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ia Callas & Sumi Jo (Vocalise "Film: The Ninth Gate Movie" - Wojciech Kil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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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1 дек 2024

Комментарии • 16

  • @francoisegareau9411
    @francoisegareau9411 2 года назад +2

    Rare and moving pictures, rare and, beautiful sound, thank you very much for sharing. What an artist she was

    • @doloresaquilina3205
      @doloresaquilina3205 2 года назад

      I discovered Callas in 1959 and haven't stopped loving her. She will always be Numero uno por moi! Many thanks.

  • @missymissymiss5192
    @missymissymiss5192 Год назад +1

    Sumi Jo’s vocals are so haunting. Beautiful tribute to both singers.

  • @ameliascibilia6272
    @ameliascibilia6272 2 года назад +3

    Stupende foto che ritraggono gli anni del dolore e dei malinconici struggenti ricordi , ma l'allure della divina era sempre presente. Grazie per la condivisione.

  • @mariadragoni83
    @mariadragoni83 2 года назад +1

    Che bella voce Sumi Jo, la Callas è stata fortunata perché si è saputa realizzare come nessun soprano, era un genio ed ha vissuto felicemente... solo nel 1975 quando purtroppo morì l'uomo che amava si intristí e si chiuse, passò 2 anni in una grande tristezza...

  • @caputdraconis1699
    @caputdraconis1699 2 года назад +1

    bellissimo video di foto alcune che nn avevo mai visto. bravi bel lavoro, vi ringrazio❤❤❤

  • @doloresaquilina3205
    @doloresaquilina3205 2 года назад +2

    Your love of Maria is evident from these photos. Many thanks for sharing,

  • @허우영-b5m
    @허우영-b5m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1

    보칼리제의 The Ninte Gate Movie
    마리아 칼라스도 불러군요.
    [마리아칼라스 생애와 활동]
    여기에 마리아칼라스 화면이 나와서 인터넷에서 그녀생애를 몇편으로 축약하고 나름대로 편집하였습니다
    [마리아 칼라스]
    1.1. 유년기[편집]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 있는 한 병원에서 그리스 이민자 부부였던 요르고스 칼로게로풀로스(미국으로 귀화하면서 조지 칼라스로 개명)와 에반젤리아 디미트리아두의 1남 2녀 중 막내이자 둘째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는 그리스에서 약학을 공부했지만 미국으로 이민와서 노동자로 일했다. 하지만 노동을 하면서도 예전부터 하던 약학 공부를 주경야독으로 이어가 미국에서도 약사 자격증을 획득했고 자신의 약국을 개업했다. 조지가 가족에 별 관심이 없었고 매사에 의욕이 없었다고 하지만 칼라스 3모녀는 서로를 비방하는 자서전을 경쟁적으로 내던 관계였으므로 이런 주장을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경우가 많다. 칼라스 가족의 여러 일화를 볼 때 그래도 아버지 조지가 가장 사람 구실을 한 편이었다. 조지는 대공황 때 주식 투자에서 돈을 날린 것을 제외하면 흠잡을 데가 없는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어머니 에반젤리아는 배우와 가수가 꿈이었으나 이를 이루지 못했다. 에반젤리나는 아이들의 장래에 지나치게 간섭하고자 했는데, 칼라스의 경우 세 살때부에반젤리아의 강요 때문에 성악을 비롯한 음악 공부를 억지로 해야 했다 에반젤리나가 자신의 이루지 못한 꿈을 딸에게 지나치게 강요했다는 시각이 많다.
    하지만 칼라스는 훗날 이 시절을 보람없고 지긋지긋한 고생의 나날이라고 부정적으로 회고하며 "그런 짓을 못하게 금하는 무슨 법률이라도 있어야 한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서 어린 시절을 빼앗아선 안 된다"고 말했다.
    조지와 에반젤리아의 불화는 심했고, 1937년 에반젤리아는 남편을 떠나 두 딸을 데리고 그리스로 떠났다.
    1.2. 그리스 시절[편집]
    1940년부터 그리스가 제2차 세계대전에 휘말리면모녀는 그리스에서 극도로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다.
    아테네 음악원에서는 기초 성악 기교가 전무하다는 이유로 퇴짜맞았고, 이어 그리스 국립음악원에서 두 번째로 오디션을 통해 입학 자격을 인정했다.
    음악원에 입학한 칼라스는 트리벨라의 문하생이 됐고 프랑스적인 가르침이었으며,이탈리아 오페라를 부르기 위한 벨칸토 창법의 기본인 Chest notes등은 후에 엘비라 데 히달고에게서 배우게 되었다고 회고.
    1938년에 아테네 음악원으로 다시 데려가 오디션을 보게 했으며 교수는 '엘비라 데 이달고'였는데,
    이달고는 칼라스의 목소리에 긍정적인 평을 내렸고, 합격 판정을 내렸다.
    국립음악원 학생들이 제작한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공연에 오페라 무대에도 데뷔했다.
    1939년 가을에 아테네 음악원에서 두 번째 성악 전공을 시작했고, 물론 지도 교수는 오디션 때 만났던 이달고였다. 이달고는 칼라스의 기교가 소프라노에 적합하다는 판단으로 자신의 벨칸토 창법을 집중적으로 전수해 주었고 고음역대를 잘하게 된 비결이라고 밝혔다.
    이달고는 칼라스에게 그리스 국립오페라단 비상근 단원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주선, 아직 10대의 나이에 오페라 무대에서 별 무리없이 무대 연기를 소화해냈다.
    1944년 여름에는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에서도 독일 비평가였던 프리드리히 헤어초크가 극찬했을 정도로 명연이었다고 한다.
    칼라스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활동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미국으로 향했다.
    (다음편계속~)

  • @허우영-b5m
    @허우영-b5m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1

    1.5. 1950년대 전반[편집]
    밀라노의 라 스칼라 가극장에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의 아이다 역으로 데뷔하였는데, 이 공연은 당시 라 스칼라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던 (그러나 곧 칼라스에 의해 밀려나게 되는) 레나타 테발디의 대역으로 출연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주역으로 정식 계약한 라 스칼라 데뷔는 1951년 12월 7일 역시 베르디의 오페라인 '시칠리아의 저녁 기도'의 엘레나 공주 역으로 이루어졌고, 곧 이 극장의 레귤러 가수가 되었다.
    1952년 말 그녀는 HMV(이후 EMI)의 명 프로듀서였던 월터 레그에게도 발탁되었고, 본격적인 오페라 전곡 녹음도 시작됨.
    또 런던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극장에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의 타이틀 롤로 데뷔하여 절찬을 받았다. 이후 코벤트 가든에서 '아이다'의 타이틀 롤, '일 트로바토레'의 레오노라 역,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역, '메데아'의 타이틀 롤, '토스카'의 타이틀 롤로 출연하였으며, 그녀의 마지막 오페라 무대도 1965년 7월 5일 코벤트 가든에서의 '토스카' 공연이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호평에도 불구하고 칼라스는 자신의 뚱뚱한 몸 때문에 고민했다.칼라스는 노래 뿐 아니라 연기하는 배역과 일체화되기 위해서는 더 날씬한 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영화 로마의 휴일을 보고 감명받은 칼라스는 당시 사실상 연인으로 지냈던 연출가이자 감독 루키노 비스콘티에게 자기가 오드리 헵번처럼 다이어트를 하면 어떻겠냐고 물었고 비스콘티가 그러면 진정한 트라비아타가 될 것이라고 말하자 곧바로 다이어트

  • @BaroneVitellioScarpia1
    @BaroneVitellioScarpia1 2 года назад +3

    I love Callas, she was so beautiful.

  • @saraya1888
    @saraya1888 7 месяцев назад +1

    Beautiful

  • @허우영-b5m
    @허우영-b5m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1

    1.6. 1950년대 후반[편집]
    그녀는 완벽주의적인 성격으로 유명했고, 이탈리아 음악인들 사이에서 호랑이라고 불렸다. 극장 경영진, 상대 배역의 테너, 지휘자들과의 불화도 늘어갔다. 1955년 라 스칼라 극장에서 안드레아 셰니어 공연을 할 때 타이틀 롤을 맡았던 마리오 델 모나코와 무대 뒤에서 다투기도 했다.
    1956년과 1957년은 그녀의 전성기였다. 하지만 짧은 전성기 이후 칼라스는 생각보다 일찍 꺾이기 시작했다.
    1956년 6월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빈 국립 가극장에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타이틀 롤로 데뷔했다. 하지만 빈 국립 가극장과는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이 되었으며 이후로는 더 이상 빈에 초청받지 못했다.
    1956년 10월에는 대서양 건너 미국 최고의 오페라 하우스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노르마 역으로 데뷔했다. 하지만 이때도 스캔들이 일어났는데, 타임지에서 칼라스와 라이벌이었던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 사이의 관계나 어머니와의 불화 등에 대해 소상히 게재한 기사를 실은 것이었다. 이후 칼라스는 1958년 11월 해고될 때까지 2년간 메트 무대에 섰는데, 메트 총감독 루돌프 빙과 많은 갈등을 빚게 되었다.
    1958년 1월 2일 로마 오페라극장의 노르마 공연은 그녀의 몰락을 상징하는 흑역사로 널리 언급되고 있다. 공연 직전에 목이 부어오를 정도로 상태가 안좋아 의사나 매니저가 출연 취소를 간청했음에도 감독이 '누구도 칼라스를 대신할 수 없다'면서 억지로 칼라스를 무대에 올렸고 칼라스는 제1막이 끝나고 공연 취소를 선언하고 극장을 나가버렸다. 극장측은 관객들이 칼라스의 노르마를 잔뜩 기대하고 있다며 대역을 준비해 두지 않았고, 칼라스는 이에 자신이 아프게 되어 공연을 못하게 될 경우에 대해 항의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극장의 책임임을 분명히 했다. 또한 설령 대역을 쓰려 해도 감히 칼라스의 대역으로 노르마 역을 노래하려고 선뜻 나서는 이가 없어 그대로 공연을 강행했다가 사달이 났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날 공연이 이탈리아 대통령 등 정계 고위층들이 임석한 중요한 이벤트였던 터라, 공연을 망친 칼라스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이탈리아에서 대단히 빠르게 확산되었다. 당시 제작된 뉴스 필름의 아나운서 멘트도 비꼬는 투가 다분했을 정도.
    가만있을 칼라스도 아니었고, 곧 극장과 언론사를 향해 고소장들을 날렸다. 후에 마리아 칼라스는 이 고소전에서 승리. 대역을 준비해놓지 않아 이탈리아의 고위층들이 공연장을 나가게 된건 전적으로 극장의 책임이었고, 일부 언론사들이 거짓된 내용의 기사를 만들어서 내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밀라노 팬들이 마리아 칼라스의 보이콧을 요구하는 등 이탈리아에서 여론이 매우 험악해졌다.
    1958년 5월 칼라스는 오랜 갈등을 빚고 있던 밀라노 라 스칼라 가극장의 총감독 안토니오 기링겔리와 다툼 후에 앞으로 더이상 스칼라좌 무대에 오르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잔여 계약을 파기했다.카랴얀은 기링겔리에 대해 무척 다정한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특히 카라얀과 기링겔리의 관계에 대해서는 발퀴레 공연 취소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기링겔리는 바그너의 대작 발퀴레를 스칼라좌 무대에 올리는 회심의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지휘자는 카라얀이 맡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베를린 필의 수장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면서 카라얀이 그의 대타로 베를린 필의 미국 공연을 지휘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기간이 밀라노에서 예정되어 있던 발퀴레 공연 기간과 겹쳤다. 하지만 베를린 필 최초의 미국 순회 공연 기회는 카라얀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공연이었고, 이를 잘 알고 있었던 기링겔리는 아무런 대가 없이 카라얀의 발퀴레 공연 스케줄을 취소해 주었다. 이후 카라얀은 순식간에 세계를 대표하는 지휘자가 되었으며, 이후에도 스칼라좌는 카라얀과 원만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카라얀은 1956년 이후 베를린 필, 빈 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이외에 다른 오케스트라는 거의 지휘하지 않았지만, 그 외에 유일하게 지휘했던 곳이 스칼라좌였다.
    1958년 11월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총감독 루돌프 빙이 칼라스에게 계약 해지를 알리며 그녀에게 해고를 통보해 왔다. 루돌프 빙은 방송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칼라스와 나 둘 중 누가 극장을 운영하는 사람인지 결정해야 할 순간이 왔습니다. 물론 그때 극장을 운영하는 사람은 나였습니다. 그래서 칼라스에게 계약을 끝내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나운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칼라스를 해고하신 건가요?) 해고라는 표현을 쓰고 싶으시면 그래도 됩니다. 하지만 저는 단순한 해고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칼라스와의 모든 관계를 완전히 단절한 것입니다."
    메트에서 해고된 후 미국 댈러스 오페라와 계약을 맺고 50년대말 한때 이 곳에서 한동안 많은 무대에 올랐다.
    사생활 쪽에서는 1957년에 그리스의 선박왕이었던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와 만나 배가 맞으면서부터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 1959년 8월 오나시스는 자신의 호화 유람선 크리스티나호에 칼라스 부부를 초청. 이 바람둥이는 리 라지윌을,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를, 그밖에 다른 수많은 여자들을 꼬실 때도 항상 크리스티나호에서 작업이 이루어졌다.
    뱃놈조심 또 조심!그때 내가 있었더라며 칼라스가 쫄망하지 않았을텐데.ㅋㅋ
    오나시스에게 반한 칼라스는 메네기니와 이혼하려 했다. 칼라스는 메네기니가 자신의 매니저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수입의 일부를 시동생들의 사업자금 등 시가(媤家) 식구들을 위해 무단으로 써버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메네기니는 이혼을 원치 않았다. 칼라스와 메네기니는 이혼 소송에 들어갔지만 당연히 이탈리아 법원은 귀책 사유가 없는 메네기니의 손을 들어줬다.

  • @claudiopersi9925
    @claudiopersi9925 2 года назад +2

    INDIMENTICABILE DIVINA!!!

  • @허우영-b5m
    @허우영-b5m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1

    1.3. 미국 시절[편집]
    1945년 뉴욕에 도착했다. 미국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칼라스는 뉴욕에서의 삶을 즐겼다. 하지만 오디션에 번번히 떨어졌고 몇몇 단역으로 출연할 수 있었을 뿐이다. 95kg의 거구였고 다이어트로 81kg감량.
    칼라스는 베리스모 오페라보다는 벨칸토 오페라를 선호했기에 뉴욕 메트로폴리탄오디션에서 번번히 떨어졌다.
    심각한 가정 불화로 칼라스는 오디션용 옷 한벌과 신발이 든 가방 하나만 들고 단신으로 뉴욕에서 이탈리아행 화물선에 올랐다.
    1.4. 이탈리아 활동과 결혼[편집]
    1947년 베로나에 도착한 칼라스는 '라 조콘다' 공연의 지휘를 맡은,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 지휘계의 본좌였던 툴리오 세라핀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후 세라핀은 그녀의 멘토로서 그녀의 음악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47년 8월 2일 베로나 아레나 무대에 올려진 '라 조콘다' 공연에서 조콘다 역을 맡은 칼라스는 성공적인 이탈리아 데뷔를 마친다. 라 조콘다 공연은 성공적이었다지만 세라핀이나 베로나 극장은 그녀에게 딱히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고 이후 추가 출연 계약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라 조콘다 공연 후 그녀는 일자리가 없었고 오디션은 보는 족족 탈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때 그녀에게 한줄기 빛이 되어준 이가 나타났으니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라는 사업가였다.
    '라 조콘다' 공연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메네기니는 그녀의 후원자를 자처. 메네기니는 칼라스보다 28세 연상이었고 키는 똥짤막했지만 젠틀했고 칼라스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오디션용 옷과 신발이 든 가방이 전부였던 칼라스에게 메네기니는 엄청난 의지가 되었고 그녀의 오디션을 위해 전문가를 코치와 피아니스트도 붙여줬다. 메네기니는 자신의 인맥을 동원하여 그녀가 공연에 설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했다. 비록 밀라노 스칼라좌에서는 거절당했지만 메네기니의 노력으로 칼라스는 1947년 12월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오디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약 열흘간 급히 이졸데를 연습했고, 오디션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능숙하게 불러 세라핀을 만족시켰다. 칼라스는 라 페니체 극장과 계약을 맺고 투란도트에도 출연.
    세라핀이 칼라스를 처음부터 중용한 것은 아니다.이탈리아에서 데뷔한 라 조콘다 공연 이후 세라핀은 칼라스를 찾지 않았다. 다시 세라핀과 칼라스가 조우하게 된 것은 트리스탄과 이졸데 공연으로, 오디션에서 칼라스가 1막 전체를 막힘없이 부르자 세라핀은 매우 기뻐했지만 그후 칼라스를 찾지 않았다. 이처럼 세라핀이 칼라스를 기용한 것은 바그너 오페라 때문이었다. 칼라스는 트리스탄으로 라 페니체에 데뷔한 이후 투란도트, 아이다, 운명의 힘 등에 출연했지만 대부분 세라핀이 아닌 다른 지휘자였다. 세라핀이 칼라스의 추천장을 써주기도 했지만 메네기니가 공연 성사를 위해 발벗고 나섰던 덕분이었다. 물론 나중에 세라핀은 발퀴레 공연 이후 이탈리아 오페라에도 칼라스를 중용했다.
    40년대말 칼라스는 메네기니의 노력으로 이탈리아의 각 지방 극장에 데뷔하며 점차 경력과 인지도를 쌓아갔다. 칼라스는 그녀의 언니 재키가 이탈리아로 직접 건너와 메네기니와 담판으로 결혼. 결혼 이후 빠른 시간만에 칼라스는 너무나 유명해져서 세계적인 소프라노가 되었다.
    1949년 1월에는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오페라극장에서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제2부 '발퀴레' 공연에서 드라마틱 소프라노의 배역인 브륀힐데 역을 노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비로 뒤이어 라 페니체에서 상연될 예정이었던 벨리니의 오페라 청교도에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배역인 엘비라 역으로 캐스팅된 소프라노 마르게리타 카로지오가 하차하자, 두 공연에서 모두 지휘를 맡은 세라핀의 요청을 받아들여 '발퀴레' 공연과 엘비라 역까지 노래함. 완전히 다른 성격의 음악과 창법, 연기를 막힘없이 소화해내는 이 가수에게 청중들은 그야말로 뿅가죽네 상태가 되었다. 유명한 오페라 연출가 프랑코 제피렐리도 이 때의 공연을 보고 경악했는데, 훗날 '그것은 마치 비르기트 닐손이 바그너 공연을 마치고 사흘 만에 베벌리 실즈의 대역을 노래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라고 회고했다. 더욱 대단한 것은, 칼라스가 엘비라 역을 단 1주일 만에, 그것도 '발퀴레'를 계속 공연해가며 짬짬이 익혀 공연했다는 점이다. 다만 악보는 다 외웠어도 가사는 다 외우지 못해서, 무대 앞에서 가사를 읽어주는 프롬프터가 'Son vergin vezzosa'(나는 매혹적인 처녀)라고 읽어준 것을 잘못 알아듣고 그만 'Son vergin viziosa'(나는 사악한 처녀)라고 노래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러나 브륀힐데 역을 노래하고 사흘 만에 엘비라 역을 노래하는 '기적'을 마주한 관객들은 그런 실수쯤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다만 이 때의 경험은 이후 경력을 봐도 상당히 극단적이고 예외적인 경우였다.
    이 발퀴레 공연은 칼라스의 경력에 전환점이 된 것으로 평가됨. 사실 이 공연도 대역으로 출연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이 발퀴레 공연 이후 세라핀은 본격적으로 칼라스를 기용하게 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칼라스 초기의 커리어에서 바그너 오페라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바그너 자체가 이탈리아에서 거의 공연되지도 않았는데 정서적으로 이탈리아인들에게 전혀 맞지 않았고, 바그너 오페라를 부르면 목이 망가진다는 괴담이 이탈리아에 널리 퍼져 있었다. 단순히 우스갯소리로 치부할 일이 아닌게 루치아노 파바로티조차도 바그너, 특히 트리스탄은 목소리가 망가지기 때문에 안부르겠다고 몇 차례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어쨌거나 당시 이탈리아에서 바그너 공연은 무척 드물어서 바그너의 발퀴레 등을 무척 좋아했던 마리오 델 모나코는 인터뷰에서 바그너를 자주 부르고 싶었지만 너무나 기회가 없었다고 탄식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 바그너를 공연하려 해도 목소리가 망가진다는 핑계로 부르기를 꺼리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칼라스는 이탈리아에서 바그너 공연들에서 기회를 잡았다.유명해진 이후 칼라스의 주요 레퍼토리는 이탈리아 오페라, 특히 도니제티와 벨리니의 낭만주의 벨 칸토 위주로 확립되었다.
    메네기니는 칼라스의 공연 출연을 위해 동분서주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녹음을 취입하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덕분에 칼라스는 데뷔 초 시절부터 의외로 많은 녹음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 @fiorellazoratti7729
    @fiorellazoratti7729 2 года назад +2

    La negazione del suo unico amore l'ha distrutta...ma il nostro amore per Lei rimarrà per sempre

  • @허우영-b5m
    @허우영-b5m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1.7. 1960년대[편집]
    칼라스는 오나시스의 크리스티나호에 처음 초대받았을 때, 얼마나 돈이 많은 사람이길래 이렇게 흥청망청 돈을 쓰면서 살 수 있나 하고 놀라워 했지만 정작 오나시스와 동거하게 되자 오나시스는 칼라스에게 강아지 두 마리를 선물한 것 말고는 돈을 쓰는 일이 없었다(ㅋㅋ짠돌녀석.사랑했다면 전재산10%라도 줬어야지..)
    1960년부터 칼라스는 EMI에서 음반 녹음 활동을 재개했고 계약이 파기됐던 이탈리아의 라스칼라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계약을 다시 맺고 메데아와 토스카등을 공연 EMI에서 스테레오의 음질로 칼라스의 여러 녹음이 남기게 되었다. 다만 목소리가 예전 같지는 않았기에 평론가들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칼라스의 이름값만으로 판매량은 보장되었다.
    1963년경 오나시스는 미국 대통령의 영부인인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와 리 라지윌 자매에게 동시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후 오나시스의 관심은 리 라지윌, 재클린 케네디 자매에게로 옮겨갔다. 하지만 오나시스의 복잡다단한 여자 관계에도 불구하고 칼라스와 오나시스 사이의 관계는 계속 이어짐.
    1964년경 칼라스는 오나시스의 집에서 나와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기 시작했고 죽을 때까지 파리에서 살았으며 오나시스와의 결별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나시스가 보유하고 있던 6채의 자택 중 하나가 파리에 있었다. 파리는 이탈리아나 미국과 달리 대중들이 유명인들의 사생활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오나시스와 칼라스가 만남을 갖기에는 가장 좋은 도시였다.
    1964년 칼라스는 연출가 제피렐리와 함께 런던 코벤트 가든 오페라에서 '토스카'로 근 5년만에 다시 오페라 무대에 복귀. 팬들은 여전히 환호했고 흥행도 성공했지만 평론가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이미 목 상태도 예전같지 않아 거의 재활 훈련 급으로 강한 발성 연습을 거듭하며 컨디션을 유지해야 했다. 가사의 발음도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었다. 출연하는 작품은 토스카, 노르마 단 두 개로 제한됨. 칼라스는 1년여 동안 런던 코벤트 가든, 파리 국립 오페라, 그리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토스카와 노르마를 돌려가며 공연했다. 하지만 결국 1965년 7월 5일에 코벤트 가든에서 공연한 토스카가 그녀의 마지막 오페라 출연이 되었다. 원래는 5회 반복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7월 5일 1회만 공연하고 나머지 4회는 다 취소되었다.
    1966년 칼라스는 오나시스와의 결혼을 희망하며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그리스 국적을 취득함으로써 메네기니와의 결혼을 무효화하려고 시도했다. 당시 그리스는 법으로 그리스정교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혼인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 국적을 취득하는 순간 메네기니와의 결혼은 취소됐다. 하지만 오나시스는 끝까지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다.닭쫓던 강아지 격이네!
    1968년 9월 칼라스는 갑자기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찾아가 공연을 마친 레나타 테발디를 만나 눈물을 흘리며 포옹하고 역사적인 화해를 했다.
    칼라스가 테발디를 찾아간 이유는 칼라스가 대중들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관계자들 앞에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번 일깨움으로써 오페라 무대에 복귀하려 했던 시도였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왕성하게 활발하고 있던 테발디보다도 한 살 어린 자신이 결코 은퇴할 나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이려 했다는 것.
    사실 칼라스가 테발디를 찾은 것은 오나시스와 재클린 케네디의 결혼 계획을 눈치챈 직후로 보여진다. 오나시스는 재클린과의 결혼 계획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있다가 결혼하기 한 달 전부터 지인들에게 재클린과의 결혼 계획을 알리기 시작했다. 칼라스가 테발디를 찾아간 날로부터 딱 한 달 후에 오나시스는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식을 올렸다.
    어쨌거나 오나시스와 재클린이 결혼을 올리며 오나시스와의 관계는 한동안 잠정 중단되었고 칼라스는 홀로서기에 나서야 했다. 오나시스와 재클린이 결혼한 지 석달 만인 1969년 초 칼라스는 파리 스튜디오에서 EMI와 함께 음반 녹음 세션을 가졌다. 이것은 1965년 7월 토스카 공연에서 1회 출연 후 잔여 공연을 캔슬한 후 4년만의 첫 음악 활동이었다. 그러나 음반 1~2개 분량의 녹음 세션이 진행된 것으로 끝났고, 다시 칼라스의 음악 활동은 다시 중단되었다. 이것은 1973-74년 투어를 제외하고 공개된 그녀의 마지막 음원이며, 오리지널 오케스트라 반주를 동반한 연주로는 마지막이었다.
    1.8. 1970년대[편집]
    1971년경 오나시스와 재클린 간에 부부 불화가 심해졌고, 오나시스와 칼라스는 다시 만남을 가지기 시작했다.
    1971년 뉴욕의 줄리어드 음대에서 성악 마스터 클래스를 개최했지만 줄리어드에서의 마스터클래스를 중단하고 파리로 돌아왔다. 이 시기는 오나시스와 재클린의 관계가 파탄나고 오나시스가 뉴욕을 떠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1972년부터 73년에 걸쳐 칼라스는 파리 자택에서 직접 런던까지 건너가서 여러 차례 음반 녹음 세션을 가졌다. 기존에 녹음해오던 EMI가 아니라 필립스였다. 주로 디 스테파노와 듀엣 곡을 녹음했다. 하지만 필립스에서 녹음한 음원들은 결국 음반으로 발매되지 못했다.
    1973년에는 이탈리아 토리노 레지오 극장에서 베르디의 시칠리아의 저녁기도로 오페라 연출가로 데뷔했다. 하지만 평은 좋지 않았고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 연출작이 되었다.
    1973년 하반기부터 예전에 자주 콤비를 이루어 공연했던 테너 가수인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세계 순회 투어를 개최했는데, 물론 둘 다 성악가로서의 생명은 사실상 끝난 상황이었고 평단의 여론도 매우 좋지 않았지만 원체 유명했던 이름값으로 매진 사례를 이어갔다.당시 스테파노와 칼라스가 내연 관계였다고 서술한 책도 있다. 투어의 마지막은 1974년 말에 한국과 일본에서 열린 공연으로 끝났다.
    그무렵 오나시스의 건강이 갑자기 크게 악화되면서 1975년 3월 15일 오나시스가 사망. 오나시스가 재클린과 이혼하고 나면 그와 결혼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도 산산조각 났다. 칼라스는 오나시스로부터 한푼도 물려받지 못했다. 다만 오나시스의 유품을 정리하던 그의 여동생이 칼라스가 오나시스에게 쓴 편지들을 그녀에게 돌려주었을 뿐이다.
    1976년 3월에는 재차 컴백할 계획으로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에서 지휘자 제프리 테이트의 피아노 반주로 비밀리에 베토벤의 '아 페르피도'를 리허설했다.
    말년의 칼라스는 파리의 아파트에 틀어박혀 거의 고립된 생활을 했다. 젊은 시절 가족들과 트러블이 무척 심했던 칼라스는 메네기니와 결혼한 직후에 어머니, 친언니, 아버지 등 모든 가족들과 완전히 의절했기 때문에 이후 남편과 오나시스가 유일한 벗이었고 그들과 차례로 헤어지게 되자 완전히 고립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칼라스는 우울증과 불면증을 이겨내기 위해 처방전도 없이 온갖 약품들을 다량 복용하면서 건강도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집에 틀어박혀서 젊은 시절 전성기 때의 음반을 듣고 홀로 흐뭇해하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고 한다. "그래...그땐 넌 참 잘했어."
    그렇게 쓸쓸히 1977년 9월 16일 아침에 급성 심근경색으로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고, 시신은 그리스 정교 의식에 따라 진행된 장례 후 화장되어 페르 라셰즈 묘지의 납골당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