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 NO. 창조일 수 밖에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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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9 фев 2025
  • 자! 한번 눈을 감아보자. 그리고 창세기 1장1절로 한번 가보자. 6,000년 보다 오래 된 그 때로 같이 가 보자. 모세와 함께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여러분이 서 있다.
    우리는 지금 태초에 와 있다. 눈을 들어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단지 한 분, 창조주 하나님이 그 곳에 계신다. 그 하나님이 온 우주를 만드시고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다. 이 엄청난 광경을 보고 우리는 이렇게 기록을 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지구는 아무 형태도 없이 텅 비어서 흑암에 싸여 있다. 빛은 없고 무저갱과 같은 깊은 어둠만이 가득하다. 그런데 그 곳에 하나님의 영, 즉 성령님이 수면 위에서 알을 품고 있듯이 이리저리 창조를 위한 활동을 하고 계시는 모습이 보인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빛이 있으라’. 참으로 놀랍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그 흑암에 싸여 있던 혼돈 상태의 지구에 빛이 비추이기 시작한다. 빛이란 존재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이 지구에 빛이 비추이자 어둠은 사라지고 빛이 충만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자! 이제 눈을 떠 보자. 여러분이 이 광경을 눈으로 목격했다면 그 장면을 글로 기록하는데 문제가 있을 수가 없다. 잠깐 눈을 감고 6,000년 전으로 돌아갔는데 그 천지창조의 모습의 잔상이 우리의 뇌에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 가운데 글재주가 없는 사람이라면 약간 어렵기는 하겠지만, 모세는 당시 고대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이집트 나라의 궁정에서 40여년을 황제 수업을 받은 왕자이다. 이런 금수저 출신의 모세가 눈으로 직접 천지창조의 순간을 목격했으니 글로 옮겨 적는데는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이 창세기의 기록은 허구나 신화가 아닌 진짜 발생했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이제 모세는 천지창조의 그 감격의 순간부터 아담과 하와의 시대를 비롯하여 노아의 홍수, 바벨탑 사건 등을 일필휘지로 기록해 나간다.
    이제 본문으로 가 보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
    ‘태초에’는 히브리어로 ‘베레쉬트’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시간적인 의미에서 ‘첫째, 최초’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주 창조의 첫 번째 시간을 뜻한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인류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관하여 탐구를 해 왔다. 하지만 어떤 종교에서도 우리가 속한 이 지구를 포함한 엄청난 우주를 누가, 언제 창조하였는지에 관해 구체적으로 진술한 기록은 없다. 물론 신화를 보면 창조에 관한 내용이 기록이 되어 있으나 기술 방식을 볼 때 전혀 터무니없는 그야말로 어린이의 동화와 같은 그런 내용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성경은 맨 앞장 맨 앞구절에 이렇게 참으로 간단하게 선포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간단 명료하다. 이보다 더 간단할 수는 없다. 이보다 더 고민이 안되는 쉬운 이해 방법도 없다.
    이 말씀을 본 우리는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창세기 1장1절은 우리들에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창조론과 어쩌다 보니 저절로 생겼다는 진화론, 즉 유신론과 무신론이다.
    우리 가운데 혹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갖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믿으려고 노력을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믿음이 좋아서 동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진짜 인생의 의미를 심각하게 고민해 본 사람은 저 작은 꽃을 비롯하여 땅 속에 있는 지렁이도 분명 창조자가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으며, 어쩌다 보니 저절로 진화가 되었다는 진화론을 믿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밤 하늘을 보면 별 중에서 가장 빛나는 북극성을 볼 수 있는데 그 별빛은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 즉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열심히 출발하여 500여년이 흐른 후 지구에 도착한 별빛이다. 가장 가까운 이런 별도 빛의 속도로 500여년이나 달려와야 우리의 눈에 관측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참으로 광대한 우주에 비하면 먼지와도 같은 조그맣고 조그만 이 지구의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는 참으로 교만하고 신성모독적인 말을 해댄다.
    인생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가 복음을 전해주지 않았을지라도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을 가질 것이다. 진정으로 고민을 하며 도를 찾는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갖지 않기가 훨씬 어렵다.
    물컵은 물을 담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눈 앞에 있는 물컵을 보며 물컵이 저절로 생겼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시계가 어쩌다 보니 생겨났고 수천만년 바람이 불고 지진이 나서 초침이 자동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믿는 것은 정말이지 어렵다.
    자동차가 수억만년이 지나다 보니 어쩌다 조립이 되었고 기름이 채워져 시동이 걸리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어마어마한 믿음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과학이 발달해 보니 들에 핀 들꽃 하나도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 보다 훨씬 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자동차는 안에 어떤 부품이 있는지 다 알지만, 과학자들은 아직도 들꽃에 투입된 그 많은 부품들을 다 알지 못하고 있다. 하물며 이보다 훨씬 복잡한 사람이 저절로 진화가 되었다고 믿는 다는 것은 태산을 옮기는 것보다 더 위대한 믿음을 필요로 한다.
    나는 비교적 감정적이지 않고 이성적인 사람이기에 핀 꽃이 창조주 없이 어쩌다 보니 생겼다는 것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나는, 어쩌다 보니 저절로 좋은 방향으로 진화가 되었다는 이런 것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나는 이런 어려운 내용을 믿는 것은 포기한다.
    그리고 이것 보다 훨씬 믿기 쉬운 이 말씀은 나는 믿는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 참으로 대단한 발견이다. 참으로 믿을만한 든든한 말씀이다.
    들에 핀 아주 조그만 야생화를 바라보다가 이 창세기 1장1절 말씀이 나에게 들린다. 그 때 나는 바지 허벅지를 ‘탁’하고 치면서 소리친다. ‘아! 그러면 그렇지. 어떻게 저절로 세상이 생기고 저절로 꽃이 피어나며 내가 태어났겠어? 틀림없이 누군가가 창조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구나’
    창세기 1장1절은 우리들에게 유신론과 무신론이 다 같이 신앙이고 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결과는 달라진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창세기 1장1절에서 판가름이 난다. 우주는 지구를 위해 만들어졌다. 지구는 동물과 식물을 위해 만들어졌다. 동물과 식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다. 즉, 온 우주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 우주의 중심이다. 이 광활한 우주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선물인 것이다.
    이 우주의 중심은 바로 우리들이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질문에 여러분은 답을 해야 한다. 온 우주가 만들어진 최종 목적이 우리를 위함이었다면, 우리는 과연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는가? 인류의 초기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이 알고 싶어했던 그 질문이다. 나는 왜 이 땅에 태어났고,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으며, 죽은 후에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거기에 대한 해답을 이사야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물컵에는 물을 담기 위해 만들어졌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 지어진 사람들이므로 우리 일생이 하나님을 찬송할 때 지으신 목적에 부합된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 거기에 아무리 재물을 채운다 하여도, 명예나 육신적인 쾌락을 채운다 할지라도 만족할 수가 없다. 왜냐면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 지어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창조된 백성들이다.
    #창조론 #진화론 #창조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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