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상을 보고 나니 넷플의 '러브 데스 로봇' 시즌 1 에피소드 중 지마 블루가 생각이 납니다. 우주의 모습을 정밀히 묘사하던 예술가가 몸을 점점 기계로 교체하면서 그림이 변하기 시작하는데, 그러다 결국 예술가 자신이 몸을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반복노동 로봇으로 해체하는 모습이 '무언가를 묘사'하려던 예술에서 네오아방가르드로 진화하는 부분과 겹쳐 보이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 레디메이드나 로스코 그림과 같은 작품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가 궁금했는데, 의미 자체를 부정하려 한다니 정말 기상천외하고 놀라운 것 같아요. 오히려 이로써 무언가의 대리인이 되는 대명사(pronoun)와 같은 예술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고유명사(proper noun)와 같은 예술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재밌는 생각이네요. 반복적으로 불쑥 엄습한 과거의 경험이 트라우마적 실재에 다가가려는 활동..? 질서의 세계에 균열이 가고 그 틈 사이로 내리쬐는 혼돈의 불안감.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문명에 충격을 받아 깊은 의식 속에 각인된 트라우마. 정확하게 반복되는 이미지는 그러한 트라우마의 발현. 무질서, 공허함, 죽음. 애써 무시하고 배제 왔던 것. 트라우마는 실재를 가리기도 하고 가르키기도 한다. 트라우마는 실재를 엿볼 수 있는 창문.
그간 시청한 영상 중에서 가장 큰 공감이 가는 영상이네요. 마지막 심연 속 자유에 대한 말이 특히 그렇습니다. 혹시 가능하시다면 liminal space에 대해 찾아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인터넷의 서브장르 중 하나인데 과거(보통 어린시절)의 완전한 경험의 엄습을 이보다 잘 표현하는 장르는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낯익은 낯섦이라는 말도 떠오르고... 마치 충코님이 옛날에 먹었던 사탕처럼 리미널 스페이스 사진들은 그 시절의 순간 속에 정체되어 있는데도 생생한 느낌을 재생시켜 주는 느낌이 들어요
와 liminal space 찾아봤는데 아주 어렸을때 봐왔던 가물가물한 기억과 공포까진 아니지만 불편한 느낌이 딱 그거네 ㄷㄷ 신기해서 해외자료 찾아보니 싸이키델 환각성 약물 먹으면 자주 보이는 이미지라네요.. ㄷㄷ 아마도 DNM이 발동되면 보이는 보이는 공간인 것 같네요. 어쩌면 플라톤이 한말이 맞을수도.. 태어날때(DNM)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성장하면서 잊어버린다(DNM 발동X)
저도 그 사탕과 같은 어릴적 기억이 있는데 저는 그 대상이 사탕이 아니라 체리 무늬가 있는 교과서의 cover sheets 이었는데 어떤 장소에서 우연히 그 체리 무늬의 종이를 발견하면 저를 과거로 데려 가는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딱히 심리적으로 트라우마가 있는 것도 아닌데 충코님의 그 사탕과 같은 느낌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제일 체감되는 개인적인 트라우마는 인터넷 중독 같네요. 저한테 실재는 우주인것 같음. 제가 느낀 바로는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의 대조가 이 영상에서 많이 다뤄진것 같은데. 진짜 실재란 우리가 인지하는 것보다 더 크지 않을까요? 당연한 소리일수도... 우주 + 우주 밖의 세상, 그리고 그 것들 속의 모든 미시세계속의 개념과 물질들..(?) 그리고 그 외? 실재라는건 너무 커서 생각하기도 힘든게 진짜 실재가 아닐까요. 기독교인으로써 실재는 하나님이다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실재와 하나님이 같은 개념일지 아닐지 모르겠고 아직 다 일관적으로 확실히 이해되진 않네요.
현대예술이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는 표현"이라면 이것을 해석하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만약 설사 어떤 작가가 자신의 그림이나 조각을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 방향으로 표현을 했음에도, 사람들이 어떤 치유적인 경험을 하거나 아름다움을 느끼거나 하는 의미나 경험을 갖게 된다면 그것은 그 예술이 의미를 갖는 수단이 되는 것인데, 그런 현상은 어떻게 봐야할까요. 작가는 자신이 내놓은 "무의미"가 관객이 어떠한 의미나 경험을 갖도록 의도하는 것 일까요, 아닐까요? 만약 그것이 의도라면 애초에 그 예술품은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없는 건 아닐까요? 한 가지 더, 앤디 워홀의 초반 작업은 반복된 이미지를 썼지만 자신의 유명세가 꺾일 즈음 바스키아와 협업하면서 실크 스크린이 아닌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면서 반복된 이미지를 버렸습니다. 또한 게이나 드렉 퀸 등을 그리면서 자신의 억압된 성정체성을 표출하기도 했고요. 주변 사람들이 에이즈로 죽어가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가면서 말년에는 종교에 점점 빠져 종교와 관련된 이미지를 주로 그리게 됩니다. 그리고 앤디 워홀 그 자신은 '캠벨 스프'와 '마를린 먼로'로만 기억되고 유명해지는 걸 혐오했습니다. 유명세는 최고였지만 주류 미술계와 비평가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신감과 자존감도 무척 낮아서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들을 하기도 하고요. 그렇다고하면, 재현과 의미가 없다는 현대미술의 핵심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 모든 '트라우마', '실재', '라깡' 이론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앤디 워홀의 커리어 초반 부분만 설명이 가능한 반 쪽 짜리 이론인 걸까요?
동감합니다. 의미의 해체를 의도 한거면 그게 작가가 나타내고자 하는게 아닐까요. 절대적인 의미를 해체한다면서 정작 작품은 관객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절대적인 무언가로 상정한 예술사조인듯...😮 인간이 총체적인 실재를 알수없는 감각적 인지적 한계에 있는것은 주어진 운명이지만 .. 그것이 트라우마적 재현의 방법으로 표현되는것은 쨌든 비극적인 측면이 아닐수 없네요...
의미찾기는 어디까지나 상징계적 질서내에서의 일일 뿐이죠. 이 영역을 넘어서면 의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닌게 됩니다. 사람들이 해석하려고 드는 행위도 이 상징계적 질서를 벗어날 수 없을 뿐아니라 시대적으로도 episteme라고 불리는 이 강력한 영향력에 지배받고 있기 때문이겠고요... 그냥 배운대로, 생각하는 대로... 아니 생각이 지배 당한대로... 습관적으로 나름 의미를 부여하려드는 것일 테고요... 일종에... 부질없는 관성이라는 생각이...
1. 어릴 적 몸에 안 좋은 사탕을 먹는다고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 2. 사탕을 옆에 친구들하고 나누지 않고 혼자 몰래 먹은 적이 있어 깊은 죄책감이 있었다. 3. 어른이 되어 사탕의 달콤함을 이기지 못하고 몸에 안 좋은 사탕에 다시 중독될가봐 두렵다. 4. 사탕사는데 많은 지출이 있어 용돈관리가 잘 안되었다. 5. 사탕을 마음대로 사 먹지 못할 정도로 용돈을 아껴야 했고 그 가난이 다시 올가봐 두렵다 6. 나는 지금 이렇게 철학도로 많이 성숙했는데 사탕을 좋아하던 미숙한 시기를 생각하기도 너무 싫다. 7. 이것이 제일 중요한데요,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고 있고 내가 많은 사람들의 중심부에 있다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유년시기에는 친구관계 등에서 리더가 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고 항상 변두리(을) 위치에 있다는 자괴감이 있었다. 따라서 지금이 너무 만족스럽고 너무 행복한데, 유년시절의 무의식중에 자리잡고 있는 자괴감으로 명예와 성취와 위치가 공중분해될가 그래서 소스라칠정도로 두렵다 8. 지금까지 성장하는 과정에서 세계관과 가치관의 변화가 심했다. 가치관이 유아에 형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이 아닌 그 전것들에 유아시기가 포함되어 느껴진다
오늘 "실재의 귀환"을 잠시 읽었는데 무슨 우연인지 충코님이 올리신 영상이 같은 내용을 담고있네요. 혹시 나중에 기회가되신다면 라캉의 '응시'에 관한 의견을 담은 영상 올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리고 할 포스터의 사진은 잘못된 분의 사진을 가져오신것 같습니다. 이분이 맞는 분입니다. en.wikipedia.org/wiki/Hal_Foster_%28art_critic%29
충코님 영상 잘 보았습니다. 저는 충코님이 보시는 질서와 실재의 관계를 정반대로 보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실재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삶이며, 질서 속에 놓여있는것은 죽음이라고 느껴집니다. 물론 질서를 구축해나갔던 세대(첫 눈을 밟은 세대)의 삶은 생명으로 가득차있었겠지만, 지금 저희에게 남은건 그들이 남겨둔 부산물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저는 질서에 몸을 바치는 삶 자체를 경멸하진 않습니다. 다만 질서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무언가 생성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무책임하다고 느껴집니다. 전자와 후자의 삶의 태도는 굉장히 다른 것 같습니다.
13:40 "붙잡히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깊은 실재"라는 말은 종교적으로 들리네요. 신과 다른게 하나도 없어요. 이것이 제가 철학을 싫어하는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을 싫어하는 이유입니다. 현실 경험에 대해서 그토록 부정적이면서 기대는게 상상속의 실재 그것도 잡을수없고 이해할 수 없는것이라는게 철학이 얼마나 공허하게 만듭니까. 포스트모더니즘을 진지하게 사유한다는건 아이언맨 수트의 관절 디자인과 헐크를 만드는 화학약품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럽네요
무엇이 달라진다는 것인지는 그걸로 대답되었다하자 그럼 어떻게 달라진다는 것인가? 관점과 생각이 직접 변하는 것인가 관점과 생각이 실재와 맺는 관계가 변하는 것인가? 다시 돌아가서 실재가 관점과 생각에 달려있다는 말은 또 하나의 실재에 대한 단정이라는 지적을 피할 수 있는가? 그 정도로 그 관점과 생각을 모호하게 규정할 것이라면 애초에 아무것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 것과 다른게 없을 것이다.
🔮 A trauma is not just an involuntary remembrance of fast event. It is the exact replay of the past incident. If you are not the part of exact replay, it's just an involuntary remembrance or recollection, not a trauma.
지금 단 41초까지 듣고 구독했습니다. 멘트에 확 몰입이 되네요
언제들어도 차분하고 좋은 목소리와 말씨입니다. 오늘도 잘 듣고 갑니다.
미학 재생목록의 마지막 영상이네요. 어렵지 않고 재미있게 (특히 발음 너무 좋으심!!!) 풀어낸 것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계속 업데이트 해주세요! 고맙습니다 :)
이 영상을 보고 나니 넷플의 '러브 데스 로봇' 시즌 1 에피소드 중 지마 블루가 생각이 납니다. 우주의 모습을 정밀히 묘사하던 예술가가 몸을 점점 기계로 교체하면서 그림이 변하기 시작하는데, 그러다 결국 예술가 자신이 몸을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반복노동 로봇으로 해체하는 모습이 '무언가를 묘사'하려던 예술에서 네오아방가르드로 진화하는 부분과 겹쳐 보이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 레디메이드나 로스코 그림과 같은 작품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가 궁금했는데, 의미 자체를 부정하려 한다니 정말 기상천외하고 놀라운 것 같아요. 오히려 이로써 무언가의 대리인이 되는 대명사(pronoun)와 같은 예술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고유명사(proper noun)와 같은 예술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용 너무 좋네요.
일요일 아침을 위한 완벽한 영상.. 이게 구원이라면 구원이네요. 갑자기 모든 할 일 이전의 내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느낌.
실재의 귀환을 읽어보려고 했는데 마침 영상이 딱!
호! 찾아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엄청 정보 밀도가 높은 내용인것 같았네요. 재밌는 영상이었습니다.
너무 재밌는 생각이네요. 반복적으로 불쑥 엄습한 과거의 경험이 트라우마적 실재에 다가가려는 활동..? 질서의 세계에 균열이 가고 그 틈 사이로 내리쬐는 혼돈의 불안감.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문명에 충격을 받아 깊은 의식 속에 각인된 트라우마. 정확하게 반복되는 이미지는 그러한 트라우마의 발현. 무질서, 공허함, 죽음. 애써 무시하고 배제 왔던 것. 트라우마는 실재를 가리기도 하고 가르키기도 한다. 트라우마는 실재를 엿볼 수 있는 창문.
그간 시청한 영상 중에서 가장 큰 공감이 가는 영상이네요. 마지막 심연 속 자유에 대한 말이 특히 그렇습니다.
혹시 가능하시다면 liminal space에 대해 찾아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인터넷의 서브장르 중 하나인데 과거(보통 어린시절)의 완전한 경험의 엄습을 이보다 잘 표현하는 장르는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낯익은 낯섦이라는 말도 떠오르고... 마치 충코님이 옛날에 먹었던 사탕처럼 리미널 스페이스 사진들은 그 시절의 순간 속에 정체되어 있는데도 생생한 느낌을 재생시켜 주는 느낌이 들어요
와 liminal space 찾아봤는데 아주 어렸을때 봐왔던 가물가물한 기억과 공포까진 아니지만 불편한 느낌이 딱 그거네 ㄷㄷ
신기해서 해외자료 찾아보니 싸이키델 환각성 약물 먹으면 자주 보이는 이미지라네요.. ㄷㄷ 아마도 DNM이 발동되면 보이는 보이는 공간인 것 같네요.
어쩌면 플라톤이 한말이 맞을수도.. 태어날때(DNM)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성장하면서 잊어버린다(DNM 발동X)
@@ghdwpdi 플라톤의 철학이 인용되는게 흥미롭네요...!
저도 그 사탕과 같은 어릴적 기억이 있는데 저는 그 대상이 사탕이 아니라 체리 무늬가 있는 교과서의 cover sheets 이었는데 어떤 장소에서 우연히 그 체리 무늬의 종이를 발견하면 저를 과거로 데려 가는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딱히 심리적으로 트라우마가 있는 것도 아닌데 충코님의 그 사탕과 같은 느낌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제일 체감되는 개인적인 트라우마는 인터넷 중독 같네요.
저한테 실재는 우주인것 같음. 제가 느낀 바로는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의 대조가 이 영상에서 많이 다뤄진것 같은데. 진짜 실재란 우리가 인지하는 것보다 더 크지 않을까요? 당연한 소리일수도... 우주 + 우주 밖의 세상, 그리고 그 것들 속의 모든 미시세계속의 개념과 물질들..(?) 그리고 그 외?
실재라는건 너무 커서 생각하기도 힘든게 진짜 실재가 아닐까요.
기독교인으로써 실재는 하나님이다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실재와 하나님이 같은 개념일지 아닐지 모르겠고 아직 다 일관적으로 확실히 이해되진 않네요.
현대예술이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는 표현"이라면 이것을 해석하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만약 설사 어떤 작가가 자신의 그림이나 조각을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 방향으로 표현을 했음에도, 사람들이 어떤 치유적인 경험을 하거나 아름다움을 느끼거나 하는 의미나 경험을 갖게 된다면 그것은 그 예술이 의미를 갖는 수단이 되는 것인데, 그런 현상은 어떻게 봐야할까요. 작가는 자신이 내놓은 "무의미"가 관객이 어떠한 의미나 경험을 갖도록 의도하는 것 일까요, 아닐까요? 만약 그것이 의도라면 애초에 그 예술품은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없는 건 아닐까요?
한 가지 더, 앤디 워홀의 초반 작업은 반복된 이미지를 썼지만 자신의 유명세가 꺾일 즈음 바스키아와 협업하면서 실크 스크린이 아닌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면서 반복된 이미지를 버렸습니다. 또한 게이나 드렉 퀸 등을 그리면서 자신의 억압된 성정체성을 표출하기도 했고요. 주변 사람들이 에이즈로 죽어가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가면서 말년에는 종교에 점점 빠져 종교와 관련된 이미지를 주로 그리게 됩니다. 그리고 앤디 워홀 그 자신은 '캠벨 스프'와 '마를린 먼로'로만 기억되고 유명해지는 걸 혐오했습니다. 유명세는 최고였지만 주류 미술계와 비평가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신감과 자존감도 무척 낮아서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들을 하기도 하고요. 그렇다고하면, 재현과 의미가 없다는 현대미술의 핵심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 모든 '트라우마', '실재', '라깡' 이론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앤디 워홀의 커리어 초반 부분만 설명이 가능한 반 쪽 짜리 이론인 걸까요?
동감합니다. 의미의 해체를 의도 한거면 그게 작가가 나타내고자 하는게 아닐까요. 절대적인 의미를 해체한다면서 정작 작품은 관객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절대적인 무언가로 상정한 예술사조인듯...😮 인간이 총체적인 실재를 알수없는 감각적 인지적 한계에 있는것은 주어진 운명이지만 .. 그것이 트라우마적 재현의 방법으로 표현되는것은 쨌든 비극적인 측면이 아닐수 없네요...
불교의 사상이 퍼뜩 생각납니다. 한없는 윤회 끝에 도달하는 무아의 경지. 우연의 일치일까요.
의미찾기는 어디까지나 상징계적 질서내에서의 일일 뿐이죠. 이 영역을 넘어서면 의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닌게 됩니다. 사람들이 해석하려고 드는 행위도 이 상징계적 질서를 벗어날 수 없을 뿐아니라 시대적으로도 episteme라고 불리는 이 강력한 영향력에 지배받고 있기 때문이겠고요... 그냥 배운대로, 생각하는 대로... 아니 생각이 지배 당한대로... 습관적으로 나름 의미를 부여하려드는 것일 테고요... 일종에... 부질없는 관성이라는 생각이...
역시 현대미술은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일반인들에게서 멀어질수밖에 없는것같아요. 다시 고전주의로 돌아가길 바래봅니다..
좋은 영상 잘 봤습니다.
앤디워홀의 스타일을 한층 더 깊이 알아가는거 같네용
왜 항상 라깡의 이론이라고 엮여지는거는 초기 이론들 몇개밖에 없는걸까
잘보고갑니다. 참고문헌 표시가 있다면 더 좋겠습니다.
1. 어릴 적 몸에 안 좋은 사탕을 먹는다고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
2. 사탕을 옆에 친구들하고 나누지 않고 혼자 몰래 먹은 적이 있어 깊은 죄책감이 있었다.
3. 어른이 되어 사탕의 달콤함을 이기지 못하고 몸에 안 좋은 사탕에 다시 중독될가봐 두렵다.
4. 사탕사는데 많은 지출이 있어 용돈관리가 잘 안되었다.
5. 사탕을 마음대로 사 먹지 못할 정도로 용돈을 아껴야 했고 그 가난이 다시 올가봐 두렵다
6. 나는 지금 이렇게 철학도로 많이 성숙했는데 사탕을 좋아하던 미숙한 시기를 생각하기도 너무 싫다.
7. 이것이 제일 중요한데요,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고 있고 내가 많은 사람들의 중심부에 있다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유년시기에는 친구관계 등에서 리더가 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고 항상 변두리(을) 위치에 있다는 자괴감이 있었다.
따라서 지금이 너무 만족스럽고 너무 행복한데, 유년시절의 무의식중에 자리잡고 있는 자괴감으로 명예와 성취와 위치가 공중분해될가 그래서 소스라칠정도로 두렵다
8. 지금까지 성장하는 과정에서 세계관과 가치관의 변화가 심했다. 가치관이 유아에 형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이 아닌 그 전것들에 유아시기가 포함되어 느껴진다
어느정도 이해가 가네요
오늘 "실재의 귀환"을 잠시 읽었는데 무슨 우연인지 충코님이 올리신 영상이 같은 내용을 담고있네요. 혹시 나중에 기회가되신다면 라캉의 '응시'에 관한 의견을 담은 영상 올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리고 할 포스터의 사진은 잘못된 분의 사진을 가져오신것 같습니다. 이분이 맞는 분입니다. en.wikipedia.org/wiki/Hal_Foster_%28art_critic%29
ㅋㅋㅋㅋ두 사람 너무 닮아서 제가 착각한 것 같아요...ㅠ
@@chungco_phil 아유ㅋㅋ아...탈모라고 다 똑같은 사람아니라구요ㅋㅋㅋ
그 사탕이 아마도 충코님의 로즈버드였나 보군요
충코님 영상 잘 보았습니다. 저는 충코님이 보시는 질서와 실재의 관계를 정반대로 보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실재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삶이며, 질서 속에 놓여있는것은 죽음이라고 느껴집니다. 물론 질서를 구축해나갔던 세대(첫 눈을 밟은 세대)의 삶은 생명으로 가득차있었겠지만, 지금 저희에게 남은건 그들이 남겨둔 부산물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저는 질서에 몸을 바치는 삶 자체를 경멸하진 않습니다. 다만 질서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무언가 생성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무책임하다고 느껴집니다. 전자와 후자의 삶의 태도는 굉장히 다른 것 같습니다.
Nihilism 이 “허무주의”로 오번역된개 애석할 뿐이에요. 찐이 아닌 의마채계를 철저히 부정한다는건 가장 용기가 필요한데.. real 은 ‘실재’보자 ”찐“ 이 더 다가오죠. 철학은 번역체가 젤 문제인듯…
예술에 조예도 깊으시고 멋지삼..
무의식중의 반응은 신비로운 영역이 아니라 후천적경험과 선천적으로 내려받은 유산일 뿐이다
와....
어렵네..
설마 제가 라깡 해달라고 해서?
무섭다
어려워 🛌
워홀 자신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는데 이것 또한 굳이 의미를 부여해 버리는 사람들… 이 자체가 아이러니
13:40 "붙잡히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깊은 실재"라는 말은 종교적으로 들리네요. 신과 다른게 하나도 없어요.
이것이 제가 철학을 싫어하는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을 싫어하는 이유입니다.
현실 경험에 대해서 그토록 부정적이면서 기대는게 상상속의 실재 그것도 잡을수없고 이해할 수 없는것이라는게 철학이 얼마나 공허하게 만듭니까.
포스트모더니즘을 진지하게 사유한다는건 아이언맨 수트의 관절 디자인과 헐크를 만드는 화학약품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럽네요
실재는 공허의 영역이라는 것이 공감이 안가네요. 전 정반대로 받아들이거든요. 제게 실재라는 단어는 풀어쓰면 지금 여기 살아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뒤샹은 미술평론가들 엿먹어봐라 하고 변기를 내놓았다고 했는데...ㅎㅎ
후기구조주의와 현대 미술은 종종, 칸트 철학을 저렴하게 변주하고 있고 또 무에 대한 얕은 이해를 가지고 자기 파괴적 호기심으로 접근하는 지적 낭비처럼 느껴집니다.
그러한 텍스트만 접하신게 아닐까요
실재를 너무 단정적으로 말하네. 실재는 바라보는 관점과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좌파식 사고방식이네요 존중합니다
@@yeongjunsang 뜬금없이 좌파라고 하는 수준ㅋㅋ
적중은 했나 보다 👀
@@yeongjunsang 확실한건 너가 일간베스트쪽이란 거지
무엇이 달라진다는 것인지는 그걸로 대답되었다하자 그럼 어떻게 달라진다는 것인가? 관점과 생각이 직접 변하는 것인가 관점과 생각이 실재와 맺는 관계가 변하는 것인가?
다시 돌아가서 실재가 관점과 생각에 달려있다는 말은 또 하나의 실재에 대한 단정이라는 지적을 피할 수 있는가? 그 정도로 그 관점과 생각을 모호하게 규정할 것이라면 애초에 아무것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 것과 다른게 없을 것이다.
🔮 A trauma is not just an involuntary remembrance of fast event. It is the exact replay of the past incident. If you are not the part of exact replay, it's just an involuntary remembrance or recollection, not a trau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