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엘리야 때처럼"을 작곡한 로빈 마크는 저와 같은 사람들에게 여러 시달렸나봅니다.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이 곡을 작곡한 배경을 상세히 적어두었습니다. robinmark.com/the-story-behind-days-of-elijah/ 아래는 챗GPT에게 마크의 주장과 제 비판을 종합적으로 평가해달라고 한 내용의 답입니다. Robin Mark의 *"Days of Elijah"*에 대한 신학적 비판에 대해, Mark는 그가 이 곡을 작곡할 때 의도한 것은 성경적인 인물들을 통해 현대 교회와 성도들에게 소망과 격려를 주기 위함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이 곡이 특별한 신학적 또는 종말론적 해석을 담고 있지 않으며, 단순히 예배와 찬양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한 어려운 시기에 희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고 말합니다. 1. **직통계시**: Mark는 이 곡을 통해 새로운 직통계시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것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엘리야의 이야기는 현대 신자들에게 "신앙과 소망을 가지고 굳건히 서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 사용되었을 뿐, 새로운 계시를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2. **모세의 언약**: "모세의 때와 같이"라는 구절 역시 모세 언약의 성취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새 언약 아래서도 여전히 의와 거룩함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나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듯이, Mark는 이 곡을 통해 의로운 삶을 강조한 것이지, 모세의 언약이 현재 적용된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3.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 에스겔의 환상에 대해서도, Robin Mark는 이것이 문자적으로 마른 뼈가 살아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교회가 하나로 연합하고 회복되는 것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구약의 이스라엘 회복을 예표로 들었지만, 그 본질은 그리스도를 통한 교회의 부활과 성령으로 이루어진 하나 됨을 의미한다고 해석됩니다. 결론적으로, Robin Mark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노래의 주된 목적이 특정 신학적 논쟁에 휘말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소망을 주고 그들의 믿음을 격려하는 것임을 거듭 강조하며, 이 곡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교회의 회복을 기다리는 희망의 노래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로빈 마크의 곡을 신사도 운동의 이단 사상을 비판하기위해 빌드업으로 사용하였으나 사료 조사가 부족하여 댓글로 보충합니다. 다만 가사의 내용은 비판받을 요소가 충분합니다. 비록 그가 의도치 않았다고 하더라도요. 1. "엘리야 때처럼 선포되는 말씀"은 아합왕 시대의 암흑시기와 영적전쟁을 떠올리게 합니다. 2. "모세의 때와 같은 언약의 성취"는 출애굽과 만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3. "에스겔의 환상에 나타난 마른 뼈"는 제2의 출애굽, 즉 바벨론 포로 귀환을 떠올리게 합니다. 구약신학을 탁월하게 제시하였으나 그리스도를 통한 성취가 가사에 담기지 않고 재림의 메시지가 강조되어 모호한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이 점에서 많은 비판이 있었을 것이며, 이게 스스로 홈페이지에서 의도를 밝히게 된 이유가 아닐까합니다. - 지금의 교회에서도 많이 불리는 찬양입니다. 제가 제기한 비판은 이 노래를 부르지 말자는게 아닙니다. 그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논쟁으로 그치지요. 저도 작곡의 도를 걸었던 사람으로서, "작곡가의 의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처럼 성경말씀의 의도를 180도 뒤집어놓은 곡이 있더라도, 저는 작곡가의 의도를 존중하여 찬양시간에 부릅니다. 이 곡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작곡가의 의도를 존중하고, 부르는 사람이 이 가사를 자신에게 성경적으로 적용하면 됩니다. 알고 부르는 것과 모르고 부르는 것에는 깊이의 차이가 있습니다. '알찬시간'은 찬송가 이해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만드는 컨텐츠입니다. - 아, 데이비드 루이스와 존 윔버는 빼박 신사도운동가 맞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노래도 잘 부릅니다 :)
어릴 때 베니힌 목사가 한국에 어떤 큰 교회에 설교를 하러 와서 아는 목사님네 가족과 함께 간 적이 있어요. 예배당이 꽉 차서 저희는 외부에 마련된 티비(생중계)로 설교를 들었는데 그 때 병을 치유하는 시간?이 있었거든요. 하나님이 오셨다면서 베니힌 목사가 오른손을 촥하고 들어올리면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우르르 쓰러지고 왼손을 펼쳐들면 왼쪽에 앉은 사람들이 죄다 쓰러지는 장면을 봤어요. 티비로 보던 장소에 있는(제가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서서 두손을 들고 기도하다 풀썩풀썩 쓰러지거나 미친듯이 깔깔거리며 웃거나, 울거나 했었는데 참 묘한 경험이었거든요. 저는 어떠한 경험도 못하고 멀뚱히 있긴 했지만.. 제가 봤던 이런 형상들, 목사님 말씀따라 성령을 ‘부리는’듯한 이런 행동들이 다 주작이었던걸까요??
오순절주의(은사주의)와 신사도주의는 신학적으로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신사도는 크게 보았을 때 극단적 예언운동이라고 할 수 있구요. 물론 오순절주의자들을 통해서 신사도운동이 시작되었지만, 현재는 그 세력이 많이 나뉘어져 있으며, 실제로 오순절 내에서도 건강한 신학 정립을 위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신사도의 문제점이 정확히 무엇인지 지적하지 않으시면서 그저 '은사'를 인정하는 모든 공동체는 신사도라고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만약 그대가 은사 중지론자이시라면, 인정하겠습니다.)
요즘은 성령님을 구하는 모든 것들을 싸그리 신사도라고 칭해서 폄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교만이나 다른 죄와 결합해서 악한 열매를 맺는 경우도 있지만, 지금은 성령시대인데 지나치게 해석되는 것 같습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만 분별되느니라 는 말씀처럼, 성령의 사역을 인간의 이성괘 경험으로 해석하고 재단하려고 해서는 안될 것 입니다
좋은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곡가와 곡에 대해 더 공부하여 고정댓글로 내용을 보충해두었습니다. 제가 제기한 비판이 과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다만 노래를 통해 전달되는 가사의 모호성 역시 동시에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마크는 소위 평신도 예배인도자입니다. 그럴수록 노래에서 다루는 가사는 철저히 검증하고, 전문가의 조언을 수용해야 합니다.
예배는 주님울 섬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제사(지금의 예배)룰 통해 섬긴거구요, 예배의 회복은 우리가 회개하며 날마다 주님을 찬양하며 말씀을 묵상 하란 뚯입니다. 그래서 다웟의 예배회복은 단순히 성전 안에서의 예배만이 아니라 우리 삶속에서 우리의 신앙이 회복되는 즉 거듭나야 하는 교회들을 뜻한다고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회개하며 거듭나서 하나님께 예배(즉 섬김으로) 우리의 신앙이 처음 사랑이 되 길 기도 합니다.
"지금은 엘리야 때처럼"을 작곡한 로빈 마크는 저와 같은 사람들에게 여러 시달렸나봅니다.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이 곡을 작곡한 배경을 상세히 적어두었습니다.
robinmark.com/the-story-behind-days-of-elijah/
아래는 챗GPT에게 마크의 주장과 제 비판을 종합적으로 평가해달라고 한 내용의 답입니다.
Robin Mark의 *"Days of Elijah"*에 대한 신학적 비판에 대해, Mark는 그가 이 곡을 작곡할 때 의도한 것은 성경적인 인물들을 통해 현대 교회와 성도들에게 소망과 격려를 주기 위함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이 곡이 특별한 신학적 또는 종말론적 해석을 담고 있지 않으며, 단순히 예배와 찬양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한 어려운 시기에 희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고 말합니다.
1. **직통계시**: Mark는 이 곡을 통해 새로운 직통계시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것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엘리야의 이야기는 현대 신자들에게 "신앙과 소망을 가지고 굳건히 서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 사용되었을 뿐, 새로운 계시를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2. **모세의 언약**: "모세의 때와 같이"라는 구절 역시 모세 언약의 성취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새 언약 아래서도 여전히 의와 거룩함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나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듯이, Mark는 이 곡을 통해 의로운 삶을 강조한 것이지, 모세의 언약이 현재 적용된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3.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 에스겔의 환상에 대해서도, Robin Mark는 이것이 문자적으로 마른 뼈가 살아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교회가 하나로 연합하고 회복되는 것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구약의 이스라엘 회복을 예표로 들었지만, 그 본질은 그리스도를 통한 교회의 부활과 성령으로 이루어진 하나 됨을 의미한다고 해석됩니다.
결론적으로, Robin Mark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노래의 주된 목적이 특정 신학적 논쟁에 휘말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소망을 주고 그들의 믿음을 격려하는 것임을 거듭 강조하며, 이 곡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교회의 회복을 기다리는 희망의 노래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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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마크의 곡을 신사도 운동의 이단 사상을 비판하기위해 빌드업으로 사용하였으나 사료 조사가 부족하여 댓글로 보충합니다.
다만 가사의 내용은 비판받을 요소가 충분합니다. 비록 그가 의도치 않았다고 하더라도요.
1. "엘리야 때처럼 선포되는 말씀"은 아합왕 시대의 암흑시기와 영적전쟁을 떠올리게 합니다.
2. "모세의 때와 같은 언약의 성취"는 출애굽과 만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3. "에스겔의 환상에 나타난 마른 뼈"는 제2의 출애굽, 즉 바벨론 포로 귀환을 떠올리게 합니다.
구약신학을 탁월하게 제시하였으나 그리스도를 통한 성취가 가사에 담기지 않고 재림의 메시지가 강조되어 모호한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이 점에서 많은 비판이 있었을 것이며, 이게 스스로 홈페이지에서 의도를 밝히게 된 이유가 아닐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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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교회에서도 많이 불리는 찬양입니다. 제가 제기한 비판은 이 노래를 부르지 말자는게 아닙니다. 그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논쟁으로 그치지요. 저도 작곡의 도를 걸었던 사람으로서, "작곡가의 의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처럼 성경말씀의 의도를 180도 뒤집어놓은 곡이 있더라도, 저는 작곡가의 의도를 존중하여 찬양시간에 부릅니다. 이 곡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작곡가의 의도를 존중하고, 부르는 사람이 이 가사를 자신에게 성경적으로 적용하면 됩니다. 알고 부르는 것과 모르고 부르는 것에는 깊이의 차이가 있습니다. '알찬시간'은 찬송가 이해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만드는 컨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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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데이비드 루이스와 존 윔버는 빼박 신사도운동가 맞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노래도 잘 부릅니다 :)
어릴 때 베니힌 목사가 한국에 어떤 큰 교회에 설교를 하러 와서 아는 목사님네 가족과 함께 간 적이 있어요. 예배당이 꽉 차서 저희는 외부에 마련된 티비(생중계)로 설교를 들었는데 그 때 병을 치유하는 시간?이 있었거든요. 하나님이 오셨다면서 베니힌 목사가 오른손을 촥하고 들어올리면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우르르 쓰러지고 왼손을 펼쳐들면 왼쪽에 앉은 사람들이 죄다 쓰러지는 장면을 봤어요. 티비로 보던 장소에 있는(제가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서서 두손을 들고 기도하다 풀썩풀썩 쓰러지거나 미친듯이 깔깔거리며 웃거나, 울거나 했었는데 참 묘한 경험이었거든요. 저는 어떠한 경험도 못하고 멀뚱히 있긴 했지만.. 제가 봤던 이런 형상들, 목사님 말씀따라 성령을 ‘부리는’듯한 이런 행동들이 다 주작이었던걸까요??
오순절주의(은사주의)와 신사도주의는 신학적으로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신사도는 크게 보았을 때 극단적 예언운동이라고 할 수 있구요.
물론 오순절주의자들을 통해서 신사도운동이 시작되었지만,
현재는 그 세력이 많이 나뉘어져 있으며, 실제로 오순절 내에서도 건강한 신학 정립을 위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신사도의 문제점이 정확히 무엇인지 지적하지 않으시면서 그저 '은사'를 인정하는 모든 공동체는 신사도라고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만약 그대가 은사 중지론자이시라면, 인정하겠습니다.)
목사님의 은사에 대한 견해를 먼저 밝히시는 게 옳을 듯 합니다
요즘은 성령님을 구하는 모든 것들을 싸그리 신사도라고 칭해서 폄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교만이나 다른 죄와 결합해서 악한 열매를 맺는 경우도 있지만, 지금은 성령시대인데 지나치게 해석되는 것 같습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만 분별되느니라 는 말씀처럼, 성령의 사역을 인간의 이성괘 경험으로 해석하고 재단하려고 해서는 안될 것 입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예수전도단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또한 주의 자비가 내려와 내려와 ~~
그래서 우리 믿음의 선조들을 시편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렸던 것입니다. 우리도 과거 믿음의 선배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편 찬양을 회복시키고 예배 찬양으로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내요.
흠.. 글쎄요...ㅡ,.ㅡ;;; 걍 지금이란 시기를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 나라가 이뤄진 오늘을 얘기함으로 봐도 될 듯 한데요.. 너무 과한 듯요.. 신사도까지 감은...;;;
신학을 좋은 학교에서 폭넓게 체계적으로 공부해야 좁은 동굴에 갇히지 않지요
좋은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곡가와 곡에 대해 더 공부하여 고정댓글로 내용을 보충해두었습니다.
제가 제기한 비판이 과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다만 노래를 통해 전달되는 가사의 모호성 역시 동시에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마크는 소위 평신도 예배인도자입니다. 그럴수록 노래에서 다루는 가사는 철저히 검증하고, 전문가의 조언을 수용해야 합니다.
찬양이라고 이름표가 붙여졌다고 해서 함부로 부르면 안되겠네요... 항상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이 찬양은 이제 찬양 목록에서 제외해야 겠습니다.
해석이 너무 많이 틀리네요ㅎㅎ
결론을 정해놓고 해석을 시작하지 마시고
해석을 통해서 결론을 내리시는게 좋겠네요.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파오운.. 이거 기독교에서 떨어져 나온 모 종교단체에서 이슬성신이라며 주장하던 것일수도 있겠네요.
예배는 주님울 섬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제사(지금의 예배)룰 통해 섬긴거구요, 예배의 회복은 우리가 회개하며 날마다 주님을 찬양하며 말씀을 묵상 하란 뚯입니다. 그래서 다웟의 예배회복은 단순히 성전 안에서의 예배만이 아니라 우리 삶속에서 우리의 신앙이 회복되는 즉 거듭나야 하는 교회들을 뜻한다고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회개하며 거듭나서 하나님께 예배(즉 섬김으로) 우리의 신앙이 처음 사랑이 되 길
기도 합니다.
ㅎㅎㅎ😊
ccm 부르는거 자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교인들이나 교회도 있는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다들?
전반적 내용은 이해하겠는데 병고침을 받은게 왜 마귀역사라고 보시는지요?
저도 이게 의문이네요. 논증없이 말하는건 이츠학 스타일 아니지 않나
열매가 보여주니까요
05분 1초에 대해서.. 고전 12:9, 이사야 53:5는 어떻게 보십니까? 초대교회에만 적용된다면 이사야 53:5는 왜? 영어성경에 나음은 healed로 적혀있음
이전에 옥성호 씨가 쓴 [엔터테이먼트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에서도 '지금은 엘리야 때처럼' 가사의 부적절성을 지적했는데 ;;; ㅎㅎㅎ 그 때 이후로 오랜만에 엘리야 때처럼 가사를 보게 되네요
통쾌한 비판 시원하네요 ^^
그 옥성호씨는 탈회심했습니다..
옥성호씨는 불신자에요 ^^;;;
보통 교회서 지금도 부르고 있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아무 생각없이 당하게 되죠. 감사합니다~ 좋은 정보들 앞으로도 많이 부탁 드립니다~꾸벅~
파오운…쿰척쿰척…
병고침 받은 게 왜 마귀 역사인지..?
그렇가면 그 마귀는 굉장히 좋은 마귀가 아닌가요? 성경 어디에 마귀가 병을 고쳤다고 나와있습니까?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데요 논증도 없고
엘리야 때 처럼 많이 불렀었는데 😢
일반교회도 부르지않나요??엘리야때처럼
와 충격이네요... ㅎ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