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황을 뒤집은 한방, 인천 상륙작전(Operation Chromite)//조종의 NAVY썰(해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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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12 янв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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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상륙작전 #한국전쟁 #6.25
    상륙작전, 전황을 바꾸는 가장 결정적인 작전이다. 2차 세계대전기에, 상륙작전은 전장을 막론하고 자주 사용되었던 작전이었으며, 상륙작전이 성공하면, 적 후방에 제 2전선을 마련하고 보급로 및 퇴로를 차단하는게 가능하다. 하지만, 효과가 큰 만큼 리스크도 큰게 상륙작전이다.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어가, 교두보를 확보하고 후속 지원군이 상륙할 동안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륙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해군 전력은 물론, 상륙전력까지 수비군 보다 적어도 3배 이상의 전력을 확보해야한다고 알려져있다. 그리고 6.25 전쟁의 전황도 상륙작전으로 인해 완전히 바뀌게 된다.
    오늘 이야기 할 네이비썰은 한국전쟁의 전환기, 인천상륙작전이다.
    1950년 8월, 대한민국은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지난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에게, 3일만에 서울을 당함락하고, 8월에는 낙동강 최후 방어선까지 국군을 밀어낸다. 하지만 UN군의 빠른 지원과 일본에서 날아온 전투기들의 제공권 및 미 해군의 제해권 장악으로 대구 및 경주, 마산 방어에 성공하게 되면서, 북한은 공세 종말점에 다다르게 되었고, 더 이상의 공세가 힘들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김일성은 8월 15일 전까지 한반도를 점령하겠다라는 야심에 눈이 멀어, 부족한 보급과 장비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공격을 명령했고, 부족한 예비병력 보충을 위해,후방에 있던 병력까지 긁어모아 어떻게든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려고 했지만 실패한다.
    맥아더 장군은 낙동강 전선이 안정화 되었고, 반격할 만한 여럭이 충분히 있으며, 북한군의 보급로 및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상륙작전을 구상했고, 미 합동참모부도 이에 동의했다. 하지만 상륙지를 어디로 결정하느냐로 맥아더와 합동 참모부간에 시각 차이가 존재한다.
    당시 상륙지역의 후보지는 총 세곳이었다. 인천, 군산, 주문진이었다. 당시 합동 참모본부는 조수 간만의 차가 적고 상대적으로 상륙에 안전한 군산을 상륙지역으로 선택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군산이 아닌 인천에 상륙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었다.
    인천은 서울과 가장 가까우며, 당시 모든 보급로는 서울을 통과하기 때문에 상륙작전에 상공한다면, 단숨에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을 괘멸할 수 있다.
    하지만 합동참무보는 당연히 이런 전략 요충지를 북한군이 모를리가 없고, 때문에 상륙 시 저항이 상당할것으로 예상했기에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덤으로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지속적인 하역작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아까운 병력만 손해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맥아더의 강력한 추진 의지와 함께 1945년 9월 작성된 미 해군의 서해 측량도 및 상륙작전 기획서를 기반으로, 충분히 해볼 만한 작전이라며 맥아더 장군은 연합참모본부에 어필했다고 한다. 맥아더의 설득에 결국 연합참모본부도 맥아더의 손을 들어주게 되면서, 맥아더의 작전을 승인한다.
    이에 맥아더는 필요한 병력을 충원하고,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한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계획은 다음과 같다. 먼저 부산,사세보,고베,요코하마에서 미 해병대 및 육군 전차사단등을 상륙선단에 적재 한 뒤, 출항해, 제주도 앞 바다에서 랑데뷰한뒤 서해를 지나 곧장 인천으로 들어간다. 첫 상륙시 인천에 투입되는 병력은 미 해병 5연대와 미해병 1연대 및 한국 해병대였다. 인천 상륙작전에서 상륙지점은 세곳이었다. 월미도, 그린비치에 상륙하는 미 해병 5연대 3대대. 월미도 기준 북쪽, 레드비치에 상륙하는 제 5연대 1,2 대대 및 한국 해병대. 그리고
    월미도 기준 남쪽, 블루비치에 상륙하는 미 해병 1연대였다.
    상륙을 위해 주변 해역 소해 및 제해권 확보가 필수이지만 당시 북한 해군은 어뢰정 몇척 밖에 없는 무의미한 수준이기 때문에 한반도 주변 해역은 미국이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이에 연합군은 삼척, 군산,인천등에 포격 및 공습을 시작했고 특히, 군산과 삼척에서는 함포 사격을 실시하면서 상륙 전 화력지원을 하는거 처럼 연출해, 적에게 상륙지점이 어디인지 모르도록 연막을 펼친다. 그리고 인천 또한 9월 4일부터 15일까지 지속적으로 공습임무를 수행하면서 상륙지점을 확보하기 위한 사전 임무에 총력을 다한다. 맥아더 장군은 이런 연막작전에 더해, 만전을 기하기 위해 인천 상륙작전이 진행되고 있을때 장사리에 상륙을 시도하기도 하며, 실제 몇 안되는 상륙부대를 군산에 상륙시키는 척을 해 북한군의 눈을 가린다.
    작전의 핵심이 되는 미 해군 또한 상륙부대의 상륙 지원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다. 미 해군은 작전을 위해 7함대 예하 7개 임무부대를 편성하였고 상륙 지원 및 상륙부대인 TF-9의 4개군과, 항공지원을 위한 TF-7의 3개군으로 나누어져있었다.
    TF-7은 목표 상륙지점인 인천 주변에서 상륙부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TF-77 경항모 부대가 덕적도 및 영흥도에 있는 해안 부대 및 어뢰정들을 침몰 시킨다.
    이때 TF-9, 미 해군 상륙부대는 덕적도와 자월도 사이의 해협을 지나, 월미도로 진입하는 루트를 선택했다. 인천의 만조시간은 약 9시였으므로, 오전 6시에 그린비치에 첫 상륙 후, 다음 만조시간에 맞춰 레드비치와 블루 비치에서는 오후 5시 30분에 상륙하기로 한다.
    1950년 9월 10일, 인천 주변 해역에 위협을 제거한 미 해군은 본격적인 상륙작전을 시작한다. 오전 2시 45분 상륙 지원 함대에서 월미도를 향해 포격을 시작한다. 그리고 오전 4시 54분 부터 항공모함에서 콜세어가 이륙해 상륙 해변을 공습하면서, 해병대의 길을 뚫어준다.
    이에 발 맞춰 오전 5시 20분, 드디어 해병대에게 상륙명령이 하달되면서, 5연대 3대대는 오전 6시 33분에 월미도에 상륙한다. 거센 저항이 예상되었지만 미 해군의 충분한 함포 사격과 공습으로, 3대대는 큰 저항에 부딪치지 않는다. 오전 8시 서진하는 해병대는 섬 남쪽 끝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0시 45분, 둑길 끝부분을 점령하면서 12시 15분, 그린비치는 완전히 점령하기에 이른다. 첫 상륙을 순조롭게 마치며 인천 상륙작전에 순풍이 불기 시작한다.
    다음은 블루와 레드 비치 차례였다. 오후 2시 30분, 블루와 레드비치에 순양함들의 포격이 시작된다.
    블루 또한 상륙 전 사전에 충분한 제압 사격 및 공습으로 생각보다 큰 저항이 없었다고 한다. 이후 오후 10시까지, 블루비치의 교차로 및 언덕과 같은 거점을 확보 및 완전히 점령하게 되면서 이후 육군 병력이 상륙하는 중요한 교두보가 된다.
    그린과 블루가 쉽게 장악을 한데 비해, 레드비치는 그렇지 않았다. 오후 12시부터 지속적인 함포사격과 공습으로 그린과 블루비치의 북한군을 제압하기는 했지만 레드비치의 경우 남아있는 북한군이 여전히 남아있는 토치카에서 해안선을 방어하고 있었다. 오후, 5시 4분 부터 수륙양용전차가 상륙을 하면서, 레드비치에서의 상륙을 개시한다. 선두 중대가 상륙하고 30분 뒤 나머지 해병대 중대가 상륙을 위해, 방파제를 돌파 및 공격을 시작한다. 이때 소대장이었던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는 소대 선두로 사다리를 타고 방파제 위로 올라간다. 하지만 북한군의 사격으로 발도메로 중위는 가슴과 오른쪽 어깨에 피격을 당했고, 이 충격으로 핀이 빠진 수류탄을 몸 아래로 끌어 안아 수류탄 폭발에서 아군을 지켜낸다, 발도메르 중위는 이후 명예훈장을 추서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레드 비치 또한 수륙양육전차와 해병대 그리고 압도적인 화력지원을 받아, 결국 5시 45분 묘지 고지 점령 및 8대의 전차 상륙함이 상륙하면서, 오후 12시까지 레드비치 점령 및 관측소 고지를 점령한다.
    이제 연합군은 상륙거점을 모두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점령한 지역을 통해 1 해병대 사단에 기갑장비가 모두 상륙한다. 이제 해병대는 연대가 아닌 사단으로 규모가 확대되게 되며 X군단으로 불리게 된다. 이 X군단은 해병대는 물론 육군과 해군 모두 혼성된 군단으로, 인천과 서울을 점령하기 위해 육해군 합동 병력이었다.
    9월 15일, 북한군과의 끈질긴 시가전 끝에, 유엔군은 드디어 인천을 수복하였다. 이에 북한군은 인천을 포기하고 서울 방어를 위해 후퇴하게 된다. 이제 X군단의 1차 목표인 인천 점령은 달성하게 되었다. 이제 X군단은 서울 탈환을 위해 진군하기 시작한다.
    9월 17일, X군단은 서울 외각 지역인 김포에 도착했고, 김포 공항을 점령, 비행장을 빼앗았다. 이 공항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다. 기존 낙동강 전선에서는 비행장이 없었기 때문에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함재기나, 일본에서 이륙한 항공기로 항공지원을 해주었다. 하지만 드디어 김포공항을 확보하게 되면서 한반도 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공항을 확보하게 된거다.
    그 뒤 9월 20일, 유엔군 수색대가 한강을 건너 서울에 침투했었고, 28일 서울을 탈환하게 된다.
    한편 9월 16일, 낙동강전선은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적인 상륙을 맞춰 반격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서울을 탈환한 X군단은 북한군의 퇴로를 끊기 위해 동진하면서 대부분의 북한군은 남한내에 고립되 소탕이 된다. 그리고 10월 1일 국군은 드디어 38선넘어 이북으로 진군한다.
    인천 상륙작전은 국군과 유엔군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다. 이 작전으로 낙동강 전선에 있던 북한군은 보급이 완전히 끊기게 되고, 38선 이북으로 후퇴를할 수 밖에 없게된다.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상륙작전이 얼마나 적에게 치명타를 주는 작전인지 보여준다. 유엔군의 인천을 점령 소식이 들린 뒤, 낙동강 전선 북한군은 총 후퇴를 명령했고, 서울을 수복한 9월 28일 이후, 낙동강 전선에 있던 국군은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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