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여선교회에서 한 주에 한 번씩 화요일 점심을 해드렸던 기억이 새롭다. 교회가 돌아가면서 봉사했는데 사람이 그리운 분들이라 너무 반가워했고 서울에서 연극 봉사오는 젊은 친구들 생각난다. 건강이 너무 안좋으신 분들이 많아서 안타까웠어요. 못오시면 돌아가신 분들도 있었어요. 벌써 10년도 넘었네.
언니들 미소가 너무 예쁘시다. 그리고 너무 가슴 아프다. 어쩜 다같은. 여성으로 태어나 우리들은 뭔가 싶다. 살아야 하기땜에 어쩔수 없었단 말씀에 많은걸 생각하게 한다. 우리 언니들의 인생은 어디서 보상받지? 그냥 괜찮다고 열심히 살아 왔다고 보듬어 드리고 싶다. 예쁜 언니들 늘 건강하시고 지금이라도 행복했음 합니다. 언니들도 우리의 이웃이고 당당히 사랑받을 자격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또 눈물난다.
오솔길 따라 걸으며...즐거운 추억을 간직하고 걸어서 다시 걸으면서 즐거운 추억을 회상 하실수 있으셨으면 좋겠어요,어머님들 찾아뵙지는 못하지만 영상물 보고 너무 많이 울었습니다 20몇년전에 미국에서 미국인 남편과 사시는 어머님께서 아들 둘을 낳고 사시는데도 영어로 언어소통을 못 하신다고 하셔서 몇달간 언어습득을 하시는데 부족하나마 제 나름대로 도움을 드렸던 적이 있었는데 그 어머니께서 나중에는 제게 선생님 너무 고맙습니다 하시면서 직접 만드신 샌드위치를 건네 주셔서 제가 저희 어머니께 김치를 좀 싸주십사 해서 전해 드렸더니 어머니께서 집에서는 냄새가 나서 못 먹는다고 가족들이 마늘 냄새가 많이나서 싫어 한다고 말씀하신게 기억나네요 지금 생존 해 계시면 연세가 팔순이 넘으셨을텐데 아련한 기억에 이렇게 글을 적어봅니다,모든 어머님들 이세상에서 가장 높은 덕 그리고 행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12년 전 미국인 남편 (그 당시에는 남친)이랑 만나서 한국에서 데이트 하는데 지하철에서 양갈보라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할아버지가 생각이 나네요. 남편이 첫 외국인 남친이였고 그런 시선이 있는 줄도 모를 때여서 너무 무섭고 당황해서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2012년 그 당시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저 분들이 사시던 시대에는 어땠을지.. 이제는 아이들 데리고 가면 그냥 혼혈이라고 신기하게 쳐다보고 예쁘다고 사진 찍어가는 분들만 보이고 소리 지르거나 욕하는 분들은 못 본 것 같아요. 물론 경멸의 시선은 종종 느끼지만요. 이모님들은 진짜 시대의 희생자들이신 거 같아요.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미국에서 한 할머니를 맞났는데 미군하고 결혼해서 미국으로 오셨답니다. 그후 가족들을 초청했는데 얼마 있다가 보니 사돈에 사돈해서 자기인척 관계 로 말미암아 미국으로 이민을 온 숫자가 200여명이 된다고요. 그런데 이곳에서 사업하고 해서 기반을 잡은 다음에는 자기와 인척 관계가 되는 것응 감추고 혼자사 양반 처럼 행동한다고 하시더군요.
박완서님의 그 남자네 집에서 이웃집 여동생이 기지촌 여성이된 이야기를 담담하게 잘 그려냈습니다. 그 책을 읽고 그 시절 우리의 언니 동생들이 식구를 먹여 살리고 나라를 먹여 살리기위해 일 했고 그 덕에 잘 살게된 식구와 나라는 그들을 부끄러워하고 숨기고 싶어했다는걸 알았습니다. 저도 기회가되면 연극을 보러가고 싶습니다.
다같이 가난하던 시절 병도 죄가 되던 세상.. 지금도 아직까지 우울증이다 정신과 다닌다하면 환자로 봐주면 다행이게 많이 좋아졌다지만 저 당시에는 얼마나 더 그랬을까...당시 기지촌 서울 집창촌 덕분에 마을이 점점 커지고 돈이 생기고 사회로 발전했다고 생각하면 그 많은 여성분들은 너무 홀대받는게 당연시 되는 불합리한 세상에서 사셨다 덕분에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모님들...행복하세요
가난한 전쟁이 만든 흑역사 속 가장 피해자인 여성들 여자로 태어나서 학교도 안보내고 가난한 가족들 생계를 위해 희생한 대한민국의 누이들 입니다. 절대 그녀들을 손가락질 할수 없습니다 전쟁이 나면 가장 피해자가 되는게 여성들 이니까요. 이제 눈물을 거두시고 건강한 노후를 사십시요.당신들은 전쟁속 폐허가 된 나라를 구축하며 생활전선에 뛰어든 억순이 소녀 가장들 였으니까요.
기지촌에 여성들 건강을 하시고 용기 있게 세상 을 살아 가세요 하고싶은 말씀을 하고 지내세요 국제 결혼한 여성들 이 세계 에 훌륭한 여성들 이 많아요 좋은 분 만나 국제결혼 하세요 어디서 나 자기가 활동을 하는데 서 성공 할수 있어요 저는 국제 결혼한 1966년도 에 미국에서 살면서 활동 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여성들 용기 내시고 건강 들 하세요 담담하게 말하세요 응원 합니다
저분들 대사에 가진게 없고 배우게 없어 양공주 택했다고 회사는 못들어가도 공장은 한글 몰라도 얼마든지 할수 있는데 예전 공장다니는 언니는 학교도 못가고 한글도 몰랐어요 근데도 미싱은 A급였는데 양공주는 본인들이 선택해서 하다가 힘들고 못하겠으면 얼마든지 중간에라도 그만 둘수 있잖아요 근데 왜 정부가 보상해줘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빚때문에 팔려온 사람 아닌이상 선택과 자유가 있는데 누가 등떠밀어 억지로 강제로 한것도 아닌데 저들도 일하는 동안 순수하지 않잖아요 미군 돈뜯어내자 본인들 스스로 낙태 열번하고 낳아도 불행하다지만 미군에게 시집가는게 소원였다고 까지 하는데 왜 나라탓하죠? 사람들이 양공주와 위안부 을 같은 동급으로 생각한다는게 개인적으로 어이없는거 같아요 저들이 결코 나쁘다고 하지않아요 근데 나라 탓 하는게 저는 이상해요 그 시대 피죽도 못먹고 더 지독하게 살아온 사람들도 많은데 제가 아직 자세히 몰라서 그런가요?
8:49 아이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닌데 아이는 무슨 잘 못인가요... 아이 떼는 걸 당연하게 얘기하시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네요. 서로 간에 불행해지지 않으려고 생명을 죽이는 일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뱃속 생명도 생명입니다. 태어났다면 아이의 삶이 얼마나 창창했겠습니까? 죽을 떄까지 불행했을거라고 어떻게 단정 지어요? 그때는 그럴수밖에 없었다는 말도 이해는 되지만 생명을 지우지 않고 입양을 보낸 사람도 있다고 하시는 옆에 할머니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기지촌, 즉 미군부대 주변 마을을 일컬어 부르는 말인데, 내 고향이 파주이고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미군부대가 있었다. 당시 어렸던 나는 여늬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야한 옷차림의 그들을 양갈보 라고 부르곤 했었다.... 그러나 영상에서 나온 것처럼 마을의 주민들은 그들을 천대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며, 철없는 아이들과는 달리 동네의 어른들은 오히려 그들을 잘 대해줬다. 명절이면 고향에도 못 가는 경우가 많은 그들을 위해서 음식도 나누고, 잘 대해 주었다.. (양색시들은 마을의 일반가정에 세 들어 사는 경우가 대부분 이였다) 당시에는 너무 어려서 어른들의 그런 행동에 대하여 이해를 못 했으나 점차 성장하며 이해를 하게 됐다. 그들이 없다면.... 어찌 되겠는가? 자신들의 고국 미국을 떠나 이역만리 한국이란 후진국에 (당시 60-70년대) 와서 군 생활을 하는 젊은 그들이다.... 미군..그들도 오욕칠정이 있는 사람이고, 청춘이며 남자가 아니겠는가?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강제로 미군의 위안부가 된 경우는 없다. 개인적으로 다 이유가 있겠고, 사연이 있겠으나 어찌 되었든지 그들이 없다면... 미군부대 주변의 마을에서는 성범죄로 피해를 보는 가정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들이 있었기에 그런 범죄는 특별히 크게 일어나지 않았고, 주민들이 평화롭게 공존해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낙후했던 그 당시에는 양색새들이 미군들과 더불어 일대의 주민들을 먹여 살리는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클럽, 양복점, 세탁소, 약국 등등... 또한 미군부대에 취업한 주민들도 적지 않았다. 미군이 떠나가기 시작하던 90년대부터 점점 쇠퇴하더니 이후에는 마치 유령마을로 변한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 글을 통해서 내가 느낀 점을 쓰자면, 당시에 양색시 들... 그중에는 학력이 대단히 높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학력이 높으니 사고의 틀이 깊고 외국의 실정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그들이, 봉건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는 자신의 처지에 절망했을 수도 있었겠다고 본다. 그것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뭘까? 검둥이 미군이라도 한 놈 물어서 국제결혼을 통해.... 자유세계.. 여성들의 자유와 권리가 한국은 비교도 안될 정도로 좋은 미국을 향해, 이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을까? 그중에는 예쁘고 섹시하고 아름다워서, 청소년 이였던 내 마음을 설레이게 만들었던, 아주 가깝게 지내면서 (?) 좋아했던 여성도 있었다... 나보다 10여 년이나 연상 이였으나 정말 좋아했었다.... 그녀는 미군을 따라 국제결혼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그 뒤로 그녀의 소식은 알 수가 없었다.... 남들이야 뭐라 할지 몰라도 그들도 수줍어 할 때는 그렇게 순진할수가 없었다. 그들이 세월이 이렇게 흘러 할머니가 되어 있는 것을 보니까... 정말 세월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나도 이제 나이가 환갑이다 ㅎㅎㅎ 저 분들이 편안한 생활을 하실 수 있기를 기원한다...
"검둥이 미군이라도 한 놈 물어서"라는 구절때문에 댓글남깁니다. 글 내용으로 보아 원댓글쓰신분의 나이가 어느정도 유추가 되고, 그 성장과정과 시대배경 상, 충분히 이런 발언을 "혐오발언"인지도 모른채 그냥 흔히 하는 말임을 알고있으나, 그래도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더이상 1960년 70년대가 아닌 2021년이다보니, 사용하시는 단어에 주의를 요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원댓글러님이 말씀하시는 바로 그 "검둥이"랑 사는 한국여자다보니, 저런 단어는 그냥 보고 지나치기가 어렵네요. ^^
왜 ... 매사에 저런류의 인생에 대해서 뭔가 애증과 동정심... 어떠한 피해자적인 자세를 쥐어주는지 모르겠다 ㅋ 지들이 원해서 걍 S 산업 근로자가 됐을뿐!!! 난 저기 어디 공단지역의 하루 12시간 미싱 돌리고 일 했던 여공들과 저런류 미군 기지촌의 S 산업 근로자들이 뭐가 또 그리 다르다는건지 모르겠다 😆😆😆 지들이 좋아했고 원했고,,, 또한 미국행을 희망했기 때문에... 음... 이런 정서속에서 바로 K 페미의 탄생이 시작되는거다... 매사에 女 역할은 언제나 가련한 피해자 코스프레 😱😱😱
기지촌 여성들 이여 슬픈 마음 갓이 마세요 당신들은 하나님의 사랑받은 자녀들 입니다 인종차별 이 아닌 인간에 차별은 더욱더 마음이 아프다 생각해요 용기들 내시고 귀 죽이 마세요 미국에서 인종차별 이 별로 없는 데요 국제 결혼한 것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 여성들 힘내세요
Those people and President Park made today’s Korea. South Korean government use money those people made to buy machinery that was the start of Korea thank you for your sacrifice . S-5 kimchi GI lee
용기를 내 출연해주신 기지촌 여성노인들에대한 혐오발언은 자제부탁합니다. 더불어 코로나로 매주 화요일 진행되던 공동식사 또한 멈춘 상태입니다. 추운 겨울 작은 후원을 원하시는 분들은 ➡️ www.hessal.org
아니 어떤인간이 혐오발언을 한단말이오? 그인간도 포주같은똑 같은 몹씁인간이네,
맘이 그리도 악인이라면,감옥으로 보내야됨!진정 욕먹을인간은그인간이지!욕하는인간!
교회 여선교회에서 한 주에 한 번씩 화요일 점심을 해드렸던 기억이 새롭다. 교회가 돌아가면서 봉사했는데 사람이 그리운 분들이라 너무 반가워했고 서울에서 연극 봉사오는 젊은 친구들 생각난다. 건강이 너무 안좋으신 분들이 많아서 안타까웠어요. 못오시면 돌아가신 분들도 있었어요. 벌써 10년도 넘었네.
@@샤론-l5p 이모님들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chonulgwiin5051 열불 낸적없는데?
@@이토순-i7c 네너무애쓰셨어요뒤안길에서
평온한행복을누리실수있기를기도합니다감사합니다
굉장히 마음이 아프고 한편으로 감동이 듭니다. 버티고 애쓰시느라 얼마나 고단하셨겠습니까. 이렇게 용기내어주시니 스스로 부끄러울만큼 근사해보이십니다. 좋은 영상과 노력에 감사드립니다.
인생이 아파서 마음이 져려요. 할머님들. 건강하세요.
할머님들 탓이 아닌데. 🥲
그시절 그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가난 전쟁.너무서글픈
시절.
살아남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범한 얘기가아닌
눈물나고 서글픈
피눈물나는.인생사
입니다.
남은여생 아프지마시고
건강하고
행복하게사세요
하느님께 기도드릴께요.
눈물이 많이 났습니다 🙏
이모님 노래듣는 순간 눈물이 터져서 혼났네요~ 영상 두번째보는데 가슴 아픈 잊으면안될 이야기라 먹먹합니다~용기있게나서주신 이모님들 응원합니다
먹기 살기위해 어쩔 수 없이했기에 그동안 참으로 고생많이 하셨습니다 온 가족들 다 먹고살았던 그 시대 넘 죄송합니다 언니 여러분
어쩔수없음 님 몸 팔아유?
소름끼친다
저여자들 드림꿈꾸고 몸팔고 돈실컷썼어요
제 이웃에 살던 한국아짐 몇분도 거기서 살다 미국군인과 같이 미국 오셔서 그래도 나름 잘 적응하고 사시더라구요.그리고 누군가 버린 혼혈아기를 입양해서 잘 키우시고 결혼까지 시키고 손주들도 돌봐주시고 했는데,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그분이 생각나네요
이분들을 욕할수 없는것이 요즘이 그때 시대처럼 똑같았으면 많은 여성들이 기지촌으로 몰려들었을거에요..
환경이 주어지면 누구나가 장담을 못하지요.
마자요..지금 가는여성들과 그시절 간 요성운결이 다르죠
시대에 삶을 이기셨던 어여쁜 분들 남은여생 행복하게 사셔요!
미국에 와서 보니 70에 가까운 분 중에 미군하고 결혼해서 오신분 꽤 많이 봤어요.
언니들 미소가 너무 예쁘시다. 그리고 너무 가슴 아프다. 어쩜 다같은. 여성으로 태어나 우리들은 뭔가 싶다. 살아야 하기땜에 어쩔수 없었단 말씀에 많은걸 생각하게 한다. 우리 언니들의 인생은 어디서 보상받지? 그냥 괜찮다고 열심히 살아 왔다고 보듬어 드리고 싶다. 예쁜 언니들 늘 건강하시고 지금이라도 행복했음 합니다. 언니들도 우리의 이웃이고 당당히 사랑받을 자격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또 눈물난다.
숙자이모 순수한 모습 예쁘네요. 노래도 잘 부르시네요 ~~
오솔길 따라 걸으며...즐거운 추억을 간직하고 걸어서 다시 걸으면서 즐거운 추억을 회상 하실수 있으셨으면 좋겠어요,어머님들 찾아뵙지는 못하지만 영상물 보고 너무 많이 울었습니다 20몇년전에 미국에서 미국인 남편과 사시는 어머님께서 아들 둘을 낳고 사시는데도 영어로 언어소통을 못 하신다고 하셔서 몇달간 언어습득을 하시는데 부족하나마 제 나름대로 도움을 드렸던 적이 있었는데 그 어머니께서 나중에는 제게 선생님 너무 고맙습니다 하시면서 직접 만드신 샌드위치를 건네 주셔서 제가 저희 어머니께 김치를 좀 싸주십사 해서 전해 드렸더니 어머니께서 집에서는 냄새가 나서 못 먹는다고 가족들이 마늘 냄새가 많이나서 싫어 한다고 말씀하신게 기억나네요 지금 생존 해 계시면 연세가 팔순이 넘으셨을텐데 아련한 기억에 이렇게 글을 적어봅니다,모든 어머님들 이세상에서 가장 높은 덕 그리고 행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려운시기에 고생들 많이 하셨읍니다 살아오시느라 참많이 애쓰셨읍니다 시랑힙니다 언니들 이말밖에 안나옵니다
국가가 팔고 가족이 뜯어가고 부끄러운 짐승으로 취급받고 한 많은 그 마음 다 풀어내고 사세요.
미음이 울컥하네요...
말로는 표현할수없는..
건강하시고,행복하세요.
그러게요 전쟁 때문에 삶 자체를 송두리째 빼야끼고 넘 기막힌 아픔과 고통속에 살았던 그 시절 참 안된듯
빼앗기고
전쟁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어렵고 고단한인생을 살아가신분들...
편안하시기를....
지금 시대에 태어난 우리가 감히 그 분들의 상황을 헤아릴 수 있을까.... 힘들었던 기억 지우시고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다
안녕하세요?
인도네시아에서 온 아나라고 합니다.
이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기지촌 성매매에 대한 주제에 관심이 많아서 논문을 읽거나 다큐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이모님들 항상 화이팅하세요~
늦게 댓글을 발견했네요 한국 여성 이야기에 관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할머님들 시대의 희생자들인만큼
나라에서보호해주고 지원해줘야한다
맞습니다. 지지합니다
You wish.....and I hope...
별의 별게 다 나라에서 보호의 대상??? 😆
@@alaskakim3172 민주주의 나 인권이 뭔지도 모르는걸 티내냐? ㅋㅋㅋ
어르신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가난한 시절 저 할머님들이
가장이 되고 가족이 살았는데
할머님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
이영상을 보면서 울었습니다.....먹고살기 위해서 그길을 택하신것은 흉이 아니십니다 그 당시에는 어쩔수 없었던것 같습니다..꼭 건강하십시요
못사는나라에 태어나서
고생많으셨어요
열심히 살아오신 이모님들
감사드립니다
12년 전 미국인 남편 (그 당시에는 남친)이랑 만나서 한국에서 데이트 하는데 지하철에서 양갈보라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할아버지가 생각이 나네요. 남편이 첫 외국인 남친이였고 그런 시선이 있는 줄도 모를 때여서 너무 무섭고 당황해서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2012년 그 당시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저 분들이 사시던 시대에는 어땠을지.. 이제는 아이들 데리고 가면 그냥 혼혈이라고 신기하게 쳐다보고 예쁘다고 사진 찍어가는 분들만 보이고 소리 지르거나 욕하는 분들은 못 본 것 같아요. 물론 경멸의 시선은 종종 느끼지만요. 이모님들은 진짜 시대의 희생자들이신 거 같아요.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아픈 세월,
버텨주셔서 감사합니다ㅠㅠ
미국에서 한 할머니를 맞났는데 미군하고 결혼해서 미국으로 오셨답니다. 그후 가족들을 초청했는데 얼마 있다가 보니 사돈에 사돈해서 자기인척 관계 로 말미암아 미국으로 이민을 온 숫자가 200여명이 된다고요. 그런데 이곳에서 사업하고 해서 기반을 잡은 다음에는 자기와 인척 관계가 되는 것응 감추고 혼자사 양반 처럼 행동한다고 하시더군요.
저...혹시 송탄쪽에 정옥자 라는 할머니를 아시나요..나이는 80가까이 되실겁니다.제가 어렸을적 돌봐주시던 분인데..저희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연락이 되질않네요..제가 이모할머니라고 불렀고요..제 기억에 중지손락이 반이 없으셨던 기억이 있습니다.꼭 찾고싶은데 찾을길이 없네요..신장동에 살고 계셨는데..찾을수 있을까요..?
지금의 대한민국은 가장 낮은곳에서의 희생을 깔고 일어선 대한민국이지요
무지하던 시대에 선택이라는것을 할수 없던 아품의 시대였습니다.
이모님들은 아날로그 세대중에서 희생하신 선배님들이십니다,,
우리 후배들이 이모님들의 희생이 빛으로 승화되도록 살아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양공주"란 말을 자진해서 사용금지 합시다.
노래가 정 말 감동적입니다 ‥어쩌면 모두는 피해자 인지도 모릅니다 남은생 행복하시길‥
너무 마음이 아프네요ㅠㅠㅠㅠ
먹고 살기위해 어쩔수 없이
선택 하셨던 거기에 어느 누구도
욕할수 없는 부분입니다 고생 하셨습니다 ~~
박완서님의 그 남자네 집에서 이웃집 여동생이 기지촌 여성이된 이야기를 담담하게 잘 그려냈습니다. 그 책을 읽고 그 시절 우리의 언니 동생들이 식구를 먹여 살리고 나라를 먹여 살리기위해 일 했고 그 덕에 잘 살게된 식구와 나라는 그들을 부끄러워하고 숨기고 싶어했다는걸 알았습니다. 저도 기회가되면 연극을 보러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돈들벌어서 가족들 쳐먹여살리고 알기는하겠냐 . 가엾은 할머니들
좋은 영상,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영상 만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잘 봤습니다.
밤마다 얼마나 미군에게 학대를 받았겠어요 넘 불상합니다
가족을위해 내몸받쳐 살았건만 그가족들누나언니 들 위해주었으면
남은여생 잘사시길
힘들게 사셨네요
이젠 행복하시길
에휴;;;, 시대가 시대니 만큼 어려웠었죠 고생하셨네요
이모님들의 인생 연극 보러 가고 싶네요..
천사는 따로 있는게 아닙니다.
그동안 수고가 많으셨어요 앞으로 남은생 즐겁게 행복하게 즐기며사세요
그저 눈물만 ㅠ_ㅠ
숙자이모는 참 사랑스럽네요
다같이 가난하던 시절 병도 죄가 되던 세상..
지금도 아직까지 우울증이다 정신과 다닌다하면
환자로 봐주면 다행이게 많이 좋아졌다지만
저 당시에는 얼마나 더 그랬을까...당시 기지촌
서울 집창촌 덕분에 마을이 점점 커지고
돈이 생기고 사회로 발전했다고 생각하면
그 많은 여성분들은 너무 홀대받는게 당연시
되는 불합리한 세상에서 사셨다 덕분에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모님들...행복하세요
속아서 팔려갔단 말은 들어도 스스로
찾아간 예도 있군요 그만큼 절박해서
였겠죠 이 또한 시대의 아픔 .. ㅠㅠ
다들 밝으시구 동병상련의 정으로
오랜 친구로 건강히 잘 지내시길 ..
옛생각 하시며 은희의 꽃반지 끼고
부르시는 분 너무 청순해 보여요 웬지
맘이 아릿하네요 여생 편안하세요
가난한 전쟁이 만든 흑역사 속
가장 피해자인 여성들
여자로 태어나서 학교도 안보내고 가난한 가족들 생계를 위해 희생한 대한민국의 누이들 입니다.
절대 그녀들을 손가락질 할수 없습니다
전쟁이 나면 가장 피해자가 되는게 여성들 이니까요.
이제 눈물을 거두시고 건강한 노후를 사십시요.당신들은 전쟁속 폐허가 된 나라를 구축하며 생활전선에 뛰어든 억순이 소녀 가장들 였으니까요.
그만 !!! 구질 구질한 피해자 코스프레 !!!
기지촌에 여성들 건강을 하시고 용기 있게 세상 을 살아 가세요 하고싶은 말씀을 하고 지내세요 국제 결혼한 여성들 이 세계 에 훌륭한 여성들 이 많아요 좋은 분
만나 국제결혼 하세요 어디서 나 자기가 활동을 하는데 서 성공 할수 있어요 저는 국제 결혼한 1966년도 에
미국에서 살면서 활동 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여성들 용기 내시고 건강 들 하세요 담담하게 말하세요
응원 합니다
이런분들의영혼은너무도순수함이저연세에도드러납니다 그져몸하나로만살아왔을뿐사회의변화와이용과는너무절제되어왔기에안타깝습니다
행복하세요
어려운시절 태어나서 어쩔수 없는선택일수도 ..
박정희 가 달러 에 눈멀어 어린여성들을 인신매매 로 경제 올리는데만 적적극극 그래놓고 양색씨니 양갈보니 양공주니 하면서 국민들은 손가락질 하고 포주들은 피빨아먹는 자들 다 지들이 돌려받을것다
그렇겠지요, 어느누가좋아서 택하겠어요.그당시 식구들 먹여살기위해서였겠지요~에으 ㅉ 가난이 지옥이요~~
저분들 대사에 가진게 없고 배우게 없어 양공주 택했다고 회사는 못들어가도
공장은 한글 몰라도 얼마든지 할수 있는데
예전 공장다니는 언니는 학교도 못가고 한글도 몰랐어요
근데도 미싱은 A급였는데
양공주는 본인들이 선택해서 하다가 힘들고 못하겠으면 얼마든지 중간에라도 그만 둘수 있잖아요
근데 왜 정부가 보상해줘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빚때문에 팔려온 사람 아닌이상
선택과 자유가 있는데
누가 등떠밀어 억지로 강제로 한것도 아닌데
저들도 일하는 동안 순수하지 않잖아요
미군 돈뜯어내자 본인들 스스로 낙태 열번하고
낳아도 불행하다지만
미군에게 시집가는게 소원였다고 까지 하는데
왜 나라탓하죠?
사람들이 양공주와 위안부 을 같은 동급으로 생각한다는게 개인적으로 어이없는거 같아요
저들이 결코 나쁘다고 하지않아요
근데 나라 탓 하는게 저는 이상해요
그 시대 피죽도 못먹고 더 지독하게 살아온 사람들도 많은데
제가 아직 자세히 몰라서 그런가요?
포주들 때문에 떠날수가없다고 했는데
@Patricia 그러니까요 배우게 없어 공장도 못갔다라는게 핑계죠 당연 공장은 초보부터 시작해서 기술 배우는건데
다른거 하고 싶어도 안받아줘서 할수없이 양공주일 했다는 감성팔이 같은 핑계 너무 싫음
가슴 아픈 전쟁의 희생자들 그러나 당신들이 한국을 잘살게 만든 애국자입니다~~
건강하세요 웃으며 이야기하시고 인생을 즐겁게 사세요~~
난 90년대 후반 2000 연대 초반에 미군으로 평택에서 근무 했는데; 그 당시에는 나이 많이 드신 한국 할머니들은 홀에서 서빙만 하고, 접개부들은 거의 다 필리핀 그리고 소련 여자들만 있었습니다.
나이들고 마담된 할머니들 많음, 송탄 셀리라는 여자도 길거리에서 자주 돌아다녔는데
성을 돈받고 판거잖아요 나라가 힘이 없어서 더 상처가 많을것입니다
Many good program from KBS, sadly there is no English subtitles.
핵심은 국가가 관여하고 저질렀다는것,
그리고 끌려온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오기보단 인신매매 당하거나 빚에 팔려오거나 취업알선한다면서 사기당해 온 사람들이 대다수. 탈출해도 신안 섬노예처럼 경찰과 공무원이 한패였고 탈출한 사람들 체포하는등 ㅈ같은 짓거리 많이 저질렀지.
제2의고향이라고 할수있는 안정리를 유투브에서 보니까 맘이 이상하네 어릴때 기억이 있는곳 부용초등학교 청담중학교 양공주누나들 눈물나네
8:49 아이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닌데 아이는 무슨 잘 못인가요... 아이 떼는 걸 당연하게 얘기하시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네요. 서로 간에 불행해지지 않으려고 생명을 죽이는 일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뱃속 생명도 생명입니다. 태어났다면 아이의 삶이 얼마나 창창했겠습니까? 죽을 떄까지 불행했을거라고 어떻게 단정 지어요? 그때는 그럴수밖에 없었다는 말도 이해는 되지만 생명을 지우지 않고 입양을 보낸 사람도 있다고 하시는 옆에 할머니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나이 들어도 웃을때 입모양이 예쁘네. 젊었을때 엄청 예뻤겠다
기지촌, 즉 미군부대 주변 마을을 일컬어 부르는 말인데, 내 고향이 파주이고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미군부대가 있었다. 당시 어렸던 나는 여늬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야한 옷차림의 그들을 양갈보 라고 부르곤 했었다....
그러나 영상에서 나온 것처럼 마을의 주민들은 그들을 천대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며, 철없는 아이들과는 달리 동네의 어른들은 오히려 그들을 잘 대해줬다.
명절이면 고향에도 못 가는 경우가 많은 그들을 위해서 음식도 나누고, 잘 대해
주었다.. (양색시들은 마을의 일반가정에 세 들어 사는 경우가 대부분 이였다)
당시에는 너무 어려서 어른들의 그런 행동에 대하여 이해를 못 했으나
점차 성장하며 이해를 하게 됐다.
그들이 없다면.... 어찌 되겠는가?
자신들의 고국 미국을 떠나 이역만리 한국이란 후진국에 (당시 60-70년대) 와서
군 생활을 하는 젊은 그들이다.... 미군..그들도 오욕칠정이 있는 사람이고, 청춘이며
남자가 아니겠는가?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강제로 미군의 위안부가 된 경우는 없다.
개인적으로 다 이유가 있겠고, 사연이 있겠으나 어찌 되었든지 그들이 없다면...
미군부대 주변의 마을에서는 성범죄로 피해를 보는 가정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들이 있었기에 그런 범죄는 특별히 크게 일어나지 않았고, 주민들이 평화롭게
공존해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낙후했던 그 당시에는
양색새들이 미군들과 더불어 일대의 주민들을 먹여 살리는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클럽, 양복점, 세탁소, 약국 등등... 또한 미군부대에 취업한 주민들도
적지 않았다. 미군이 떠나가기 시작하던 90년대부터 점점 쇠퇴하더니 이후에는
마치 유령마을로 변한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 글을 통해서 내가 느낀 점을 쓰자면, 당시에 양색시 들...
그중에는 학력이 대단히 높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학력이 높으니 사고의 틀이 깊고
외국의 실정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그들이, 봉건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는 자신의
처지에 절망했을 수도 있었겠다고 본다. 그것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뭘까?
검둥이 미군이라도 한 놈 물어서 국제결혼을 통해.... 자유세계.. 여성들의 자유와
권리가 한국은 비교도 안될 정도로 좋은 미국을 향해, 이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을까? 그중에는 예쁘고 섹시하고 아름다워서, 청소년 이였던 내 마음을
설레이게 만들었던, 아주 가깝게 지내면서 (?) 좋아했던 여성도 있었다...
나보다 10여 년이나 연상 이였으나 정말 좋아했었다....
그녀는 미군을 따라 국제결혼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그 뒤로 그녀의 소식은 알 수가 없었다....
남들이야 뭐라 할지 몰라도 그들도 수줍어 할 때는 그렇게 순진할수가 없었다.
그들이 세월이 이렇게 흘러 할머니가 되어 있는 것을 보니까... 정말 세월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나도 이제 나이가 환갑이다 ㅎㅎㅎ
저 분들이 편안한 생활을 하실 수 있기를 기원한다...
"검둥이 미군이라도 한 놈 물어서"라는 구절때문에 댓글남깁니다. 글 내용으로 보아 원댓글쓰신분의 나이가 어느정도 유추가 되고, 그 성장과정과 시대배경 상, 충분히 이런 발언을 "혐오발언"인지도 모른채 그냥 흔히 하는 말임을 알고있으나, 그래도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더이상 1960년 70년대가 아닌 2021년이다보니, 사용하시는 단어에 주의를 요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원댓글러님이 말씀하시는 바로 그 "검둥이"랑 사는 한국여자다보니, 저런 단어는 그냥 보고 지나치기가 어렵네요. ^^
왜 ... 매사에 저런류의 인생에 대해서 뭔가 애증과 동정심... 어떠한 피해자적인 자세를 쥐어주는지 모르겠다 ㅋ
지들이 원해서 걍 S 산업 근로자가 됐을뿐!!!
난 저기 어디 공단지역의 하루 12시간 미싱 돌리고 일 했던 여공들과 저런류 미군 기지촌의 S 산업 근로자들이 뭐가 또 그리 다르다는건지 모르겠다 😆😆😆
지들이 좋아했고 원했고,,, 또한 미국행을 희망했기 때문에...
음... 이런 정서속에서 바로 K 페미의 탄생이 시작되는거다...
매사에 女 역할은 언제나 가련한 피해자 코스프레 😱😱😱
불과 몇년전까지만도 있었던 미아리텍사스 출신 여성들의 공동체도 생겼으면함. 그런곳이야말로 납치당해서 인신매매당하신 진정한 피해자들이 많은곳인데 .
다시는 이런일이 😢없어야 겠습니다 아픈 역사네요
제이슨엄마^^ 지금까지 잘 사셨나요? 파주 선유리에서 신촌에 내 대학졸업식도 오셨었죠 ㅋ, 보고싶어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알수없는 알고리즘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경기도에서 의미있는 사업 많이 하셨네요
이모님들 항상 화이팅하세요
어려운시기 넘기느라 마음고생이 많았겠어요
사기치고 도둑질하는것이 아닌데 무슨죄가되겠습니까
용기를 가지세요
전쟁시에는 가장슬픈희생자가 아기들과 여자들입니다
먹고 살기위해 한일 누가뭘 어떻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고생하셨어요
나라가 가난하면 여성과어린이들이
불쌍하죠 😔
힘내세요!! 응원합니다!
누구도 정죄할수 없습니다 하늘아래 다 같은 영혼들일뿐
세상에나! 넘 불쌍해! ㅉ
당신들이 진정한 애국자입니다 고맙습니다.
지지리도 못살고 집집마다 육남매 칠남매 이랬던 시절.. 그중에서도 공부 잘하는 자식이나 아들에게만 도와주고 나머지는 공장 같은 곳에 다 현장투입 하던 시절인데.. 그중에서도 정말 일해먹고 살기 힘든 케이스의 경우 여성들이 기지촌으로 많이 갈수밖에 없었죠..
대한민국 아푼역사입니다 울지마세요 할머님들 사시는동안 건강하세요
Sad...
2024년인데.어떻게지내시는지.편한하신지.
기지촌 여성들 이여 슬픈 마음 갓이 마세요
당신들은 하나님의 사랑받은 자녀들 입니다 인종차별 이 아닌 인간에 차별은 더욱더 마음이 아프다 생각해요
용기들 내시고 귀 죽이 마세요 미국에서 인종차별 이 별로 없는 데요 국제 결혼한 것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 여성들 힘내세요
참불쌍하다
진짜 국가에서 제대로된 배상을 했으면 합니다
저는 동두천에서 나고자라 혼혈친구들도 있었고 지금은 놀스캐롤라이나에서 삽니다 가끔 미군과 결혼해 와서 사시는 분들을 종종 뵙습니다 그 자녀분들과 제가 같은 세대인데요 혼혈인 자녀분들은 같은 사람이라고 저를 엄청 반가워 하세요 그중엔 동두천 출생도 있고요 한국말은 다 잊었지요 저도 반가워 합니다
본인들 엄마가 한국사람이라고 저를 소개시켜주시는데 동두천이 친정이라고 하면 저를 피하세요 참 안타깝습니다
나라가 부강해야 함!
나라 하고 아무 상괸도 없는디...
뭐 선진국권에선 S 산업 근로자가 없더냐 ㅋ
ㅠㅠ
전후의 나라 생계를 저 분들이 책임졌네. 지금의 삼성전자. 자랑스러워해야 할 분들을 범죄자 취급했네.
가난이 원수...
어려운시기 달러 벌어드려..나라에 도움 많이 된 분들입니다..
평택.....쌈리 가본지 언제던가 ㅠㅠ 그 언니들 잘사나
베트남 패망이후 ..여대생들도 수없이 화류계로 진출햇네요...국가가 경제강국이어야지 이런일 이 없는것입니다...6.25전쟁이후 우리나라 세계 꼴찌엿지요 ...
대한민국이 이양반들에게 의지 하던 때도 있었다.....
They are survivors. They are US...
그당시에 나라가 가난해 정부로 부터 외환을 벌어들이기 위해 기지촌 여성들을 이용 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분들 용감히 지난 그것들을 말할수록 있는 용기 . 감사 합니다.
부디, 우리 이모님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소원합니다.🌷
미군아이를 낳은 여성도 제법있었고 결혼하여 미국도가는데 대게는 그후이혼하였으며 그래도 그것이 우리사람에게는 드림을 실 천하는 길이옄ㅆ다
THEY ARE US!
아직도 그쪽에서 산다는게 신기하네요
우리는 기지촌 할머님들 국가에서 보살펴 주어야된다 달러번다고 애국자다. 할때는 언제고 지금는 갈시하면 안돼죠
Those people and President Park made today’s Korea. South Korean government use money those people made to buy machinery that was the start of Korea thank you for your sacrifice . S-5 kimchi GI lee
Absolutely! 박정희 정귄에도 dollars 를 벌수있는 도움을 준애국자님들! 정말로 그시대 끔찍히도 가난.가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