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음력 4월 12일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서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쓰시마 섬 북단의 오우라(大浦)를 출항해 부산에 상륙하였다. 13일에 총공격을 시작으로, 14일에 동래, 15일에 기장, 좌수영, 16일에 양산, 17일에 밀양, 그 후에 대구, 인동, 선산을 차례차례로 공략하고, 26일에 경상도 순변사 이일(李鎰)을 상주에서 격파하였으며, 27일에 경상도를 넘어 충청도로 진군, 탄금대에서 요격 나온 신립(申砬)의 조선군을 괴멸시켜 충주를 공략하였다. 또 경기도로 나아가 음력 5월 1일에 여주 공략 후, 2일에 용진을 거쳐 한성 동대문 앞에 도착한 후, 3일에는 수도 한성에 입성하였다. 7월 16일, 명의 요동군 부총병 조승훈(祖承訓)이 조선에 지원군으로 들어와 일본군이 점령한 평양성을 공격했지만 격퇴했다. 이때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패주하는 명군을 추격해, 명나라군 장수 사유(史儒), 천총(千総) 장국충(張國忠), 마세륭(馬世隆) 등을 죽였다. 29일, 이원익(李元翼)이 이끄는 조선군이 평양성을 공격하지만, 이도 격퇴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세키가하라전투에서 패해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참수당하자마자 요시토시는 기다렸다는 듯이 유키나가의 딸인 고니시 마리아와 이혼하고, 그녀와 그녀가 낳은 아들을 추방했다. 이것은 도쿠가와 정권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여서 자기 영지에 피해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마리아와의 이혼은 더 이상 유키나가의 통제를 받지 않겠다는 뜻이었고, 비정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대마도 다이묘(당주)는 조선어와 일본어를 모두 쓸 줄 알아야 했고, 당주 후계자로 어릴 때 낙점되면 10대 이전부터 조선어 교육을 받았었고, 늦게 낙점된 사람도 바로 조선어 공부를 필사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 그러니 당연히 소 요시토시도 조선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당연히 죽여야 할 대상 중에 요시토시만 차별적 특혜를 줘서 살려둔 것도 조선과의 외교를 위한 선택이었다. 임진왜란 전에 조선 조정이 내려준 소 요시토시의 관직은 예조참의 격이었다고 하는데 현재 직급으로 보자면 차관보 정도로 볼 수 있다. 심지어 1589년 조선을 방문했을 당시에는 창덕궁 인정전에서의 연회 때 선조를 만나 직접 술잔을 올리기까지 하였다. 소 요시토시의 10대손이 바로 일제강점기 덕혜옹주의 남편이었던 소 다케유키 백작이다.
서면에서 연산동 걸어올 때 우두커니 서있는 송상현 동상에 감사함을 전합니다.
크흐 멋집니다
같은 병력으로 김시민은 완벽히 막았고 송상현은 왜군 50명 피해만 입힘.
싸우다 죽기는 쉬우나,
길을 내어주기는 어렵다.
동래부사 송상현
훌륭하신 말씀입니다
다 죽으니 끝까지 싸우겠다.
요즘은 이렇게 많은 인원을 동원 하는
사극이 없지요…
인원도 인원이지만 요즘 사극은 사극이 사극 답지 않게 가볍지요
@@부엉이셋째동생 사회 자체가 여성화되어 있음. 계1집의 나라
인건비가ㅈ많이올라서 힘들죠 차라리CG가 싸게먹히기때문에
인건비 비싸져서 불가능
동래성 전투의 참상이 지금 부산 동래로타리 지하철 공사할때 발견 되었지요
정발 송상현 윤흥신같은
부산 방어라인은 처절하게
잘싸웠다
워낙 태합전하의 천병들이
베터랑인 탓으로 진것이지
저들은 용전분투한거임
볼트액션식 조총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조총이 아니고 M16이네 ㅋㅋ
식민사관 이 무섭긴 무섭구나
나는 이 드라마로 인해 반일 감정과 일본 혐오 의식을 갖게 되었지.
2016년말 어떤 사건으로 북괴의 앞잡이 집단을 경멸하게 되었다..
Chắc phụ nữ hàn quốc bị lính Nhật chơi hết
세상과 시대가 변했어 임마 ㅋ 이런 놈이 반일 불매 운동 어쩌고 하면서 죽창을 들지 ㅉㅉ
부산성과 동래성 위치가 지금의 어디인가요 ?
부산성은 지금의 좌천동 일대와 자성대로 보고있고 동래성은 지금의 동래시장 인근 입니다
.ㅎㅎ
ประเทศเกาหลีใต้ มีดาบยาว ใช้ดาบยาวกันซะส่วนใหญ่
1592년 음력 4월 12일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서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쓰시마 섬 북단의 오우라(大浦)를 출항해 부산에 상륙하였다.
13일에 총공격을 시작으로, 14일에 동래, 15일에 기장, 좌수영, 16일에 양산, 17일에 밀양, 그 후에 대구, 인동, 선산을 차례차례로 공략하고, 26일에 경상도 순변사 이일(李鎰)을 상주에서 격파하였으며, 27일에 경상도를 넘어 충청도로 진군, 탄금대에서 요격 나온 신립(申砬)의 조선군을 괴멸시켜 충주를 공략하였다. 또 경기도로 나아가 음력 5월 1일에 여주 공략 후,
2일에 용진을 거쳐 한성 동대문 앞에 도착한 후, 3일에는 수도 한성에 입성하였다.
7월 16일, 명의 요동군 부총병 조승훈(祖承訓)이 조선에 지원군으로 들어와 일본군이 점령한 평양성을 공격했지만 격퇴했다. 이때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패주하는 명군을 추격해, 명나라군 장수 사유(史儒), 천총(千総) 장국충(張國忠), 마세륭(馬世隆) 등을 죽였다. 29일, 이원익(李元翼)이 이끄는 조선군이 평양성을 공격하지만, 이도 격퇴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세키가하라전투에서 패해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참수당하자마자 요시토시는 기다렸다는 듯이 유키나가의 딸인 고니시 마리아와 이혼하고, 그녀와 그녀가 낳은 아들을 추방했다. 이것은 도쿠가와 정권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여서 자기 영지에 피해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마리아와의 이혼은 더 이상 유키나가의 통제를 받지 않겠다는 뜻이었고, 비정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대마도 다이묘(당주)는 조선어와 일본어를 모두 쓸 줄 알아야 했고, 당주 후계자로 어릴 때 낙점되면 10대 이전부터 조선어 교육을 받았었고, 늦게 낙점된 사람도 바로 조선어 공부를 필사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 그러니 당연히 소 요시토시도 조선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당연히 죽여야 할 대상 중에 요시토시만 차별적 특혜를 줘서 살려둔 것도 조선과의 외교를 위한 선택이었다.
임진왜란 전에 조선 조정이 내려준 소 요시토시의 관직은 예조참의 격이었다고 하는데 현재 직급으로 보자면 차관보 정도로 볼 수 있다. 심지어 1589년 조선을 방문했을 당시에는 창덕궁 인정전에서의 연회 때 선조를 만나 직접 술잔을 올리기까지 하였다.
소 요시토시의 10대손이 바로 일제강점기 덕혜옹주의 남편이었던 소 다케유키 백작이다.
พระราชินีแพ็คเจ การวาดรูปศิลปะ สมัยสุโขทัย จันทบุรี ธนาคารไทยพาณิชย์ เจ้าของคุณพิมพ์เสน่ห์
1:22 4:37 6:25
37세 고니시가 와이리 삭았냐 ㅋㅋ
고니시역 배우 당시 45세
일본 애들도 송상현은 안죽이고 싶었다넹6
총맞으면 바로 즉사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