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백내전 당시 백군의 군가 슬라브 여인의 작별 farewell of slavia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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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4 сен 2024
  • 왜 슬라브 여인의 작별인지는 모르겠지만 듣기 참 좋은 노래 같습니다. 즐감 하시길 바랍니다.
    영상 출처 • Russian Patriotic Song...
    영상 중간 중간이나 마지막에 초상화에 나오는 사람은 알렉산드르 콜차크 입니다.
    원제는 '제독(Адмиралъ; Admiral)'. 실존인물인 알렉산드르 콜차크(1874~1920)가 제정 러시아 해군 제독에서 적백내전 당시 백군 지휘관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총살당하기까지의 일대기를 다룬 전쟁 영화입니다. 한글 제목은 한국 배급사가 독자적으로 만든 제목으로, 콜차크와 연인인 안나와의 사랑 이야기를 실제보다 강조하기 위해서 바꾼 것입니다.
    아래는 콜차크에 대한 설명입니다.
    1894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러시아 해군 장교가 되었다.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으며 전쟁중 소장으로 진급해 제독이 되었다. 러시아 혁명 당시 흑해 함대 사령관이었다. 러시아 제국 해군에서의 최종 계급은 중장이었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사회혁명당 정권이 구성되자 신 정부에 계급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편입, 정권의 견제 차원에서 새롭게 협상국으로 참여한 미국으로 파견되었지만 러시아 내전이 일어나자 일본 제국을 통해 시베리아에 도착했다. 이후 백군에 합류하여 군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시베리아 방면의 임시정부는 곧 영국이 후원하는 쿠데타로 뒤집어졌고 콜차크 자신이 옴스크의 전러시아 임시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콜차크는 임시정부의 수반이 되자마자 사회혁명당을 탄압했고 케렌스키 시절의 법률을 철폐하고 차르 시대의 구시대적 법률을 되살렸다. 거주민들에게도 가혹하게 대해서 잦은 징발이나 거주지 소개가 이루어졌는데 당연히도 하나같이 현지인들에게 인기가 없는 정책이었다. 결국은 독재자인 동시에 민중의 지지도 얻지 못했던 것이다.
    콜차크의 실책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우선 백군의 스폰서라고 할 수 있는 협상국과의 외교에 영향을 끼쳤다. 영국의 군수상 윈스턴 처칠은 콜차크 정부를 지지했지만 정작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는 영 뜨뜻미지근했고, 무엇보다 이상주의자인 우드로 윌슨 미합중국 대통령이 그를 매우 싫어했다. 미 육군을 파병해 군사 행동을 같이 하기는 했지만 끝끝내 콜차크 정부를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은 무슨 정책이든 별 신경 안 썼지만 극동에서 자기네들 이익 챙겨먹기에 바빴고 그나마도 콜차크가 일본을 경계했다.
    또 내부에서도 반발이 생겼는데 시베리아 백군 전부가 러시아 제국 군 출신인 것은 아니고 현지 주민과 카자크들이 일부 합류했으며 주력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었다. 콜차크의 정책은 그들에게서도 환심을 사는데에 실패했다. 백군의 다른 일파들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발트 방면의 백군인 니콜라이 유데니치는 핀란드의 만네르헤임과 연계해보려고 했지만 명목상의 상관인 콜차크가 이들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으며 실패했다.
    그외에도 안그래도 시베리아 지역은 보급이 힘든데 시베리아 백군이 전진할수록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보급 상황은 극악으로 치달았다. 이를 타개하고자 안톤 데니킨, 표트르 브란겔 장군이 속한 남부 백군과 연계하기 위해 남러시아 측은 차리친을, 전러시아 임시정부 측은 사마라와 사라토프를 열심히 두들겨 보았지만, 이오시프 스탈린과 클리멘트 보로실로프가 의기투합해 지키던 그 사이 지역은 끝끝내 뚫리지 않았고, 두 전선은 러시아 내전 동안 계속해서 분리되어 있게 되었다.
    초반의 패배 이후 레프 트로츠키의 개혁으로 정신을 차린 적군은 반격을 시작했다. 새로이 징집된 장병들이 미하일 프룬제, 미하일 투하쳅스키와 같은 명장들과 함께 시베리아 전선에 배치되었고 백군은 밀려나기 시작했다. 콜차크 자신은 적군의 반격으로, 옴스크에 적군이 입성하기 하루 전에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이르쿠츠크로 향했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통제하는 구역을 따라 따라 퇴각하던 중 이미 볼셰비키의 지배하에 넘어간 이르쿠츠크로 군단에 의해 넘겨졌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콜차크를 넘기는 대신 안전을 보장받았고, 며칠 동안 심문을 받은 콜차크는 사형을 선고받고 1920년 2월 7일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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