비유’처럼, 그냥 21세기에는 인류 전체의 ‘인구’ 역시 많으니까, 노스트라무스처럼 뭘 본건지 걍 대충 때려맞추기 한건지는 모르겠는데, 현실 속에서 현재 2천년 이 후의 ’디지털 초연결 공간 온라인‘이 연결되고 나서부터는, 우리 인류들이 정말로 하나 둘씩 진짜로 깨어나는 중인거죠.
단지, 그 깨어남은 ’긍•부정‘의 혼합체이며, 우리는 거기서 ’부정‘을 ’실패‘로부터 배우며, 거기 ’부정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긍정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더 인류애•사회적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다는 뜻 이겠죠.
결국은 일종의 ‘깨달음’이라는 것은 ‘앎’이라는 것과도 연결이 되어 있는 단어이니.
소크라테스는: “우리는 모두 알지만 모두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
또는,
어느 누군가의: “우리는 모르는 것을 아는 순간 ‘지피지기’의 ‘백전불패’이다. 즉, 지는 법을 경험•실패들을 하여 보았기에, 이기는 방법을 더 많이 안다.”
와 비슷한 의미 같습니다.
지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더 일찍 태어난 부처마냥,
어느 날 현실 경험들을 통하여,
핸즈업 하면서,
본인이 깨달은 것 또는 서양은 ’신‘이라는 ’존재‘로 묶어버림.
아무튼.
그 것은 이 예수 이 전 부터, 아주 고대부터 일종의 ’구전‘ 같은 이야기 방식으로, 세대간 전파가 됬겠죠.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들이 무슨 ’존재들‘인지.
”세상의 자연 속에서 무엇이든 ‘에너지’를 본인들만의 색깔•단어 등의 지식들의 다중 결합으로 ‘새로운 도구 또는 것들‘을 만들어나가는, 우리 모두는 ‘자유 의지’를 가진 ‘신의 아들•딸’들이 맞는거지.“
단지, 예수도 깨지고 부딛히고 넘어지고 실패하면, 양 쪽 뺨 다 내 주고,
깨달았겠지.
아 ㅅㅂ.
욕하면 안되나부다~
ㅋㅋㅋㅋㅋ
그러므로, 결국 이나 무슬림 및 모든 종교•철학적 역시 결국은 ’하나의 같은 의미‘를 모두 각기 다른 ‘상상력’의 방식으로 나열하여 설명하는 ‘기록물’들이 되는거죠.
추가로, ‘과학’은 우리 모두가 ‘동의’를 하고 교육 과정 속에서 모든 ‘단어’들의 기본 기초•개념들을 논리적•이성적•실험학적으로 측정하여 동의를 한 하나의 다중 인간 집단의 ‘팩트 체크’ 같은 검증을 거친 후에, 하나의 같은 가설에서 이론으로 그리고 법칙 같은 것으로, 굳어지는 것 이라고, 저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방식으로 세상을 그리며 관찰하며 생각 합니다.
그러므로,
=
Is correct?
or Non? 😂🎉
여기서 웃긴 과거 사실은;
‘신’이라는 존재를 서양 철학자 니체?가 깬거 맞죠?
거기에 ‘도덕성’도 얘가 깼자낰ㅋㅋ
욕망? .... ㅋㅋ. 부처님이 서원을 세우는 것도 뭔가 이루고자하는 뭔가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건 욕망과 뭐가 다를까요? 욕망은 에너지지요.... 알고자하는 욕구... 그것도 에너지... 에너지의 다른말이 욕망 아닌가? ㅋㅋ. 몰라 몰라.
시대가 변했어도 사람은 시대가 변한만큼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에 관한 학문 고뇌들은 어느정도 도움 받을 부분이 있다 생각
늘 행복할필요없어❤
옛날 사람들은 지금 시대의 사람들과 다르게 살았을 것이라는 기본 전제가 잘못되지 않았을까요? 옛날 사람들도 지금처럼 현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았고 통치자들 역시도 너무나도 현실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쏟고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간다는 말처럼 사람들은 소셜미디어가 없어도 말로써 끊임없이 서로간의 정보를 전달하면서 공유하고 사회의 일들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살았어요.
정말 저에게는 너무 어렵네요 근데 도를 말하는 순간 도가 아니게 된다고 알려주지도 않으니 답답한데 그냥 그렇게 도대체 어떤것이 진리인지도 모르며 살아가지는대로 살아가는게 한편으로는 도인가 싶기도 하고 = 아무튼 모르겠단 뜻 😂
40대 50대의 충코님을 응원합니다!
노자의 도덕경 좋은 책이지. 대학생때 교수가 읽고 과제 해오라고 해서, 할 수 없이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땐 억지로 봤는데
물은 어디에도 있잖아요. 눈에 보이는 물 만이 물이 아니죠. 그러나 물은 생명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것입니다. 우리가 물의 입장에서 삶을 살수도 있고요.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말과 비슷한 뜻으로 이해할수도있죠.
우리 부모님이 참 한발 빼고 사시는데 좋지만은 않습니다…ㅋㅋ 혼자 살기엔 좋은듯요!
불교를 철학으로 다루기 보다 검증과 증명의 종교이지요. 도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서이지 철학서로 접근하면 수행의 의미가 희미해지기도 합니다. 도덕경도 불경처럼 스스로 검증하고 증명해야하지요. 깔라마 경, Kalama-sutta, 앙굿따라니까야 3.65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덮어놓고 믿어라가 아니라 스스로 검증해야 합니다. 수행자이자 대도인의 노자를 잘 알고 싶다면 소요 이기주 선생이 쓴 노자의 길을 보시길 바랍니다.
4:30 헐! 최근에 되게 멋있다고 생각햇던 구절_☆
저는 발은 땅에 붙이고 머리는 이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살고 싶어용 :>
현실을 노력하면서도 정신은 따뜻함을 가지고 싶습니당
모두 코로나 재유행 조심하시고 건강하시길!☆
노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양 철학자.
문명과 자연의 이분법의 허구성을 간파했다면, 그 논리를 더 밀고 나가보시는 게 좋겠다는 의견 남길게요. 지금 충코님의 논의 전개에서 또 다른 이분법들, 검증되지 않은 크고 작은 믿음(선입견)들이 많이 보이는데, 문명과 자연 이분법에 의문을 제기한 태도로 그러한 선입견에도 질문(의문)을 던지고 해체해 나가다보면, 노자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거의 이해하지 못하신듯해요. 아직 젊으셔서, 시간이 더 필요하실 듯 합니다. 교수님과 인터뷰하신 영상 보니까, 서두에 교수님께서 선입견을 내려놓으라는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이 핵심입니다. 앎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 말은 쉽지만 이거 잘 안되는 것입니다. 도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한 것은 그것이 모든 이분법 너머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언어의 기본 구조는 이분법입니다. (true or false, 있음 또는 없음). 서양철학 전공이라 하시니, 포스트구조주의로 지칭되는 근대성 비판 사상가들의 작업과 노자가 만나는 지점을 보게 되신다면, 노자의 이야기로 진입할 수 있는 하나의 경로가 될 수도 있어 보입니다.
굿 잡 ㅎㅎ 깨우치신 분이 또 계셨네
철학은 시대별로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 당시의 사람들의 생각을 말하여 줍니다
오늘 내용 정말 좋네요.
노자가 생각한 이상적인 사회는 현대 자본주의와 대척점에 있죠. 소비자본주의 기술문명은 끊임 없이 ‘마음’(인위적 욕망)을 창출하니까요.
그런 거 아닙니다.
@ 노자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것도 아니고 노자의 테제들은 반현대-기술문명이 맞죠 ㅋㅋ
@@choi-zu6ng 진짜 깝깝한 소리 하시네요. 공부 더 하시기 바랍니다.
@@user-blackandwhite7 구체적으로 반박을 하시기 바랍니다. 저능하게 대응하지 마세요.
@@choi-zu6ng 아휴 못배운 티.... 고생하세요
1:20 헐...저랑완전반대 되는 생각이시네요..
제가느끼기엔 현재2024년도도 관통하던데..
먹고 만족하면 별문제가 없을 텐데... 미래를 보려는 인간은 먹을 것을 훗날 배고플까봐 잔뜩 쌓아둠으로서 충분한 만족보다는, 결핍에 대한 걱정으로 오히려 축적의 과잉이 일어난 것 같다. 물흐르듯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인간의 불만족은 미래를 보려고 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감사합니다~^^
유물론자로서 인간은 세계의 물질에 불구하며 인간 또한 자연에 종속되어있고, 그런 인간의 문화 및 사회 또한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위는 자연이 아닌것에서 온것이 없고 인간의 행위는 모두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생각하고요.
자연과 문명을 구분지을 수 없고 인간과 이종을 구분짓는것을 문명과 자연을 구분짓는다고 착각한다고 생각되기도하네요.
@@pigeon1091 인간적인것이 자연적이기는 하지만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반드시 옳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도둑질이나 폭력이 자연적으로 발생할수는 있지만 결코 옳다고 할수는 없는것처럼요 인간의 행위가 자연적이기 때문에 모두 옳다면 법과 처벌은 왜 존재하며 어떤 개인이 부당한 일을 하면 사회적으로 비난받고 지탄받는 일이 왜 존재하겠습니까. (물론 단지 어떤 개인을 질투하기 때문에 끌어내리기 위해 부당한 비난을 일삼는것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적으로 옳은 일이 있고 옳지 않은 일이 있기 때문이며 인간은 누구나 양심에 의해 자명한 판단을 내리고 실천할수있는 능력이 있지만 이를 부정할수 있는 선택권도 동시에 지니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자연적이지만 옳지 않은 행위도 할수 있는 가능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발생했다고 반드시 바람직한것은 아닙니다.
@@user-er92 어디서 이런 오해가 나온지 잘 모르겠으나
'인간적, 사회적, 문화적 이라는것 모두 자연적인것이다' 라는것은 절대 사회에서 용납하지 못한것을 하였을때 처벌하지 못하거나 하는 그런것을 뜻하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사회자체가 자연적인것이니 사회 내 규칙도 자연적이라는 말입니다. 본인께서는 제 말을 제대로 오해하였습니다. 자연과 문화를 나누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user-hi2fr5xm5p 자연이 정당하다는 생각이 오해를 불러온것 같군요.
하지만 인간 또한 자연에서 살며 자연에서 나며 죽고, 자연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이 말은 인간의 행위 또한 자연의 거울이라는 말이되고, 이건 절대 이 세상에 정당하다든지 하는 편합한 생각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인간의 문화, 문명 모두 자연스러우며 자연의 것이라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더 이상의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pigeon1091 문화와 문명이 자연적으로 발생했다고 하여 반드시 높은 수준의 문화를 반영하는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비양심적이고 저열한 문화나 문명도 얼마든지 존재하며 뜯어 고치고 개선해야 하는 불의로 가득찬 악한 문화도 존재할수 있습니다. 본인은 자연적으로 발생된 문화 문명 제도 등은 반드시 옳다는 왜곡된 사고방식을 가진것 같네요. 지금은 아무런 오해도 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정당한것이 편협한것인지 이해할수 없네요 본인은 본인이 하는 말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말하고 있나요? 그것이 진실이냐와는 무관하게요
@@user-er92 당신은 제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문화와 문명을 자연과 분리하지 말라는것이 어찌 문화와 문명의 수준으로 거론되는겁니까?
문화, 문명 등은 자연에서 비롯됬고 자연안에서 돌아가니 자연의 것이라는것입니다.
비열한 문명이 쇠퇴하든 부강하든 그것 또한 자연적이라는말입니다.
본인께서는 뛰어난 도덕성을 가지신거 같고, 자연이라느건 저능한것이라 생각하시는것 같지만, 저는 유물론적 시각을 말씀 드린것이고, 생명의 씨앗은 자연에서 난것이고 자연에서 발전했으며 자연에서 돋아나 인간이라는 것을 낳았고 인간은 그 자연을 보고 번창하며 문화와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말한 자연이란 수풀이나 바다 같은 생태적 자연 외에도 우주 등등을 통합하여 말하는 겁니다.
9:51 도덕경 태상부지유지
스트레스 받지 않으면서 사는게 진정한 삶이라는 가르침 아닌가? 지금 시대는 겨우 100년된 지독히 비정상적 삶이 강요된 시대. 그래서 병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음
뭘 따져요
그냥 당신이 살고 싶은대로 사세요
눈은 사상 상념이 포함된다는 거고 배는 진정 내가 원하는 것.
태고시대 : 환국시대
상고시대 : 배달국시대
태상 불지유지 : 태고 및 상고시대에는 (도와 하나가 되어) 도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는 뜻
기차 친이예지 : 그 다음시대(중고시대; 단군조선/요, 순, 하)에는 도와 친하여 찬양하였다
기차 외지 : 그 다음시대(하고시대; 상, 주)에는 도에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기차 모지 : 그 다음시대(춘추전국시대)에는 도를 믿지 않고 모멸하였다(노자 당대)
하늘의 이치가 도, 도를 따르고 행함이 덕..
이빨 까는 사람을 조심하라-노자🤩🤩
진리입니다!!!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고, 인간을 자연 외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이 저도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어차피 인간은 자연이 낳은 존재들이고 자연 안에 포함되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와 산출물들은 어차피 원래 자연이 가지고 있던 가능성의 표출이고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문명을 더 발전시키고 결국 지구를 완전히 소모시킨후 더 큰 우주로 나아가 다른 행성을 찾아 나서거나 우주에 머무는 존재가 된다고 해도 그 역시 우주의 여러 잠재된 가능성의 표출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욕구 충족에 만족할 줄 알면 일체의 욕망의 헛됨을 깨닫는거겠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산다고 해서 그 시류에 꼭 편승해 살 필요 없는거 아니겠습니까.
개인적으로 노자보다는 장자의 사상이 더 현대인에게 필요하다고 보이네요
썸네일 보면 마음을 닦은 사람은 저 뜻을 그냥 알겠고 원래 세속에만 찌든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이치와 도리라고 믿어버리겠네요. ㅎ
ㅋㅋㅋㅋ카메라가 조금 비뚫어진건지 거슬리내욬ㅋㅋㅋ수평이 안맞는거같아요
노자 도덕경은 철학보다는 칼융의 황금꽃의 비밀= 태을금화종지 즉 금액환단, 우이등선, 신선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한 인간의 수행지침이라고 생각합니다.
매미로 웃으며 시작 ㅋㅋㅋㅋ
노자가 있다면 한국엔 흑자가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