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d2577 이정후가 등장하기전 까지 유일하게 순수 신인이 유일힌게 규정타석 채우고 3할을 쳤었죠 거기다 당시 신인이었지만 98 방콕 아시안게임 엔트리까지 들었을정도 였으니.. 소속팀 삼성도 지역출신+1차지명 스타성 있는 선수여서 최소 15년간은 1번타자 걱정 없겠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3년뒤 헬멧 냄새 좋아하는 신인이 등장하면서 그 걱정을 덜긴 했지만요
베어스 입단 . 베어스 감독이 김성근 김성근은 투수는 많이 던지면 던질 수록 어깨가 단련된다고 믿는 사람 입단 첫 해 동계훈련때 부터 박노준을 무진장 던지게 했고 , 박노준의 어깨는 견뎌내지 못 하는 상황에 그와중에 외야수로 출전한 경기에서 수비를 하다 팬스에 어깨가 부딪치는 부상까지
강혁선수는 가족이 문제였어요. 가족이 이중계약을 주도. 또 두산에게 "죄송한데, 강혁 다른 동기들이 대학에 못 가니 일단 한양대 가겠습니다. 다음에 꼭 두산에 가겠습니다!" 라고 하면 원만하게 풀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그렇게 한 선수들이 있었기에). 가족이 두산에다가 "그깟 프로 안 가고 만다!" 라고 해서 두산을 열 받게 했고 두산이 영구제명 요구하게 만들어! 강혁 영입에 성공한 한양대관계자들조차 가족에게 " 왜 일을 만드세요? 제발 가만히 계세요!" 라고 말렸을 정도. 강혁을 위로하며 "아직 4년이라능 시간이 있다! 그냥 열심히하면 프로에서 꼭 너를 데려 갈 거다!" 라고 했다고 강혁이 한양대 졸업후 상무에 가서 병역을 해결하고 크보에 읍소 해서 징계를 풀려다 또 부친 병원비 문제로 돈이 필요해서 실업 현대 피닉스에 계약
박정혁선수는 저도 기억합니다. 어렸을때 잠깐 리틀야구했을때 휘문중고의 소운동장을 빌려서 했었고 그 인연으로 전국대회하면 휘문고 응원도 자주갔는데 16강부터 4강까지 경기 후반부에 동점 역전 홈런을 거짓말처럼 쳐내서 아주 난리가 났죠 결승에서는 아쉽게 클러치상황에서 범타로 물러나며 준우승했지만 이때 활약으로 대학생까지 포함된 국대에서도 4번으로 발탁됐었습니다 대회 중 부진해서 6번으로 바뀌긴했지만..
저는 부산에서 고교를 다닐 때 겨울철 선린상고가 제 모교로 동계 훈련을 왔습니다. 선린 연습 타격 때 박노준 프리 배팅하는 것 보고 깜놀, 치는 공이 모두 라인 드라이버, 지금의 이대호 급 수준.... 옆에서 지켜보던 모교 감독이 선수들 모두 부르면서, 자 ~~ 노준이 치는 것 잘 봐~~ 저게 바로 타격이야~~ 야구부 친구도 믿기 힘든 표정이었습니다. 당시 모교 감독님은 국대 감독까지 하신 정연회 감독님이었습니다. 또한 프리배팅 끝나고 피칭 연습할 때, 포수 뒤에서 박노준 선수의 공을 살펴보니 정직하게 들어오는 스트레이성 직구는 하나도 없었고, 플레이트 가장 자리를 걸치면서 솟아오르거나 아웃코스로 빠지는 공들이 대부분, 당시 고교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습니다. 봉황대기에서 박노준과 붙었던 친구는 공 3개로 삼진 당했는데, 평범한 공이라 초구만 지켜보고 2구, 3구는 휘둘렀는데 모두 헛스윙~~ 분명이 자신있게 칠 수 있는 공으로 보였는데 스윙 순간 공이 사라지더라고 하더군요. 그 친구는 당시 경북고 류중일 선수와 마찬가지로 고교 유격수 쌍벽을 이룰 정도로 잘 했었고 K대 진학 후 백호기 결승전에서 결승 홈런 때려 MVP를 받았던 선수입니다. 그런 역대급 재능을 가진 선수가 고대로 진학하면서 투타 겸업하게 된 것이 독이 된 것 같네요. 우연히도 저도 고대로 진학하면서 박노준 선수를 계속 지켜보았지만, 한가지만 똑 부러지게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때는 오히려 고교 때보다 공의 구위가 떨어진 것 같았습니다. 당시 고대 최00 감독님이 박노준을 타자로, 투수로 너무 혹사 시키지 않았다면~~~ 대신 선동열은 대학 시절 1학년 때 세계야구선수권 대회(82년 한국 우승) 이후 본인의 몸을 보호하느라 그다지 많이 등판하지 않았고, 연대와 경기에서 이순철한테 많이 많이 까였던 기억들이 생생합니다.(다소 설겅설겅 거렸던 느낌) 덕분에 프로에 와서는 아껴놓았던 어깨를 풀 가동하면서 전설적인 기록을 남겨 놓았죠.
저는 오랜 타이거즈 팬으로 김상진 선수 위암 4기라고 뉴스가 뜨니까 아니 4기가 될 때까지 구단은 뭐했냐 몸이 재산인 운동선수들 건강검진도 안 해주냐고 비난했었는데 운이 엄청 없는 케이스더군요. 엄청 특이하게 위벽 바깥쪽에 종양이 생겨서 내시경으로도 안 보이고 현대의학기술로도 조기 발견이 쉽지 않은 곳이라더군요... 이대진 뒤를 이를 에이스 오브 에이스의 자질을 갖춘 투수였는데 참 안타깝죠.
한명제씨의 음성과 딕션을 좋아하고 웬지 이제는 우리또래라 들으면 추억이되는 음성이라 좋아합니다만 이번엔 아쉬운게 많네요 저희 부모님이 82년에 강남구 논현동에 주택을 사서 이사오실때 4천만원이었습니다 97 한국시리즈는 해태 VS LG였는데 이종범의 위세가 대단해서 이종범 VS LG라는 스포츠신문 기사가 나올정도 였는데....또 휘문고 레전드 박정혁선수는 92년이 아니라 99년12월 횡단보도에서 떨어진 노트북 줍다가 택시에 치어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당시 학교에 끌려 강제로 응원다녔던 동대문야구장이 생각나는 새벽에 끄적여 봅니다
박노준 선수 부상당하는 경기 저도 본 기억이 있네요 다리 다친 직후에 기어가면서 홈터치하던 장면도... 저 당시 박노준 선수의 인기가 언 정도였냐하면 웬만한 청소년 잡지와 연예잡지의 표지 모델로 나오셨지요. 당시 라이벌이 경북고의 성준, 류중일인데 성준, 류중일 두 선수가 프로에서 짱짱 잘나갔던 걸 생각하면 참 안타깝지요
@@dnjfpsqjvlt 박노준은 그야말로 전국에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다..근데 BTS는 아예 모르는 사람들 엄청 많어 ㅋㅋ 박노준이 부상 당할 때 9시 뉴스에서 직접 병원에 누워있는 박노준을 취재할 정도였었고 일간 신문에 대문짝하게 나왔었다 ㅋㅋ BTS는 그정도는 택도 없을텐데 ㅋㅋ
박노준....그때 당시 고교야구를 선린상고때문에 좋아하고 지금도 사랑하는 이유가 된 선수죠...구본호감독...현재 뭐하시는지...박노준,김건우,조영일,이경제,이바오로 ,,,아직도 라인업이 기억이 나네요...81년 당시 3개 전국 대회에서 경북고에게 다 스윕을 당하죠,,,당시 천안북일 김상국,경북고 성준 ,대구고 강기웅,동산고 여태구 등등
그 시절 고교시절의 1명의 스타가 몇명씩 대학에 데리고 가는 얘기의 핵심은 그 쩌리 선수들의 부모로 부터 당시 학교 감독들이 거액의 촌지를 받아 챙겼고 스타선수들과 나누어 가지던 시절이었죠 프로의 엄청난 계약금과는 비교할수 없지만 월급쟁이 감독으로서는 매년 받는 성과급으로 고교 3학년전에 이미 진로는 다 결정되는데 대학 안가고 프로간다는 선수는 거의 경기에 못뛰게한다던지 훈련제외시키는등 온갖 불이익으로 대학을 갈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죠
한국에 야구 천재가 나올 수 없는 이유는 생활체육이 아니여서 전 국민을 대상으로 선수를 뽑는게 나는 야구할꺼야 어려서부터 시작한 사람만이 야구를 해서입니다. 일본은 야구가 생활 채육이 되었죠. 그래서 가능성이 보이는 선수를 뽑을 경우의 수가 많습니다. 한국은 나는 야구 천재야 알고 야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제가 야구로 유명한 중학교를 나왔는데 3년 동안 단 한번도 학교 체육 시간에 야구를 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라서 어깨가 좋았거든요. 멀리 던지기 2위도 했었죠. 돈으로 야구를 시작해서 끝까지 운동하려면 어마 어마한 돈이 들어가죠. 돈 없으면 운동 접어야 하는게 대한민국입니다. 김연아가 대한민국에 나온 것 자체가 미스테리입니다. 정말 대한민국의 국민성 때문에 일본에 개기는 거지 인플라로 보면 일본은 쳐다볼 수도 없는 엄청난 지원이 있습니다. 오타니 쇼헤이가 한국에는 나올 수 없는 이유죠. 자기는 천재인지 모릅니다. 그것을 캐취하고 밀어주는 인플라가 있어야 하죠. 한국은 그래서 운동 후진국인 것입니다. 가능성 있어도 무리한 제구 시켜서 어깨 망가져서 투수에서 타자로 가는 선수도 많죠. 아니면 운동 생활 끝내던지요.
아마 그 말이 아니고 일본은 누구나 어릴 때 야구를 하기 때문에 소질이 있는 아이라면 자기가 소질이 있는 걸 알게 되는데 우리는 오타니가 태어나도 평생 야구공 만질 기회가 없어서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거지요. 일본도 물론 중딩 말년 되면 소질있는 아이는 엘리트야구를 할지 부카츠, 즉 특별활동 야구를 할지 정하긴 하지요.
@@강기철-m3n 그러니까 더더욱 반쪽짜리 발언이 되죠. 자기 자식이 노래하겠다. 운동하겠다. 영화 만들어보겠다고 하면 기쓰고 반대하며 거렁뱅이 취급해온게 한국 어른들의 시선 아닙니까. 곧 죽어도 공부해야하고, 체육시간마저 다 뺐어서 아이들 입시 기계로만 육성해온게 한국 청소년 문화인데 옆나라 일본 생활 체육만 논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 발언인가요? 직접적인 원인은 제하고 바꾸고 싶은 이상만 논하는건 아무짝에도 의미없는 발언이라 생각합니다.
원댓글 멍청한게 일본이든 미국이든 한국이든 야구는 돈없으면 못하는 종목입니다 어디서 말장난식으로 씨부리고있어 누구나 다 건드리는 종목이 아니란 말입니다 국민학생때 실력이 좋아서 학교에서 지원해주고 감독도 지원해주고 그래서 선수생활을 이어나가면서 중학교 고등학교 계속 엇나가지않고 열심히해서 이어나가는 선수들이 있는겁니다 진짜 개소리는 좀 댓글로 안썼으면 좋겠는데 알량꼴량한 지식가지고 있어보이게 댓글쓰는건 손모가지를 짤라야지
박정혁선배...그립네..덕분에 봉황대기 8강부터 결승까지 응원갔었는데... 교내에서 마주치면 웬지 아우라가 느껴지는 우상같은 선배님. 그때 선동이랑 진필중선배, 류택현선배까지...고교시절 제일 기억에 남았던 대회였던듯..... 갓졸업한 선배님들부터 70대 노인이 되신 선배들까지 플랜카드 걸어 놓고 응원하시는거 보고 이래서 운동부를 키우는구나 납득이 갔음. 가끔 박정혁선배 이야기 나올 때면 너무 안타까워 맘이 안 좋다. 개인적으로 학폭에 연루된 인간들을 극혐오하게된 가장 큰 이유가 정혁선배 때문인듯... 그런이유로 안우진은 후배로 인정 안 함. 내가 인정하든 말든 아무상관도 없지만 ㅡㅡ;;;;
그당시에 선린상고 경북고등 양강구도데 박노준 김건우 두 스타가 있었고 경북고등 유중일 문병권 두스타가 있었고 있었는데 해설자는 선린상고가 우승을 예상 했지만 경북고등 선린상고와 붙어서 4번이나 우승 한걸로 아는데 정확한것은 아니지만 기억됩니다 라디오 열심히 들었지요 라디오 캐스트 전우벽 아나운서가 생각 납니다
당시 청룡기 봉황기를 경북하고 선린이 해서 경북이 둘다 이겨서 우승했지요. 봉황기 결승에 그 유명한 박노준 다리 부상이 있었고 당시 소녀팬들 난리났었지요 경북고는 황금사자기하고 전국체전까지 우승해서 4관왕이었어요. 그 때는 고교야구를 보면서 저 형들 야구를 참 잘하는구나 라고 하면서 봤었는데 이제는 세월이 지나서 프로 감독도 3명 빼고는 저보다 젊은 사람들이 하는군요. 언제 이렇게 나이만 먹었는지...
선린상고가 엄청나게 운이 없었음 붙을때마다 경고에게 깨져버리고 또 전국체전때 경북고가 지방대회에 떨어져서 출전을 못하는 상태였는데 흥행을 위해 야구협회에서 경북고의 출전을 허락,,,결국 전국체전에서도 경북고가 선린상고를 제치고 우승 선수빨이나 능력에서는 선린상고가 더 우세였는데 경기가 끝나면 경북고 우승
정말 아쉬운 단 한명의 천재 라면 역시 신일고 설종진이 아니였을지... 투수에 4번 하면 꼭 그 분이 기억이 나네요.. 게다가 내 기억이 맞으면 게임 중간에 교체 였지만 왼손잡이 인데도 3루수를 할 정도 였으니까요... 그런데 대학때 화상을 입으셨다고... 너무 아쉽죠.. 그리고 김건덕 선수도 기억이 남네요.. 정말 위대한 투수 였다고 들었는데요..
이종범 선수 건국대 진학 케이스군요. 그 전에도 있었습니다. 군산상고에 재학 중이던 이광우 선수인데요. 신문 기사에도 난 건인데... 단국대에서 이광우+동기4명 진학 조건을 내밀며 진학을 권유했으나 지역 대학인 원광대에서 이광우+ 군산상고 졸업생 전원 조건을 제시하게 됩니다. 이 외 조건은 기사화되진 않았으나 단국대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걸로 보이는데... 이광우 선수는 동기들을 위해 원광대 진학을 결정하죠. 쾌 화제가 된 사건입니다. 프로에서 대성은 못했으나 대학 시절 국가대표도 하고 해태-두산에서 나름 활약을 하고 은퇴한 걸로 압니다.
박정혁 선수대단하다
박찬호 스트라이크 언제들어올지 모르는시절에 어쩌다들어오는 스트라이크를 통타했으니
◀🎇
고 박정혁 선수 생몰년도는 1970~1999년입니다.
◀🔨
박정혁 선수.... 눈물나게 안타깝습니다 학폭은 사고가 아니라 범죄입니다
때린놈은 아직도 잘살고있겠죠.
@@saenoh1013 박철순도 연세대 시절 최동원 폭행한거 당시 신문에도 났죠.
그 대가는 82년 코시 끝나고 받기 시작해서 끝없는 부상으로 치뤘죠.
@@saenoh1013가해자는 전 해태타이거즈 포수라고하네여...
@@wooseok. 권오성 인가요?
때린넘 탈타리 잘치고 잘삼
우리 박사장님은 홈런으로 여러가지 기록이 있네,, 한만두 배리본즈70호 칼립켄주니어!!!!! 박정혁..
한타자에게 한회에 만루홈런 두번. 이것은 절때 깨질수 없는 기록입니다.
박정혁이 박찬호에게 3연타수 홈런치던 경기를 동대문 야구장에서 직접 봤었는데...
다시 그 경기가 떠오르네요.
그립다. 휘문고 박정혁.
W모자쓴 사진이 만화주인공같네..
제가 술은 안마시지만 술맛 깊어지는 이야기들이네요..김상진 선수, 박정혁 선수에게 잔을 바칩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야구 모르는 것처럼 인생도 모릅니다. '아직'이세요. 멋지게 살고 계실거라 믿습니다. 화이팅!!
학폭은 사고가 아니라 범죄
방망이로 사람을 쳐서 팔꿈치에 철심을 박았는데 사고라니요
경남상고 곽재성이랑 김건덕도 참 아쉬운 선수들입니다. 곽재성은 차명주보다 에이스였는데, 롯데에서 입단동기 염종석한테 밀리다가 사라졌고.. 김건덕은 그당시 고교최고 유망주였는데.. 비운의 사고로 선수생활을 접고 결국 지금은 우리곁을 떠났다고 알고 있습니다.
곽재성 선수는 여자농구 sk가드 김지윤선수랑 결혼했죠. 부상때문에 은퇴했습니다. 사실 임선동 조성민보다 더 기대되는선수였는데
김건덕은 애비 땜에 망한거고
곽재성은 체격이 프로에 적응이 힘든 체격임
김건우도 아깝고 개인적으론 강혁 정말 타격 귀신이었는데 그런 컨택은 본기억이 없음
역시 친구를 잘만나야하고 그주변에잇는 어른도 잘만나야한다. 내부터잘살아야 여럿 붙게되더라 그리고 못날때 거를사람 거르게되는 시기가되더라
팔꿈치 떄린 인간은 고소해서 합의금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15:00 박정혁 선수 사례는 모든 야구선수들에게 교육시켜야되겠네요 너무나 안타까운 경우입니다 잊혀지지 않고 다시는 비슷한 사례가 나오지 않아야되겠습니다!
박정혁선수는 학ㅍ만 아니었다면 어떻게 바뀌었을는지도 모르는데, 가장 안타깝네요.....
박노준, 김건우 선수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당시에 경북고와 결승에서 맡붙었던 기억도 나네요..... 경북고에는 유중일 선수가 있었죠.....^^
97년한국시리즈 MVP가 이종범입니다.😂😂😂
2009 우승하고 응원석에서 K에게 부르던 기억이 ㅠㅠ K 난 너를 못잊어
97년이 이종범선수가 94년에 맞먹을만한 커리어하이 찍은해인데ㅋㅋㅋ
97년 한국시리즈에서 이상훈에게 홈런치고 역전해 이긴 동력으로 시리즈를 끝낸 것인데.... ㅋㅋㅋㅋㅋ
삼성 강동우의 담장부딪힌 수비로 인한 안타까운 부상도 떠오르네요. 그 수비이후로 내리막길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어디서 뭐하시는지..
아마 지금 코치하고 계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한화 1군 타코하고 있어요
강동우선수 너무 안타까웠지요 진짜 1번타자가 나왔구나 그 어린 시절에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었는데ㅜㅡ
@@csd2577
이정후가 등장하기전 까지
유일하게 순수 신인이
유일힌게 규정타석 채우고
3할을 쳤었죠
거기다 당시 신인이었지만
98 방콕 아시안게임
엔트리까지 들었을정도 였으니..
소속팀 삼성도 지역출신+1차지명
스타성 있는 선수여서 최소
15년간은 1번타자 걱정 없겠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3년뒤 헬멧 냄새 좋아하는
신인이 등장하면서
그 걱정을 덜긴 했지만요
@@FirstLove.심재학이 대신 방콕갔음
강혁 선수는 친구들 때문에 결국 커리어 망쳤네..
본인 생각이 없이 끌려다니기만 한 사랑 같은데 병역비리도 그렇고
친구? 보단 부모님의 설득도 한몫했을듯
90년대 그시절에는 내가 가고싶은 팀이아니라 감독이 가라는곳에 가는게 국룰이었음. 나는 도장찍은 기억없는데 팀이 정해졌고. 친구끼워 올려보내더라. 검은거래 난무했던 그시절.
지잡댜 한성대 한명재에 뭘바래 😊
그 친구, 학부모들이 문제 ㅋㅋㅋㅋ 지 자식들만 소중함. 해당 부모. 친구들은 평생 속죄하면서 살길
박정혁 선수 학폭 선수 가해자가 분명히 있을 것 아닙니까? 그걸 누군지 밝혀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이게 정말 학폭이죠. 그 선수의 부모도 가만 있으면 안되죠..
고대 89학번 해태 지명받은 권오성 포수입니다.
박노준도 고려대학교에서 너무 혹사당해서 프로에서 투수를 못했죠 이래저래 고려대학교가 문제입니다
선동렬 아프다고 핑계되면 대신 다 던짐.
국대에서는 선발, 구원 다 나오고, 타순은 클린업이었어요,84 엘에이 올림픽서는 마크 맥과이어도 잡아내고.
고려대들 사라지니 기아 우승 하잖아요 ㅎ
베어스 입단 . 베어스 감독이 김성근
김성근은 투수는 많이 던지면 던질 수록 어깨가 단련된다고 믿는 사람
입단 첫 해 동계훈련때 부터 박노준을 무진장 던지게 했고 ,
박노준의 어깨는 견뎌내지 못 하는 상황에
그와중에 외야수로 출전한 경기에서 수비를 하다 팬스에 어깨가 부딪치는 부상까지
고려대 시절 선동열이 부상으로 안 던진 것도 맞고
정상흠이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고려대측이 배려해서, 재학중 실업팀 농협 소속으로 월급을 받고 활동
(고려대와 농협이 같은 훈련장을 사용한 것도)
@@appetite4214 당시 김성근 투코가 박노준 투구폼이 맘에 안든다고 몇일동안 신일고던가 운동장에서 공 많이 던지게 했던 회고담도 있었죠.
아마추어에서 아무리 잘해봐야 프로에서 족적을 남기지 못하면 아무도 인정을안하죠
한성대 한명재에 뭘바래
박노준 대학 다닐때 고대 연습장에서 홈런 친 공이 구장을 넘어 구장밖 이공대 건물 2층 유리창을 깼다는 전설도 있었음. 고대 야구선수 중 그 건물을 맞춘 사람도 없었다고 함.
야구장 옆이 도서관 건물이어서 연습하는거 많이 봤죠. 저는 심재학의 연습 타구가 도서관 벽을 맞추는 장면을 봤네요.. 😂
참고로 박노준 고대 1학년 때 3번타자였음...
그때는 알루미늄배트라 ㅎㅎ
김상진 선수 사망 후 동아일보는 “김상진 인생 마운드 강판!” 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렸다가 욕을 먹었던 적이 있다. 당시 기사를 쓴 기자도 욕을 많이 먹었는데 나중에 자기가 쓴 기사가 아니라 편집부에서 임의로 만든 제목이었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강혁선수는 가족이 문제였어요. 가족이 이중계약을 주도. 또 두산에게 "죄송한데, 강혁 다른 동기들이 대학에 못 가니 일단 한양대 가겠습니다. 다음에 꼭 두산에 가겠습니다!" 라고 하면 원만하게 풀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그렇게 한 선수들이 있었기에).
가족이 두산에다가 "그깟 프로 안 가고 만다!" 라고 해서 두산을 열 받게 했고
두산이 영구제명 요구하게 만들어!
강혁 영입에 성공한 한양대관계자들조차 가족에게 " 왜 일을 만드세요? 제발 가만히 계세요!" 라고 말렸을 정도. 강혁을 위로하며 "아직 4년이라능 시간이 있다! 그냥 열심히하면 프로에서 꼭 너를 데려 갈 거다!" 라고 했다고
강혁이 한양대 졸업후 상무에 가서 병역을 해결하고 크보에 읍소 해서 징계를 풀려다
또 부친 병원비 문제로 돈이 필요해서
실업 현대 피닉스에 계약
정확하게 모르면서 아는척은 그만
박정혁선수는 저도 기억합니다. 어렸을때 잠깐 리틀야구했을때 휘문중고의 소운동장을 빌려서 했었고 그 인연으로 전국대회하면 휘문고 응원도 자주갔는데 16강부터 4강까지 경기 후반부에 동점 역전 홈런을 거짓말처럼 쳐내서 아주 난리가 났죠
결승에서는 아쉽게 클러치상황에서 범타로 물러나며 준우승했지만 이때 활약으로 대학생까지 포함된 국대에서도 4번으로 발탁됐었습니다
대회 중 부진해서 6번으로 바뀌긴했지만..
저는 부산에서 고교를 다닐 때 겨울철 선린상고가 제 모교로 동계 훈련을 왔습니다.
선린 연습 타격 때 박노준 프리 배팅하는 것 보고 깜놀, 치는 공이 모두 라인 드라이버, 지금의 이대호 급 수준....
옆에서 지켜보던 모교 감독이 선수들 모두 부르면서,
자 ~~ 노준이 치는 것 잘 봐~~ 저게 바로 타격이야~~
야구부 친구도 믿기 힘든 표정이었습니다.
당시 모교 감독님은 국대 감독까지 하신 정연회 감독님이었습니다.
또한 프리배팅 끝나고 피칭 연습할 때,
포수 뒤에서 박노준 선수의 공을 살펴보니 정직하게 들어오는 스트레이성 직구는 하나도 없었고,
플레이트 가장 자리를 걸치면서 솟아오르거나 아웃코스로 빠지는 공들이 대부분,
당시 고교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습니다.
봉황대기에서 박노준과 붙었던 친구는 공 3개로 삼진 당했는데,
평범한 공이라 초구만 지켜보고 2구, 3구는 휘둘렀는데 모두 헛스윙~~
분명이 자신있게 칠 수 있는 공으로 보였는데 스윙 순간 공이 사라지더라고 하더군요.
그 친구는 당시 경북고 류중일 선수와 마찬가지로 고교 유격수 쌍벽을 이룰 정도로 잘 했었고
K대 진학 후 백호기 결승전에서 결승 홈런 때려 MVP를 받았던 선수입니다.
그런 역대급 재능을 가진 선수가 고대로 진학하면서 투타 겸업하게 된 것이 독이 된 것 같네요.
우연히도 저도 고대로 진학하면서 박노준 선수를 계속 지켜보았지만,
한가지만 똑 부러지게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때는 오히려 고교 때보다 공의 구위가 떨어진 것 같았습니다.
당시 고대 최00 감독님이 박노준을 타자로, 투수로 너무 혹사 시키지 않았다면~~~
대신 선동열은 대학 시절 1학년 때 세계야구선수권 대회(82년 한국 우승) 이후
본인의 몸을 보호하느라 그다지 많이 등판하지 않았고,
연대와 경기에서 이순철한테 많이 많이 까였던 기억들이 생생합니다.(다소 설겅설겅 거렸던 느낌)
덕분에 프로에 와서는 아껴놓았던 어깨를 풀 가동하면서 전설적인 기록을 남겨 놓았죠.
1981년 고교 야구 인기와 지금 고교 야구 인기가 천지 차이인데, 어떻게 그때 박노준과 3년 전 김도영 고교 때를 비교할 수 있나요?
김상진선수는 뜨거운 음식을 바로 삼켜서 먹는 안좋은 식습관때문에 병에 걸린 것으로 압니다.. 뜨거운 음식은 식혀서 먹으라는 얘기는 괜히 나은 얘기가 아님
저는 오랜 타이거즈 팬으로 김상진 선수 위암 4기라고 뉴스가 뜨니까
아니 4기가 될 때까지 구단은 뭐했냐
몸이 재산인 운동선수들 건강검진도 안 해주냐고 비난했었는데
운이 엄청 없는 케이스더군요.
엄청 특이하게 위벽 바깥쪽에 종양이 생겨서 내시경으로도 안 보이고
현대의학기술로도 조기 발견이 쉽지 않은 곳이라더군요...
이대진 뒤를 이를 에이스 오브 에이스의 자질을 갖춘 투수였는데 참 안타깝죠.
잘 모르시는거 같은데 급성 암은 순식간에 퍼져요 특히 혈기왕성한 젊은 사람은 더 빨리 퍼지고 나이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느리게 퍼져요
그 때린 고대 선배는 어떤 놈이래요?
고대 89학번 해태 지명받은 권오성 포수입니다.
우리 찬호는 홈런을 좋아해.
13:57 한만두에 이어 3연타석 홈런.... tmt좌 그는 대체.....
한명제씨의 음성과 딕션을 좋아하고 웬지 이제는 우리또래라 들으면 추억이되는 음성이라 좋아합니다만 이번엔 아쉬운게 많네요 저희 부모님이 82년에 강남구 논현동에 주택을 사서 이사오실때 4천만원이었습니다 97 한국시리즈는 해태 VS LG였는데 이종범의 위세가 대단해서 이종범 VS LG라는 스포츠신문 기사가 나올정도 였는데....또 휘문고 레전드 박정혁선수는 92년이 아니라 99년12월 횡단보도에서 떨어진 노트북 줍다가 택시에 치어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당시 학교에 끌려 강제로 응원다녔던 동대문야구장이 생각나는 새벽에 끄적여 봅니다
엘지팬입니다. 골수팬에겐 김건우 선수가 그 사고만 없었으면 mbc시절 우승한번은 있지 않았을까 아직도 생각합니다.
ㅇㅈ 1987년 제법 많은 잔여 경기를 남겨둔 상태에서 12승을 올린 상태..
Ob팬이지만 김건우선수무척좋아햇습니다
좋은 댓글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손흥민 선수와 팬들의 끈끈한 유대감이 느껴져요!
이종범 코치는 동기들 뿐이 아니고, 1년 선배들그리고 건국대.졸업할때 까지 후배들 받았다고 합니다.
박노준 선수 부상당하는 경기 저도 본 기억이 있네요
다리 다친 직후에 기어가면서 홈터치하던 장면도...
저 당시 박노준 선수의 인기가 언 정도였냐하면 웬만한 청소년 잡지와 연예잡지의 표지 모델로 나오셨지요.
당시 라이벌이 경북고의 성준, 류중일인데
성준, 류중일 두 선수가 프로에서 짱짱 잘나갔던 걸 생각하면 참 안타깝지요
그래서 그 박정혁선수 선수인생을 끝낸 그 18 선배라는새끠 는 누구인가요 ???
고대 89학번 해태 지명받은 권오성 포수입니다.
당시 박노준의 인기는 bts 이상이었지. 전국민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bts는 관심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이름만 아는 사람들도 많은데... 여기선 잔부상만 얘기기하는데, 더 큰 원인은 당시 만연한 선수 혹사가 문제였지.
고교, 대학 시절 어마어마한 혹사를 당했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대체 야빠들은 왜이러는걸까 BTS가 무슨 옆집 개이름도 아니고 ㅋㅋㅋㅋㅋ
@@dnjfpsqjvlt 박노준은 그야말로 전국에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다..근데 BTS는 아예 모르는 사람들 엄청 많어 ㅋㅋ 박노준이 부상 당할 때 9시 뉴스에서 직접 병원에 누워있는 박노준을 취재할 정도였었고 일간 신문에 대문짝하게 나왔었다 ㅋㅋ BTS는 그정도는 택도 없을텐데 ㅋㅋ
@@dehwankim2269 아죠씨...BTS는 빌보드에요...박노준이 일간신문에 나올때 BTS는 뉴욕타임즈에 나와요...아무리 그래도 비빌걸 비비셔야죠
@@dnjfpsqjvlt 이해력이 떨어지네...그건 국제적 명성이고 국내에서 인기를 얘기하는거야..
97년도 이종범있었음 98년도 얘기인듯ㅇㅇ
한명재 캐스터님 97년에 이종범 선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30 30 했어요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는 98년
정혁형님 사고로 돌아가시기 전에 잠시나마 함께 일했던 기억을 간직합니다…!
박노준....그때 당시 고교야구를 선린상고때문에 좋아하고 지금도 사랑하는 이유가 된 선수죠...구본호감독...현재 뭐하시는지...박노준,김건우,조영일,이경제,이바오로 ,,,아직도 라인업이 기억이 나네요...81년 당시 3개 전국 대회에서 경북고에게 다 스윕을 당하죠,,,당시 천안북일 김상국,경북고 성준 ,대구고 강기웅,동산고 여태구 등등
북일고 안성수, 조양근, 지화동. 경북고 문병권, 류중일
광주제일 까치 김정수, 부산고 김종석
경북고 권택제도 있었죠...프로에 오지는 않았지만..삼숑에 부동의 1루수 김용철이 있어서 김용철을 밀어낼 자신이 없어서 포기했었다고함..
지금도 생각하면 매우 안쓰러운 타이거즈 11번 김상진
박노준 선수도 뛰어나지만, 동기인 김건우 선수도 엄청 났습니다. 공이 투포환만큼이나 묵직했던… 그러나 안타깝게 교통사고로 정말 투포환 던지는 폼으로 바뀌면서 ㅠㅠ 안타깝습니다
재밌네요. 박노준님이 고딩때 인기는 영상 보고 첨 알았네요.
1. 97년은 이종범의 원맨쇼 덕분에 우승했죠.. 선동렬이 없고.... 이종범마저 없어지고는 해태가 한국시리즈에 다시는 못 갔죠..
2. 최동원선수도 만약 그 어떤 레전드 투수한테 허리를 맞지 않았다면 더 롱런했을 것인데...
박정혁은 진짜 안타까운선수네요 나이대를 유추해보면 그나이대에 유명한 프로선수같은데 진짜 학폭은 평생죗값치르면서 살아야된다
박 철순
@@pts-kz3vd
난 박철순을 싫어하지만 박철순은 연대
그리고 관런선수는 최동원이다
제발 알면서 얘기하자
@@두부-m7h 뭔소리여 선배가 마해영 임수혁 이런 선수들인데 최동원선수 나이를 알고나 하는거냐?? 미췬ㅋ
마해영은 동갑이고 고 임수혁은 1년 선배이고... 통상 바로 위 선배들이 군기담당을 하니. 고 임수혁의 동기 중에 한 명일 듯..
신일고 출신. 권 O. S. 포수
한명재 케스터가 뭔가 잘못알고있네요 97년에 이종범 있었습니다; 우승했구요 김응룡 감독이 얘기한 선동열도 없고 종범이 도 없고 는 98년시즌 앞두고 얘기한거입니다 이종범도 선동열도 일본으로 떠나서 둘다 해태에 없던 98년엔 승률5할도 못찍고 5위로 마감했습니다
저도 지적을 할려고 했는데ㅎㅎㅎ맞습니다.그나마 이종범이 있어서 우승에 큰 도움이 되었지요.그해 한국시리즈에서도 결정적일때 홈런을 몇개 때렸던 기억도 나는군요
97년 이종범이 30-60을 했었는데..
97년 한국시리즈 MVP가 이종범 아니었나요?
@@ganggoori 그당시 엠뷔피는 이승엽!! 최연소 30 홈런 기록자 라고 기자단이 몰표
@@Zuilietzhan + 홈런왕 타이틀 때문이었을거라 봅니다.
그시절 서울서 국민학교 중학교때까지 야구했었는데 박노준은 그당시 야구하던 학생들 한테는 우상이었습니다 ㅎㅎ
김건우도 유명했죠!
박노준 선수도 선린상고때 대단했지. 조계현 선수도 군산상고때 한일전 나와서도 엄청났음. 나왔구나 박노준. 영상 다 보기 전에 씀.
그 시절 고교시절의 1명의 스타가 몇명씩 대학에 데리고 가는 얘기의 핵심은 그 쩌리 선수들의 부모로 부터 당시 학교 감독들이 거액의 촌지를 받아 챙겼고 스타선수들과 나누어 가지던 시절이었죠 프로의 엄청난 계약금과는 비교할수 없지만 월급쟁이 감독으로서는 매년 받는 성과급으로 고교 3학년전에 이미 진로는 다 결정되는데 대학 안가고 프로간다는 선수는 거의 경기에 못뛰게한다던지 훈련제외시키는등 온갖 불이익으로 대학을 갈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죠
우리 박사장님은 홈런으로 여러가지 기록이 있네..
한만두 , 배리본즈70호 , 칼립켄주니어 , 박정혁...
겁 무지 많은 새가슴,
1980, 1981년은 선린상고가 전국을 제패하던 시절, 그 가운데 김건우, 박노준이 있었네요. 엄청 야구를 잘 해서
우리는 동대문 운동장으로 동원 되는 그런 웃픈 시절이 있었습니다 ㅎㅎ
돌아보면 그 시절 함께했던 친구들이 그립네요
혹시 선린 출신? 나돈데...
박정혁 학폭가해자는 공개해야 하는거 아닌가 지금까지 저는 잘살꺼아냐 뻔뻔하게 남의인생 시기와질투로 망쳐놓고
고대 89학번 해태 지명받은 권오성 포수입니다.
박정혁의 5연타석 홈런을 막은 투수가 동산고 위재영 투수!!! 위재영 앞에 1학년 임선동 2학년 박정혁 추풍 낙엽이었습니다
서울 아이돌 - 선린상고 박노준
부산 아이돌 - 부산고 양상문
대구 아이돌 - 경북고 류중일
군산 아이돌 - 군산상고 조계현
전국 고교야구 4대 얼짱이었음
97년 이종범이 해태 마지막 우승하고 일본으로 팔려 갔잖아요
한명재 실수.... 97년에는 이종범이 mvp 였음
일본에서 발렸죠
본인이 보내 달라고 해서 간거죠.
선이 가고 싶다고해서 여론조사 할때 묻어서 간거죠.
그때. 5년차 밖에 안될텐데
@@zhuan5050 리그 MVP 이승엽 아님? 한국시리즈 MVP가 이종범 아니고?
@@dalbongpark2830해태가 당시에 IMF터지면서 일본에 돈주고 팔렸어요. 자기도 가고싶기도 했는데 해태가 지금난 시달리면서 판거죠. 당시에 팔 이유가 없었어요. 임창용도 삼성에 팔리고..
인생의 가치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보통 살면서 한 일의 결과로 평가 받는다. 인간은 유한하고 죽기전에 자기 가치에 대해서 반드시 회고하게 되어있다. 잠실을 바라보며 훌륭한 인생이라고 자긍심을 가지고 분명 기뻐했을거같다
박노준은 오늘 소개된 선수 중에 젤 유명한 선수죠 한참 잘나갈때 박노준선수의 사인이 금박으로 새겨진 신발이 판매되었죠 나도 그 신발을 신고 다녔는데...
86년도 5000만원이라.... 아마도 압구정동 현대 한양아파트 33평형이 그 가격이었을 겁니다.
지금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40억이 넘겠네요.
그놈의 집합... 지하 목욕탕에 집합해서 엉덩이 30대 맞고 며칠 꼼짝 못했던 아픈 기억이...
97년은 이종범이 우승시킨 한국시리즈였습니다.
아 박정혁 선배님 휘문고 첫 전국대회 우승 시켜주실뻔했던.....안타깝습니다
박노준 문병권 김건우 이 바오로 기억이 나네요. 직접 봤으니 중계방송. 물론 저는 대구라서 경북과 응원 박노준 실려나가고 이겼다는 생각이 들었죠. 감독은 구수갑 ㅎㅎㅎ. 추억 소환 이네요
1994년 경남상고 김건덕 같은 비운의 선수가 있을까? 고교시절 투구수 많았다고 대학1년때 팔을 사용안함 , 결국 굳어버림
한국에 야구 천재가 나올 수 없는 이유는 생활체육이 아니여서 전 국민을 대상으로 선수를 뽑는게 나는 야구할꺼야 어려서부터 시작한 사람만이 야구를 해서입니다. 일본은 야구가 생활 채육이 되었죠. 그래서 가능성이 보이는 선수를 뽑을 경우의 수가 많습니다. 한국은 나는 야구 천재야 알고 야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제가 야구로 유명한 중학교를 나왔는데 3년 동안 단 한번도 학교 체육 시간에 야구를 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라서 어깨가 좋았거든요. 멀리 던지기 2위도 했었죠. 돈으로 야구를 시작해서 끝까지 운동하려면 어마 어마한 돈이 들어가죠. 돈 없으면 운동 접어야 하는게 대한민국입니다. 김연아가 대한민국에 나온 것 자체가 미스테리입니다. 정말 대한민국의 국민성 때문에 일본에 개기는 거지 인플라로 보면 일본은 쳐다볼 수도 없는 엄청난 지원이 있습니다. 오타니 쇼헤이가 한국에는 나올 수 없는 이유죠. 자기는 천재인지 모릅니다. 그것을 캐취하고 밀어주는 인플라가 있어야 하죠. 한국은 그래서 운동 후진국인 것입니다. 가능성 있어도 무리한 제구 시켜서 어깨 망가져서 투수에서 타자로 가는 선수도 많죠. 아니면 운동 생활 끝내던지요.
인플라가 아니고 인프라
오타니 쇼헤이는 엘리트 선수지 생활체육이 아닙니다
무슨 이상한 소리듣고 오는 경우가 너무 많네요.
아마 그 말이 아니고 일본은 누구나 어릴 때 야구를 하기 때문에 소질이 있는 아이라면 자기가 소질이 있는 걸 알게 되는데 우리는 오타니가 태어나도 평생 야구공 만질 기회가 없어서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거지요. 일본도 물론 중딩 말년 되면 소질있는 아이는 엘리트야구를 할지 부카츠, 즉 특별활동 야구를 할지 정하긴 하지요.
@@강기철-m3n 그러니까 더더욱 반쪽짜리 발언이 되죠.
자기 자식이 노래하겠다. 운동하겠다. 영화 만들어보겠다고 하면 기쓰고 반대하며 거렁뱅이 취급해온게 한국 어른들의 시선 아닙니까. 곧 죽어도 공부해야하고, 체육시간마저 다 뺐어서 아이들 입시 기계로만 육성해온게 한국 청소년 문화인데 옆나라 일본 생활 체육만 논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 발언인가요?
직접적인 원인은 제하고 바꾸고 싶은 이상만 논하는건 아무짝에도 의미없는 발언이라 생각합니다.
원댓글 멍청한게 일본이든 미국이든 한국이든 야구는 돈없으면 못하는 종목입니다 어디서 말장난식으로 씨부리고있어 누구나 다 건드리는 종목이 아니란 말입니다 국민학생때 실력이 좋아서 학교에서 지원해주고 감독도 지원해주고 그래서 선수생활을 이어나가면서 중학교 고등학교 계속 엇나가지않고 열심히해서 이어나가는 선수들이 있는겁니다 진짜 개소리는 좀 댓글로 안썼으면 좋겠는데 알량꼴량한 지식가지고 있어보이게 댓글쓰는건 손모가지를 짤라야지
깊은정보감사,한케스터
충격적인 야구천재 얘기를 하는데 김건덕이 안 나오네오. 누구보다 뛰어난 천재이자 비운의 부상으로 은퇴한 선수죠.
종목은 다르지만
단체 구기종목.
90년대 그시절에는 내가 가고싶은 팀이아니라 감독이 가라는곳에 가는게 국룰이었음. 나는 도장찍은 기억없는데 팀이 정해졌고. 친구끼워 올려보내더라. 검은거래 난무했던 그시절.
이영민 타격상.... 이거받고 프로에서 잘나가는선수보다...
코리안특급 박찬호 고교땐 그렇게 대단한 선수는 아니었다고 들었는데...
구속은 인정했다는...
서울고 전설의좌완에이스 박형렬 투수! 대단했었죠 ⚾️ 고교졸업후 바로 프로 OB입단...
근데 프로에서는 그야말로 망...역시 고교 시절 혹사 때문인가 ?
한명재님 여러 매체에서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제 2의 도약 응원합니다
캐스터 은퇴인가요
김건우
18승으로 신인왕하고
교통사고로 끝
아쉬운 선수
MBC청룡선수. 86년신인왕. 아직도 선동렬이랑 맞대결하면서 투수전 펼치던 돌직구 가슴이 웅장.
하~~~교통사고 전에도 전반기에만 12승 따내며 역대급 페이스로 가던중에 정말 비운의 교통사고
죽은 선수도 있었다.
mbc 소속 김정수 였던걸로 기억.
@@신용섭-l1y해태 김정수일걸요
신일고-mbc 청룡 였던
투수 김정수로 알고 있음.@@alsdl1452
한명재 캐스터는 부드럽고 경험도 많고 괜찮은데 너무 멋있게 멘트 하려다가 중계때도 실수 하는게 굉장히 많아요.
고조성민 지금은 은퇴한 임선동의 라이벌이여던 손경수
손경수는 지가 자기 관리 못해서 즉 술을 하도 먹어서 망가진 케이스임
불운이나 비운이 아닌
@@스뎅깡통 그놈의 술이 웬쑤여
@@dydcjs61사람이 문제지 술은 잘못없음
@@스뎅깡통 경수형은 고등학교시절부터 술엄청 먹었음 나이트좋아하고ㅋ
박정혁선배...그립네..덕분에 봉황대기 8강부터 결승까지 응원갔었는데...
교내에서 마주치면 웬지 아우라가 느껴지는 우상같은 선배님.
그때 선동이랑 진필중선배, 류택현선배까지...고교시절 제일 기억에 남았던 대회였던듯.....
갓졸업한 선배님들부터 70대 노인이 되신 선배들까지 플랜카드 걸어 놓고 응원하시는거 보고 이래서 운동부를 키우는구나 납득이 갔음. 가끔 박정혁선배 이야기 나올 때면 너무 안타까워 맘이 안 좋다.
개인적으로 학폭에 연루된 인간들을 극혐오하게된 가장 큰 이유가 정혁선배 때문인듯...
그런이유로 안우진은 후배로 인정 안 함. 내가 인정하든 말든 아무상관도 없지만 ㅡㅡ;;;;
3연타수보다 더빛나는 3연타석 홈런은 친 광주일고 김윤환선수 한국야구사 최초 싸일클링히트를 친 대구상고 이종두선수마지막 타석 2루타성 안타를치고 1루에서 머문것이 기억에남고 경북고출신황병일선수 건국대재학시두번째 싸일클링 기억에남네요
한국에서는 감독을 잘 만나지 못하면 비운의 스타입니다. 김성근옹 만나면 투수어깨 팔꿈치가 3년이내에 작살납니다. 송진우도 김응룡 감독을 만났나면 혹사를 피해서 더 좋은 성적이 가능했습니다. 한대화는 성근옹을 피해서 화가 복이 됩니다.
박정혁 선수 92년이 아니고 99년도에 사고당했습니다. 제 고등학교 및 대학교 선배이십니다. 정정 부탁드립니다.
제친구가 방위병 복무할때 동기라고들음ㅋ
2000년대 초반에도 대학교 체육관 지나가면 빠따 맞는 소리 퍽퍽 났었죠. 운동부 없는 초중고 다니다가 대학교 가서 빠따 맞고 기합 받는거 보고 처음에는 꽤 충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지나서 입대하니...
ㅋㅋㅋㅋ
남의 인생 망쳐놓고 그로인하여 사망하는 인생으로 가게 한 가해자는 평생 기억하고.. 끝까지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길 바랍니다.
신기하게.. 제가 그리 말하는데 안 지키면.. 인생 별로 안좋아지더라구요.
믿든 안믿는 자유지만~^^
비슷한 시기에 부산고에 김종석이란 좌완투수가 있었는데 이선수도 기억이 나네요 프로에는 갔었는지 모르겠네요
그 김종석. 아들이. 기아의. 투수
김대유입니다
김종석. 안성수.류중일. 모두
한양대. 83학번 동기입니다
김종석 롯데로 갔었죠.
나름 환호하면서 기뻤었는데
그당시에 선린상고 경북고등 양강구도데 박노준 김건우 두 스타가 있었고 경북고등 유중일 문병권 두스타가 있었고 있었는데 해설자는 선린상고가 우승을 예상 했지만 경북고등 선린상고와 붙어서 4번이나 우승 한걸로 아는데 정확한것은 아니지만 기억됩니다 라디오 열심히 들었지요 라디오 캐스트 전우벽 아나운서가 생각 납니다
당시 청룡기 봉황기를 경북하고 선린이 해서 경북이 둘다 이겨서 우승했지요.
봉황기 결승에 그 유명한 박노준 다리 부상이 있었고 당시 소녀팬들 난리났었지요
경북고는 황금사자기하고 전국체전까지 우승해서 4관왕이었어요.
그 때는 고교야구를 보면서 저 형들 야구를 참 잘하는구나 라고 하면서 봤었는데 이제는 세월이 지나서 프로 감독도 3명 빼고는 저보다 젊은 사람들이 하는군요.
언제 이렇게 나이만 먹었는지...
선린상고가 엄청나게 운이 없었음
붙을때마다 경고에게 깨져버리고
또 전국체전때 경북고가 지방대회에
떨어져서 출전을 못하는 상태였는데
흥행을 위해 야구협회에서 경북고의
출전을 허락,,,결국 전국체전에서도
경북고가 선린상고를 제치고 우승
선수빨이나 능력에서는 선린상고가
더 우세였는데 경기가 끝나면 경북고 우승
@@soyoungshin-k8c 선린은 수비카 쥐약이었음...빠따는 좋은데..
@@im9404그때 8회 1사만루에서 류중일이 유격수에서 투수로 올라와 병살타로 막기도 했는데(군대 휴가나와서 대구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라디오중계 들었는데 버스안이 난리가 났지요)
경북 에이스는 성준 선수 였고, 선린은 저 두 명 외에 이 경재라는 선수도 있었습니다. 6번을 치는데 타율이 4할 대라서 선린은 클린업 트리오가 두 개 있다고 했죠. 박 노준 다리 부상도 이 경재의 적시타 때 들어오다 비가와 진창인 땅에 다리가 꼬이며 당한 거죠.
박노준 좌투좌타 3번타자. 김건우 우투우타 4번타자 나 초3때인데 기억에 선하네... 낭만의 시대
손경수 설종진 성영훈 등 다음펀도 해주세요
인트로빼고 시작(00:53)부터 거의 3분 30초동안(04:26) 한번을 안쉬고 혼자서만 말하시네 ㅋㅋㅋ 멘트 배분을 신경 써주시면 좋을거 같습니다. 3분 가까이 혼자서만 말하니까 좀 늘어지는 느낌이에용
강기웅 5연타석 홈런도 있습니다. 제가 봐도 왜소한 체격에 알루미늄 배트 덕 봤다고 인정되지만~~
강기웅도 오랜 아마추어 시절을 보내서 나무 베트에 적응을 못했음..당시에는 그런 선수들이 꽤 있었음..국대에서 이름을 날리다가 프로에서 나무 베트에 적응을 못해서 실패한 선수들이 꽤 많았음..
7연타석 홈런칠 뻔 했죠
강기웅은 부상 때문에 선수생활을 오래 못했지 실패했다고 할 수는 없지요 타격 2위 2번 골든글러브 3번 올스타
89년 신인왕 2위에다가
데뷔시즌부터 류중일과 함께 그시절을 대표하는 키스톤콤비였음
배트적응은 거리가 멈
그당시 국대는 아마위주 대회뿐이었고 프로의 벽이 높은거지. 배트적응은 모든 타자들에게 해당하는 부분이죠
정말 아쉬운 단 한명의 천재 라면 역시 신일고 설종진이 아니였을지... 투수에 4번 하면 꼭 그 분이 기억이 나네요.. 게다가 내 기억이 맞으면 게임 중간에 교체 였지만 왼손잡이 인데도 3루수를 할 정도 였으니까요... 그런데 대학때 화상을 입으셨다고... 너무 아쉽죠.. 그리고 김건덕 선수도 기억이 남네요.. 정말 위대한 투수 였다고 들었는데요..
설종진선수까지 다뤄주셨으면 좋았겠단 생각해봅니다
박찬호는 타자들에 홈런으로 추억을 많이 줬네
약을 팔려면 잘 알고 팝시다. 97년 해태에 이종범 있었죠.
남은 선수끼리 똘똘 뭉쳐 우승한 해는 선동렬과 김성한이 떠난 96년이고.
의리가 밥 먹여주나 솔직히 좋은대학 많이 보내면 지도자들 한테 이득되니까
어린애들 꼬셔서 그쪽대학 보내면서 그걸로 포장한거지
추억보정이 너무 많이되셨다... 그렇게 덤으로 들어가서 고맙다고 연락오는 사람 몇이나 될까...
한명재 목소리는 언제나 참 좋다.
이종범 선수 건국대 진학 케이스군요. 그 전에도 있었습니다. 군산상고에 재학 중이던 이광우 선수인데요. 신문 기사에도 난 건인데... 단국대에서 이광우+동기4명 진학 조건을 내밀며 진학을 권유했으나 지역 대학인 원광대에서 이광우+ 군산상고 졸업생 전원 조건을 제시하게 됩니다. 이 외 조건은 기사화되진 않았으나 단국대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걸로 보이는데... 이광우 선수는 동기들을 위해 원광대 진학을 결정하죠. 쾌 화제가 된 사건입니다. 프로에서 대성은 못했으나 대학 시절 국가대표도 하고 해태-두산에서 나름 활약을 하고 은퇴한 걸로 압니다.
이광우 선수 기억납니다. 프로 말년즈음에 포크볼을 더 잘던지기 위해 검지와 중지사이를 조금 찢는 수술했다는 신문기사 보고 어린마음에 충격이었죠. 와 프로라는게 저런 곳이구나 했었습니다.
이광우 정도면 프로에서도 꽤 잘했죠. 아마때 만큼이 아니라서 그렇지
이광우선수 잘했는데요??
이승엽은 수능시험에서 떨어졌죠.. 그 유명한 백지제출~~ 이승엽 덕분에 체육선수에 대한 수능 최저점수가 더 떨어지고 백지제출 금지...
@@趙남매들 이승엽 언급하면 동기인 비운의 스타 김건덕이 생각나네요. 이승엽은 인문계인 경북고라 수능 하한선이 적용되었는데 김건덕은 경남상고, 즉 실업계라 그게 적용 안되서 한양대 진학 후... 고교때부터 누적된 혹사로 쓸쓸히 사라진 선수죠.
박노준 라이브로 봤던 부상 경기. 그해 고교최강 선린이 준우승만 하던 불운의 시절
개인적으로 안타까웠던건 부산고 김종석 선수였습니다...고교야구를 씹어 먹던 선수라 언제 프로오나 기다리고 있었는데.....이미 와있더군요.....패전처리로......
고교 혹사 였죠. 류중일에게 잠실구장 1호 홈런 맞은 투수
한양대에서도 혹사
박노준 김건우 선린상고는 전국구 스타
한명재 케스터 대학교 동문이라 더 반갑네요. 그때 그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앞으로도 더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아는 사람이 강혁친구던데 요새도 자주 만난다고 함
제 동기라 기억하는데 동기투수중에는 김선우 박명환이 동기중 원투고 김상진이 넘버쓰리였습니다. 서재응도 동기였죠. 그 외 경헌호 정현욱 박준수(박승민) 등이 있었죠.
박노준 김건우
다음 2선발 이 바오로 선수도 취재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