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장군의 사망 기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서울시 도봉구 도봉1동 596-5 앞 도로에서 1950.12.23.10시 45분 경 교통사고로 인해 사망. (가해자 한국군 6사단 2연대 소속 박경래;1924년생) 워커장군은 운전병과 함께 전사하였다. 워커장군 뿐 아니라 지프 운전병도 사망했습니다.
@@sangyeolkim2725 이런 주장이 고도의 빨갱이들 두둔 하는 주장이지.. 북한이 워크 장군을 매복 사살 했다고 자신들 전사에 기록하여 전과를 과장 하고 있는데, 미군과 한국군은 명백한 사고사라는 당시 조사결론을 주장하고 있지. 이승만은 피의자를 사형에 처하려 했으나, 미군에서 말려서 피의자는 3년형을 받았었지. 워크 장군 암살설은 정말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인데,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놈은 남한 측에 뿌리 박은 빨갱이들 주장에 휘둘리는 놈이거나, 간첩이거나...
여기서 등장하는 워커 장군의 아들 샘워커 장군은 훗날 카터가 주한미군철수를 하려고 할때 결사반대 하며 막아내는 선봉에 섰고 결국 그 항명의 여파로 유럽방위 사령부로 쫒아 내려하자 1978년 자진 퇴역을 결정 하게 되게 되지만 한국을 위해 끝까지 미군철수를 막은 인물 입니다.
이분의 아들도 대장으로 예편하셨는데 얼마나 굉장한 일을 하셨냐면 아버지와 함께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아버지의 장례후 다시 한국에 와서 한국전쟁에서 싸우셨습니다. 지미카터 행정부가 주한미군 감축을 논의할때 육군 대장으로 강하게 반대하셧습니다. 진짜 우리나라는 미국의 워커가문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습니다.
워커 장군의 낙동강 전선전투 때 stand or die!는 정말 진정한 한국전의 영웅 자체였다! 예전 임진왜란 때 조선 구국의 영웅이셨던 이순신 제독님의 필생즉사 필사즉생의 그 자체! 한국전의 영웅 워커장군님과 16개국 연합군 장병들의 희생과 노고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자유대한민국만세! 한미동맹 만만세!
7월 말 낙동강 건너 부대가 자리 잡았을때 워커가 이렇게 당부했다고 하죠 이제 더이상 후퇴는 없다, 누가 뭐래도 방어선을 뒤로 늦추거나 조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됭케르크나 바탄 전투를 두번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부산까지 달아난다면 역사상 최대의 살생이 벌어질 것이다. 끝까지 싸우자. 하나로 뭉쳐서 굳게 맞서야 한다. 우리중 누군가가 죽어 넘어지더라도 우리는 함께 싸우다 죽을 것이다. Wilson Heefnet, Patton's bulldog p185, Max Hastings The Korean war p84, 콜디스트 윈터 p246
구태여 알려하지 않았던,하지만 워커라는 단어에는 작은 궁금증이 있었기에, 오늘 알게 되어 궁금증이 해결 되었습니다. 군화를 워커라고 했던건 당연했는데 장군의 姓이였군요! 워커 힐의 워커도 장군의 姓이였군요! 오래전 이태원 로터리에 워커장군동상이 있었고,미군장군의 동상이 왜? 이곳에 있고 우리와 무슨 인연이지? 했는데 오늘에서야 오랜,오십여년전의 의문이 풀렸습니다. 로터리 중앙에 덩그러니 서 있어 다가갈 수 없었고,동상의 설명문도 있었는지 기억이 안납니다만、 미팔군기지를 내려다 보듯 있었던 것은 아니였나 하네요. 로터리에서 삼각지까지는 줄곳 내리막이였지요. 워커장군 동상은, 한가롭던 그 시절에서 눈부시게 발전한 우리나라를 바라보았을지요. 아직도 그 이태원 로터리에 서있을지요. 아흔 여섯의 내 부친도 육이오 참전 장교. 부친으로 부터 워커장군이란 이름만 들은 기억은 있습니다. 포부를 이루지 못하고 졸지에 사망한 워커장군의 명복을 빕니다. 정보 감사합니다.
한국군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일본군 장교, 부사관 출신들, 독립전쟁했던 독립군 출신들, 국방경비사관학교 출신의 육사출신들이 뒤섞여 있었는데, 그래도 일부분은 패튼의 아끼는 부하였던 월튼 워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그러므로 한국군은 패튼의 간접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철모를 쓰고, 기동을 중시했던 월튼 워커 장군의 성향은 조지 패튼과 비슷하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패튼도 전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하고, 워커 장군도 전쟁중 교통사고로 순직했다. 참 애석한 죽음이다. 한 사람의 쓰임이 다하면 하느님이 데려가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전 개인적으로, 맥아더보다도 월튼 워커 장군을 더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남한국민들들에겐 너무나 많은 아쉬움을 남긴 한국전쟁이었습니다. 통일을 위한 기회가 5000년만에 찾아왔어도 잘못된 판단의 연속으로 살리지 못한. 한국과 유엔군이 평양까지만 점령했어도 통일은 된거나 마찬가지인데. 욕심에 함경도개마고원 산속까지 진격한 것은 큰 잘 못. 북한은 평양이북은 산지라 나라와 수도를 유지할 곳이 전혀 없어 자멸이 예정된 상황. 진격을 하려면 차라리 핵포함 대규모 진격으로 만주까지 밀었어야. 이 승만은 자나깨나 만주회복을 외쳤는데.
사람들이 패튼이나 워커를 누가 암살사주 한 거 아니냐? 라고 하는데 당시 지프는 안전벨트도 없고 그냥 비딱하게 타는게 유행이라 그냥 교통사고 나면 바로 붕 떠서 죽었음, 실제로 수 많은 장교들이 지프사고로 죽었고, 그나마 4명 탈 수 있는 중에 2인만 탔음에도 사망률이 높았다(이는 지프 특유의 힘과 전고 때문이기도 함) 사족으로 벌지전투 당시 미군으로 위장한 독일군 특공대들이 많이 들킨 이유가 미군은 2명만 지프에 타는데 차량이 부족한 독일군은 차량에 최대한 많이 태우는 습관이 있어서 2인 지프에 4명씩 타고 다녀서 눈에 띄였다고.
자유의 책임 자유란 무엇인가? 철학적 사변을 논하자는게 아니라, 현재 나자신의 상황을 알아보자는 말이다. 즉, 지금 여기에서의 나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인식하는 바탕 위에서 자유의 본질에 접근해보자는 것이다. 내가 이 하찮은 글을 늘어 놓고 있는 현재가 지금이고, 우리은하권 태양계 지구성 아세아주 대한민국 경상북도 안동시가 여기에 해당한다. 나는 62년생이고, 남성이고, 기혼에 자식을 슬하에 둔데다 고령의 노모가 생존해 있고, 삶의 과정은 평범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용렬하다고 해야만 진실에 근접할 정도로 비천한 존재다. 이게 객관적 실체에 충실한 나에 대한 진술이다. 바로 이, 특정된 나라는 존재가 자유를 이야기해보겠다. 먼저 나는 자유란 지극히 관념적이고도 동태적 용어의 의미를 스스로 말미암음이라고 정의(定義)한다. 철학이나 정치학 또는 국어학 수준의 학술적 토론이나 논리전개를 하자는게 아니라, 전술한 나라는 특정한 실존적 한 인간이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서 온몸으로 느끼는 몸부림으로서의 자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학문적 접근이나 비판은 사양한다. 자유란 스스로 말미암음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현재 대한민국에서 일개 국민으로서의 모든 의무를 이행해 온 나에게 자유는 있는가? 스스로 말미암는다는게 뭔가?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할게 전혀 없다. 가장 기본적이고 따라서 상식적인 것을 상정해보자. 우리가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가? 아침에 일어나면 먹고 씻고 무언가 공부나 일을 하고 자식을 걱정하고 영화관이나 시장 또는 공원을 가고 또는 부모님이나 친구에게 안부를 전하고 음악을 듣거나 자전거를 타다가 밤이면 가족들과 함께 잠에 든다. 여기에 내가 성인이 되기 이전의 시간들과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아야하는 전제와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일개 국민으로서 법률준수라는 사회적 계약의 이행의무를 제외하면 사실상 나의 행동이나 생각을 제약하거나 구속하는 그 무엇도 있어선 안된다. 내가 어떤 사유를 하고, 어떤 행위를 하던지간에 그 어떠한 방식으로든 나의 자유의지가 아닌 것을 강요 받는다면, 나는 분명히 자유의 상태가 아닌게 확실하다. 한 마디로 자유를 자유스럽지 몾하게 하는 모든 것은 강제이고 폭력인 것이다. 그것이 비록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되는 법률의 형태를 띠고 나타날지라도 위헌의 소지가 있거나,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징벌적 과세라던가,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규제나 정책일지라도 그것은 이미 폭력인것이다. 이런 기준으로 지금 여기 대한민국은 특정지역과 출신배경을 공유하는 사이비민족주의권력에 의해 폭력이 버젓이 합법의 탈을 쓰고, 너무도 당당하게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비자유의 전체주의국가임이 명백하다. 내가 이러한 판단을 할 수 밖에 없는 당위성의 근거는 우리 집 앞을 흘러가는 낙동강변의 모래알 숫자 보다 많다. 그 실예를 열거해보자.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다고, 없는 죄도 조작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멀쩡한 기간시설이나 산업설비도 너무도 희박한 사고가능성만으로 폐기하거나, 효율적 대안도 없이 정지 시키거나 철회해, 그 발생된 피해를 국민에게 부담토록 강요했다. 경제의 작동원리를 무시하고, 도덕적경제정책을 무지막지하게 밀어부쳐, 그 부작용을 극대화 시켜, 온 국민들에게 고통을 강요했다. 감당할 수 없는 갖가지 과도한 세금을 갈취하여, 자기편들 끼리 갈라서 먹었다. 자기편이 아닌 모든 국민들은 적폐라는 낙인을 찍고, 모멸과 조롱으로 박해를 그치지 않았다. 국가의 재정을 마구 풀어서 자기편의 숫자를 늘리고, 또 그 유지를 위하여 더더욱 세금을 늘리는 무한반복 가렴주구의 학정이 지속했다. 국가경영에 대한 외교 및 안보에 대한 비전, 즉, 국가대전략도 없이 환상외교와 굴종안보는 우리의 국가나 기업의 비용을 증가시켜 경쟁력을 하락으로 유도하여, 결국은 산업의 공동화를 이룩하였다. 당연히 실업자는 증가하고, 특히 청년들의 실업은 결혼기피와 출산을 기피하게 조장하여, 민족의 멸종을 촉진하는 지경에 도달했다. 여기에 무엇을 더 열거하랴! 국가의 존망이 풍전등화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의회나 언론을 가장한 선동꾼 및 법조계, 문화계 등 사회전반에 깊이 뿌리를 내린 국가파괴세력들이 온갖 나팔수를 동원해 자화자찬으로 날을 새고, 순진한 국민들을 세뇌하고, 또한 이에 속지 않는 사람들은 시위나 학문적비판을 가장한 무시무시한 해결사행동대원들을 투입하여 탄압 및 제거하는 공포통치를 계속하고 있다. 그 뿐이랴? 이토록 자유는 자유롭지 몾한지가 이미 오래건만, 이젠 훨씬 더 고성능에 고사양인 풀옵션 한정판 세습독재자를 숭상하며 국가전복을 기도하고 있다. 이에 나는 감히 천명한다. 이제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고. 여기는 21세기의 낙동강전선이라고. 스텐드 오어 다이! 이것은 6. 25전쟁 중, 낙동강전선 최후의 보루에서 미국의 제8군 사령관 워커중장이 토해낸 결사방어의 결의에 찬 사자후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하지만 그 책임 조차도 나의 자유로운 영혼이 선택한 것일 땐 두렵지 않다. 얼마 후엔 결전의 날이다. 나는 자유를 선택하련다. 여기는 낙동강이다! 스탠드 오어 다이! 涯黎
사료를 보면 나오지만 당시 일본에 있던 미군은 그냥 미군이 아니라 점령군이었습니다. 때문에 공짜 기차를 타고 마음대로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자료화면에 나오는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6.25전쟁이 터지자 이렇게 편히 지내던 미군들은 지옥을 맛보게 됩니다. 워커장군조차 일본에서 가족과 행복하게 보냈다고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반동가리난 이 한반도를 어렵게 지켜낸 미군들이 있었는데.. 또다시 전운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데.. 북한을 격파하고 중공군을 이기진 못하더라도 혼자서라도 빈사상태까지 보낼정도의 국력과방위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미군이 나중에라도 도아준다.. 첨부터 비실대면.. 도아줄 가치가 있냐?? 대만처럼...
맥아더 장군이 미 해병대를 비롯한 최정예부대를 이끌고 인천상륙을 준비하고 있을 때 워커장군은 죽을 맛이었습니다. 자신은 한정된 병력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해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막았습니다. 이곳에 북한군 최정예부대가 묶여있지 않았다면 인천상륙작전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방송을 좋아하고 자주 봅니다. 그런데, 오늘 방송중 몇 가지는 사실이 아닌듯합니다. 워커 장군이 해병대를 3일간 활용했다는 것, 집차에서 "미친듯이" 서서 달렸다는 것, 워커 장군이 사고당시 차량 바깥으로 튀어나와 사망했다는 것... 벨트를 매지 않은 ,워커 장군 집차에 동승한, 부하들은 살았습니다. 워커 장군은 추위로 허벅지 wrap belt를 하고 있어서 탈출이 안되어 사망한겁니다. 자신의 정찰/지휘를 위해 서서 달린 것은 그 분의 지휘철학이었습니다. 마산 전투와 다부동지역 전투에서 미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이동하기 전까지는 오랫동안 미보병들과 함께 싸웠지요. 항상 재미있게 이 방송 보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부경대에는 워커장군을 기리는 워커하우스가 있습니다. 워커하우스는 6.25 전쟁 당시 미 8군 사령부의지휘본부로서 사령관 워커(Walton H. Walker) 장군과 참모들이 머물렀던 역사의 현장입니다. 워커장군은 바로 이곳 워커하우스에서 낙동강 방어선이 가장 위급했던 18일 동안 전쟁의 지휘본부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참고로 워커하우스는 돌을 사용해 지어져 굉장히 튼튼한 구조로 지어졌는데, 이는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통신장비 보호를 위함이였다고 합니다.
워커 장군하면 워커힐과 대구 캠프 워커가 있죠. 64.11.14 신성일&엄앵란 결혼식에 엄앵란은 그당시 유명 디자이너이자 노라 노 패션학원장인 노라 노(경기여고 출신인 본명이 노명자로 서울중앙방송국장 노창성의 딸) 드레스가 아닌 국제복장학원 1기이자 남성 1호 디자이너로 73년 롯데로 불하된 반도호텔(4.16 이후 5.16때까지 장면 총리는 VIP실을 총리관저로 썼음)에서 패션쇼를 한 신성 앙드레 김(김봉남)의 드레스를 입었죠. 그리고, 성 김 전 미국대사와도 관련 있죠. 58년 옛 부산 수영비행장에서 옛 여의도 비행장으로 가던 민간항공사인 대한민국항공 빅행기가 공군 정훈감 김기완 대령과 조종사&부조종사인 미군과 국회의원이 북한으로 하이재킹 당해 피납되는데 공군 정훈감이 성 김부친이죠. 대한민국항공의 비행기 3대 중 57년 만송(이기붕의 호)호가 수영비행장 착륙 중 전손되고, 58년 창랑(장택상의 호)호가 납북되고, 우남(이승만의 호)만 남아 미국에서 비행기 1대 더 들여오나 5.16 재정난으로 파산 직전이 되자 혁명정부는 62년 국유화해 대한항공공사가 됐다가 69년 한진에 매각해 대한항공이 되죠. 창공호 사건으로 북한 납북으로 공군에서 나오죠. 63.4.8 개장한 워커힐은 중앙정보부가 관할하다 73년 선경에게 매각되죠. 63년 때 워커힐의 지배인으로 있던 김기완씨는 김형욱 중정부장의 제안으로 중정에 들어가 이름이 김재권으로 불리게 되죠. 71년 의문의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김대중은 72.10.11 신병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가고 72.10.17 유신을 발표하자 일본에 있게 되죠. 73.8.8 일본 도쿄호텔에서 납치되 배에 실려 익사 시키려하나 김대중 동선을 파악한 훗날 주한 미국대사가 되는 CIA한국지부장의 경고로 김대중은 부산항에 풀려나죠. 그 당시 일본 주재 한국대사관 영사가 성 김 부친이 김재권씨였죠. 김대중 납치사건은 73.4 윤필용 사건으로 입장이 난처해진 이후락 중정부장의 부하들이 꾸민일이죠. 68.1.21사건 때 윤필용 방첩부대장은 김신조의 박정희 모가지 발언으로 해임되고 김재규가 방첩부대장으로 왔다가 보안사렁관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중장이 되고 70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롤백한 윤필용 감청하다 71년 8월 들키면서 김재규 보안사령관은 짤리죠. 70년 12월 일본 대사에서 중정부장으로 롤백한 울산 출신 이후락(육군 소장 출신으로 2공 때 정보정보연구회 연구실장인데 당시 국가정보 취급 책임자로 혁명정부에 잡혔다 풀려난 후 혁명정부에 충성했음. 차남은 한화 김종희 회장의 장녀 김영혜와 결혼하고 첫째 외손부는 CJ손경식 회장 장녀이고, 차남은 94년 푸르밀우유 회장 아들 신동학과 프라이드 사건이 유명하죠)과 울산 출신으로 전두환의 라이벌이자 윤필용 비서인 손영길 준장을 매개로 친해지면서 73.4 이후락과 윤필용의 만남에서 각하 다음은 형님 이후락이라고 하다가 차기 중정부장을 노리는 박종규 경호실장 레이더에 걸리면서 윤필용과 전두환의 라이벌 손영길이 날아가고, 72년 김일성 만나고 왔지만 역린에 걸린 이후락의 부하들이 김대중 납치사건이란 무리수를 두다 73년 12월 짤리죠. 하지만 육여사의 반대로 차기 중정부장은 신직수(박대통령이 5사단장 때 법무참모로 중정 차장, 검찰 총장, 법무부 장관, 중정 부장까지 함)넘어가고 1974.8.15 육여사가 돌아가시자 박종규 짤리고 평소 육여사가 총애하던 차지철이 경호실장이 되죠. 1960년생인 성 김은 성북동 동네친구가 동갑인 정진석 의원으로 한국일보 기자때 LA로 가서 성 김의 결혼식 함진아비를 해 주었는데 성 김 부인은 이화여대 미대 출신이죠. 74년 부친과 가족들이 미국으로 망명하죠. 성 김 외삼촌이 임재범과 손지창의 부친인 임택근 아나운서죠. 임택근 아사운서는 51년 연희대 1학년 때 남산의 서울중앙방송국 아나운서로 합격하나 입사조건이 대졸이라 합격 취소가 되려하자 디자이너 노라 노 부친인 서울중앙방송국 노창성 국장에게 읍소해 합격한 후 인기 아나운서가 되죠. 4.19 이후 우리나라 육군 최초로 ROTC가 생길 때 서울대 ROTC준비교관이었던 전두환 대위가 주도한 5.16 찬성 육사생도들의 가두행진을 라디오 생중계를 하는 역사의 현장에 있었죠. 64년 MBC로 옮기고 MBC&경향신문 전문까지 되었다가 80년 신군부에 의해 MBC와 경향신문으로 갈라지고 전무에서 사직하게 되죠. TBC와 중앙일보도 갈라지고 TBC는 KBS2가 되고 TBC 여의도 신사옥은 KBS별관이 되죠. 육사생도 가두행진을 이끈 전두환 대위는 박정희 재건회의 부의장의 눈에 들며 재의회의 비서관으로 출세길에 들게 되죠. 전두환의 부친은 예전 대구 삼성상회에서 일했는데 그때 이맹희도 동년배라 알았죠. 이병철 회장이 서울로 가면서 대구 삼성상회 지배인은 현 동서식품 회장의 부친인 김재명 회장으로 6.25때 거지꼴로 내려온 이회장에게 그동안의 수익금을 돌려주면서 이회장은 부산에 내려가 고철장사로 떼돈을 벌어 부산 서면 부산교통공사 건너편에 있던 제일제당을 세우죠. 전경환은 장교로 월남 전 참전하고 예편 후 삼성비서실에 있다가 형이 장군으로 있던 청외대 경호실로 들어가죠. 한국비료사건으로 물러난 후 이병철 회장의 비리투서를 이 회장의 차남 이창희가 써 전두환을 통해 박대통령에게 전달되지만 박대통령은 아들이 아버지를 고자질할 수 없다며 돌려보내고 당사자 이창희는 미국으로 동생을 관리못 한 이맹희는 거의 모든 직 박탈당하고 패인처럼 떠돌고 삼성 대권은 이건희에게 넘어가죠. 80년 대통령이 된 전두환을 통해 이맹희는 다시 삼성을 찾으려하나 실패하죠.
밴 플리트 장군은 한국에 대한 애정이 미군 장군 중에서 가장 많았을 것입니다. 그의 별명이 한국군의 아버지입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국군에게 포병과 전차 등 중화기를 아낌없이 지원했고 4년제 정규 육군사관학교의 커리큘럼을 미국을 모방하여 짰던 것이 밴 플리트 입니다. 또한 국군의 문제점이 훈련 부족임을 깨닫고 병사들을 모아 집중 훈련을 시켰고 그 훈련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기도 했습니다. ruclips.net/video/agvNMsb64yI/видео.html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가 한국군의 아버지로 불린 이유) 그 뿐이 아닙니다. 밴 플리트 장군은 휴전 전에 금강산을 탈환하기 위해 금강산 탈환 작전까지 기획한 인물입니다. ruclips.net/video/R8PVjkC8sXA/видео.html
ruclips.net/video/NX7yJhGXIWQ/видео.htmlsi=jTRWxyXd5Fty0QNM (북한군의 3일간 서울에 머물렀던 이유) 사실 이 영상 안에 답이 있습니다. 04:45~09:41: 그들이 멈춘 진짜 이유는 이것입니다. 부분에 북한 탱크가 한강을 건너는 장면이 나옵니다.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끊었고 미군도 한강 철교를 폭격으로 끊어놨습니다. 그런데 한강철교의 단선 2개는 끊어졌으나 복선 1개는 살아 남았습니다. 북한군 전차는 도하장비 없이 이곳에 나무판자를 임시로 깔고서 남하했습니다. 북한군 보병은 민간인 나룻배를 징발해서 이것을 타고 한강을 건너게 됩니다.
워커장군의 사망 기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서울시 도봉구 도봉1동 596-5 앞 도로에서
1950.12.23.10시 45분 경 교통사고로 인해 사망.
(가해자 한국군 6사단 2연대 소속 박경래;1924년생) 워커장군은 운전병과 함께 전사하였다.
워커장군 뿐 아니라 지프 운전병도 사망했습니다.
만물상자님 자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민주당 주사파 들이 그리 좋아하시는 중공이 매우좋아했다면 중공에 포섭된 간첩에 의한 워커 장군님 암살로 돌아가셨네요
ㅠㅠ
애도를
@@sangyeolkim2725 이런 주장이 고도의 빨갱이들 두둔 하는 주장이지.. 북한이 워크 장군을 매복 사살 했다고 자신들 전사에 기록하여 전과를
과장 하고 있는데, 미군과 한국군은 명백한 사고사라는 당시 조사결론을 주장하고 있지.
이승만은 피의자를 사형에 처하려 했으나, 미군에서 말려서 피의자는 3년형을 받았었지.
워크 장군 암살설은 정말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인데,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놈은 남한 측에 뿌리 박은 빨갱이들 주장에 휘둘리는 놈이거나, 간첩이거나...
정말 어이없는 죽음😢
여기서 등장하는 워커 장군의 아들 샘워커 장군은 훗날 카터가 주한미군철수를 하려고 할때 결사반대 하며 막아내는 선봉에 섰고 결국 그 항명의 여파로 유럽방위 사령부로 쫒아 내려하자 1978년 자진 퇴역을 결정 하게 되게 되지만 한국을 위해 끝까지 미군철수를 막은 인물 입니다.
신이시여 한국을 지켜주소서!
대한민국을 지켜 주소서!
영웅들에 평화로운 영면을 기원합니다
오 역시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군요 역시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있었다면
한국전쟁에는 워커 장군 부자가 있었군요
@@BanDi-c7o 근데 을사오적 권중현의 외가가 이순신 집안이라는게 다르죠. 권율과 이순신 후손의 결합이 일제에 나라를 넘긴 후손이 하필 을사오적이라...쩝 .
워커 장군 집안과 비교 불가죠
@@seon-kimin6784 와 권중현 대단한 🐦끼네요
대단하다… 제 짧은 지식으로 워커 가문에 먹칠을 햇군요 ㅠ
워커 장군 님 당신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한국이라는 작고 가난한 나라를 위해 당신의 헌신과 노력에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고귀한 희생을 평생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대구에 워커장군을 기리기 위해 지금도 켐푸워커가 있죠
우리에게 자유를 선물하신 장군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분의 아들도 대장으로 예편하셨는데 얼마나 굉장한 일을 하셨냐면 아버지와 함께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아버지의 장례후 다시 한국에 와서 한국전쟁에서 싸우셨습니다. 지미카터 행정부가 주한미군 감축을 논의할때 육군 대장으로 강하게 반대하셧습니다. 진짜 우리나라는 미국의 워커가문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월튼 워커 장군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멸공!! ❤❤😢😢
참으로 위대한 군인 워커장군.ㅡ
귀한 그 분의 마음과 한국을 구한 사랑에 진정 감사를 드립니다.♡♡♡
워커장군의 교통사고 지역이 도봉역 2번 출구 지역 인건 이번에 첨 알았네요..
가끔 도봉역을 가긴 하는데, 혹 가게 되면 2번 출구에서 묵념한번 하고 와야 겠네요..
만물상자님 감사합니다.
워커 장군님 고맙습니다 !😊
워커 장군님 감사합니다. 자유대한민국은 저희와 주한미군이 함게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워커장군님의 헌신에 감사 드리고 명복을 빕니다.
전 도봉구 창동 23년 산 사람이라서 들어왔는데 6.25에서 도봉구에서 죽은 미군 장성의 무덤이 묻혀있는지 몰랐었네요. 미군들의 자유 민주주의 수호에 대한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1950.12.23. 성탄절을 이틀 남긴 날.
워커장군은 현재의 도봉역 2번출구 도로 맞은편에서
한국군 트럭과 충돌하여 세상을 떠났습니다.
현재 표지석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워커 장군의 낙동강 전선전투 때 stand or die!는 정말 진정한 한국전의 영웅 자체였다! 예전 임진왜란 때 조선 구국의 영웅이셨던 이순신 제독님의 필생즉사 필사즉생의 그 자체! 한국전의 영웅 워커장군님과 16개국 연합군 장병들의 희생과 노고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자유대한민국만세! 한미동맹 만만세!
워커 장군님 감사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게 그것도 국군 트럭에 교통사고로 허망하게 가시다니... 적군이 좋아하는 모습에 분노를 억제할수 없어.. 편히 잠드시길, 뒷모습에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나라를 지켜주셔셔.... 당신들의 희생을 잊지 않고 값진 삶을 살겠습니다.
'월튼 워커' 영상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도봉역 맞은편에..인도에 초라하게 워커장군이 사망한 곳이라고 초라하게 표지석이 있죠 때를 시커멓게 뒤집어 쓴
조화와 함께..
우리나라가 워커 집안에 큰 빚을 졌네요.
감사합니다.
늦게 알게 되었지만 장군님의
명복을 빕니다 덕분에 지금의
자유대한민국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장군님😅
대구에 있는 미군부대 캠프워커도 워커장군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쓴걸로 알고 있습니다.
월튼 워커장군은 한국전쟁시 최고의 장군이자 영웅! 가장 대한민국을 구하신 분이다.
월튼워커 장군님 감사합니다!
존경합니다 워커장군
우리가 자유와 번영을 누리고 사는 것은 모두 워커장군을 비롯 이 땅의 자유를 위해 싸워주신 연합군과 국군의 위대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워커 장군의 명복을 빕니다 🎉
만물상자를 통해. 미국의 장군들. 맥아더,워커,벤플리트,리지웨이, 해병대 스미스 장군들이 하나같이 이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며 싸웠는지 알게되었습니다. 현재의 정치적 경제적 미국과의 관계를 떠나. 미국이라는 나라를 다시한번 리스펙트 합니다. 감사합니다
7월 말 낙동강 건너 부대가 자리 잡았을때 워커가 이렇게 당부했다고 하죠
이제 더이상 후퇴는 없다, 누가 뭐래도 방어선을 뒤로 늦추거나 조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됭케르크나 바탄 전투를 두번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부산까지 달아난다면 역사상 최대의 살생이 벌어질 것이다.
끝까지 싸우자.
하나로 뭉쳐서 굳게 맞서야 한다.
우리중 누군가가 죽어 넘어지더라도 우리는 함께 싸우다 죽을 것이다.
Wilson Heefnet, Patton's bulldog p185, Max Hastings The Korean war p84, 콜디스트 윈터 p246
벌써 곧 6만이라니...제가 다 감격스럽습니다. 요즘 바쁜 일이 많아 업로드날에 바로바로 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항상 꾸준히 올려주시는 영상을 즐기고 있는 예전부터 봐왔던 애청자로서 10만 20만까지 쭉쭉 순항 응원하겠습니다!
응원의 말씀 감사드립니다.
채널의 모든 컨텐츠는 정확한 내용만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이렇게 고증화면을 정확하게 인용하여 이해시켜주지 못합니다.
이점은 확실합니다.
미국 군인 워커장군님 충성! 감사합니다.
워커장군님 고맙습니다!
철저한 고증
해설
감사합니다 😊
감사 합니다 ~~~!!!
구태여 알려하지 않았던,하지만 워커라는 단어에는 작은 궁금증이 있었기에,
오늘 알게 되어 궁금증이 해결 되었습니다.
군화를 워커라고 했던건 당연했는데 장군의 姓이였군요!
워커 힐의 워커도 장군의 姓이였군요!
오래전 이태원 로터리에 워커장군동상이 있었고,미군장군의 동상이 왜? 이곳에 있고 우리와 무슨 인연이지?
했는데 오늘에서야 오랜,오십여년전의 의문이 풀렸습니다.
로터리 중앙에 덩그러니 서 있어 다가갈 수 없었고,동상의 설명문도 있었는지 기억이 안납니다만、
미팔군기지를 내려다 보듯 있었던 것은 아니였나 하네요.
로터리에서 삼각지까지는 줄곳 내리막이였지요.
워커장군 동상은,
한가롭던 그 시절에서 눈부시게 발전한 우리나라를 바라보았을지요.
아직도 그 이태원 로터리에 서있을지요.
아흔 여섯의 내 부친도 육이오 참전 장교.
부친으로 부터 워커장군이란 이름만 들은 기억은 있습니다.
포부를 이루지 못하고 졸지에 사망한 워커장군의 명복을 빕니다.
정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전쟁의 신 님 하트 감사드립니다.
응원의 말씀 감사드립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저야말로 좋은 영상 감사드립니다.
워커중장이 낙동강방어를 거의예술적으로 지휘해서 부산함락을막음 그의옛상사인조지패튼패튼이새삼대단하다워커중장이자기전에항상패튼이집필한전술서를항상끼고잤음
대단한 영웅들,
머리 숙여 존경합니다.
워커힐의 이름이 그렇게 탄생햇군요
워커장군
장군이란 이름값을 햇군요👍
아십니까?
워커장군!
윌튼워커!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대구에 캠프워커가
있습니다!
워커장군님은 겁없는 적극적인 훌륭한 군인이었다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감사한 마음이 있으시다면 도봉역옆 럭키아파트 모서리에 묘비가 있습니다..참배는 바라지 않습니다만 감사한 마음은 가져주세요
한국군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일본군 장교, 부사관 출신들, 독립전쟁했던 독립군 출신들, 국방경비사관학교 출신의 육사출신들이 뒤섞여 있었는데, 그래도 일부분은 패튼의 아끼는 부하였던 월튼 워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그러므로 한국군은 패튼의 간접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철모를 쓰고, 기동을 중시했던 월튼 워커 장군의 성향은 조지 패튼과 비슷하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패튼도 전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하고, 워커 장군도 전쟁중 교통사고로 순직했다. 참 애석한 죽음이다. 한 사람의 쓰임이 다하면 하느님이 데려가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전 개인적으로, 맥아더보다도 월튼 워커 장군을 더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도봉동, 유년 시절을 보낸 제 고향과 같은 곳에서 사망했군요. 게다가 6사단 출신인데 이래저래 워커 장군과 인연이 있네요.
정말 인연이 있네요.
6.25전쟁당시 참전한 미군 장군의 아들만 200명이었다고하죠!!
아이젠하워 대통령 아들도 참전했읍니다.
박대통령 님 이 워커힐 을 만든겁니다 영웅 을 잊지 않겠습니다
ㅋㅋㅋㅋㅋ 다카끼 마사오??
맥아더장군 워커장군 대한민국의 은인 !!!!!ㅠ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남한국민들들에겐 너무나 많은 아쉬움을 남긴 한국전쟁이었습니다.
통일을 위한 기회가 5000년만에 찾아왔어도 잘못된 판단의 연속으로 살리지 못한.
한국과 유엔군이 평양까지만 점령했어도 통일은 된거나 마찬가지인데.
욕심에 함경도개마고원 산속까지 진격한 것은 큰 잘 못.
북한은 평양이북은 산지라 나라와 수도를 유지할 곳이 전혀 없어 자멸이 예정된 상황.
진격을 하려면 차라리 핵포함 대규모 진격으로 만주까지 밀었어야.
이 승만은 자나깨나 만주회복을 외쳤는데.
사람들이 패튼이나 워커를 누가 암살사주 한 거 아니냐? 라고 하는데 당시 지프는 안전벨트도 없고 그냥 비딱하게 타는게 유행이라 그냥 교통사고 나면 바로 붕 떠서 죽었음, 실제로 수 많은 장교들이 지프사고로 죽었고, 그나마 4명 탈 수 있는 중에 2인만 탔음에도 사망률이 높았다(이는 지프 특유의 힘과 전고 때문이기도 함) 사족으로 벌지전투 당시 미군으로 위장한 독일군 특공대들이 많이 들킨 이유가 미군은 2명만 지프에 타는데 차량이 부족한 독일군은 차량에 최대한 많이 태우는 습관이 있어서 2인 지프에 4명씩 타고 다녀서 눈에 띄였다고.
How are you..
대한민국 역사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뉴욕에서 응원합니다. ❤️❤️👍✌️
응원 감사합니다.
도봉동 637-107 에 워커장군의 기념 흉상이 있습니다. 정말 이분이 안 계셨더라면 한국은 아작 났습니다. 만일 광화문에 한국인을 위한 미국인을 기념하는 동상을 짓는다면 무조건 워커장군이라고 생각합니다.
맥아더 장군은
자유대한 민국을
구해낸 전쟁의 신이다
대한민국을 지킨 영웅들 감사합니다^^
맥아더보다 난 이분이 좋다 장군님 지금 대한민국이 너무 개판입니다 탱크좀 보내주이소
자유의 책임
자유란 무엇인가? 철학적 사변을 논하자는게 아니라, 현재 나자신의 상황을 알아보자는 말이다. 즉, 지금 여기에서의 나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인식하는 바탕 위에서 자유의 본질에 접근해보자는 것이다.
내가 이 하찮은 글을 늘어 놓고 있는 현재가 지금이고, 우리은하권 태양계 지구성 아세아주 대한민국 경상북도 안동시가 여기에 해당한다. 나는 62년생이고, 남성이고, 기혼에 자식을 슬하에 둔데다 고령의 노모가 생존해 있고, 삶의 과정은 평범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용렬하다고 해야만 진실에 근접할 정도로 비천한 존재다. 이게 객관적 실체에 충실한 나에 대한 진술이다.
바로 이, 특정된 나라는 존재가 자유를 이야기해보겠다.
먼저 나는 자유란 지극히 관념적이고도 동태적 용어의 의미를 스스로 말미암음이라고 정의(定義)한다. 철학이나 정치학 또는 국어학 수준의 학술적 토론이나 논리전개를 하자는게 아니라, 전술한 나라는 특정한 실존적 한 인간이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서 온몸으로 느끼는 몸부림으로서의 자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학문적 접근이나 비판은 사양한다.
자유란 스스로 말미암음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현재 대한민국에서 일개 국민으로서의 모든 의무를 이행해 온 나에게 자유는 있는가?
스스로 말미암는다는게 뭔가?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할게 전혀 없다. 가장 기본적이고 따라서 상식적인 것을 상정해보자.
우리가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가?
아침에 일어나면 먹고 씻고 무언가 공부나 일을 하고 자식을 걱정하고 영화관이나 시장 또는 공원을 가고 또는 부모님이나 친구에게 안부를 전하고 음악을 듣거나 자전거를 타다가 밤이면 가족들과 함께 잠에 든다. 여기에 내가 성인이 되기 이전의 시간들과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아야하는 전제와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일개 국민으로서 법률준수라는 사회적 계약의 이행의무를 제외하면 사실상 나의 행동이나 생각을 제약하거나 구속하는 그 무엇도 있어선 안된다.
내가 어떤 사유를 하고, 어떤 행위를 하던지간에 그 어떠한 방식으로든 나의 자유의지가 아닌 것을 강요 받는다면, 나는 분명히 자유의 상태가 아닌게 확실하다.
한 마디로 자유를 자유스럽지 몾하게 하는 모든 것은 강제이고 폭력인 것이다.
그것이 비록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되는 법률의 형태를 띠고 나타날지라도 위헌의 소지가 있거나,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징벌적 과세라던가,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규제나 정책일지라도 그것은 이미 폭력인것이다.
이런 기준으로 지금 여기 대한민국은 특정지역과 출신배경을 공유하는 사이비민족주의권력에 의해 폭력이 버젓이 합법의 탈을 쓰고, 너무도 당당하게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비자유의 전체주의국가임이 명백하다.
내가 이러한 판단을 할 수 밖에 없는 당위성의 근거는 우리 집 앞을 흘러가는 낙동강변의 모래알 숫자 보다 많다.
그 실예를 열거해보자.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다고, 없는 죄도 조작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멀쩡한 기간시설이나 산업설비도 너무도 희박한 사고가능성만으로 폐기하거나, 효율적 대안도 없이 정지 시키거나 철회해, 그 발생된 피해를 국민에게 부담토록 강요했다.
경제의 작동원리를 무시하고, 도덕적경제정책을 무지막지하게 밀어부쳐, 그 부작용을 극대화 시켜, 온 국민들에게 고통을 강요했다.
감당할 수 없는 갖가지 과도한 세금을 갈취하여, 자기편들 끼리 갈라서 먹었다.
자기편이 아닌 모든 국민들은 적폐라는 낙인을 찍고, 모멸과 조롱으로 박해를 그치지 않았다.
국가의 재정을 마구 풀어서 자기편의 숫자를 늘리고, 또 그 유지를 위하여 더더욱 세금을 늘리는 무한반복 가렴주구의 학정이 지속했다.
국가경영에 대한 외교 및 안보에 대한 비전, 즉, 국가대전략도 없이 환상외교와 굴종안보는 우리의 국가나 기업의 비용을 증가시켜 경쟁력을 하락으로 유도하여, 결국은 산업의 공동화를 이룩하였다.
당연히 실업자는 증가하고, 특히 청년들의 실업은 결혼기피와 출산을 기피하게 조장하여, 민족의 멸종을 촉진하는 지경에 도달했다.
여기에 무엇을 더 열거하랴!
국가의 존망이 풍전등화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의회나 언론을 가장한 선동꾼 및 법조계, 문화계 등 사회전반에 깊이 뿌리를 내린 국가파괴세력들이 온갖 나팔수를 동원해 자화자찬으로 날을 새고, 순진한 국민들을 세뇌하고, 또한 이에 속지 않는 사람들은 시위나 학문적비판을 가장한 무시무시한 해결사행동대원들을 투입하여 탄압 및 제거하는 공포통치를 계속하고 있다.
그 뿐이랴?
이토록 자유는 자유롭지 몾한지가 이미 오래건만, 이젠 훨씬 더 고성능에 고사양인 풀옵션 한정판 세습독재자를 숭상하며 국가전복을 기도하고 있다.
이에 나는 감히 천명한다.
이제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고.
여기는 21세기의 낙동강전선이라고.
스텐드 오어 다이!
이것은 6. 25전쟁 중, 낙동강전선 최후의 보루에서 미국의 제8군 사령관 워커중장이 토해낸 결사방어의 결의에 찬 사자후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하지만 그 책임 조차도 나의 자유로운 영혼이 선택한 것일 땐 두렵지 않다.
얼마 후엔 결전의 날이다.
나는 자유를 선택하련다.
여기는 낙동강이다!
스탠드 오어 다이!
涯黎
군화- 워커 민간어원썰 인상적이네요. 작업화를 Woker boots, work boot 같이 쓰는 용례가 있을건데. 다음배-담배 민간 어원급으로 흥미돋았습미다.
개인적으로도 차라리 군화를 영어로 하려면 부츠라는 단어가 있는데
왜 워커라는 말을 쓸까 이상했는데 의문이 풀렸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워커장군님과아드님! 부디 천국에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굽이 살펴 주시옵소서!
감사합니다 장군님 감사합니다ㅠ
엘리트 하나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한국전쟁 에는 참 미스테리가많내요 하긴 2차세계대전 끝나고 게을리 놀고싶을수밖에없죠 한국전쟁 초반에 미군이 약할수밖에없는이유죠 일본에서 대우도많이받고 공짜로많이놀고다녔구나
사료를 보면 나오지만
당시 일본에 있던 미군은 그냥 미군이 아니라 점령군이었습니다.
때문에 공짜 기차를 타고 마음대로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자료화면에 나오는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6.25전쟁이 터지자 이렇게 편히 지내던 미군들은 지옥을 맛보게 됩니다.
워커장군조차 일본에서 가족과 행복하게 보냈다고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한국전쟁 은 참이상한 전쟁이였내요
@@만물상자TV전쟁의신 근데 이해가안가는건아닌데 2차세계대전 이라는 거대한전쟁이 끝나고 편히있고싶고 놀고싶죠.....
@@kdwni03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당시 일본에 있던 미군은 패전국 일본을 통치하는 점령군이었습니다.
한국 구한분은 워커 장군이네요!
가장 암담한 시기에 가장 많은 고생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도봉역 을 지날때 묵념 기도 하는 한국인이 되겠습니다.
👍
은혜는 꼭보답해야지.
반동가리난 이 한반도를 어렵게 지켜낸 미군들이 있었는데.. 또다시 전운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데.. 북한을 격파하고 중공군을 이기진 못하더라도 혼자서라도 빈사상태까지 보낼정도의 국력과방위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미군이 나중에라도 도아준다.. 첨부터 비실대면.. 도아줄 가치가 있냐?? 대만처럼...
잘봤습니다
다음엔 북베트남군이 중공군의 신분으로 6.25전쟁에 참전했을 가능성에 대해 다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중공군이 북베트남군 신분으로 가 맞을거같네요😅
감사합니다 장군님ㅜ 왜 이런분들의 일대기를 방송 안해주나?
한국의 언론방송을 장악한 좌익들이 이런 인물들을 싫어하거든요.
워커 장군 덕분에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가능했던겁니다.
맥아더 장군이 미 해병대를 비롯한 최정예부대를 이끌고
인천상륙을 준비하고 있을 때 워커장군은 죽을 맛이었습니다.
자신은 한정된 병력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해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막았습니다.
이곳에 북한군 최정예부대가 묶여있지 않았다면
인천상륙작전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국을 도운 미국 장군이 하필이면 국군 트럭에?!?! 못 말려!!! 진짜 한심하다 국군!!!
참으로 이게 진짜야? 할 정도로 기가막힌 일이었지만
미 8군 사령관 워커중장을 죽인 것은 무면허 한국인 군속이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외 또 다른 영웅 이네요....워커장군!!! .......현충일날 이 땅을 위해 싸우신 장군님께 경의를 표합니다....전승!!!
이제 일본에게 패망한 조선보다
단군이래 최강 세계강국 자유대한을 세우고 지키고 일으킨 영웅들을 내세워야 한다
미개한조선은 없어진게 우리의 축복
워커장군께서 아들에게 직접 훈장을 수여하기 위해서 들뜬마음으로 의정부로 향했고,
그날 장군께서 직접 운전을 했다. 평소에도 가끔씩 직접 운전하며 레이싱을 펼치셨다함. 과거 방송에 나왔었다....
없어질뻔한 대한민국을 구한영웅~월튼워커장군
광진구 워커힐이 워커 장군이 사망한 곳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곳임.. 워커장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저공비행하며 확성기로 후퇴하는 미군들에게 악을 쓰며 다시 돌아갈 것을 지시한 것으로 유명함.. 강건너 적군의 총탄도 두려워하지 않았음
워커장군이 사망한 곳은 지금의 도봉역 2번 출구 부근입니다.
아들에게 훈장을 달아주기 위해 의정부 방면으로 가다가 사망했습니다.
워커힐 호텔은 워커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워커힐로 명명한 것입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아 그렇군요 정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튼 참 영웅이었습니다. 워커 장군 아니었으면 부산은 함락됐을 거예요.
@@torutomaktu 분명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07:23 부분입니다.
전쟁터진 나라의 육군본부는 부산으로 물러갔는데 워커장군은 사령부를 대구에 차렸습니다.
이는 죽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워커동상이 용산구청에서 삼각지쪽으로 좌회전하는곳에 우리국민학교때도 있었는데 언제 없애버렸는지 ...
조지 S. 패튼과 같은 마지막을 맞이하였군요 ㅠㅅㅠ7
워커 장군님이 계속 살아있었다면 연합군과 국군이 더 적극적인 태도로 나서고 나아가 휴전에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겁니다..감사합니다 워커 장군님.
이 방송을 좋아하고 자주 봅니다. 그런데, 오늘 방송중 몇 가지는 사실이 아닌듯합니다. 워커 장군이 해병대를 3일간 활용했다는 것, 집차에서 "미친듯이" 서서 달렸다는 것, 워커 장군이 사고당시 차량 바깥으로 튀어나와 사망했다는 것... 벨트를 매지 않은 ,워커 장군 집차에 동승한, 부하들은 살았습니다. 워커 장군은 추위로 허벅지 wrap belt를 하고 있어서 탈출이 안되어 사망한겁니다. 자신의 정찰/지휘를 위해 서서 달린 것은 그 분의 지휘철학이었습니다. 마산 전투와 다부동지역 전투에서 미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이동하기 전까지는 오랫동안 미보병들과 함께 싸웠지요. 항상 재미있게 이 방송 보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지프 운전병은 사망하지 않았습니다. 사고 직후에 미육군 제8055 MASH에 워커장군과 함게 운전병 Belton 상사도 후송되었는데, 워커 장군은 MASH 군의관이 사망을 확인했고, 운전병은 심하게 부상을 입었지만, 군목이 인도한 간단한 워커 장군 임종 예배후에, 운전병은 헬기로 후송병원으로 후송되었습니다.
부경대에는 워커장군을 기리는 워커하우스가 있습니다.
워커하우스는 6.25 전쟁 당시 미 8군 사령부의지휘본부로서 사령관 워커(Walton H. Walker) 장군과 참모들이 머물렀던 역사의 현장입니다.
워커장군은 바로 이곳 워커하우스에서 낙동강 방어선이 가장 위급했던 18일 동안
전쟁의 지휘본부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참고로 워커하우스는 돌을 사용해 지어져
굉장히 튼튼한 구조로 지어졌는데, 이는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통신장비 보호를 위함이였다고 합니다.
카터는 최악의 미국대통령중 한명이다.
아 우리 장인 어른이 워커 장군의 당번병이었는데....
새로운 사실을 알게되어 감사드림니다
워커장군님과 함께 싸운 미군들예게 감사드림니다
워커 중장을 군용 트럭으로 죽게 만들다니.
이건 의도적 살인, 기획살인, 암살 이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만 있을 뿐. 살인범을 수사해서 배후를 밝혀야 하는데.
그러게요
무슨 고속도로라서 피할수 없는것도 아니고 좀 이해안되네요😢
늙으면 가는게 진리다 도라이들이냐 정신병자야? 북괴군도 원인미상, 공비소행도 아니고 한국군이 운전하다 운전병 운전교육 하다가 겨울철 좁고 미끄러운 비포장길에서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돌아가신 사고인데 뭔 과대망상증 음모론에 빠져 치매걸린 노친네 헛소리들이야
음모론은 무지에서 나오는 망상입니다. 워커장군의 안타까운 죽음을 과대망상으로 해석하지좀 마세여ㅛ
사실이었으면 미군부터 가만있지 않았겠죠...
월튼 워커장군 도봉역에서 교통사고 당했을까요 만물상자님 🤔?!
워커 장군하면 워커힐과 대구 캠프 워커가 있죠. 64.11.14 신성일&엄앵란 결혼식에 엄앵란은 그당시 유명 디자이너이자 노라 노 패션학원장인 노라 노(경기여고 출신인 본명이 노명자로 서울중앙방송국장 노창성의 딸) 드레스가 아닌 국제복장학원 1기이자 남성 1호 디자이너로 73년 롯데로 불하된 반도호텔(4.16 이후 5.16때까지 장면 총리는 VIP실을 총리관저로 썼음)에서 패션쇼를 한 신성 앙드레 김(김봉남)의 드레스를 입었죠. 그리고, 성 김 전 미국대사와도 관련 있죠. 58년 옛 부산 수영비행장에서 옛 여의도 비행장으로 가던 민간항공사인 대한민국항공 빅행기가 공군 정훈감 김기완 대령과 조종사&부조종사인 미군과 국회의원이 북한으로 하이재킹 당해 피납되는데 공군 정훈감이 성 김부친이죠. 대한민국항공의 비행기 3대 중 57년 만송(이기붕의 호)호가 수영비행장 착륙 중 전손되고, 58년 창랑(장택상의 호)호가 납북되고, 우남(이승만의 호)만 남아 미국에서 비행기 1대 더 들여오나 5.16 재정난으로 파산 직전이 되자 혁명정부는 62년 국유화해 대한항공공사가 됐다가 69년 한진에 매각해 대한항공이 되죠. 창공호 사건으로 북한 납북으로 공군에서 나오죠. 63.4.8 개장한 워커힐은 중앙정보부가 관할하다 73년 선경에게 매각되죠. 63년 때 워커힐의 지배인으로 있던 김기완씨는 김형욱 중정부장의 제안으로 중정에 들어가 이름이 김재권으로 불리게 되죠. 71년 의문의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김대중은 72.10.11 신병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가고 72.10.17 유신을 발표하자 일본에 있게 되죠. 73.8.8 일본 도쿄호텔에서 납치되 배에 실려 익사 시키려하나 김대중 동선을 파악한 훗날 주한 미국대사가 되는 CIA한국지부장의 경고로 김대중은 부산항에 풀려나죠. 그 당시 일본 주재 한국대사관 영사가 성 김 부친이 김재권씨였죠. 김대중 납치사건은 73.4 윤필용 사건으로 입장이 난처해진 이후락 중정부장의 부하들이 꾸민일이죠. 68.1.21사건 때 윤필용 방첩부대장은 김신조의 박정희 모가지 발언으로 해임되고 김재규가 방첩부대장으로 왔다가 보안사렁관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중장이 되고 70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롤백한 윤필용 감청하다 71년 8월 들키면서 김재규 보안사령관은 짤리죠. 70년 12월 일본 대사에서 중정부장으로 롤백한 울산 출신 이후락(육군 소장 출신으로 2공 때 정보정보연구회 연구실장인데 당시 국가정보 취급 책임자로 혁명정부에 잡혔다 풀려난 후 혁명정부에 충성했음. 차남은 한화 김종희 회장의 장녀 김영혜와 결혼하고 첫째 외손부는 CJ손경식 회장 장녀이고, 차남은 94년 푸르밀우유 회장 아들 신동학과 프라이드 사건이 유명하죠)과 울산 출신으로 전두환의 라이벌이자 윤필용 비서인 손영길 준장을 매개로 친해지면서 73.4 이후락과 윤필용의 만남에서 각하 다음은 형님 이후락이라고 하다가 차기 중정부장을 노리는 박종규 경호실장 레이더에 걸리면서 윤필용과 전두환의 라이벌 손영길이 날아가고, 72년 김일성 만나고 왔지만 역린에 걸린 이후락의 부하들이 김대중 납치사건이란 무리수를 두다 73년 12월 짤리죠. 하지만 육여사의 반대로 차기 중정부장은 신직수(박대통령이 5사단장 때 법무참모로 중정 차장, 검찰 총장, 법무부 장관, 중정 부장까지 함)넘어가고 1974.8.15 육여사가 돌아가시자 박종규 짤리고 평소 육여사가 총애하던 차지철이 경호실장이 되죠. 1960년생인 성 김은 성북동 동네친구가 동갑인 정진석 의원으로 한국일보 기자때 LA로 가서 성 김의 결혼식 함진아비를 해 주었는데 성 김 부인은 이화여대 미대 출신이죠. 74년 부친과 가족들이 미국으로 망명하죠. 성 김 외삼촌이 임재범과 손지창의 부친인 임택근 아나운서죠. 임택근 아사운서는 51년 연희대 1학년 때 남산의 서울중앙방송국 아나운서로 합격하나 입사조건이 대졸이라 합격 취소가 되려하자 디자이너 노라 노 부친인 서울중앙방송국 노창성 국장에게 읍소해 합격한 후 인기 아나운서가 되죠. 4.19 이후 우리나라 육군 최초로 ROTC가 생길 때 서울대 ROTC준비교관이었던 전두환 대위가 주도한 5.16 찬성 육사생도들의 가두행진을 라디오 생중계를 하는 역사의 현장에 있었죠. 64년 MBC로 옮기고 MBC&경향신문 전문까지 되었다가 80년 신군부에 의해 MBC와 경향신문으로 갈라지고 전무에서 사직하게 되죠. TBC와 중앙일보도 갈라지고 TBC는 KBS2가 되고 TBC 여의도 신사옥은 KBS별관이 되죠. 육사생도 가두행진을 이끈 전두환 대위는 박정희 재건회의 부의장의 눈에 들며 재의회의 비서관으로 출세길에 들게 되죠. 전두환의 부친은 예전 대구 삼성상회에서 일했는데 그때 이맹희도 동년배라 알았죠. 이병철 회장이 서울로 가면서 대구 삼성상회 지배인은 현 동서식품 회장의 부친인 김재명 회장으로 6.25때 거지꼴로 내려온 이회장에게 그동안의 수익금을 돌려주면서 이회장은 부산에 내려가 고철장사로 떼돈을 벌어 부산 서면 부산교통공사 건너편에 있던 제일제당을 세우죠. 전경환은 장교로 월남 전 참전하고 예편 후 삼성비서실에 있다가 형이 장군으로 있던 청외대 경호실로 들어가죠. 한국비료사건으로 물러난 후 이병철 회장의 비리투서를 이 회장의 차남 이창희가 써 전두환을 통해 박대통령에게 전달되지만 박대통령은 아들이 아버지를 고자질할 수 없다며 돌려보내고 당사자 이창희는 미국으로 동생을 관리못 한 이맹희는 거의 모든 직 박탈당하고 패인처럼 떠돌고 삼성 대권은 이건희에게 넘어가죠. 80년 대통령이 된 전두환을 통해 이맹희는 다시 삼성을 찾으려하나 실패하죠.
워커힐 호텔도 워커장군을 기리는 호텔입니다
워커는 중공군 2차 공세때 충격 먹고 한반도 포기 하려했지. 실제 위기의 un군과 대한민국을 지킨건 적을 정확히 파악한 리지웨이와 화력전의 대가 벤플리트
밴 플리트 장군은 한국에 대한 애정이 미군 장군 중에서 가장 많았을 것입니다.
그의 별명이 한국군의 아버지입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국군에게 포병과 전차 등 중화기를 아낌없이 지원했고
4년제 정규 육군사관학교의 커리큘럼을 미국을 모방하여 짰던 것이 밴 플리트 입니다.
또한 국군의 문제점이 훈련 부족임을 깨닫고 병사들을 모아 집중 훈련을 시켰고
그 훈련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기도 했습니다.
ruclips.net/video/agvNMsb64yI/видео.html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가 한국군의 아버지로 불린 이유)
그 뿐이 아닙니다. 밴 플리트 장군은 휴전 전에 금강산을 탈환하기 위해
금강산 탈환 작전까지 기획한 인물입니다.
ruclips.net/video/R8PVjkC8sXA/видео.html
@@만물상자TV전쟁의신벤 플리트장군이 더 위대하네요😢
아... 워커힐호텔... 또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박경례 지령이 있었던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군속이 왜 군용차량을 운전하냐 면허도 없이
정작 전투에 임해야하는 우리육본은 부산으로 도망가고, 워커장군만 대구에서 홀로 사수 ㅎㅎ, 도데체 니들은 부끄러움도 없냐??
이역만리외국땅에서희생하신UN군여러분 감사합니다
모자보고 독일군인줄 알았습니다 ㅋㅋㅋㅋ
실제 워커장군의 모습입니다.
미군 장군 군모와 독일군 군모가 비슷하긴 하죠.
워커 장군이 낙동강 최후저지선에서 미8군에 내린 명령:
"Stand Or Die!"
안타깝다!
북괴군의 서울주둔 3일 미스테리에서 질문드릴게 있는데요
3일을 기다리다가 남침을 지속했다하는데 인력이나 물자야 뗏목으로 나른다 치더라도
북괴탱크는 한강도하를 어떻게
했는지 궁금합니다
대교들은 다 끊어져있고
도하장비도 소련에서 못받았던
상황에서 3일동안 손가락 빨다가
이후 급하게 남침재개를 했는지
서서히 도하를 진행하고 있었는지
북괴탱크 기준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ruclips.net/video/NX7yJhGXIWQ/видео.htmlsi=jTRWxyXd5Fty0QNM
(북한군의 3일간 서울에 머물렀던 이유)
사실 이 영상 안에 답이 있습니다.
04:45~09:41: 그들이 멈춘 진짜 이유는 이것입니다. 부분에 북한 탱크가 한강을 건너는 장면이 나옵니다.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끊었고 미군도 한강 철교를 폭격으로 끊어놨습니다.
그런데 한강철교의 단선 2개는 끊어졌으나 복선 1개는 살아 남았습니다.
북한군 전차는 도하장비 없이 이곳에 나무판자를 임시로 깔고서 남하했습니다.
북한군 보병은 민간인 나룻배를 징발해서 이것을 타고 한강을 건너게 됩니다.
결국 박경래가 아니었으면 한국 통일 가능했다는이야기네
워커장군이 겁쟁이 블루스타 사창리전투에서 다팽겨치고 줄행랑친 6사단 청성부대 호구가 운전하는 차에 치어 서거하였구만..6사단 왜 해체안했나?
워커장군의 지프를 들이받은 사람은 국군병사가 아니라
민간인이었던 군무원이었습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그러니깐요...북에포섭된간첩이라니깐요.
패튼과 또 한 가지 유사하게 탱크에 그 이름이 남음
태양신 입니다 옛날에 김영미 입니다 창녕띠기 잖아요 근로복지공단 대구병원에서 3회 마치고 부산 이사왔고요 1억3천만원 주고 샀습니다 삼성화재보험 김인호씨 덕택에 이집도 싸고요 그런데 기저귀 차고 병원에 누워서 계시데요 담배도 안태우고요 형님도 잘알고 일하는 애하고 연애 한다고요 맨날 이잖아요 장금이돼지국밥 에서요
중풍이 들어서요 적그리스도 이혼 입니다
지긋지긋합니다
화이팅하이소
한국전 이후 소.중국경 분쟁시 중국은 한국전때 같이 인해전술이 통할거라 생각을 해서 인해전술을 실행했으나 소련의 중화기 화력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철수를 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즉슨 미국의 소화기 전략은 실패를 한것 입니다
중국군한테 죽은게 아니고 한국인한테 죽었구나 천하의 맹장인데
의도치 않게 한국인 군무원에게
죽은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
5:01 세상에 워커화 기원이라니
개인적으로도 이 사실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미군은 워커를 워커로 부르지 않고 Military Boots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워커장군이 보내줬기에 워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