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 독서로 인해 깨달은 점은 딱 두가지로 요약되었어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일체 유심조... 그냥 생각하는대로 보이는게 세상임 그리고 다 경전이나 언어에 속지 말라고 이야기 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나 성인들... 자신들은 엄청나게 텍스트를 읽어서 그 경지까지 간게 팩트임
영상의 논증과 결론이 모두 멋집니다. 불교에서 무기(無記)라고 하는 결론인 것 같습니다. " '의미가 있느니 없느니' 말하는 것 자체가, '저승이 있느니 없느니' 말하는 것 자체가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 헛소리다. " 라고 하셨죠. 하지만, 모든 것이 헛되지는 않습니다. 사람이란 늘 망각하는 존재라서 심지어 깨달음조차 깨달았다 하더라도 가만히 있으면 생경해기지 마련이지요. 그렇기에 절에 가면 있는 불상, 불경, 수행의 계, 부처... 불교 밖에 있는 철학, 논리, 논증, 유튜브... 심지어는 악한사람 아수라장 무논리 가짜뉴스 등등 세상의 추한것들까지도(이경우엔 반면교사) 모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서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유튜브 영상으로 늘 철학의 달을 가리켜주시길!
9개월 전 선생님의 비트겐슈타인 영상을 보고 생애 최고조로 깊은 환희를 느끼고 크디 큰 깨달음을 얻은 뒤 다시금 이 영상으로 찾아왔습니다만 이번에도 역시 그 황홀한 환희는 그대로군요. 깨달음이란, 영상에 나온것 처럼, 본디 개인만의 영역이자 한 단어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겐 1이 진정 깨달음이 될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2가 진정한 깨달음이 될 수 있는 것 처럼 말입니다. 결국 중요한것은, 자신만의 그 불가형언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겠지요. 이런 영상들이 모두 제 인생의 신념이자 가치관이 되었다는 점에 무한히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만의 '깨달음'을 또 하나 만든것 같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마지막 결론이 좋은 말씀입니다 훌륭하십니다 💖👍 따로이 깨달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환상놀음 입니다 하늘에 핀 무지개를 쫒아서 무지개만 보고 걸어가다 낭떠리지 에 떨어져 죽습니다 깨달음 쫒다 인생 망가지고 폐인되는 경우 허다 하지요 가짜에 속아 환상놀음을 하다 허송세월 하는 것입니다 성철스님이 어느정도 수준이신지 는 모르나 세상속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셨더라도 그 마음상태 유지가 가능하셨을까요? 그 진여의 자리, 깨달음 자리에서 24시간을 머물수 있으셨을까? 하는 의문이 있지요 진짜 공부는 온실 속에서 하는 게 아니고 생존의 처절한 전쟁터예서 해야 제대로이죠 스님들에 대한 그런 환상 갖지 맙시다 그러나 믿고 싶습니다 훌륭하신 고승님들, 스님들이 진실을 알았고 , 아는 만큼 행동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말이죠 우리들 모두 노력합시다 위선자가 되지 않기 위해 ..
지눌스님의 수심결과 육조의 육조단경 모두 재밌게 봤는데요. 돈오돈수 돈오점수 깨닫고 난뒤에 보면 다르지 않습니다. 산 정상에 올라 뒤돌아보고 너 어디로 왔니? 했더니 a코스로 온사람 b코스로 온사람. 코스만 달랐을 뿐입니가.근기에 따라 자기에게 주어지는 길이 다른거죠. 정상에 올랐으나 올라온 길이 다르기에 둘다 같다 할 수도 없고. 어느 한길이 낫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진실은 다만 길이 달랐을 뿐. 모두 진실. 중도입니다. 사실 근기,돈오돈수,점수라고 하는 것도 관념적으로 표현한 것이지 실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달을 가리킨 손가락이 존재하는 것처럼요. 내 모순을 알아보고 참회하고 감사함이 마음그릇에 차면 스스로 알게되지요. 나는 똥만드는 기계란 사실을 ㅎㅎ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금강경- 유투버님의 깊이 있는 헛소리에서 내공이 느껴집니다. 꾸벅
영상, 강의, 모두 멋지네요.. 깨달음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도 그것을 말로 책으로 기술할 수 없고 햬도 달이 아닌 손가락을 보는 셈이니... 불가의 각이란 철저하게 '사적언어'라는 것이 이해됩니다. 더더구나 깨달았다는 사람들끼리 서로 아니라고 하는 판국에 이르면...과연 그 '깨달음'이란 것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이릅니다. 암튼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인간은 뇌에서 언어로만 생각할 수 있다. 어떠한 체험은 다양한 감각에서 시작되지만, 결국 최종적으로는 뇌의 알고리즘을 통해 어떠한 단어로 도출되어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비트켄슈타인은 이것을 언어놀이라고 표현하였다. 노자의 사상처럼 “깨달음”을 어떠한 문장이나 언어로 정의 한다면 그것은 더이상 깨달음이라고 하기 어렵다. 인간은 뇌에서 전기신호를 이용하여 현상을 해석하고 언어를 통해 이야기를 지어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것이 또 모든것이 될수도 있는 것이다. 이 내용이 참 현묘하다고 할 수 있다. 결론: 제 댓글도 헛소리 입니다ㅠ
저는 종종 배를 타고 갔으면 배에서 내려야지 배를 타고 있으면 강을 건너지 못한다고도 비유합니다. 손가락과 달의 비유와 같죠. 헛소리긴 하지만, 헛소리도 손가락이나 배 쯤으로 생각해보면 좋겠네요. 배도 손가락도 필요하니까요. 오늘 영상도 재밌게 잘 보았습니다. 주제를 쉽게 잘 정리해주시는 건 선생님의 탁월한 능력이고, 그만큼의 고심과 노력이 있었겠지요? 감사한 마음 듬뿍 남깁니다~^^
사적 언어 논증의 요지는 깨달음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닌가가 아닌 깨달음이라는 것 자체가 매우 개인적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에, 세상에 흩뿌려진 글과 언어에 현혹되거나 철학적 논의를 하는 등의 활동에 쓸떼없는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깨달음의 철학적 논의는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논의는, 깨달음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아닌 깨달음과 같이 언어로 상세히 표현될 수 없는 어떠한 개념들에대한 철학적 논의이기에 충분히 의미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사적 언어 논증의 요지를 깨달음의 객관적 여부가 아니라고 받아들인다면, 그 자체로도 의미가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좋은 영상 감사드립니다!
어릴적 중학생때 우연히 보게된 성철스님의 영원한자유라는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오랜시간이 흘렀네요. 언어로는 한계가 있고 여기 유트브에서 언어로 얘기하는 것처럼 말 언어는 어떤 동기, 무브먼트를 유발할 수 있는 힘이긴 합니다. 그치만 모든 갈증을 해소하기엔 1프로도 부족하죠... 삶은 실제가 아니고 실제와 같은 착각이 드는 연극일 뿐인것 같아요(본인의 의지가 들어간, 여기서 의지도 현생의 의지) 성철스님도 본인이 아닌이상 우리가 깨달으신 분이다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언어에는 한계가 있고 그 안에서 말씀을 전하셨으므로. 성철스님이 하신 말은 딱히 새로운 얘기가 아니기도 하구요.. 관련 서적 조금만 봐도 알수가 있느니, 하지만 저같은 사람들 깨우침에 입문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너무나 감사한 스님이십니다.
좋은 영상과 내용 항상 감사드립니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는 저도 나름 고민해 보았던 문제입니다. 제가 나름대로 정리본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논쟁에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요소 하나가 빠져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논쟁이 커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 요소는 바로 수련을 하고 있는 각각의 한명의 수련자 그 개인입니다. 수련을 하는 것은 결국 한명의 사람이므로 이 존재를 빼놓고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하는 논쟁은 무의미하게 됩니다. 즉 돈오돈수 돈오점수의 주체는 바로 한명 한명 개인의 수련자가 됩니다. 이것을 인간이라고 하는 종 전체를 기준으로보면 오류가 생기게 됩니다. 따라서 그 한명의 수련자가 돈오돈수형의 기질을 가졌다면, 그 사람에게는 돈오돈수가 맞고, 그 수련자가 돈오점수형의 기질을 가졌으면 그 사람에게는 돈오점수가 맞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다분히 이론적인 면에서 보았을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실질적인 측면을 보았을 때는 돈오돈수형의 인간은, 수련자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경우에는 돈오점수가 맞게 됩니다. 돈오돈수냐 돈오점수냐 이 자체에만 빠져버리면 오히려 다른 큰 것을 놓치게 됩니다. 좀더 넓게 보고 다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언어의 한계성과 사고의 틀에 갖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즉 결론은 "둘다 맞다"인데 "이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가 됩니다. 아무튼 아침 일찍부터 좋아하는 내용의 영상을 볼 수 있어 기분 최고입니다. ^^ 오늘 하루도 즐거운 하루 되십시요 화이팅입니다 ^^
님의 글이 더 이해를 깊게 해 주네요. 철학적 논의가 헛소리라고 하더라도 왜 스님마다 다른 주장을 하셨는가에 대한 고찰은 의미가 있지요. 사실 저는 깨달음과 수행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다만 같은 수행이라도 깨닫기 전의 수행과 깨달은 후의 수행은 차원이 좀 다른 것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요.
기억은 외현기억과 암흑기억으로 크게 나뉩니다.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뉘는 것처럼. 그리고 외현기억을 담당하는 신경과 암흑기억을 담당하는 신경은 나뉘어져 있어서 하나만 한다고 다른 것이 저절로 기억되지는 않습니다. 마치 수영 이론을 들었다고 수영할 수 없는 것처럼, 그리고 수영이 가능하다는 이론적 사실을 알지 못하면 수영 시도 자체가 힘든 것 처럼,,,,,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은 외현기억에 해당하고 달은 암흑기억에 해당한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외현기억의 헛점은 익숙해지면 암흑기억도 할 줄안다는 착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의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영상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의문은 수준을 고려하지 않아서 나오는 것이라 봅니다. 일단 깨달을려면 깨달음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근데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소위 에고인데 그 에고를 초월하는 것이 깨달음이기에 결국에는 깨달으려는 욕망도 버려야 합니다. 언어적 가르침도 마찮가지죠. 초반에는 많이 들어서 채워야 합니다. 왜냐면 그래야 방향 설정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끝으로 갈수록 비워내야 하죠. 궁극의 진리는 형상이 없는데 언어는 자동적으로 어떤 상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모순이라고 하는 것은 과정을 고려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과정마다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시작하는 단계에서 필요한 것과 끝나는 단계에서 필요한 것이 다릅니다. 근데 그런 과정과 수준을 무시하고 본다면 모순처럼 보이지요
깨달음은 개인적인 체험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아무리 읽어도 그게 뭔지 모르겠었는데 마음이 달라지고 현실이 변하는걸 체험하고 나서는 그 설명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 잘 이해가 된다는게 다른점입니다. 그럼 깨달음 이전과 이후의 내가 엄청 다른 사람이냐하면 그건 아니라는 거죠. 다만 이전에 거슬리던 상황들이 스트레스 받던 일들이 더이상 현실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건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성철스님은 현실에 더이상 번뇌가 안나타나므로 완전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지눌스님은 번뇌 자체는 계속 나타나지만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므로 그런 상황을 마주보는 일은 계속된다는 말씀으로 이해가 되네요.
깨달음의 정의는 뭘까요? 틀을 깨고 어딘가에 다다른다~그걸 깨달음이라고 배웠습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모든 게 처음부터 완벽한 건 아닌데... 각자의 정의와 개념에 따라서 언어는 가변적임을 알기에 블교에서의 깨달음 논쟁은 언제나 공허하게만 여겨집니다. 잘 먹고,잘 살면,그게 가장 잘 깨달은 사람입니다. 이 문구 또한 물질적인 해석만을 하는 사람은 어쩔수 없이 그 또한 그렇게 살면 그 뿐이고요.... 항상 철학의 현실적 조명을 해주시는 영상들에~감사합니다!
깨달음~~~도데체 무엇을 깨닫는다고 하는걸까요? 인간의 본성 참나가 도데체 뭘까요?.자신의 영혼육중 자신의영을 아는것입니다. 저는견성했습니다. 나의 본성이 오욕칠정의생각감정오감의 혼이 아니라 또 이 육체가 아니라 나를존재하게하는 에너지 영이 있는것을 아는것. 영의 성질을 정확히 본것을 돈오 라고하는거구요. 그 영(신령영)의 성질을 우리의 혼에 강력한영향을 주어 성스럽게 금방 살아갈수 있는것을 돈오돈수 점차로 영의 성질(영성)을 우리의 생각감정오감에 영향을 주는것을 돈오점수라 합니다.
중생이 '견성' 즉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교'즉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이 필요하죠 또한 깨달음(견성)이란 자체는 마음이 마음의 어떤 상태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에 즉 이미 자신의 마음자리중에 이미있는 것에 이르는 체험을 한상태를 선정에 든 상태를 즉 '선.'이라고 합니다. 달을 가르키는 손을 이해하는 과정인 '교' 그달을 보며 느끼고 체헝해보는. '선' 둘중 필요치 않는 것이 무엇이죠? 마음속에 이미있는 것을 찾으라는. 말은 쉽기도하고 어렵기도 합니다만~그리어려운 것도 아니랍니다. 깨달음의 자리 즉 열반자리를 '공적영지' 텅빈각성자리라고 합니다. 우리마음중 텅비어서 알아차리는 자리를 명상하며 느껴보세요~있는지 없는지~
깨달았다 생각한 뒤 또 몇년 뒤면 그때의 그 깨달음에 부족한 점이 보여서 또 다른 답을 찾아가죠(달을 보려고) 손을 따라서 가다보면 손가락에 집착하기도 하지만 지금 내가 살면서 풀어야 하는 답을 찾으면서 살아야하는게 깨달음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새는 나와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것에 왜 그렇게 쉽게 경도되고 끌리는지 찾고 있습니다.
/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집착을 버려야 하나, 깨달음에 대한 집착은? cf)러셀의 이발사 역설 ; 자기 수염을 깎지 않는 사람만 잘라주는 이발사, 자기 수염은? -> 자기 수염을 깎을수도 없고, 깎지 않을 수도 없다. -> 깨달음의 패러독스로 연관 수행을 통해 집착을 하지 않는 습관이 배이면 굳이 버리려 하지 않아도 버려짐 / 돈오점수 : 단박에 깨닫고 점진적인 수행, 고려 지눌스님 vs 돈오돈수 : 단박에 깨닫고 수행은 불필요, 고려 보우스님, 성철스님 -> 둘은 다른 깨달음? 아니면 정도가 다른 깨달음? -> 깨달음은 사적체험이므로 알 수가 없음 /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논증' "내 상자안에는 딱정벌레가 들어 있다." ->다른 사람의 상자 속에 딱정벌레(사적 언어)가 들어있는지 알 수 없다. ->주관적 경험(사적 영역)은 결코 알 수 없다. -> 언어의 달콤함에 빠져 꿀통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철학자들 비판 깨달음의 분류 - 지적인 깨달음 : 공 사상의 이해, 연기에 의해 변화하며 실체/본질은 없음 - 열반적 깨달음 : 체험으로서의 깨달음, 성철스님이 주장하는 진정한 깨달음 ~> 선불교 :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언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깨달음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논의'를 하므로 모순!
다시 한번 보아도 명쾌한 정리에 감동입니다. 첨언이지만 붓다의 육성(아마 일부만)을 기록했다는 니까야를 보면 깨달음보다는 '해탈'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며 비교적 명확한 언어로 정의를 내렸습니다. 니까야를 보면 선에서 말하는 순간적인 깨달음(뭐라 부르든)은 브라만교(힌두교의 전신)에서 말하는 범아일여의 성취에 가깝고 이를 비판하고 극복했다는 붓다는 해탈을 수행을 통해서 모든 번뇌가 사라졌고(삼애에 들었을 때나 삼매에서 나왔을 때나) 다시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라고 표현합니다. 역시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최소한 스스로는(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확인이 가능할 것 같아요. 중국에서 만들어진 선불교보다 오히려 기원전 6세기의 붓다가 '해탈'을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대승비불설은 이미 불교계에서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승으로의 발전이라고 억지를 부리지요. 대승은 브라만교이고 선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짝퉁이라는 주장이 불교학자들 사이에서 들립니다.
저 비트겐슈타인 새끼 말은 그냥 연관 관계적 생각을 포기하겠다는거 아님? 자기 무능을 합리화하는 것에 불과함. 인생을 초자아 없이 살아가겠다고? 그래서 거기가서 꺵판 피우셨나봐. 감정을 제거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감정이 사라지는게 아닌데, 재귀정의 명제나열 자승자박 그 자체인듯.
깨달음이란 우주의섭리 자연의 공식을 아는것 그 공식을 자신의 인생에 대입하여 답을 만들어 가는것 공식만 안다고 깨달은것도 아니요 행동만 한다고 깨달은것도 아니죠 조건값에 나를 더해서 각자의 답을 만들어 가는것 조건을 깨우치고 나를 아는게 핵심 둘중 하나만 아는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같은것 산속에서 속세에서만 깨달음을 추구하는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말장난 입니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패러독스는 전칭명제를 사용하는데서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가령, "일체유심조(모든 것은 마음이 빚어낸다)"라는 화엄의 교설에서 모든 것을 마음이 빚어낸다면 그 마음은 그 모든 것에 속하는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낳죠. 프레게나 러셀이 부딪친 문제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봅니다. 이런 선불교의 교설은 많습니다. 가령, "개구즉착(입을 열어 말하는 순간 그르친다)" 이렇게 되면 개구즉착 그 발설 자체는 그르친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낳습니다. 또 "불립문자(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라는 말은 그 스스로 문자를 세운 것일까, 아닐까. 선불교의 교설은 기본적으로 이런 패러독스의 구조위에 구축된다고 보는데 그럼 왜 그런 패러독스를 선사들은 사용했을까. 제 생각엔 언어와 사유의 논리를 먹통에 이르게 해서 언어와 사유를 뛰어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을 '사다리를 걷어찬다'라고 생각했구요. 반가운 테마여서 한 말씀 해봤습니다.
4차산업혁명과 인문학 4차산업혁명에서 인문학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혹은 어떤 관련성/연관성이 있나요??+ 인문학의 정의도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인문학이 중요해지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기술의 발전으로 편리성이 증가하게 되었지만 의외로 기술에 맹목적으로 빠지다보니 인간 윤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학문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문학이 결과적으로 인간의 감수성이나 사고에 밀접하게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를 기계와 융합시키고 기계를 만들때 결합이 되어야 비로소 우리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은 보통 인류가 가지고 있는 기본 소양 정도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ㅡ 출처. 네이버 지식인.
왜 CEO는 인문학에 열광하는가? 요즘 기업들은 ‘인문학의 시대’에 산다. 수많은 기업 CEO들이 인문학을 기업 내부 교육에 적용하고 있다. 인문학 CEO 양성과정은 이제 흔한 것이 되었으며, 기업 임직원들은 기업 내·외부에서 인문학 교육을 받는다. 유명 기업교육 전문업체 사이트에서도 인문학 교육과정을 쉽게 찾을 수 있다. 17년 동안 디즈니의 CEO를 맡았던 마이클 아이스너는 인문학도 출신이다. 그는 세상의 모든 일이 인간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점을 들어 문학의 유용성을 강조했다. 문학을 전공한 탓인지 그는 창의력과 경영가의 마인드를 동시에 가진 보기 드문 리더라는 평가를 받는다. 철학을 전공한 휴렛팩커드의 전 CEO 칼리 피오리나 역시 철학으로부터 수많은 정보를 하나의 핵심으로 통합하는 법을 배웠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을 배워야한다고 강조했다. 이외에도 알리바바, 홀푸드, 유튜브 등 거대기업의 수장들이 인문학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홍수가 터진 듯 넘쳐나는 근래의 인문학 열풍은 불과 10년 전만 해도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왜 인문학은 주목받고 있는가? 그에 대한 답은 인문학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에 있다. 인문학은 삶과 인간에 대한 통찰을 가능하게 한다. 평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현상들로부터 새로운 아이디어와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 때문에 인문학은 기존이 물질만능주의 사회와 인스턴트식 학문에 피로감을 느낀 사람들에게 일종의 탈출구가 된다. 동시에 기업 CEO들에게는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중략... 출처. 미디어 SR
집착을 놓아야 깨달음을 얻을수 있다 깨달음에 대한 집착은 절대 놓을수 없다에대한 파라독스 부분을 제대로 봤습니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은 견성입니다. 견성을 하기위해 부처도 버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완벽히 어떻게 깨딛는지 방법을 아셨네요. 자기 자신이 깨닫고 있다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그때가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불가에선 설명하죠
예전 말을 통한 깨달음은 방편이라 들은적이 있는데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철학적 논의대상으로 삼으니 또 새롭네요. 정말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다만 제 짧은 지식으로는 언어의 단계에서 깨달음에 대한 배척은 원효가 주장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이러한 주장이 원시불교에서도 나타난다고 볼 수 있을까요?
내가 깨달음을 얻으려면 그 집착을 버려리려하면 깨달음에 집착도 버리게 되어 깨달음을 얻을 수 없고, 깨달음을 포기하면 모든 집착을 버리게되어 깨달음을 얻을 수 없게 된다 그 패러독스는 곧 수행이다 인간의 본질중 하나인 학습과 교육, 수행으로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철학에 대해 많은 영상만드시라 고생하셨을 듯?하네요 앞으로도 많이배우고 지금도 많이 배우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깨달음!
모든 암묵적 지식이나 기술과 마찬가지로, 깨달음이라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도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언어를 통해서 그 대략적인 방향을 지식으로 습득할 수 있겠지만 깨달음의 문 앞에서 깨달음에 대한 집착까지 버리려면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 능동적 실천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다양한 글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사랑의 실천방식에 변화가 생기기도 하니까요.
돈오돈수가 없으면 돈오점수가 비진리가 되고, 돈오점수가 없으면 돈오돈수가 비진리가 되는, 서로 대립하는 논리이나 모순적이게도 서로의 병존이 진리가 되는 것이 저 논쟁의 묘미라고 봅니다. 돈오점수만 진리라면 깨달음의 단계가 있다는 말이되고, 나는 얼마나 깨달았다는 계급의식이 생기죠. 돈오돈수만 진리라면 어디선가 깨달은 독생자가 생겨 세상을 호령할 수 있겠죠. 하지만 서로 대립논리가 있어 나는 깨달았는가, 얼마나 깨달았는가, 얼마나 깨달았다는 자의식이 허위는 아닌가 하는 자기에 대한 질문에 몰입하게 되는것 같습니다ㅎ 그게 성철께서 단박에 깨닫고 그 이후에는 없다는 가히 높은 스탠다드를 제시한것이 아닐까, 돈오돈수와 점수의 언어논쟁을 궁극적으로 파괴함이 성철스님이 가리킨 달이 아닐까, 기독인으로서 금강경을 계속 읽던 와중에 돈오론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ㅎㅎ
깨달은 사람이 깨달은 사람을 알아보도록 되어있습니다. 못깨달은 사람은 깨달은 사람을 알아볼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고정관념의 찌꺼기가 색안경처럼 작용해서 깨달은 사람의 투명한 마음자리를 볼수가 없고, 자신이 쓴 안경색으로만 해석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이 나온것입니다.
조계종 간화선도 해보고 인도에서 탄트라 싱잉볼 차크라 끌어올린다는 명상, 미얀마에서 위빠사나 다 해봤는데요. 위빠사나가 제일 진짜 같습니다. 이쪽이 신비주의가 제일 없고 오로지 호흡과 감각만 관찰하거든요. 미얀마에는 아직도 아라한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 조계종에 서울대 나오고 명망있는 스님이 하는 간화선 강의도 들어봤는데 속만 터지게 하더군요. 결론은 조주에 물음에 답은 없다는거죠. 답이 없는 물음을 계속 갖고 모른다 하는게 수행이라는거죠. 성철스님이 하는 말은 대단하지만 그분이 깨달았는지도 의심스럽고, 돈오점수가 더 맞다고 봅니다. 부처님도 자기 부족이 전쟁으로 코끼리에 압사 당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슬퍼 햌ㅅ다는 이야기도 있고 마지막 공양에서 설사를 하고 열반에 드셨으니까요. 오로지 흐름만 있을 뿐이지 항번에 깨치고 끝나는건 납득 안가네요
깨달음이 중요한것이 아닙니다. 깨달아도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는것입니다. 깨닫는것은 생각보다는 쉽습니다. 다만 깨달은것을 실천하는것이 어려운것입니다. 우리가 양심이란것이 어떤것인지는 알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달을 찾고 달을 보는것은 쉽지만 실제로 달에 가는것은 어려운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달에 가기위에서는 그만한 과학과 기술력이 있어야 합니다. 양심있는 세상을 만들기위해서는 그만한 법과 제도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석가공맹소크라테스가 잘몰랐던거지요 깨달음은 실천과상관이없어요 그리고 깨달으면 모든게 실체가 없다는것을 알게된다 이것이 맞습니다 여기에 대입하면 양심이나도덕윤리 진실걑은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깨달을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고로 양심이나 선(착함)과 실천은 깨달음과 아무관련이 없습니다 안믿을사람이 많겠지만 믿지는 마시길~ 깨달음이란 객관이 아닌 주관에만 있음을 기억한다면 믿든안믿든 진실이 그러하다는 것을 언젠가 알게 됩니다
@@energygreen3769 감사합니다 나는 깨달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성자들이 깨달음에 이른것이 아니라고 말한것뿐입니다 님도 말했다시피 성자들도 자신이 아는 바를 자신의 방식대로 이야기 한것뿐이지요 그것이 옳거나 맞는 이야기는 아니라는거지요 이것은 내가 말한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스스로 말한거지요 신앙이되면 절대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선생님입니다 수학선생 과학선생 있듯이 자신의 과목이 다른것 뿐이지요 그들의 가르침을 배우는것뿐 그들하나를 지정해 믿으란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자중에는 예수나 공자처럼 무조건 맞다라고 생각하신분들도 있으나 그분들이 잘못알고 계신거 뿐입니다 깨달음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세상이나 우주의 정보를 조금더 알뿐이지요 정의되는것도 아니구요 그냥 간단히 말하면 이주재는 말이나 글로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스스로 깨우치는날 알게되시며 님께서 알고이있다해도 누군가를 가르칠수 없습니다 여러성자들이 했던것처럼 그리되면 우리에게 이득 도움이 될뿐이라는것만 이야기할수 있을뿐입니다 깨달음은 중요한게 아니고 좋은것이 있다면 깨닫게되면 세상에 눈을 뜨고 걷는다는것 뿐입니다 조금더 잘 갈수있겠지요 깨닫지 못했을때는 눈을 감고 걷는다는것 그 차이일 뿐입니다 눈을 감고 어떻게 걷는가 라는 의심이 들겠지만 대부분 눈감고 걷지요 모른다고 말하는것이 감고있다는 것과같습니다 안다고 말하는이들역시 마찬가지 깨닫게되면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이란 성자들이 말했듯이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만 말하지요 지금처럼 질문에만 대답합니다 깨달았다 하는것은 모두가 각자의 길을 가도록 뇌두는것이기 첫째 법칙임을 알기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은 깨달음이 열리는 시기이니 님께서도 스스로 알게 되는날이 올것입니다 님 뿐아나라 어리석고 눈감고있는 모든이들이 언젠가는 어차피 깨달음에 이릅니다 그러니 특정인이 대단한것이 아니라 우리모두가 대단한 이들입니다 깨달음에 이르기는 조금더 빠르나 늦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믿지마시라고 말한것은 특정한것이 옳다고 믿는한 절대 깨닫지 못합니다 이글은 참고 일뿐입니다 그저 진실이그러합니다 진실이란 옳은것도 그른것도 아닙니다 나는 이런진실을 말함에 믿든안믿든 강요나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님께서 하는 스스로의 선택을 오직 존중할뿐입니다 이로서 질문1,2,3번에 대한 대답입니다 정의에대해서도 깨달음은 진리라고도 합니다 진리는 멈추어있는것이 아니고 움직임 즉 변화합니다 그러므로 멈추었다의 의미를 가진 정의 를 내리는것이 불가능합니다 정의내리는 순간 이미 깨달음이 아니라는거지요 앞에서도이야기한 윤리도덕양심등은 우리가 이득되는 덕목일뿐 깨달음과는 무관하다고 말한거뿐입니다 실체는존재하나 실체가아니고 볼수없습니다 없고옳고그름이 없다는것을 아는것이 께달음입니다 님께서 깨달음을 선택하여 원한다면 도움되는 스승들을 찾게되실겁니다 고맙습니다
@@energygreen3769 기분에 동요하는 사람 아니니 안심하세요 동문서답으로 생각하셨다면 내가 잘못말했군요 동문서답이 아닙니다 이는 그린님 한사람이 아닌 여러사람이 보도록구성했기에 부득이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이글을 누가볼지 하나하나 알고 있습니다 다만 나는 점쟁이도 아니며 내가 알려지길 바라는이도 아니기에 대답하지는 않습니다 질문애 대한답이 시원치 않았다면 하나하나 다시 질문바랍니다 먼저것을 보면 1번질문 깨달음의 커다란의미는 그냥 아는것입니다 하지만 몰라도 크게 상관이없습니다 2번 질문 눈을 뜨고 걷는것입니다 우주의관점에서 볼때 대부분 눈감고 걷습니다 3번 질문 이것을 아는 것입니다 좀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는 꿈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냥 긴 꿈입니다 반야심경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를 알았던 예수 석가도 물리계의 법칙을 따랐습니다 그들이 이 야기를 전하러 온건 지옥에서몸부림 하는 불쌍한영혼들의 하소연 때문입니다 이것도 논점에서 벗어났나요? 이것은 그저 작은 부분의 예 를 든것입니다 깨닫는다는것은 이런 사실 즉 진실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궁극 마지막엔 모두가 고통없고 모두가 하나되어 하나의 에너지에 훕수되는것이궁극의목적 입니다 물리계나 우주고차원이나 수없이 많은 여러 선택을 할수있고 하고있지만 깨달음의 마지막단계에서는 심플하게 둘중 하나만 선택하는 기로에 섭니다 흡수될것인가? 남을것인가? 깨달음에 가까워질수록 단순해집니다 철학이란 개개인각자의생각을 말한것이며 심오함속으로 깊이들어갈수록 깨달음은 멀어집니다 고맙습니다
@@energygreen3769 깨달음에 정의란 없습니다 정의를 내리는 순간 이미 께달음에서 멀어집니다 깨달음은 변화합니다 정의는 멈추어있습니다 정의를 알고자 하시나 어차피 아는것을 이야기하고 싶어도 지구별의 언어로는 표현할방법이 없으며 깨달음에대해 정의내리고자 하는 어휘가 우리에겐 없습니다 그린님은 깨달음을 실천이라 생각하는군요 성자들이 잘못알았거나 왜곡 되었습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 부득 트러블이나 고통이 수반되기도 합니다 모든고통의 원인은 무엇인가를 시도하면서 발생합니다 그중 큰 고통은 인연인데 인연은 무엇인가 시도 하는 행동에 귀속되어있는 표현이므로 연 에 대하여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깨닫고자 행하는자체로 깨달음에서 멀어진다는것이 진실입니다 진짜 깨달음은 있는그대로 바라보는 관조 입니다 굳이 정의를 표현한다면 깨달음이란 관조입니다 대답이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궁금하다면 질문하십시요 질문이 생기지 않을때까지 말입니다 내가 옳든그르든 어차피 진실은진실입니다 그냥 나그네의 헛소리로 치부한다해도 나는 괘념치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것이 진실임을 알게될것입니다
@@energygreen3769 좋습니다 토론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해만 해도 좋습니다 진실은 모순이 없어야 합니다 동문서답도 없어야 하지요 이해를 바라지 않습니다 모순이나 동문서답으로 본다면 교류가 되지 않아서 겠지요 답변을 다시 살펴보길 권장합니다 내가 보기에 그린님은 시야를 넓히시면 보일듯합니다 답변에 그린님이 원하는 답이 있어요 실천이라는 단어에의미에 얽메어 있다는것을 알수있어요 이것을 언짢게 느낀다면 미안합니다 또한 토론이야 각자의 생각을 말하는것일뿐이지요 정답을 요구하나 정답이란 없습니다 상대의관점이나 생각을 이야기하메 자신이나 주변의누군가의 반응을 살피길권장합니다 반응이란 무 입니다 동요되지 않아야하는게 기준입니다 스스로를 살핌에 반응된다면 어차피 결론내려지지 않지요 그린님이 부정하든 긍정하든 나는 그저 그대로 바라보고 또한 완전히 존중할 뿐입니다 그러니 이대화에서 잘못된것은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5분뚝딱철학빠 입니다. 김필영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성철 스님의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보면 안된다'는 것도 언어를 통해 전달될 수 밖에 없기에 비언어적 깨달음이라는 것이 철저히 비언어적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언어는 관계를 상정하는 것인데 관계가 없이 '깨달음'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멋지네요. 살아보지않고 삶을 알수 없죠. 철학은 삶을 위한 것이지 철학 그자체를 위한것이 아니죠. 하지만 살기 위해선 철학책을 공부해야죠. 만약 나혼자 자연속에서 산다면 성철스님 말대로 해도되지만 인간사회 속에서 살아야하니 사회적 논리를 배워야 살수있죠. 제 생각엔 두사람 말이 다 맞아보여요. 산속에서 혼자 사는데 사회적 언어가 의미가 없고, 사회 속에서 어울려살면 사회적 언어를 배워야 사람구실 할수있죠. 서로가 처한 환경에 따라 깨달음도 달라지는게 맞아보여요. 서로 싸울일이 아닌거죠.
20년간 독서로 인해 깨달은 점은 딱 두가지로 요약되었어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일체 유심조... 그냥 생각하는대로 보이는게 세상임 그리고 다 경전이나 언어에 속지 말라고 이야기 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나 성인들... 자신들은 엄청나게 텍스트를 읽어서 그 경지까지 간게 팩트임
나이 60이 되어서야 이렇게
책상위에 적어 놓았습니다.
공부와 숙련은 다르다
공부와 수행은 다르다
공부와 깨침은 다르다
김필영 선생님
공부하고 있어서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존경합니다.
아... 이 글도 어렵네요.
불교는 진짜 어렵지만 매력적인 학문인 것 같습니다...ㅎㅎ
헛소리임을 알기위해 계속 헛소리를 해야되는게 인간 숙명이구나.
오! 깔끔하네요
옷~~~~
이것도 결국 헛소리 너도나도 헛소리
굿
정답입니다.
영상의 논증과 결론이 모두 멋집니다. 불교에서 무기(無記)라고 하는 결론인 것 같습니다. " '의미가 있느니 없느니' 말하는 것 자체가, '저승이 있느니 없느니' 말하는 것 자체가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 헛소리다. " 라고 하셨죠.
하지만, 모든 것이 헛되지는 않습니다. 사람이란 늘 망각하는 존재라서 심지어 깨달음조차 깨달았다 하더라도 가만히 있으면 생경해기지 마련이지요. 그렇기에 절에 가면 있는 불상, 불경, 수행의 계, 부처... 불교 밖에 있는 철학, 논리, 논증, 유튜브... 심지어는 악한사람 아수라장 무논리 가짜뉴스 등등 세상의 추한것들까지도(이경우엔 반면교사) 모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서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유튜브 영상으로 늘 철학의 달을 가리켜주시길!
9개월 전 선생님의 비트겐슈타인 영상을 보고 생애 최고조로 깊은 환희를 느끼고 크디 큰 깨달음을 얻은 뒤 다시금 이 영상으로 찾아왔습니다만
이번에도 역시 그 황홀한 환희는 그대로군요.
깨달음이란, 영상에 나온것 처럼, 본디 개인만의 영역이자 한 단어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겐 1이 진정 깨달음이 될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2가 진정한 깨달음이 될 수 있는 것 처럼 말입니다.
결국 중요한것은, 자신만의 그 불가형언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겠지요.
이런 영상들이 모두 제 인생의 신념이자 가치관이 되었다는 점에 무한히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만의 '깨달음'을 또 하나 만든것 같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마지막 결론이 좋은 말씀입니다
훌륭하십니다 💖👍
따로이 깨달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환상놀음 입니다
하늘에 핀 무지개를 쫒아서
무지개만 보고 걸어가다 낭떠리지
에 떨어져 죽습니다
깨달음 쫒다 인생 망가지고 폐인되는 경우 허다 하지요
가짜에 속아 환상놀음을 하다
허송세월 하는 것입니다
성철스님이 어느정도 수준이신지
는 모르나
세상속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셨더라도 그 마음상태 유지가
가능하셨을까요?
그 진여의 자리, 깨달음 자리에서
24시간을 머물수 있으셨을까?
하는 의문이 있지요
진짜 공부는 온실 속에서 하는 게
아니고 생존의 처절한 전쟁터예서
해야 제대로이죠
스님들에 대한 그런 환상 갖지 맙시다
그러나 믿고 싶습니다
훌륭하신 고승님들, 스님들이
진실을 알았고 , 아는 만큼 행동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말이죠
우리들 모두 노력합시다
위선자가 되지 않기 위해 ..
몽산법어애 그런 말이 나옵니다,,,,사람들이 들끓는 시장 속애서도 화두 일념이 된다면 큰 깨달음을 얻을 시긱가 다가온 것이라고,,,,,,
저번 한학기 동안 대학에서 불교철학 강의 들으며 배운 것 보다 이 영상 한편에서 배운 것이 더 많습니다. 정보전달 능력이 굉장하십니다. 이런 영상을 유튜브 알고리즘에 딱 떠서 클릭 한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에 너무 감사드립니다.
미투~~~~~^♥^~~~~~
그런데 이런 내용을 엄청나게 방대하게 다루는게 대단하죠!! 진짜 다루는 철학자 엄청 많더라거요
김필영 선생님은 정말 교수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웃프네요🤣🤣🤣
대학교에서 만나는 교수님들은 랜덤인 반면에 유투브에서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사람들이 인정받기 때문에 더 좋은 것 같네요
과거의 말씀은 참고하되 현실에 맞게 바르게 살아야겠습니다. 깨달음이란 나의 모순을
찾아가는 것이 깨달음으로 가는길이라 생각되며
깨달음을 찾는순간 그때 부터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생각해 보며 진정한 삶의 길을
찾아 가는것이 아닐런지...
감사합니다.
말할수없는것엔 침묵하라-비트겐슈타인-
지눌 스님의 말씀이 더 와닿네요.
깨달음은 깨달음인데, 그게 모든 것에게 적용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동양철학은 성찰하여 평안한 행복을얻고
서양철학은 지식을쌓아
지혜로 행복을 얻는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시선의 장르/철수김원태
행복한삶.
긍정(절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사는삶 .
불행한삶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사는삶
잘사는삶 희락과 고통의 리듬을
조화롭게 잘타는삶..
정의란?
반칙없는 옯바른마음과 균등한 분배다.
또 정의는 지혜로운 눈으로
세상에 시선을 던지는것.
즐거운삶. 긍정과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죽음을 굴복시키고
행복을 느끼면서 사는삶.
지눌스님의 수심결과 육조의 육조단경 모두 재밌게 봤는데요. 돈오돈수 돈오점수 깨닫고 난뒤에 보면 다르지 않습니다. 산 정상에 올라 뒤돌아보고 너 어디로 왔니? 했더니 a코스로 온사람 b코스로 온사람. 코스만 달랐을 뿐입니가.근기에 따라 자기에게 주어지는 길이 다른거죠. 정상에 올랐으나 올라온 길이 다르기에 둘다 같다 할 수도 없고. 어느 한길이 낫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진실은 다만 길이 달랐을 뿐. 모두 진실. 중도입니다.
사실 근기,돈오돈수,점수라고 하는 것도 관념적으로 표현한 것이지 실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달을 가리킨 손가락이 존재하는 것처럼요.
내 모순을 알아보고 참회하고 감사함이 마음그릇에 차면 스스로 알게되지요. 나는 똥만드는 기계란 사실을 ㅎㅎ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금강경-
유투버님의 깊이 있는 헛소리에서 내공이 느껴집니다. 꾸벅
아쭈, 쫌 아는것 같은데???
하하하하,
우리 고등학교 철학선생님도 맨날 학생들한테 똥만드는 기계라고 하셧는데ㅋ
영상, 강의, 모두 멋지네요.. 깨달음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도 그것을 말로 책으로 기술할 수 없고 햬도 달이 아닌 손가락을 보는 셈이니... 불가의 각이란 철저하게 '사적언어'라는 것이 이해됩니다. 더더구나 깨달았다는 사람들끼리 서로 아니라고 하는 판국에 이르면...과연 그 '깨달음'이란 것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이릅니다. 암튼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꽤 의미있는 주제였습니다.
동양철학을 배우다보면 이런 오묘한 맛에 빠지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어느샌가 깨달음에 더 다가가 있는 저를 만나게 됩니다.
어쨓든 손가락만 보고 있더라도 그것의 방향도 언젠가는 보게 될테니 말입니다~
훌륭하신 강의 감사합니다^^
인간은 뇌에서 언어로만 생각할 수 있다. 어떠한 체험은 다양한 감각에서 시작되지만, 결국 최종적으로는 뇌의 알고리즘을 통해 어떠한 단어로 도출되어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비트켄슈타인은 이것을 언어놀이라고 표현하였다. 노자의 사상처럼 “깨달음”을 어떠한 문장이나 언어로 정의 한다면 그것은 더이상 깨달음이라고 하기 어렵다. 인간은 뇌에서 전기신호를 이용하여 현상을 해석하고 언어를 통해 이야기를 지어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것이 또 모든것이 될수도 있는 것이다. 이 내용이 참 현묘하다고 할 수 있다.
결론: 제 댓글도 헛소리 입니다ㅠ
고딩 때 꿈과 물리공부로 색즉시공을 깨우친 바로서....... 학교가 미션스쿨이라서 법사님한테 말했다가 속세에서 깨달음을 얻는것도 좋은 공부라고 하셨습니다.....
강의 좋습니다. 깨달음 참 매력적입니다. 성철 스님은 책읽지 말라 했지만 자기 밑에 제자들은 책을 많이 읽고 가방끈이 긴 사람들만 두었다 하더군요. 아마 가방끈이 길어야 책 읽지 마라하는 말도 이해한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유튜브에서 간만에 좋은 방송 만나 아주 재미지게 시청하고 있습니다....
치구들과 선후배들에게 인연따라 알리는 중입니다.
흥해라 흥해~~~~~얼씨구 좋타~~~~~
오늘 본 영상은 5분 뚝딱 철학 영상 중에서 최고였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영상 200여 개 정도 만드실 생각이라고 하셨는데, 영상에 대해 부탁드려도 될까요? 무리한 부탁일진 모르지만 299개까지 영상을 만들어 주실 수 있나요?
(농담반 진담반입니다)
저는 종종 배를 타고 갔으면 배에서 내려야지 배를 타고 있으면 강을 건너지 못한다고도 비유합니다. 손가락과 달의 비유와 같죠. 헛소리긴 하지만, 헛소리도 손가락이나 배 쯤으로 생각해보면 좋겠네요. 배도 손가락도 필요하니까요. 오늘 영상도 재밌게 잘 보았습니다. 주제를 쉽게 잘 정리해주시는 건 선생님의 탁월한 능력이고, 그만큼의 고심과 노력이 있었겠지요? 감사한 마음 듬뿍 남깁니다~^^
와우
대박ㅜㅜ 이토록 세련된 주제에 세련된 영상이라니!! 감사합니다
사적 언어 논증의 요지는 깨달음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닌가가 아닌 깨달음이라는 것 자체가 매우 개인적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에, 세상에 흩뿌려진 글과 언어에 현혹되거나 철학적 논의를 하는 등의 활동에 쓸떼없는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깨달음의 철학적 논의는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논의는, 깨달음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아닌 깨달음과 같이 언어로 상세히 표현될 수 없는 어떠한 개념들에대한 철학적 논의이기에 충분히 의미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사적 언어 논증의 요지를 깨달음의 객관적 여부가 아니라고 받아들인다면, 그 자체로도 의미가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좋은 영상 감사드립니다!
어릴적 중학생때 우연히 보게된 성철스님의 영원한자유라는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오랜시간이 흘렀네요. 언어로는 한계가 있고 여기 유트브에서 언어로 얘기하는 것처럼 말 언어는 어떤 동기, 무브먼트를 유발할 수 있는 힘이긴 합니다. 그치만 모든 갈증을 해소하기엔 1프로도 부족하죠... 삶은 실제가 아니고 실제와 같은 착각이 드는 연극일 뿐인것 같아요(본인의 의지가 들어간, 여기서 의지도 현생의 의지)
성철스님도 본인이 아닌이상 우리가 깨달으신 분이다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언어에는 한계가 있고 그 안에서 말씀을 전하셨으므로. 성철스님이 하신 말은 딱히 새로운 얘기가 아니기도 하구요.. 관련 서적 조금만 봐도 알수가 있느니, 하지만 저같은 사람들 깨우침에 입문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너무나 감사한 스님이십니다.
좋은 영상과 내용 항상 감사드립니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는 저도 나름 고민해 보았던 문제입니다.
제가 나름대로 정리본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논쟁에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요소 하나가 빠져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논쟁이 커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 요소는 바로 수련을 하고 있는 각각의 한명의 수련자 그 개인입니다.
수련을 하는 것은 결국 한명의 사람이므로 이 존재를 빼놓고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하는 논쟁은 무의미하게 됩니다.
즉 돈오돈수 돈오점수의 주체는 바로 한명 한명 개인의 수련자가 됩니다.
이것을 인간이라고 하는 종 전체를 기준으로보면 오류가 생기게 됩니다.
따라서 그 한명의 수련자가 돈오돈수형의 기질을 가졌다면, 그 사람에게는 돈오돈수가 맞고,
그 수련자가 돈오점수형의 기질을 가졌으면 그 사람에게는 돈오점수가 맞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다분히 이론적인 면에서 보았을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실질적인 측면을 보았을 때는 돈오돈수형의 인간은, 수련자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경우에는 돈오점수가 맞게 됩니다.
돈오돈수냐 돈오점수냐 이 자체에만 빠져버리면 오히려 다른 큰 것을 놓치게 됩니다.
좀더 넓게 보고 다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언어의 한계성과 사고의 틀에 갖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즉 결론은 "둘다 맞다"인데 "이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가 됩니다.
아무튼 아침 일찍부터 좋아하는 내용의 영상을 볼 수 있어 기분 최고입니다. ^^
오늘 하루도 즐거운 하루 되십시요 화이팅입니다 ^^
명쾌하네요ㅎㅎ 👍👍
님의 글을 제 블로그에 옮기고 싶은데 허락해주세요~
댓글의 내용이 넘 좋습니다^^
님의 글이 더 이해를 깊게 해 주네요. 철학적 논의가 헛소리라고 하더라도 왜 스님마다 다른 주장을 하셨는가에 대한 고찰은 의미가 있지요.
사실 저는 깨달음과 수행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다만 같은 수행이라도 깨닫기 전의 수행과 깨달은 후의 수행은 차원이 좀 다른 것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요.
@@현-k2r 황송합니다. 감사합니다.^^ 빅썬이라는 출처만 표시해주시면 얼마든 옮기셔도 좋습니다.
@@bigsuntv262 그럼요~♡
감사합니다^^
.... 인류의 가장 큰 비극은, 궁극적인 자유를 얻은 극소수의 깨달은자들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한 자들이 마음대로 편집하고 해석하는데서 일어난다......!
아침에 듣는 북소리가
날 깨우네요.
항상 고맙고 감사 드립니다
좋은 말씀에 . . .
기억은 외현기억과 암흑기억으로 크게 나뉩니다.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뉘는 것처럼. 그리고 외현기억을 담당하는 신경과 암흑기억을 담당하는 신경은 나뉘어져 있어서 하나만 한다고 다른 것이 저절로 기억되지는 않습니다. 마치 수영 이론을 들었다고 수영할 수 없는 것처럼, 그리고 수영이 가능하다는 이론적 사실을 알지 못하면 수영 시도 자체가 힘든 것 처럼,,,,,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은 외현기억에 해당하고 달은 암흑기억에 해당한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외현기억의 헛점은 익숙해지면 암흑기억도 할 줄안다는 착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의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영상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달은 주체 밖에 있는 데 그걸 왜 기억 이고 무의식이라고 말합니까? 철학적 논변을 위한 예시를 또다시 자신만의 예시로 끌어내리면서 본질과는 한없이 멀어지는군요.
@@starcraftgamechannel 달은 깨달음을 의미하고 깨달음은 나를 이해하는 것이지 밖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에요.
이런 의문은 수준을 고려하지 않아서 나오는 것이라 봅니다. 일단 깨달을려면 깨달음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근데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소위 에고인데 그 에고를 초월하는 것이 깨달음이기에 결국에는 깨달으려는 욕망도 버려야 합니다.
언어적 가르침도 마찮가지죠. 초반에는 많이 들어서 채워야 합니다. 왜냐면 그래야 방향 설정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끝으로 갈수록 비워내야 하죠. 궁극의 진리는 형상이 없는데 언어는 자동적으로 어떤 상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모순이라고 하는 것은 과정을 고려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과정마다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시작하는 단계에서 필요한 것과 끝나는 단계에서 필요한 것이 다릅니다. 근데 그런 과정과 수준을 무시하고 본다면 모순처럼 보이지요
부처님도, 비트겐슈타인도, 니체도 공통적으로 하는 말 "나를 넘어서 너만의 것을 찾아가라"
비트겐슈타인은 자기논리를 사다리처럼 타고 올라간 후엔 걷어 차버리라고 말했는데 적절한 비유 같아요ㅎㅎ
이론, 지식을 넘어선 진리.
사람들은 동양철학하면 생소하실텐데 드디어 말문을 조금씩 여시는것 같아 기쁩니다
🧡🧡영상 즐감하고 갑니다. 건강한 하루되세요. 응원합니다. 👍👍👍
깨달음에 대한 강의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봐라.
불교를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수행으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
완전한 깨달음(열반)에 이르기를 바래봅니다.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평안하라. 안락하라.
저 분들의 생각의 깊이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네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제게 있어 너무나도 유익한 헛소리 오늘도 고맙습니다.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어찌보면 깨달음을 얻어가는 수행의 길과 비슷한것 같네요.^-^딱딱하지 않고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주셔서 요즘 혼자 생각하며 공부해가는 기회가 많아지는 것 같아요!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깨달음은 개인적인 체험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아무리 읽어도 그게 뭔지 모르겠었는데 마음이 달라지고 현실이 변하는걸 체험하고 나서는 그 설명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 잘 이해가 된다는게 다른점입니다. 그럼 깨달음 이전과 이후의 내가 엄청 다른 사람이냐하면 그건 아니라는 거죠. 다만 이전에 거슬리던 상황들이 스트레스 받던 일들이 더이상 현실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건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성철스님은 현실에 더이상 번뇌가 안나타나므로 완전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지눌스님은 번뇌 자체는 계속 나타나지만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므로 그런 상황을 마주보는 일은 계속된다는 말씀으로 이해가 되네요.
깨달음이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언어로 경계된 인식세계는 왜곡되어 있으며 허구일 수밖에 없음을 아는 것. 그래서 분별망상을 하지 말라는 거지요. 불교에서 수많은 세계를 설명하는데 오히려 각 개인마다 다른 식을 가지고 살아가니 불교의 세계도 모자라다 할 것입니다.
"언어의 경계된 인식세계은 왜곡되어 있으며
허구일 수밖에 없음을 아는 것, 그래서 분별망상을 하지 말라는 거지요"
최고의 말씀이십니다
언어로 경계된 인식세계는 왜곡 되어있다. ㅎ ㄷ ㄷ ㄷ
도가도비상도
@@artistparty 명가명비상명 ㅋㅋ
언어의 한계를 꼬집는 성철 스님의 말이나 노자가 '도'라고 말하는 것이 '도'가 아니라는 말이 상통합니다. 이론만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만은 인정하고 싶습니다. 강의 감사합니다.
깨달음의 정의는 뭘까요?
틀을 깨고 어딘가에 다다른다~그걸 깨달음이라고 배웠습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모든 게 처음부터 완벽한 건 아닌데...
각자의 정의와 개념에 따라서 언어는 가변적임을 알기에 블교에서의 깨달음 논쟁은 언제나 공허하게만 여겨집니다.
잘 먹고,잘 살면,그게 가장 잘 깨달은 사람입니다.
이 문구 또한 물질적인 해석만을 하는 사람은 어쩔수 없이 그 또한 그렇게 살면 그 뿐이고요....
항상 철학의 현실적 조명을 해주시는 영상들에~감사합니다!
아이고 이귀한걸..아침부터
꼭꼭씹어먹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김해사는....
아 ! 이 영상을 보고
예전 남친이 나에게 신발을 던지고 떠난 이유를 깨달음 ~ 그땐 사랑이라는 언어에 집착이 심했던 터라 ....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단박에 깨치신 당신 더는 수행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danbipapa ㅋㅋㅋㅋ
깨달음~~~도데체 무엇을 깨닫는다고 하는걸까요? 인간의 본성 참나가 도데체 뭘까요?.자신의 영혼육중 자신의영을 아는것입니다. 저는견성했습니다. 나의 본성이 오욕칠정의생각감정오감의 혼이 아니라 또 이 육체가 아니라 나를존재하게하는 에너지 영이 있는것을 아는것. 영의 성질을 정확히 본것을 돈오 라고하는거구요. 그 영(신령영)의 성질을 우리의 혼에 강력한영향을 주어 성스럽게 금방 살아갈수 있는것을 돈오돈수
점차로 영의 성질(영성)을 우리의 생각감정오감에 영향을 주는것을 돈오점수라 합니다.
무수히 쌓인 북마크와 나중에 볼 동영상에 일침을 가하는 성철스님의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곱씹어서 생각하게 되는 멋진 주제네요.. 감사합니다!
중생이 '견성' 즉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교'즉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이 필요하죠 또한 깨달음(견성)이란 자체는 마음이 마음의 어떤 상태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에 즉 이미 자신의 마음자리중에 이미있는 것에 이르는 체험을 한상태를 선정에 든 상태를 즉 '선.'이라고 합니다. 달을 가르키는 손을 이해하는 과정인 '교' 그달을 보며 느끼고 체헝해보는. '선' 둘중 필요치 않는 것이 무엇이죠?
마음속에 이미있는 것을 찾으라는. 말은 쉽기도하고 어렵기도 합니다만~그리어려운 것도 아니랍니다. 깨달음의 자리 즉 열반자리를 '공적영지' 텅빈각성자리라고 합니다.
우리마음중 텅비어서 알아차리는 자리를 명상하며 느껴보세요~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 - 비트겐슈타인
집착을 하지않으면 깨달음을 가졌다고해야지요
모든것은 집착에서 비롯된거
깨달음을 도를닦아서 얻는것이 아니라
깨달음은 삶속에서 집착을 갖지않는순간 깨달음 을얻은것이지요
깨달았다 생각한 뒤 또 몇년 뒤면
그때의 그 깨달음에 부족한 점이 보여서
또 다른 답을 찾아가죠(달을 보려고)
손을 따라서 가다보면 손가락에 집착하기도 하지만 지금 내가 살면서 풀어야 하는 답을 찾으면서 살아야하는게 깨달음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새는
나와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것에 왜 그렇게 쉽게 경도되고 끌리는지
찾고 있습니다.
/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집착을 버려야 하나, 깨달음에 대한 집착은?
cf)러셀의 이발사 역설 ; 자기 수염을 깎지 않는 사람만 잘라주는 이발사, 자기 수염은?
-> 자기 수염을 깎을수도 없고, 깎지 않을 수도 없다.
-> 깨달음의 패러독스로 연관
수행을 통해 집착을 하지 않는 습관이 배이면 굳이 버리려 하지 않아도 버려짐
/
돈오점수 : 단박에 깨닫고 점진적인 수행, 고려 지눌스님
vs 돈오돈수 : 단박에 깨닫고 수행은 불필요, 고려 보우스님, 성철스님
-> 둘은 다른 깨달음? 아니면 정도가 다른 깨달음?
-> 깨달음은 사적체험이므로 알 수가 없음
/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논증'
"내 상자안에는 딱정벌레가 들어 있다."
->다른 사람의 상자 속에 딱정벌레(사적 언어)가 들어있는지 알 수 없다.
->주관적 경험(사적 영역)은 결코 알 수 없다.
-> 언어의 달콤함에 빠져 꿀통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철학자들 비판
깨달음의 분류
- 지적인 깨달음 : 공 사상의 이해, 연기에 의해 변화하며 실체/본질은 없음
- 열반적 깨달음 : 체험으로서의 깨달음, 성철스님이 주장하는 진정한 깨달음
~> 선불교 :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언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깨달음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논의'를 하므로 모순!
달그자체ㅡ달을 지각하는것ㅡ손가락을 보는것ㅡ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ㅡ달을 보라는 깨우친 스승의 언어와 목소리ㅡ그 목소리덕분에 달을 보고 달을 알게되는 과정 전체
모두 교육적 대화의 상호작용성ᆢ김필영선생님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보아도 명쾌한 정리에 감동입니다. 첨언이지만 붓다의 육성(아마 일부만)을 기록했다는 니까야를 보면 깨달음보다는 '해탈'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며 비교적 명확한 언어로 정의를 내렸습니다. 니까야를 보면 선에서 말하는 순간적인 깨달음(뭐라 부르든)은 브라만교(힌두교의 전신)에서 말하는 범아일여의 성취에 가깝고 이를 비판하고 극복했다는 붓다는 해탈을 수행을 통해서 모든 번뇌가 사라졌고(삼애에 들었을 때나 삼매에서 나왔을 때나) 다시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라고 표현합니다. 역시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최소한 스스로는(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확인이 가능할 것 같아요. 중국에서 만들어진 선불교보다 오히려 기원전 6세기의 붓다가 '해탈'을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대승비불설은 이미 불교계에서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승으로의 발전이라고 억지를 부리지요. 대승은 브라만교이고 선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짝퉁이라는 주장이 불교학자들 사이에서 들립니다.
산을 물이라고 하는 놈도 머저리고,
산을 산이라고 하는 놈도 머저리다.
내가 머저리임을 아는 것으로 족하다.
그 이외의 것을 알려고 하는 놈은 쓸데없이 욕심만 많은 놈이다.
아니지, 머저리가 모든 사람을 머저리로 만들려고 한다면, 그거 자체로 죄악이지. 필요악 몰라?
저 비트겐슈타인 새끼 말은 그냥 연관 관계적 생각을 포기하겠다는거 아님? 자기 무능을 합리화하는 것에 불과함. 인생을 초자아 없이 살아가겠다고? 그래서 거기가서 꺵판 피우셨나봐. 감정을 제거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감정이 사라지는게 아닌데, 재귀정의 명제나열 자승자박 그 자체인듯.
@@asdasdasdww6001 이런 말을 하는 본인도 머저리~
니들이 머저리를 알어?
@@asdasdasdww6001 맞다,,,,,졌다,,,,,하하하하하,,,,,,
깨달음이란
우주의섭리
자연의 공식을 아는것
그 공식을 자신의 인생에 대입하여
답을 만들어 가는것
공식만 안다고 깨달은것도 아니요
행동만 한다고 깨달은것도 아니죠
조건값에 나를 더해서 각자의 답을 만들어 가는것
조건을 깨우치고
나를 아는게 핵심
둘중 하나만 아는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같은것
산속에서 속세에서만 깨달음을 추구하는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말장난 입니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패러독스는 전칭명제를 사용하는데서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가령, "일체유심조(모든 것은 마음이 빚어낸다)"라는 화엄의 교설에서 모든 것을 마음이 빚어낸다면 그 마음은 그 모든 것에 속하는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낳죠. 프레게나 러셀이 부딪친 문제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봅니다. 이런 선불교의 교설은 많습니다. 가령, "개구즉착(입을 열어 말하는 순간 그르친다)" 이렇게 되면 개구즉착 그 발설 자체는 그르친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낳습니다. 또 "불립문자(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라는 말은 그 스스로 문자를 세운 것일까, 아닐까.
선불교의 교설은 기본적으로 이런 패러독스의 구조위에 구축된다고 보는데 그럼 왜 그런 패러독스를 선사들은 사용했을까. 제 생각엔 언어와 사유의 논리를 먹통에 이르게 해서 언어와 사유를 뛰어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을 '사다리를 걷어찬다'라고 생각했구요. 반가운 테마여서 한 말씀 해봤습니다.
공감합니다.
크게 공감합니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생각나네요..
리처드 파인만도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서 생각해봐도 정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들은 고민하지 않는다 왜냐면 정답을 알 필요가 없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었죠 진리에 대한 집착에 빠지면 끝없는 고민들과 생각들에 사로잡혀 두려워지더라구요.
재수공부하다가 쉴 때 마다 옵니다..영상 감사드립니다
영상 보면 볼수록 철학과 졸업하면 실업자 되고, 철학하면 배고프게 살 수 밖에 없다는걸 실감한다.
ㅠ..
4차산업혁명과 인문학
4차산업혁명에서 인문학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혹은 어떤 관련성/연관성이 있나요??+ 인문학의 정의도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인문학이 중요해지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기술의 발전으로 편리성이 증가하게 되었지만 의외로 기술에 맹목적으로 빠지다보니 인간 윤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학문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문학이 결과적으로 인간의 감수성이나 사고에 밀접하게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를 기계와 융합시키고 기계를 만들때 결합이 되어야 비로소 우리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은 보통 인류가 가지고 있는 기본 소양 정도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ㅡ 출처. 네이버 지식인.
인문학의 가장 기초는 철학과 신학입니다.
왜 CEO는 인문학에 열광하는가?
요즘 기업들은 ‘인문학의 시대’에 산다. 수많은 기업 CEO들이 인문학을 기업 내부 교육에 적용하고 있다. 인문학 CEO 양성과정은 이제 흔한 것이 되었으며, 기업 임직원들은 기업 내·외부에서 인문학 교육을 받는다. 유명 기업교육 전문업체 사이트에서도 인문학 교육과정을 쉽게 찾을 수 있다.
17년 동안 디즈니의 CEO를 맡았던 마이클 아이스너는 인문학도 출신이다. 그는 세상의 모든 일이 인간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점을 들어 문학의 유용성을 강조했다. 문학을 전공한 탓인지 그는 창의력과 경영가의 마인드를 동시에 가진 보기 드문 리더라는 평가를 받는다. 철학을 전공한 휴렛팩커드의 전 CEO 칼리 피오리나 역시 철학으로부터 수많은 정보를 하나의 핵심으로 통합하는 법을 배웠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을 배워야한다고 강조했다. 이외에도 알리바바, 홀푸드, 유튜브 등 거대기업의 수장들이 인문학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홍수가 터진 듯 넘쳐나는 근래의 인문학 열풍은 불과 10년 전만 해도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왜 인문학은 주목받고 있는가? 그에 대한 답은 인문학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에 있다. 인문학은 삶과 인간에 대한 통찰을 가능하게 한다. 평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현상들로부터 새로운 아이디어와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 때문에 인문학은 기존이 물질만능주의 사회와 인스턴트식 학문에 피로감을 느낀 사람들에게 일종의 탈출구가 된다. 동시에 기업 CEO들에게는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중략...
출처. 미디어 SR
ㅎ,ㅎ,ㅎ,
집착을 놓아야 깨달음을 얻을수 있다 깨달음에 대한 집착은 절대 놓을수 없다에대한 파라독스 부분을 제대로 봤습니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은 견성입니다. 견성을 하기위해 부처도 버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완벽히 어떻게 깨딛는지 방법을 아셨네요. 자기 자신이 깨닫고 있다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그때가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불가에선 설명하죠
예전 말을 통한 깨달음은 방편이라 들은적이 있는데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철학적 논의대상으로 삼으니 또 새롭네요. 정말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다만 제 짧은 지식으로는 언어의 단계에서 깨달음에 대한 배척은 원효가 주장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이러한 주장이 원시불교에서도 나타난다고 볼 수 있을까요?
깨달음의 구분이 좋았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내가 깨달음을 얻으려면 그 집착을 버려리려하면 깨달음에 집착도 버리게 되어 깨달음을 얻을 수 없고,
깨달음을 포기하면 모든 집착을 버리게되어 깨달음을 얻을 수 없게 된다
그 패러독스는 곧 수행이다
인간의 본질중 하나인 학습과 교육, 수행으로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철학에 대해 많은 영상만드시라 고생하셨을 듯?하네요
앞으로도 많이배우고 지금도 많이 배우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깨달음!
좋은 영상 감사해요.김필영 선생님 복 받으세요.저는 감사의미로 광고 건너띄기없이 듣느라 쪼금 애쓰고 있어요.ㅎㅎ
초기경전 [쌍윳따 니까야] 12.65. 나가라숫따에 나타난 붓다의 깨달음은
연기법의 사유로 드러난 사성제입니다. 그외의 해석들. . .
초기불교-열반,해탈.
화엄경-진리의 본성이해.
금강경.반야심경-공의 이해, 반야지혜 터득.
열반경-불성 깨닫기.
선불교-마음을 깨닫기.
깨달음 의미를 조금씩 다르게 불렀지만 같은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깨달음을 가르키는 시간,공간의 손이 달랐을 뿐 달을 가르킨 건 같았다고.보여져요.
반갑습니다. 열심히 정진하셨군요. 좋은 분이시군요.
며칠전 비트겐슈타인의 사적언어 란 강의를 들으며 불교에서 얘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생각 했는데 역시나 선생님 의 강의를 들었네요
물론 이해하는 폭이 낮지만 나름의 즐거움 을 얻습니다 깨달음은 개인적이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하고. 양자역학? 깨달아도 설사는 나온다... 고통은 피할 수 없음.
체험(몸부림)에서 관조(받아들임)로의 전환일 뿐..
말에 ㅓ너무 집착하지 말아야겟네요 저만 스트레스받으니,, 성인들의 말씀을 참고해야겟습니다,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보지말라!
논쟁할 것과 안할 것을 스스로 판단해서,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문제가 별로 생기 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수행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엔 살아가는 방법론인 것 같습니다. ^^
개인의 사고는 개인의 언어를 넘어설 수가 없죠
언어에 집착하고 싶지 않지만 또 그러지 못하는 저의 패러독스입니다ㅠ 오늘도 영상 감사합니다!
성철 스님의 선승 오계, 저는 못 지켜요. 그냥 깨달음 없이 많이 자고, 말도 많이 하고, 책 보면서 간식도 먹고 돌아다니며 색계에서 즐겁게 살렵니다.(구독자 10만 달성, 실버 버튼 개봉기 올려주시기를 기대하며 축하드립니다!)
선승 5계를 지키며 사나 색계에서 화식을 즐기며 육체의 편안함과 안락을 즐기며 사나 결국에는 같습니다. 모든것은 그저 하나의 꿈과 같습니다.
모든 암묵적 지식이나 기술과 마찬가지로, 깨달음이라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도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언어를 통해서 그 대략적인 방향을 지식으로 습득할 수 있겠지만
깨달음의 문 앞에서 깨달음에 대한 집착까지 버리려면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 능동적 실천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다양한 글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사랑의 실천방식에 변화가 생기기도 하니까요.
달을 보았더라도 달에 머물거나 집착하면 이미 어긋난다는걸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선가애서는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얻었더라도 부처의 지위에 머물거나 집착하거나 뽐내면 이미 그르친 것이라고 했다,,,,,
휴학 중인데 다시 대학교에서 교양을 듣는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많이 배워가요.
너무 멋진 강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돈오돈수가 없으면 돈오점수가 비진리가 되고, 돈오점수가 없으면 돈오돈수가 비진리가 되는, 서로 대립하는 논리이나 모순적이게도 서로의 병존이 진리가 되는 것이 저 논쟁의 묘미라고 봅니다. 돈오점수만 진리라면 깨달음의 단계가 있다는 말이되고, 나는 얼마나 깨달았다는 계급의식이 생기죠. 돈오돈수만 진리라면 어디선가 깨달은 독생자가 생겨 세상을 호령할 수 있겠죠. 하지만 서로 대립논리가 있어 나는 깨달았는가, 얼마나 깨달았는가, 얼마나 깨달았다는 자의식이 허위는 아닌가 하는 자기에 대한 질문에 몰입하게 되는것 같습니다ㅎ 그게 성철께서 단박에 깨닫고 그 이후에는 없다는 가히 높은 스탠다드를 제시한것이 아닐까, 돈오돈수와 점수의 언어논쟁을 궁극적으로 파괴함이 성철스님이 가리킨 달이 아닐까, 기독인으로서 금강경을 계속 읽던 와중에 돈오론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ㅎㅎ
오늘 아침 방송시청하고 새삼 한가지 깨달었습니다.
역시 철학은 어렵다는것을. . . ㅎ
와, 최고네요.. 그동안의 논쟁이 주질없음을 느끼네요
구독자 10만명 돌파! 실버버튼 인증해주새요 선생님 ㅎㅎㅎ
깨달음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알수 없지만서도 깨달음을 얻었다는 자들이 "내 깨달음이 옳고 너는 그르다" 며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 자체가 이미 그들은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I dont care fuckin idiots알아서피해 50% 맞는 말씀.
깨달은 사람이 깨달은 사람을 알아보도록 되어있습니다. 못깨달은 사람은 깨달은 사람을 알아볼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고정관념의 찌꺼기가 색안경처럼 작용해서 깨달은 사람의 투명한 마음자리를 볼수가 없고, 자신이 쓴 안경색으로만 해석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이 나온것입니다.
재밌어요 개인적으로 깨달음이라는 주제가 잡념과 온갖 감정이 많은 저에게는 흥미로운 주제거든요.
김필영 선생님 감사합니다
완전 흥미진진 , 넘넘 잘 봤습니다. !!!!
참 잘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성철스님', '깨달음' 너무좋습니다! 동양철학도 다뤄주세요~!!
지금, 정신차려진 자리, 정신이 돌아온 자리. 지금 이 자리가 생각 감정에 매몰되지 않는 내 본래 자리. 내 원래 자리.
이자리가 내 본래 자리인걸 아니, 정신이 광명해 지는구나. 내 존재감이 드러 나느구나.
조용히 눈을 감고, 그 자리를 즐기니, 거기가 열반이구나.
형님~
마지막 맨트(저의 모든 소리는 헛소리였던 것 같습니다.)
졸라 멋지십니다*^^*
불가의 깨달음은 생노병사의 해결을 향한 방향으로의 깨달음입니다.
철학적 깨달음도 아니고 철학적 깨달음이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인간적차원의 철학적 진리탐구가 불가에 많이 도입된 듯하여 종교성에 큰 흠집을 냅니다.
조계종 간화선도 해보고 인도에서 탄트라 싱잉볼 차크라 끌어올린다는 명상, 미얀마에서 위빠사나 다 해봤는데요. 위빠사나가 제일 진짜 같습니다. 이쪽이 신비주의가 제일 없고 오로지 호흡과 감각만 관찰하거든요. 미얀마에는 아직도 아라한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 조계종에 서울대 나오고 명망있는 스님이 하는 간화선 강의도 들어봤는데 속만 터지게 하더군요. 결론은 조주에 물음에 답은 없다는거죠. 답이 없는 물음을 계속 갖고 모른다 하는게 수행이라는거죠. 성철스님이 하는 말은 대단하지만 그분이 깨달았는지도 의심스럽고, 돈오점수가 더 맞다고 봅니다. 부처님도 자기 부족이 전쟁으로 코끼리에 압사 당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슬퍼 햌ㅅ다는 이야기도 있고 마지막 공양에서 설사를 하고 열반에 드셨으니까요. 오로지 흐름만 있을 뿐이지 항번에 깨치고 끝나는건 납득 안가네요
있다 없다가 어차피 답이 아니기 때문에 답을 못내도 상관 없다는 것 아닌가요 ? 답 없는 채로 묻고만 있으면, 그 물음이 나오는 자리가 바로 존재의 본질이고 생명의 근원이니까, 그 자리를 찾으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속 시원하고 좋았습니다...
오늘의 작가님 이야기도 헛소리일 수도 있겠다는 마지막 멘트 미소짓게만드네요. 삶에 지혜가되는 헛소리도 있을까요 ? ㅎㅎ
종교는 정답이 없고. 깨달음도 정답이 없고. 그래서 종교가 많고, 깨달음에 대한 수행방법도 많고. 호흡법도 다양하고, ,,,,,,,,,,,,,,,,,,,,,,,,,,
믿든 말든, 이걸 하건 말건은 당신 맘.
흐름을 타되 얽메이지 않는다.
문자를 읽되 문자 너머의 본질을 파악하라.
깨달음이 중요한것이 아닙니다. 깨달아도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는것입니다. 깨닫는것은 생각보다는 쉽습니다. 다만 깨달은것을 실천하는것이 어려운것입니다. 우리가 양심이란것이 어떤것인지는 알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달을 찾고 달을 보는것은 쉽지만 실제로 달에 가는것은 어려운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달에 가기위에서는 그만한 과학과 기술력이 있어야 합니다. 양심있는 세상을 만들기위해서는 그만한 법과 제도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석가공맹소크라테스가 잘몰랐던거지요
깨달음은 실천과상관이없어요 그리고 깨달으면 모든게 실체가 없다는것을 알게된다 이것이 맞습니다 여기에 대입하면 양심이나도덕윤리 진실걑은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깨달을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고로 양심이나 선(착함)과 실천은 깨달음과 아무관련이 없습니다
안믿을사람이 많겠지만
믿지는 마시길~ 깨달음이란 객관이 아닌 주관에만 있음을 기억한다면 믿든안믿든 진실이 그러하다는 것을 언젠가 알게 됩니다
@@energygreen3769 감사합니다 나는 깨달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성자들이 깨달음에 이른것이 아니라고 말한것뿐입니다 님도 말했다시피 성자들도 자신이 아는 바를 자신의 방식대로 이야기 한것뿐이지요 그것이 옳거나 맞는 이야기는 아니라는거지요 이것은 내가 말한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스스로 말한거지요 신앙이되면 절대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선생님입니다 수학선생 과학선생 있듯이 자신의 과목이 다른것 뿐이지요 그들의 가르침을 배우는것뿐 그들하나를 지정해 믿으란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자중에는 예수나 공자처럼 무조건 맞다라고 생각하신분들도 있으나 그분들이 잘못알고 계신거 뿐입니다 깨달음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세상이나 우주의 정보를 조금더 알뿐이지요 정의되는것도 아니구요
그냥 간단히 말하면 이주재는 말이나 글로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스스로 깨우치는날 알게되시며 님께서 알고이있다해도 누군가를 가르칠수 없습니다 여러성자들이 했던것처럼 그리되면 우리에게 이득 도움이 될뿐이라는것만 이야기할수 있을뿐입니다 깨달음은 중요한게 아니고 좋은것이 있다면 깨닫게되면 세상에 눈을 뜨고 걷는다는것 뿐입니다 조금더 잘 갈수있겠지요 깨닫지 못했을때는 눈을 감고 걷는다는것 그 차이일 뿐입니다 눈을 감고 어떻게 걷는가 라는 의심이 들겠지만 대부분 눈감고 걷지요 모른다고 말하는것이 감고있다는 것과같습니다 안다고 말하는이들역시 마찬가지 깨닫게되면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이란 성자들이 말했듯이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만 말하지요 지금처럼 질문에만 대답합니다 깨달았다 하는것은 모두가 각자의 길을 가도록 뇌두는것이기 첫째 법칙임을 알기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은 깨달음이 열리는 시기이니 님께서도 스스로 알게 되는날이 올것입니다 님 뿐아나라 어리석고 눈감고있는 모든이들이 언젠가는 어차피 깨달음에 이릅니다 그러니 특정인이 대단한것이 아니라 우리모두가 대단한 이들입니다 깨달음에 이르기는 조금더 빠르나 늦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믿지마시라고 말한것은 특정한것이 옳다고 믿는한 절대 깨닫지 못합니다 이글은 참고 일뿐입니다 그저 진실이그러합니다 진실이란 옳은것도 그른것도 아닙니다 나는 이런진실을 말함에 믿든안믿든 강요나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님께서 하는 스스로의 선택을 오직 존중할뿐입니다
이로서 질문1,2,3번에 대한 대답입니다
정의에대해서도 깨달음은 진리라고도 합니다 진리는 멈추어있는것이 아니고 움직임 즉 변화합니다 그러므로 멈추었다의 의미를 가진 정의 를 내리는것이 불가능합니다 정의내리는 순간 이미 깨달음이 아니라는거지요 앞에서도이야기한 윤리도덕양심등은 우리가 이득되는 덕목일뿐 깨달음과는 무관하다고 말한거뿐입니다 실체는존재하나 실체가아니고 볼수없습니다 없고옳고그름이 없다는것을 아는것이 께달음입니다 님께서 깨달음을 선택하여 원한다면 도움되는 스승들을 찾게되실겁니다
고맙습니다
@@energygreen3769 기분에 동요하는 사람 아니니 안심하세요 동문서답으로 생각하셨다면 내가 잘못말했군요 동문서답이 아닙니다 이는 그린님 한사람이 아닌 여러사람이 보도록구성했기에 부득이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이글을 누가볼지 하나하나 알고 있습니다 다만 나는 점쟁이도 아니며 내가 알려지길 바라는이도 아니기에 대답하지는 않습니다 질문애 대한답이 시원치 않았다면 하나하나 다시 질문바랍니다
먼저것을 보면 1번질문 깨달음의 커다란의미는 그냥 아는것입니다 하지만 몰라도 크게 상관이없습니다
2번 질문
눈을 뜨고 걷는것입니다 우주의관점에서 볼때 대부분 눈감고 걷습니다
3번 질문
이것을 아는 것입니다
좀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는 꿈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냥 긴 꿈입니다 반야심경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를 알았던 예수 석가도 물리계의 법칙을 따랐습니다
그들이 이 야기를 전하러 온건 지옥에서몸부림 하는 불쌍한영혼들의 하소연 때문입니다 이것도 논점에서 벗어났나요? 이것은 그저 작은 부분의 예 를 든것입니다
깨닫는다는것은 이런 사실 즉 진실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궁극 마지막엔 모두가 고통없고 모두가 하나되어 하나의 에너지에 훕수되는것이궁극의목적 입니다 물리계나 우주고차원이나 수없이 많은 여러 선택을 할수있고 하고있지만 깨달음의 마지막단계에서는 심플하게 둘중 하나만 선택하는 기로에 섭니다 흡수될것인가? 남을것인가?
깨달음에 가까워질수록 단순해집니다 철학이란 개개인각자의생각을 말한것이며 심오함속으로 깊이들어갈수록 깨달음은 멀어집니다
고맙습니다
@@energygreen3769 깨달음에 정의란 없습니다 정의를 내리는 순간 이미 께달음에서 멀어집니다
깨달음은 변화합니다 정의는 멈추어있습니다
정의를 알고자 하시나 어차피 아는것을 이야기하고 싶어도 지구별의 언어로는 표현할방법이 없으며 깨달음에대해 정의내리고자 하는 어휘가 우리에겐 없습니다 그린님은 깨달음을 실천이라 생각하는군요 성자들이 잘못알았거나 왜곡 되었습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 부득 트러블이나 고통이 수반되기도 합니다 모든고통의 원인은 무엇인가를 시도하면서 발생합니다 그중 큰 고통은 인연인데 인연은 무엇인가 시도 하는 행동에 귀속되어있는 표현이므로 연 에 대하여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깨닫고자 행하는자체로 깨달음에서 멀어진다는것이 진실입니다 진짜 깨달음은 있는그대로 바라보는 관조 입니다
굳이 정의를 표현한다면 깨달음이란 관조입니다 대답이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궁금하다면 질문하십시요 질문이 생기지 않을때까지 말입니다 내가 옳든그르든 어차피 진실은진실입니다 그냥 나그네의 헛소리로 치부한다해도 나는 괘념치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것이 진실임을 알게될것입니다
@@energygreen3769 좋습니다 토론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해만 해도 좋습니다
진실은 모순이 없어야 합니다 동문서답도 없어야 하지요 이해를 바라지 않습니다 모순이나 동문서답으로 본다면 교류가 되지 않아서 겠지요 답변을 다시 살펴보길 권장합니다 내가 보기에 그린님은 시야를 넓히시면 보일듯합니다 답변에 그린님이 원하는 답이 있어요 실천이라는 단어에의미에 얽메어 있다는것을 알수있어요
이것을 언짢게 느낀다면 미안합니다
또한 토론이야 각자의 생각을 말하는것일뿐이지요
정답을 요구하나 정답이란 없습니다
상대의관점이나 생각을 이야기하메 자신이나 주변의누군가의 반응을 살피길권장합니다 반응이란 무 입니다 동요되지 않아야하는게 기준입니다 스스로를 살핌에 반응된다면 어차피 결론내려지지 않지요 그린님이 부정하든 긍정하든 나는 그저 그대로 바라보고 또한 완전히 존중할 뿐입니다 그러니 이대화에서 잘못된것은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한번의 깨달음으로, 전부를 깨달았다 할 수는 없습니다.
설사 전부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행함이 없다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깨달음 자체가 완전한데 거기에 무슨 행함이 있나요?
@@이기훈-n2s 안다고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니지요.
마음으로 깨달았더라도, 몸이 따라주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정말 항상 그렇게 유익하네요ㅎㅎ 감사합니다 :)
좋았습니다~!
5분뚝딱철학빠 입니다. 김필영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성철 스님의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보면 안된다'는 것도 언어를 통해 전달될 수 밖에 없기에 비언어적 깨달음이라는 것이 철저히 비언어적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언어는 관계를 상정하는 것인데 관계가 없이 '깨달음'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감사합니다ㆍ솜결
특히 요즘 코로나 때문에, 간식 안 먹고, 책 안 읽고, 말 안하고, 안 돌아다니고 다 할 수 있는데 3시간 밖에 안자는건 좀... ㅠㅠ 스님.. 어떻게 3시간 밖에 안 자요.
유전적으로 잠을 적게자도 피로감이 없는 타입이 있다고 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깨닫다 는 깨닫지못했다 를 동시에 창조해 버리니까. 빛 이란걸 인지 할 수 있는건 그림자가 있기때문인거처럼. 둘은 하나인데 하나가 둘 일때 우리가 인지할 수 있으니. 인생즐겜 합시다
멋지네요. 살아보지않고 삶을 알수 없죠. 철학은 삶을 위한 것이지 철학 그자체를 위한것이 아니죠. 하지만 살기 위해선 철학책을 공부해야죠. 만약 나혼자 자연속에서 산다면 성철스님 말대로 해도되지만 인간사회 속에서 살아야하니 사회적 논리를 배워야 살수있죠. 제 생각엔 두사람 말이 다 맞아보여요. 산속에서 혼자 사는데 사회적 언어가 의미가 없고, 사회 속에서 어울려살면 사회적 언어를 배워야 사람구실 할수있죠. 서로가 처한 환경에 따라 깨달음도 달라지는게 맞아보여요. 서로 싸울일이 아닌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