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산스님의 벽암록】 제55칙 도오의 말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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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Опубликовано: 5 фев 2025
- 제55칙 도오의 말하지 못함(道吾不道)
치밀하게 살펴 온전히 참됨을 증험한다면
능히 호랑이 머리에 올라타고
호랑이 꼬리를 거두는 것을 감당하게 된다.
그런데 다시 어떤 사람이기에
선타파(仙陀婆)를 굴렸는가.
【본칙】
도오(道吾: 769~835)스님이 점원(漸源)스님과 함께 어떤 집을 찾아가 조문을 하였는데, 점원스님이 관을 두드리며 (도오스님에게) 말했다.
“살아있습니까? 죽었습니까?”
도오스님이 말했다.
“살아있다고도 말하지 못하고 죽었다고도 말하지 못한다.”
“무엇 때문에 말하지 못합니까?”
“말하지 못한다. 말하지 못한다.”
(절로) 돌아가는 길에
점원스님이 말했다.
“화상께서는 빨리 저에게 말해주십시오. 만약 말하지 않으시면 화상을 치겠습니다.”
“치려거든 마음대로 쳐라. (그렇지만) 말로는 말하지 못한다.”
점원스님이 곧바로 쳤다.
나중에 도오스님이 천화하자, 점원스님은 석상(石箱)스님에게 이르러 앞의 이야기를 그대로 하였다.
석상스님이 말했다.
“살았다고도 말하지 못하고 죽었다고도 말하지 못한다.”
“무엇 때문에 말하지 못합니까?”
“말하지 못한다, 말하지 못한다.”
점원스님이 이 말 아래에서 살피는 것이 있었다.
점원스님이 하루는 삽을 들고 법당에 올라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걸었다.
석상스님이 말했다.
“선사(先師: 옛 스승, 도오)의 영골(靈骨)을 찾고 있습니다.”
“큰 파도가 끝없이 아득하고 흰 물결이 하늘까지 치솟는데, 무슨 선사(先師)의 영골(靈骨)을 찾는다는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설두스님은 착어하였다.
“창천, 창천(蒼天蒼天)”
점원스님은 말했다.
“힘을 붙이기에 딱 좋겠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태원(太原) 부상좌(孚上座)는 말했다.
“선사(先師)의 영골이 오히려 있었구나.”
내용을 보겠습니다.
도오(道吾: 769~835)스님이 점원(漸源)스님과 함께 어떤 집을 찾아가 조문을 하였는데, 점원스님이 관을 두드리며 (도오스님에게) 말했다.
“살아있습니까? 죽었습니까?”
지금 저 스님은 무엇을 알고자 한 것일까요? 육체가 죽으면 마음도 죽는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살아있는지 알고 싶은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은 이미 양변에 떨어진 이후라고 하겠습니다. 만약 그가 항상 성성하다면 어찌 양쪽 변두리에서 두리번거리겠습니까? 어찌 깨끗함과 더러움, 범부와 성인에 머물겠습니까? 아득히 초월해 갔을 것입니다.
도오스님이 말했다.
“살아있다고도 말하지 못하고 죽었다고도 말하지 못한다.”
도오스님이 자비심에서 저 스님의 말을 따라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모자를 머리에 맞추어 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오스님의 이러한 말은 마치 용이 읊조리는 것과 같고 호랑이가 휘파람을 부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무엇 때문에 말하지 못합니까?”
이 스님이 이렇게 묻고 있다는 것은 곧 옛 사람들이 ‘무심이 곧 도’라고 한 뜻을 크게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어째서 평상심이 곧 도라고 한 것을 알지 못할까요?
“말하지 못한다. 말하지 못한다.”
가르침에 근거하여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는 것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옛 사람들은 어째서 입을 아끼고 말을 끊었을까요? 이것은 마치 말로써 침묵을 설명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말을 하면 이미 침묵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저 침묵의 그림자만을 말로 설명할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어찌 저 감미로운 제호의 맛을 말로 전할 수 있겠습니까?
(절로) 돌아가는 길에
점원스님이 말했다.
“화상께서는 빨리 저에게 말해주십시오. 만약 말하지 않으시면 화상을 치겠습니다.”
저 절로 돌아가는 길이란 그대로 호젓하고 성성적적한 길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길과 길의 변두리는 더 이상 둘이 아니고 하나도 아닌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찌 하리오. 강물에 보검을 빠뜨리고 배에 금을 새기는 자는 많고 달마와 같은 자는 드물게 만나는 것을. 저 스님이 그동안 먹은 것을 다 토해내지 않는다면 어찌 저 성성적적함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인가?
“치려거든 마음대로 쳐라. (그렇지만) 말로는 말하지 못한다.”
점원스님이 곧바로 쳤다.
눈먼 방망이를 휘둘러서는 안 됩니다. 그 방망이는 오히려 자기자신을 향했어야 했습니다.
나중에 도오스님이 천화하자, 점원스님은 석상(石箱)스님에게 이르러 앞의 이야기를 그대로 하였다.
그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점원스님은 석상스님을 찾아왔습니다. 그저 우연히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석상스님 또한 도오스님을 스승으로 모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 원오스님은 말하기를, ‘알고서 일부러 범하였는데, (그는 이것이) 옳은지 옳지 않는지를 몰랐다. 옳다면 크게 기특할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알고서 일부러 범하였다’는 것은 점원스님에게는 이미 보는 눈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다시 물어서 거듭 확인해 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옳고 옳지 않는지가 아직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그 자초지종에 대해 미흡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검증을 받아보고서 옳다면 크게 기특한 일이 될 거라는 것입니다.
석상스님이 말했다.
“살아있다고도 말하지 못하고 죽었다고도 말하지 못한다.”
그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백번을 반복해도 신선하고 참신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양변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양변에 떨어지지 않는 것을 무심이라고 부릅니다. 범부와 성인, 옳고 옳지 않음, 깨끗하고 더러움, 길고 짧음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수보살은 말하기를, ‘무심을 익히는 것은 마치 활을 쏘는 연습을 하는 것과 같다. 처음에는 드물게 적중하지만 나중에는 백발백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말하지 못합니까?”
이 스님은 지금 ‘이 세상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현상이든 어떤 깨달음이든 모두 혓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석상스님은 말하였습니다.
“말하지 못한다, 말하지 못한다.”
옛 사람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은 입을 벌리려고 애를 썼지만 한 사람은 애초에 혀뿌리조차 움직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원오스님은 말하기를, ‘천상천하이다. 조계(曹溪)의 물결과 비슷해서는 무한평인(無限平人)이 육침(陸沈)을 입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해 장경각출판 [벽암록]에서는 ‘온 천하에 그득하네. 조계의 물결(두 스님의 말씀)이 서로 닮았다고 한다면, 수없이 많은 멀쩡한 사람을 땅속에 파묻는 꼴이 되고 만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천상천하’라고 한 것은 이 ‘말로 하지 못하는 이것’은 곧 온 하늘세계와 인간세계의 모든 가르침에서 이것만이 홀로 우뚝하다는 것입니다. ‘조계(曹溪)의 물결과 비슷해서는’이라고 한 것은 곧 조계와 매우 닮아있다는 것입니다. ‘무한평인(無限平人)이 육침(陸沈)을 입는다’라고 한 것은 큰 도를 간직한 사람이 세상 사람의 옷을 입고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은인자중한다는 것입니다.
질문: 원오스님께서는 왜 이 말을 했을까요?
답변: 노파심 때문입니다.
점원스님이 이 말 아래에서 살피는 것이 있었다.
이 스님은 그동안 얼마나 이 일을 의심하고 의심하며 잠못 이루는 밤을 보냈을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이것이 분명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도대체 왜 충분하지 않을까요?
여기에 대해 원오스님은 말하기를, ‘눈먼 자야, 또다시 산승을 속여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저 ‘여인출정(女人出定)’이라는 화두를 알겠느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잘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대가 살폈다고 해도 딱 거기까지라는 것입니다.
하루는 점원스님이 삽을 들고 법당에 올라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걸었다.
그동안 이 스님은 삽을 들고 동쪽으로 서쪽으로 누비며 다녔습니다. 땅속에 황금이 있다는 것을 배워서 아는 것을 ‘지혜를 배운다’라고 하고, 삽과 곡괭이를 들고서 땅을 파는 것을 ‘수행을 한다’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얻는 것을 ‘살피는 것이 있다’라고 합니다. ‘살피는 것이 있다’는 것은 곧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는 것을 다소 알았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이 스님에게는 이미 이전에 한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지금에 이르러서 다시 확인하고 거듭 증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찍이 점원스님은 어느 작은 암자에 이르렀는데, 한 행자가 [관음경(觀音經)]을 암송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관음경]이란 [법화경] 가운데 ‘관세음보살보문품’을 하나의 경전으로 만든 것입니다.
[관음경]에서는 말하였습니다.
“응당 비구의 몸으로 제도해야 할 자에게는 곧 비구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한다.”
점원스님은 바로 이 대목에서 홀연히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큰 깨달음이라고 한 것은 소승과 중승과는 다른 대승의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하였습니다.
“내가 당시에 도오스님을 잘못 알았구나. 이 일이 원래 말과 구절 가운데 있지 않다는 것을 어찌 알았을 것인가?”
(1부)
합장
취산스님과 가깝게 지내기: 카카오톡 ID: taoindra
※한 번 들으면 자신이 보이고 열 번 들으면 글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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