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가 지휘관의 역량과 입장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강조는 섬멸에 가까운 대승을 거둠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유혹이 있었을 것 같은데 반해 강감찬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하겠다는 뚜렷한 목표에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 또한 역량에 의한 것이고, 나아가 자신이 선택한 길을 최대한 성공적으로 가는 것도 역량에 달린 것인데, 그에 있어서 강감찬이 강조보다 훨씬 더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귀주대첩의 가장 큰 승리 요인이 전투 도중 합류한 김종현의 1만 기병에 있었다고 봅니다. 사실 귀주 대첩 당시의 거란군은 말씀하신대로 거의 거지꼴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던 고려군과 팽팽하게 맞설 정도로 전투력 하나만큼은 정말 압도적이었죠. 고려군도 초반엔 그 기세에 생각보다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종현의 기병부대가 개경에서부터 거란군을 추격하느라 의도치 않게 합류가 늦어졌는데 그게 오히려 전투중에 적의 후방을 기습한 그림이 되면서 거란군 진영이 완전히 무너졌고 그 덕분에 전세가 기울어버렸죠. 그 1만명이 전투 시작 전부터 주력군과 합류해 있었다면 고려는 승리는 할 수 있었을지언정 거란군을 그렇게까지 궤멸시키는건 절대로 불가능했을거라고 봅니다
맞습니다. 배수진을 친 상태였던 거란군이 보병 위주인 고려군을 압도적인 기병으로 맞서며 전열이 밀리지 않았던 상황인 거죠. 그 상황에서 텅 비어있던 뒤가 뚫리니 전열이 완전히 무너졌지요. 역사기록의 부실로 설계인지 우연인지 알 수 없지만, 배수진이라는 승부수를 무너뜨린 한방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지요.
동의합니다. 고려땅에서 일말의 소득도 거두지 못한 채 본국으로의 무사퇴각만 바라보고 버텨왔던 거란군에게 갑자기 후방에서 돌격해오는 기병은 그야말로 재앙이었을 겁니다. 초원에서 태어나고 자라나 기병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거란족이니까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막고 있는 전면의 고려군을 뚫지 못하는 상황도 피를 말리는데, 무려 1만 규모의 기병대가 뒤에서 나타났으니 그나마 갖고 있던 일말의 희망조차도 완전히 상실하고 지휘관부터 말단 병사들까지 그대로 무너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나 더 요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통주 전투 당시에는 거란병력이 통주와 흥화진에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또한 흥화진은 최전방이었으므로 퇴각로가 완전히 열려있는 상황이었죠. 실제 고려거란 전쟁에서도 20만/20만으로 표기하던데 그 정도 포위라면 얼마든지 자기들의 구원군이 될 수 있었던 상황입니다. 심지어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는다고 해도 말이죠. 즉 돌아갈 퇴각로가 열려있다는 거 그러나 3차 거란 전쟁에서는 그런 병력따위는 전혀 없었죠. 물론 정예병 10만이라는 숫자는 고려에게 벅찬 숫자는 맞으나 아무리 정예병이라도 초능력으로 퇴각로를 개척할 수는 없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이 전투에 이겨도 다시 퇴각로를 개척하는 전투 최소 한번은 더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즉 자기들은 적을 전멸시켜야 하는데 고려군은 그냥 버텨도 된다는 생각까지 있으니 더더욱 급해질 수 밖에 없죠. 후방에서 고려병력 1만이 도착하는 순간 오히려 우리가 포위되었구나라는 생각으로 싸울 수 밖에 없게 됩니다.즉 사기가 거기서 바스라 지는 거죠. 싸울 마음이 없는 군대는 절대로 이길수 없다는 건 세계2차대전에서도 심지어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증명되고 있는 사실입니다. 또한 왜 병법에서 포위 섬멸이 위험한가를 제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봅니다. 이 상황에서 거란군의 사기에 유지 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사항 또한 중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2차 전쟁 당시 거란이 무로대에 20만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남하했다고 하는데, 그게 정말로 20만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만, 어쨌든 상당수의 병력을 후방에 둔 채로 남하한 건 사실 같습니다. 그로 인해 흥화진을 점령하지 못했어도 후방의 안정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3차 전쟁 당시의 거란군은 말 그대로 고립무원의 상태였고, 후방 지원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더 불리했습니다. 당시 거란군도 나름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고려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탈출하고자 했지만, 강감찬이 결국 정보전에서 승리하면서 거란군의 퇴각로였던 귀주를 정확히 예측해 냈고, 그곳에서 미리 기다리면서 먼저 거란군의 사기를 꺾고 들어갔다는 게 현대 학자들의 추정이고, 저 또한 그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퇴각로를 확보하지 못한 부대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 싸움이 된 것 같습니다.
사료에는 40만을 20/20으로 나눴다고 되어있긴한데 그이후 후방에 남은 20만에 대힌 기록이 전무함. 양규가 소수 병력으로 포위뚫고 나와서 곽주성 탈횐하고 후방에서 계속 게릴라 펼칠동안 가만히 있었다는게 말이 안되기 때문에 대부분 역사학자들은 애초에 거란병력 40만도 부풀려진거고 병력을 나누지도 않았을거라고 추측함.
고려의 군사력은 확실히 진짜 강했긴 했던것같음. 고려는 사병 군대들을 가지고 있던 지방 영주(호족)들의 힘이 워낙 막강했던 중세 봉건제 국가에 가까웠기에 군사반란이나 내전도 많았고 전쟁도 많았기 때문에 고려군들은 조선군과는 달리 실전 경험이 매우 많은 강한 군인이었던 것도 있고, 한반도라는 지형 자체가 워낙 정복하기 힘든 험난한 산악 지형이기도 해서 그런 지형에 산성을 건설해서 전쟁요새화 시킨후 수성전을 전개하면 그 지형 효과가 진짜 극대화 되는 것 같음. 그래서 미국이 베트남과 싸워서 패배한 것처럼, 당시 세계 초강대국인 거란제국이 고려를 6차례나 침략했지만 고려를 완전 정복하는데는 실패한게 아닌가 싶음.👍
강조가 대회전을 하게 된 배경에 뇌피셜을 조금 보태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 강조는 정변으로 권력을 잡았기에 30만의 대군을 쪼개 요충지 곳곳마다 맡겨 수성을 하기에 휘하 장수들을 충분히 믿지 못해서이지 않았을까도 생각됩니다. 삼수채에 이르러 통주 성 인근, 산아래, 삼수채 이렇게 군사를 분할만 할 정도로 강조의 신뢰를 얻은 장수의 수가 적어서이지 않았을까도 싶네요
정확한 분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추론으로는 고려군의 정예화도 굉장히 큰 승리 요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차 전쟁에 참전해서 실전을 겪고 살아남은 젊은 병사들의 나이대를 감안하면 3차 전쟁에서는 그 젊은 병사들이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까지의 나이가 됐을 가능성이 굉장히 큰데 실전 경험이 있고 체력도 그렇게 나쁘지 않은 그런 '전쟁기계'가 된 수준의 고참병들이 새로 온 젊은 병사들을 이끌었으니 아무래도 전투력이나 생존율이 굉장히 높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잔인한 얘기지만 고기도 잘 먹어본 놈이 잘 먹는 것처럼 사람도 잘 죽여본 놈이 잘 죽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무래도 지휘관의 명령을 이해하고 수행하는 능력도 높을 수밖에 없고 진형이 쉽게 와해되지도 않았겠죠.
말씀하신 대로 실전 경험을 갖고 있는 전력의 위력은 상당합니다. 로마군이 강력했던 이유도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갖춘 백인대장들과 고참병들 덕분이었다고 하지요. 그들은 통주에서 검차로 거란군을 실제로 상대해 본 경험을 갖고 있고, 또한 지휘관들도 당시의 경험을 살려서 더욱 보강했을 겁니다. 여러 정황이 고려에게 유리하게 셋팅된 것도 있지만, 실전 경험으로 인해 귀주에서의 고려군은 거란군을 상대로 더 잘 견디면서 싸웠을 것 같습니다.
그냥 실전경험의 차이였다고 보는 8년만에 귀주의 군대 대다수는 통주성 전투 당시 패잔병이던 고려군이 귀주에선 모루 역할을 해도 버틸.만큼은 되었으니까요 당시 대규모 회전에선 병사들의 숙련 및 실전경험이 중요 했는데 강조는 그걸 간과 해서 망한거라 보는 당시 고려군은 2군 6위는 소수일테고 호족 사병 조금에 대다수가 광군이라 부르는 예비군 이었을텐데 이 부대가 조선시절 임진왜란 시절 보다 나은 부대인지 의문 스러운 실제로 귀주에서는 대등하게 싸우는 판에 김종현의 1만 군대가 뒤를 쳤다고 나오니 망치와 모루 역할이 이상적으로 이루어졌고 드라마에서 처럼 전열이 무너지게 되었을때 고려 기병이 튀어나왔으니 고려군 전열이 몇시간이나 버틴 거니까요 통주전투 당시 진법 훈련 시키라고 하고 도순검사가 버틸 거다 한 이유가 강조도 초반엔 병사들의 숙련도를 못믿어 최대한 양규가 버티면서.시간을 벌어주길 바랬다고 봅니다
사실 예비군이 주력인 국가는 언제나 훈련도가 가장 치명적인 이슈였지요. 말씀하신 대로 병사들의 실전경험 또한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을 듯합니다. 통주전투에서 30만 가운데 생존자가 27만 정도는 될 텐데, 그들 중 다수가 귀주대첩에도 동원됐을 것이라 생각하면, 같은 병사를 가지고 다른 결과가 나온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경험과 훈련도였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두 전쟁에 승패 요인은 두개로요약 선빵 과 대의명분 입니다. 강조는 명분이 없는 싸움을 어쩔수 없이 벼랑끝 전술로 임해야 했고 강감찬에 경우 백성의 신뢰와 고려를 지키는 명분 신의를 버리지 않는 신하로 정평이 나있었으며 준비를 충분히 마친 채 ,신뢰와 은 방비책 그리고 제의2군 대비책등 많은 준비 기간 , 군사에 훈련기간 등은 무시할수 없 습니다. 운동을 그렇게 잘하는 운동 선수도 컨디션이 난조를 이루게 되면 본래 실력을 3분에 1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에 반에 충분한 힘을 비축하고 방비하고 정신 무장한 아마추어라도 최상에 컨디션과 준비가 적절히 이뤄진다면 자기보다 강한선수도 쓰러뜨리는게 승패에 요인이지요 강조는 선방을 맞은거랑 다름없고 대비가 안되어 있고 명분도 없었다 . 강감찬은 명분과 백성, 신하들에 기대를 한몸에 받고 , 그를따르는 목숨바치는 부하들도 많았으며 충분한 지략을 펼칠수 있는 시간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전투에 임했다 . 명장과 졸장에 차이가 바로 시대에 배경 , 우두머리에 성품 , 명분 에 하모니 전략과 지략은 순간순간에 작은 요인일뿐 큰 영향은 없음, 사실은 그당시 명분,선빵이 대부분임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귀주대첩의 묘미는 역시 적의 후방을 급습한 김종현의 1만 기병대였죠ㅋㅋ 수성전에 익숙한 한반도 정주민 부대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망치와 모루 작전 그 자체로서는 흠잡을 곳이 없는 병력 운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카이사르도 그렇고 역사상 이름 한 줄 남긴 명장들은 뭔가 하나로 관통되는 부분이 있는거 같아요
물론 방어측도 보급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긴 합니다만, 공격측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리한 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고려는 서북면의 보급 물자 비축에 꽤 공을 들였기 때문에 1차 고려거란전쟁에서는 서경 이북을 떼어주고 화친하자는 할지론이 우세했을 당시 거란에게 식량이 넘어갈 걸 우려해서 서경에 쌓아 둔 식량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고도 많이 남아서 강물에 던져 버릴 지경이었습니다. 따라서 장기전으로 가도 서경이 함락된다든가 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다음에야 고려는 보급 면에 있어서는 거란보다 훨씬 우위에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통주전투에서 고려가 서둘렀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보급은 우선순위에서 많이 아래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갈량과 사마의의 전쟁도 그랬고 보스의 마음가짐이 가장큰차이 이기는 전투를 하느냐vs전쟁에서 승리하느냐의 차이 소배압은 전투에서 이기고싶어했고 전리품을 원했고 강조도 마찬가지고,하지만 강감찬은 적을 후방으로 유인한후,갈수록 보급이 힘들어진 적을 괴롭히며 체력을 깎고 절대 질수없을때 한타를 크게이겨 전쟁에서 대승리,사마의와 강감찬은 자신들이 지지않을 경우의 수를 유도해서 적을 자신들의 뜻대로 만들었음,눈앞의 전투승리와 전리품에 눈이돌아간 상대가 덫에걸려 힘이빠질때까지
귀주 전투에서는 고려군의 수성전과 청야 전술로 강추위에 승리와 휴식없이 강행군으로 지친 거란 부대, 여러차례 소규모 전투에서 패배하여 병력손실과 사기가 떨어진 거란부대와 힘이 비축되고, 준비된 고려 군대와의 전투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고려군에 유리한 전투였다고 보여짐. 만약 초반 대등한 대결이었다면 기병전력, 특히 황제의 최정예 우피실 군에 대해서 고려군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음
다 이유가 있고 시대가 만든거죠 당시 중국의 거란과 송의 긴장타는 기간만큼 고려도 외교노선이 안정되질 못해서 국방비에 투자가 많았었고 그만큼 나라 재정에 부담을 줬던거고 조선은 안정되가는 중원의 명나라가 있으니 그들과만 외교만 잘하면 나라가 편안히 굴러갔던거고~ 참고로 국력은 조선이 고려보다 압도적으로 좋았습니다
썸네일의 제목서부터가 좀.... 단순히 지휘관 비교 뿐 아니라, 시기 전후의 맥락도 다르고 배경도 다 달랐습니다. 한쪽은 흥화진 전투 직후였고, 한쪽은 통주 전투 뿐 아니라 서경 전투, 곽주성 탈환전, 왕의 몽진, 애전 전투, 압록강 도하 기습전 등의 데이터베이스가 쌓여나가고 영향들을 준 상황이죠... 왜 A는 실패했고 B는 성공했는가? 같은 물음은 동시대 유사한 배경 하에서나 의미있는 질문 아닐까 싶습니다.
지채문이 27일간 달려간 거리에 개경이 있었다면 180킬로 떨어져 있는 지금의 평양이 서경 일리가 없음. 하루에 6킬로 뛰었다는 얘기인데 말이 되남? 군대 갔다 온사람이면 알겠지만 하루에 적어도 40킬로는 걸어서 가는 거리임. 약 1200킬로미터 밖에 서경이 있었다는 얘기임. 서경은 북쪽에 있지 서쪽에 있지 않음. 아직도 고려의 남경이 어디인지 아무도 모름. 서희의 강동6주는 압강의 동쪽에 쌓았는데 이 압강은 압록강이라고도 불리지만 현재의 압록강과 한자가 다름. 고지도에는 압강은 북경 옆에 있으니 그 곳에 강동6주가 있어야 정상임. 고려사에 나오는 지명들 중 특히 전쟁이 일어난 곳은 한반도에 하나도 발견안 됨. 고려와 요의 국경인 내원성과 안문관 모두 북경 서쪽 산서성에 있고, 고려가 안문관 앞에 쌓은 성들도 지금도 산서성에 있음. 서경에 반드시 있어야 할 사찰, 강, 산, 명승지 어느 것 하나 지금의 평양에서 발견되지 않음. 그리고 송나라가 쓴 고려도경에도 송의 동북쪽 즉 북경과 동북지역에 고려가 있고, 등주[산동성]의 맞은편에 고려가 마주 보고 있다고 기록하고있음. 북경 주변에는 고구려 유리왕과 대무신왕의 묘도 있고, 고려영이라는 주둔지도 남아 있음. 현재 남아 있는 바둑판식 현대 도시를 연상시키는 서경지도와 강의 흐름 등도 지금의 북경과 가장 잘 일치함.
우리나라가 조선군처럼 비겁하게 성안에 숨어 수성전만 해대는것이 아닌 고려군처럼 대회전으로 유목민족을 상대로 대등하게 겨룰수 있을정도로 강했다는게 이번 고려거란전쟁으로 증명된것 같습니다 군사규모며 장수들과 백성들의 애국심이며 ❤ 우리나라가 왜 조선을 혐오하고 고구려와 고려를 국명에 넣을정도인지 알수 있었습니다 역사멘터리님께서도 고려 관련 영상 알려주셔서 속이 다 시원합니다 ㅎㅎ
사실 저는 조선을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최대한 이해하려고 하고, 그렇게 나쁜 국가는 아니었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누가 저에게 하나의 삶을 선택하라면서 선택지로 고려 백성과 조선 백성의 삶을 제시한다면 망설임 없이 조선의 백성으로 사는 걸 선택할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후대인의 시각에서 보기에 아무래도 조선은 답답하고, 고구려나 고려는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듯합니다. 특히나 대외관계 및 전쟁 등에 있어서 만큼은 고구려나 고려가 조선에 비해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이 강했지요. 그래서 저도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아하는 역대 왕조가 고려입니다. 고려는 고구려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고, 그게 최근 드라마 등을 통해 알려지면서 많은 분께서 고려라는 나라의 특징에 대해 이해하실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영상을 전혀 안보신것 같네요. 평상시에 말타고 다니면서 수렵을 하는 유목민 기병과 평상시에 농사짓고 사는 정착민보병이 평야에서 싸우는건, 시작할때부터 50% 이상 패널티를 안고 싸우는겁니다. 나와 상대방의 약점과 강점을 파악하는 현명한 지휘관이라면, 당연히 평야에서 전투는 최대한 피하는게 지극히 정상입니다. 방성전에 주력하는건 "비겁한게" 아니라 정착민보병이 가지는 태생적 약점을 최대한 커버하고, 그 장점을 극대화하는 매우 효과적이면서 효율적인 전술입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비겁같은건 없습니다. 님이 전장에서 창칼들고 싸우는데 비겁한지 용감한지 따지겠어요? 어떤 방식을 쓰건 내가 피 덜 흘리고 이기는게 제일 중요한게 아닐까요? 국가간의 전쟁은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결과를 획득하는 정치외교적 행동이지, 피해는 얼마나 보는지 상관없이 용맹을 겨루는 결투장이 아닙니다. 그래서 손자병볍에도 안싸우고 이기는게 가장 상수라고 하는겁니다. 용맹을 겨루며 피투성이가 되며 싸우는게 가장 하수입니다. 그런건 필부의 용맹이고, 지도자가 그런 생각을 하게되면 국가를 멸망으로 몰아넣기에 딱 좋습니다.
조선과 고려의 국방 파이의 차이는 사병제도의 유무가 아닐까합니다. 사병제도는 왕권을 위협할수있는 잠재적불안요소이지만 전시에는 잘 훈련된 병사들을 손쉽게 모을수있는 장점 또한 있어서요. 고려의 사병제도가 없었다면 천년전 한반도의 거의 반토막 규모에서 40만대군을 갑자기 모은다는건 좀 힘들것 같아요.
일단 기본적으로 외교적 상황 자체가 달랐음. 고려시대에는 중국이 지들끼리 분열하고 유목민족들까지 꼽사리끼면서 국제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웠던 상황이라 고려도 거기에 맞춰서 국방력을 늘려놓을 필요가 있었던 반면에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중기까지 명나라라는 압도적인 패권국이 존재해서 위아래에서 소규모로 깝쳐대는 여진족이나 왜구 정도만 막아내면 됐었고, 심지어 그 명나라는 고려 말 이성계의 요동정벌(라고할뻔)을 기억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국방력을 강화하기 어려웠음
통주전투 패전과 귀주대첩의 승리는 강조와 강감찬 이라는 두 지휘관의 역량과 정치적 상황도 요인 이라고 봅니다.
저도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가 지휘관의 역량과 입장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강조는 섬멸에 가까운 대승을 거둠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유혹이 있었을 것 같은데 반해 강감찬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하겠다는 뚜렷한 목표에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 또한 역량에 의한 것이고, 나아가 자신이 선택한 길을 최대한 성공적으로 가는 것도 역량에 달린 것인데, 그에 있어서 강감찬이 강조보다 훨씬 더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그런것도 있고 무엇보다 2차때의 총력전 경험이 생기다보니 3차때는 준비를 잘했죠 2차때의 강조의 위치에 강감찬이었더라도 별반 차이가 없었을거라 봅니다
@@Hmentary 지피지기죠....
개인적으로는 귀주대첩의 가장 큰 승리 요인이 전투 도중 합류한 김종현의 1만 기병에 있었다고 봅니다. 사실 귀주 대첩 당시의 거란군은 말씀하신대로 거의 거지꼴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던 고려군과 팽팽하게 맞설 정도로 전투력 하나만큼은 정말 압도적이었죠. 고려군도 초반엔 그 기세에 생각보다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종현의 기병부대가 개경에서부터 거란군을 추격하느라 의도치 않게 합류가 늦어졌는데 그게 오히려 전투중에 적의 후방을 기습한 그림이 되면서 거란군 진영이 완전히 무너졌고 그 덕분에 전세가 기울어버렸죠. 그 1만명이 전투 시작 전부터 주력군과 합류해 있었다면 고려는 승리는 할 수 있었을지언정 거란군을 그렇게까지 궤멸시키는건 절대로 불가능했을거라고 봅니다
맞습니다. 배수진을 친 상태였던 거란군이 보병 위주인 고려군을 압도적인 기병으로 맞서며 전열이 밀리지 않았던 상황인 거죠. 그 상황에서 텅 비어있던 뒤가 뚫리니 전열이 완전히 무너졌지요. 역사기록의 부실로 설계인지 우연인지 알 수 없지만, 배수진이라는 승부수를 무너뜨린 한방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지요.
10만 거란군이 고작 1만 명으로 먼 궤멸? 강감찬이 거란놈들 조질거 다 조지고 뒤늦게 지원병들이 후방에서 꼽사리 낀거뿐이다. 역사 왜곡금지
동의합니다. 고려땅에서 일말의 소득도 거두지 못한 채 본국으로의 무사퇴각만 바라보고 버텨왔던 거란군에게 갑자기 후방에서 돌격해오는 기병은 그야말로 재앙이었을 겁니다. 초원에서 태어나고 자라나 기병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거란족이니까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막고 있는 전면의 고려군을 뚫지 못하는 상황도 피를 말리는데, 무려 1만 규모의 기병대가 뒤에서 나타났으니 그나마 갖고 있던 일말의 희망조차도 완전히 상실하고 지휘관부터 말단 병사들까지 그대로 무너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김종현이라는 정사에 한줄나오는 사람을 넘 대단한거로 띄우네 강감찬과 강민첨이 다때려놓은 상황에서 김종현이 꼽사리 낀거뿐 아무것도 한게 없습니다, 강민첨이 반령의 최후전투에서 거란군을 끝까지 추격해서 이긴 전투인데 뭔 듣보잡 김씨놈을 거론하는지 개어이없네ㅋㅋ
김종현이라는 정사에 한줄나오는 사람을 넘 대단한거로 띄우네 강감찬과 강민첨이 다때려놓은 상황에서 김종현이 꼽사리 낀거뿐 아무것도 한게 없습니다, 강민첨이 반령의 최후전투에서 거란군을 끝까지 추격해서 이긴 전투인데 뭔 듣보잡을 거론하는지 ㅋㅋ
하나 더 요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통주 전투 당시에는 거란병력이 통주와 흥화진에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또한 흥화진은 최전방이었으므로 퇴각로가 완전히 열려있는 상황이었죠.
실제 고려거란 전쟁에서도 20만/20만으로 표기하던데 그 정도 포위라면
얼마든지 자기들의 구원군이 될 수 있었던 상황입니다.
심지어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는다고 해도 말이죠. 즉 돌아갈 퇴각로가
열려있다는 거 그러나 3차 거란 전쟁에서는 그런 병력따위는 전혀 없었죠.
물론 정예병 10만이라는 숫자는 고려에게 벅찬 숫자는 맞으나 아무리
정예병이라도 초능력으로 퇴각로를 개척할 수는 없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이 전투에 이겨도 다시 퇴각로를 개척하는 전투 최소 한번은 더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즉 자기들은 적을 전멸시켜야 하는데 고려군은
그냥 버텨도 된다는 생각까지 있으니 더더욱 급해질 수 밖에 없죠.
후방에서 고려병력 1만이 도착하는 순간 오히려 우리가 포위되었구나라는
생각으로 싸울 수 밖에 없게 됩니다.즉 사기가 거기서 바스라 지는 거죠.
싸울 마음이 없는 군대는 절대로 이길수 없다는 건 세계2차대전에서도
심지어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증명되고 있는 사실입니다.
또한 왜 병법에서 포위 섬멸이 위험한가를 제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봅니다.
이 상황에서 거란군의 사기에 유지 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사항 또한 중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2차 전쟁 당시 거란이 무로대에 20만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남하했다고 하는데, 그게 정말로 20만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만, 어쨌든 상당수의 병력을 후방에 둔 채로 남하한 건 사실 같습니다. 그로 인해 흥화진을 점령하지 못했어도 후방의 안정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3차 전쟁 당시의 거란군은 말 그대로 고립무원의 상태였고, 후방 지원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더 불리했습니다.
당시 거란군도 나름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고려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탈출하고자 했지만, 강감찬이 결국 정보전에서 승리하면서 거란군의 퇴각로였던 귀주를 정확히 예측해 냈고, 그곳에서 미리 기다리면서 먼저 거란군의 사기를 꺾고 들어갔다는 게 현대 학자들의 추정이고, 저 또한 그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퇴각로를 확보하지 못한 부대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 싸움이 된 것 같습니다.
사료에는 40만을 20/20으로 나눴다고 되어있긴한데 그이후 후방에 남은 20만에 대힌 기록이 전무함. 양규가 소수 병력으로 포위뚫고 나와서 곽주성 탈횐하고 후방에서 계속 게릴라 펼칠동안 가만히 있었다는게 말이 안되기 때문에 대부분 역사학자들은 애초에 거란병력 40만도 부풀려진거고 병력을 나누지도 않았을거라고 추측함.
고려의 군사력은 확실히 진짜 강했긴 했던것같음. 고려는 사병 군대들을 가지고 있던 지방 영주(호족)들의 힘이 워낙 막강했던 중세 봉건제 국가에 가까웠기에 군사반란이나 내전도 많았고 전쟁도 많았기 때문에 고려군들은 조선군과는 달리 실전 경험이 매우 많은 강한 군인이었던 것도 있고, 한반도라는 지형 자체가 워낙 정복하기 힘든 험난한 산악 지형이기도 해서 그런 지형에 산성을 건설해서 전쟁요새화 시킨후 수성전을 전개하면 그 지형 효과가 진짜 극대화 되는 것 같음. 그래서 미국이 베트남과 싸워서 패배한 것처럼, 당시 세계 초강대국인 거란제국이 고려를 6차례나 침략했지만 고려를 완전 정복하는데는 실패한게 아닌가 싶음.👍
지형이 사기이긴함
베트남은.. 몽골도 못뚫었죠??
@@장정환-w3t베트남은 지형이 거지 같음
@@장정환-w3t 네~ 3번인가 쳐들어갔지만 다 못뚫음. 그리고 베트남의 명장 쩐흥다오의 활약도 있었음.
드라마에서는 광군을 오합지졸로 묘사하기는 했지만..
큰 맥락은 결국 호족들의 사병을 동원 체제로 편입시킨 것이었던 만큼 형편없는 수준은 아니었을 거 같아요
무엇보다 자기 고장은 자기가 지켜야 했던게 광군의 향방작계였죠ㅋㅋ
강조가 대회전을 하게 된 배경에 뇌피셜을 조금 보태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
강조는 정변으로 권력을 잡았기에 30만의 대군을 쪼개 요충지 곳곳마다 맡겨 수성을 하기에 휘하 장수들을 충분히 믿지 못해서이지 않았을까도 생각됩니다.
삼수채에 이르러 통주 성 인근, 산아래, 삼수채 이렇게 군사를 분할만 할 정도로 강조의 신뢰를 얻은 장수의 수가 적어서이지 않았을까도 싶네요
정확한 분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추론으로는 고려군의 정예화도 굉장히 큰 승리 요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차 전쟁에 참전해서 실전을 겪고 살아남은 젊은 병사들의 나이대를 감안하면 3차 전쟁에서는 그 젊은 병사들이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까지의 나이가 됐을 가능성이 굉장히 큰데 실전 경험이 있고 체력도 그렇게 나쁘지 않은 그런 '전쟁기계'가 된 수준의 고참병들이 새로 온 젊은 병사들을 이끌었으니 아무래도 전투력이나 생존율이 굉장히 높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잔인한 얘기지만 고기도 잘 먹어본 놈이 잘 먹는 것처럼 사람도 잘 죽여본 놈이 잘 죽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무래도 지휘관의 명령을 이해하고 수행하는 능력도 높을 수밖에 없고 진형이 쉽게 와해되지도 않았겠죠.
말씀하신 대로 실전 경험을 갖고 있는 전력의 위력은 상당합니다. 로마군이 강력했던 이유도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갖춘 백인대장들과 고참병들 덕분이었다고 하지요.
그들은 통주에서 검차로 거란군을 실제로 상대해 본 경험을 갖고 있고, 또한 지휘관들도 당시의 경험을 살려서 더욱 보강했을 겁니다.
여러 정황이 고려에게 유리하게 셋팅된 것도 있지만, 실전 경험으로 인해 귀주에서의 고려군은 거란군을 상대로 더 잘 견디면서 싸웠을 것 같습니다.
승리한 많은이유중 님이말씀하신게 실질적으로 가장큰 이유일듯하네요
그냥 실전경험의 차이였다고 보는
8년만에 귀주의 군대 대다수는 통주성 전투 당시 패잔병이던
고려군이 귀주에선 모루 역할을 해도
버틸.만큼은 되었으니까요
당시 대규모 회전에선 병사들의 숙련 및 실전경험이 중요 했는데 강조는
그걸 간과 해서 망한거라 보는
당시 고려군은 2군 6위는 소수일테고
호족 사병 조금에
대다수가 광군이라 부르는 예비군 이었을텐데 이 부대가 조선시절
임진왜란 시절 보다 나은 부대인지
의문 스러운
실제로 귀주에서는 대등하게 싸우는
판에 김종현의 1만 군대가 뒤를
쳤다고 나오니 망치와 모루 역할이
이상적으로 이루어졌고
드라마에서 처럼 전열이 무너지게
되었을때 고려 기병이 튀어나왔으니
고려군 전열이 몇시간이나 버틴
거니까요
통주전투 당시 진법 훈련 시키라고
하고 도순검사가 버틸 거다 한
이유가 강조도 초반엔 병사들의
숙련도를 못믿어 최대한 양규가
버티면서.시간을 벌어주길 바랬다고 봅니다
사실 예비군이 주력인 국가는 언제나 훈련도가 가장 치명적인 이슈였지요. 말씀하신 대로 병사들의 실전경험 또한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을 듯합니다.
통주전투에서 30만 가운데 생존자가 27만 정도는 될 텐데, 그들 중 다수가 귀주대첩에도 동원됐을 것이라 생각하면, 같은 병사를 가지고 다른 결과가 나온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경험과 훈련도였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두 전쟁에 승패 요인은 두개로요약 선빵 과 대의명분 입니다. 강조는 명분이 없는 싸움을 어쩔수 없이 벼랑끝 전술로 임해야 했고 강감찬에 경우 백성의 신뢰와 고려를 지키는 명분
신의를 버리지 않는 신하로 정평이 나있었으며 준비를 충분히 마친 채 ,신뢰와 은 방비책 그리고 제의2군 대비책등 많은 준비 기간 , 군사에 훈련기간 등은 무시할수 없
습니다. 운동을 그렇게 잘하는 운동 선수도 컨디션이 난조를 이루게 되면 본래 실력을 3분에 1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에 반에 충분한 힘을 비축하고 방비하고 정신 무장한 아마추어라도
최상에 컨디션과 준비가 적절히 이뤄진다면 자기보다 강한선수도 쓰러뜨리는게 승패에 요인이지요 강조는 선방을 맞은거랑 다름없고 대비가 안되어 있고 명분도 없었다 .
강감찬은 명분과 백성, 신하들에 기대를 한몸에 받고 , 그를따르는 목숨바치는 부하들도 많았으며 충분한 지략을 펼칠수 있는 시간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전투에 임했다 .
명장과 졸장에 차이가 바로 시대에 배경 , 우두머리에 성품 , 명분 에 하모니 전략과 지략은 순간순간에 작은 요인일뿐 큰 영향은 없음, 사실은 그당시 명분,선빵이 대부분임
잘 봤습니다. 구독 누르고 가요.
통주성 전투는 평지전 .. 2번 이기고
새벽에 기습 당하고 총관 강조의 방심 ..
( 검차부대 + 도리깨 ) 요충지 대응
강감찬 - 효율성 소규모 존버 🔥
바람 + 기마병 - ( 김종현 . 강민첨 )
🎉🎉
업로드 자주 올라와서 너무 좋아요 :)
영상 기다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기다리실 가치가 있는 영상을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대단해요! 한자 책을 읽어 가면서 이런 영상을 만든 역사멘터리님이 대 고려국의 충신입니다.
설명을 경청하니, 복싱경기가 떠오릅니다. 강조는 강한 상대에게 강대강으로 맞붙어서 초반 어퍼컷에 무참히 KO패 당한 반면, 강감찬은 잽을 날리면서 철저하게 아웃복싱으로 상대를 지치게 하여, 최후의 카운터 펀치를 날려서 통쾌한 KO승을 거둔 것이구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귀주대첩의 묘미는 역시 적의 후방을 급습한 김종현의 1만 기병대였죠ㅋㅋ
수성전에 익숙한 한반도 정주민 부대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망치와 모루 작전 그 자체로서는 흠잡을 곳이 없는 병력 운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카이사르도 그렇고 역사상 이름 한 줄 남긴 명장들은 뭔가 하나로 관통되는 부분이 있는거 같아요
통주에서 거란만 보급의 어려움이 있는건 아니었음. 고려도 30만을 먹이려면 장난 아님. 아무리 방어하는쪽이라도 보급선이 짧을뿐이지 고대전투에서 30만이 먹어대는 식량의 부담은 절대 시간을 끌수 있는게 아님
물론 방어측도 보급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긴 합니다만, 공격측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리한 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고려는 서북면의 보급 물자 비축에 꽤 공을 들였기 때문에 1차 고려거란전쟁에서는 서경 이북을 떼어주고 화친하자는 할지론이 우세했을 당시 거란에게 식량이 넘어갈 걸 우려해서 서경에 쌓아 둔 식량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고도 많이 남아서 강물에 던져 버릴 지경이었습니다.
따라서 장기전으로 가도 서경이 함락된다든가 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다음에야 고려는 보급 면에 있어서는 거란보다 훨씬 우위에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통주전투에서 고려가 서둘렀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보급은 우선순위에서 많이 아래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건 중국같은 개활지 이야기이지 좁고 산악지형인 한반도에는 해당 안됨
병사들도 1,2차 겪으면서 베테랑으로 성장하고 절실했던것도 있을
간단명료한 내용 감사합니다.
제갈량과 사마의의 전쟁도 그랬고 보스의 마음가짐이 가장큰차이
이기는 전투를 하느냐vs전쟁에서 승리하느냐의 차이
소배압은 전투에서 이기고싶어했고 전리품을 원했고 강조도 마찬가지고,하지만 강감찬은 적을 후방으로 유인한후,갈수록 보급이 힘들어진 적을 괴롭히며 체력을 깎고 절대 질수없을때 한타를 크게이겨 전쟁에서 대승리,사마의와 강감찬은 자신들이 지지않을 경우의 수를 유도해서 적을 자신들의 뜻대로 만들었음,눈앞의 전투승리와 전리품에 눈이돌아간 상대가 덫에걸려 힘이빠질때까지
말씀하신 대로 강감찬은 전투에서의 승리보다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원했고, 그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택했던 것 같습니다.
강조는 너무 성급했고, 그 성급함이 고려를 치명적인 위험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 망국의 주범이 될 뻔 했지요.
귀주 전투에서는 고려군의 수성전과 청야 전술로 강추위에 승리와 휴식없이 강행군으로 지친 거란 부대, 여러차례 소규모 전투에서 패배하여 병력손실과 사기가 떨어진 거란부대와 힘이 비축되고, 준비된 고려 군대와의 전투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고려군에 유리한 전투였다고 보여짐.
만약 초반 대등한 대결이었다면 기병전력, 특히 황제의 최정예 우피실 군에 대해서 고려군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음
말씀하신 상황을 만들기 위해 강감찬은 큰 그림을 그렸지만, 강조는 그렇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지 않은 채로 전면전에 들어갔기에 결국 패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거란의 후방을 급습한 그 1만 기병대가 참 역사적인 미스테리임.
오히려 그 기병대는 원래 와야 되는 시간보다 훨씬 늦게 도착했는데 그 이유는 끝끝내 밝혀지지 않음.
문제는 그 타이밍이 너무나 드라마틱해서 거란군도, 귀주의 고려군도 예상치 못했을 정도.
고로 강감찬장군이 강조장군보다 더 전략적으로 우월했네
우리 사회가 요 근래
조선의 형편없는 국력을
마주하면서 고려에 대해
가까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조선 갸들은 시작부터
중국의 속방을 자처하고
출발했습니다 부끄러운 단체였죠 그걸 국가라고 부르기도
쪽팔립니다
다 이유가 있고 시대가 만든거죠 당시 중국의 거란과 송의 긴장타는 기간만큼 고려도 외교노선이 안정되질 못해서 국방비에 투자가 많았었고 그만큼 나라 재정에 부담을 줬던거고 조선은 안정되가는 중원의 명나라가 있으니 그들과만 외교만 잘하면 나라가 편안히 굴러갔던거고~
참고로 국력은 조선이 고려보다 압도적으로 좋았습니다
@@역사잼 틀딱말투 진짜
통주 전투가 드라마에서는 무슨 커피 물 끓기도 전에 마무리 됐네요. 유명한 바둑씬을 재현한 것에만 의미를 두어야 할 듯.
정확한 분석이라 생각하네요... ^^
긍정적으로 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 개인의 주관에 따른 분석을 바탕으로 영상을 만들고 있습니다만, 가급적 많은 분들께 공감 받을 수 있는 내용을 담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썸네일의 제목서부터가 좀....
단순히 지휘관 비교 뿐 아니라, 시기 전후의 맥락도 다르고 배경도 다 달랐습니다.
한쪽은 흥화진 전투 직후였고, 한쪽은 통주 전투 뿐 아니라 서경 전투, 곽주성 탈환전, 왕의 몽진, 애전 전투, 압록강 도하 기습전 등의 데이터베이스가 쌓여나가고 영향들을 준 상황이죠...
왜 A는 실패했고 B는 성공했는가? 같은 물음은 동시대 유사한 배경 하에서나 의미있는 질문 아닐까 싶습니다.
유럽이나 중국이 훈족이나 몽골에 털리던 이유는
보병 방진이나 수성전이 의미가 없게 만들어버림
야전에서 민가 약탈하고 가버리는데
무슨 방법이 있나
3차전쟁이 아니라 세번째 격전이지
추론이지만 사실에 가장 근접하는 분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강감찬장군사위분은압해나주정씨정열장군이시고다산정약용선생선조님이시다경주최씨최치원선생사위분은압해나주정씨태사정언영이시고최치원선생이당나라유학시절에는압해나주정씨문중사람들이의식주를제공해드리고학업을도와드렸다고합니다참고하시길바랍니다
별 내용이 없네 ㅜㅜ
방성전보다는 수성전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귀두대첩없었으면 우리나라 어찌됐을지...ㅠ
요약하자면 발해도 고려도 내분이 아니면 거란상대로 싸워 볼만한 나라였음.
지채문이 27일간 달려간 거리에 개경이 있었다면 180킬로 떨어져 있는 지금의 평양이 서경 일리가 없음. 하루에 6킬로 뛰었다는 얘기인데 말이 되남? 군대 갔다 온사람이면 알겠지만 하루에 적어도 40킬로는 걸어서 가는 거리임. 약 1200킬로미터 밖에 서경이 있었다는 얘기임. 서경은 북쪽에 있지 서쪽에 있지 않음. 아직도 고려의 남경이 어디인지 아무도 모름. 서희의 강동6주는 압강의 동쪽에 쌓았는데 이 압강은 압록강이라고도 불리지만 현재의 압록강과 한자가 다름. 고지도에는 압강은 북경 옆에 있으니 그 곳에 강동6주가 있어야 정상임. 고려사에 나오는 지명들 중 특히 전쟁이 일어난 곳은 한반도에 하나도 발견안 됨. 고려와 요의 국경인 내원성과 안문관 모두 북경 서쪽 산서성에 있고, 고려가 안문관 앞에 쌓은 성들도 지금도 산서성에 있음. 서경에 반드시 있어야 할 사찰, 강, 산, 명승지 어느 것 하나 지금의 평양에서 발견되지 않음. 그리고 송나라가 쓴 고려도경에도 송의 동북쪽 즉 북경과 동북지역에 고려가 있고, 등주[산동성]의 맞은편에 고려가 마주 보고 있다고 기록하고있음. 북경 주변에는 고구려 유리왕과 대무신왕의 묘도 있고, 고려영이라는 주둔지도 남아 있음. 현재 남아 있는 바둑판식 현대 도시를 연상시키는 서경지도와 강의 흐름 등도 지금의 북경과 가장 잘 일치함.
직선거리로 볼때는 180키로라도 산과산을 넘고 길이 지금보다는 안좋았기때문에 하루6키로가 아닐수도 있지 않나요??
고려나 조선이 거란 여진을 상대하기 쉬웠던건 반농반목적인 자국 근거지를 두고 보급을 하는 전투스타일이라 상대하기 쉬웠는데 몽골은 그냥 전형적인 게르 유목민족 전쟁이라 마을 약탈해서 현지 보급하고 움직이는곳이 곧 본거지라 본거지 개념이 없어서 약점도 없음.
강조의 방심
고려의 국경지도를 제대로 된걸 올려주시죠 강동6주가 왜강남에 있는거죠
전쟁은 절대 방심하면안됨
솔직히 귀주대첩의 승리는
김종현장군이 9할은했다봅니다
강감찬이 다 몰아 패고 뒤늦게 김종혁이 꼽사리 낀건데 뭔 9할?ㅋㅋ 강감찬 아님 님조상들도 거란놈씨받이되었을수 있음
@@트루스 나름 비볐고 고려 입장에서도 이쯤 됐다 싶은 타이밍에 1만 철갑기병이 나타나니 거란군 기세는 안봐도 비디오죠. 토탈워 게임에서도 나름 잘 비비다가 적 예비병력이 뒤로 돌아오는거 보면 싸울맘 사라짐
교만한 자,반드시 경계에 실패해 전쟁에,전투에 실패한다.
그래서 경계에 실패한 자는 엄히 처벌해야 한다.
몽골의 역참제도를 보면 몽골의 주력군은 보병이 절대 아니라는걸 알수있음. 전 세계 어디서든 지치지 않는 기병을 쓰겠다는 뜻이고. 거란은 몽골처럼 역참제도가 없었지.
귀주성에 강감찬이 기다리고 김종현이 이끄는 기병들이 굶어 버려 지친 거란군 죽어라 추격하고 있었음
죽기살가로 싸우면 이기는데
몽골은 점령이 지체 되면 깔끔하게 그 도시버리고 약한 도시 약탈하고 초토화하고 다시 그 도시 초토화시킴. 거란은 하나 하나 교전하면서 들어오지. 몽골이라면 흥화진에 20만 두고 오지 않음. 애초에 몽골은 거란처럼 대군을 움직이지도 않지만.
우리나라가 조선군처럼
비겁하게 성안에 숨어 수성전만 해대는것이 아닌 고려군처럼 대회전으로 유목민족을 상대로 대등하게 겨룰수 있을정도로 강했다는게 이번 고려거란전쟁으로 증명된것 같습니다
군사규모며 장수들과 백성들의 애국심이며 ❤
우리나라가 왜 조선을 혐오하고 고구려와 고려를 국명에 넣을정도인지 알수 있었습니다
역사멘터리님께서도 고려 관련 영상 알려주셔서 속이 다 시원합니다 ㅎㅎ
사실 저는 조선을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최대한 이해하려고 하고, 그렇게 나쁜 국가는 아니었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누가 저에게 하나의 삶을 선택하라면서 선택지로 고려 백성과 조선 백성의 삶을 제시한다면 망설임 없이 조선의 백성으로 사는 걸 선택할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후대인의 시각에서 보기에 아무래도 조선은 답답하고, 고구려나 고려는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듯합니다. 특히나 대외관계 및 전쟁 등에 있어서 만큼은 고구려나 고려가 조선에 비해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이 강했지요.
그래서 저도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아하는 역대 왕조가 고려입니다. 고려는 고구려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고, 그게 최근 드라마 등을 통해 알려지면서 많은 분께서 고려라는 나라의 특징에 대해 이해하실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영상을 전혀 안보신것 같네요.
평상시에 말타고 다니면서 수렵을 하는 유목민 기병과
평상시에 농사짓고 사는 정착민보병이 평야에서 싸우는건,
시작할때부터 50% 이상 패널티를 안고 싸우는겁니다.
나와 상대방의 약점과 강점을 파악하는 현명한 지휘관이라면,
당연히 평야에서 전투는 최대한 피하는게 지극히 정상입니다.
방성전에 주력하는건 "비겁한게" 아니라 정착민보병이 가지는 태생적 약점을 최대한 커버하고,
그 장점을 극대화하는 매우 효과적이면서 효율적인 전술입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비겁같은건 없습니다.
님이 전장에서 창칼들고 싸우는데 비겁한지 용감한지 따지겠어요?
어떤 방식을 쓰건 내가 피 덜 흘리고 이기는게 제일 중요한게 아닐까요?
국가간의 전쟁은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결과를 획득하는 정치외교적 행동이지,
피해는 얼마나 보는지 상관없이 용맹을 겨루는 결투장이 아닙니다.
그래서 손자병볍에도 안싸우고 이기는게 가장 상수라고 하는겁니다.
용맹을 겨루며 피투성이가 되며 싸우는게 가장 하수입니다.
그런건 필부의 용맹이고, 지도자가 그런 생각을 하게되면 국가를 멸망으로 몰아넣기에 딱 좋습니다.
조선과 고려의 국방 파이의 차이는 사병제도의 유무가 아닐까합니다.
사병제도는 왕권을 위협할수있는 잠재적불안요소이지만 전시에는 잘 훈련된 병사들을 손쉽게 모을수있는 장점 또한 있어서요.
고려의 사병제도가 없었다면 천년전 한반도의 거의 반토막 규모에서 40만대군을 갑자기 모은다는건 좀 힘들것 같아요.
@@Hmentary저도 조선 백성으로 ㅎ 고려 백성으로는 못 살음 인생 난이도 급상승!!
요나라 전쟁
여진과 전쟁
거란 유민 쳐들어와 전쟁
몽골과의 전쟁
홍건적과 전쟁
전 고려 국토를 들쑤시고 다닌 왜구와의 전쟁
또 군사반란과 민란은 왜이리 많은지....
일단 기본적으로 외교적 상황 자체가 달랐음. 고려시대에는 중국이 지들끼리 분열하고 유목민족들까지 꼽사리끼면서 국제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웠던 상황이라 고려도 거기에 맞춰서 국방력을 늘려놓을 필요가 있었던 반면에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중기까지 명나라라는 압도적인 패권국이 존재해서 위아래에서 소규모로 깝쳐대는 여진족이나 왜구 정도만 막아내면 됐었고, 심지어 그 명나라는 고려 말 이성계의 요동정벌(라고할뻔)을 기억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국방력을 강화하기 어려웠음
지휘관의 지휘력 문제가 큼. 30만이 정예병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정도 규모면 수성은 하고도 남고 고려가 방어하기 어려운 땅이 아님
특히 몽골은 점령보다는 초토화로 말려죽이는 전술이면 거란은 발해때도 그렇고 반농반목으로 점령에 목적을 두었음
몽골의 경우는 후방 이딴거 신경 안쓰고 지도 끝까지 뚫고 다니는 스타일이라 흥화진이고 뭐고 퇴로 신경 1도 안쓰니까 고려군 입장에서 힘든거고 몽골이 고려 때릴때는 심지어 중국 집어삼킨 상태에서 때린거라 군량이 부족하지가 않음
거란은 고려의 주요성을 점령하길 원했고 빠르게 전쟁을 끝내길 원했음 장기전으로 끌지 않아야 송나라의 견제를 받을수있지 않았으니까. 몽골때는 고려를 점령하는게 목적이아니라 초토화시키는게 목적이라 기병으로 전국토를 빠르게 휩쓸고 막대한 피해주면 그만인데 심지어 송나라가 멸망한 상태라 후방의 위협도 없음
거란을 상대로는 고려가 저항이 가능했는데 왜 같은 퉁구스계 몽골족한테는 불가능했는가? 그 답임. 그 이유가 거란 상대로는 고려가 해볼만 했던거고.
발해도 요동라인으로 방어가 가능했는데 그 당시 거란은 반농반목이 아니라 유목민족이어서 점령보다는 초토화 전술이라
수성만 하면 국토 대미지가 누적되는데 심지어 화산폭발의 기록과 내분의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발해가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음
귀주 대첩은 전략상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섬멸하는 전투이고 통주 전투는 진군하는 적과 정면에서 맞아 싸운 전쟁인데...
완전 180도 다른 케이스....
패주는 격퇴당했기때문에 도망가는건데 거란군이 무슨 고려로 도망온거냐 고려로 공격왔다가 패해서 도망가다 섬멸당한거지
@@닭알-e2g위치와 무관하게 패주가 그런뜻아닌가요?
강감찬은 일부려 헌종에게. 지라하죠
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