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그래서 결국엔 조선후기에 이르러 조총, 즉 아케부스를 전세계에서 가장 잘 다루는 나라가 되었다. 물론 그 쯤 되어선 다른 나라들은 스프링이 결합된 방아쇠, 장전, 격발장치 와 탄알 그리고 머신건까지 실전에 쓰고있었지만 말이다. 나라가 발전이 없었단 거다. 기술이라는게 물건 하나 만든다고 땡이 아니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지 싶다.
@@jmsunny1437 전쟁 무기가 전쟁때문에 발전한다고 생각하냐? 전쟁 무기의 발전은 과학과 산업 기술의 발달이 촉진하는거다. 아프리카가 100만년 전쟁을 해도 거대 무기 제조사를 가질 수 없고 한국이 100만년 북한과 대립을 해도 보잉사를 가질 수는 없다. 너의 논리 대로면 전세계에서 가장 무기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국가는 스웨덴이고 전세계에서 가장 무기가 발달한 국가는 시리아야. 지난 70년 사이에 중동 전쟁 1차 2차 3차 4차 를 했고 시리아 내전과 ISIS있다. 하지만 실제는 스웨덴은 세계적인 방산국가고 시리아는 단지 전쟁터일 뿐이야.
그게 문제가 아니라 조선 기마병 숫자보다 여진족 기마병 숫자가 존나 많았죠 상대적으로 적었던 조선기마병들한테는 일본조총병들이 초반에는 먹혔는데 우리보다 몇배는 많은 여진족 기마병들은 확실히 수준이 달랐던거죠 그리고 조선북쪽과 여진족 주전장은 평지였습니다 험지가 많은 조선땅에서는 매복전술이 먹히지만 평지가 많은 북쪽에서는 기마병이 유리했죠
활을 들고 총을 들엇스나 전력화에 실페 한 총이지요 너무 총에만 의지한 전략이니까요 저 총은 한번 쏘면 장전에 시간이 만이 걸림니다 또한 쏘아도 명중륭이 매우 낮습니다 총의 위력이 생ㄱ각보다 약하다는 것이지요 즉총성은 커서 조치만 명충륙 낮고 장정에 시간이 만이간다 적이 그것을 안다면 치명적인 약점에의해 아군의 전멸이겟지요~~~~당현 하게도 적은 그 약점을 이해 하고 있으며 조선군을 전멸 시켯구요
전쟁은 장난이 아님니다 죽이느냐 죽느냐 잡아 먹느냐 잡아 먹희느냐 임니다 튀어난 지휘관과 판단력은 적을 잡아 먹지만 어리석은 지휘관은 잡아 먹힘니다 아무리 무기가 조아도여 ~~총의 군대 만들고 총의 취약점을 약한 부분을 보강하지 안코 전쟁에 나아 같지요 ~~~그당시 지휘 체계와 ((지휘 체계라 함은 자신의 지인이라 하여 어리석은 자를 지휘관에 안치는 것 이지요))그리고 그 지휘관이 누구 인지 모르나 어리석은 자가 분명하다 하겟지요
나선정벌 때 조선군이 러시아 탐험대 를 상대로 이기고 러시아 탐험대 의 머스켓총을 노획했는데 청나라 에게 상납하게되어 구식 심지식 화승총 으로 밖에 못 머무름 청나라 는 17세기 머스켓식 총을 사용하고 또 이후에 서양나라 들을 통해 들어온 개량형 소총들을 가지게 되었어요
'궁시로는 조총에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이 왜란초 전투를 경험한 장수들의 결론이였습니다. 잘만 싸운게 아니라 원거리 전투에서 화약무기와 성능 좋은 활로 조선군이 누려온 전술적 우위가 조총으로 거의 상쇄되어버려 악전고투를 했습니다. 다만 당시 일본군에서 조총 포수의 비중이 그렇게 크지 않았고 조선군도 활만 사용한게 아니라 승자총통 계통의 개인 화기와 그외 각종 화기를 운용해 어느정도 대적이 가능했던거 뿐입니다. 조총 사거리가 50미터라는 의미는 조총 탄환이 50미터 밖에 못날아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원형의 탄환이 무회전으로 날아가는 조총 탄환의 특성으로 인해 공기 저항으로 궤적이 불안정하여 50미터 이상 날아가면 조준한 지점에서 완전 벗어난 곳으로 탄환이 날아가 명중률이 떨어졌기 때문에 50미터까지 다가가서 쏘았던 겁니다. 실제 조총의 발사 에너지는 현대 소총과 비슷한 수준이라 단순히 총알이 날아갈 수 있는 사거리는 수백미터에 달했습니다. 조선 후기 전술 지침을 보면 '적이 100보 이내로 다가오면 총을 쏘고, 적이 90보 이내로 다가오면 활을 쏜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실제 사거리는 조총이 당시 조선군이 사용하던 활보다 더 길었기에 나온 전술입니다.
@@miju-wt1cr 화승총이 전장에서 널리 쓰인 결정적인 이유는 활보다 사거리가 길어서가 아닙니다. 활은 갑옷이나 방패로 쉽게 막을 수 있었지만 화승총과 같은 화약무기는 그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된 철제 갑옷을 갖춘 무사에게 활은 큰 위협이 못되었지만 그런 무사도 화승총 탄환에는 속수무책이였지요. 일본도 똑같은 이유로 조총을 사용했습니다. 전국시대 일본은 중무장한 무사들이 선봉에 서서 적진으로 돌진하는 전술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그런 중무장한 무사를 활로 제압할 수는 없었지만 조총은 단 한방으로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도 비슷한 이유로 건국 초기부터 화약무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조총보다 더 구식인 핸드고네류 무기만으로도 활로는 도저히 제압할 수 없었던 적을 능히 제압해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핸드고네에 불과한 승자총통을 두고 천하를 평정할만한 무기라고 호들갑까지 떨었습니다. 사거리는 화승총을 채택하는 이유가 아니였습니다. 18세기 유럽, 전열보병 시대조차 머스킷 운용 전술은 적의 눈동자가 보일 정도로 바싹 다가가서 일제 사격하는 것이였습니다. 수백미터의 사거리를 보였던 롱보우나 쇠뇌를 이용하던 유럽인들이 이런 무기를 버리고 머스킷으로 완전히 갈아탔던건 머스킷이 활보다 사거리가 길어서가 아니였음을 보여줍니다.
@@Kwinter 전투에 숙련자 투입하지 새내기 투입하나 징용병이라도 숙련시켜 투입시키는거지 조총도 마찬가지고 저 시기 왜의 조총부대는 주력부대 아니고 극히 부분적으로 쓰였고 시중에 알려진것 처럼 3단계 전법 같은건 있지도 않은 뻥티기 소설속에나 등장하는 일본의 거짓말임
추가로, 시종일관 활 VS 조총 이렇게 비교하는데 조선이 조총으로 대처하려 한건 활이 아니라 그 이전까지 조선의 주력 화기로 사용하던 승자총통입니다. 조선은 건국초부터 핸드고네 형태의 소형 총통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왔습니다. 매체에서 이걸 제대로 묘사한 경우가 거의 없어서 조선 전기엔 대형 화포와 활만 쓴거처럼 오해할 수 있지만 조선은 대형 화포 보다는 오히려 핸드고네 형태의 다양한 개인화기를 더 많이 사용했고 이것은 전술적으로 조선군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습니다. 기마술과 궁술에 뛰어난 여진족을 상대하면서 이런 핸드고네들을 대량 운용한다는건 조선군이 가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점이였기 때문입니다. 니탕개의 난 때도 조선군의 승자총통이 인상적인 활약을 해서 신립은 승자총통의 위력을 극찬했고, 조정은 뒤늦게 승자총통을 개발한 김지 장군을 포상했습니다.(당시 김지는 이미 고인이 된 뒤였다고 합니다. 사후에 빛을 본 셈) 승자총통과 비교해선 조총이 모든면에서 우월했기에 승자총통을 대체할 차세대 화기로 조총을 도입했던 겁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조총은 활을 전장에서 퇴출 시킨 것이 아니라 궁수와 포수가 조합되는 삼수병 체제가 도입되어 오랜 기간 병용되었습니다. 활+승자총통 에서 활+화승총 으로 바뀐거죠. 그리고 조총은 조선으로선 가성비 좋은 무기가 결코 아닙니다. 화약의 재료인 유황과 염초는 조선 중기까지 거의 대부분을 명나라로부터 수입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국궁의 재료인 물소뿔 수입보다 나은 점이 없었습니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대규모로 화약무기를 운용했지만 만성적인 화약 부족에 시달려왔습니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염초를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고 조선 내에서 유황 광산을 개발하기도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만성적 화약 부족 문제는 서구의 근대식 화약무기가 들어올때까지 해결되지 못했었습니다. 덧붙여 화승총만으론 기병 돌격을 저지하지 못합니다. 화기만으로 기병 돌격을 저지할 수 있게 된 것은 연발 사격이 가능한 총이 등장하면서 부터입니다. 고대부터 임란 당시까지 기병의 돌격을 막아내는 수단은 기병의 돌격을 거부하는 대기병 장애물과 보병 방진이였습니다. 유럽에서도 테르시오라 불리는 창병과 포수가 조합된 진형으로 기병을 막아낸거지 오직 화승총 사격만으로 기병 돌격을 막아낸건 아니지요. 따라서 화승총의 보급을 여진족 기병 대책으로 보는 것은 오해입니다. 조선은 임란 이후에도 기병을 중시했고 기병 양성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단지 조선의 사정이 나빠져서 충분한 기병 양성을 할 수 없게 된거죠.
@@저는기어다닐거에요 총검 등장 이전에도 대기병장애물과 장창으로 제대로 방진 갖추고 있는데 기병 닥돌하면 갈려나가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기병 돌격 전에 중무장 보병들이 먼저 돌진해서 대기병장애물을 제거해버리거나, 궁기병, 총기병들이 활이나 총으로 방진을 공격해 방진에 구멍을 내는 전술이 사용되었습니다. 혹은 제대로 방진을 갖추기 전에 기습을 가하거나 방진이 허술한 부분을 찾아 집중 공격했지요. 영화에서 처럼 방진을 향해서 무지성으로 돌격하면 아무리 기병이라도 참패합니다.,
조총이 물론 훈련 없이 쓸 수 있는 물건은 아니지만 활에 비하면 비교적 쉽게 징집된 병사들도 쓸수 있다는건 이후 전쟁양상도 바꿀 정도로 중요한 사실이죠. 활도 강력한 무기이지만 기본적인 숙련도가 나오려면 시간이 더 걸리고 잠깐 훈련으로는 만족할 성능이 나올순 없으니 ㅎㅎㅎ 잘봤습니다!
고려와 조선 초에 사용을 하건 단순히 활이 아니라 궁기병이야. 그래서 여진족 털었던거야. 조선은 활을 포기한게 아니라 궁기병을 포기한거야. 문제는 청의 중갑기병의 카운터가 궁기병이었다는거지. 그리고 화승총병의 카운터가 중갑기병이고 차라리 화승총병이 아니라 카라콜을 운용 했어야지. 하지만 카라콜을 운용하기에는 조선은 너무 가난했어. 청의 중갑기병이 카라콜 이기는건 진짜 ㅈㄴ 힘들지. 중갑기병은 느린대 경기병은 가벼워서 속도가 빨라 더구나 중갑기병은 창으로 찔러야해서 2m이내로 접근해야하지만 칼라콜은 권총이라 유효사거리가 아무리 개판이라도 5~10m야. 새 무기가 나오면 그에 맞는 전략과 전술을 가져야하는데 그러기엔 돈이 너무 없지. 카라콜을 하려고 해봐 일단 기병을 키워야하고 기병은 권총을 두자루를 가져야해. 그리고 다시 뛸 기병 1기당 말이 추가로 있어야하고 말위에서 장전을 못하니까 장전을 위한 장소와 인력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진지 구축이 필요하고 진지 수호를 위한 보병이 필요하고 보병은 포병 장창병 총병으로 구성되어야하고 전투가 시작되면 포병이 포를 쏘고 총병은 돌격하고 장창병은 그 앞에 서야해. 이런 완전히 편제된 부대가 있고 포가 동급이나 더 좋은 성능을 가졌다면 병사가 청의 절반밖에 안되도 이겼겠지.
@@마에-s5y 네 그렇습니다. 일반적인 각궁은 40J, 조총은 장약량에 따라서 700-2000J입니다. 인간 근력으로 만들어내는 위력을 지닌 냉기(칼,활,창)이 화약 폭발력으로 만들어내는 위력을 이용하는 화기(총,대포)에 비교될 수 조차 없죠. 조총의 총구 속도가 음속이 넘어가죠. 즉, 초음속입니다. 활은 시속 200km 정도이고.. 그냥 비교가 안되죠.
조총이 비록 활보다 사거리가 짧고 재장전이 시간이 걸려도 활보다 훨씬 우월한 병기일 수 밖에 없는게, 전장터에서 쓸만한 습사수 한명 길러내는데 최소 2년 정도 시간이 소요됨. 아무리 단기간 속성으로 벼락치기 해도 6개월은 걸림. 반면에 조총은 빠르면 1~2주, 오래 걸려도 한달이면 조총수 한명이 탄생함. 병사들이 마구 죽어나가는 전쟁터에서 병력보충이라는 면에서 비교 불가. 또한 활은 활과 화살 일일히 장인들이 손으로 만들어야 해서 생산량도 적고 비용도 비쌈. 반면에 조총은 공정만 일단 갖춰지면 대량생산 가능. 역시 병기의 보충이라는 면에서 비교 불가. 상대보다 더 격렬하게 소모하면서도 더 오래 버텨야 승리하는 전쟁에 있어, 병력과 병기의 보충이라는 면에서 뒤 떨어지는 활은 도태 될 수 밖에 없었다.
추가로 활의 경우 조준 후 사격을 하는데있어 동작이 매우 컷고 은폐엄폐가 불가능했기에 적군에게 있어 노출될 위험이 매우 컸음. 즉 상대 궁사나 척후병으로부터 표적이 되기 쉽기에 생명유지도 힘들었겠지. 하지만 조총의 경우 동작이 작고 구조물에 은폐 엄폐를 한 상태에서도 조준 사격이 가능했기에 적군으로부터 몸이 노출되는게 궁사보다도 월등히 낮았음. 즉 사수의 생명유지에 있어서도 오래 버틸수 있었음.
조총 사거리가 짧다는 거는 잘못 알려진 거입니다. 조총은 무강선 활강총이라 조준이 가능한 직진성을 유지할 수 있는 거리가 50m이고 그후 무회전 특징인 어디로 날아갈지 몰라서 일뿐 실제 유효사거리(죽이든 상처를 입히든 위력이 보증되는 거리는) 250m 까지였습니다. 직진 거리 넘어가면 탄착점이 어딘 지 알수 없지만 맞으면 골로가는 거는 마찬가지입니다. 활도 또한 직접 조준해서 날릴 수 있는 거리는 40-50m이고 그후는 높이 들어서 아무나 맞고 죽어라는 식으로 여러 명이서 탄막을 형성해서 날리는 거는 조총이랑 같았습니다. 조총도 적이 멀리 떨어지면 포물선 사법을 구사해서 탄막을 형성해서 아무나 맞고 죽으라는 식으로 쏘았고 40보(50m)쯤에서는 목표물을 조준해서 쏘았어요. 그리고 정규군이 아닌 군대를 상대로 할 때 활은 위력을 발휘했지만 갑옷을 제대로 갖춘 정규군 상대로는 활은 상대가 진격을 늦추는 개념이었지 갑옷을 뚫을 수가 없었고 조총은 한방에 갑옷을 뚫어서 저지할 수 있어서 원거리 무기에 진심인 조선이 조총을 선택 안하는 거는 이상한 거죠. 우리나라 활도 전쟁용 활은 거의 100파운드급이며 90J의 운동에너지를 지녔습니다. 이걸로는 갑옷을 뚫지 못하죠. 참고로 사극에 보면 등장하는 개인용 휴대활은 40파운드급으로 전쟁용으로는 쓸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갑옷을 뚫을려면 최소 400J 이상의 운동에너지를 가져야하는 걸로 압니다. 조총은 화약 장약에 따라서 700~2000J 까지 나갔습니다. 위력 측면에서 활과는 다른 차원의 무기였습니다. 개인화기로 정규군 중장갑을 뚫는 획기적인 혁명이었죠. 중세 이후 유럽에서 활이나 석궁을 안쓴 이유가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무조건 화승총(아케버스와 머스킷)과 대포였죠. 17세기 이후 서양의 전쟁은 물론 창도 있고 칼도 있었겠지만 총과 대포의 전장이었습니다. 1700년대 중반이후는 거의 총과 대포로만 싸우죠. 접근전에서는 일반 보병들은 총앞에 대검을 꽂아서 싸웠지 칼은 써지 않았습니다. 장교나 기병대들은 말을 타고 칼을 휘둘러야해서 칼을 썼지만
웃자고 얘기하는것이지만 신미양요때 미군의 총은 레밍턴. 카빈과같은 엎드려서 1분에 6내지10발사격이 가능한 총을 사용했으며 그때 조선군은 임진왜란때와 비슷한 화승총을 사용했었슴. 이걸보고 어떤 역사박사님께서 이런말을 하셨슴 신미양요때 조선군은 세계에서 제일 잘만들고 훌륭한 화승총이 있었다고
냉병기, 열병기의 차이중에는 사수의 '체력'도 있죠 냉병기는 사수가 격발에 체력을 운동에너지로 소모해야 하는데, 분당 몇발을 쏘느냐가 전투에서 승패를 갈랐죠. 따라서 지속가능한 사격발수는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핵심요소였는데 , 아무리 숙련된 사수도 활을 몇시간씩 계속해서 정확하게 쏘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열병기는 운동에너지가 화약이므로 조건만 맞으면 무한대가 가능했죠. 따라서 효율성만보면 열병기가 훨씬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안병욱-r6q 오래돼서 대충 기억을 더듬은건데 님덕분에 정확한 자료 찾아 봤습니다 박취문의 부북일기 이고 박취문과 이시복의 쏘기 시합에서 박취문이 189발을 연속 명중시켰고 이시복이 200발을 연속 명중 시켰네요 화살은 가장 많이 쏜 날은 300발을 쏜 날이네요 그리고 당진 국궁장에서는 대부분 60대 이상 노인들이고 하루 100발 이상 쏘는데 무슨 혈관이 터져요 당진 국궁장도 100보가 족히 넘어보이더만
만들수 있는거 하고 우수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 당시 조선의 공업력으로는 우수한 총을 만들지 못함. 가공 기술이 너무 낙후됨 조선제 조총은 후진 총임 당시 화약은 대량생산도 안되고 장기보관도 어려움. 돈 덩어리임. 조선 나라는 전쟁을 할 수있을 정도의 화약을 비축해 본적이 없음. 이미 그 시절가면 쩐의 전쟁이 시작되는 시대임. 칼, 창, 활은 쩐하고 절대적인 영향은 없음. 화포, 기병, 함대 등은 쩐하고 절대적인 관계가 있음. 그래서 너도나도 돈벌러 갔음. 땅파먹고 있는 조선 나라가 우수한 화포를 구비한다는 것은 반경제 논리에 비논리적 판타지임. 언제까지 논리를 무시할런지. 설마 조선제 화약이 중국이나 일본화약보다 우수하다고 우길런가? 서양까지 갈 것도 없음. 총 품질도 마찬가지지만 화약도 천차만별임. 당시에는 화약 성능이 그 나라의 기술 척도임. 지나친 판타지는 몸에 해롭슴. 백년 전의 고물도 안버리고 장부에 잡아 놓은 숫자라는건 알고 가야함. 정작 전쟁나면 쓸만한게 없음.
아마도 처음으로 조총을 배운건 총통수였었을거라고 봅니다. 화약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병과였었기에 조총도 금방 적응을 했을테구요 승자총통에서 조총으로 갈아탄 이유는 아무래도 편리함 때문이라고 봅니다. 승자총통에 비해 화약도 적게 들구 방아쇠 덕분에 바로 쏠수있구 명중률도 좋구 말이죠 근데 그 총통수들 싸그리 다 갈아버린것이 사르후전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조총의 장점은 포수가 사망했을때 그 병력을 즉시 채울수 있다는 장점이 있음 즉, 사격술은 열흘이면 끝나고 전술교육 좀 시켜서 전장에 보내면 될 정도 인데 활은 그렇지 않음 어릴때 부터 활에 재미를 가진 사람이 활로 사냥 등 생계를 유지하다가 전쟁시에 차출 되는 것임 당연히 활의 유지보수는 알아서 할수 있을 정도니까 십수년은 활과 함께해야 그나마 전술적인 유효사가 가능함...1급 궁수가 사망하면 이후에 채울수가 없었음 이게 조선이 계속 밀렸던 이유임...왜군도 부산에 상륙하고 나서 활이 너무 살벌하게 날아와서 첫공성에 실패하고 활에 대한 방비책을 만들고 공성했다고 기록했었지만 문제는 1급 궁수가 초반에 전부 소모 됐다는것....
궁도장에서 활시위당겨본사람은 알듯 시위 당기는게 여간힘든게 아님 어지간한 숙련자가 아니고서야 과녁에 적중은 커녕 몇번쏘면 지치고 수십미터날리는것도 버겨움 그런 궁병을 저 시대에 양성하려면 훈련기간이 어마어마하게 걸렸을건데 총은 장전하는 방법이랑 조준법만 익히고 몇 발쏴보면 끝임 여담으로 신미양요나 병인양요 때 그 쏘기힘든 활을 들고 근대무기인 볼트액션을 상대했다는건 거의 말이 안될정도라는거임
조선군 무턱대고 욕하는 사람들이 놓치는게, 현실은 게임이 아닙니다. 와! 조총! 와! 플린트락! 좋아보인다고 바로바로 바꾸지 못해요. 뭔 정책을 해도 공짜인게 아니니 좋은거 알아도 결국 실행 못하고 묻힌 정책들도 많습니다. 현실은 게임이 아니라 조정에서 업그레이드 누르고 업그레이드 컴플리트! 하면 바로 모든 병력이 세지는게 아니에요... 지금도 최신 장비같은건 최전방부터 보급해주는것처럼요
임진왜란 이전에도 조선은 조총의 존재를 알았지만 활보다 짮은 사정거리와 느린 발사 속도 때문에 무시 했다가 조총의 단점을 보완해서 나온 일본군에 쳐맞으면서 조총의 위력을 실감하고 받아 들이죠 근데 웃기는 것은 조선후기 고종때까지 불을 붙혀서 발사하는 화승총을 사용해다는 것 서양인들이 고도 성장을 이루는 동안에 조선은 임진왜란때 그대로...
당시의 조총보다 활이 좋은 무기다라는 것은 무기만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시 화승총 수준의 조총조차도 잘 사용할 경우 다양하고 굉장한 이점이 있었습니다. 1. 전장의 병사들과 말은 게임 속 유닛들처럼 어택땅 찍으면 무조건 돌격하는 무생물이 아닙니다. 활보다 총은 굉장히 큰 굉음을 울리기 때문에 적에게 공포를 심어주고 특히 말을 놀라게 하기 때문에 잘 사용된 조총이 잘 사용된 궁병보다 적을 죽이는 숫자가 적더라도, 그런 공포 유발 효과로 인해서 적을 저지하거나 적의 진형을 와해하는 효과가 컸습니다. 2. 당시의 조총보다 당시 조선활이 사정거리가 더 길기 때문에 활이 무조건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근접거리에서의 갑주 관통력은 조총이 일반적으로 훨씬 위력적이었습니다. 특히 활은 개개인의 팔의 완력과 훈련도의 기간에 크게 의존하였지만, 조총은 화약의 힘으로 나가기 때문에 극소수 명궁들이 갑옷을 관통하였다고 하더라도 훈련기간이 짧은 경우 조총병이 궁병보다 무조건 낫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위 2번과 연관된 내용인데, 활을 위력적으로 쏘기 위해 어마어마한 팔의 힘과 오랜 숙달이 필요한 것과 달리, 조총병은 상대적으로 훈련이 쉽고 그 파괴력이 일률적이므로 대규모료 육성할 시 조총병이 더 우월한게 맞습니다. 다만 대량생산 시스템 자체를 운영할 능력이 없었던 조선이 조총을 주무기로 쓰려니까 잘못된 궁합이었던 것이죠. 청나라가 발흥할 시기 서구에선 이미 대량의 총기제조를 통한 전열보병 물량화력전을 하고 있을 때, 조선은 그 명중률 낮은 조총을 소수정예라고 착각하고서 전장에 내보냈으니 소수기병에 썰린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4. 당시 조총은 명중률도 낮거니와 발사와 발사의 간격이 굉장히 긴 무기였기 때문에, 적의 돌격 특히 빠른 기병의 돌격을 반드시 막아줄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스페인의 테루시오 전법, 일본 나가시노 전투의 3단 목책, 그리고 이후 근대에 와서 서구에서 총에 검을 달아 장창병 역할도 어느정도 가능하게 바꾼 점 등, 기병에 썰려버리는 당시 머스켓 수준에 대한 고려 없이 청나라의 강력한 기병에 조총병으로 들이댄 것은 그야말로 병종의 상호보완성에 대한 기초적 이해도 없던 조선의 수준 낮은 군대 운영 능력을 엿볼 수 있지요. 게임으로 치자면, 전략게임을 하면서 아주 초보적인 유닛조합도 할 줄 모르는 저급한 수준. 5. 일본군은 조총병을 꽤 운영하였지만 비율적으로 언제나 근접보병이 다수를 차지하고, 조총병은 전략적으로 필요한 순간에 운영한 것이지, 조총병 몰빵으로 운영한 적이 없습니다. 그 유명한 나가시노 전투에서도 실제 일본 역사가들에 따르면 1만이 넘었던 노부나가 지원군 중 조총의 수는 고작 1천 정 정도 밖에 되지 않았으며 90%에 가까운 병사들은 창병, 검병, 궁병이었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적의 기마병을 와해하는 용도로 목책진지와 함께 전략적으로 쓴 것이죠. 임진왜란 때의 일본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말하자면 당시 동아시아의 조총(텟포, 사실상 초창기 머스킷) 수준으로는 수백년 후 나폴레옹 시절과 같은 무지성 전열보병 물량전이 가능하지가 않았죠. 그런데 전쟁에 대한 이해도가 없는 왕이나 책상물림 신하들이 조총 하나 때문에 졌다고 착각하고 조총병을 운영한것 입니다. 조총병을 보조해줄 창검병이 있었다고는 하나, 장창을 방진으로 짜도 기병돌격을 막을까 말까할 정도인데, 창과 검을 복합적으로 쓰는, 진형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은 애매한 창검병으로 보조하면 당연히 기병에게 썰리는건 당연지사라고 봅니다. 6. 근본적으로 전쟁은 첫번째가 돈 즉 경제력이고, 두번째가 생산력입니다. 돈도 부족하고 생산력도 딸리면 제 아무리 남의 선진 무기를 베껴와도 의미가 없습니다. 양반이 군대도 면제받고 세금도 면제받던 조선사회에서 국가가 경제력이 전쟁을 뒷받침 해줄 리가 만무하고, 사농공상에 절여져 공인들을 무시하던 문화에서 대량생산을 위한 혁신을 할 수 있을리도 없는데, 조총 몇백정 베껴서 만들어 본 들 의미가 있을 턱이 없지요.
근데 아쉬운건 조선의 비격진척뢰나 대장군기같은 대형 화기들이 많앗는데 전방에서 조총부대와 적절히 사용햇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기마부대를 비격진척뢰 + 대장군기 그러고 장전 그 뒤 보병 및 조총 사격후 장전씩으로 싸웟다면 홍익포가 잇엇어도 해볼만 햇을텐데 그리고 그 많던 수군은 어디로 말타고 오는 길목에 해안선만 가까우면 뻥뻥쏴줌 될텐데
그 화약이 굉장히 구하기 힘든 자원이였습니다. 조선 땅에서 염초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뒷간 흙, 부엌의 흙을 달달 긁어모아야 인공적으로 염초를 생산할 수 있었어요. 서유럽 역시 염초가 부족해서 인분을 일부러 삭혀서 염초 성분을 생산하는 대규모 시설을 만드는 등 화약은 중요한 전략 자원이였습니다. 그나마 자연적으로 염초가 나는 지역은 중국 인도 정도였는데 중국 명나라는 조선을 경계하여 염초 수출양을 철저히 통제했습니다. 그래서 대형화기를 보편적으로 굴리기 힘들었던겁니다. 일본은 염초는 안나도 대신 유황이 풍부했기 때문에 염초만 잘 만들면 조총병을 대규모로 굴릴 수 있었지만 우리는 염초 유황 둘다 안나는 땅이였어요.
기병 상대로는 교대 사격이 별 도움이 안되는데다 3단 사격의 전설이 나오는 나가시노 전투도 본래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이 다케다군보다 병력이 월등히 많았기에 이긴 전투였고 이마저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병력이 6천 명이나 전사할 정도로 치열한 육박전으로 전개될 정도로 조총병의 역할은 생각외로 크지 않았습니다.
근본적인 화력과 제압능력에 있어서 냉병기는 열병기를 따라갈수가 없음. 중간에 습사용 활가지고 쏴대는 연습장의 사거리 같은게 나오는데 현실은 주력인 전투용 철전 마저 사거리는 80보 미만, 불안정한 마상 사격시엔 그의 절반으로 떨어졌음. 되려 조선은 수조규식 같은 수군 교본이나 장용영등의 훈련기록에서 조총의 사거리를 활보다 더 멀리 잡았음. 전장식 활강총도 사수에 따라 100 보이상으로 명중탄을 내기도 하는 무기인데 활과 조총을 비교하면 활은 항상 비전투시 활터 같은데서 정지된 표적을 두고 유엽전이나 목전같은 가벼운 비살상 연습용 화살을 쓴 사거리 240보 같은거나 언급하고 조총의 사거리는 50미터다 이런식으로 최대사거리와 유효사거리를 비교하는 뻘짓거리만 하는듯. 당장 이일의 상주전투에서도 왜군이 조총으로 사격을 하고 있었지만 활의 사거리가 닿지 않아 반격을 못하기도 했음. 세상 모든 활로 날고기는 민족들 결국 열병기를 주력으로 갈아탔고, 이는 조선을 관광태운 청군마저 마찬가지였음. 조선이 활 가지고 임진왜란때 성과를 냈다 하지만 정작 조선군은 1593년 부터 조총을 복제하고 있었고 정유재란땐 왜군 못지 않게 조총을 이미 운용하고 있었음 여진족이 활가지고 조총병 중심의 조선군을 이겼다고 우월하다 하는데 물론 이는 조총만 가지고 병종을 구성했을때 나타는 결점이자 조총의 시대적인 한계를 보여주는 장면임은 분명하지만 이걸가지고 조총이 활보다 열등하다 하는건 어불성설임. 당시 조선군 구성에 총을 활로 바꾼다 한들 결과는 달라졌을까? 근접 병종이 지켜주지 못하면 당대의 모든 원거리 병기는 무력할 뿐이고 패배의 원인은 신무기의 특성을 살리지 못한 저열한 조선군의 병종 구성에 있지 이걸 근거로 당대인이 평가한 우월을 평가절하 하는건 옳지 않다고 본다 조선군은 서구의 경보병들이 산병전을 벌이듯 느슨한 대열에서 조준사격을 가하는걸 무려 근접병과의 호위 없이 벌였는데 이러면 당연히 돌격하는 적병이나 기병을 못막는다 이건 나폴레옹시대 전열보병들과 경보병들도 마찬가지였음. 전장식 강선라이플로 무장해 200m는 물론이고 600m 저격기록 까지 남겼던 당대 경보병들도 적기병이 돌격하면 전열을 짜고 산병시에 맞딱 드리면 '기도 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할 정도였고 전열보병이라는 병과가 만들어진 이유이기도 했는데 당연히 전열보병으로 진화도 못하고 조합도 망가진 반푼이 조선식 테르시오에 화포도 중세식 그대로인 상태인 병종으로 기병 상대로 산병전을 벌이면 방포 한번 하고 밀려버리는건 당연하다. 당장 조선군이 병자년에 성과를 냈던 김화전투나 광교산 전투도 지세가 근접 병과 역할을 해주니 드디어 조총의 장기를 발휘 해 열병기의 힘을 보여줄수 있었다. 결국 요는 조총이 일부 한계가 있는 무기는 맞으나, 게임체인저로서 기능을 한 세계 최초의 '사수와 지휘관에 의해 사격통제가 가능한 휴대용 열병기'임은 분명하고 그 장점은 대체 불가했으며 조선이 전술을 잘 못짜 단점만 드러난거지 이걸 가지고 열병기 조총이 냉병기 활보다 뒤떨어진다 하는건 어불성설임 마치 제국주의 시절 후장식 탄피 소총가지고도 지휘관이 뻘짓하다가 열등한 무기를 가진 토착세력에게 패배했다고 원주민 고물 수석총이 후장식 소총보다 낫다 하는 사례로 쓰는것과 똑같은 꼴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임진 왜란 때의 경험(항왜가 아직도 노병으로 현역이던 시절)으로 기병을 막을 목책이나 창병이 필수적이라는걸 알았을 터인데도 이런 노력을 한 흔적은 안 보인다는거. 그 외에도 간이 창병으로 쓰기 위해 대검 등을 다는 아이디어를 낼 법도 한데, 조선이 끝나는 그 날까지도 여전히 총은 총이고 창은 창인 군 체제였음.
조선은 태생적으로 강한 군사력 소유가 불가능한 나라였습니다. 특히 이 성계의 위화도 회군 두차례의 왕자의 난 등으로 이미 자신들이 군대에 관한 깊은 트라우마 가 있어 강한 국방력을 가지는게 불가능 . 이렇게 회자되고 비판하는것 각개의 전투에 대한 분석은되나 무슨 국가라는게 한번전투에서 지면 국방력이 괴멸되는게 말이된다고 봅니까.
일본은 조총도 대출로 사고 화약도 대출로 구입했지. 게임을 보면 도구점에서 무기를 사서 몬스터를 사냥해서 보석이 나오면 다시 무기를 사는거지. 화약 한자루도 상당히 비싼데 귀를 코로 바꾸니 수익률이 50%가 되는거지. 대출은 있는데 갚는건 불가능하지. 조총을 포기하고 칼과 활로만 싸우는거지. 돈받고 팔았다는 설도 있지. 화약유지비가 안나오는데 조선은 화약을 국가차원에서 지원했으니 원없이 쓴거지. 원래부터 조총은 그렇게 오래된 무기도 아닌데 주력무기는 칼과 창이지.
평야는 조총쏘기에 아주적합한곳 .. 그리고 신립의 조총을 너무과소평가했지 그리고 우리가 병자호란때 조총병이 기마병한테 반대로 졋던이유 당시도요토미는 조총 재장전의단점을보완하기위해 조총수를 여러줄을세워 조총을바로쏘고 빠지는전략을 썻으나 우리는 그러지못했지 그래서 우리는 병자호란때 조총병이 무참히 깨지지 근데 당시 조선은 화포가 더 쌨지 솔직히 화포는 하루만해도 다 배울듯
나도 처음에는 활에서 조총으로 바꾼건줄 알았었는데 화력조선을 보고 난후 활이 아니라 승자총통에서 조총으로 바꾼거 란걸 알게 됨 조선은 세종때 부터 화력에 목이 말라있었고 천.지.현.황 같은 각종화포에다 개인용 화포라고 볼수있는 총통을 사용함 총통이 등장하면서 활은 총통의 장전시간을 벌어주는 수단이 됐었다고 봄 이건 조총이 등장한뒤에도 마찬가지 였었구 글쿠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때는 조총으로 무장 했지만 역으로 후금팔기군기마부대에 개쳐발린걸 보면 신립이 기마부대로 닥돌 하려고 고집을 피운 이유를 알것도 같음 근데 탄금대전투와 사르후전투의 차이점은 지형이랑 날씨의 차이 때문이라고 봄 탄금대전투의 주전장은 충주달천평야 였었고 6월 초여름에 전투를 했었는데 이 6월달이면 논밭에다 물을 대는 시기로 자동차조차도 논에 들어가면 꼼짝을 못하는데 말은 머 말할것도 없다고 봄 논에서 움직일수는 있어도 속도는 떨어질수밖에 없다고 봄 반면 사르후전투는 벌판에서 그것도 한창 추운 3월달에 전투를 했었는데 바람이 하도 불어대서 총알을 장전하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고 볼수있슴 화약이 바람에 휘익 하고 날아가 버리니까 신립의 기마부대도 그렇고 후금의 팔기군도 그렇고 둘다 창기병이 아닌 활을 쓰는 궁기병 들임 특히나 신립의 기마부대는 활외에 마상에서 쏠수있는 세총통도 가지고 있었을거라고 봄 창기병이었다면 왜군의 장창부대에 때문에 막히겠지만 궁기병이면 기마돌격을 안하고도 공략을 할수있었겠지만 지형을 무시하고 날씨를 무시한 결과는 끔직스러웠다고 봄
역사 전공은 커녕, 취미로도 역사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해본적 없는거 같네요. 신립에 대해서는 식민사관 그대로 씨부린다는게 정말 어이가 없고, 임진왜란에 있어서 조총은 하나의 요소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농민이 베테랑 군인을 어떻게 이깁니까. 어디 역사소설에서 들은거 가지고 씨부리지 마십쇼 ~
저도 자세히늗 공부해봐야 알지만, 조총 화승총 이건 순서가 아닌걸로 알고 있습니다. 먼저 화승총인 아르케부스와 머스켓이 등장했고, 조총은 아르케부스의 일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구에서는 두개가 같이 병존하다가 아르케부스는 소멸되고 머스켓이 대세가 되면서, 머스켓에서 총열에 강선이 추가된 라이플이 등장하였고, 탄약에서도 탄피개념이 등장하였고, 탄을 총구에 넣는식에서 뒤로 넣는식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현대식 소총이 등장한 것이라보면 될듯합니다.
조선 후기 5군영(훈련도감, 어영청, 수어청, 총융청, 금위영) 군사 다 합쳐도 1만이 넘지 못했고 군대를 면제 받는 양인에게 군포(군대를 면제 받는 대가로 면포를 갹출)를 가혹하게 징수하고도 가난한 조선은 직업군인 1만도 유지하기가 어려운 나라였다. 당시 조선의 현실이었고 특히 인조 효종 현종(경신 대기근 1670년 1671년 인구 100만 이상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사망) 숙종(을병대기근 1695년~ 1699년 인구 100만에서 200만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사망)대 까지 거듭되는 흉년으로 훈련도감 군인들의 급료도 재 때 지급하지 못한 것이 가난한 조선의 한계였습니다. 조총은 녹슬고 총렬이 막혀 납탄이 장전 안되고 화약은 불량화약이라 위력도 없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애도막부 문화 황금기 였는데 조선은 퇴보하고 있었습니다. 정조시기 조선은 중흥기를 맞이하지만 정조 사후 안동김씨 60년 세도정치로 조선은 완전 회생 불능 나라가 되었습니다.
조상들이 바보도 아니고 조총이 여러모로 좋으니까 활대신 조총에 빠진거임. 발사속도는 숙련된 궁수보다 떨어지는건 확실하지만 궁수 숙련기간보다 조총병 훈련 기간이 훨씬 짧고 장전법만 알면 애들도 강한 화력을 투사 할수 있는게 조총임. 사거리 관통력 살상력 모두 활이 조총을 따라가지 못했음.
조선은 그래서 결국엔 조선후기에 이르러 조총, 즉 아케부스를 전세계에서 가장 잘 다루는 나라가 되었다. 물론 그 쯤 되어선 다른 나라들은 스프링이 결합된 방아쇠, 장전, 격발장치 와 탄알 그리고 머신건까지 실전에 쓰고있었지만 말이다. 나라가 발전이 없었단 거다. 기술이라는게 물건 하나 만든다고 땡이 아니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지 싶다.
조선과 서양의 차이점이 조선은 병자호란이후엔 그렇다할 전쟁이 없었어서 전쟁기술이 많이도태된게 있었고 동시대 서양은 아메리카 아프리카정복전쟁하고 유럽내부에서도 지들끼리 정복전쟁하고 정복전쟁이 일상화되던시기였음
틈만나면 정복하고 전쟁해대니 무기발전이 있을수밖에없었지
정치인들이 나라발전을 위할 생각은 안하고 자기밥그릇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식이어서 그렇지요. 우리나라는 개개인은 우수한데 뭔가 감투만 쓰고나면 그 좋은 머리를 나쁜 쪽으로 쓴다는게 문제입니다.
@워윅펜타킬영상 정약용 같이 뛰어난 학자이자 과학자를 모함해서 귀양보낸 것만 봐도 조선시대는 정치 때문에 사회가 발전을 못하고 500년간 정체기를 겪다가 패망한 것입니다. 뛰어난 인재는 많았으나 전부 정치적인 문제로 재능을 펴지 못했지요.
@워윅펜타킬영상 조선은 수뇌부가 자기 밥그릇만 챙기면 되는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나라였음 나라가 완전히 망할 정도의 위기가 아니면 변화를 시도조차 안함
@@jmsunny1437 전쟁 무기가 전쟁때문에 발전한다고 생각하냐?
전쟁 무기의 발전은 과학과 산업 기술의 발달이 촉진하는거다.
아프리카가 100만년 전쟁을 해도 거대 무기 제조사를 가질 수 없고 한국이 100만년 북한과 대립을 해도 보잉사를 가질 수는 없다.
너의 논리 대로면 전세계에서 가장 무기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국가는 스웨덴이고 전세계에서 가장 무기가 발달한 국가는 시리아야.
지난 70년 사이에 중동 전쟁 1차 2차 3차 4차 를 했고 시리아 내전과 ISIS있다.
하지만 실제는 스웨덴은 세계적인 방산국가고 시리아는 단지 전쟁터일 뿐이야.
조총 땜에 진거라고 생각해서 조총에 올인했는데 조총없이 기병+궁병 조합으로 개털리는 조선ㅋㅋㅋ
결국은 무기탓이 아니라 걍 훈련, 전략 그리고 제일 큰 지휘관의 부정부패 때문
그게 문제가 아니라 조선 기마병 숫자보다 여진족 기마병 숫자가 존나 많았죠 상대적으로 적었던 조선기마병들한테는 일본조총병들이 초반에는 먹혔는데 우리보다 몇배는 많은 여진족 기마병들은 확실히 수준이 달랐던거죠 그리고 조선북쪽과 여진족 주전장은 평지였습니다 험지가 많은 조선땅에서는 매복전술이 먹히지만 평지가 많은 북쪽에서는 기마병이 유리했죠
그리고 그당시 조선은 장창병들이 시마말랐었습니다 기마병을 저지하려면 장창병들이 필요했었는데
병자호란때는 지휘관과 상부가 말아먹은게 심각했음. 인조가 반정으로 즉위한데다 이괄의 난까지 겹쳐서 국방력과 국방에 관련된 정치가 아주 혼란스러웠음. 병력도 하자가 있었을 수 있지만 나라가 아주 엉망이었음.
당시 만주 팔기군들은 훨씬 많은 명나라군들과도 백전백승하던 무시무시한 군대였죠
그냥 당시에 팔기군을 이길 나라가 전 세계적으로 있었을까 싶음… 음 .. 테르시오?
이미 임란 이전인 조선 중기부터 기병 전력이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말의 경우 그 수가 줄어들고 있었는데, 호랑이와 같은 육식 동물의 습격으로 말이 줄어들고 있었는데다가 인구의 증가로 목장이 논경지로 전환되는 등의 이유가 주 원인었습니다.
활을 들고 총을 들엇스나 전력화에 실페 한 총이지요 너무 총에만 의지한 전략이니까요 저 총은 한번 쏘면 장전에 시간이 만이 걸림니다 또한 쏘아도 명중륭이 매우 낮습니다 총의 위력이 생ㄱ각보다 약하다는 것이지요 즉총성은 커서 조치만 명충륙 낮고 장정에 시간이 만이간다 적이 그것을 안다면 치명적인 약점에의해 아군의 전멸이겟지요~~~~당현 하게도 적은 그 약점을 이해 하고 있으며 조선군을 전멸 시켯구요
전쟁은 장난이 아님니다 죽이느냐 죽느냐 잡아 먹느냐 잡아 먹희느냐 임니다 튀어난 지휘관과 판단력은 적을 잡아 먹지만 어리석은 지휘관은 잡아 먹힘니다 아무리 무기가 조아도여 ~~총의 군대 만들고 총의 취약점을 약한 부분을 보강하지 안코 전쟁에 나아 같지요 ~~~그당시 지휘 체계와 ((지휘 체계라 함은 자신의 지인이라 하여 어리석은 자를 지휘관에 안치는 것 이지요))그리고 그 지휘관이 누구 인지 모르나 어리석은 자가 분명하다 하겟지요
선조는 조총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진짜문제는 훈련되지못한군대였다는게 문제 아닐까 생각 합니다
맞습니다
사야가(김충선), 하멜, 벨테브레 납치 등으로 서양의 총을 들여왔으나 자동격발장치의 부재나 화약 재장전 등의 단점이 많았죠
나선정벌 때 조선군이 러시아 탐험대 를 상대로 이기고 러시아 탐험대 의 머스켓총을 노획했는데 청나라 에게 상납하게되어 구식 심지식 화승총 으로 밖에 못 머무름 청나라 는 17세기 머스켓식 총을 사용하고 또 이후에 서양나라 들을 통해 들어온 개량형 소총들을 가지게 되었어요
@@hyeongjungkim0441 만들어봤자 부싯돌 재료가 진짜 부족해서 양산 못함
@@hyeongjungkim0441 청나라에게 상납이 아니라.. 거의 삥뜯긴 수준이었습니다. T-T
단점을 커버할수있을만큼 가성비가 좋은게 총임 ㅋㅋ 임란이후로 쭉 조선 주 무기가 총인 이유가 뭐겠냐
조선도 나중에 신기술로 제작된 총을 입수하게 됨 문제는 본인들이 한 번 만들어 보니까 기존 성능과 별 차이 없으면서 생산 가격만 높아서 개발을 포기함 (개인적으로 국가 재정 영향이 컸다고 봄)
9:05 질산칼륨은 똥오줌 겨우 퍼서 만든거라 극도로 부족했던걸로 압니당
이유는 아주 간단함. 훈련기간이 짧기 때문
활을 잘 다루는 정예병 보다, 적당한 훈련을 마친 일반병의 조총 사용의 효율이 높기 때문.
정확합니다 능숙한 궁병 하나 양성하는데 2~3년정도 걸린다고 들었는데 그에반면 조총은 양성하기가 엄청 쉬웠다고 하죠
'궁시로는 조총에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이 왜란초 전투를 경험한 장수들의 결론이였습니다. 잘만 싸운게 아니라 원거리 전투에서 화약무기와 성능 좋은 활로 조선군이 누려온 전술적 우위가 조총으로 거의 상쇄되어버려 악전고투를 했습니다. 다만 당시 일본군에서 조총 포수의 비중이 그렇게 크지 않았고 조선군도 활만 사용한게 아니라 승자총통 계통의 개인 화기와 그외 각종 화기를 운용해 어느정도 대적이 가능했던거 뿐입니다.
조총 사거리가 50미터라는 의미는 조총 탄환이 50미터 밖에 못날아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원형의 탄환이 무회전으로 날아가는 조총 탄환의 특성으로 인해 공기 저항으로 궤적이 불안정하여 50미터 이상 날아가면 조준한 지점에서 완전 벗어난 곳으로 탄환이 날아가 명중률이 떨어졌기 때문에 50미터까지 다가가서 쏘았던 겁니다. 실제 조총의 발사 에너지는 현대 소총과 비슷한 수준이라 단순히 총알이 날아갈 수 있는 사거리는 수백미터에 달했습니다.
조선 후기 전술 지침을 보면 '적이 100보 이내로 다가오면 총을 쏘고, 적이 90보 이내로 다가오면 활을 쏜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실제 사거리는 조총이 당시 조선군이 사용하던 활보다 더 길었기에 나온 전술입니다.
실제 우리 활은 200미터 300미터까지 나간다고 한던데 이해가 안되네요 일본이 조총을 재빨리 수입하게 된것도 일본활의 사정거리가 30미터 남짓밖에 되지 않아 전국시대 전쟁에 이기기위해 어떻게든 조총을 수입햇던 걸로 보임
@@miju-wt1cr 화승총이 전장에서 널리 쓰인 결정적인 이유는 활보다 사거리가 길어서가 아닙니다. 활은 갑옷이나 방패로 쉽게 막을 수 있었지만 화승총과 같은 화약무기는 그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된 철제 갑옷을 갖춘 무사에게 활은 큰 위협이 못되었지만 그런 무사도 화승총 탄환에는 속수무책이였지요.
일본도 똑같은 이유로 조총을 사용했습니다. 전국시대 일본은 중무장한 무사들이 선봉에 서서 적진으로 돌진하는 전술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그런 중무장한 무사를 활로 제압할 수는 없었지만 조총은 단 한방으로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도 비슷한 이유로 건국 초기부터 화약무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조총보다 더 구식인 핸드고네류 무기만으로도 활로는 도저히 제압할 수 없었던 적을 능히 제압해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핸드고네에 불과한 승자총통을 두고 천하를 평정할만한 무기라고 호들갑까지 떨었습니다.
사거리는 화승총을 채택하는 이유가 아니였습니다. 18세기 유럽, 전열보병 시대조차 머스킷 운용 전술은 적의 눈동자가 보일 정도로 바싹 다가가서 일제 사격하는 것이였습니다. 수백미터의 사거리를 보였던 롱보우나 쇠뇌를 이용하던 유럽인들이 이런 무기를 버리고 머스킷으로 완전히 갈아탔던건 머스킷이 활보다 사거리가 길어서가 아니였음을 보여줍니다.
@@miju-wt1cr 200 300M는 숙련자 기준임 징집병들이 그렇게 다쏠수있을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조총은 일정한사거리 일정한화력의 유지가 가능합니다
@@Kwinter 전투에 숙련자 투입하지 새내기 투입하나 징용병이라도 숙련시켜
투입시키는거지 조총도 마찬가지고
저 시기 왜의 조총부대는 주력부대 아니고 극히 부분적으로 쓰였고 시중에 알려진것 처럼 3단계 전법 같은건 있지도 않은
뻥티기 소설속에나 등장하는 일본의 거짓말임
@@Kwinter모두가 이성계는 아니라는 말씀이시군요.
게임체인져급은 아니지만 비젼은 활이 아니라 조총인건 맞으니... 조선이 조총에 집착하는건 아주당연한 일인듯..
항상 무기 전술은 발전한다. 지금은 북한 핵을 고민해야 한다. 전쟁나면 핵 한방으로 모든것이 끝날 수 있다.
영상 잘 시청하였습니다 :) 몰랐던 역사적 정보를 얻고갑니다 혹시 2:33 가즈아 는 어디에서 볼 수 있나요?
임진왜란 1592입니다ㅎ
@@생생역사 감사합니다
추가로, 시종일관 활 VS 조총 이렇게 비교하는데 조선이 조총으로 대처하려 한건 활이 아니라 그 이전까지 조선의 주력 화기로 사용하던 승자총통입니다.
조선은 건국초부터 핸드고네 형태의 소형 총통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왔습니다. 매체에서 이걸 제대로 묘사한 경우가 거의 없어서 조선 전기엔 대형 화포와 활만 쓴거처럼 오해할 수 있지만 조선은 대형 화포 보다는 오히려 핸드고네 형태의 다양한 개인화기를 더 많이 사용했고 이것은 전술적으로 조선군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습니다. 기마술과 궁술에 뛰어난 여진족을 상대하면서 이런 핸드고네들을 대량 운용한다는건 조선군이 가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점이였기 때문입니다. 니탕개의 난 때도 조선군의 승자총통이 인상적인 활약을 해서 신립은 승자총통의 위력을 극찬했고, 조정은 뒤늦게 승자총통을 개발한 김지 장군을 포상했습니다.(당시 김지는 이미 고인이 된 뒤였다고 합니다. 사후에 빛을 본 셈)
승자총통과 비교해선 조총이 모든면에서 우월했기에 승자총통을 대체할 차세대 화기로 조총을 도입했던 겁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조총은 활을 전장에서 퇴출 시킨 것이 아니라 궁수와 포수가 조합되는 삼수병 체제가 도입되어 오랜 기간 병용되었습니다.
활+승자총통 에서 활+화승총 으로 바뀐거죠.
그리고 조총은 조선으로선 가성비 좋은 무기가 결코 아닙니다. 화약의 재료인 유황과 염초는 조선 중기까지 거의 대부분을 명나라로부터 수입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국궁의 재료인 물소뿔 수입보다 나은 점이 없었습니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대규모로 화약무기를 운용했지만 만성적인 화약 부족에 시달려왔습니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염초를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고 조선 내에서 유황 광산을 개발하기도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만성적 화약 부족 문제는 서구의 근대식 화약무기가 들어올때까지 해결되지 못했었습니다.
덧붙여 화승총만으론 기병 돌격을 저지하지 못합니다. 화기만으로 기병 돌격을 저지할 수 있게 된 것은 연발 사격이 가능한 총이 등장하면서 부터입니다. 고대부터 임란 당시까지 기병의 돌격을 막아내는 수단은 기병의 돌격을 거부하는 대기병 장애물과 보병 방진이였습니다. 유럽에서도 테르시오라 불리는 창병과 포수가 조합된 진형으로 기병을 막아낸거지 오직 화승총 사격만으로 기병 돌격을 막아낸건 아니지요. 따라서 화승총의 보급을 여진족 기병 대책으로 보는 것은 오해입니다. 조선은 임란 이후에도 기병을 중시했고 기병 양성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단지 조선의 사정이 나빠져서 충분한 기병 양성을 할 수 없게 된거죠.
총검 개발된 시점부터 사각방진 짜면 기병 갈려나갔지 않나요
@@저는기어다닐거에요 총검과 방진이 기본이던 나폴레옹 전쟁기에도 기병은 여전히 맹활약 했었지요.
@@agm1144 활약한 건 맞는데 보병&포병지원이 갖춰져야지 그냥 꼬라박으면 네처럼 돼요
@@저는기어다닐거에요 총검 등장 이전에도 대기병장애물과 장창으로 제대로 방진 갖추고 있는데 기병 닥돌하면 갈려나가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기병 돌격 전에 중무장 보병들이 먼저 돌진해서 대기병장애물을 제거해버리거나, 궁기병, 총기병들이 활이나 총으로 방진을 공격해 방진에 구멍을 내는 전술이 사용되었습니다. 혹은 제대로 방진을 갖추기 전에 기습을 가하거나 방진이 허술한 부분을 찾아 집중 공격했지요. 영화에서 처럼 방진을 향해서 무지성으로 돌격하면 아무리 기병이라도 참패합니다.,
조총이 물론 훈련 없이 쓸 수 있는 물건은 아니지만 활에 비하면 비교적 쉽게 징집된 병사들도 쓸수 있다는건 이후 전쟁양상도 바꿀 정도로 중요한 사실이죠. 활도 강력한 무기이지만 기본적인 숙련도가 나오려면 시간이 더 걸리고 잠깐 훈련으로는 만족할 성능이 나올순 없으니 ㅎㅎㅎ 잘봤습니다!
이 말이 ㄹㅇ인게 일반인들? 줄 한번 댕겼다가 팔 힘 다빠짐 ㅋㅋㅋㅋ 그것도 귓대기 끝까지 당기는게 정석인데 ㅋㅋㅋ
백발백중애 십수년 훈련한 명사수가 갓징집한 이등병의 총알에 맞아뒤지고혼자서 천명을 써는 무사사 갓징집한 이등병의 총알에 맞아뒤짐 ㅋㅋㅋ
그래서 조총쓰는거죠
걍 살상력을 활이 따라갈수가 없죠. 말이라는 짐승을 활 한두발로 어찌하기 힘든데. 조총은 치명이죠. 조총은 방패며 갑옷이며 관통하고. 병자호란이후 살수들도 조총병으로 전환시켰죠. 활보다 속도가 5배 빨라요(화약에너지라)
고려와 조선 초에 사용을 하건 단순히 활이 아니라 궁기병이야. 그래서 여진족 털었던거야.
조선은 활을 포기한게 아니라 궁기병을 포기한거야.
문제는 청의 중갑기병의 카운터가 궁기병이었다는거지. 그리고 화승총병의 카운터가 중갑기병이고 차라리 화승총병이 아니라 카라콜을 운용 했어야지.
하지만 카라콜을 운용하기에는 조선은 너무 가난했어.
청의 중갑기병이 카라콜 이기는건 진짜 ㅈㄴ 힘들지. 중갑기병은 느린대 경기병은 가벼워서 속도가 빨라 더구나 중갑기병은 창으로 찔러야해서 2m이내로 접근해야하지만 칼라콜은 권총이라 유효사거리가 아무리 개판이라도 5~10m야.
새 무기가 나오면 그에 맞는 전략과 전술을 가져야하는데 그러기엔 돈이 너무 없지.
카라콜을 하려고 해봐 일단 기병을 키워야하고 기병은 권총을 두자루를 가져야해. 그리고 다시 뛸 기병 1기당 말이 추가로 있어야하고 말위에서 장전을 못하니까 장전을 위한 장소와 인력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진지 구축이 필요하고 진지 수호를 위한 보병이 필요하고
보병은 포병 장창병 총병으로 구성되어야하고
전투가 시작되면 포병이 포를 쏘고 총병은 돌격하고 장창병은 그 앞에 서야해.
이런 완전히 편제된 부대가 있고 포가 동급이나 더 좋은 성능을 가졌다면 병사가 청의 절반밖에 안되도 이겼겠지.
@@마에-s5y 네 그렇습니다. 일반적인 각궁은 40J, 조총은 장약량에 따라서 700-2000J입니다. 인간 근력으로 만들어내는 위력을 지닌 냉기(칼,활,창)이 화약 폭발력으로 만들어내는 위력을 이용하는 화기(총,대포)에 비교될 수 조차 없죠. 조총의 총구 속도가 음속이 넘어가죠. 즉, 초음속입니다. 활은 시속 200km 정도이고.. 그냥 비교가 안되죠.
와, 진짜 흥미롭네요. 조총...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정말 잘 봤습니다.
강력한 자주국방만이 살길이다. 힘없는 나라는 언제든 망하게 돼있다. 강력한 국방력을 만들어야 한다.
국방은 지금도 충분하게 강합니다. 약하게 만들려는 세력들이 문제죠..
조총이 비록 활보다 사거리가 짧고 재장전이 시간이 걸려도 활보다 훨씬 우월한 병기일 수 밖에 없는게, 전장터에서 쓸만한 습사수 한명 길러내는데 최소 2년 정도 시간이 소요됨. 아무리 단기간 속성으로 벼락치기 해도 6개월은 걸림. 반면에 조총은 빠르면 1~2주, 오래 걸려도 한달이면 조총수 한명이 탄생함. 병사들이 마구 죽어나가는 전쟁터에서 병력보충이라는 면에서 비교 불가.
또한 활은 활과 화살 일일히 장인들이 손으로 만들어야 해서 생산량도 적고 비용도 비쌈. 반면에 조총은 공정만 일단 갖춰지면 대량생산 가능. 역시 병기의 보충이라는 면에서 비교 불가. 상대보다 더 격렬하게 소모하면서도 더 오래 버텨야 승리하는 전쟁에 있어, 병력과 병기의 보충이라는 면에서 뒤 떨어지는 활은 도태 될 수 밖에 없었다.
라고 영상에서 그대로 설명하네요^^
추가로 활의 경우 조준 후 사격을 하는데있어 동작이 매우 컷고 은폐엄폐가 불가능했기에 적군에게 있어 노출될 위험이 매우 컸음. 즉 상대 궁사나 척후병으로부터 표적이 되기 쉽기에 생명유지도 힘들었겠지.
하지만 조총의 경우 동작이 작고 구조물에 은폐 엄폐를 한 상태에서도 조준 사격이 가능했기에 적군으로부터 몸이 노출되는게 궁사보다도 월등히 낮았음. 즉 사수의 생명유지에 있어서도 오래 버틸수 있었음.
재미있는건 조선은 활보다 총의 사거리를 길게 봤음. 무과 시험장이나 활터에서 쓰이는 비전투용 유엽전의 수백미터 사거리는 실전용이 아님
조총 사거리가 짧다는 거는 잘못 알려진 거입니다. 조총은 무강선 활강총이라 조준이 가능한 직진성을 유지할 수 있는 거리가 50m이고 그후 무회전 특징인 어디로 날아갈지 몰라서 일뿐 실제 유효사거리(죽이든 상처를 입히든 위력이 보증되는 거리는) 250m 까지였습니다. 직진 거리 넘어가면 탄착점이 어딘 지 알수 없지만 맞으면 골로가는 거는 마찬가지입니다.
활도 또한 직접 조준해서 날릴 수 있는 거리는 40-50m이고 그후는 높이 들어서 아무나 맞고 죽어라는 식으로 여러 명이서 탄막을 형성해서 날리는 거는 조총이랑 같았습니다.
조총도 적이 멀리 떨어지면 포물선 사법을 구사해서 탄막을 형성해서 아무나 맞고 죽으라는 식으로 쏘았고 40보(50m)쯤에서는 목표물을 조준해서 쏘았어요.
그리고 정규군이 아닌 군대를 상대로 할 때 활은 위력을 발휘했지만 갑옷을 제대로 갖춘 정규군 상대로는 활은 상대가 진격을 늦추는 개념이었지 갑옷을 뚫을 수가 없었고 조총은 한방에 갑옷을 뚫어서 저지할 수 있어서 원거리 무기에 진심인 조선이 조총을 선택 안하는 거는 이상한 거죠.
우리나라 활도 전쟁용 활은 거의 100파운드급이며 90J의 운동에너지를 지녔습니다. 이걸로는 갑옷을 뚫지 못하죠. 참고로 사극에 보면 등장하는 개인용 휴대활은 40파운드급으로 전쟁용으로는 쓸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갑옷을 뚫을려면 최소 400J 이상의 운동에너지를 가져야하는 걸로 압니다. 조총은 화약 장약에 따라서 700~2000J 까지 나갔습니다.
위력 측면에서 활과는 다른 차원의 무기였습니다. 개인화기로 정규군 중장갑을 뚫는 획기적인 혁명이었죠. 중세 이후 유럽에서 활이나 석궁을 안쓴 이유가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무조건 화승총(아케버스와 머스킷)과 대포였죠. 17세기 이후 서양의 전쟁은 물론 창도 있고 칼도 있었겠지만 총과 대포의 전장이었습니다. 1700년대 중반이후는 거의 총과 대포로만 싸우죠. 접근전에서는 일반 보병들은 총앞에 대검을 꽂아서 싸웠지 칼은 써지 않았습니다. 장교나 기병대들은 말을 타고 칼을 휘둘러야해서 칼을 썼지만
@@dubu999 그리고 활은 맞어도 100%죽지않는 병기였음 근데 조총은 맞으면 거으80%죽을수밖에 없었음 당시 의원들이 와과술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했지만 구가의서에서 백광현이가 있었다면 수지 치료해 줬을텐데 아쉬움
웃자고 얘기하는것이지만
신미양요때 미군의 총은 레밍턴. 카빈과같은 엎드려서 1분에 6내지10발사격이 가능한 총을 사용했으며
그때 조선군은 임진왜란때와 비슷한 화승총을 사용했었슴.
이걸보고 어떤 역사박사님께서 이런말을 하셨슴
신미양요때 조선군은 세계에서 제일 잘만들고 훌륭한 화승총이 있었다고
내용 처음보고. 구독 ㆍ알림 쥬아요ㅡ 하고갑니다 ᆢ내용이 참신함
조선의 기병대는 숙련도가 매우높았고 또강력한 무장을 하고있었기에 조선정부도 아주굳건히 믿었건만 정작 그어떤 무기로도 뚫리지 않던 기병의 갑옷을 조총이 무참히 뚫어버렸다. 3:10 인조때도 그럴려고 했다고 합니다. 살수(창검병)의 비중을 늘리고 일부기병을 길러 청의 기병에 대항하려 했으나 일단살수의 지원하는 사람수가 너무적은데다(초시를 면제해주고 봉급도 높게해주는등 우대해주었음에도) 창검은 조총보다 저렴했으나(장창 9냥 검11냥 조총14냥) 갑옷과같은 다른장비들이 너무비쌌습니다.살수의 다른장비들(투구 18냥 두정갑(철갑) 72냥) 조총병 다른장비들(투구 18냥 지갑9냥 화약5냥)전체적으로 살수가 비쌌습니다. 그리고 기병은 한기를 양성하는데 무려600냥이 넘는데 당시조선의 경제상황으로는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활병은 병사를 양성하는데 너무오래걸려 비중이 점차낮아졌죠 결국 조총의 비중이 더욱늘어났었다고 합니다.
근데 사실 조총의 위력도 위력이지만 전국시대로 다져진 일본군의 전투경력 + 오랜 평화로 인해 무뎌진 조선군 이 두가지 콤보가 전쟁 초기에 조선군이 두드려맞았던 이유가 컸을듯
맞습니다
특히 육상에서의 백병전은 거의 백전백패 했다고 봅니다. 이겼던 전투들은 수성전이나 해전입니다. 이순신도 왜군 배가 붙어서 넘어오는 백병전은 필사적으로 피했죠
조선은 오랫동안 전쟁하면 피폐해져서 더못싸우고 평화가오래되어도 무뎌져서 못싸우고 그냥 병신나라 아니냐 ㅋㅋ
전쟁으로 다져진 북방군은 신립이 말아먹었습니다 데헷
@@저는기어다닐거에요신립은 일본군 이 여진족보다약할줄 알았던겁니다 아무리 약한적이어도 방심하면 안되는게 전쟁이죠 여진족에서잘싸운 명성을 탄금대 전투에서 한순간에 잃게되는 신립
영상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물소 뿔이 대개 명이나 일본쪽을 통해 수입하는데 이둘이 우리나라가 물소뿔 구입하면 전쟁 준비하냐고 수출 규제하는 갑질을 당한걸 생각하면 조총에 빠질수 밖에 없었겠죠ㅜㅜ
와!!해설 오지구요!!
틀린거 정정도 오지구요~
두번보고 구독 누릅니다!!
자주 볼테니 역사의 사실에 입각해 많이 해설해 주세요!!^^bbb
총은 훈련소 병아리들마저 쉽게배워서 쏠수있는 무기고, 활은 기초입문과정만 몇달임. 전쟁때 미리훈련된 병사는 거의없음 개판이지. 난이 터져도 빨리 훈련시켜 실전에 바로 투입하는게 가장 무서운 무기임
냉병기, 열병기의 차이중에는 사수의 '체력'도 있죠
냉병기는 사수가 격발에 체력을 운동에너지로 소모해야 하는데, 분당 몇발을 쏘느냐가 전투에서 승패를 갈랐죠.
따라서 지속가능한 사격발수는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핵심요소였는데 , 아무리 숙련된 사수도 활을 몇시간씩 계속해서 정확하게 쏘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열병기는 운동에너지가 화약이므로 조건만 맞으면 무한대가 가능했죠. 따라서 효율성만보면 열병기가 훨씬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한국의 궁술 실력
실록 기록에 의하면 김과 이가 백오십보 밖의 과녁에 살을 쏘는걸 내기 했는데
김이 500발 중 494발을 맞췄다 함
하지만 승리는 이 였는데
이는 만발이었다 함
500발씩 쏠수 있나요? 100발 전에 팔근육 인대 다 터질건대요.
@@안병욱-r6q 오래돼서 대충 기억을 더듬은건데 님덕분에 정확한 자료 찾아 봤습니다
박취문의 부북일기 이고
박취문과 이시복의 쏘기 시합에서 박취문이 189발을 연속 명중시켰고 이시복이 200발을 연속 명중 시켰네요
화살은 가장 많이 쏜 날은 300발을 쏜 날이네요
그리고 당진 국궁장에서는 대부분 60대 이상 노인들이고 하루 100발 이상 쏘는데 무슨 혈관이 터져요
당진 국궁장도 100보가 족히 넘어보이더만
현 국궁장 표적이 145m인걸로 압니다
만들수 있는거 하고 우수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
당시 조선의 공업력으로는 우수한 총을 만들지 못함.
가공 기술이 너무 낙후됨
조선제 조총은 후진 총임
당시 화약은 대량생산도 안되고 장기보관도 어려움. 돈 덩어리임.
조선 나라는 전쟁을 할 수있을 정도의 화약을 비축해 본적이 없음.
이미 그 시절가면 쩐의 전쟁이 시작되는 시대임.
칼, 창, 활은 쩐하고 절대적인 영향은 없음.
화포, 기병, 함대 등은 쩐하고 절대적인 관계가 있음.
그래서 너도나도 돈벌러 갔음.
땅파먹고 있는 조선 나라가 우수한 화포를 구비한다는 것은 반경제 논리에 비논리적 판타지임.
언제까지 논리를 무시할런지.
설마 조선제 화약이 중국이나 일본화약보다 우수하다고 우길런가? 서양까지 갈 것도 없음.
총 품질도 마찬가지지만 화약도 천차만별임. 당시에는 화약 성능이 그 나라의 기술 척도임.
지나친 판타지는 몸에 해롭슴.
백년 전의 고물도 안버리고 장부에 잡아 놓은 숫자라는건 알고 가야함.
정작 전쟁나면 쓸만한게 없음.
전 이댓이 현실성 있어보이네요
화약 자체는 거기서 거기구 조총도 유럽 중동 동남아 아프리카 동아시아 거기서 거기임 그리고 조선은 제작 기술력이 딸리고 그러지는 않았음
그냥 조선은 그놈의 유교 사상 때문에
상업을 천시 당연히 경공업도 낙후
그냥 가난한 나라여서 털린것
아마도 처음으로 조총을 배운건 총통수였었을거라고 봅니다.
화약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병과였었기에
조총도 금방 적응을 했을테구요
승자총통에서 조총으로 갈아탄 이유는
아무래도 편리함 때문이라고 봅니다.
승자총통에 비해 화약도 적게 들구
방아쇠 덕분에 바로 쏠수있구
명중률도 좋구 말이죠
근데 그 총통수들 싸그리 다 갈아버린것이
사르후전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무기에 맞는 전술을 개발했어야 했지만.... 스페인의 테르시오처럼 말이죠
좋은 영상 고맙습니다~!
아주 유익하고 재미있는 영상에 감사드립니다!
조총의 장점은 포수가 사망했을때 그 병력을 즉시 채울수 있다는 장점이 있음 즉, 사격술은 열흘이면 끝나고 전술교육 좀 시켜서 전장에 보내면 될 정도 인데 활은 그렇지 않음 어릴때 부터 활에 재미를 가진 사람이 활로 사냥 등 생계를 유지하다가 전쟁시에 차출 되는 것임 당연히 활의 유지보수는 알아서 할수 있을 정도니까 십수년은 활과 함께해야 그나마 전술적인 유효사가 가능함...1급 궁수가 사망하면 이후에 채울수가 없었음 이게 조선이 계속 밀렸던 이유임...왜군도 부산에 상륙하고 나서 활이 너무 살벌하게 날아와서 첫공성에 실패하고 활에 대한 방비책을 만들고 공성했다고 기록했었지만 문제는 1급 궁수가 초반에 전부 소모 됐다는것....
궁도장에서 활시위당겨본사람은 알듯
시위 당기는게 여간힘든게 아님
어지간한 숙련자가 아니고서야 과녁에 적중은 커녕 몇번쏘면 지치고 수십미터날리는것도 버겨움
그런 궁병을 저 시대에 양성하려면 훈련기간이 어마어마하게 걸렸을건데
총은 장전하는 방법이랑 조준법만 익히고 몇 발쏴보면 끝임
여담으로 신미양요나 병인양요 때 그 쏘기힘든 활을 들고
근대무기인 볼트액션을 상대했다는건 거의 말이 안될정도라는거임
조선군 무턱대고 욕하는 사람들이 놓치는게, 현실은 게임이 아닙니다. 와! 조총! 와! 플린트락! 좋아보인다고 바로바로 바꾸지 못해요. 뭔 정책을 해도 공짜인게 아니니 좋은거 알아도 결국 실행 못하고 묻힌 정책들도 많습니다. 현실은 게임이 아니라 조정에서 업그레이드 누르고 업그레이드 컴플리트! 하면 바로 모든 병력이 세지는게 아니에요...
지금도 최신 장비같은건 최전방부터 보급해주는것처럼요
임진왜란 이전에도 조선은 조총의 존재를 알았지만 활보다 짮은 사정거리와 느린 발사 속도 때문에 무시 했다가 조총의 단점을 보완해서 나온 일본군에 쳐맞으면서 조총의 위력을 실감하고 받아 들이죠 근데 웃기는 것은 조선후기 고종때까지 불을 붙혀서 발사하는 화승총을 사용해다는 것 서양인들이 고도 성장을 이루는 동안에 조선은 임진왜란때 그대로...
비싸서 개조 안했다함
뭐 틀린 말은 아닌데, 역사 잘 모르지? ㅋ
그냥 상업을 도외시한 가난한 조선의 말로
플린트락도 불 붙여서 발사하는 총인데요..
재미있는 시선 잘 보고 갑니다....감사합니다.
신립의기병대가 병자호란때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냥 궁금 ㅎㅋㅋㅋ
병자호란이 일어나지 못했을꺼고,
후금까지 성장하지 못했을겁니다.
명과 조선이 후금의 성장을 억제했으니깐요ㅋㅋ
조선후기 조총은 그냥 임진왜란당시 일본의 조총을 그대로 배끼지는 않았습니다.
활때문도 아니고 조총때문에 유린당한게 아니다.
당시 세력들이 무인들을 아주 천대시 했을뿐 아니라 군인의 처우가 아주 안좋았음. 군인은 ㅇ
가장 최악의 직업이 었던 샘.
조선의 약점은 서방들처럼 포수 기병 장창부대 섞은 부대가 아니라는것이였지요 유럽도 보면 조총보다 화승총이 있었지만 화승총 만으로는 기병을 상대할수 없었죠 프로이센 장군 프리드리히가 만들어낸 전술이 정말최고었었죠 어느한쪽에 취우치지 않은 부대였죠
그 나폴레옹이 보병 기병 포병을 조합한 제병합동술의 달인이였죠.
조선도 조총병 창병 검병 조합을 짰습니다.
제병협동전술은 조선도 사용했습니다.
조선은 서양마냥 막 몇미터짜리 장창 굴리고 그럴만한 곳이 아니여요..
당시의 조총보다 활이 좋은 무기다라는 것은 무기만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시 화승총 수준의 조총조차도 잘 사용할 경우 다양하고 굉장한 이점이 있었습니다.
1. 전장의 병사들과 말은 게임 속 유닛들처럼 어택땅 찍으면 무조건 돌격하는 무생물이 아닙니다. 활보다 총은 굉장히 큰 굉음을 울리기 때문에 적에게 공포를 심어주고 특히 말을 놀라게 하기 때문에 잘 사용된 조총이 잘 사용된 궁병보다 적을 죽이는 숫자가 적더라도, 그런 공포 유발 효과로 인해서 적을 저지하거나 적의 진형을 와해하는 효과가 컸습니다.
2. 당시의 조총보다 당시 조선활이 사정거리가 더 길기 때문에 활이 무조건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근접거리에서의 갑주 관통력은 조총이 일반적으로 훨씬 위력적이었습니다. 특히 활은 개개인의 팔의 완력과 훈련도의 기간에 크게 의존하였지만, 조총은 화약의 힘으로 나가기 때문에 극소수 명궁들이 갑옷을 관통하였다고 하더라도 훈련기간이 짧은 경우 조총병이 궁병보다 무조건 낫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위 2번과 연관된 내용인데, 활을 위력적으로 쏘기 위해 어마어마한 팔의 힘과 오랜 숙달이 필요한 것과 달리, 조총병은 상대적으로 훈련이 쉽고 그 파괴력이 일률적이므로 대규모료 육성할 시 조총병이 더 우월한게 맞습니다. 다만 대량생산 시스템 자체를 운영할 능력이 없었던 조선이 조총을 주무기로 쓰려니까 잘못된 궁합이었던 것이죠. 청나라가 발흥할 시기 서구에선 이미 대량의 총기제조를 통한 전열보병 물량화력전을 하고 있을 때, 조선은 그 명중률 낮은 조총을 소수정예라고 착각하고서 전장에 내보냈으니 소수기병에 썰린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4. 당시 조총은 명중률도 낮거니와 발사와 발사의 간격이 굉장히 긴 무기였기 때문에, 적의 돌격 특히 빠른 기병의 돌격을 반드시 막아줄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스페인의 테루시오 전법, 일본 나가시노 전투의 3단 목책, 그리고 이후 근대에 와서 서구에서 총에 검을 달아 장창병 역할도 어느정도 가능하게 바꾼 점 등, 기병에 썰려버리는 당시 머스켓 수준에 대한 고려 없이 청나라의 강력한 기병에 조총병으로 들이댄 것은 그야말로 병종의 상호보완성에 대한 기초적 이해도 없던 조선의 수준 낮은 군대 운영 능력을 엿볼 수 있지요. 게임으로 치자면, 전략게임을 하면서 아주 초보적인 유닛조합도 할 줄 모르는 저급한 수준.
5. 일본군은 조총병을 꽤 운영하였지만 비율적으로 언제나 근접보병이 다수를 차지하고, 조총병은 전략적으로 필요한 순간에 운영한 것이지, 조총병 몰빵으로 운영한 적이 없습니다. 그 유명한 나가시노 전투에서도 실제 일본 역사가들에 따르면 1만이 넘었던 노부나가 지원군 중 조총의 수는 고작 1천 정 정도 밖에 되지 않았으며 90%에 가까운 병사들은 창병, 검병, 궁병이었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적의 기마병을 와해하는 용도로 목책진지와 함께 전략적으로 쓴 것이죠. 임진왜란 때의 일본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말하자면 당시 동아시아의 조총(텟포, 사실상 초창기 머스킷) 수준으로는 수백년 후 나폴레옹 시절과 같은 무지성 전열보병 물량전이 가능하지가 않았죠. 그런데 전쟁에 대한 이해도가 없는 왕이나 책상물림 신하들이 조총 하나 때문에 졌다고 착각하고 조총병을 운영한것 입니다. 조총병을 보조해줄 창검병이 있었다고는 하나, 장창을 방진으로 짜도 기병돌격을 막을까 말까할 정도인데, 창과 검을 복합적으로 쓰는, 진형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은 애매한 창검병으로 보조하면 당연히 기병에게 썰리는건 당연지사라고 봅니다.
6. 근본적으로 전쟁은 첫번째가 돈 즉 경제력이고, 두번째가 생산력입니다. 돈도 부족하고 생산력도 딸리면 제 아무리 남의 선진 무기를 베껴와도 의미가 없습니다. 양반이 군대도 면제받고 세금도 면제받던 조선사회에서 국가가 경제력이 전쟁을 뒷받침 해줄 리가 만무하고, 사농공상에 절여져 공인들을 무시하던 문화에서 대량생산을 위한 혁신을 할 수 있을리도 없는데, 조총 몇백정 베껴서 만들어 본 들 의미가 있을 턱이 없지요.
잘보고 가용
너무 쉽게 다룰수있어서 그런거죠
결과도 최고고 김충선님 진짜 존경
근데 아쉬운건 조선의 비격진척뢰나 대장군기같은 대형 화기들이 많앗는데 전방에서 조총부대와 적절히 사용햇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기마부대를 비격진척뢰 + 대장군기
그러고 장전 그 뒤 보병 및 조총 사격후 장전씩으로 싸웟다면 홍익포가 잇엇어도 해볼만 햇을텐데 그리고 그 많던 수군은 어디로 말타고 오는 길목에 해안선만 가까우면 뻥뻥쏴줌 될텐데
조총병 훈련시킬 돈도 모자란데 어떻게 그런 중화기를 개발시킵니까
산지가 70프로이고 육로 교통이 불편한 조선땅에서 화포를 야전에 운용하는것이 여간 힘든일이 아닙니다~
그게 화약소모량도 많고 무겁기까지해서 너무 비효율 적이었음 나중에가면 현자,승자총통같은 소형화포를 운용함
훈련 잘된 부대들이 이괄의 난 때 갈려나갔음. 게다가 외침이 잦은 상황으로 나라도 반쯤 파탄상태였는데 정치적으로도 꽤나 막장이었으니까요.
그 화약이 굉장히 구하기 힘든 자원이였습니다.
조선 땅에서 염초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뒷간 흙, 부엌의 흙을 달달 긁어모아야 인공적으로 염초를 생산할 수 있었어요. 서유럽 역시 염초가 부족해서 인분을 일부러 삭혀서 염초 성분을 생산하는 대규모 시설을 만드는 등 화약은 중요한 전략 자원이였습니다.
그나마 자연적으로 염초가 나는 지역은 중국 인도 정도였는데 중국 명나라는 조선을 경계하여 염초 수출양을 철저히 통제했습니다.
그래서 대형화기를 보편적으로 굴리기 힘들었던겁니다.
일본은 염초는 안나도 대신 유황이 풍부했기 때문에 염초만 잘 만들면 조총병을 대규모로 굴릴 수 있었지만 우리는 염초 유황 둘다 안나는 땅이였어요.
멋진 영상입니다 잘 봤습니다~
확실히 조선시대 초기때까지 조선의 주력 군대는 긴 창을 들고 돌격하는 돌격기병대였는데 임진왜란 이후부터는 주력 군대가 총병으로 바뀐듯.
쬭봐리들이야 조총 창검의 조합으로 수십년간 전쟁을 치러왔던 터라... 그 전술 운용에 있어서 정말 효율적이었을 듯...
일본군처럼 5열 교대 사격은 안했나요? 궁금하네요
기병 상대로는 교대 사격이 별 도움이 안되는데다 3단 사격의 전설이 나오는 나가시노 전투도 본래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이 다케다군보다 병력이 월등히 많았기에 이긴 전투였고 이마저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병력이 6천 명이나 전사할 정도로 치열한 육박전으로 전개될 정도로 조총병의 역할은 생각외로 크지 않았습니다.
근본적인 화력과 제압능력에 있어서 냉병기는 열병기를 따라갈수가 없음. 중간에 습사용 활가지고 쏴대는 연습장의 사거리 같은게 나오는데 현실은 주력인 전투용 철전 마저 사거리는 80보 미만, 불안정한 마상 사격시엔 그의 절반으로 떨어졌음. 되려 조선은 수조규식 같은 수군 교본이나 장용영등의 훈련기록에서 조총의 사거리를 활보다 더 멀리 잡았음. 전장식 활강총도 사수에 따라 100 보이상으로 명중탄을 내기도 하는 무기인데 활과 조총을 비교하면 활은 항상 비전투시 활터 같은데서 정지된 표적을 두고 유엽전이나 목전같은 가벼운 비살상 연습용 화살을 쓴 사거리 240보 같은거나 언급하고 조총의 사거리는 50미터다 이런식으로 최대사거리와 유효사거리를 비교하는 뻘짓거리만 하는듯. 당장 이일의 상주전투에서도 왜군이 조총으로 사격을 하고 있었지만 활의 사거리가 닿지 않아 반격을 못하기도 했음.
세상 모든 활로 날고기는 민족들 결국 열병기를 주력으로 갈아탔고, 이는 조선을 관광태운 청군마저 마찬가지였음. 조선이 활 가지고 임진왜란때 성과를 냈다 하지만 정작 조선군은 1593년 부터 조총을 복제하고 있었고 정유재란땐 왜군 못지 않게 조총을 이미 운용하고 있었음
여진족이 활가지고 조총병 중심의 조선군을 이겼다고 우월하다 하는데 물론 이는 조총만 가지고 병종을 구성했을때 나타는 결점이자 조총의 시대적인 한계를 보여주는 장면임은 분명하지만
이걸가지고 조총이 활보다 열등하다 하는건 어불성설임. 당시 조선군 구성에 총을 활로 바꾼다 한들 결과는 달라졌을까? 근접 병종이 지켜주지 못하면 당대의 모든 원거리 병기는 무력할 뿐이고 패배의 원인은 신무기의 특성을 살리지 못한 저열한 조선군의 병종 구성에 있지 이걸 근거로 당대인이 평가한 우월을 평가절하 하는건 옳지 않다고 본다
조선군은 서구의 경보병들이 산병전을 벌이듯 느슨한 대열에서 조준사격을 가하는걸 무려 근접병과의 호위 없이 벌였는데 이러면 당연히 돌격하는 적병이나 기병을 못막는다
이건 나폴레옹시대 전열보병들과 경보병들도 마찬가지였음. 전장식 강선라이플로 무장해 200m는 물론이고 600m 저격기록 까지 남겼던 당대 경보병들도 적기병이 돌격하면 전열을 짜고 산병시에 맞딱 드리면 '기도 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할 정도였고 전열보병이라는 병과가 만들어진 이유이기도 했는데 당연히 전열보병으로 진화도 못하고 조합도 망가진 반푼이 조선식 테르시오에 화포도 중세식 그대로인 상태인 병종으로 기병 상대로 산병전을 벌이면 방포 한번 하고 밀려버리는건 당연하다. 당장 조선군이 병자년에 성과를 냈던 김화전투나 광교산 전투도 지세가 근접 병과 역할을 해주니 드디어 조총의 장기를 발휘 해 열병기의 힘을 보여줄수 있었다.
결국 요는 조총이 일부 한계가 있는 무기는 맞으나, 게임체인저로서 기능을 한 세계 최초의 '사수와 지휘관에 의해 사격통제가 가능한 휴대용 열병기'임은 분명하고 그 장점은 대체 불가했으며 조선이 전술을 잘 못짜 단점만 드러난거지 이걸 가지고 열병기 조총이 냉병기 활보다 뒤떨어진다 하는건 어불성설임
마치 제국주의 시절 후장식 탄피 소총가지고도 지휘관이 뻘짓하다가 열등한 무기를 가진 토착세력에게 패배했다고 원주민 고물 수석총이 후장식 소총보다 낫다 하는 사례로 쓰는것과 똑같은 꼴
여진족이 이긴 이유는 유목민의 잘 훈련된 기병이지 활이 아니죠.. 애초에 조선 활이 여진 활보다 뛰어났기도 하고..
좋은글입니다
전국시대로 오랜 내전으로 단련된 왜군 막는게 쉬운게 아니었쥬
국궁 몇개월 배워봤는데 힘들데요ㅎㅎ
저는 자신있습니다. 팔빠질 자신이요.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임진 왜란 때의 경험(항왜가 아직도 노병으로 현역이던 시절)으로 기병을 막을 목책이나 창병이 필수적이라는걸 알았을 터인데도 이런 노력을 한 흔적은 안 보인다는거.
그 외에도 간이 창병으로 쓰기 위해 대검 등을 다는 아이디어를 낼 법도 한데, 조선이 끝나는 그 날까지도 여전히 총은 총이고 창은 창인 군 체제였음.
일본처럼 창병 + 조총병 조합과 전술 운영에 대해서 많은 연구와 훈련이 필요했는데 제대로 안되었기 때문에 당함.
화약통 터지고 화약 분배도 제대로 안되고 문제가 꽤 있었음...
@@12atgh50조공 문제가 아니라 걍 나무가 없어선데요
신립 진짜…하…이래서 사람이 과거의 영광을 경계해야 하나봄…
신립도 신립인데 나라단위로 헛다리 상당히 짚은 게 컷죠. 일본을 제대로 간파한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그나마 제대로 짚은 게 이순신, 류성룡, 소수의 남인들이었음.
@춘 식 전술교리는 무슨...진흙탕에 기병 끌고 들어가는 교리도 있나...
@@추이-n5d지형을 알아야 뭘 하던가 하는데 북방에서만 놀다가 처음 와봤으니..
내가 바로 7천번째 구독자
충성충성^^7
조총이란게 바로 쏠 수 있는 현대의 소총이 아닌 듯 . . .
18세기 유럽전쟁영화를 보면 . . .
근데 조총을 사용하지 않았던 이유는 의외로 활보다 비효율적이란 말이 있던데??
그니까 지금시점으로 비교하자면... 탱크..장갑차... 이런 기갑부대보다는 드론.무인기.로봇등의 무기가 그당시 조총이라고 볼수있겠네... 그때는 게임체인져는 아니지만 나중엔 게임체인져가 예약된 신기술.신무기 임
맞습니다ㅎㅎ 나름 좋은 무기였죠ㅎㅎ
지금 생각해보니까 비대칭 전력 정도가 될거 같습니다. 아, 영상만들 때는 왜 이 단어가 생각이 안났을까ㅠㅠ
@@생생역사 영상 콸러티 좋은데요.,?! 그렇게 자책할것 까지는...
갑자기 든 감상입니다ㅎㅎ 다음편은 더 잘만들겠습니다ㅋㅋ
솔직히 물소뿔 구하기도 힘들고... 한국 기후 특성상... 활 수명이... 조총은 그냥 나무 하고 철, 화약만 있으면 어찌 저찌 운영되는데 물소뿔은 수입 해야됨.
3번 계속 봐도 재미있어ㅋㅋㅋ
조총병의 진가는 화망을 이용한 일제사격과 집중사격인데, 사르후전투 광교산 전투때 빛을 발했고 선조의 선택은 결과론적으로 옳게 되었죠
명장 신립장군이 탄금대에 진을 친 이유는
조령에 배치한 방어군이 도망자 속출로 진이 무너지니 어쩔수없이 배수진을 친거다
조선의 무능함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심각해진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게틀링건 사용하고 있을 때 활, 삼지창, 화승총을 사용했고 외국함대는 강철로 만든 함대였지만 조선은 그때까지도 판옥선에 돌대포... 답이없었다.
아 그놈의 삼지창 제발 사극으로 역사를 배우지 마세요
@@저는기어다닐거에요그만큼 약한거지
다 좋은데 조선의 다양한 화포 같은 건 다 빼놓으셨네
조총이야기라 뺏습니다ㅠ
조총에 대한 이야기이니 화포 이야기가 없을수도 있겠지요.
임진왜란때일본군의 조총부대비율은 10%내외였다하네요 ..조총땜진게아니라 적을 너무가벼이생각에 (경적필패 조선의 재승방략체재하다 무너짐
활:갑옷 못 뚫음 총: 갑옷 뚫을 수 있음 이 차이가 제일 큼
조선은 태생적으로 강한 군사력 소유가 불가능한 나라였습니다. 특히 이 성계의 위화도 회군 두차례의 왕자의 난 등으로 이미 자신들이 군대에 관한 깊은 트라우마 가 있어 강한 국방력을 가지는게 불가능 . 이렇게 회자되고 비판하는것 각개의 전투에 대한 분석은되나 무슨 국가라는게 한번전투에서 지면 국방력이 괴멸되는게 말이된다고 봅니까.
대체 어느 전투에서요..?
일본은 조총도 대출로 사고 화약도 대출로 구입했지. 게임을 보면 도구점에서 무기를 사서 몬스터를 사냥해서 보석이 나오면 다시 무기를 사는거지.
화약 한자루도 상당히 비싼데 귀를 코로 바꾸니 수익률이 50%가 되는거지. 대출은 있는데 갚는건 불가능하지. 조총을 포기하고 칼과 활로만 싸우는거지.
돈받고 팔았다는 설도 있지. 화약유지비가 안나오는데 조선은 화약을 국가차원에서 지원했으니 원없이 쓴거지.
원래부터 조총은 그렇게 오래된 무기도 아닌데 주력무기는 칼과 창이지.
평야는 조총쏘기에 아주적합한곳 .. 그리고 신립의 조총을 너무과소평가했지
그리고 우리가 병자호란때 조총병이 기마병한테 반대로 졋던이유
당시도요토미는 조총 재장전의단점을보완하기위해 조총수를 여러줄을세워 조총을바로쏘고 빠지는전략을 썻으나 우리는 그러지못했지 그래서 우리는 병자호란때 조총병이 무참히 깨지지
근데 당시 조선은 화포가 더 쌨지 솔직히 화포는 하루만해도 다 배울듯
왜군의 철포병 비율은 10%남짓이였으며 왜궁과 함께 혼용해 썼고 그들의 기다란 장창과 왜검으로 조선군의 진영을 휘저었죠. 또한 철포는 진영을 부수고 기세를 높이는 정도의 전술이였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뭔가 일이 터지고서야 해결하려는 습성이 있는듯... 씁쓸하다...
근데
저 무렵
우린 화승총 이라 부르지 않았나요?
총한번 쏴보고 활한번 쏴보면 어떤게 사용하기 힘든지 바로 알수 있지
솔직히 활은 쏘려면 2년 넘게 걸리지만 총은 4주만에 쏠 수 있으니 훈련시간이 앞도적으로 차이가 남
그거야 일본군이 임진왜란때 썻던 연사로 발사할수있는 조총이있을때 얘기고 그냥조총은 재장전 엄청오래걸려서 2년걸리더라도 활이 나음 그리고 활 가르쳐주는 사람에 따라다름 활쏘는데 귀신인 주몽한테 활 가르침 받은사람들은 1달안에 활쏘는거에 적응한걸로알음
조총은 창을 대체하는 무기고 활은 대체하는건 포라고 생각합니다
탄금대전투는 이미 십 년도 더 전에 노부나가와 신겐이 했던 전투...... 패전은 정해져 있었다...
삼단조총법
사실상 르네상스 시기에도 철기병들이 조총병한테 돌진해서 승전한 역사도 많았었지요
노부나가와 신겐이 아니라 신겐 아들 아님?
그거 개 과장된건데 ㅋㅋㅋ
나가시노 전투인가 그거
그럴리가 휴대하기 얼마나 핵편한 조총인데 활보다
김해김씨가 "우륵김"과 "가야김" 이 두가지. 우륵김의 시조는 사야가. 가야김의 시조가 김수로왕.....
나도 처음에는 활에서 조총으로 바꾼건줄 알았었는데 화력조선을 보고 난후
활이 아니라 승자총통에서 조총으로 바꾼거 란걸 알게 됨
조선은 세종때 부터 화력에 목이 말라있었고 천.지.현.황 같은 각종화포에다 개인용 화포라고 볼수있는
총통을 사용함
총통이 등장하면서 활은 총통의 장전시간을 벌어주는 수단이 됐었다고 봄
이건 조총이 등장한뒤에도 마찬가지 였었구
글쿠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때는 조총으로 무장 했지만 역으로 후금팔기군기마부대에 개쳐발린걸 보면
신립이 기마부대로 닥돌 하려고 고집을 피운 이유를 알것도 같음
근데 탄금대전투와 사르후전투의 차이점은 지형이랑 날씨의 차이 때문이라고 봄
탄금대전투의 주전장은 충주달천평야 였었고 6월 초여름에 전투를 했었는데
이 6월달이면 논밭에다 물을 대는 시기로
자동차조차도 논에 들어가면 꼼짝을 못하는데 말은 머 말할것도 없다고 봄
논에서 움직일수는 있어도 속도는 떨어질수밖에 없다고 봄
반면 사르후전투는 벌판에서 그것도 한창 추운 3월달에 전투를 했었는데
바람이 하도 불어대서 총알을 장전하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고 볼수있슴
화약이 바람에 휘익 하고 날아가 버리니까
신립의 기마부대도 그렇고 후금의 팔기군도 그렇고 둘다 창기병이 아닌
활을 쓰는 궁기병 들임
특히나 신립의 기마부대는 활외에 마상에서 쏠수있는 세총통도 가지고 있었을거라고 봄
창기병이었다면 왜군의 장창부대에 때문에 막히겠지만 궁기병이면 기마돌격을 안하고도 공략을 할수있었겠지만 지형을 무시하고 날씨를 무시한 결과는 끔직스러웠다고 봄
세총통은 문종대에 사전•팔전총통과 함께 도태된 걸로 알아요
역사 전공은 커녕, 취미로도 역사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해본적 없는거 같네요.
신립에 대해서는 식민사관 그대로 씨부린다는게 정말 어이가 없고, 임진왜란에 있어서 조총은 하나의 요소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농민이 베테랑 군인을 어떻게 이깁니까. 어디 역사소설에서 들은거 가지고 씨부리지 마십쇼 ~
조총은 분명 좋은무기였던것은 맞았습니다. 무기자체는 게임체인저가 아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사용자가 제대로 활용한다면 게임체인저가 될수있지만 무기자체만으로는 아닙니다.
저기요 총의 역사는 조총 화승총 머스켓 스프링필드인가요? 몰라서 적습니다
저도 자세히늗 공부해봐야 알지만, 조총 화승총 이건 순서가 아닌걸로 알고 있습니다. 먼저 화승총인 아르케부스와 머스켓이 등장했고, 조총은 아르케부스의 일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구에서는 두개가 같이 병존하다가 아르케부스는 소멸되고 머스켓이 대세가 되면서, 머스켓에서 총열에 강선이 추가된 라이플이 등장하였고, 탄약에서도 탄피개념이 등장하였고, 탄을 총구에 넣는식에서 뒤로 넣는식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현대식 소총이 등장한 것이라보면 될듯합니다.
@@생생역사 아 그렇군요 잘 알았습니다
조선에서 먼든 조총은 얼마나 남아있나요.. 일제와 비교해 정밀도는
한가지 궁금한게 왜 육군은 해군처럼 포를 성에 배치하지 않았을까? 성벽위에 엄청난 포를 배치했다면?
했는데요
농경국가에서 양성에만 몇년걸리는 활이랑 조총은 비교불가인듯 원나라처럼 평생 말타는게 직업인것도 아니고 평상시엔 농사짓는데
테르시오가 없는 조총병들은 바람 앞에 촛불일뿐. 결국 사르후전투에서 그 목이 달아나는 운명을 맞이하죠.
조선 후기 5군영(훈련도감, 어영청, 수어청, 총융청, 금위영) 군사 다 합쳐도 1만이 넘지 못했고 군대를 면제 받는 양인에게 군포(군대를 면제 받는 대가로 면포를 갹출)를 가혹하게 징수하고도 가난한 조선은 직업군인 1만도 유지하기가 어려운 나라였다. 당시 조선의 현실이었고 특히 인조 효종 현종(경신 대기근 1670년 1671년 인구 100만 이상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사망) 숙종(을병대기근 1695년~ 1699년 인구 100만에서 200만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사망)대 까지 거듭되는 흉년으로 훈련도감 군인들의 급료도 재 때 지급하지 못한 것이 가난한 조선의 한계였습니다. 조총은 녹슬고 총렬이 막혀 납탄이 장전 안되고 화약은 불량화약이라 위력도 없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애도막부 문화 황금기 였는데 조선은 퇴보하고 있었습니다. 정조시기 조선은 중흥기를 맞이하지만 정조 사후 안동김씨 60년 세도정치로 조선은 완전 회생 불능 나라가 되었습니다.
조총보다 석궁이 연사속도나 사거리는 더 좋지 않나요?
석궁보다 조총이쓰여진가장큰이유는 휴대성의보편화가좋았기때문이죠 석궁은장전방식이간단하고 휴대성또한좋지만 동시에 위력은낮았습니다.반대로 위력을높인석궁들은 들고가기에는 매우무겁고 또한 장전방식이 조총만큼 어려워지죠. 그래서 석궁은 공성전에서 방어할때에만 잘쓰여졌습니다. 에초에석궁을 만드는 코스트또한 당시기준으로는 상당히비쌋기때문에 여러가지의이유가있지요
조총은 방패나 갑옷을 뚫을수있음
@@user-ry8vu8rl1i 갑옷은 몰라도 방패는 막던데요?
@@Kang-kg3ux 애초 전쟁에서 방패병들이나 지휘관들 아니면 방패 안 챙김
전방에 위치한 방패병들 포탄으로 작살내고 뒷공간 조총으로 치는게 정석임
조총 장점이 볏집 같은데 숨어서 쏘면 효율 미치긴함
@@정무박-t3f 아는데 조총이 방패 뚫는다고 해서 한말
임진왜란 끝나고도 기병들 남아있었음 기병 5000 인원으로 여진족 마을 불태운 기록있음
더 값싸고 훈련시키기 쉬우니까
오죽하면 조선시대에 총을 쥐어주면 어린아이도 항우를 능히 이길 수 있다는 말이 나왔겠나?
실상 침공로별 산성방어로 진빼기가 고려-조선의 기본 방위전략이라 활보다 조총이 더유리했음 그걸 사르후 같은데 갖고가서 필드전을 하려니 안됐던거지
나였다면 조총에 대응해 석궁을 빠르게 보급시켰을듯...사정거리 장전속도 숙련화 속도 모두 조총보다 석궁보다 나은듯함
국방력이 강했던 적이 없는데, 멸망안하고 살아남은것도 대단함
그걸로따지면 고려가 대단한거지. 유럽까지 점령했던 원나라한테 유일하게 약소국인 고려가 원나라 한테 살아남았는데 속국으로 지내서 살아남은거지만
속국이였으니
이거 보니 역시 우리나라는 장인의 나라임 ㅋㅋㅋ 활도 정말 극으로 만들었다고 하고 조총도 결국 다른나라 18세기였나 19세기에 다른나라는 볼트액션인가로 바뀔 때 최고의 화승 총을 가지게 되었다고하던데 ㅋㅋㅋ
좋게 말해서 장인의 나라지 걍 틀딱이지.
걍 발전이 없는거지 있는거만 계속 개선시켜서 만들고
@@속바지입는여자는몰카 개선 시키는 것도 발전이지...
아 쫌 쉴드 칠껄 쳐라... 남들 자동차 타는데 최고급 자전거 만들었다고 좋아할 기세
@@Brown_Poodle 그 얘기 한건데..??? 타는 거랑 만다는거랑은 다르지. 남들 자동차 만들 때 최고급 자전거를 만들었다고 해야 맞는거지 넌 어째 타는거랑 만드는거랑 하나로 보니...
어찌 저리 어리석은 전략을 생각했을까?! 역시나 리더의 중요성이 입증된 경우네요!
조상들이 바보도 아니고 조총이 여러모로 좋으니까 활대신 조총에 빠진거임. 발사속도는 숙련된 궁수보다 떨어지는건 확실하지만 궁수 숙련기간보다 조총병 훈련 기간이 훨씬 짧고 장전법만 알면 애들도 강한 화력을 투사 할수 있는게 조총임. 사거리 관통력 살상력 모두 활이 조총을 따라가지 못했음.
음.... 화약이 국내수급 가능한 지에 대해서.... 화력조선 영상보면 화약원료들의 국내자급이 불가능해서 수입에 의존했다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도 교차검증 한 번 부탁드립ㄴ다.
자력자급은 가능함 그대신 한번 사용하면 없는게 문제
갑오개혁은 1894년입니다.
블러처리했어요~
그러게 하멜일행들이 갖고 있던 조총에는 무관심했냐? 하멜이 일본 나가사키에 갔을때 나가사키영주는 단번에 조총의 중요성을 알아보고 큰돈을 지불하고 샀는데..
하멜 일행이 왔을때는 이미 조선에 조총이 보편화된 시대였습니다. 또 하멜 이전에 벨테브레가 왔을때 이미 조총과 대포의 개량이 이루어진 상태였습니다. 제 기억에 하멜 일행 중 기술자는 없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계속 조선 팔도 뺑뺑이 돌린거죠
신립이랑 원균 선조 아이큐 합치면 머리 다친 우리 동네 강아지 아이큐랑 같다는게 학계의 정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