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금은 여진족들이 어릴때부터 말타기부터 사냥, 개인전투를 습득했고 유목과 농경을 함께 했기 때문에 순식간에 모이고 흩어지는 대회전도 충분히 가능했을만큼 한명한명이 노련한 병사였고 조선과 명은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16세이상의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남성을 징집하여 훈련시켰기에 실전에서의 차이가 클수밖에 없었죠. 고려시대만 해도 각 가문에 사병이 있었고 마을마다 별초라고 불리는 마을자경단이 있었습니다. 고려는 중앙집권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각지방의 호족,토호,유지,권문세족들이 각자 가문의 사병을 수십에서 천명단위까지 거느린 체계였고 국가에서 필요할때 징집했는데 이건 마치 중세유럽의 영주와 왕, 일본의 다이묘들과 비슷했습니다. 이런 경우 사병들은 자주 다른 가문의 사병들과 소규모의 전투를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싸우는 방법을 터득합니다. 이성계의 조상이 죄를 지었을때 그 지역 관리가 잡아들이지 못하고 병사를 모으는 이유는 이성계의 조상이 사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려시대에는 관군이라고 해도 지방토호를 잡아들이려면 사병과의 전쟁을 하지 않고는 잡아올수가 없었습니다. 이성계가 데리고 다는 병사들중 상당수도 여진족의 땅에서 갈고닦은 노련한 병사들이었죠. 그들은 백병전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히 싸웠습니다. 과거 금나라의 침략때도 마을의 별초들이 각자 대항하고 순식간에 모여 하나의 군대를 이루며 끈질기게 괴롭힐수 있던것도 이런 시스템때문입니다.(이게 나중에 삼별초의 모태가 됩니다. 삼별초가 사병집단이었다가 관병화되었습니다.) 문제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사병을 이용하고 권력을 잡은 세력인 정도전이 사병혁파를 단행했고 이에 반대한 이방원도 자신이 권력을 잡을때는 사병을 이용했으면서 자신도 그렇게 당할까봐 사병제혁파를 그대로 시행했다는겁니다. 그 덕에 세종시대에는 많은 사병을 관병화해서 수십만의 대군을 만들어내어 영토를 넓힐때도 쓰이는등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했지만 세조이후 집안내에 백병전을 연습만해도 사형이라는 무시무시한 법을 만들어내고 도검을 집안에 두지못하게 하고 이전에는 늘상 차고 다녔던 도검도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하면서 그 사병들이 그대로 농민, 노비화 되어갑니다. 조선중기 임진왜란직전에 이르면 조선내에는 곧배로 전쟁에 나가 싸울수 있는 사병이 전혀 없고 군역도 대신하거나 대납하여 면제하는등의 폐단으로 북방의 일부 군대를 제외하면 사실상 근대가 없는거와 거의 비슷한 상태가 되버립니다. 이런것이 조선이 임진왜란 초기에 대응에 실패하게 한 원인이죠. 고려시대 같으면 부산에서 부터 각지방의 사병들이 일시에 규합하면서 왜군을 계속 괴롭히고 중앙군이 모일 시간을 벌어줬겠지만 뭐 다 알다시피 단시간에 한양까지 왜군이 주파하게 해주죠. 이런 속도는 전쟁사에도 별로 없을만큼 빠른 진군이었죠. 그것고 기병이 거의 없던 왜군인데도요. 아무튼 조선은 중앙집권화를 완벽히 이뤄냈고 당시의 시대만 해도 선진적인 정치체재를 만들어냈었으나 그로인한 풍선효과로 그렇게 강하던 고려군대를 엄청나가 허약한 조선군대로 변모시킨 이유가 된겁니다. 후금에게 쉽사리 당하는것도 이해못할 일이 아닌거죠.
@@tv1009Jesus.together 위의 제 댓글을 보면 고려시대가 더 좋고 조선시대가 안좋은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고려시대보다 조선시대가 살기는 더 좋았습니다. 토지에서 생산되는 수확량은 40배이상 늘었고 전국대부분을 경작했고 고려시대에 비해 공납이든 세수든 훨씬 적었습니다. 임진왜란 직전만해도 매우 많은 생산량덕분에 나라가 부유해졌습니다. 문제는 님말대로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었고 명나라의 질서에 편입된 후로 별다른 외침도 받지 않았고, 고려말 조선초의 강력한 왜구말살정책덕분에 지방의 백성들이 더이상 타국이나 왜구의 노략질을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는겁니다. 그래서 군대의 필요성이 현저히 줄어들면서 군대를 가지 않게되었고 공납으로 대신 받아주는 행태가 만연해진거지요. 북방의 여진족만 가끔 말썽이었을 뿐이라 북방의 기마부대와 궁병들 정도만 정예병이었고 지방군은 거의 없는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임진왜란 직전에 왜군이 쳐들어올것을 예측 못한것이 아니고 실록을 보면 어느정도 예측은 했습니다. 그래서 성을 축조하고 개보수도 하고 가끔 훈련도 했는데 그 훈련이런것이 농사짓던 백성을 마치 현대의 예비군처럼 모았다고 다시 돌려보내는, 즉 모집훈련정도만 한겁니다. 왜 그런가하면 그때까지 북방의 오랑캐도 아니고 감히 왜나라가 17만이란 대군으로 쳐들어올거라고는 누구도 예상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이 판단이 욕을 먹지만 사실 누구라도 그 시대에 살았다면 예상할수 없는 일입니다. 기껏해야 조선초나 고려말의 왜구들처럼 수백에서 만명이하가 올줄알았지요.
이전 영국 BBC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포인트는 전투식량의 차이를 보더라구요. 명 조선은 쌀과 밀가루가 주식이고 후금은 우유와 고기가 주식이라 전투 병사들이 전투력의 유지 시간에 상당한 차이를 둔다고. 후금은 몇날 며칠을 싸워도 잘 안 지치는데 명과 조선은 하루만 지나도 많이 지치더라.
일종의 포라고 합니다. 그때 이미 후금은 고기를 말려서 가공하는 기술이 뛰어났죠...포 한주먹만 물과 함께 솥에 넣고 끊이면 말 그대로 수명이 먹을수 있는 훌룡한 전투식량이 됩니다. 몽고족도 마찮가지였구요. 물기를 완전히 제거한 육포는 가볍고 부패의 위험이 없죠...거기다가 지구력면에서 상대가 안되죠...육식과 채식의 차이...
사람 머리 숫자로만 판단할 게 아닌 것이... 여진족 기병은 1인 당 최소 3마리의 말을 운영하기 때문에 지칠 때마다 갈아타면서 극강의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고, 더구나 유목민족은 어릴 때부터 수렵생활을 하면서 자라기 때문에 전투기술을 따로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음. 이후로 만주족은 멀리 티베트, 위구르족까지 정복하여 한족이 한번도 정복한 적이 없었던 영토를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에게 공짜로 선물해줬으니 망해가던 명나라 사람들이 상대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었음. 유목민족의 문제는 조직력... 몽골 족의 테무친도 가장 힘 없는 부족의 가장 빈약한 추장의 아들이었는데 누르하치도 마찬가지였구만... 어떤 모티베이션이 그 리더와 그의 수하들을 제국 건설까지 이르게 했는지 좀 더 심도 있는 탐사가 필요하지만 글을 남기지 않는 유목민족의 특성 때문에 한계가 있는 듯...
군기가 쌔면 모함. 조선군은 보급이 잘 안되서 유정이 보급을 나눠주기도 했는데. 잘싸운다해도 보급을 나눠줘서 같이 약해질거면 조선은 애초에 안오는게 나았을 거 같음.. 심지어 조선은 완편군대도 아니어서 명나라 지원역할로 왔는데 의문인게 명은 완편도 안된 군대를 받아서 뭔 깡으로 참전시켰는지. 명이 보완해줄만한 상황도 아닌데 머릿수에만 집중한 듯. 군사적 판단 보단 정치적 판단이 우선된 게 아닌가..
전투에 경험있는 장군을 명나라가 패전 목적으로 죽인 게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본다. 지형, 전력, 상대의 움직임등을 실전에서 겪어본 장군은 이후 전쟁에서 유용한데 패전 책임으로 죽여버리면 경험치가 안 남고 저렇게 죽여버리니 총사령관에 유능한 사람들이 지원을 안 한다. 원칙만 입각한 멍청한 탁상행정의 실패 결과라고 본다.
@@반안 저 당시 참전한 총사령관을 9년간 옥에 가두고 숭정제 때 처형한 부분을 말 한 부분입니다. 해당 장교는 임진년 조선 전쟁에도 참전 경험이 있고 상당히 유능한 장군임에도 저 사르후 전투 이후에 후금에 대한 경험치가 있음에도 죽여버렸죠. 사르후 전투로 인해 사실상 1,2,3군은 전멸 전투 직전 철군한 4군만 살아 돌아갔는데 사르후에서 청군과 직접 싸워본 장군이 몇이나 대기중일까요?
@@KHTV01 이후 심양성을 지키던 하세현이 그 4군 이영방 소속 장군이였습니다 인조도 알고 있을정도로 굉장히 유명한 장군이였죠 그리고 명나라는 정치보다 '감찰'쪽이 더 큰 경우가 많았어서 흔히 있는 일입니다 이후 원숭환 만계 노상승 홍승주 조문조 손전정이 제대로 된 지원없이 떠밀려나가서 전사 혹은 같은편에게 처형당하게 되죠
@@scottyoko703 활로 순식간에 움직이는 기병을 잡는게 쉽지 않습니다. 기병은 경기병이라해도 화살 한두방에 죽지 않는 갑옷을 입고 있고 말도 중요부위를 가리기 때문에 일단 백병전에 돌입하면 기병에게 대항하는것은 창병이 더 유리합니다. 이런 이유로 조선도 일반병사가 창을 사용한것입니다. 창은 기병뿐 아니라 보병전에서도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다만 그렇다해도 수백에서 수천의 기병이 들이닥치는것을 보병이 막기는 어렵습니다. 현대로 치면 자동차가 달려드는데 사람이 막아서는것과 비슷한거죠.
이미 군사력에서부터 게임이 안됬죠. 당대 누르하치의 팔기군은 세계에서 가장 군사력이 막강한 기병대로서 군사력 1위였는데, 실제로 노토부락 전투에서 보더라도 여진족 기병 1명이 일본군 30명과 전투해도 이길수있을만큼 강력했음. 조선군은 초기때는 제법 군사력이 쓸만했는데 중기로 갈수록 쇠락해져갔고, 그 당시 조선군의 기병대가 그렇게 강한 편이 아니었고 보병대도 임진왜란때 일본군의 침략과 상륙을 저지하기위해 재편된 터라... 조선군이 사르후 전투에 참전했지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누르하치에게 학살당했었죠...
그냥 인구수가 많아서 그랬어요. 누루아치가 통치하기전까정은 조선 북방군 500명에게도 털리고 안돼는 것들이었어요. 조선군이 진적도 없고 맨날 여진족 토벌만 하다. 중국 심양에서 북쪽 하얾빈까지 중국인 절반 인구전체가 합쳤으니 숫자적으로 압도한거고 명.조선은 임진왜란.내정분란으로 피로감 쌓인상태고 단지 휴식 많앗던 후금이 유라한거엿던거죠.
몇가지 아쉬운 점이 있네요. 먼저 방송에서는 강홍립의 중영을 후금이 고스란히 살려 돌려보낸것처럼 표현됐는데 이는 명백히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강홍립 장군의 종사관이었던 이민환이 쓴 책중일록에 따르면 강홍립 휘하 중영 병력은 후금의 포로가 된 후, 장수급 무관을 제외한 일반병들은 노비로 후금 각 가정에 분배되고, 장수급들은 감금생활을 합니다. 이후 조선군 포로의 도망, 후금 부녀자 강간 등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자 양반출신 포로 2백여명이 학살되기도 합니다. 결국 도망에 성공한 일부 포로들만 생환에 성공(일설에는 2,700여명 가량) 하였고, 강홍립과 김경서는 훗날 청이 조선을 침공할 때 같이 끌려왔다가 조선 조정에 반환됩니다. 절대로 순순히 후금이 중영 군사들을 살려준 건 아닙니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영원성 공략하다가 홍이포에 부상을 입어 사망했다는 말은 설이지,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정설인것처럼 단정지어 말하는 것은 지양해야 합니다. 누르하치가 홍이포 부상으로 죽었다는 설은 후금군이 영원성 공략 실패 이후 바로 몽골을 치러 갔다는 데에서 의문점이 많은 설입니다.
이게 근데...우리나라사람은 이해를 하기가 힘든 부분이 있는데 말로 훈련수준이 개판이다 개판이다 라고 우리조선군도 그렇게 평가를 받는데 최소한 훈련이 부족해도 싸우기는 싸웠던 조선과 달리 명나라는 10대1 우세여도 실제로 싸우는건 1~2명밖에 안되고 나머지는 싸울생각을 안하는지라;; 쉽게말해 현재 공무원이 책좀 잡혀서 연금깎이는거 싫어하니까 자기 손해볼려는짓은 1도 안하려 하잖아요 당시 명은 살벌해서 이게 조금만 잘못해도 무조건 사형이니까 장수들이 안나가게 되서 진짜 뜻있는 몇명이 멱살잡고 버티는 형세라 얘네는 1대1로도 잘싸우는데 나머지는 그냥 튀는것도 아니고 한 200~300명 대충 몰아내고 조정에 수만명을 격퇴하였다고 허위보고해서 상금타먹고 공을 어쨋든 세웠으니 그냥 눌러앉아요 병사들 마인드도 문제인게 여튼 우리나라는 국토가 작아서 경남 전남출신이 함경까지 가서 싸운다한들 내나라를 지킨다는 마인드가 있는데 중국은 그게 없어서 우리가 왜 싸워야하냐는 인식이 강합니다;;
여자분의 클로징 멘트는 당시 후금을 대국으로 표현했지만 엄밀히 말한다먼 당시의 후금은 부상하는 세력이었지 대국은 아니었지요. 후금 입장에서는 생존을 건 전투라고 보여집니다. 후금입장에서 사르후 전투에서 패했었다면 곧 멸망의 길로 들어섰을 것입니다. 그 후의 역사를 우리가 알고있기에 후금의 강성함을 알지만 후금의 세력이 커지는 과정이기에 과연 당시 후금을 강국이라 칭할지는 미지수로 보입니다.
@@poolnae7249 당시 일본정도면 만주까지는 아니더라도 좆선정도면 충분히 정벌 가능했다. 당시 좆선군은 이미 그전부터 정규군도 아닌 일본해적들에게 털릴 정도로도 형편없었고 실제로 평지야전에서는 이긴적이 거의 없으니. 다만 명나라 대군의 지원으로 전쟁이 길어지고 그 사이에 히데요시가 병으로 죽어서 퇴각한 것이지.
북방족은 겨울이 빨라 항상 식량부족. 목축에 의존 하여 육식위주이였고 수명이 40대 초반 이라 만성 인구 부족이였다. 이들은 야성적이며 부족적으로 독립성이 강해 연합이 안되였지만 청대에 이르러 모처럼 힘을 합칠수 있었다. 과거 징기스탄. 누르하치. 또 몇명의 북방적 영웅이 있었으나 자연적으로 사람이 모일수 지형과 자급자족이 가능한 중국 앞에선 모래성 같은 존재들이고 이 상황은 현대까지 이르렀다. 한때 천하를 주름 잡던 징기스탄의 후예는 우환거리로 취급 제노사이드 형태로 제정러시아와 한테 형제국이였던 청에 의해 인종 학살로 현재 3백만 인구만 몽골이 유지 하니 어쩜 중국은 영원히 우환을 제거한 상태.
당시 누루하치는 자신이 신라의 후예였기 때문에 조선을 형제의 나라로 여기고 조선을 관대하게 봐줬음.그러나 조선이 고구려와는 달리 계속 명을 받들고 고구려때부터 친하게 지내왔던 여진족들을 오랑캐라 부르며 청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급기야는 삼전도의 굴욕을 겪게 된 것임. 그리고 사회자나 역사학자들이 강대국에 둘러싸인 조선이라고 말하는데 고려때만해도 여진족과는 일진일퇴의 호각지세를 이루웠었던 국가였지만 조선이 들어서면서 태생 자체가 중국에 대해서 사대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누루하치 마냥 중국을 복속시킬 생각자체가 아예 없었던게 아쉬울따름이죠. 중국 역사상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이긴 적이 없던 나라였는데 말이죠.
@@오규열-v2r 저도 안 좋은 소리 안 하려고 그 말까지 안 쓰긴 했는데, 저하고 생각이 비슷하시네요. 제 생각은 얘기는 듣긴 하는데, 본인 생각을 말을 안 하는 건지, 아예 없는 건지 생각했어요. 인형 앉혀 놓은 느낌은 저도 동일하게 받았고요. 토전사처럼 윤지연 아나하고 이세환 기자 같은 티키타카가 돼야지 허준이 재미있어지는데, 태상호 기자도 그냥 설명만 하고 드립이나 이런 건 허허 이러면서 대꾸도 안 해 주고, 파트너는 인형 같이 앉아 있고, 비교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안 했었는데, 너무 비교가 많이 되네요
오합지졸에 군대와 ... 목표가 있고 잘훈련되고 훌륭한 지휘관이 있는 부대와 는 다르죠 .. 대제국을 건설한 나라에 특징 인구가 많아서 된게 아니죠 .. 로마 . 몽골 . 청나라. 영국. 미국 . 인구가 많아서 된게 아님 .. 임진왜란때 용인전투에서 조선군 5만명이 외군 2천명에게 전멸했던것도 기억하시길 ... 훈련없는 군대는 의미없는숫자임 ...
@@lapark4524 임란 겪은 명나라 30대 후반~ 40대 베테랑 군인들은 이때 아마 예순 살이 넘었을 겁니다... 임란(1592~1598) 이후 사르후전투(1619년)......참고로 임란 당시 항왜 출신 장군이었던 김충선 장군의 경우 병자호란(1636년)때 예순 넘은 나이였다는...
당시 요토가 이끈 병력만 2700명이였는데 뭔 개소리죠 ㅋㅋㅋ 당시 청나라 기마병 이끈 요토가 무슨 듣보잡도 아니고 청나라 서열 7위이자 서열 2위 다이샨의 장남에 사르후때부터 활약했고 병자호란 직전 1636년 초에 화북침공때 3갈래군중 한개를 담당할만큼 대단한사람이였고 당시 조선군도 2~3000정도로 병력도 비슷했으니 당연한 결과죠 그리고 청군이 1명도 안죽었다는게 아니라 청나라 기록자체가 한의 명을 받아 말을 폭풍같이 몰아내니 간적들이 두려워 도망갔다 뭐 이런식으로 적어놔서 그렇습니다
후금은 여진족들이 어릴때부터 말타기부터 사냥, 개인전투를 습득했고 유목과 농경을 함께 했기 때문에 순식간에 모이고 흩어지는 대회전도 충분히 가능했을만큼 한명한명이 노련한 병사였고 조선과 명은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16세이상의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남성을 징집하여 훈련시켰기에 실전에서의 차이가 클수밖에 없었죠. 고려시대만 해도 각 가문에 사병이 있었고 마을마다 별초라고 불리는 마을자경단이 있었습니다. 고려는 중앙집권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각지방의 호족,토호,유지,권문세족들이 각자 가문의 사병을 수십에서 천명단위까지 거느린 체계였고 국가에서 필요할때 징집했는데 이건 마치 중세유럽의 영주와 왕, 일본의 다이묘들과 비슷했습니다. 이런 경우 사병들은 자주 다른 가문의 사병들과 소규모의 전투를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싸우는 방법을 터득합니다. 이성계의 조상이 죄를 지었을때 그 지역 관리가 잡아들이지 못하고 병사를 모으는 이유는 이성계의 조상이 사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려시대에는 관군이라고 해도 지방토호를 잡아들이려면 사병과의 전쟁을 하지 않고는 잡아올수가 없었습니다. 이성계가 데리고 다는 병사들중 상당수도 여진족의 땅에서 갈고닦은 노련한 병사들이었죠. 그들은 백병전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히 싸웠습니다. 과거 금나라의 침략때도 마을의 별초들이 각자 대항하고 순식간에 모여 하나의 군대를 이루며 끈질기게 괴롭힐수 있던것도 이런 시스템때문입니다.(이게 나중에 삼별초의 모태가 됩니다. 삼별초가 사병집단이었다가 관병화되었습니다.)
문제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사병을 이용하고 권력을 잡은 세력인 정도전이 사병혁파를 단행했고 이에 반대한 이방원도 자신이 권력을 잡을때는 사병을 이용했으면서 자신도 그렇게 당할까봐 사병제혁파를 그대로 시행했다는겁니다. 그 덕에 세종시대에는 많은 사병을 관병화해서 수십만의 대군을 만들어내어 영토를 넓힐때도 쓰이는등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했지만 세조이후 집안내에 백병전을 연습만해도 사형이라는 무시무시한 법을 만들어내고 도검을 집안에 두지못하게 하고 이전에는 늘상 차고 다녔던 도검도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하면서 그 사병들이 그대로 농민, 노비화 되어갑니다. 조선중기 임진왜란직전에 이르면 조선내에는 곧배로 전쟁에 나가 싸울수 있는 사병이 전혀 없고 군역도 대신하거나 대납하여 면제하는등의 폐단으로 북방의 일부 군대를 제외하면 사실상 근대가 없는거와 거의 비슷한 상태가 되버립니다.
이런것이 조선이 임진왜란 초기에 대응에 실패하게 한 원인이죠. 고려시대 같으면 부산에서 부터 각지방의 사병들이 일시에 규합하면서 왜군을 계속 괴롭히고 중앙군이 모일 시간을 벌어줬겠지만 뭐 다 알다시피 단시간에 한양까지 왜군이 주파하게 해주죠. 이런 속도는 전쟁사에도 별로 없을만큼 빠른 진군이었죠. 그것고 기병이 거의 없던 왜군인데도요. 아무튼 조선은 중앙집권화를 완벽히 이뤄냈고 당시의 시대만 해도 선진적인 정치체재를 만들어냈었으나 그로인한 풍선효과로 그렇게 강하던 고려군대를 엄청나가 허약한 조선군대로 변모시킨 이유가 된겁니다. 후금에게 쉽사리 당하는것도 이해못할 일이 아닌거죠.
오호! 정리 굿
아 그렇군요 애초부터 게임이 안되었군요 먹고사는문제가 해결되면 정신력도 나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tv1009Jesus.together 위의 제 댓글을 보면 고려시대가 더 좋고 조선시대가 안좋은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고려시대보다 조선시대가 살기는 더 좋았습니다. 토지에서 생산되는 수확량은 40배이상 늘었고 전국대부분을 경작했고 고려시대에 비해 공납이든 세수든 훨씬 적었습니다. 임진왜란 직전만해도 매우 많은 생산량덕분에 나라가 부유해졌습니다. 문제는 님말대로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었고 명나라의 질서에 편입된 후로 별다른 외침도 받지 않았고, 고려말 조선초의 강력한 왜구말살정책덕분에 지방의 백성들이 더이상 타국이나 왜구의 노략질을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는겁니다. 그래서 군대의 필요성이 현저히 줄어들면서 군대를 가지 않게되었고 공납으로 대신 받아주는 행태가 만연해진거지요. 북방의 여진족만 가끔 말썽이었을 뿐이라 북방의 기마부대와 궁병들 정도만 정예병이었고 지방군은 거의 없는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임진왜란 직전에 왜군이 쳐들어올것을 예측 못한것이 아니고 실록을 보면 어느정도 예측은 했습니다. 그래서 성을 축조하고 개보수도 하고 가끔 훈련도 했는데 그 훈련이런것이 농사짓던 백성을 마치 현대의 예비군처럼 모았다고 다시 돌려보내는, 즉 모집훈련정도만 한겁니다. 왜 그런가하면 그때까지 북방의 오랑캐도 아니고 감히 왜나라가 17만이란 대군으로 쳐들어올거라고는 누구도 예상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이 판단이 욕을 먹지만 사실 누구라도 그 시대에 살았다면 예상할수 없는 일입니다. 기껏해야 조선초나 고려말의 왜구들처럼 수백에서 만명이하가 올줄알았지요.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
굿
오늘도 넘나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유익한 정보 감사합니다
와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사르후 전투 영상보다 훨씬 자세하다
이전 영국 BBC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포인트는 전투식량의 차이를 보더라구요. 명 조선은 쌀과 밀가루가 주식이고 후금은 우유와 고기가 주식이라 전투 병사들이 전투력의 유지 시간에 상당한 차이를 둔다고. 후금은 몇날 며칠을 싸워도 잘 안 지치는데 명과 조선은 하루만 지나도 많이 지치더라.
체격에서도 상당한 격차가 있다고 하죠..
몽고족도 고기가 주식 아닌가요?
실제로 몽골과 여진족은 전투시 삶은 말이나 소고기를 말린후 실밥처럼 가늘게 찢어서 압축상태로 휴대하고 다녔습니다.
일종의 포라고 합니다. 그때 이미 후금은 고기를 말려서 가공하는 기술이 뛰어났죠...포 한주먹만 물과 함께 솥에 넣고 끊이면 말 그대로 수명이 먹을수 있는 훌룡한 전투식량이 됩니다.
몽고족도 마찮가지였구요. 물기를 완전히 제거한 육포는 가볍고 부패의 위험이 없죠...거기다가 지구력면에서 상대가 안되죠...육식과 채식의 차이...
후금은 밥을 해 먹어요
몽골과 후금은 다름
병력으로만 보면 상대도 안되는 병력수와 자원의 차이가 있었음에도 명을 멸하고 청을 세운 후금의 저력이 대단합니다.
명을 멸망시킨것은 이자성의 반란군이고 청은 투항한 오삼계군과 연합하여 이자성군을 궤멸시킴
사람 머리 숫자로만 판단할 게 아닌 것이... 여진족 기병은 1인 당 최소 3마리의 말을 운영하기 때문에 지칠 때마다 갈아타면서 극강의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고, 더구나 유목민족은 어릴 때부터 수렵생활을 하면서 자라기 때문에 전투기술을 따로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음. 이후로 만주족은 멀리 티베트, 위구르족까지 정복하여 한족이 한번도 정복한 적이 없었던 영토를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에게 공짜로 선물해줬으니 망해가던 명나라 사람들이 상대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었음. 유목민족의 문제는 조직력... 몽골 족의 테무친도 가장 힘 없는 부족의 가장 빈약한 추장의 아들이었는데 누르하치도 마찬가지였구만... 어떤 모티베이션이 그 리더와 그의 수하들을 제국 건설까지 이르게 했는지 좀 더 심도 있는 탐사가 필요하지만 글을 남기지 않는 유목민족의 특성 때문에 한계가 있는 듯...
이자성이 오삼계 가족들가지고 트롤짓만 안했어도 후금은 후금에서 멈췄는데 뭔 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볼때 후금군은 여기서 지면 우린 죽는다. 라는 신념을 갖고 모두가 필사적으로 싸운것 같고 명나라와 조선군은 왜 싸워야하는지 모르는 병사들을 데리고 그런 적군과 전쟁을 하려고 하니 그 의지 부터가 차이가 났기 때문에 패한거 같다.
애초에 군기 자체가 엄청 났습니다. 전성기 로마, 몽골제국 수준임. 후퇴하면 지휘관이 붉은 화살쏴서 표시한 뒤 나중에 처형함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와의 전쟁과 같은 양상인것 같다.
긍께. 군기빠진 중공군.남조선군이랑께.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뽀록났다.방산비리.군비리.이제 해결하여 똥별.방산업자 처벌해불자.잉.안글라잉
@@박광수-l5z 애국보수분들 명나라 형님형님만 외치다 망해버렷노
군기가 쌔면 모함.
조선군은 보급이 잘 안되서 유정이 보급을 나눠주기도 했는데.
잘싸운다해도 보급을 나눠줘서 같이 약해질거면 조선은 애초에 안오는게 나았을 거 같음..
심지어 조선은 완편군대도 아니어서 명나라 지원역할로 왔는데 의문인게 명은 완편도 안된 군대를 받아서 뭔 깡으로 참전시켰는지.
명이 보완해줄만한 상황도 아닌데 머릿수에만 집중한 듯. 군사적 판단 보단 정치적 판단이 우선된 게 아닌가..
오 1부도 흥미있게 봤습니다!!!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잘봅니다
잘 보겠습니다
실전을 방불케하는 명괘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적을 알지 못하고 분열된 군대가 어떤 최후를 맞게 되는지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마림은 명장 집안 출신인데 본인은 야전지휘관 보다는 문관에 가까운 인물이였지요.
그래도 마림은 후금군을 막겠다고 준비를 했습니다. 참호도 팠고요 그 이유는 선봉 군대가 개판 되었다는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찌되었든 마림군은 준비는 했지만 팔기가 넘사벽이라서 망했지요
전 이미 나와있나해서 열심히 찿아봤는데..ㅠㅠ
26:30 저 그림 금나라군 아닌가요?
예전에 중국에 이런말이 있었어요.八旗過萬,天下無敵(팔기가 만이 넘으면 천하에 당할자가 없도다 )과장일수는 있지만 청나라 초창기의 팔기군의 강력함을 볼수 있죠
오늘은 박작가님 자기이야기 별로 안하고 현상황을 냉철하게 잘 야그 하신 영상이었네요 극공감하네요 선한방송 감사합니다!
전투력도 전투력이지만 명군은 정보력 부재로 패배했다고 보여지죠.
특히 말안듣는 부하 장수 문제도있고.
전투에 경험있는 장군을 명나라가 패전 목적으로 죽인 게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본다. 지형, 전력, 상대의 움직임등을 실전에서 겪어본 장군은 이후 전쟁에서 유용한데 패전 책임으로 죽여버리면 경험치가 안 남고 저렇게 죽여버리니 총사령관에 유능한 사람들이 지원을 안 한다. 원칙만 입각한 멍청한 탁상행정의 실패 결과라고 본다.
경험이 많은 후임 장군들이 줄줄이 대기중인데 무슨 말인지.
@@반안 저 당시 참전한 총사령관을 9년간 옥에 가두고 숭정제 때 처형한 부분을 말 한 부분입니다. 해당 장교는 임진년 조선 전쟁에도 참전 경험이 있고 상당히 유능한 장군임에도 저 사르후 전투 이후에 후금에 대한 경험치가 있음에도 죽여버렸죠. 사르후 전투로 인해 사실상 1,2,3군은 전멸 전투 직전 철군한 4군만 살아 돌아갔는데 사르후에서 청군과 직접 싸워본 장군이 몇이나 대기중일까요?
@@KHTV01 이후 심양성을 지키던 하세현이 그 4군 이영방 소속 장군이였습니다 인조도 알고 있을정도로 굉장히 유명한 장군이였죠 그리고 명나라는 정치보다 '감찰'쪽이 더 큰 경우가 많았어서 흔히 있는 일입니다 이후 원숭환 만계 노상승 홍승주 조문조 손전정이 제대로 된 지원없이 떠밀려나가서 전사 혹은 같은편에게 처형당하게 되죠
진짜 흥미진진하네요 75km 를 6시간에 간다니.. 🥵
당시 조선군은 고려군의 반도 고구려군의 반에반에 반도 인되는 군사력이었다. 고구려군사력급의 후금군을 상대하기엔 하~~~안참 못미치는 군사력.
1당백 천명이면 충분 당시의 기마병은 보통 1대 20명 정에병은 1당 백 이었다하더군요 보병이 기마병을 이기는건 라스트 사무라이에 나왔듯 총과 대포가 나온후였고 그 전에는 활쏘는 기마병이 월등
활은요? ㅎㅎㅎㅎㅎ
@@scottyoko703 활로 순식간에 움직이는 기병을 잡는게 쉽지 않습니다. 기병은 경기병이라해도 화살 한두방에 죽지 않는 갑옷을 입고 있고 말도 중요부위를 가리기 때문에 일단 백병전에 돌입하면 기병에게 대항하는것은 창병이 더 유리합니다. 이런 이유로 조선도 일반병사가 창을 사용한것입니다. 창은 기병뿐 아니라 보병전에서도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다만 그렇다해도 수백에서 수천의 기병이 들이닥치는것을 보병이 막기는 어렵습니다. 현대로 치면 자동차가 달려드는데 사람이 막아서는것과 비슷한거죠.
@@ego6929 그건 아는데요 저분이 활쏘는 기마병이라고 글을 고쳤네요 ㅎㅎ
개인 싸움에서는 1명이 3명도 이기기 힘들지만 전쟁에서는 만명이 10만도 이길수있다 그이유는 10만명은 각자가 자기는 안다치고 옆의 다른사람이싸워주겠지하는 안이한 생각을 하기때문이다 죽을각오하고 덤비는 팔기군을 군기빠진 명나라군이
다 동의는 못하겠음.
중세말기 유럽상황아십니까?
이미 군사력에서부터 게임이 안됬죠.
당대 누르하치의 팔기군은 세계에서 가장 군사력이 막강한 기병대로서 군사력 1위였는데,
실제로 노토부락 전투에서 보더라도 여진족 기병 1명이 일본군 30명과 전투해도 이길수있을만큼 강력했음.
조선군은 초기때는 제법 군사력이 쓸만했는데 중기로 갈수록 쇠락해져갔고, 그 당시 조선군의 기병대가 그렇게 강한 편이 아니었고 보병대도 임진왜란때 일본군의 침략과 상륙을 저지하기위해 재편된 터라... 조선군이 사르후 전투에 참전했지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누르하치에게 학살당했었죠...
7
2
그냥 인구수가 많아서 그랬어요. 누루아치가 통치하기전까정은 조선 북방군 500명에게도 털리고 안돼는 것들이었어요. 조선군이 진적도 없고 맨날 여진족 토벌만 하다. 중국 심양에서 북쪽 하얾빈까지 중국인 절반 인구전체가 합쳤으니 숫자적으로 압도한거고 명.조선은 임진왜란.내정분란으로 피로감 쌓인상태고 단지 휴식 많앗던 후금이 유라한거엿던거죠.
실제 일본군과 싸웠고
그당시 만주까지 갈려고 하다가 놀라서 엄청뒤로 후퇴함
함경도까지 일본이 점령했는데
함경도는 조선이 방어하라고 하고 지휘관을 임명하고
자신은 저뒤로 후퇴함
사실 일본군은 중원을 노릴만큼은 되지 않았음
조선정도 먹었으면 엄청 성공인데 그것도 하지못했지
@@prestetuu2611 몽골이나 여진족 기병 한명이 좆본 병사 10명도 넘게 상대하니 전투력에서 상대가 안됨
요렁게 또일어나길 바람
왜군이 칼싸움 솜씨는 상당했는데 좁은 공간에서 왜군 30명이 후금군 1명에 진다는 건 말비약임. 반대로 넓은 공간에서는 후금군 철기병이 왜군 보병과는 그럴 수도 있을 것임..
정말 기록으로 보고 강의로 봐도 이해하기 힘든 패전이네요~~ 고대 칼과 활만 있던 시절이면 납득이 되겠는데.... 총과 대포가 있던 시절에는 한명을 죽이기 위해선 한명이 죽을 수 밖에 없는데... 팔기군은 그런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네요....
재밌네요
몇가지 아쉬운 점이 있네요. 먼저 방송에서는 강홍립의 중영을 후금이 고스란히 살려 돌려보낸것처럼 표현됐는데 이는 명백히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강홍립 장군의 종사관이었던 이민환이 쓴 책중일록에 따르면 강홍립 휘하 중영 병력은 후금의 포로가 된 후, 장수급 무관을 제외한 일반병들은 노비로 후금 각 가정에 분배되고, 장수급들은 감금생활을 합니다. 이후 조선군 포로의 도망, 후금 부녀자 강간 등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자 양반출신 포로 2백여명이 학살되기도 합니다. 결국 도망에 성공한 일부 포로들만 생환에 성공(일설에는 2,700여명 가량) 하였고, 강홍립과 김경서는 훗날 청이 조선을 침공할 때 같이 끌려왔다가 조선 조정에 반환됩니다. 절대로 순순히 후금이 중영 군사들을 살려준 건 아닙니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영원성 공략하다가 홍이포에 부상을 입어 사망했다는 말은 설이지,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정설인것처럼 단정지어 말하는 것은 지양해야 합니다. 누르하치가 홍이포 부상으로 죽었다는 설은 후금군이 영원성 공략 실패 이후 바로 몽골을 치러 갔다는 데에서 의문점이 많은 설입니다.
명나라군대가 당나라군대 보다
헐씬 약체 였나보다.
10만 대 8천 대결
20:00 사실 이건 누르하치보다는 다이샨의 공;; 총지휘관의 공 역시 적지는 않겠지만 사실 말에 내려서 싸우라고 명령 내리기는 했는데 정작 다이샨은 급박하니까 그냥 기마돌격해서 마림진채가 함락당했죠
오 곧 공개
8천이 아니고 4~5만명 정도는 넘었을 건데
컴퓨터 cg 무슨 게임인가요?
당시에 이런말이 있었죠
여진인들이 만명이상 모이면 그들을 상대할자는 없다..라고
그건과장임. 요나라와 여진족이 싸울때 만명의 여진족이 몇배나되는 요군을 격퇴했는데 한전투에서 일어난 사건이 와전된것임
가랑비가 왔다면서 초승달이
떠 있다는걱 뭔가 안 맞네
원래 이동 속도가 하루 15km
항시 공격측은 방어측의 열배로 공격한다. 열배의 공격병력과 대적해 이길려면 지형지물과 시차를 이용해야함.
10:00
중국기록에서 군대숫자는 어느정도 보정하고 봐야함. 청이열세인건 맞더라도 10:1수준의 열세이진 않았을듯.
이게 근데...우리나라사람은 이해를 하기가 힘든 부분이 있는데 말로 훈련수준이 개판이다 개판이다 라고 우리조선군도 그렇게 평가를 받는데 최소한 훈련이 부족해도 싸우기는 싸웠던 조선과 달리 명나라는 10대1 우세여도 실제로 싸우는건 1~2명밖에 안되고 나머지는 싸울생각을 안하는지라;; 쉽게말해 현재 공무원이 책좀 잡혀서 연금깎이는거 싫어하니까 자기 손해볼려는짓은 1도 안하려 하잖아요 당시 명은 살벌해서 이게 조금만 잘못해도 무조건 사형이니까 장수들이 안나가게 되서 진짜 뜻있는 몇명이 멱살잡고 버티는 형세라 얘네는 1대1로도 잘싸우는데 나머지는 그냥 튀는것도 아니고 한 200~300명 대충 몰아내고 조정에 수만명을 격퇴하였다고 허위보고해서 상금타먹고 공을 어쨋든 세웠으니 그냥 눌러앉아요 병사들 마인드도 문제인게 여튼 우리나라는 국토가 작아서 경남 전남출신이 함경까지 가서 싸운다한들 내나라를 지킨다는 마인드가 있는데 중국은 그게 없어서 우리가 왜 싸워야하냐는 인식이 강합니다;;
원래 북방기병만명은 전투병력이 대부분이고
전투병력이 돌격 궁술 근접 모두해냈음
그냥 만명이 대부분 전투병력에다가 모든전술이 가능했음
중국 10만명은 실제 전투병력이 절반정도 될것
그러니깐 몇번 전투에서 패하면 숫자로도 압도하지도 못함
그리고 가장큰것은
경험이고 어릴때부터 전장에서 살았고
보통 10살되면 말타고 싸움
궁술도 엄청좋았음
무서운게 궁술이었지
이동하면서 쏘는걸 자유자재로 하니깐
중국은 고대부터 전세계 인구의 상당부분을 차지했음. 숫자 보정은 필요하지만 그게 꼭 중국 기록에 한정될 문제는 아니고 우리나라나 유럽 기록도 과장이나 은유 비유적 표현이 많음. 가령 만명 십만명 같은 단위는 많은 병력을 나타내는 대명사와 같은 식으로 많이 사용 되었음.
스파르타 전사 vs 페르시아 전사 레벨이군요.
스파르타는 과장이 많이 되었음. 실제로 국제 사회에서 대단한 활약도 못해봄
👍👍👍👍👍
👍👍👍👍
10만 보병 8000탱크
기병으로 조총병에 발렸으면, 조총병으로 기병 바르는 걸 우리도 보여줬어야지,,
일본군 조총병은 조선군 기병이 돌격하면 장창병 뒤에 숨었는데
조선군은 적의 기병을 막아줄 살수의 비율이 너무 낮았죠..
조총이랑 활 가지고 어떻게 제압사격을 함.... 영국장궁대가 프랑스 기사를 저지한 적은 있는데 진창과 언덕이라는 지형에서 수비를 하니 가능했고. 야지에서 격돌한 상태에서 조총과 궁수를 제압한다는건 자살행위힘
후금이 아니라 후김 아닌가?
여자분의 클로징 멘트는 당시 후금을 대국으로 표현했지만 엄밀히 말한다먼 당시의 후금은 부상하는 세력이었지 대국은 아니었지요.
후금 입장에서는 생존을 건 전투라고 보여집니다. 후금입장에서 사르후 전투에서 패했었다면 곧 멸망의 길로 들어섰을 것입니다.
그 후의 역사를 우리가 알고있기에 후금의 강성함을 알지만 후금의 세력이 커지는 과정이기에 과연 당시 후금을 강국이라 칭할지는 미지수로 보입니다.
❤ 1618년 누루하치 팔기군 사르후전투 승리자입니다 ❤
사르후전투 유럽이제일 궁금해하고 연구대상인 두사람 창키스칸 누르하치 1 유목민이다 2 보급기지가없다 3 군사지식을 배운적없다
임진왜란 때 카토 기요마사 군대와 여진족이 시험삼아 한번 붙었음 순수하게 전력 탐색차원에서 붙었기 때문에 승패는 의미없지만 호각이었다고 함
가등청정군대가 여진족한테 크게당하고 더이상 압록강이북쪽으로 더이상 진격못했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내란의힘윤썩열 진지하게 북벌하려고 마음먹었으면 토벌됬겠죠 가토군이 2만가까이 됬는데 임란 이후 이수일이 이끈 3000 조선군보다 못하지는 않았을껍니다
@@남호양-m5z 좆본 전력으로는 절대 북벌 안돼지 만주라는 지역이 기후적으로도 혹독하지만 여진족 자체가 전투력이 존나 강했기 때문에 조선이 괜히 북방을 주시한게 아니다 이말이야
@@poolnae7249 여진족을 북벌할수있다는게 아니라 가토랑 맞섰던 노토부락정도는 작정했을때 일본군이 충분히 정벌가능했다 라는겁니다
@@poolnae7249
당시 일본정도면 만주까지는 아니더라도 좆선정도면 충분히 정벌 가능했다. 당시 좆선군은 이미 그전부터 정규군도 아닌 일본해적들에게 털릴 정도로도 형편없었고 실제로 평지야전에서는 이긴적이 거의 없으니.
다만 명나라 대군의 지원으로 전쟁이 길어지고 그 사이에 히데요시가 병으로 죽어서 퇴각한 것이지.
당시 조선의 주력이 조총이였는데 바람이 많이 불어서 쓸 수 없게됬던게 패배의 요인 중 하나임
저 당시 후금군사는
몽고 기병을 능가한 듯
청나라 만주족과 몽골은 고구려
유목부족인 마가부족 후손들임
그래서 전통 복장도 거의 같아요
북방족은 겨울이 빨라 항상 식량부족.
목축에 의존 하여 육식위주이였고 수명이 40대 초반 이라 만성 인구 부족이였다. 이들은 야성적이며 부족적으로 독립성이 강해 연합이 안되였지만 청대에 이르러 모처럼 힘을 합칠수 있었다. 과거 징기스탄. 누르하치. 또 몇명의 북방적 영웅이 있었으나 자연적으로 사람이 모일수 지형과 자급자족이 가능한 중국 앞에선 모래성 같은 존재들이고 이 상황은 현대까지 이르렀다. 한때 천하를 주름 잡던 징기스탄의 후예는 우환거리로 취급 제노사이드 형태로 제정러시아와 한테 형제국이였던 청에 의해 인종 학살로 현재 3백만 인구만 몽골이 유지 하니 어쩜 중국은 영원히 우환을 제거한 상태.
우환은 제거했는데 우한이 복병이 될줄...
뭐 현대전에선 어차피 기마가 의미없어서 우환은 아닌듯... 뭐 화약무기 발전해서 기마병쓸모없어질때까지 꿀 빨만큼 빨았으니
몽골도 불쌍함 고려때 한짓 생각하면 우호적일 순 없는데... 이후로는 힘든 시기를 보내서...동정이 감..
여진족의 머리는 말머리처럼 길쭉하네요.
그래서 말갈족이네요.
원래는 말대갈 이라고 부르다가 말갈로 고쳐부른듯 합니다.
이괄의 난 없었고 숭정제가 원숭환 의심만 안했어도 사르후 대패 후에도 후금이 중원을 먹는 일은 없었을텐데..
당시 누루하치는 자신이 신라의 후예였기 때문에 조선을 형제의 나라로 여기고 조선을 관대하게 봐줬음.그러나 조선이 고구려와는 달리 계속 명을 받들고 고구려때부터 친하게 지내왔던 여진족들을 오랑캐라 부르며 청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급기야는 삼전도의 굴욕을 겪게 된 것임.
그리고 사회자나 역사학자들이 강대국에 둘러싸인 조선이라고 말하는데 고려때만해도 여진족과는 일진일퇴의 호각지세를 이루웠었던 국가였지만 조선이 들어서면서 태생 자체가 중국에 대해서 사대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누루하치 마냥 중국을 복속시킬 생각자체가 아예 없었던게 아쉬울따름이죠.
중국 역사상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이긴 적이 없던 나라였는데 말이죠.
유사역사학 작작해라.
누르하치는 본인이 신라출신이라고 말한적 한번도 없다.
차라리 남송의 명장 악비의 후손이라고 말한적은 있어도.
우리 한국인은 중국 인은 단지 이웃으로 대하여야지 그이상
가깝게 할필요가없다 중국인은 천년의 원수이다
원수인 기간보다 우호적인 기간이 더 길었음. 그리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자고. 수나라가 고구려 쳐들어가기 전에 고구려가 먼저 침략한 건 알고 있나?
@@fullstacknology1142 조공이라는 게 말 그대로 착취와 같은 건 아님. 그리고 그렇게 본다면 지금 미국과 한국 혹은 다른 강대국과 약소국의 관계도 다 조공과 그 조공으로 주고받는 서로의 이익 및 손실이 함께 있음.
과거 중국 대륙 국가는 체면을 중시 하던 나라라 한반도 국가도 이를 잘 알고 대우 해주데 그만한 대접도 받았음 즉, 실속을 중시 햇죠
😱😱😱😱😱😱😱😱😱😱
후김씨 나라= 청
확실히 허준mc는 잘 받아주는 파트너가 있어야지 개그감이 터지면서 방송이 재미있는데, 이 방송 파트너분은 허준의 드립을 못 받아주네.. 윤지연 아나운서하고 캐미가 진짜 잘 맞았었는데
싫은 소리 안하고 싶은데
이야기를 잘 안듣는 느낌임
본인 생각은 거의 없고
그냥 인형 앉혀 놓은 느낌
@@오규열-v2r 저도 안 좋은 소리 안 하려고 그 말까지 안 쓰긴 했는데, 저하고 생각이 비슷하시네요. 제 생각은 얘기는 듣긴 하는데, 본인 생각을 말을 안 하는 건지, 아예 없는 건지 생각했어요. 인형 앉혀 놓은 느낌은 저도 동일하게 받았고요. 토전사처럼 윤지연 아나하고 이세환 기자 같은 티키타카가 돼야지 허준이 재미있어지는데, 태상호 기자도 그냥 설명만 하고 드립이나 이런 건 허허 이러면서 대꾸도 안 해 주고, 파트너는 인형 같이 앉아 있고, 비교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안 했었는데, 너무 비교가 많이 되네요
진짜 북방 기마민족은 강하긴 엄청 강했던듯
임용한 박사가 출연할때와 안할때로 전혀 다른 방송이라는 느낌입니다..
스피드도 뒤지고
싸움도 못하는 명군
후금이 이기는건 당연하네
근데 썸넬은 8천명이라고 표시되어있는데
청이 각개격파할때 전군을 몰아서 친데다가, 명이 토벌공격할때 동수의 군대를 지녀서 명나라 장군들도 힘들다고 했는데...
명나라 장군이 겁쟁이도 아니고 8천명을 비슷한 병력이라고 부풀라는 없잖슴
8천은 아무리 봐도 납득이 안감
제아무리 8기라도 하루만에 2만명을 몰살시키는 게 말이되나
겨우 8천으로 ㅋㅋㅋ
팔기만 온 것도 아니고 주변 몽골군들도 끌고 왓을 건데 무슨 자신감으로 8천이라고 확언하는지 모르겟음
명이 10만을 47만 이라고 했을 때 청도 10만이라고 뻥쳤겠죠. 강군 8천명이 약군 1만명씩 각개격파하기는 쉽죠. 8천명과 1만명은 거의 같은 숫자죠.
@@slee-01 그 이전에 여진내전때 동원된 병력을 봐도 그래도 1~2만은 됫었음;; 저당시에 예허여진에서 명측에 지원한 여진병만 1만이였는데 한쪽을 거의다 장악한 누르하치가 1만도 동원못하는게 말이 안되는거긴하죠
다른 얘기지만 고려의 영토가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심양까지 였다는 것을 저 지도에서도 보여주네 철령 ㅎㅎ
한국전쟁 주요 전투들도 앞으로 다뤄주세요. 이상하게 한국전쟁에 대한 컨텐츠는 없음. 북한 좋아하는 인간들이 많아서 그런가
저런 전쟁에 끼워서 죽으면, 개죽음일 뿐!~, 요즘은 용문신 전과자들은 군에서 받아주지도 않는데~,
노획한 말이 2.8만?? 마리
여진은 고구려의 후예
고조선의 후예이기도 하죠
숙신 의 신이
여진의 진과 같고
진은 진번, 진국으로 중국 역사서에 표기됨
오합지졸에 군대와 ... 목표가 있고 잘훈련되고 훌륭한 지휘관이 있는 부대와 는 다르죠 .. 대제국을 건설한 나라에 특징 인구가 많아서 된게 아니죠 .. 로마 . 몽골 . 청나라. 영국. 미국 . 인구가 많아서 된게 아님 .. 임진왜란때 용인전투에서 조선군 5만명이 외군 2천명에게 전멸했던것도 기억하시길 ... 훈련없는 군대는 의미없는숫자임 ...
전..멸? 그떄 5만명 중에서 전사한 조선군이 천명정도 되는걸로 아는데 엄밀히 말해서 전멸은 아님.
막줄에 훈련없는 군대는 의미없는 군대라고 해놨네요.
선봉대 깨지면 원래 도망가는게 세상이치.
미국은 인구대국이다 영국도 적은 인구가 아니죠
여진 기마 1대 일본 30은 너무하지 않나?
일본군은 명이나 조선과 달리 전투에 이력이 난 사람들이라 벽제관 전투에서 이여송이 방심했다고는 하나 여진출신 기병으로 목책 뒤에 진을 치고 있던 일본군에 참패하고 간신히 도망 간 적이 있습니다.
뚜벅이 좆본 사무라이가 쌔봐야 기동성 가진 기마병한테 개털리는건 역사가 증명하는데 너무하지 않나 ㅇㅈㄹ ㅋㅋㅋ
@@poolnae7249
30:1은 헛소리 맞는데? 애초에 일본군은 여진군 만큼은 아니였지만 평지 야전에서는 명나라군이나 좆선군이나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고 다녔는데.
(애초에 좆선군은 평지 야전에서는 일본군과 싸워서 이긴적이 거의 없음.)
@@poolnae7249
애초에 영원한 중국의 속국이였던 자국민 절반을 노예로 부린 좆선이 전쟁에서 이겼던것도 명나라 지원군 때문.
명나라가 청나라에게 멸망한 이유는 뭘까 🤔?!
이자성의 난+누르하치의 산해관 돌파
명나라는 이자성한테 망했습니다..청나라 아님..청나라 막는다고 수탈을 워낙 많이해서 사방에서 반란군이 생기고 그 중 이자성 농민 반란을 못막아서 지방이 초토화되고 북경까지 함락당함
@@심심해-e4u 만력제 때부터 이미 망하기 시작했죠.
청에게 멸망하기 전 명나라는 안 망한 게 신기한 나라였죠. 이미 막장국가였음
이자성이 오삼계 가족들가지고 트롤짓 해서
고구려를 실제로 이은 전투력을 가진 종족은 흑수말갈, 건주여진, 만주족
야인으로 살아야 전투력이 높아진다
문명화되는 순간 전투력은 폭망함
지휘관이 무능한게 명군의 패배 원인...
명나라 없으면 조선지금은 바로 일본이지
근데 임진왜란 겪은 베테랑들인데요.
제가 볼 땐 명나라가 지금으로 따지면 초인플레이션+전국폭동+전쟁+국회마비+대재앙자연재해+전염병 등등 상황에서 사르후원정군보낸건데 엄청 열악한 전투를 한거임.
이건 조선도 마찬가지.
결론은 무능할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lapark4524 임란 겪은 명나라 30대 후반~ 40대 베테랑 군인들은 이때 아마 예순 살이 넘었을 겁니다...
임란(1592~1598) 이후 사르후전투(1619년)......참고로 임란 당시 항왜 출신 장군이었던 김충선 장군의 경우 병자호란(1636년)때 예순 넘은 나이였다는...
@@김윤상실버스푼명왕조의 당시 사령관들 상당수 임란참전장교임.
@@김윤상실버스푼 꽤 시간 갭이 있네요
결론으 기마민족의 우수성이 나온 결과라고..
명은 야전에서 청을 이겨 본적이 없는..팔기군의 무시무시한 교전비..상황파악 못하는 조선
천리장성아닌가 요동지역은.
보병전술을가지고 기병하고 야전에서 싸운다 ..... 이는 대전차화기없이 기갑부대랑싸우는겁니다 이길수가 없어요
사르흐전투 누루하치의 복수심,,, 명나라 아웃입니다
청나라가 조선을 병합하지않은 이유가 궁금하다 명나라와 몽골 티벳등을 모두 병합했는데
용서 안해주면 조선사람들이 더 열심히 싸울것 같아서.😊
근데 허준은 이미 토전사에서 이 부분을 자세히 다뤄서 다 아는 내용일텐데 호응하는거보면 방송으로 밥벌어 먹는게 쉽지 않긴하나봄…
조선과 명나라가 패배한 원인은 나라의 부패가 한 몫을 하는 것임.
조명 연합군이 아닌.. 그냥 조명 즉 명조입니다. 명 뒤에 조를 붙혀 제번국을 표시했습니다. 우리식으로 조명 조청 고몽으로 불렸습니다. 우린 태황국이며 오랑캐간 전투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식민사관은 국가의 미래동력을 소멸시킵니다.
고려천자 만력제와 무능한 인조 VS 칠대한을 품은 누르하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 품은 사람 못이기제
도르곤이 청태종 황태극 나라의 대들보였다 젊어서 38세에 낙마사망
어디는 6만이라고 하고
어디는 8천이라고 하고
그냥 운빨과 지휘관 역량 차이죠 솔직히 사르후 원숭한이 지휘했음 그렇게 개발리진 않았음 명나라는 멸망 직전까지 청보다 국력이 강했고 지들이 자멸만 안 했음 누르하치는 참수됐을듯
남한산성의 인조를 구하고자 전라 충청 경상 3도 병사 2만명이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다가 여주 이천 벌판에서 청나라기마병 300명에게 몰살당한사실은
너무 챙피 해서인지 역사책에서 가르치지 않는다
청나라 병사들은 1도 죽지 않았습니다
조총도 있었을텐데... 도대체 얼마나 오합지졸이었을지...
당시 요토가 이끈 병력만 2700명이였는데 뭔 개소리죠 ㅋㅋㅋ 당시 청나라 기마병 이끈 요토가 무슨 듣보잡도 아니고 청나라 서열 7위이자 서열 2위 다이샨의 장남에 사르후때부터 활약했고 병자호란 직전 1636년 초에 화북침공때 3갈래군중 한개를 담당할만큼 대단한사람이였고 당시 조선군도 2~3000정도로 병력도 비슷했으니 당연한 결과죠 그리고 청군이 1명도 안죽었다는게 아니라 청나라 기록자체가 한의 명을 받아 말을 폭풍같이 몰아내니 간적들이 두려워 도망갔다 뭐 이런식으로 적어놔서 그렇습니다
동물의 살을 칼로 발라먹는
우락부락 조폭 깍두기들이
각종 연장을 각그랜저에 싣고 다니며
시골 농민들 두들겨 패고 행패 부리는 수준이지.
"전멸하다" 보다는 "전멸되다"가 더 적절.
천일양병 일일용병.
한국인들이 덩치가 작았나? 전쟁기술이나. 무기에 차이지.실전 기술같은애들하고 조총가진애들하고 상대가 대겠냐고?
여진족은 다 관우냐
어서빨리 북진통일하여 되찾자 우리의 요동 ~ !!! 우리 고려,조선의 땅 !!!
고려가대단햇던건 한반도쪽인가
아니면 저기만주족애들이대단햇던걸까
고구려 발해의뜻을 이은건 아니지만 결국은 고구려발해 후예들이 중국을 정복한거지
애초에 고구려 발해는 다민족 국가였다.
청->후금-> 금, 발해 - > 신라
그러므로 우리역사에 편입시켜야 된다 만주일대는 다 우리민족이 살았던 곳이다
삼국시대부터 고려군까지는 용맹했지만, 그후조선군은 나약하고 개판이였음.
고려시대에 윤관이 북방 개척해봤자 여진족에 털려서 못먹었고 오히려 몽골 때문에 고려 개박살난걸 생각해야지
@@poolnae7249 몽귤에 그렇게 오래토록 끝까지 항거하고 인정받은 나라 이세상에 없음. 그만큼 고려때 강했음.
@북한강 살쾡이 4군 6진은 조선초기 김종서때임. 이방원이 사병혁파해서 중앙군으로 흡수했지만 나름 고려때의 세가 남아 있어 나름 강군이었을 거라 생각굄. 갈수록 약해짐. 임진왜란때 부산에서 한양까지 어떻게 뚷린지 모름? 이순신장군 아니었으면 수군도 털리지 않았을까 함.
솔직히 임진왜란은 희대의 영웅 이순신 장군 아니였으면 지상군 있으나 마나였지. 그냥 소소한 전투에서 항전이나 마찬가지.
@@fozzoking 베트남이 있음. 베트남군이 몽골군을 물리쳤음.
왜병이 만주족 기병한테 약할것 같지는 않은데. 애초에 왜병들도 다케다신켄 기마대를 개박살낸 이시가루 텟포대 조합으로 진형만 잘 짜면 해볼만하지.
다케다신켄 기마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기병 아님. 기마보병에 가까움.
동아시아 기마대는 우리가 알고있는 유럽 중무장 기사와 큰 말과 많이 다름.
유럽기사들이 몽골 기마병 봤을 땨 왠 거지떼인줄 알았다자나..
그 거지떼에 탈탈털린 유럽의 큰말 기마병ㅋ
조선도 약하긴 약하지만,명나라군대도 참 약하구만.
@북한강 살쾡이 조선 ㅈㅂ임,초기에는 명한테 약탈 너무 당함
@북한강 살쾡이 군마랑화살같은거
@북한강 살쾡이 가서 검색해봐
@북한강 살쾡이 ?역사제대로 모르구나,너 중국인맞지?
@북한강 살쾡이 넌 중국인이면 바이두에서"明朝剥削朝鲜战马“”쳐봐,공부좀하고와.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고. 기세찬이런 사람이 육사출신에 역사 교수라 ㅋㅋㅋ 끝까지 8천이 10만을 이겼다고 우겨대네. 사르후 전투에 참여한 팔기군이 6만이었고, 속전속결로각개 격파가 가능한것은 지역수적우세도 중요 했음.
전체가 6만이다 3개 부대로나뉘어 2만이다
팔기군이라는 말자체가 6만기병이라는뜻임
그리고 보병은 뺀수치
게다가 부족하면 바로 동원해서 채울수있음
실제 군사력은 20만도 가능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