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선조와 율곡이이] 조선의 천재 율곡 이이, 그가 주장한 십만양병설은 왜 실패했을까? | [무묻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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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Опубликовано: 22 дек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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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wstory
다시 돌아온 조선왕조실록 시즌2
오늘의 주제는 바로
심각해진 문제 속 말라비틀어진 사회 속
한줄기 빛이었던 율곡 이이!
미래님들은 율곡 이이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율곡 이이의 어머니는 신사임당!
율곡 이이는 과거시험을 9번 봐서 9번 합격할만큼 천재였다?
율곡 이이의 선견지명으로 기름칠을 해둔 정자를 불태워 선조의 대피를 도왔다?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한 율곡 이이는
대체 왜 큰 업적은 없을까?
‘현재사는 심용환’에서
율곡 이이의 열망과
절망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영상이짧아서 아쉬우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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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편집본에서 길~게 전~부 보실 수 있답니다😘
‘현재사는 심용환’
좋아요+댓글+구독+알림설정+멤버십까지
언제나 감사합니다💕
2:28 퇴계 이황과 학술논쟁을 한 유학자는 '기정진'이 아니라 '기대승'이 맞습니다. (*기정진 : 조선 후기 유학자)
저도 검색해봤는데, 기대승이 맞습니다.
노사 기정진, 고봉 기대승
오류라고 댓글 달려고 했는데 ㅋㅋㅋ 감사합니다
깜짝 놀랬음..........혹시 필자가 잘못 알고 있었나 했는데 아니었네요
저도 알고있던 이름이 아니라 호를 불렀나? 했네요
이기이원론의 기대승 ㅎㅎㅎ
사실은 병조판서였던 이이는 자신이 구상해온 개혁안을 '군사력 증강을 위한 것'이란 명분을 붙여서 양병론으로서 제시했던 거임. 이것은 전쟁을 예견하고 10만 군대를 양성하자는 십만 양병론과는 전혀 다른 것이였음. 이이의 양병론은 자신이 제안한 개혁으로 국력을 증강하면 군사력 증강도 가능하다는 것으로 실상은 양병론이 아니라 국가 개혁론이였음. 그러나 이런 개혁은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충분히 있어야 했으나, 이이는 이런 세력을 확보하지 못해 선조를 직접 설득하는 것 만으로 추진해보려 했던건데 결국 실패했음.
그러나 임진왜란을 격으면서 사람들은 이이의 본래 취지는 망각하고 양병을 거론했던 것만을 기억하여, 이이의 양병론(국가 개혁론)을 초인적인 현자가 미래를 예측해낸 신비로운 일로 곡해해버리고 이이를 초인적인 존재로 신격화 했는데, 그게 우리가 아는 십만 양병설임.
이번 영상에서 평소 영상보다도 더욱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율곡 이이의 삶이 이렇게 흥미로울 수 있다니 놀랍습니다. 마지막 말씀에 더 큰 울림을 받았습니다. 퇴계 이황 이야기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항상 좋은 영상 제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12:33 "직접세와 간접세"가 아니라 "비례세와 역진세"라 하는 것이 맥락 상 적절해보입니다
직접세: 납세의무자와 조세부담자가 일치하여 조세부담이 전가되지 않는 조세
간접세: 세금을 납부하는 주체와 실제로 부담하는 주체가 다른 조세
비례세: 과세단위에 대하여 일정한 "세율"이 적용되는 조세
역진세: 과세 대상이 많아짐에 따라 "세율"이 낮아지는 조세.
공물은 인두세의 일종으로 역진세에 해당합니다.
이번 편 정말 좋네요 방황했던 청년 이이 때 모습이나 유명하지만 결국 선조가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아 개혁의 업적이 없다시피한 모습을 알게 되어 새로웠습니다
선조시대 인재풀은 고대부터 현대 한국까지 아울러봐도 역사상 가장 많았다고 여겨집니다. 세종때와는 반대인거죠. 왕이 훌륭했지만 인재가 빈약한 시대가 세종시대였고 선조시대는 이것과 정반대였어요. 이걸 돌이켜보면 결국 왕권을 가진자가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달라진다는걸 알수 있는거지요.
@@ego6929선조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게 많은데.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망명시도라는 무책임한 결정 한 번을 제외하면 사실상 세종에 비빌 수준의 유능했던 임금입니다. 그 수 많은 인재풀이라는 것도 결국 선조의 인재 욕심 덕분에 유지가 가능했던 겁니다.
이이의 경장론 즉 개혁을 선조가 받아들이지 않은 게 아닙니다. 새로운 정책에 대해 조사하고 준비하고 시범운영까지 착실하게 준비하긴 합니다. 중간에 왜란이 터지고 전후복구가 우선이 되느라 순위에서 밀렸던 거 뿐이죠.
@@품위있는녀석선조의 인성과는 별개로 능력만큼은 진짜였죠
괜히 당대에 목릉성세라는 말이 나온게 아닙니다
선생님의 강의는 사람 냄새가 나서 너무 좋습니다.
지금도 국민들이 선택하는 꼴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바가 없네요
좋은 내용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잘봤습니다!
역시 유교가 문제가 아니라 항상 기득권이 부패하는게 문제. 인간의 욕망을 제어하는 국가 시스템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사다리 타고 올라간 사람이 지 마음대로 하니까 나라가 개판 나는 것. 어느 시대나 같네 :)
아이들이 이이에 관해 물으면 대답하기 어려웠는데 같이 봐야겠어요😊
18:48 자막에서 '이발(율곡이이)'라고 표현하신 부분은 이발과 이이 두 인물들을 정철은 자신의 정적인 주요 인물들로 여겼다는 의미에서 표현 하신건가요? 그런데 '이발'은 동인 측 문신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선 중기 동인 측을 대표하던 문신이었던 '이발'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왜 괄호 치고 율곡이이라고 함께 자막에 표현하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부디 이 댓글을 확인하신다면 심용환 선생님께서 답변을 달아주시면 좋겠어요. 정말 궁금하네요.
11:31 고종황제가 입한군주제를 근본적인 이유네요.
의회 눈치 안보고 맘대로 돈을 쓰고 싶었던 욕망...
당시 마지막 희망이었던 독립협회의 수뇌부였던 윤치호, 이완용이 변절한 이유였다고 생각합니다.
?? 이완용이 왜 관직에서 박탈당했는지 역사 공부좀 하세요~
그리고 그 이후에 국민을 먼저 생각했는지 본인 가문과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물을 탐했는지 ~ ㅋ
역시 역사얘기할때 가장 빛이나십니다
오ㅏ.. 그동안 율곡 이이에 대한 오해가 풀리는 영상이었습니다! 무편집본도 얼른 보고 싶네요! 늘 대중의 인식을 깨치는 역사 콘텐츠 정말 감사합니다! ❤
잘 보겠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시대는 엄청 발전했는데 저 때의 나쁜 면모가 지금도 발현하는게 씁쓸하네요.
십만양병설은 율곡 선생이 지은 글을 총망라했다는 율곡전서에도 없고 선조실록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선조수정실록에는 나오고 율곡의 제자인 김장생이 지은 율곡행장에 나옵니다. 행장이란 위인전 같은 개념의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실제 율곡께서 십만양병을 주장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율곡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고 임진왜란을 실제로 체험한 이항복, 이정구의 경우 율곡이 십만병력을 키워야했다는 식의 언급을 하였으므로 마냥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조선은 지금의 예비군과 비슷한 개념인 병농일치제가 무너지고 모병제로 넘어가는 그 과도기에 있었고 그 과도기에 병농일치도 아니고 모병도 아닌 어중간한 ,실제 병력이 제대로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터진 것이 왜란이었습니다. 새로운 군대 십만을 새로 만드는 것이 시급한 것이 아니고 실제 병력 확보와 훈련이 더 큰 과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위기로 보건대 율곡이 십만명이란 숫자를 못을 박아서 새로 키우자고 말한 것이 아니라 국방을 위해서는 최소 약 10만의 상비 실병력내지 전시에 약 10만 정도는 동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 병농일치제가 무너진 상태라 심각한 문제이다. 이걸 어떻게든 해결해야 된다는 취지에서 주장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병역제도를 개편한다는 것은 나라의 근본을 바꾸는 것만큼 중차대한 일입니다.
조선왕조는 500년을 유지했기 때문에 수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중종, 선조 때의 병역제도는 방군수포제가 기본 뼈대였습니다.
병역의무가 있는 16세~60세 양인 남자는 실제로 근무하는 대신에 군포를 내면 그 군포로 일종의 직업군인이 중앙군을 유지합니다.
조선중앙군은 다섯개의 위를 가졌는데 이를 오위라 했고 1 위에 6천여명의 직업군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약 3만 명의 중앙군이 오위도총부 장부에 있었지만 이것조차도 유지하지를 못했습니다.
신립 장군이 출동명령을 받고 받아든 장부가 오위도총부 장부였지만 모두 흩어지고 몇명만 모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선조가 나름 전쟁에 대비했다는 임진왜란 직전의 상황이 이러한데 무슨 10만 양병입니까?
기록의 나라 조선의 그 어떤 공식적인 기록에도 율곡이 10만 양병을 주장했다는 기록이 없는데 무슨...
나라의 큰 변란을 겪은 뒤에는 의례 그 사건을 미리 예언했다는 전설이 떠돌기 마련입니다.
노론의 교주인 율곡도 임진왜란을 미리 예견하고 1만 양병설을 주장했다고 교주를 신격화한 것입니다.
율곡의 제자들이 율곡 위인전에 수록하고, 그걸 사관들이 다시 수정실록에 채록한 것 자체가 앞뒤 정황상 딱 들어맞는 이야기입니다.
조선 후기는 노론이 집권했기 때문에 이걸 기정사실화 시킨 것입니다.
선조 임금의 피란길을 미리 예견하여 임진강 나루에 화석정을 지었다는 이야기와 10만 양병설은 쌍둥이입니다.
율곡의 십만양병설의 최종 악용자는 자주국방 유비무환을 내세운 군사쿠데타 박정희라는데 눈길이 가야 합니다. 율곡의 국방강화론은 이탕개 난 때 나온 것이기에 임진왜란 때 실무력 대마왕 유성룡 선생이 율곡의 선명지견 운운하는 건 병법가 유성룡에 대한 폄훼입니다. 임진왜란 때 서애 유성룡의 고민은 선조가 희망한 명나라 원군 10만명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이 명군에 식량제공할 수 있는 군량미 삼천석, 5천석 조달을 놓고 고민했습니다. 동북방 이탕개 난 때 임진왜란을 대비해 십만양병론을 제시했다고 하는 건 율곡에 대한 찬양일지 모르나 따져 보면 율곡을 세상 물정 모르는 책상물림으로 비판받게 하는 격하론입니다. 농본사회에서 10만이나 되는 군사는 부국강병책이 될 수 있을까요? 유자들의 시무책은 적용(適用)의 지혜를 벗어나면 탁상공론이 될 따름입니다. 군대는 안전 도모 한편에 민폐이고 위험입니다. 오랑캐, 왜구의 침략이 없으면 재수고 침략 당하는 건 도리 없는 문치조선의 운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조광조를 이은 제2의 조선경장론자 율곡은 구체적 국방강화론의 선구자였다 선에서 마침표를 찍는 게 술이부작일 것 같습니다. (댓글달기 좋은 글이라 실례를 무릅쓰고)
이이의 양병설은 선조실록에도 관련 기록이 나옵니다만, 이것이 전쟁에 대비해 군대를 키우자는 의도가 아니라 이이가 주장해왔던 개혁안을 추진할 명분으로 양병을 이용한 것이였지요. 당시 이이는 국방부장관격인 병조판서였고, 자신의 개혁안을 추진할 명분으로 양병설 만한게 없었던겁니다.
이이의 양병론은 전쟁에 대비해 군대를 키우자는 것이 아니라, 양병을 위해 체제 개혁을 하자는 것이였습니다. 개혁을 통해 국력을 키우면 그 여력으로 군대도 재건이 가능하다는 논리였습니다. 이른바 선양민후양병(先養民後養兵; 먼저 백성을 기른 뒤 병사를 기를 수 있다) 논리였습니다.
임란 직후 병력 동원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개전초 일본군의 침공에 바로 노출된 지방에선 병력을 동원할 관리들이 도망치면서 동원 체제에 문제가 생겼던거지 그렇지 않은 후방에서 병력 동원은 제대로 진행되어 임진년 이듬해인 계사년에 파악된 동원 병력은 17만에 달했습니다. 따라서 실제 병력 확보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임란의 위기는 군제 문란에서 비롯된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조선으로선 감당 못할 규모의 침략을 받은데 있습니다. 잘 훈련된 10만 정예병의 침공을 감당할 능력은 조선에 없었습니다. 이건 조선의 한계를 넘어선 일이였어요. 일본을 낮춰보는 경향이 워낙 심해 우리가 대비만 정상적으로 했으면 일본 따위는 문제가 아니였다는 식의 자뻑이 이어져오는거 뿐이죠.
조선군의 핵심 인력인 '정병'이 군제 문란으로 제대로 훈련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지만 애시당초 부병제에서 병력들이 고도로 훈련된 정예병이 된다는건 시스템 상으로 불가능한 일이였습니다. '질'은 포기하고 '양'으로 승부를 보는게 부병제입니다. 서툰 병사들이라도 잔뜩 모아서 머리수로 대응한다는 거죠. 군사 기술이 정교하지 못하던 고대에는 이런 방식이 어느 정도 먹혔습니다만 16세기 말 정교한 집단전 전술들이 등장한 시기에 이런 부병제는 이제 몹쓸 제도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임진왜란 이후 부병제로는 안된다걸 절감하고는 직업군으로 구성된 5군영을 만들게 된거죠.
@@agm1144 당시 조선 인구가 500-600만인 상황에서 10만 병력을 유지한다는 것은 수나라가 5,000만 인구일 때 113만명 동원한 것과 같은 규모입니다. 정상적으로 될 수가 없습니다. 임진왜란 후기에 조선이 17만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전시에 일시적이니까 가능한 일이고, 평시에 늘 10만을 정규군으로 준비해놓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유사시에 10만명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의 예비군을 편성해놓자"는 것으로 이해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10:41 이 부분은 조직의 리더가 아닐지라도.. 한 개인의 성장에도 뼈저리게만큼은 아니어도 크든 작든 변화는 필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영상 내내 들었던 제기 느꼈던 안타까움의 이유라서 그런걸까요... 꽤 공감이 되는 ㅎㅎ
감사합니다
재밌게 보고 갑니다.
요즘은 역사를 돌이켜보면 너무 씁쓸해지고 불안까지 오는 세상이 되어버려 답답합니다.
왜 반복을 하려 하는지 감갑합니다.
설명을 너무 재밌게...ㅜㅜ
말씀하신 9번 장원한, 구도장원공 내역은 13세에 진사과 1회(초시), 21세에 진사과 1회(초시인지 복시인지 아리까리), 23세에 별시 1회 (초시), 하이라이트인 29세 생원과 2회 (초시/복시), 진사과 1회(초시), 대과 3회(초시/복시/전시) 총 9회입니다. 👍👍👍 천재이긴 천재임.
21세에 소과 복시에서 글짓기 시험인 진사과에서 장원했음.
내가 알기로는
과거는 소과, 대과 ,진사 시험으로 나뉘는데 소과 초시, 복시, 대과 초시 복시로 나눠져서 총 다섯 번 시험 쳐야 함.
소과 초시는 도의 인구비욜로 인원이 정해지고 각 지역 감영에서 치뤄짐.
소과 초시 합격하면 한양에서 소과 복시 다시 쳐서 인원 줄이는 작업하고
소과 복시 합격자들은 하급 공무원이 될 수 있고 성균관 입학할 수 있음.
원칙적으로 성균관 들어가서 300일 공부해야만 주어지는 대과 응시자격이 주어짐. 소과 복시에서 진사과 합격자와 생원과 합격자는 최 진사, 조 생원 같이 부를 수 있게 됨.
생원, 진사 즉 소과 복시 합격자들은 대과 초시로 인원 또 줄이고
대과 초시 합격한 이들만
다시 대과 복시 쳐서 수십 명으로 인원 또 줄임.
대과 복시 합격자들의 순위를 매기기 위해서 전시 쳐서 갑, 을, 병 순으로 순위를 정하고 이들은 고급 간부가 됨.
율곡이이는 문과 전시에서 33명 중 갑과 1등이었고 이순신은 무과 전시에서 29명 중 병과 4등이었음.
율곡이이의 29세 때가 하이라이트인 이유는
소과 초시는 유교경전(중용, 맹자, 논어, 대학, 시경, 주역, 서경, 예기, 춘추) 내용을 잘 이해했는지 평가하는 생원과와 글짓기 시험인 진사과로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음.
근데 율곡이이는 둘 다 응시해서
소과의 초시인 생원과와 진사과에서 다 1등 함.
그 다음 단계인 소과애서 생원시의 복시에서 또 일등 함.
대과에서 초시, 복시 일등하고
전시에서도 또 일등 했기 때문임.
그래서
율곡이이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 아홉 九, 횟수 度, 씩씩하다 壯, 으뜸 元, 존칭어로서 선생님 公 - 장원은 1등한 사람을 가리키며 13살 때부터 29세까지 응시한 과거에서 아홉 번 일등한 선생님이라는 뜻임)이라 부름.
이이가10뇬만더살았어도 임진왜란
은 미리막을수있었다.
정주행 재생목록 만들어 주세용! ㅠㅠ
이이, 성혼, 송악필, 심의겸, 정철 등은 연배가 비슷하고 정치적으로 상당히 급진적인 그룹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맞선 동인 그룹은 기존의 권세있는 집안 출신이나 영남의 남인들 처럼 온건한 자기 수행을 우선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서인이 득세한 것은 기득권이 아니라 재야 사림의 광범위한 지지에 기반했다고 봐야 합니다. 요즘 서인을 보수세력으로 묘사하나 실제 서인의 이이와 그의 제자들인 노론은 가장 성리학적 이상국가를 만들려고 한 급진 세력으로 보아야할 것입니다.
이게 왜곡된 미디어와 얄팍한 지식으로 역사를 논하는 유튜버들 때문임.. 서인이 오히려 성리학을 개혁적으로 접근했던 학파였는데. 훗날 노비제 폐지도 이런 서인들의 사상적 기반에서 시작된 거고.
기정진이 아니라 기대승인것 같습니다 2:28
십만 양병설은 솔까 저 당시 조선 상황으로 보면 불가능에 가까운 주장이지 ~ 군대는 그냥 양병설 주장하면 툭하고 튀어나오냐?
경제가 뒷받침 되야 하는데 ~ 저당시 조선은 먹고 살기도 힘들정도인데 군대 10만명 무장시키고 훈련시키고 이동시키고 먹이고 재워줄 시설 건설이나 가능했나 냉정하게 살펴봐야지
어중이 떠중이 그냥 사람 모아서 10만명이런건 의미없고~
부자감세의 역사는 무한 반복이군요. 그런데 그게 조선을 망하게 한 결정적인 원인이라는 사실은 몰랐네요. 감사합니다.
고단한 월급장이들 소득세와 부가세보다는 재산세 상속세 그런쪽으로 좀 더 부담해주면 좋겠네요. 그러면 소비도 좀 더 살아나고,
자영업 서민경제도 좋아질텐데. 부질없는 희망? 그대로 할말은 하면서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대한민국은 상위 1%, 상위 10%가 세금 부담을 죄다 끌어안는 대표적인 부자증세 국가인데요? 전체 소득세의 70%이상을 상위 10%가 부담하고, 상위 1%는 전체 종부세의 70%를 부담하고 있습니다. 반면 근로자 10명중 하위 4명은 세금을 한 푼도 안내는 나라에요. 나라에서 얻어가기만 하는 세금도둑들이 부자증세 하라고 떠들고 있는 한심한 나라입니다 ㅋㅋ
대한민국처럼 고소득자에게 세금많이 내게 하는 나라가 어딧나ㅋㅋ북유럽 사회주의국가말고는 없을걸요. 세금도 거의 안내는 인간들이 맨날 내 세금으로, 부자감세 타령하는게 문제죠
심쌤이 설명하신 율곡선생의 방식도 소득세를 늘리고 인두세를 줄이자는 건데 이분은 반대로 이해하신 듯. 토지=재산이니까 조세가 현대의 재산세라고 생각하신 것 같은데 농업국가에서 토지는 그 자체로 소득 이었음. 지금처럼 지대 개념이 아니라 실질적인 생산 수단이었던 거임. 오히려 민주시민이라면서 소득세를 안내는 범위가 하위 40퍼고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서 온갖 이중과세하는 현 상황이 오히려 비정상적. 모든 계층에서 소득세를 합리적인 수준으로 부담하고 상속세, 양도세 등 이중과세, 거래세를 경감시키는게 오히려 율곡선생의 뜻에 맞는 듯. 물론 현대에서는 토지공개념을 적극 도입하여서 지대추구를 극단적으로 억제시키는 것을 전제로 하고
@@user-qc8ii4hl9q "상위 1%가 내는 소득세가 전체 ‘세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5%가 아니라 6.7%밖에 되지 않는다(KBS)." 그러나 전체소득의 13%를 상위 1%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KBS "상위 1%가 내는 소득세가 전체 ‘세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5%가 아니라 6.7%밖에 되지 않는다." 상위 1%가 전체 소득의 13% 소득을 차지 합니다. 부가세 꾸준히 올라서 결국 물가 올랐습니다.
❤ 0:07
10만 양병설을 안한게 아니라 능력이 안됐음...선조도 나름 최대한 임진왜란 방비는 한거임...이순신장군 7품계 상승은 조선왕조내 유일함... 세조때부터 공신전 남발로 세수가 급락 하고 중종반정이후로 공신전이 더 늘어서 경제 개박살이남... 공신전은 면세라
조선의 최고의 빌런왕 연산군, 선조, 인조.. 이이가 왕을 잘못만났구나..
선조가 최고 빌런이라니?
저기요 이이가 뭔데요? 뭐 대단한 사람인데요? ㅋㅋㅋㅋ
@@komericanblues643 9번이나 장원급제하고 정책이 좋잖아 운좋았으면 나라를 잘 운영했을것 같은데
@@JidSet-OnAi 그건 망상 상상 현실은 아무것도 한것이 없네요~조선 고려 삼국시대 위인들 많습니다. 공통점은 초등학생도 다 아는 업적이 있지요. 장원급제 9번ㅋㅋ
신유공안이 왜 직접세 간접세 문제입니까?
종부세폐지 재산세감면이지
다 그런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명신들은 사망한 뒤에 군주가 후회하네요 에라이
역시 선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만 ㅋㅋㅋ
자주 잘 보고 있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18:50에 자막이
‘이발(율곡 이이)’라고 나오는데 같은 사람이 아닌데 이렇게 표기하면 혼동을 야기하는 듯합니다.
서인 정철이
이이가
동인에 속한 이발을 편드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될까요?😮
율곡이이가 갑자기 죽었다 부분에서 아! 하늘이 조선을 버렸구나 싶었다
저도 그런 생각이... 한편으로 뭐 세속적인 생각이지만 개인적으로 건강이 좋아야 한다는 생각도 드네요. 혹시나 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임진왜란 터지면 또 인생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는 짧은 생각이 드네요...
현재 인구가 5000만인데, 징병제로 50만 유지가 쉽지않음.. 저 때 인구로 10만 유지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양반 빠지고, 노비들 빠지고, 결국 양인들 중에 젊은 사람들이 대상자들인데..농업 중심 경제체제에서 굉장히 어려움..고려가 더 적은 인구로 더 많은 병력을 보유했던 건, 일본과 비슷한 가문들의 사병제를 실시했기 때문임..
+고려는 더 적은 인구로 더 많은 병력을 무리해서라도 유지할 대외상황 등의 당위성도 있었고, 결국 나중 가면 그 사병제의 폐해도 치르게 됬죠.
고려는 고려의 상황대로 합리적인 선택 했고 그 비용도 치뤘고, 조선도 마찬가지로 조선의 상황대로 합리적인 선택과 그 비용 모두 치른거죠
저런분들의 안타까운점은 정치적인 세력을 만들지 못하는것이다 정치란 세력의 싸움인데 매우 안타까움
예나 지금이나...
율곡 이이가 당시 상황을 꿰뚫어 보고 개혁을 하려한 인물인건 알겠는데
결국 이룬게 없었다는거네요
물론 그 이유는 달면 빨고 쓰면 뱉는 하성군 덕분이지만
이순신만이 아니라 율곡 이이에게도 그 따위짓을 했군요
뒤에 기축옥사를 봐도 그렇지만
대체 하성군 그 쓰레기가 어딜봐서 인재를 잘 활용한다는 건지 쯧
조선이 힘들어진건 확실히 세조때부터 차근차근 쌓여온 세금문제때문이었구나
율곡선생은 국방력 강화 주장은 했지만 뒷밭침 해줄 경제 정책은 없었습니다
돈이 있어야 군사력을 키울텐데 당시 양반 아니면 추가 세수 확보할곳 없음
당시 지방군은 추수 이후 잠시 모여서 훈련하는데 자비로 참가해야 했음
식비도 자부담임 이러니 훈련은 수성전 말고 할수 있는것이 없었죠
임진왜란에서 야전에서 조선군이 승리한 사례가 없습니다
율곡 선생은 장기간 평화로 국방력이 약화됬고 이런 때 외침오면 위험하니 대비하자는 원론적인 수준이었음
그것을 실현시킬 방책은 없었죠
슬프다…인간본성은 과거나 현재나 동일하니..조선시대의 썩은 나라 꼴이나…현재의 꼴이나 다른게 없네…ㅠ
징집을 해서 십만은 모을 수 있겠지만.. 정예병을 양성하는 것이 쉽지가 않음..당시 조선에서는 현실적으로 어려울듯
율곡의 제자들과 이황의 제자들이 서로 자신들의 스승이 더 성현이라고 우기다가 결국 그들은 스승들의 밤일광경을 보았다. 율곡이 참으로 얌전하게 일을 치른데 비하여 이황은 알려진대로 격렬하게 일을 해서 다음날 이황의 제자들이 "성현으로서 어찌 그렇게 짐승처럼 일을 치릅니까!"하고 묻자 이황이 웃으며 3번 항목의 부부관계에 대한 말을 하며 "율곡은 밤일도 그렇게 너무 조심스럽게 치르니 후사를 늦게 얻을 것이다"라 말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퇴계의 종가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17대 종손 이치억 씨가 퇴계철학을 공부하여 성균관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는 등 꾸준히 이어지고 있으나, 율곡은 본처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여 서자가 대를 잇는 등 후손들이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대를 근근히 이어나가고 있다. 현재 율곡 종손들에 비하면 퇴계 종손들은 자손 규모에서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다. 한편 사람들이 부인에게 이황에 대해 물으니 (앞에서 소개한대로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낮 퇴계랑 밤 퇴계는 다른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했다는 소리도 있다. 어디까지나 야사인지라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이 '낮 퇴계 밤 퇴계'는 현대에도 이황의 이중적인(?) 면을 가리키는 농담으로 자주 사용되는 말이다.
역시 조선최고의 쌍두마차 선조인조😊
상비군 10 만이 되겠냐고... 그보다는 침공시 연락을 최대한 빨리하고 적의 진격 속도를 늦추고 빠른 시간에 징병할 수 있는 체제 구축을 했어야지..
인구대비 십만이 가능한가 싶네요.
당시 인구가 500-600만이었으니 상비군으로는 절대 불가능하죠.
사피엔스 스튜디오에서처럼 배경, 음질도 좋아지면 좋겠고 편집도 집중되게 해주시면 보기 좋을 것 같습니다 심용환님 강의가 좋아서 들어왔다가 종종 나가게 됩니다 사피엔스는 몇 번씩 돌려보는데.
10만 양병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10만병력은 전문직업군인인지 징병병사를 포함하는 것인지부터 분별을 해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10만 양병이 당시에 조선이던 조선과 인구규모가 유사한 국가이던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10만이라면 오늘날 인구규모 비례대로 한다면 50만정도 규모에 해당됩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기준해서 50만양병을 한다는 것이 쉬운 문제일까요? 현재 한국군대 병력이 50만인데 이중 순수한 직업군인은 십수만 이하에 불과합니다.
반드시 전문 직업군인만으로 정병병력의 전부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일반 대다수 징집병사 및 병역의무이행을 목적으로 한 초급간부들의 상당수는 구조적으로 정병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결론적으로 10만양병설은 오늘날에 기준해서도 쉬운 문제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선조 초기의 명재상 이준경이 유언으로 "붕당을 경계하라"고 하니까 이이가 이준경이 늙그막에 맛이 가서 그렇다고 한 것을 보면 이이도 딱히 붕당대립 과정에서 잘 한 것은 없어 보임
기록도 없이 이이의 엄마라는 이유로 5만원권에...차라리 온국민이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한 문익점을 5만원권에..아니면 곰을 넣던지...모든 이의 엄마인
밀수범을 어떻게???
그냥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단체사진 넣으면 깔끔할거 같은데
훌륭한 분들이지만, 화폐모델이 될만한 분인지는 모르겠음
외국인에게 이황,이이의 업적을 설명하라면 막막함.
바꾸었으면 좋겠음.😢
우리나라 화폐는 한국 근대 민족주의 확립에 이바지한 세종(고유문자 한글창제, 한반도로 영토 확립), 이순신(민족 수호 영웅), 주시경(근대적 국어문법 수립), 방정환(근대적인 어린이 인권 개념 수립), 임정 위인 중 독재 논란 없는 분들 2~3분 정도(김구, 박은식, 김규식 등)로 하면 좋겠어요. 현대 공화국 체제 및 현대 한국 문화와 관련이 있는 분들로 해야지 유교국가도 아닌데 유학자에 그 엄마까지 지폐에 넣다니
독립투사들 좋은데 매국노들이 싫어해서
한줄평) 선조는 멍청한 리더였고 이이를 저격한 동인과 함께 나라를 말아먹었다.. 임난 이후의 성리학은 초기의 그 좋은 의도와는 다르게 더욱 변절되었고
임진강에 있던 정자를 태운것은 거짓입니더 그 옆에 쌓아둔 장작을 태운것 입니다. 다시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왜 역사수업은 이런걸 가르치지 않을까요. 인격과 가치관을 길러가는 청소년기 교육에서는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한데요. 저 역시도 이이에 대해서 많이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서인의 거두로 차후에 조선의 폐단이 되는 붕당정치의 당사자들을 길러낸 대스승이라고 생각해서 반감이 조금 있었습니다. 9번 장원의 결과가 대단해 실패를 모르는 백면서생정도로 생각했네요. 이이의 위대함을 단편적으로나마 알게된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론 어렸을때부터 퇴계 이황이나 율곡 아이를
훌륭하다는 사람들을 이해 못했고
고작 앉아서 공자 왈, 맹자 왈이나 주절거리는 선비내지 사대부 나부랭이가 뭐 대단하다고
호들갑인지 알수가 없었으며
숭문천무의 나라답다는 생각으로 경멸감을 느꼈는데
커가면서 꼭 그렇지는 않다는 생각은 하죠
물론 그래도 문약한 문치주의라 인식과 그걸 싫어하는건 지금도 매한가지지만
그래도 어렸을때 생각한 부정적인 인식만 있지는 않죠
적어도 퇴계 이황의 학문은 인간의 심성을 나름 논리적으로 설명했고
기대승과의 문답은 진정 질문을 통해 원하는걸 추구하는 학자의 면모가 있고
그외 여러 언행을 보면 입만 산 선비나 사대부는 아니고
율곡 이이도 말만 번지르르한 선비나 사대부도 아니란 생각은 합니다
@@수집쟁이드라하카 주희의 성리학은 양명학보다 꼴통이라고어느 유교학자분이 말햇어요.
이퇴계는 꼴통이에요. 노비도 300명 이상 둔 미니멀리즘? ㅋㅋㅋ
외쳐 ee!!
그냥 위인전의 상투적인 미화 일뿐! 그런 주장에 대한 기록도 동조여부에 대한 기록도 없음 다른 학파의 이견이나 반론기록도 전혀 없음. 오늘날 국회나 행정부에서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하자고 했을때 기록도 동의도 이견도 반론도 없었다는 것과 같이 허황된 기묘한 일이겠지요.
율곡 이이는 지혜로운 신하이자 학자인듯 합니다.
와...유성룡도 참....속좁은 인간이었구만..ㅡㅡ;
역시 대가리가 무능하면 손발이 아무리 뛰어나도 볍진이 되는구나... 딱 지금상황이네...
문재인이 때부터 대가리가 무능하니 답이 없네요 ㅜㅜ
이제 십만양병설 이이는 그만 놓아주자.ㅋㅋ
무능한 왕과 탐관오리에 나라가 망하기 일보직전까지 갔다가 장군님과 민초들의 희생으로 살았구나
정치가율곡선생이10만이라는구체적숫자를제시하지않은건팩트입니다결론은,당시조선왕조체제에서10만군사를키운다는것은실현가능성이제로였다고봅니다율곡선생도이걸알고있었다고봅니다
이놈의 나라는 몇백년이 넘어도 제자리네
율곡도 결국 명나라 사대주의자라 기자실기를 저술했지요 조선은 단국을 인정하지 않고 중국의 기자 후손으로 생각했지요 아직도 대한민국 지폐에 성리학 사대주의자가 그려진건 왜 아무도 이이제기 하지 않을까요?
조선은 진짜 희한한나라였음. 근데 그나마 제대로 된 정치가가 나오면 ㅄ간은 왕이 말아먹었으니.
지지리 못난 인간들이(소인) 잘난 인재를 시기해서 끌어내리는 역사 중상과 모략.
이 사람들이 백성을 백성으로 보지 않았나
이이는십만양병설을주장한적이없습니다병력을키워야한다는양병설을주장했을뿐입니다엿사는팩트에기반해서해석해야한다고봅니다심용환선생얘기는당대의1차사료에는나오지않고,율곡제자들이쓴문집에만나옵니다이건팩트입니다
전문가가 썰을 진실인양 호도하다니
아니 이래서 책 한 권만 읽은 애들이 무서워 ㅋㅋㅋ 이재호 교수가 말한 거 반박한 교수들도 많이 있는데 참 ㅋㅋㅋ 수정 신록 신뢰성이며 당시 인구 문제도 반박 주장이나 이미 어용군 등도 몇만이었고 양군문 군사도 20만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무슨 이재호가 한말은 다 팩트라고 말을 하시는지 ㅋ
십만양병설이 아니라는 팩트도 소실되서 없는게 사실아님? 팩트를 알 수가 없는데 님이 아는게 팩트인양 말하는 것도 웃긴데요? ㅋㅋㅋ
양병을 주장한 본질은 변함이 없잖습니까~ 그렇게 비난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튼 양병을 강조해 국가의 군사력을 키우고자하는 이이의 뜻은 변함없지 않나요? 이런 사실을 알린다는 것 자체로도 칭찬받아 마땅한 일인데 그렇게 매몰차게 말하는 건 좀 아쉽네요😢
10만이라는구체적인숫자를제시하지않은건팩트입니다결론에서보면,10양병자체는저선왕조에서실현불가능했습니다이건팩트입니다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한적은 없습니다. 이는 거짓말입니다.
기대승은 조선중 인물, 기정진은 조선말 인물. 둘 다 행주 기씨인 것은 맞습니다. 퇴계 이황과 사단칠정론을 논한 사람은 기대승입니다.
북한사학계에서는 율곡을 대학자, 이황을 사대주의 쓰레기라 가르칩니다. 아니 이황에 대해 아예 언급하지 않습니다. 북한에서 보면 율곡을 조선시대 청빈한 대학자로 가르치며 학교이름도 율곡고급중학교 라는 이름으로 율곡을 추앙합니다.
북괴의 역사관은 거론할 가치가 없어요!!
그...북한 사학계는 이순신장군마저도 조선왕조를 지켰다고 꼬투리잡는, 오직 주체사상 기준으로만 평가해서 딱히 북한 사학계의 "의견"은 가치가 없습니다.
뭐 고구려, 고려를 극도로 중시하니 그쪽 유물 보존은 잘 했겠...지?라는 가치는 있겠지만요
기정진이 아니고 기대승입니다. 호남학파 기대승
실록에 없는 얘기는 헛소리 뻥이고 날조입니다
외쳐 EE
역사 가지고 선동질 이나 하는건 역사가가 아니지 역사가인 척하는 선동꾼 이지
이때 까지 서인이 보수 색이 짙고 동인이 진보적인 색을 나타내는 집단인줄 알았는데 좀 의외에 사실을 안것같네요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
십만양병 지어낸 얘기라는데?
지금도 북한이 곧 쳐들어온다고 경비태세 강화하고 국방예산 늘리고 병역기간 늘리는 등 하면 여론 난리날겁니다. 어렷을때는 왜 대비를 못했을까 생각했는데 어른되어보니 과할정도로 대비 못한게 당연한거였죠. 그래도 조선입장에서는 나름 1~2만 침입규모 상정하고 대비는 했으니.
사실 국방예산이나 경비태세 지금도 충분하다고봅니다 문제는 군대 다녀오셔서 아시겠지만 날먹 직업군인들도 많은게 현실이고 미군과 합동훈련하면 많이나오는 문제가 지휘관 역량 부족이 큽니다 보급도 엉망이고요 참고로 제부대는 훈련중 포대장 지리미숙으로 잘못 진지이동하여 포사격맞고 가상이지만 전멸했습니다
별들과 군지휘관 역량 키우고 방산비리만 없애도 충분히강군이라고봅니다
국방예산 많이 늘어났음.
보면 볼수록 선조가 무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퇴계도, 율곡도, 유성룡도, 이순신도, 권율도, 오성과 한음을 다 거느리고도 나라꼴을 그렇게 돌아가게 한걸보면...
성학십도요 ㅋ ㅋ ㅋ
ㅋㅋㅋㅋ 지금과 같네
노비 100넘게 사육하느라 바쁘셨던...
학자라는게
당대에 일본도 없고 중국도 없는 노비제로 밥 먹고 살았던 인물..
이건 이황도 마찬가지..
식량을 생산하는데 노비를 쓰는 것은 부가가치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멍청이나 하는 짓인데..
그런자 둘이서 뭘하겠다고..
나라는 점점 가난해지는 것은 당연한것..
빨랑 우리 돈에서 빼라..
저것들이랑.
저거 가르친 엄마랑..
노비 왕국 만든 세종이랑..
이게 무슨 노비의 나라도 아니고
이런 것들만 돈에 박아놨냐?
이런자들에게 뭐가 학술인가?
성리학의 인을 논하면서
집에가면 사람을 가축처럼 부리는데.
풉 그놈의 인재 두 번만 길렀다간 임진왜란 때 일본 영토 되고도 남았겠네요.
기정진??? 고봉 기대승입니다.ㅜㅜ
양병설은 허구고 소설인데 뭔 율곡
항상 생각하는 건데 율곡 이이랑 선조는 정말 멍청하다는 생각을 함. 왜란이 터졌으면 그 당시 영향권 안에 있는 여진 부족을 배태워 일본 빈집털이를 시켰어야지. 실제 역사에서 누르하치도 선조에게 원군 보낼까라고 물어봤는데 선조가 거절함. 이유는 누르하치가 원군 보내는 척하고 우리 나라 잡아먹을까 걱정해서라고 하는데 사람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님. 차라리 누르하치를 일본 본토로 빈집털이를 시켰으면 임진왜란도 훨씬 적은 피해로 막아냈을 거임.
그럼 누르하지가 배타고 일본을 갔을까요? 말타고 전투하는 게 장점인 여진족이? 그렇게 쉽게 외교가 되는 게 아닙니다.
선조가 누르하치한테 배타고 일본 치라고 누르하치가 예 알겠습니다 하고 잘도 갔겠다 ㅋㅋㅋ
@@품위있는녀석 ㅋㅋㅋ 여진족은 농업과 어업을 겸했고 해적으로도 악명을 떨쳤는데 잘 모르시나 보네요. 일본 헤이안 시대인 간닌(寛仁) 3년(1019년) 여진족의 일파로 보이는 집단이 주체가 된 해적 집단이 일본의 이키(壱岐) ・ 쓰시마(対馬) 및 지쿠젠(筑前) 등을 침략한 사건을 도이의 입구(일본어: 刀伊の入寇)라고 합니다.
@@fipiphihi475 누르하치가 임진왜란때 병력 보내주겠다고 먼저 나서서 말했는데? 글을 안 읽으심?
@@크레용사님일어나세요누르하치 뭘 믿고 지원을 받아요? 그 야심을 생각하면 안 받는게 맞는것 같습니다
돈 때문에 망한거지 뭐
대가리가 선조이고 이승만이고 윤씨다
율곡 이이는 십만양병설을 주장한적이 없어요~ 오히려 반대의 주장을 했죠~ '십만양병설'은 이이의 제자라고 할수있는 송시열이 만들어낸말일 뿐이죠. 율곡 이이가 남긴 어떤 문헌에도 '십만양병'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역사학자라면 1차사료를 가지고 팩트로서 설명을 하셔야죠. 아직도 잘못된 역사를 연구도 없이 그대로 가르치는 현실이 안타깝네요. 윤봉길의사가 물통폭탄이 아니라 도시락폭탄을 던졌다고 하는거랑 뭐가 다른가요~
이이가 십만양병설 주장했다는 것은 사실인가요?
당시 조선 인구가 얼만데 그런 주장을.ㅋ
화폐에 나올 인물들은 절대 못됨.
둘 다 입으로 조선을 말아먹었다고 봐야함.
역사가냐? 선동꾼 이냐?
지금 누구때문에 나라가 쇠퇴해가고있지
이재명때문에ㅜ
국방력 올리려면 엄청난 비용이 필요하고 그럼 세율올려야하고 농번기에 노동력을 상당부분 강제차출해야 하는데 이거 조선백성들이 감당가능함? 일본의 세율이 거의 50%였고 조선은 20%수준이었는데 50까지 올릴수 있음?10만 양병은 그당시 조선의 경제력이나 사회구조상 불가능했고 오히려 반란부추기는 요인이 될 가능성이 컸기때문에 못함. 조선은 유교사상에 빠져서 상공업 천시 인재천시 부자가나오면 수탈해서 부자가 나오지 못하게하는 시스템 그러면서 내부통제만 강화한 폐쇄적인 체제여서 권력을 가진 사대부라도 가난했음. 딱 지금의 북한임. 지금도 그러고 있음. 평등사상에 빠져서 인재뽑기위한 경쟁을 나쁜것으로 치부하고 인재가 부자되는 것을 기득권세력으로 악마화함 그러면서 자기들이 치부하는 것은 정당화함. 김제동 김어준처럼. 하는 짓이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하던 짓 그대로임. 21세기 성리학이 지금의 무지성 평등사상임. 말만 항일외치지만 실제한 짓은 일제에게 조선을 바치기 좋은 병약한 국가로 만들었던 조선유학자들 그행동 그대로임.
그리고 한반도 5천년 역사에 명확한 업적을 가진 위인이 많은데 신사임당이 생식기가 여자라고 당당히 떡 박혀있는건 역사학자로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진짜 님도 대단하심. 업적도 없는 사람 위인이라고 하는거 보통 일 아님. 이순신 권율 이런 사람이야 이야기하기 쉽지. 여튼 대단
10만 양병설 자체가 비현실적인 거였음. 당시 인구 남북 합쳐 180만. 여성 빼고, 유소년과 노인 빼고 당시의 평균수명 고려하면 멀쩡한 남자 몽땅 합쳐야 10만 남짓, 근데 어떻게 상비군10만을 양성해? 비현실적이고 실행 불가한 것이 10만 양병론이었다.
후기에서 서인에서 10만 양변설을 주장한것뿐이지. 이이는 10만 양병설 주장한게 아님. 이이가 주장한거는 조선초기의 제대로된 중앙군 수천명은 유지 시켜야 한다는거를 주장한것일뿐임. 마치 3천궁녀 같은 후대 유학자들이 뻥튀기 숫자를 한것에 불과할뿐임. 상비군+예비군 개념으로 본다면 10만은 유지가 가능. 중앙 직속군대+국경수비대 개념의 정예5만, 상시 예비군 5만은 유지 가능했고, 그리 해야 했지만 조선 자체가 문제가 군역의 모든 장비밎 물품을 죄다 병역의 대상자에게 떠넘겨버렸음. 이게 진짜 문제인것.
인구 180만 통계 어디서 나온거에요? 당나라 때 백제 인구가 이미 300넘었는데
@@arsenalatleletico9874 180만호로 알아들은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