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강독 - [존재와 시간] 20 현존재의 일상성과 존재 망각 (Sein und Zeit, Being and Time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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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4 дек 2024

Комментарии • 16

  • @donghoshin7180
    @donghoshin7180 4 года назад +1

    감사합니다. 하이데거의 개념은 삶에 적용하기가 용이한 것 같습니다.

    • @philosophyreader
      @philosophyreader  4 года назад

      Dongho Shin 맞습니다 그게 하이데거 철학의 매력입니다 ^^

  • @joji6351
    @joji6351 8 месяцев назад +2

    1
    지난 시간 우리는 각자성과 실존이라고 하는 이 두가지의 성격에 입각해서 현존재를 분석해야 된다고 이야기를 했는데요.
    그리고 이 실존이란 말에는 우리의 어떤 궁극적인 목적에 입각해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라는 그런 지시가 담겨 있다고도 이야기를 했어요.
    그리고 이것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거창한 명제나 이념의 입각해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요.
    정말 평범한 우리의 일상에서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하이데거는 말했습니다.
    오늘도 이어서 계속 읽어보도록 할게요.
    ​66쪽 마지막 문단입니다.
    그런데 이 평균적 일상성이 이 존재자의 존재적 '우선성’[卑近性]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즉, 너무 비근해서], 우리는 현존재의 해명에 있어서 이 일상성을 예나 지금이나 되풀이해서 건너뛰었다. 존재적으로 가장 가깝고 잘 알려진 것은, 존재론적으로는 가장 먼 것, 인식되지 않은 것, 그 존재론적 의미에 있어서는 부단히 간과되고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Quid autem propinquius meipso mihi? [그러나 나에게 있어 나 자신만큼 가까운 것이 있을까요?]라고 묻고, ego certe laboro hic meipso: factus sum mihi terra difficultatis et sudoris nimii [나는 사실 이 문제 때문에 고민 하고 있으며, 더구나 나 자신의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바로 이 나 자신이 많은 땀을 필요로 하는 고난의 밭으로 되어 버린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 말은 현존재가 존재적으로나 전 존재론적으로 불투명하다는 데 대해서만 타당한 것이 아니라, 더 높은 단계의 존재론적 과제, 즉 이 존재자를 현상적으로 가장 가까운 그 존재양식에 있어서 놓치지 않을 뿐더러 적극적으로 성격지우면서 접근할 수 있게 한다는 존재론적 과제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 네. 이 문단은 많은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앞에서 무슨 현존재를 정말 평범한 우리의 일상에서 분석한다고 이야기를 했잖아요. 하이데거가 보기엔 지금까지 모든 인간을 연구하는 그런 연구들이 다 우리의 평범한 삶에서 시작되지 않았는지, 꼭 어떤 이념을 형성하거나 어떤 가치관이나 선입견에 입각해서 인간을 이해하려고 하는지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하자면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라는 그런 선입견을 두고 인간을 바라보고요.
    인간은 존엄한 존재다. 이렇게 생각하고 인간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이 막상 가까운 이런 평범한 일상에서는 왜 시작하려고 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어요.
    여기서 하이데거의 아주 중요한 사유가 나오고 있는데요. 바로 존재적으로 가까운것은 존재론적으로는 멀다 라는 그런 개념입니다.
    이걸 설명하기 전에 제가 하나의 단어에 대해서만 좀 더 설명을 할게요. 앞부분에서 비근하다 라는 말이 나왔죠. 이것은 정말 너무나 가깝다, 너무나 나에게 붙어 있다라는 그런 의미에요.
    이게 하이데거가 앞으로 존재와 시간을 읽을 때 자주 나오는 단어고 저도 이제 비근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할 테니까 여러분들 알아두시길 바라겠어요. 가장 가깝다. 가장 밀접하다. 이게 바로 비근하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존재적으로 가깝다는 말은 비근하다,
    너무나 비근하기 때문에 존재론적으로는 멀다 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자 이제 이 유명한 사유명구를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존재적으로 가까울수록 존재론적으로 멀다는 이런 의미입니다.
    자 저는 안경을 잘 쓰지는 않지만, 안경을 쓰는 사람들 한번 생각해 볼게요.
    평소에 일상적인 우리 삶에서 안경을 쓰는 사람들은 안경을 인식하고 의식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안경의 의미를 전혀 생각하면서 살지 않아요.
    우리가 주제로 삼는 것은 언제나 컴퓨터거나,
    혹은 이렇게 핸드폰 화면이고 혹은 책이기 때문에 그거에 관심이 있지, 컴퓨터나 핸드폰이나 책을 보기 위해서 필요한 이 안경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고 그 의미에 대해서 혹은 주제적으로 관찰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존재적으로 가깝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것이 혹은 어떤 대상이 가깝다는 얘기고 존재론 쪽으로 멀다는 말은 그 대상에 대한 의미를 보통 망각하고나 잊거나 하면서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의 그런 삶의 태도와 이런 모습들 모든것들은 다 우리 부모님에게 물려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여러분들 언제나 부모님에게 감사하면서 부모님의 존재에 대해서 언제나 감동하면서 살고 있나요. 고마움을 느끼면서 살고 있나요 하다못해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의 존재도 없었을텐데 꼭 이것을 생각하면서 부모님께 대하고 있나요? 보통 그렇지 못하죠.바로 존재적으로 가까울수록 존재론적으로 멀다도
    여기에 적용될 수 있어요. 자신의 가족에게 혹은 가까운 친지들에게 대해서 그렇게 얼마든지 대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족이란 이름으로 친구란 이름으로 연인이란 이름으로 그 소중함을
    많이 망각한 채 홀대할때가 많이 있잖아요.
    바로 존재적으로 가까울수록 존재론적으로 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의 소중함과 의미를 많이 놓치고 낯선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람들에게 집중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더 잘 보일려고 할때가 있죠.
    궁극적으로 무엇일까요? 하이데거가 인용한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런 문구에 나와 있듯이 나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는 누구일까요?
    바로 나 자신이겠죠. 그래서 우리는 내가 생각하고 내가 무언가를 먹고 내가 무언갈 입고 내가 무언가를 말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참으로 나란 존재는 나에게 너무나 가까운데, 이것에 대해서 즉 나에 대해서 왜 먹는지 왜 입는지 그리고 왜 살아가는지를 매번 놓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죠. 우리는 매번 생각하지 않죠. 그냥 살아갈 때가 너무나 많이 있죠.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놓치고 있기 때문에 불투명한 나 자신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가져오기 위한 목표와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고 하이데거는 말하고 있네요.

  • @ByungJinKim1
    @ByungJinKim1 3 месяца назад +1

    석가모니도 현존재에 대한 탐구를 하시면서 깨달음을 얻으셨죠. 일상성 얘기하니, 불교와 비슷한 면이 많네요. 석가모니도 결국 관념같은거에 얽매이지 말고 일상을 살아라고 말씀하십니다.

  • @joji6351
    @joji6351 8 месяцев назад +2

    2
    현존재의 평균적 일상성은 그러나 단순히 >외관으로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평균적 일상성 속에도, 비본래성의 양상속에도, 실존성의 구조는 아프리오리하게 놓여 있다. 그런 일상성 속에서도 현존재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문제되고 있는 것은 그의 존재이다. 현존재는 평균적 일상성의 양상, 즉 그 존재에 직면해서 거기로부터 도피하는 양상에 있어서나 그 존재를 망각하는 양상에 있어서, 존재에 대해 태도를 취하고 있다.
    >> 하이데거는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평범한 그런 일상을 그냥 외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바로 이 평범한 일상성. 이것을 다른 말로 비본래 성이라고도 말하고 있는데요.
    이 비본래성에도, 평범한 일상성에도 현존재 인간의 그런 실존적 구조가 언제나 아프리오리 하게 즉 선험적 으로 놓여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아마 제가 앞에 부분에서 왜 소강희씨가 아프리 오리를 선험적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그냥 아프리오리라고 번역했는지는 여러분들께 설명을 드렸을 겁니다.
    현존재에 평균적 일상성에서도 하이데거는
    그의 존재에 대해서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서 언제나 궁금해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될지,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면서 살아야 되는지 고민하면서 산다는 겁니다.
    평범한 일상이니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요. 평범한 일상에도 오히려 그 문제들이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고 말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바로 이런 비본래적인 삶. 평균적 일상성에 입각해 있는 삶의 태도를 보면요.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언제나 도피하거나 그것을 잊어버리는 방식으로
    존재하는데요. 참으로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럴 거 같아요. 모든 사람이 잘 살고 싶어할거 같아요.
    잘 살고 싶다고 하는 그 내용에 있어서는 각자 다르겠지만, 모든 사람들은 정말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가 있고 삶의 모습들이 있고 거기에 비추어서 살아가고 싶을 거예요.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나의 그런 궁극적인 목적에게서 무언갈 선택하고 하나하나 행위해야 되는데 그것을 제대로 하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참 소수에 불과하겠죠. 이 소수에 불과한 평범한 일상에 젖어 사는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하이데거가 안타까워서 이 책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너무 제가 하이데거를 높여 주고 있는것 같네요

  • @최지안-u7r
    @최지안-u7r 4 года назад +1

    유럽철학쪽에 적합하지않은 머리를 가져서 그런지 끝까지 달려왔지만 조금이라도 사변적이면 막 헤매이게 되네요. 경험주의 사고로부터 탈피가 되지않고 특히 독일 하이데거철학은 더 추상적아라 뭔가가시적이지도 딱딱잡히지도 않고 사고의 점프도안되고...하이데거가 실존주의? 현상학에도 들어가는지? 구조주의? 아마도 몇번을 반복해야지만 어렴풋이라도 알수있을것만같네요.
    고맙습니다..

    • @philosophyreader
      @philosophyreader  4 года назад +1

      최지안 동영상 강의의 한계와 부족한 제 설명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ㅠㅠ

    • @philosophyreader
      @philosophyreader  4 года назад +1

      최지안 설명을 덧붙이자면 구조주의는 아닌 것 같아요 단, 후설의 현상학을 받아들여 존재물음(실존)으로 발전시켰다고 보면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아요

  • @starcheol
    @starcheol 2 года назад +1

    근대철학이 인간에 대해 말했다면, 현대철학은 개인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 개인의 독자성과, 고유성과, 자율성과 주체성에 대해 하이데거의 현존재 개념은 탁월한 예시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오늘 강의에서 박사님께서 언급해 주신 것처럼,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소수이고, 많은 사람들은 평균적 일상성 속에서 망각과 도피의 양태 속에서 본래적 의미의 실존을 살지 못합니다.
    1) 이 비본래적 양태의 실존은 과연 개인의 결단의 부족함 때문만일까요? 요즘 말로 하자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 먹고 살기에도 바쁜 사람들, 사회구조가 만들어 놓은 타자들, 또는 제 3세계의 사람들을 비본래적 실존으로 살아간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매우 불공평한 비판이 아닐까요? 이러한 사회불공평 구조 관점에서 (이전 강의에서 제가 이미 제기 했던) 하이데거의 현존재 개념은 일종의 우월의식이나 전체주의를 유발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해 봅니다... 물론 이러한 비판은 하이데거 철학의 일면성만을 바라보고 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요.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현존재 개념은 인간일반에 대한 이해를 위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2) 위의 질문에 근거하여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과 무관한, 일종의 순수철학의 일종이라고 봐도 괜찮을까요? 예를 들어서, 대부분의 순수철학은 마치 기하학처럼 그 시대의 어떠한 역사적 또는 정치적 상황과 관계 없이 시공을 초월하여 읽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역사, 우리의 삶의 현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하이데거는 바로 일상의 철학을 말하면서도, 곰곰이 읽어 나가다 보면, 우리 삶의 치열한 투쟁이나 부조리에 대해서 전혀 무관한, 그저 순수한 실존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는 과거의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도, 그 자신도 형이상학의 방법으로 자신의 존재론을 썼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의 실생활, 실사회의 현상을 배제하고, 그저 인간의 순수실존만을 말하는 듯합니다.
    일 마치고 돌아와 강의 듣는 즐거움으로 하루 하루 보냅니다... 하이데거가 소개하는 현존재의 삶을 살도록 노력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 @philosophyreader
      @philosophyreader  2 года назад +1

      1)과 2) 질문 모두 아직 대답할 단계가 아닙니다. 지금 올리기 시작하는 부분에서 조금 일상적 현존재를 이야기한 정도입니다. 좋은 질문이에요.이 질문거리를 안고 좀 더 읽어보세요.
      지금 제가 답을 말하면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게 됩니다. 선생님은 진중하시니 그 답을 잘 찾으실 것 같아요~~^^

    • @starcheol
      @starcheol 2 года назад +1

      @@philosophyreader조만간 연락을 드린다 하면서도 좀처럼 시간이 되지를 않네요... 저는 매인 몸이라... 꼭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늘 건강하세요.

    • @philosophyreader
      @philosophyreader  2 года назад

      @@starcheol 그럼요~~
      저도 직장생활 경험해서 잘 알아요~~^^
      그런 걱정마시고, 철학함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ㅎ

  • @박근형-i5b
    @박근형-i5b 3 года назад +1

    교수님! 강의를 듣던 도중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겼습니다. 고 중세의 철학의 중심인 존재론이 어떤 계기로 인해 근대 철학에서는 인식론(데카르트, 버클리, 흄 등등..)이 그 중심에 서게 된지 궁금합니다!!

    • @philosophyreader
      @philosophyreader  3 года назад +1

      하이데거가 보기에 고대 존재론의 잘못된 선입견으로 더 이상 담론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근대에 들어서면서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고 신의 권위가 약화 되면서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의문을 삼기 시작하죠.
      이 의문이 인식론의 발달을 가져온 것 같아요.

    • @박근형-i5b
      @박근형-i5b 3 года назад +1

      @@philosophyreader 답변감사합니다! 책 내용 적으면서 공부한다고 이제 반쯤 했는데 하이데거 관련 논문 읽기가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ㅎㅎ 잘 듣겠습니다!

    • @philosophyreader
      @philosophyreader  3 года назад

      @@박근형-i5b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