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가 대단한 국가로 알고 있는데 실상은 다릅니다 우선 고구려의 인구는 150만명을 넘어선 적은 거의 없었구요 보통 100만명 정도로 .. 신라나 백제 마져도 완전히 점령해서 먹을수있는 국력이 안되었습니다 그당시에는 민족개념도 없었고 그냥 힘이 정의였고 점령해서 병합하면 그만이었던 시대 입니다 물론 그때도 그들나름대로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것은 힘앞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시절입니다 당나라나 수도는 장안이고 고구려에서는 아주 멀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까지 원정오려면 전투병 력보다 식량과 화살및 공성무기 부품 공급 병력이 더많아야 했습니다 산성을 치려면 전투병력만 해도 적어도 수비의 3배에서 5배의 병력이 필요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또 고구려는 5개의 부족들이 연합해서 만든 나라여서 언제나 내부다툼과 권력투쟁이 심했습니다 신라나 백제도 마찮가지였지만 ... 결국 연개소문과 그아들들이 고구려를 망쳤습니다 연개소문의 장남이 고구려의 군사력과 고위층들의 많은 비밀들을 가지고서 당나라에 투항해서 앞장서서 당나라 군의 선봉장으로 고구려로 진격해 왔으니..
형수 취수혼 ... 국경이 넓어서 전쟁이 많았던 고구려에서 수시로 대량으로 많은 남자들이 죽었습니다 특히 귀족들은 재산도 있었는데 본인이 죽으면 남편이 죽고 부인이 재혼하면 귀족의 재산은 다른가문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아이들이 없거나 어릴경우는 더욱 그렇죠 그래서 재산이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지 않게 하고 형의 자식들이나 동생 의 자식들이 다른 가문의 남자에게 핍박받는 것을 막을려고 형수나 사별한 제수와 결혼하는 풍속이 생긴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당시 수명도 길지 않았던 시대 이지 만 형수처럼 대하다가 부인이 되어 합방하게 되면 참 아이러니 할것 같습니다 제수씨도 마찮가지구요 허구헌날 전쟁 하면 일할사람도 없고 고구려에는 농사도 많지 않았던 반농 반유목 국가였습니다 만주에 쌀농사는 조선말기에서 일제시대때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고구려 시대에는 면적당 수확량이 작은 콩과 수수(옥수수 아님) 조 귀리 같은 작물들 주로 심었다고 합니다 조선말 선교사들이 조선에와서 한반도 북쪽에는 쌀밥이 없었고 조밥이나 보리밥과 수수를 주로 먹는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연개소문이 등장하기 이전에 신라의 진흥왕 시절 이미 고구려는 약화되었습니다 그증거가 고구려 땅이던 지금의 함경도(원래 옥저땅)와 강원도 북부 (지금의 원산 과 금강산 부근) 이 모조리 신라영토로 되었습니다 신라와 전투마다 패한것입니다 물론 고구려의 군사들은 당시 선비족이나 북위등의 침 략을 막아야 하기에 서쪽에 많은 병사들을 배치해야 하니 신라까지 신경을 못섰을 수도 있으나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 가까이 신라군이 진격해 영토를 넒 히는 상황에서 중국쪽만 방어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죠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것도 중국쪽 세력이던 한나라 위나라 공손씨 들의 침략이 무 서워서 중국세력들에서 먼쪽으로 옮긴것인데 ... 그당시 지도를 보면 신라가 마음만 먹었다면 원산 쪽에서 현재의 북한땅 원산 평양 고속도로 길을 따라 평양으로 진격하면 평양은 며칠만에 떨어질수도 있었습니다 동해안은 함경도 까지 신라가 먹었으니 ..
고구려가 그래도 특유의 버티는 힘은 확실히 있었던 게, 잘 모르는데 요동 방어선 북쪽을 책임지는 신성은 무려 9개월을 버텨냅니다 정말 안시성의 신화가 재현될 뻔한 순간도 있었어요 그런데 연남생의 투항, 이게 정말 큰 건 국내성 포함해서 6개 성과 10만 호의 인구를 들고 투항했다고 하는데 그러면 인구가 50만가량입니다 원래 북쪽에서 내려오는 적을 막기 위한 후방 기지 역할을 했던 게 국내성인데 이 성 중심으로 수많은 성과 인구가 고구려에서 일순간 떨어져 나가면서 요동과 평양 사이에 엄청난 힘의 공백지대가 형성됐고, 요동 북쪽에서 국내성 쪽으로 이어지는 안정적인 보급로가 형성되면서, 고구려 원정의 최대 과제였던 보급의 문제를 해소하게 됐어요 나당 연합군의 소규모, 대규모 공세를 끈질기게 막아내며 국토를 수호해왔던 고구려인데 내분 앞에선 어쩔 도리가 없어요 고구려가 당나라에 맞섰던 가장 큰 무기는 땅 그 자체의 험난함과 그로 인한 적 행동의 제한성, 이 두 가지가 결정적이었는데 이게 더이상 먹히지 않게 되니 결국 막을 내리게 된 거죠 고구려의 멸망은 한민족의 역사에 있어 유난히 안타깝죠
심지어 그 신성도 사부구놈의 배신이 아니었으면 안무너졌음. 게다가 제3차 고당전쟁때 황산전투에 투입된 고구려군만 15만에 외인부대격인 말갈인 부대:5만을 더해 전투부대만 20만을 동원했을정도였는데 신라는 백제먹고도 진짜 끌어모아야 20만을 동원한점과 남소성에 저항한 고구려군이 15만이나 되는점을 고려하면 사부구가 배신만 안했어도 신성이 안무너진데다 요동성,안시성등도 그대로 버티고 있는 상황이라 나당연합군에 평양성이 무너지기는 커녕 오히려 제3차 고당전쟁은 나당연합군이 고구려군에 참패했다는것으로 끝나고 얼마 안지나서 가르천칭의 토번제국의 급성장으로 당제국이 수도 장안성까지 탈탈 털리며 고구려는 당제국에 역습을 가하며 당제국에게 타격을 준후 바로 신라를 쳐서 먹었을것임. 백제를 먹은 신라는 최대가 20만이 그만인데다 백제 세력들이 고구려에 붙어버리면 신라는 그대로 ㅈ망했겠죠. 그리고 가르천칭의 토번제국과 신라와 백제를 흡수하여 중화 제국과 동급이상의 문명에 백만 대군도 동원가능해진 통일 고구려로 인해 당제국은 ㅈ망했겠죠. 그리고 신라도 고구려애들과 어느정도 동질성이 있던걸 고려하면 당제국에 붙을 가능성은 낮을테니 당제국입장에서는 답이 없겠죠
고구려가 대단한 국가로 알고 있는데 실상은 다릅니다 우선 고구려의 인구는 150만명을 넘어선 적은 거의 없었구요 보통 100만명 정도로 .. 신라나 백제 마져도 완전히 점령해서 먹을수있는 국력이 안되었습니다 그당시에는 민족개념도 없었고 그냥 힘이 정의였고 점령해서 병합하면 그만이었던 시대 입니다 물론 그때도 그들나름대로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것은 힘앞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시절입니다 당나라나 수도는 장안이고 고구려에서는 아주 멀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까지 원정오려면 전투병 력보다 식량과 화살및 공성무기 부품 공급 병력이 더많아야 했습니다 산성을 치려면 전투병력만 해도 적어도 수비의 3배에서 5배의 병력이 필요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또 고구려는 5개의 부족들이 연합해서 만든 나라여서 언제나 내부다툼과 권력투쟁이 심했습니다 신라나 백제도 마찮가지였지만 ... 결국 연개소문과 그아들들이 고구려를 망쳤습니다 연개소문의 장남이 고구려의 군사력과 고위층들의 많은 비밀들을 가지고서 당나라에 투항해서 앞장서서 당나라 군의 선봉장으로 고구려로 진격해 왔으니..
형수 취수혼 ... 국경이 넓어서 전쟁이 많았던 고구려에서 수시로 대량으로 많은 남자들이 죽었습니다 특히 귀족들은 재산도 있었는데 본인이 죽으면 남편이 죽고 부인이 재혼하면 귀족의 재산은 다른가문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아이들이 없거나 어릴경우는 더욱 그렇죠 그래서 재산이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지 않게 하고 형의 자식들이나 동생 의 자식들이 다른 가문의 남자에게 핍박받는 것을 막을려고 형수나 사별한 제수와 결혼하는 풍속이 생긴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당시 수명도 길지 않았던 시대 이지 만 형수처럼 대하다가 부인이 되어 합방하게 되면 참 아이러니 할것 같습니다 제수씨도 마찮가지구요 허구헌날 전쟁 하면 일할사람도 없고 고구려에는 농사도 많지 않았던 반농 반유목 국가였습니다 만주에 쌀농사는 조선말기에서 일제시대때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고구려 시대에는 면적당 수확량이 작은 콩과 수수(옥수수 아님) 조 귀리 같은 작물들 주로 심었다고 합니다 조선말 선교사들이 조선에와서 한반도 북쪽에는 쌀밥이 없었고 조밥이나 보리밥과 수수를 주로 먹는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한민족 역사상 다시는 없을 나라다 영토며 국력이며 운까지 고조선과 다르게 건국초에 중국이 분열된 시기에 다가 주변 경쟁 국가들은 연맹 왕국 단계 팽창하기 좋은 시기에 다가 유능한 지도층 까지 영토로 따지면 발해도 있지만 고구려에 비할바는 못된다고 생각함 고구려는 국가 멸망전을 몇번이고 버텨냈는데 발해가 고구려의 반만이라도 버텼다면....
@@Bin314-h5z 발해가 운도 안 좋았던게 몰론 요나라를 만난 것도 있지만 후삼국이 분열되어 있던 것도 크다고 봅니다. 몰론 거란이 요나라 세우고 발해 침공하기 전에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했어도 고구려 계승 의식이 같은 발해와 주도권 싸움을 할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으나 만약 일찍 통일되었다고 가정한 고려 입장에서 발해가 무너지면 요나라라는 대국과 직접 국경을 맞대니 그래도 발해를 지원하지 않았을까요? 순망치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말도 있고요.
@@Bin314-h5z 어차피 발해가 있어도 발해의 중심인 5경(상경 중경 동경 서경 남경)은 대부분 백두산 위쪽, 만주, 연해주, 간도 쪽에 있고 핵심 요충지도 요동과 부여성이기에 고려쪽으로 남진할려고 하여 충돌하진 않을 거라고 봅니다. 게다가 고려보다 더 강한 요나라가 요동과 부여성을 노리고 있으니까요! 그때도 민족의 개념이 있었을지는 모르나 고려가 신라처럼 중국 당나라나 거란 요나라에 빌붙어서 발해땅을 나누려고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봅니다.
@@문재덕-i6h 그쵸 주위 국가들이 다 분열이 되어서 요나라를 견제할 세력이 없었죠 중국 한국 토번 위구르 까지 동북아 거대국가중 안정된 나라가 발해와 요나라 이 둘밖에 없었죠 둘의 경쟁으로 동북아 패권이 정해지는 싸움 이었는데 유목민족과의 전면전은 중국도 힘드니까요 그래도 발해가 국력에 비해 너무 맥없이 망한게 아쉽네요 물론 발해 부흥운동은 상당히 많았지만요 최소한 여진족 초럼 간도랑 한반도 북부만 지켰어도 괜찮았을 텐데요
5:49 연개소문이 안시성을 직접적으로 공격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단지 당태종이 안시성에 패해서 돌아갈 때 “안시성은 연개소문도 함락하지 못 했다더라” 라는 카더라 말만 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그 기록 가지고 지금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마치 내전이 있었던 것 처럼 말하고 있구요. 이는 당태종이 점령하지 못 하고 패퇴하는 과정에서 하는 변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당태종 말이 맞다면 연개소문이 고정의 장군을 포함한 15만 군사를 굳이 보내 지원했을리가 없습니다. 성문도 열어주지 않을텐데요.. 이 부분은 잘못된 역사정보를 퍼트리고 있는 것이므로 정정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설에 대한 수많은 공격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안시성의 성주도 양만춘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아닌. 고정의 장군이 었을 확률도 높습니다. 고연수를 비롯한 선봉대 패배 후 후퇴해서 안시성과 합류해. 당군을 격퇴했을 것으로 보는게 맞을 듯 합니다. 상식적으로 5천도 안되는 병력으로 몇십만의 당군을 물리치는 것은 납득이 되기 어려운 부분이지요.... 선봉대 패배 후 본대의 행방도 묘연하구요.
확실한건 안시성과 중앙군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면 안시성에서 당 태종을 물리칠 수 없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안시성이 이기든, 지든 성 자체의 방어력이 약해졌을거고, 병력 숫자도 줄었을테니까요. 갈등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마저도 '가설'에 불과한데 마치 내전을 정사인 것처럼 말씀하시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형수 취수혼 ... 국경이 넓어서 전쟁이 많았던 고구려에서 수시로 대량으로 많은 남자들이 죽었습니다 특히 귀족들은 재산도 있었는데 본인이 죽으면 남편이 죽고 부인이 재혼하면 귀족의 재산은 다른가문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아이들이 없거나 어릴경우는 더욱 그렇죠 그래서 재산이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지 않게 하고 형의 자식들이나 동생 의 자식들이 다른 가문의 남자에게 핍박받는 것을 막을려고 형수나 사별한 제수와 결혼하는 풍속이 생긴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당시 수명도 길지 않았던 시대 이지 만 형수처럼 대하다가 부인이 되어 합방하게 되면 참 아이러니 할것 같습니다 제수씨도 마찮가지구요 허구헌날 전쟁 하면 일할사람도 없고 고구려에는 농사도 많지 않았던 반농 반유목 국가였습니다 만주에 쌀농사는 조선말기에서 일제시대때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고구려 시대에는 면적당 수확량이 작은 콩과 수수(옥수수 아님) 조 귀리 같은 작물들 주로 심었다고 합니다 조선말 선교사들이 조선에와서 한반도 북쪽에는 쌀밥이 없었고 조밥이나 보리밥과 수수를 주로 먹는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gretsu222 상황은 무슨 중국 사신이 와서 눈안보이는척 하면서 고구려를 샅샅히 살폈으며 고구려의 승전탑까지 부셨는데 뭘해도 전쟁을 했을꺼임 연개소문은 그당시에 할수있는 최고의 외교술을 펼쳤고 그게 안되서 강경적으로 나온거뿐임 난 연개소문 그정도면 할꺼 다했다고 본다 사후 문제는 비판받을수 있으나 연개소문을 전쟁광 취급하기에는 그당시 고구려 상황을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왜 이렇게 까지 할수밖에 없었는가 그걸을 봐야지 정변했다고 그걸 당이 명분의 빌미를 삼아 전쟁을 일으키게 되서 전쟁을 통해 고구려가 멸망하게 되었다. 라는 말은 너무 너무하지 않음? 난 적어도 연개소문의 성씨를 1000년동안 중국의 기록만 보고 잘못 안 우리들과 그 우리보다 한참 못했던 일본한테 따라잡혀서 지배당하고 그후로는 힘이 부족해서 반갈죽당하고 북한이 도발하면 진짜 제대로된 구사적 대응도 못하는 나라의 후손들이 연개소문을 욕할 자격이 있나 싶다. 난 연개소문이 끝까지 중국과 어떻게든 싸워줘서 끝까지 할수있다는 의지를 보여줘서 진짜 감사하다고 생각함 조선과 다르게 아무것도 하지못하고 지배당하는것보단 손가락질 당할 각오로 정변 일으켜서 나라를 지키는것도 대단한 위인임
@@gretsu222 10 역알못 수준 ㅋㅋㅋㅋ 영류왕이 고수 전쟁때 잡은 포로들 다 풀어주고 승전기념탑 부셔버리고 고구려 상세지도 당태종한테 보내주고 선물까지 보내주면서 굴종적으로 나오면서 비굴한 평화를 유지했는데 그게 영원히 갈거 같냐? 어차피 당 태종은 고구려를 침략할건데? 개소리도 좀 적당히해라 영류왕이 한 짓은 매국노짓이나 다를게 없었음
@@tv-zz2ym 민주주의는 다원주의를 전제로 함. 내분조장과 분탕질은 누가 판단하고 무슨 기준으로 하는 것임? 박정희 전두환 시절엔 민주주의 세력을 내분 조장 분탕질 조장 세력이라고 규정했음.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독재체제 주장- 제외하고는 헌법질서 내에서 용인되는 것이면 함부로 부정할 수 없는 것임.(헌재 판시이기도 함) 가치없는 주장이면 다수의 호응 못받고 사라지겠지. 선해해서 국가나 국민 공동체에 도움되는 방향으로 가자는 의미 정도로 이해는 하겠으나 저 구호 자체만 놓고보면 악용될 소지가 다분한 말임.
2차 고당전쟁 승전 이후에 고구려는 당나라 봉선의식에 참여함 이것은 당이 고구려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뜻으로 사실상 고구려 정벌을 잠정적으로 포기하겠다는 의사였으나.. 연남생이 귀순하면서 생각이 뒤바뀌고 고구려 정벌에 올인했지 그 사이에 토번이 발흥한걸 생각하면 만약 그 시기에 고구려가 당과 전쟁없이 넘겼다면 토번의 발흥과 맞물려서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음 당나라는 한반도는 커녕 요동까지도 직접 통제할 여력이 없었음 결국 내분이 모든걸 망쳤다
어렸을때는 항상 외세에 굴복하지 않고 항전을 주장한 연갯소문을 비롯한 강경파가 늘 멋있어 보였는데 사회생활을 해보면서 현실적인걸 많이 느끼다 보니 일단 나보다 더 쎈놈앞에서는 숙이고 들어가야겠구나를 배우게 되더군요. 보통 고수전쟁과 고당전쟁에서 일어난 살수대첩, 안시성에서의 항전... 보통 이 스토리들은 멋있고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가 맞는건 부인하지 안하는데... 고수전쟁으로 고구려도 엄청난 국력 손실을 입었기에 이게 복귀되기전까지.. 정확히 언제쯤 복구가 되고 다시금 부국강병을 이룰지는 누구도 몰랐겠지만 중원의 신흥강자인 당나라에게 한수 접고 숙이고 들어갔어야 되지 않았나 그래서 영류왕이 더 옳았던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건 순전히 드라마 속의 대사이라 이 둘이 진짜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알수 없으나 드라마 '정도전'에서 요동정벌을 주장하는 최영이 반대하는 이성계에게 "이 사람아 자네는 오래전 우리 자랑스러운 선조들께서 저 중원의 수와 당과 싸워 이긴걸 모르시나?" 하니 이성계가 "그 전쟁들이 우리가 중원으로 쳐들어가서 이겼던 전쟁입니까?"라고 반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뭐 누구는 이미 이성계가 쿠데타를 일으키려 작정하고 위화도 회군을 했다고도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 이성계 말대로 방어전이었지 공격전이 아니었기에 고구려 국력의 손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것으로 짐작됩니다. 거기다 불난집에 휘발유 뿌리는격으로 남쪽에서 신라를 견제해주던 백제마저 멸망했으니 당나라와 신라사이에 샌드위치 신세가 된 고구려가 망하는건 연남생이가 도망을 안가고 대막리지 자리를 유지했어도 피하기 어려웠을것으로 추정은 됩니다. 더욱이 수,당 때 중국의 인구는 대략4천만명 고구려는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는데 적게는 300만에서 많게는 700만까지도 유추하는데 이때야 다들 잘 아실테지만 사람 한명이 가내수공업 공장이었는지라 지금도 그렇지만 인구빨과 물량빨로 밀고들어오는 적에게 당해낼 재간이 있었는지 의문이긴 합니다.
고구려가 대단한 국가로 알고 있는데 실상은 다릅니다 우선 고구려의 인구는 150만명을 넘어선 적은 거의 없었구요 보통 100만명 정도로 .. 신라나 백제 마져도 완전히 점령해서 먹을수있는 국력이 안되었습니다 그당시에는 민족개념도 없었고 그냥 힘이 정의였고 점령해서 병합하면 그만이었던 시대 입니다 물론 그때도 그들나름대로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것은 힘앞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시절입니다 당나라나 수도는 장안이고 고구려에서는 아주 멀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까지 원정오려면 전투병 력보다 식량과 화살및 공성무기 부품 공급 병력이 더많아야 했습니다 산성을 치려면 전투병력만 해도 적어도 수비의 3배에서 5배의 병력이 필요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또 고구려는 5개의 부족들이 연합해서 만든 나라여서 언제나 내부다툼과 권력투쟁이 심했습니다 신라나 백제도 마찮가지였지만 ... 결국 연개소문과 그아들들이 고구려를 망쳤습니다 연개소문의 장남이 고구려의 군사력과 고위층들의 많은 비밀들을 가지고서 당나라에 투항해서 앞장서서 당나라 군의 선봉장으로 고구려로 진격해 왔으니..
지금의 역사서에 기록된 현 평양이 태왕성이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증거가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태왕이 상시 또는 자주 거주하며 지내는 태왕성은 만주 심양 백산 부근이라는 것이 속속 나오고 있고, 고구려의 평양은 즉 수도로써 태왕이 가는곳은 전부 평양이라는 지명을 썻다고도 합니다. 현 북경은 고구려의 유주였으며 서평양, 국내성은 동평양, 부여성은 북평양, 현 북한의 평양이 남 평양, 만주 심양 백산 부근이 중평양 즉 태왕성입니다.
역사 저널인가에서 최태성 선생이 요즘 학생들은 약소국 신라가 나중 (외세인 당을 끌여들여) 통일을 할 때 환호를 지른다고 하던데, 우리가 학창 시절엔 신라의 통일 과정을 보면서 환호 보단 강대국 고구려가 나당(솔직히 당나라)에 의해 역사속에서 사라지는 것을 더 슬퍼했던것으로 기억하는 데, 비슷한 연배의 학력고사 세대(국사는 세계사와 달리 선택이 아닌 기본 25점인과목-체력장 20점 포함 340점중에서...)인 최태성 선생은 그렇지 않았는지 의아해 지더라는...
전 솔직히 한국인들은 신라의 후손 비중이 크다고 봅니다. 성씨들만 봐도 알 수 있죠. 박 석 김 이 최 정 배 손 설 + 김 이 허(가야계) 통일신라 이후 고려, 조선, 현재 신라계 후손들이 한국을 이끌고 있죠. 신라가 이기지 못했다면 지금 이들이 존재 했을까요? 그들이 지금 학생들이고 환호를 하는 이유도 말씀을 안 해도 알겠죠? 저도 94년생이고 어릴 때 환호했습니다.
고구려가 대단한 국가로 알고 있는데 실상은 다릅니다 우선 고구려의 인구는 150만명을 넘어선 적은 거의 없었구요 보통 100만명 정도로 .. 신라나 백제 마져도 완전히 점령해서 먹을수있는 국력이 안되었습니다 그당시에는 민족개념도 없었고 그냥 힘이 정의였고 점령해서 병합하면 그만이었던 시대 입니다 물론 그때도 그들나름대로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것은 힘앞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시절입니다 당나라나 수도는 장안이고 고구려에서는 아주 멀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까지 원정오려면 전투병 력보다 식량과 화살및 공성무기 부품 공급 병력이 더많아야 했습니다 산성을 치려면 전투병력만 해도 적어도 수비의 3배에서 5배의 병력이 필요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또 고구려는 5개의 부족들이 연합해서 만든 나라여서 언제나 내부다툼과 권력투쟁이 심했습니다 신라나 백제도 마찮가지였지만 ... 결국 연개소문과 그아들들이 고구려를 망쳤습니다 연개소문의 장남이 고구려의 군사력과 고위층들의 많은 비밀들을 가지고서 당나라에 투항해서 앞장서서 당나라 군의 선봉장으로 고구려로 진격해 왔으니..
형수 취수혼 ... 국경이 넓어서 전쟁이 많았던 고구려에서 수시로 대량으로 많은 남자들이 죽었습니다 특히 귀족들은 재산도 있었는데 본인이 죽으면 남편이 죽고 부인이 재혼하면 귀족의 재산은 다른가문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아이들이 없거나 어릴경우는 더욱 그렇죠 그래서 재산이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지 않게 하고 형의 자식들이나 동생 의 자식들이 다른 가문의 남자에게 핍박받는 것을 막을려고 형수나 사별한 제수와 결혼하는 풍속이 생긴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당시 수명도 길지 않았던 시대 이지 만 형수처럼 대하다가 부인이 되어 합방하게 되면 참 아이러니 할것 같습니다 제수씨도 마찮가지구요 허구헌날 전쟁 하면 일할사람도 없고 고구려에는 농사도 많지 않았던 반농 반유목 국가였습니다 만주에 쌀농사는 조선말기에서 일제시대때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고구려 시대에는 면적당 수확량이 작은 콩과 수수(옥수수 아님) 조 귀리 같은 작물들 주로 심었다고 합니다 조선말 선교사들이 조선에와서 한반도 북쪽에는 쌀밥이 없었고 조밥이나 보리밥과 수수를 주로 먹는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고구려는 강대국이 아닙니다 초창기에 전투를 잘해서 좀 잘나가긴 했지만 서기 534년에 태어난 신라 진흥왕 시대에 접어들면 고구려는 여기저기에서 쳐발리는 국가가 됩니다 고구려가 강했다면 신라나 백제를 먹어서 더욱 강해졌겠죠 오죽하면 신라에게 쳐발려서 지금의 함경도 까지 동해안의 한반도 영토는 죄다 신라에 넘어갔겠습니까? 그시기에는 김춘추나 김유신은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기이고 당과연합 같은것도 없었으며 순수하게 신라에게 전 쟁에 져서 영토를 빼앗긴 것입니다 그당시 만주는 영토는 넓었어도 쓸모없는 땅이 많았고 추워서 벼농사는 짓지도 못하던 시기였습니다
@@티라노사우루스렉스trx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인건 맞지 대당 강경책의 입안자이기도 하고 자식들의 분열역시 연개소문의 쿠데타와 권력 세습으로 인해 유발된거니까 고구려가 일시적으로라도 숙이고 당태종~측천무후 집권까지 약 60년만 버텼으면 그 다음은 당나라도 슬슬 개판나기 시작하기 때문에 훨씬 더 오래 생존했을걸..
연개소문이 등장하기 이전에 신라의 진흥왕 시절 이미 고구려는 약화되었습니다 그증거가 고구려 땅이던 지금의 함경도(원래 옥저땅)와 강원도 북부 (지금의 원산 과 금강산 부근) 이 모조리 신라영토로 되었습니다 신라와 전투마다 패한것입니다 물론 고구려의 군사들은 당시 선비족이나 북위등의 침 략을 막아야 하기에 서쪽에 많은 병사들을 배치해야 하니 신라까지 신경을 못섰을 수도 있으나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 가까이 신라군이 진격해 영토를 넒 히는 상황에서 중국쪽만 방어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죠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것도 중국쪽 세력이던 한나라 위나라 공손씨 들의 침략이 무 서워서 중국세력들에서 먼쪽으로 옮긴것인데 ... 그당시 지도를 보면 신라가 마음만 먹었다면 원산 쪽에서 현재의 북한땅 원산 평양 고속도로 길을 따라 평양으로 진격하면 평양은 며칠만에 떨어질수도 있었습니다 동해안은 함경도 까지 신라가 먹었으니 ..
형수 취수혼 ... 국경이 넓어서 전쟁이 많았던 고구려에서 수시로 대량으로 많은 남자들이 죽었습니다 특히 귀족들은 재산도 있었는데 본인이 죽으면 남편이 죽고 부인이 재혼하면 귀족의 재산은 다른가문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아이들이 없거나 어릴경우는 더욱 그렇죠 그래서 재산이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지 않게 하고 형의 자식들이나 동생 의 자식들이 다른 가문의 남자에게 핍박받는 것을 막을려고 형수나 사별한 제수와 결혼하는 풍속이 생긴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당시 수명도 길지 않았던 시대 이지 만 형수처럼 대하다가 부인이 되어 합방하게 되면 참 아이러니 할것 같습니다 제수씨도 마찮가지구요 허구헌날 전쟁 하면 일할사람도 없고 고구려에는 농사도 많지 않았던 반농 반유목 국가였습니다 만주에 쌀농사는 조선말기에서 일제시대때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고구려 시대에는 면적당 수확량이 작은 콩과 수수(옥수수 아님) 조 귀리 같은 작물들 주로 심었다고 합니다 조선말 선교사들이 조선에와서 한반도 북쪽에는 쌀밥이 없었고 조밥이나 보리밥과 수수를 주로 먹는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7세기 고구려는 그냥 땅덩이만 컸지 애초부터 비옥한 농토도 별로 없고 영토 대비 가성비 떨어지고 그나마 영토 넓고 인구 많으니까 특유 군사력으로 백제랑 신라 누를 수 있었던거지 그래서 전성기때도 북쪽으로 그렇게 많이 확장했지만 남진정책도 포기할 수 없었던거고 고구려가 한반도를 먹을거였으면 광개토장수문자왕때 확실하게 백제신라 복속했어야했는데 때를 놓친거임 오히려 땅덩이에 비해 갓성비였던게 평야도 있고 철도 많이 생산된 한반도 중남부 국가들이고 바다까지 넓어서 자급자족도 되고 말년에 백제가 쌉질만 안했어도 남부지방에서 신라랑 양강구도 펼칠 수 있었는데 신라한테 먹힌거임 신라보고 외세 지원받은 양아치&불완전 통일이라고 평가하는데 그 당시 상황으로선 고구려랑 백제는 이미 내정 자체가 개판나있었고 신라는 급식때부터 진흥왕때가 전성기라고 배웠는데 어디까지나 영토넓이 기준일 뿐이고 그 이후로 더 똘똘 뭉치고 강해져서 신라가 통일할 수밖에 없는 그림이었다 급식때는 고구려가 통일했어야 지금보다 땅도 더 넓었을거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급식스러운 생각이었던거같고 심지어 고구려보다 북쪽으로 영토 더 넓었던 발해도 얼마안가 작살난거보면 그냥 만주~연해주 땅덩이 차지하는건 그리 중요해보이지 않음
고구려가 대단한 국가로 알고 있는데 실상은 다릅니다 우선 고구려의 인구는 150만명을 넘어선 적은 거의 없었구요 보통 100만명 정도로 .. 신라나 백제 마져도 완전히 점령해서 먹을수있는 국력이 안되었습니다 그당시에는 민족개념도 없었고 그냥 힘이 정의였고 점령해서 병합하면 그만이었던 시대 입니다 물론 그때도 그들나름대로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것은 힘앞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시절입니다 당나라나 수도는 장안이고 고구려에서는 아주 멀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까지 원정오려면 전투병 력보다 식량과 화살및 공성무기 부품 공급 병력이 더많아야 했습니다 산성을 치려면 전투병력만 해도 적어도 수비의 3배에서 5배의 병력이 필요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또 고구려는 5개의 부족들이 연합해서 만든 나라여서 언제나 내부다툼과 권력투쟁이 심했습니다 신라나 백제도 마찮가지였지만 ... 결국 연개소문과 그아들들이 고구려를 망쳤습니다 연개소문의 장남이 고구려의 군사력과 고위층들의 많은 비밀들을 가지고서 당나라에 투항해서 앞장서서 당나라 군의 선봉장으로 고구려로 진격해 왔으니..
형수 취수혼 ... 국경이 넓어서 전쟁이 많았던 고구려에서 수시로 대량으로 많은 남자들이 죽었습니다 특히 귀족들은 재산도 있었는데 본인이 죽으면 남편이 죽고 부인이 재혼하면 귀족의 재산은 다른가문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아이들이 없거나 어릴경우는 더욱 그렇죠 그래서 재산이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지 않게 하고 형의 자식들이나 동생 의 자식들이 다른 가문의 남자에게 핍박받는 것을 막을려고 형수나 사별한 제수와 결혼하는 풍속이 생긴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당시 수명도 길지 않았던 시대 이지 만 형수처럼 대하다가 부인이 되어 합방하게 되면 참 아이러니 할것 같습니다 제수씨도 마찮가지구요 허구헌날 전쟁 하면 일할사람도 없고 고구려에는 농사도 많지 않았던 반농 반유목 국가였습니다 만주에 쌀농사는 조선말기에서 일제시대때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고구려 시대에는 면적당 수확량이 작은 콩과 수수(옥수수 아님) 조 귀리 같은 작물들 주로 심었다고 합니다 조선말 선교사들이 조선에와서 한반도 북쪽에는 쌀밥이 없었고 조밥이나 보리밥과 수수를 주로 먹는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다 좋은데 가끔 소설을 쓰시는군.... 연개소문이 정변에 반대한 안시성을 공격했다고 그리고 패했다고??? 당태종이 요동의 살벌한 겨울추위도 다가오고 안시성 공략 실패를 감추기위한 거짓말 이라는 것이 중론이고 고구려 최전선 요동의 중심은 말 그대로 대성인 요동성이고 안시성은 산악지형의 중소규모의 성이지....ㅋㅋㅋ
고구려가 대단한 국가로 알고 있는데 실상은 다릅니다 우선 고구려의 인구는 150만명을 넘어선 적은 거의 없었구요 보통 100만명 정도로 .. 신라나 백제 마져도 완전히 점령해서 먹을수있는 국력이 안되었습니다 그당시에는 민족개념도 없었고 그냥 힘이 정의였고 점령해서 병합하면 그만이었던 시대 입니다 물론 그때도 그들나름대로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것은 힘앞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시절입니다 당나라나 수도는 장안이고 고구려에서는 아주 멀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까지 원정오려면 전투병 력보다 식량과 화살및 공성무기 부품 공급 병력이 더많아야 했습니다 산성을 치려면 전투병력만 해도 적어도 수비의 3배에서 5배의 병력이 필요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또 고구려는 5개의 부족들이 연합해서 만든 나라여서 언제나 내부다툼과 권력투쟁이 심했습니다 신라나 백제도 마찮가지였지만 ... 결국 연개소문과 그아들들이 고구려를 망쳤습니다 연개소문의 장남이 고구려의 군사력과 고위층들의 많은 비밀들을 가지고서 당나라에 투항해서 앞장서서 당나라 군의 선봉장으로 고구려로 진격해 왔으니..
형수 취수혼 ... 국경이 넓어서 전쟁이 많았던 고구려에서 수시로 대량으로 많은 남자들이 죽었습니다 특히 귀족들은 재산도 있었는데 본인이 죽으면 남편이 죽고 부인이 재혼하면 귀족의 재산은 다른가문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아이들이 없거나 어릴경우는 더욱 그렇죠 그래서 재산이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지 않게 하고 형의 자식들이나 동생 의 자식들이 다른 가문의 남자에게 핍박받는 것을 막을려고 형수나 사별한 제수와 결혼하는 풍속이 생긴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당시 수명도 길지 않았던 시대 이지 만 형수처럼 대하다가 부인이 되어 합방하게 되면 참 아이러니 할것 같습니다 제수씨도 마찮가지구요 허구헌날 전쟁 하면 일할사람도 없고 고구려에는 농사도 많지 않았던 반농 반유목 국가였습니다 만주에 쌀농사는 조선말기에서 일제시대때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고구려 시대에는 면적당 수확량이 작은 콩과 수수(옥수수 아님) 조 귀리 같은 작물들 주로 심었다고 합니다 조선말 선교사들이 조선에와서 한반도 북쪽에는 쌀밥이 없었고 조밥이나 보리밥과 수수를 주로 먹는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연남생이 10만호의 무리와 함께 투항해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연정토가 12개 성과 함께 투항 연남생이 투항했기 때문에 보급 문제가 해결. 그후 당나라는 최소 50만명의 대군을 파병합니다. 이때 당나라는 모든 국력을 다 쏟아부었는데.. 만약 고구려가 큰 피해 없이 버티고 역공을 가했다면 당나라는 수나라처럼 멸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연개소문도 없고 후방 방어선들이 줄줄이 무너지거나 항복하는 상태에서... 신라군이 20만명이나 왔고 평양 인근 모든 남부 전선이 다 뚫렸는데도....... 평양성이 함락이 안됬죠; 만약 이때 고구려가 버텼다면 당나라나 신라 둘중 하나는 100% 멸망이었을것이고... 신라가 멸망당했다면 삼국통일 확정이죠. 고구려도 복수를 하기 위해 모든 국력을 다 쏟아부어서 칠테니깐요. 그점이 참 아쉽습니다. 이때 평양성에서 성문 열지말고 끝까지 버텨냈다면..... 역사는 달라지지 않을까요? 적어도 고구려가 3차 침입을 버텼다면... 4차 침입때 멸망을 당했다 해도.. 신라가 요동 일부라도 차지했을 것이고... 최소한 그때부터 쭉 유지한다면.. 적어도 고려시대-조선시대를 겪으면서 지금보다는 넓은 영토가 되지 않았을까..생각이 듭니다.
고구려는 신라때문이 아니라 당나라때문에 멸망함. 당시 신라의 국력으로는 불가능 했음. 나당연합이 고구려를 침공할때 신라가 기다린건 고구려 멸망보다 당나라가 힘을 빼주길 기다린게 아닐까 함. 고구려 멸망하고 신라까지 집어삼켜 한반도 전체를 당나라 관할구역으로 편입하는걸 저지하기 위해......
동이(고구려)는 산지 많고, 성이 산을 따라 형성되어있다. 백성들은 예의를 알고, 전시에는 단결도 잘한다. 따라서 이런 민족은 함부로 도모하기 힘들다. 이 민족을 도모하려면, 내분의 조짐이 보일때 첩자를 보내 충신을 제거하고, 민심을 벌려놓으면 알아서 내분으로 무너지니, 그때 공격하면 쉽게 도모할 수 있다. - 촉한 승상 제갈양
고대 국가는 중앙집권 이 아닌 귀족들의 연합체 라고 보는것이 맞겠네요 대게 고구려 백제가 망한것이 국력이 약한것이 아니었군요 ... 귀족들과 연합이 얼마나 되느냐 차이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멸망 이후 고구려도 백제도 부흥운동이 이루어진걸 보면 영상의 내용이 공감이 됩니다
그 해석이 틀리지 않은 부분은, 백제는 상좌평이 귀족들의 최고 위치였는데 의자왕이 아들들을 전부 상좌평에 앉힘으로써 귀족 민심이 이반됐고, 결국 신라가 5만 군대 이끌고 쳐들어올 때 부랴부랴 동원할 수 있었던 게 겨우 계백의 5천 결사대였으니 귀족을 얼마나 왕이 잘 규합시키느냐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죠. 연개소문은 반정으로 친당 세력 영류왕과 100여 명의 귀족을 전부 제거한 뒤 대막리지에 올라 순전 본인의 카리스마와 역량으로 당나라의 침략을 저지시켰지만 그가 떠난 뒤 그만한 인물이 나오지 않으면 그 공백은 굉장히 크게 다가오죠. 연개소문만은 고구려를 강성하게 이끌었다고 말하고 싶을지 모르나 그가 권력을 잡았던 기간 동안 왕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외세에 싸운다는 대의도 약해졌고, 귀족이 왕의 권한을 행세하는 꼴이 된 데다 자식 간의 내분까지 일어나버렸으니... 귀족이 왕의 권한을 행사한 국가, 귀족이 왕을 버린 국가가 고구려와 백제의 말로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네요.
@@에스카노르-i8j 그렇지~고대국가는 국가가 곧 왕이고 왕이 곧 국가인 그런 시대였는데 왕에게서 모든 권력을 강탈해버렸으니 나라가 어떻게 안망해~고구려 역사를 살짝만 들어가서 보면 소수림왕(광개토대왕의 선왕이자 아버지)때도 그의 멸망직전 까지 갔었고 국내성이 함락되고 태왕비가 적국에 끌려가고 위기의 순간이 수도없이 많았지만 고구려는 그걸 다 뚫고 나왔는데 그게 바로 왕을 구심점으로 똘똘 뭉쳤기때문이라고 보는데 연개소문은 그런 구심점이 되어줄 왕을 없애버리고 자기가 왕의 자리에 앉았으니 나라가 어떻게 안망해
고구려가 대단한 국가로 알고 있는데 실상은 다릅니다 우선 고구려의 인구는 150만명을 넘어선 적은 거의 없었구요 보통 100만명 정도로 .. 신라나 백제 마져도 완전히 점령해서 먹을수있는 국력이 안되었습니다 그당시에는 민족개념도 없었고 그냥 힘이 정의였고 점령해서 병합하면 그만이었던 시대 입니다 물론 그때도 그들나름대로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것은 힘앞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시절입니다 당나라나 수도는 장안이고 고구려에서는 아주 멀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까지 원정오려면 전투병 력보다 식량과 화살및 공성무기 부품 공급 병력이 더많아야 했습니다 산성을 치려면 전투병력만 해도 적어도 수비의 3배에서 5배의 병력이 필요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또 고구려는 5개의 부족들이 연합해서 만든 나라여서 언제나 내부다툼과 권력투쟁이 심했습니다 신라나 백제도 마찮가지였지만 ... 결국 연개소문과 그아들들이 고구려를 망쳤습니다 연개소문의 장남이 고구려의 군사력과 고위층들의 많은 비밀들을 가지고서 당나라에 투항해서 앞장서서 당나라 군의 선봉장으로 고구려로 진격해 왔으니..
고구려가 지도로 보면 강대국으로 보이지만 사실 쓸모잇는 땅은 그렇게 크지 않음. 백두산 주변은 다 높은 산이엇을꺼고, 만주도 남쪽은 습지대라 쓸모가 없엇을꺼임. 그렇게 보면 서해를 끼고 잇는 평지만이 쓸모잇는 땅이엇을꺼임. 그럼 전체적으로 평면지도상의 영역보다 축소해서 봐야 됨.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강대국도 대국도 아닌어서 고구려가 3국을 통일할 능력이 되지 않은거임.
고당전쟁때 주필산전투에서 동원된 고구려군의 일부가 15만정도였던것을 보면 다른 세력을 견제할 필요가 없었다면 백제와 신라를 멸망시킬수 있었을겁니다. 고구려가 삼국의 통일할 찬스는 광개토대왕때 였고 백제 아신왕도 항복 시키고 신라는 알아서 굽신거렸으니 그냥 이때 밀어버렸으면 됐는데 제후국 정도로 삼은게 다 였죠
고구려의 영광스러웠던 황금기만을 보고서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었으면.. 이라는 if를 생각한다. 하지만 이 if는 좋지않은 결과를 초래했을 수 있다. 이는 고구려의 특성 때문인데 완벽한 중앙집권이 아닌 다양한 파벌이 있었으며 또한 고구려는 상업기반의 국가라는 점이다. 신라, 백제는 농업기반이었지만 고구려는 농업, 목축업, 약탈등의 기반경제를 가지고 삼국을 통일했을 시 상업기반으로 바뀌었을 것임. 이런 상업기반에 귀족이 득세하기 쉬운 이런 사회구조는 잦은 반란을 야기한다. 실제로 고구려가 쇠약해진 이유는 각 기반의 귀족들과 왕의 견제와 내전때문이었다. 이런 잦은 내전은 기반을 흔들고 왕이 고씨를 벗어나는 신라와 같은 행보가 이어진다면 망하는건 순식간임. 그렇게 되면 한민족은 황금기를 맞이할지는 모르나. 자연스레 중국의 소수민족들 처럼 중국과 융화되어 중국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국가가 망하는 가장큰 이유는 내분이지...... 원래 강대국이 망하는건 내부에서 시작이 됨..... 연남생이 권력을 잡았으면 .... 그를 중심으로 뭉쳣어야 맞는거지...... 자신을 죽이려 하면..... 과연 어느누가 나죽여라 할 사람이 있을까...?? 연남생 욕할것 없음..... 욕먹을 자들은 내분 일으킨 귀족들의 책임임....
내분이 크긴한데 부수적인 요인으론 고구려의 동맹국이 대거 사라진 영향도 큼 북쪽에선 돌궐이나 그런 유목민족이 고구려와 동맹관계라 당나라를 적절히 견제했는데 다 당나라한테 정복당하고 남쪽으론 백제는 진작에 멸망당하고 거기에 내분까지 터지니 안망할수가 없는데.그와중에도 고구려는 1년이상이나 버팀
고구려 멸망은 사실 중국의 운하와 당시 항해술과 조선술의 발달임 중국이 고구려를 쉽게 못건든게 엄청난 원정임 특히 요하 주변의 늪과 뻘이 원정을 더 힘들게함 원정에서 제일 중요한건 보급임 보급이 가능해야함 근데 중국에 운하가 생기고 중국 남부 양쯔강에서의 엄청난 경제력이 이제 북 중국까지 올 수 있게 됨 또한 그전까지 중국은 오직 육로로 고구려를 침공함 아직 대군을 이동시킬 항해술과 조선술이 겸비가 안됨 근데 수나라 때부터 중국은 이제 육군 해군이 동시 출병이 가능해짐 원래 중국이 고구려 쳐들어가려면 마음 크게 한번 먹고 가야했음 근데 수나라부터 당나라까지 위에 서술한 이유로 연속 침공이 가능해짐 결국 물량전 못 버틴 고구려는 국력이 회복이 안되서 멸망한거임
@@용민김-e8d위 댓글이 말하는건 중원국가들의 고구려 공격방식이 훨씬 효과적으로 바뀌어 고구려가 비록 내분에 의하긴 했지만 수당과의 전쟁에 꽤 고생했다는 내용임 요동에 방어선 박아두고 비교적 후방인 평양을 안전한 수도로 생각했지만 수나라부터 서해로 바로 수군을 보내 평양성 직공이 가능해짐 사수전투로 유명한 당의 2차 침공도 백제가 멸망했던것처럼 10만이 넘는 군대가 한번에 서해를 건너 평양을 직격한거임. 비록 연개소문이 사수전투로 당군을 격멸시켰지만 고구려 입장에선 엄청난 위기였음 상대적 후방인 서해안 지역이 공격받는다는건 고구려의 몇안되는 곡창 지역이 공격받는다는 걸 뜻했고 결국 병력이 분산되어 당의 2차 침공 당시 고구려는 한강에서 평양까지 쌀배달온 김유신도 못막음 즉 아무리 내분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했다고 해도 수당의 수륙 양공 작전이 고구려의 국력을 엄청나게 소모시켰다는건 부정할 수 없음
고려는 안망했음 우리가슴속에 살아있어여 우리가 고려 직계후손들 어차피 바로 발해 생기고 250년후에 고려 유민 후손 왕건이 다시 세웠고 전세계가 한국을 코리 라고 부르니깐 용비어천가에도 고려를 고리 라고 발음해여 진정한 통일은 고려 신라는 민족의식 통합도못햇고 이북지역은 간접통치햇고.. 이성계도 고려 이북 출시ㄴ이고.. 서울사투리도 개성어 삘나고 이북말.. 조선시대 문학 들도 황해도 말투로 써져있고
미래의 사람이 고구려 시대를 가서 고구려 삼국 통일한 미래보다 암울하지만..신라가 통일하고...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쳐야 하는 미래가 필요했기때문!!수백만 분에 1의 확률에서 오로지 이 역사를 거쳐야 하는 이유가 있어서임.이래야 미래의 타이머신을 만들어서 인류를 지킬수 있는 역사가 만들어지는 하나의 선택.
고구려도 백제나 신라처럼 특정 국경선 일대가 전부 바다로 에워싸여 있다거나 남쪽만을 주요 국경선으로 두는 형태였다면 광개토대왕 혹은 장수왕 대에 말씀하신 무력으로 밀어버리는 것이 가능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후의 역사가 꼭 고구려가 통일을 이뤄낼 만한 전개로 흘러가지만은 않았어요. 우선 광개토대왕 때에 통일하지 않은 것은 요동 일대를 아직 완전히 강역 안으로 두기 전이었고, 요동을 완전히 장악한 뒤로도 북쪽에서 얻어낼 것들이 훨씬 많았기 때문입니다. 철, 소금, 병마 등... 이건 남쪽보다 한반도 북쪽 혹은 요동과 만주 일대에 훨씬 풍부하기 때문에 남쪽은 고구려 입장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하지 않게 돌아갈 정도로 관리하고 북쪽을 공략하려던 거였죠. 비려나 말갈 등 제압해야 할 유목 민족들이 더러 있었다는 것도 이유고요. 그들이 수도인 국내성을 백제와 신라 이상으로 훨씬 더 위협할 존재인 데다 그들은 국가 형태를 띄고 있지 않으니 더 쉽사리 제압하는 게 가능했습니다. 이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남쪽은 고구려에 "불리하지 않게 돌아가게끔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어요. 그래서 백제 아신왕이 왜를 끌어 들여 신라 금성까지 유린했을 때 급히 5만 기병 보내서 구원했던 거고요. 당시 신라 수도인 금성(경주)이 털릴 정도였는데, 그걸 살려내고 왜군 전부 축출한 뒤 낙동강 넘어서 초기 가야의 맹주였던 금관가야를 털었죠. 이렇게 충분히 밀어놔야 다시는 신라(당시 신라의 위치는 고구려의 우방 국가이자 후방이 완전히 백제화되는 것을 막아줄 국가)를 쉽게 흔들지 못할 것이라 여겼으니까요. 이때 신라는 세력이 너무 약해 백제는 커녕 왜한테도 쩔쩔매는 수준이었는데, 고구려의 주적은 백제였고, 백제가 가야, 왜와 연합해 호시탐탐 신라 지역을 집어삼킬 궁리를 하고 있었으니, 고구려 입장에서는 신라를 살려놔야 후방이 안전해지는 겁니다. 백제가 신라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취한다면,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포위되었던 것 같은 국제 정세가 조기에 형성되었을 거예요. 고구려가 남방 정세에 있어 가장 경계했던 상황도 바로 이것이었구요. 그리고 장수왕이 결과적으로 평양 천도를 이루지만 이 계획은 광개토대왕 때부터 차근차근 준비되고 있었기 때문에 수도를 옮기려는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남쪽의 두 국가와 대전쟁을 치룬다는 건 말이 안 되고요. 장수왕의 경우는 평양 천도를 성공시키지만 오랫 동안 수도 귀족으로서의 지위를 누려 온 국내성파 귀족들의 반발로 최소 수 년 정도는 내전 혹은 그와 유사한 거센 저항에 부딪쳤을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때 고구려의 대외 활동 기록이 거의 전무하거든요. 내부에서 해결할 문제가 있어 해외 원정이나 영토 팽창을 하지 못했다는 거죠. 이렇게 장수왕이 평양 천도한 게 427년이고, 나제동맹은 고구려의 영향 하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신라와 고구려를 꺾고 싶어했던 백제의 연합으로 433년부터 554년(이때 나제동맹으로 한강 빼앗지만 신라 진흥왕이 뒤통수 치고 백제 성왕 죽임으로써 나제동맹 해체)까지 이어지는데, 장수왕 입장에서도 중원 왕조들과 북방 이민족들을 두고 함부로 나제 동맹군을 공격하긴 어렵죠. 한반도는 압록강 이북 대륙에 비해 폭이 상대적으로 좁고(선택할 수 있는 길이 제한적이란 뜻), 산지와 강이 많기 때문에 수비하는 쪽에서 준비를 잘하고 있으면 치고 들어가기가 어려워요. 그럼에도 장수왕이 백제를 한 번 확실히 꺾어야겠다고 결심했던 건 472년 개로왕이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함께 공격하자고 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475년에 한성을 급습해 개로왕을 죽임으로써 백제도 한성백제시대가 끝나고 충청도에 수도를 두기 시작하는 거죠. 장수왕이 당시 백제 수도였던 한성 함락 때 동원한 군사 수가 단 3만 명이고, 개로왕 처형 후 부랴부랴 군대 추가해 밀고 내려간 게 아니라 차근차근 확장해 나갑니다. 이유는 나제동맹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도 있지만 수도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남쪽으로 천도됐으니 평양 이남으로 좀 더 국경선을 넓혀 수도를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에요. 평야를 충분히 확보하고, 중국으로 가는 뱃길을 안정적으로 장악하려는 것도 이유였지만요. 어쨋든 한성 함락으로 장수왕이 백제를 크게 약화시킨 건 맞지만 백제와 신라 지역을 한 번에 집어삼킬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정적으로 영토 확장하면서 최대로 넓힌 게 우리가 역사 시간 때 본 충청도 아산만~경상도 죽령 지역까지의 영토입니다. 고구려가 세력을 확장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백제&신라 입장에서 보면 영토가 좁아진 만큼 더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로 내부 단결이 돼 더욱 강하게 저항하니 고구려 입장에서도 정말 작정하고 대군을 휘몰아 통일 전쟁을 시작할 것이 아니라면 굳이 그들과 전쟁을 벌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이 시점부턴 영토로나,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고구려의 위상과 국력이 백제와 신라를 확실히 앞섭니다. 하지만 고구려 단독으로 백제와 신라 지역을 단숨에 점령할 만큼 두 국가가 호락호락하지는 않습니다. 이 묘한 힘의 질서가 고구려가 더 이상의 전쟁 비용을 치르려 하지 않았던, 다르게 말하면 백제와 신라를 점령하지 못했던 이유입니다. 광개토대왕 때부터의 활발한 영토 확장으로 장수왕 치세 때의 고구려는 확고부동한 동방의 1인자라는 지위를 얻었고, 한반도 남부 세력으로부터 심각한 위협 또한 없으니 이제부턴 평화를 누리며 실익만 챙기면 되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 시기부터는 한반도 남부 정세에 있어 고구려에 큰 위협이 될 만한 상황이 펼쳐지지 않는 한 굳이 대군을 동원해 전쟁을 벌일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냉정하게 본다면 백제는 한성백제시대가 끝난 뒤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치더라도 신라는 이전에 비해 국력이 확실히 신장된 상태였다는 겁니다. 백제와 신라 각각의 국토가 고구려에 비해선 현저히 작으니 두 국가를 각각 상대할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는 있어도, 나제동맹군 전체를 고구려가 홀로 상대해야 했던 당시 상황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정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가 김유신과 김춘추가 그러했듯 다른 두 나라를 멸망시키고 홀로 이 땅의 주인이 되어야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품었다면 전성기 고구려가 역사적인 삼국통일을 이뤄내는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지만... 역사에 만약이란 없으니까요.
544년의 귀족 다툼 기록은 그 신빙성에는 정설이라 보기 힘듭니다. 일본서기의 기록으로 알고 있는데 일본서기라는 책 자체가 신빙성이 부족한 책입니다. 대체로 6세기 중반을 귀족연합정권이라 칭하지만 직 후 고구려 왕들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전쟁에 나가는 모습도 보이는데 이는 왕권이 군권을 장악한 모습으로 6세기 고구려의 국력 약화 근거로 보기 힘듭니자. - 또한 개로왕의 편지 역시 고구려를 치기 위한 내용의 기록이며 북위는 빈번하게 고구려와 사신 교류를 했습니다. 북위가 그 백제의 내용에 답장 조차 하지 않은 사실은 당시 고구려와 북위가 서로 남쪽을 바라보며 그들의 국경 지역에 대한 우호를 맺었고, 그것인 즉 고구려가 내란 상태의 직면으로 보기 힘듭니다. 또한 단 7일만에 (개로왕이 북위에 편지를 보내고 3년만에 쳐들어가) 한성을 무너뜨린 고구려가 당시 귀족과 장수왕 같은 내전이 참혹했다믄 것 역시 사실로 보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중국의 통일이 큰 이유기도 할겁니다. 그리고 백제의 멸망과 연개소문 사후 자식들간의 세력다툼으로 국론이 분열된 것도 크고요. 하지만 한 나라가 망하고 그 민족이 30년만에 다시 나라가 만들어진 최초의 발해 왕국이 건국되기도 하였고요. 영류왕이 온건파였던건 오랜 전쟁으로 나라 사정이 말이 아니여서였을겁니다. 우선 전쟁이 일어나면 주변의 논밭은 다 태워버리고 성문을 잠그고 항전하는거니깐요. 이런게 지속되다보면 농사 지어야 하는 백성들이 징집되고 악순환의 반복이었을겁니다. 국내성파와 평양파의 지역감정도 국론을 분열시킨 원인이었을거고요. 또한 왕이 절대적인 권한을 갖는 고려, 조선때와는 다르게 여러 부족의 결집으로 이루어진 국가이다보니 자신들에게 분리하게 여겨지면 결국은 왕이 원하는대로 군사와 식량을 내주는 것도 쉽지 않았을거라고 생각되고요. 그래도 국력이 수십배 차이가 나는데도 오랜기간 버티고 수 차례 승리한 고구려는 우리의 자랑스런 역사라고도 생각되고요.
여기 저기 들은 거 합치신 것 같은데 왕이 절대적인 권한 갖는 고려, 조선이라 하셨는데 거기서 고려 빼셔야 합니다. 고려 왕이 수도 나가면 백성들 중 누가 강도가 되어 금품 갈취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국가였습니다. 단적으로 일본군 쳐들어왔을 때 선조가 의주로 피난가는 동안 백성들이 공격한 예 없죠? 고려는 거란이 쳐들어왔을 때 현종이 나주까지 튀어갈 동안 받은 산적들과 지방 귀족들의 공격이 어떠했는지는 아세요??? 고려가 왕이 절대적 권한을 갖고 있었다고 어디 가서 말하면 무식하단 소리 들을 겁니다
고구려 멸망은 연개소문때문이고요. 강력한 왕권을 유지만 해도 고구려는 안망했을건데 연개소문이라는 쿠테타세력이 국정을 농단을 해서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였기때문에 망할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고대 역사는 왕권이 강하면 부흥하고 왕권이 약하고 신권이 약하고 꼭 망합니다. 왕권이 약하고 신권이 강하다는것은 이미 시스템이 무너졌다는겁니다. 군벌시대라고 봐야지 청나라말기도 많은 군벌들이 왕의 영향권에서 벗어서 지역을 통치했었지요. 역사상 어느시대든간에 신권이 강해지면 나라가 망할 징조로 보면 될겁니다..
한국인은 자존심 상하겠지만 고구려를 마치 자멸했다고 말하는건 역사를 왜곡하는거 그냥 당나라한테 결국은 패배해서 멸망했다 그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내분으로 멸망한거지 내분 없었으면 당나라에 지지 않았을것 이라는건 역사를 왜곡하는거라 생각함 고구려가 당나라 잘 막을때 고구려가 강해서 그런거지 그걸 가지고 중국애들이 당나라가 그당시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라고 우기면 그게 얼마나 추잡스럽나
그동안 연개소문의 3아들이 분열된 이유에 대해서 서로에 대한 질투심이라고 생각했는데 꾹내성귀족과 평양성귀족간의 세력 다툼이라는 관점이 신선하네요 여기에 살을 붙인다면 연남생의 부인이 국내성에 강한 세력을 가진 호족이고 연남생이 대막리지가 되자마자 부인의 출신인 국내성 호족을 회유하기 위해서 수도를 옮긴다던지 지방순시를 했었으며 여기에 반발한 평양성 호족이 결집하여 연개소문 2남을 필두로 연남생을 위시한 국내성의 유력귀족을 몰아낸건 아닌가 싶네요. 물론 소설 한번 지어봤네요
정치인들의 파벌싸움으로 나라망한거보면 고구려는 확실히 한국의 역사다.
적당히가 중요함. 고구려의 리버스 버전인 완벽한 중앙집권체제 조선은 주변 세력에 군사력을 키울 여지차체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허약하기 그지없었음. 고구려의 군사력이 강했던 이유는 지방 귀족들의 끊임없는 견제와 경쟁으로 군사력 증진에 진심이었기 때문임
@@비리브 고려가 그 중간 쯤 어디었다가 공민왕 대에 성리학이 적극 도입되면서 장차 그쪽으로 흘러가 버렸지..
고구려가 대단한 국가로 알고 있는데 실상은 다릅니다 우선 고구려의 인구는 150만명을 넘어선 적은 거의 없었구요 보통 100만명 정도로 .. 신라나 백제 마져도 완전히
점령해서 먹을수있는 국력이 안되었습니다 그당시에는 민족개념도 없었고 그냥 힘이 정의였고 점령해서 병합하면 그만이었던 시대 입니다 물론 그때도 그들나름대로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것은 힘앞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시절입니다 당나라나 수도는 장안이고 고구려에서는 아주 멀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까지 원정오려면 전투병
력보다 식량과 화살및 공성무기 부품 공급 병력이 더많아야 했습니다 산성을 치려면 전투병력만 해도 적어도 수비의 3배에서 5배의 병력이 필요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또 고구려는 5개의 부족들이 연합해서 만든 나라여서 언제나 내부다툼과 권력투쟁이 심했습니다 신라나 백제도 마찮가지였지만 ... 결국 연개소문과 그아들들이 고구려를
망쳤습니다 연개소문의 장남이 고구려의 군사력과 고위층들의 많은 비밀들을 가지고서 당나라에 투항해서 앞장서서 당나라 군의 선봉장으로 고구려로 진격해 왔으니..
형수 취수혼 ... 국경이 넓어서 전쟁이 많았던 고구려에서 수시로 대량으로 많은 남자들이 죽었습니다 특히 귀족들은 재산도 있었는데 본인이 죽으면 남편이 죽고 부인이
재혼하면 귀족의 재산은 다른가문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아이들이 없거나 어릴경우는 더욱 그렇죠 그래서 재산이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지 않게 하고 형의 자식들이나 동생
의 자식들이 다른 가문의 남자에게 핍박받는 것을 막을려고 형수나 사별한 제수와 결혼하는 풍속이 생긴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당시 수명도 길지 않았던 시대 이지
만 형수처럼 대하다가 부인이 되어 합방하게 되면 참 아이러니 할것 같습니다 제수씨도 마찮가지구요 허구헌날 전쟁 하면 일할사람도 없고 고구려에는 농사도 많지 않았던
반농 반유목 국가였습니다 만주에 쌀농사는 조선말기에서 일제시대때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고구려 시대에는 면적당 수확량이 작은 콩과 수수(옥수수 아님) 조 귀리 같은
작물들 주로 심었다고 합니다 조선말 선교사들이 조선에와서 한반도 북쪽에는 쌀밥이 없었고 조밥이나 보리밥과 수수를 주로 먹는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연개소문이 등장하기 이전에 신라의 진흥왕 시절 이미 고구려는 약화되었습니다 그증거가 고구려 땅이던 지금의 함경도(원래 옥저땅)와 강원도 북부
(지금의 원산 과 금강산 부근) 이 모조리 신라영토로 되었습니다 신라와 전투마다 패한것입니다 물론 고구려의 군사들은 당시 선비족이나 북위등의 침
략을 막아야 하기에 서쪽에 많은 병사들을 배치해야 하니 신라까지 신경을 못섰을 수도 있으나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 가까이 신라군이 진격해 영토를 넒
히는 상황에서 중국쪽만 방어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죠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것도 중국쪽 세력이던 한나라 위나라 공손씨 들의 침략이 무
서워서 중국세력들에서 먼쪽으로 옮긴것인데 ... 그당시 지도를 보면 신라가 마음만 먹었다면 원산 쪽에서 현재의 북한땅 원산 평양 고속도로 길을 따라
평양으로 진격하면 평양은 며칠만에 떨어질수도 있었습니다 동해안은 함경도 까지 신라가 먹었으니 ..
고구려가 그래도 특유의 버티는 힘은 확실히 있었던 게, 잘 모르는데 요동 방어선 북쪽을 책임지는 신성은 무려 9개월을 버텨냅니다
정말 안시성의 신화가 재현될 뻔한 순간도 있었어요
그런데 연남생의 투항, 이게 정말 큰 건 국내성 포함해서 6개 성과 10만 호의 인구를 들고 투항했다고 하는데 그러면 인구가 50만가량입니다
원래 북쪽에서 내려오는 적을 막기 위한 후방 기지 역할을 했던 게 국내성인데 이 성 중심으로 수많은 성과 인구가 고구려에서 일순간 떨어져 나가면서 요동과 평양 사이에 엄청난 힘의 공백지대가 형성됐고, 요동 북쪽에서 국내성 쪽으로 이어지는 안정적인 보급로가 형성되면서, 고구려 원정의 최대 과제였던 보급의 문제를 해소하게 됐어요
나당 연합군의 소규모, 대규모 공세를 끈질기게 막아내며 국토를 수호해왔던 고구려인데 내분 앞에선 어쩔 도리가 없어요
고구려가 당나라에 맞섰던 가장 큰 무기는 땅 그 자체의 험난함과 그로 인한 적 행동의 제한성, 이 두 가지가 결정적이었는데 이게 더이상 먹히지 않게 되니 결국 막을 내리게 된 거죠
고구려의 멸망은 한민족의 역사에 있어 유난히 안타깝죠
심지어 그 신성도 사부구놈의 배신이 아니었으면 안무너졌음.
게다가 제3차 고당전쟁때 황산전투에 투입된 고구려군만 15만에 외인부대격인 말갈인 부대:5만을 더해
전투부대만 20만을 동원했을정도였는데
신라는 백제먹고도 진짜 끌어모아야 20만을 동원한점과 남소성에 저항한 고구려군이 15만이나 되는점을 고려하면
사부구가 배신만 안했어도 신성이 안무너진데다
요동성,안시성등도 그대로 버티고 있는 상황이라
나당연합군에 평양성이 무너지기는 커녕
오히려 제3차 고당전쟁은 나당연합군이 고구려군에 참패했다는것으로 끝나고
얼마 안지나서 가르천칭의 토번제국의 급성장으로 당제국이 수도 장안성까지 탈탈 털리며 고구려는 당제국에 역습을 가하며 당제국에게 타격을 준후
바로 신라를 쳐서 먹었을것임.
백제를 먹은 신라는 최대가 20만이 그만인데다
백제 세력들이 고구려에 붙어버리면 신라는 그대로 ㅈ망했겠죠.
그리고 가르천칭의 토번제국과 신라와 백제를 흡수하여 중화 제국과 동급이상의 문명에 백만 대군도 동원가능해진 통일 고구려로 인해 당제국은 ㅈ망했겠죠.
그리고 신라도 고구려애들과 어느정도 동질성이 있던걸 고려하면
당제국에 붙을 가능성은 낮을테니
당제국입장에서는 답이 없겠죠
@@mao4253
그 나라 멸망했다고 인구가 빠져나갔다고 그 나라 역사 자체가 다른 나라 역사가 된다는 건 뭔 발상입니까? ;
옳은 해석이것 같습니다. 후방 문열어주고. 하이패스로 내려왛지요
@@수분-g3g 영국인구가 미국을 세웠고 그후 그사람들을 미국역사로 치지 영국역사는 아니지 않아요?
@@수분-g3g 역사의 주체는 사람아니에여??
지구상에 존재하던 대부분의 나라들이 멸망 할때는 내부에서 이미 무너지고 외부의 공격은 그저 마침표만 찍는거라고 하더라구요..
한국도 곧이다. ㅋ
지금 한국이 지역갈등, 세대갈등, 남여갈등임....지금 미군이 없으면 침략하기 좋은 시기임
고구려가 대단한 국가로 알고 있는데 실상은 다릅니다 우선 고구려의 인구는 150만명을 넘어선 적은 거의 없었구요 보통 100만명 정도로 .. 신라나 백제 마져도 완전히
점령해서 먹을수있는 국력이 안되었습니다 그당시에는 민족개념도 없었고 그냥 힘이 정의였고 점령해서 병합하면 그만이었던 시대 입니다 물론 그때도 그들나름대로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것은 힘앞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시절입니다 당나라나 수도는 장안이고 고구려에서는 아주 멀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까지 원정오려면 전투병
력보다 식량과 화살및 공성무기 부품 공급 병력이 더많아야 했습니다 산성을 치려면 전투병력만 해도 적어도 수비의 3배에서 5배의 병력이 필요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또 고구려는 5개의 부족들이 연합해서 만든 나라여서 언제나 내부다툼과 권력투쟁이 심했습니다 신라나 백제도 마찮가지였지만 ... 결국 연개소문과 그아들들이 고구려를
망쳤습니다 연개소문의 장남이 고구려의 군사력과 고위층들의 많은 비밀들을 가지고서 당나라에 투항해서 앞장서서 당나라 군의 선봉장으로 고구려로 진격해 왔으니..
형수 취수혼 ... 국경이 넓어서 전쟁이 많았던 고구려에서 수시로 대량으로 많은 남자들이 죽었습니다 특히 귀족들은 재산도 있었는데 본인이 죽으면 남편이 죽고 부인이
재혼하면 귀족의 재산은 다른가문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아이들이 없거나 어릴경우는 더욱 그렇죠 그래서 재산이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지 않게 하고 형의 자식들이나 동생
의 자식들이 다른 가문의 남자에게 핍박받는 것을 막을려고 형수나 사별한 제수와 결혼하는 풍속이 생긴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당시 수명도 길지 않았던 시대 이지
만 형수처럼 대하다가 부인이 되어 합방하게 되면 참 아이러니 할것 같습니다 제수씨도 마찮가지구요 허구헌날 전쟁 하면 일할사람도 없고 고구려에는 농사도 많지 않았던
반농 반유목 국가였습니다 만주에 쌀농사는 조선말기에서 일제시대때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고구려 시대에는 면적당 수확량이 작은 콩과 수수(옥수수 아님) 조 귀리 같은
작물들 주로 심었다고 합니다 조선말 선교사들이 조선에와서 한반도 북쪽에는 쌀밥이 없었고 조밥이나 보리밥과 수수를 주로 먹는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죄송한데 고구려가 백제랑 신라 먹을수있었는데요.. 북쪽에서 계속 공격해오고 둘이서 동맹맺으면 샌드위치라 이건 못이긴다고 봐야해요.. 백제vs고구려 신라vs고구려 하면 고구려가 다 이길수있어요..
한민족 역사상 다시는 없을 나라다 영토며 국력이며 운까지 고조선과 다르게 건국초에 중국이 분열된 시기에 다가 주변 경쟁 국가들은 연맹 왕국 단계 팽창하기 좋은 시기에 다가 유능한 지도층 까지 영토로 따지면 발해도 있지만 고구려에 비할바는 못된다고 생각함 고구려는 국가 멸망전을 몇번이고 버텨냈는데 발해가 고구려의 반만이라도 버텼다면....
확실히 국력 성장 할때가 중국 삼국시대였고 전성기에 맞춰 국력 확장할 때가 5호 16국 그리고 미천왕때부터 장수왕까지 군주들 라인업도 장난 아니였네요
@@gray8235 발해도 군주들이 유능했으나 하필이면 경쟁 상대가 요나라.....만약 발해가 요나라와의 경쟁에서만 이겼다면 중국 역사상 가장 돈많은 호구인 송나라에게서 공물이나 뜯으면서 역대급 제국이 됬을수도 있었으나...
그 축복은 요나라가 누렸네요
@@Bin314-h5z 발해가 운도 안 좋았던게 몰론 요나라를 만난 것도 있지만 후삼국이 분열되어 있던 것도 크다고 봅니다.
몰론 거란이 요나라 세우고 발해 침공하기 전에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했어도 고구려 계승 의식이 같은 발해와 주도권 싸움을 할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으나 만약 일찍 통일되었다고 가정한 고려 입장에서 발해가 무너지면 요나라라는 대국과 직접 국경을 맞대니 그래도 발해를 지원하지 않았을까요?
순망치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말도 있고요.
@@Bin314-h5z 어차피 발해가 있어도 발해의 중심인 5경(상경 중경 동경 서경 남경)은 대부분 백두산 위쪽, 만주, 연해주, 간도 쪽에 있고 핵심 요충지도 요동과 부여성이기에 고려쪽으로 남진할려고 하여 충돌하진 않을 거라고 봅니다. 게다가 고려보다 더 강한 요나라가 요동과 부여성을 노리고 있으니까요!
그때도 민족의 개념이 있었을지는 모르나 고려가 신라처럼 중국 당나라나 거란 요나라에 빌붙어서 발해땅을 나누려고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봅니다.
@@문재덕-i6h 그쵸 주위 국가들이 다 분열이 되어서 요나라를 견제할 세력이 없었죠
중국 한국 토번 위구르 까지 동북아 거대국가중 안정된 나라가 발해와 요나라 이 둘밖에 없었죠
둘의 경쟁으로 동북아 패권이 정해지는 싸움 이었는데 유목민족과의 전면전은 중국도 힘드니까요 그래도 발해가 국력에 비해 너무 맥없이 망한게 아쉽네요 물론 발해 부흥운동은 상당히 많았지만요 최소한 여진족 초럼 간도랑 한반도 북부만 지켰어도 괜찮았을 텐데요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중학교 2학년 입니다. 이번 도덕시간에 선풀달기 활동을 해서 역사돋보기님의 영상에 댓글을 남김니다. 제가 역사공부를 했었는데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을 해줘서 너무 좋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영상을 제작해 주세요.
이것만은알아주세요. 졸업한지 10년이다되어가는 20대후반의형이지만 한국사라는초중고 역사책은 믿지마세요 전부다 한국입장으로만 만든책이라 거짓이많아요 역사다큐를보더라도 해외에서만든걸보세요
@@하얀고양이아나 그 말투가 최소 30대 후반의 형님같은데요..
@@김준기-y1g ㅋㅋ 애늙은이라는말 많이들어봐서
@@김준기-y1g ㄹㅇㅋㅋ
여기서 역사 공부하지마쇼. 진주박물관 채널이랑 임용한 박사 채널 가셈
5:49 연개소문이 안시성을 직접적으로 공격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단지 당태종이 안시성에 패해서 돌아갈 때 “안시성은 연개소문도 함락하지 못 했다더라” 라는 카더라 말만 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그 기록 가지고 지금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마치 내전이 있었던 것 처럼 말하고 있구요. 이는 당태종이 점령하지 못 하고 패퇴하는 과정에서 하는 변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당태종 말이 맞다면 연개소문이 고정의 장군을 포함한 15만 군사를 굳이 보내 지원했을리가 없습니다. 성문도 열어주지 않을텐데요.. 이 부분은 잘못된 역사정보를 퍼트리고 있는 것이므로 정정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처음 이설을 밀었던 분이 여호규 교수님이신대 몇년전에 스스로 이설을 철회시키셨죠
이 설에 대한 수많은 공격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안시성의 성주도 양만춘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아닌. 고정의 장군이 었을 확률도 높습니다. 고연수를 비롯한 선봉대 패배 후 후퇴해서 안시성과 합류해. 당군을 격퇴했을 것으로 보는게 맞을 듯 합니다. 상식적으로 5천도 안되는 병력으로 몇십만의 당군을 물리치는 것은 납득이 되기 어려운 부분이지요.... 선봉대 패배 후 본대의 행방도 묘연하구요.
확실한건 안시성과 중앙군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면 안시성에서 당 태종을 물리칠 수 없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안시성이 이기든, 지든 성 자체의 방어력이 약해졌을거고, 병력 숫자도 줄었을테니까요. 갈등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마저도 '가설'에 불과한데 마치 내전을 정사인 것처럼 말씀하시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안시성성주는 고정의가 아님
양만춘도 가상의 인물이 아님
다만 성은 양씨가 맞지만 정확한
이름은 전해내려오지않음
형수 취수혼 ... 국경이 넓어서 전쟁이 많았던 고구려에서 수시로 대량으로 많은 남자들이 죽었습니다 특히 귀족들은 재산도 있었는데 본인이 죽으면 남편이 죽고 부인이
재혼하면 귀족의 재산은 다른가문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아이들이 없거나 어릴경우는 더욱 그렇죠 그래서 재산이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지 않게 하고 형의 자식들이나 동생
의 자식들이 다른 가문의 남자에게 핍박받는 것을 막을려고 형수나 사별한 제수와 결혼하는 풍속이 생긴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당시 수명도 길지 않았던 시대 이지
만 형수처럼 대하다가 부인이 되어 합방하게 되면 참 아이러니 할것 같습니다 제수씨도 마찮가지구요 허구헌날 전쟁 하면 일할사람도 없고 고구려에는 농사도 많지 않았던
반농 반유목 국가였습니다 만주에 쌀농사는 조선말기에서 일제시대때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고구려 시대에는 면적당 수확량이 작은 콩과 수수(옥수수 아님) 조 귀리 같은
작물들 주로 심었다고 합니다 조선말 선교사들이 조선에와서 한반도 북쪽에는 쌀밥이 없었고 조밥이나 보리밥과 수수를 주로 먹는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고구려의 멸망에는 연개소문 사후 아들들의 세력타툼이 컸는데 그중에서도 연남생의 배신이 뼈아프네요.
못 배운 기록인데 어디서 크 또 망하겠네 음
고구려의 멸망은 연개소문때문이라 봐야지요, 그때 상황을 봐서 그냥 중국에 고개숙이고 적당히 조공하자고 한 왕과 귀족들을 불러내서 싹다 죽여삐고 전쟁광으로 고구려를 몇십년만에 작살낸게 연개소문임
@@gretsu222 상황은 무슨 중국 사신이 와서 눈안보이는척 하면서 고구려를 샅샅히 살폈으며 고구려의 승전탑까지 부셨는데 뭘해도 전쟁을 했을꺼임 연개소문은 그당시에 할수있는 최고의 외교술을 펼쳤고 그게 안되서 강경적으로 나온거뿐임 난 연개소문 그정도면 할꺼 다했다고 본다 사후 문제는 비판받을수 있으나 연개소문을 전쟁광 취급하기에는 그당시 고구려 상황을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왜 이렇게 까지 할수밖에 없었는가 그걸을 봐야지 정변했다고 그걸 당이 명분의 빌미를 삼아 전쟁을 일으키게 되서 전쟁을 통해 고구려가 멸망하게 되었다. 라는 말은 너무 너무하지 않음? 난 적어도 연개소문의 성씨를 1000년동안 중국의 기록만 보고 잘못 안 우리들과 그 우리보다 한참 못했던 일본한테 따라잡혀서 지배당하고 그후로는 힘이 부족해서 반갈죽당하고 북한이 도발하면 진짜 제대로된 구사적 대응도 못하는 나라의 후손들이 연개소문을 욕할 자격이 있나 싶다. 난 연개소문이 끝까지 중국과 어떻게든 싸워줘서 끝까지 할수있다는 의지를 보여줘서 진짜 감사하다고 생각함 조선과 다르게 아무것도 하지못하고 지배당하는것보단 손가락질 당할 각오로 정변 일으켜서 나라를 지키는것도 대단한 위인임
@@gretsu222 10 역알못 수준 ㅋㅋㅋㅋ 영류왕이 고수 전쟁때 잡은 포로들 다 풀어주고 승전기념탑 부셔버리고 고구려 상세지도 당태종한테 보내주고 선물까지 보내주면서 굴종적으로 나오면서 비굴한 평화를 유지했는데 그게 영원히 갈거 같냐? 어차피 당 태종은 고구려를 침략할건데?
개소리도 좀 적당히해라 영류왕이 한 짓은 매국노짓이나 다를게 없었음
@@gretsu222 당나라에 조공보내면 진짜로 안처들어올거 같냐고 ㅋㅋ
당장 고구려 멸망 후에 신라까지 먹으려고 한게 당나라구만 정신 좀 차려라
아무리 강한 국가라 한들.. 내분은 자멸이다.. 마지막 멘트... 이거 진짜 우리들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명심해야 할 말... 내분을 조장하고 분탕질을 조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다 사라져야 한다..
윤석열과 국짐을 보고도 이런 말이 나오냐?
내분이 문제가 아니잖아
백제도 고구려도 매국노가 나라를 망하게 했다
지금 우리나라도 윤석열과 국짐 같은 매국노들이 나라를 망하게 만들고 있잖아
민주주의 국가에서 무슨 전체국가적 발상인지
@@sliverkim5784 민주주의의 탈을 쓴 사회주의적 사상과 성향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함. 그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자체를 위태롭게 함
@@sliverkim5784 저게왜 전체주의적발상임?
@@tv-zz2ym 민주주의는 다원주의를 전제로 함. 내분조장과 분탕질은 누가 판단하고 무슨 기준으로 하는 것임?
박정희 전두환 시절엔 민주주의 세력을 내분 조장 분탕질 조장 세력이라고 규정했음.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독재체제 주장- 제외하고는 헌법질서 내에서 용인되는 것이면 함부로 부정할 수 없는 것임.(헌재 판시이기도 함)
가치없는 주장이면 다수의 호응 못받고 사라지겠지.
선해해서 국가나 국민 공동체에 도움되는 방향으로 가자는 의미 정도로 이해는 하겠으나 저 구호 자체만 놓고보면 악용될 소지가 다분한 말임.
2차 고당전쟁 승전 이후에 고구려는 당나라 봉선의식에 참여함 이것은 당이 고구려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뜻으로 사실상 고구려 정벌을 잠정적으로 포기하겠다는 의사였으나.. 연남생이 귀순하면서 생각이 뒤바뀌고 고구려 정벌에 올인했지 그 사이에 토번이 발흥한걸 생각하면 만약 그 시기에 고구려가 당과 전쟁없이 넘겼다면 토번의 발흥과 맞물려서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음 당나라는 한반도는 커녕 요동까지도 직접 통제할 여력이 없었음 결국 내분이 모든걸 망쳤다
그때 고구려가 멸망하지않았으면 아직까지도 한반도가 통일되지 않았을수도 있져
@@gretsu222 ㅈㄹㄴ
@@gretsu222 뭔 발상임??
@@gretsu222 지금도 분단이다 게이야..
맞는 말입니다. 1년만 버텼어도 당은 토번때문에 고구려원정은 포기했겠죠. 따라서 연개소문의 정변이 고구려멸망의 직접적인 원일일 수 있습니다.
어렸을때는 항상 외세에 굴복하지 않고 항전을 주장한 연갯소문을 비롯한 강경파가 늘 멋있어 보였는데 사회생활을 해보면서 현실적인걸 많이 느끼다 보니 일단 나보다 더 쎈놈앞에서는 숙이고 들어가야겠구나를 배우게 되더군요. 보통 고수전쟁과 고당전쟁에서 일어난 살수대첩, 안시성에서의 항전... 보통 이 스토리들은 멋있고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가 맞는건 부인하지 안하는데... 고수전쟁으로 고구려도 엄청난 국력 손실을 입었기에 이게 복귀되기전까지.. 정확히 언제쯤 복구가 되고 다시금 부국강병을 이룰지는 누구도 몰랐겠지만 중원의 신흥강자인 당나라에게 한수 접고 숙이고 들어갔어야 되지 않았나 그래서 영류왕이 더 옳았던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건 순전히 드라마 속의 대사이라 이 둘이 진짜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알수 없으나 드라마 '정도전'에서 요동정벌을 주장하는 최영이 반대하는 이성계에게 "이 사람아 자네는 오래전 우리 자랑스러운 선조들께서 저 중원의 수와 당과 싸워 이긴걸 모르시나?" 하니 이성계가 "그 전쟁들이 우리가 중원으로 쳐들어가서 이겼던 전쟁입니까?"라고 반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뭐 누구는 이미 이성계가 쿠데타를 일으키려 작정하고 위화도 회군을 했다고도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 이성계 말대로 방어전이었지 공격전이 아니었기에 고구려 국력의 손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것으로 짐작됩니다. 거기다 불난집에 휘발유 뿌리는격으로 남쪽에서 신라를 견제해주던 백제마저 멸망했으니 당나라와 신라사이에 샌드위치 신세가 된 고구려가 망하는건 연남생이가 도망을 안가고 대막리지 자리를 유지했어도 피하기 어려웠을것으로 추정은 됩니다. 더욱이 수,당 때 중국의 인구는 대략4천만명 고구려는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는데 적게는 300만에서 많게는 700만까지도 유추하는데 이때야 다들 잘 아실테지만 사람 한명이 가내수공업 공장이었는지라 지금도 그렇지만 인구빨과 물량빨로 밀고들어오는 적에게 당해낼 재간이 있었는지 의문이긴 합니다.
고구려가 대단한 국가로 알고 있는데 실상은 다릅니다 우선 고구려의 인구는 150만명을 넘어선 적은 거의 없었구요 보통 100만명 정도로 .. 신라나 백제 마져도 완전히
점령해서 먹을수있는 국력이 안되었습니다 그당시에는 민족개념도 없었고 그냥 힘이 정의였고 점령해서 병합하면 그만이었던 시대 입니다 물론 그때도 그들나름대로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것은 힘앞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시절입니다 당나라나 수도는 장안이고 고구려에서는 아주 멀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까지 원정오려면 전투병
력보다 식량과 화살및 공성무기 부품 공급 병력이 더많아야 했습니다 산성을 치려면 전투병력만 해도 적어도 수비의 3배에서 5배의 병력이 필요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또 고구려는 5개의 부족들이 연합해서 만든 나라여서 언제나 내부다툼과 권력투쟁이 심했습니다 신라나 백제도 마찮가지였지만 ... 결국 연개소문과 그아들들이 고구려를
망쳤습니다 연개소문의 장남이 고구려의 군사력과 고위층들의 많은 비밀들을 가지고서 당나라에 투항해서 앞장서서 당나라 군의 선봉장으로 고구려로 진격해 왔으니..
한 국가가 망하는 건 외부의 침략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의 분란 때문에 망한다.
멕시코 마야 문명이 스페인 군인이 진입했을 때 이미 내분으로 망해있었다.
마야문명은 거의 시체나 다름없었고 예시로 드신건 아즈텍 문명이 아닐까요?
음 외부의침략이 너무세서 내분이 생기는게 아닐까 싶네요
분명한건 고구려가 평양이 아닌 만주에 수도를 삼았다면 수나라때 멸망당했을 가능성이 컷음
이삼중에 방어진과 바다 여러깊은 강등 워낙 어려움이 많았죠
그건 아님 수나라도 고구려에 국경 방어선을 쉽게 못뚫음
지금의 역사서에 기록된 현 평양이 태왕성이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증거가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태왕이 상시 또는 자주 거주하며 지내는 태왕성은 만주 심양 백산 부근이라는 것이 속속 나오고 있고, 고구려의 평양은 즉 수도로써 태왕이 가는곳은 전부 평양이라는 지명을 썻다고도 합니다. 현 북경은 고구려의 유주였으며 서평양, 국내성은 동평양, 부여성은 북평양, 현 북한의 평양이 남 평양, 만주 심양 백산 부근이 중평양 즉 태왕성입니다.
갱샹도 중국 후손 흉노인을 믿은게 잘못 ㅋㅋ경상도는 절대 믿지마라 통수맞는다 백제처럼ㅋㅋ 그리고 왜곡 도잘함ㅋㅋ 일본 피가 많이 섞여서 그런지 낄낄
그건아님. 그리고 부족이랑 강력국가 백제 신라땜 위치 선정 더욱이 그럼 안되고.
어쨌건 말도 안되는 역사 모르는 소리.
수나라는 고구려정벌안해도 스스로망할 나라였음 자국민 몇십만을 노역으로 죽였는데 ㅋㅋㅋㅋ
역사 저널인가에서 최태성 선생이 요즘 학생들은 약소국 신라가 나중 (외세인 당을 끌여들여) 통일을 할 때 환호를 지른다고 하던데, 우리가 학창 시절엔 신라의 통일 과정을 보면서 환호 보단 강대국 고구려가 나당(솔직히 당나라)에 의해 역사속에서 사라지는 것을 더 슬퍼했던것으로 기억하는 데, 비슷한 연배의 학력고사 세대(국사는 세계사와 달리 선택이 아닌 기본 25점인과목-체력장 20점 포함 340점중에서...)인 최태성 선생은 그렇지 않았는지 의아해 지더라는...
전 솔직히 한국인들은 신라의 후손 비중이 크다고 봅니다. 성씨들만 봐도 알 수 있죠. 박 석 김 이 최 정 배 손 설 + 김 이 허(가야계) 통일신라 이후 고려, 조선, 현재 신라계 후손들이 한국을 이끌고 있죠. 신라가 이기지 못했다면 지금 이들이 존재 했을까요? 그들이 지금 학생들이고 환호를 하는 이유도 말씀을 안 해도 알겠죠? 저도 94년생이고 어릴 때 환호했습니다.
남한은 성씨만 봐도 신라인 후손이 압도적으로 많죠. 그래서 그렇습니다.
그놈의 외세타령은 참.... 그땐 삼국이 서로에게 외세엿습니다.
근데 사실 고구려가 600년 넘게 갔다는거 자체가 존나 대단한거지
신라나 백제는 지들끼리 라이벌인데
고구려의 라이벌은 중국이였으니
고구려가 거의 700년을 갈 동안 중국에서 바뀐 왕조만 10개가 넘은걸보면 고구려는 존나 오래 간거임
땅덩이가 작은것도 아니였는데
라이벌은 아님 백제가 신라 개털었음 갑자기 당나라가 개입해서 한순간에 뒤 바뀐거지
@@볼트-x7p신라는 광개토대왕 아니었음 진작 멸망당했지 ㄹㅇ
고구려가 대단한 국가로 알고 있는데 실상은 다릅니다 우선 고구려의 인구는 150만명을 넘어선 적은 거의 없었구요 보통 100만명 정도로 .. 신라나 백제 마져도 완전히
점령해서 먹을수있는 국력이 안되었습니다 그당시에는 민족개념도 없었고 그냥 힘이 정의였고 점령해서 병합하면 그만이었던 시대 입니다 물론 그때도 그들나름대로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것은 힘앞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시절입니다 당나라나 수도는 장안이고 고구려에서는 아주 멀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까지 원정오려면 전투병
력보다 식량과 화살및 공성무기 부품 공급 병력이 더많아야 했습니다 산성을 치려면 전투병력만 해도 적어도 수비의 3배에서 5배의 병력이 필요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또 고구려는 5개의 부족들이 연합해서 만든 나라여서 언제나 내부다툼과 권력투쟁이 심했습니다 신라나 백제도 마찮가지였지만 ... 결국 연개소문과 그아들들이 고구려를
망쳤습니다 연개소문의 장남이 고구려의 군사력과 고위층들의 많은 비밀들을 가지고서 당나라에 투항해서 앞장서서 당나라 군의 선봉장으로 고구려로 진격해 왔으니..
형수 취수혼 ... 국경이 넓어서 전쟁이 많았던 고구려에서 수시로 대량으로 많은 남자들이 죽었습니다 특히 귀족들은 재산도 있었는데 본인이 죽으면 남편이 죽고 부인이
재혼하면 귀족의 재산은 다른가문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아이들이 없거나 어릴경우는 더욱 그렇죠 그래서 재산이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지 않게 하고 형의 자식들이나 동생
의 자식들이 다른 가문의 남자에게 핍박받는 것을 막을려고 형수나 사별한 제수와 결혼하는 풍속이 생긴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당시 수명도 길지 않았던 시대 이지
만 형수처럼 대하다가 부인이 되어 합방하게 되면 참 아이러니 할것 같습니다 제수씨도 마찮가지구요 허구헌날 전쟁 하면 일할사람도 없고 고구려에는 농사도 많지 않았던
반농 반유목 국가였습니다 만주에 쌀농사는 조선말기에서 일제시대때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고구려 시대에는 면적당 수확량이 작은 콩과 수수(옥수수 아님) 조 귀리 같은
작물들 주로 심었다고 합니다 조선말 선교사들이 조선에와서 한반도 북쪽에는 쌀밥이 없었고 조밥이나 보리밥과 수수를 주로 먹는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고구려는 강대국이 아닙니다 초창기에 전투를 잘해서 좀 잘나가긴 했지만 서기 534년에 태어난 신라 진흥왕 시대에 접어들면 고구려는 여기저기에서
쳐발리는 국가가 됩니다 고구려가 강했다면 신라나 백제를 먹어서 더욱 강해졌겠죠 오죽하면 신라에게 쳐발려서 지금의 함경도 까지 동해안의 한반도
영토는 죄다 신라에 넘어갔겠습니까? 그시기에는 김춘추나 김유신은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기이고 당과연합 같은것도 없었으며 순수하게 신라에게 전
쟁에 져서 영토를 빼앗긴 것입니다 그당시 만주는 영토는 넓었어도 쓸모없는 땅이 많았고 추워서 벼농사는 짓지도 못하던 시기였습니다
연개소문 쿠데타 → 왕권약화 → 연개소문 사망 → 후계자 서열정리 중 내분으로 자멸 → 나당연합에 멸망
고려의 무신정변과 같은 논리입니다 연개소문의 권력 장악이 고구려 멸망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고구려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은 연개소문 아들들의 분열과 연남생의 배신인데 왜 언개소문 탓을 하냐
애초에 영류왕이 매국노나 다름없는 비굴한 평화를 구걸하고 연개소문을 죽이려고해서 먼저 선빵쳐서 없앤거고 연개소문이 강력한 카리스마랑 리더쉽으로 내분에 쌓인 고구려를 이끌어서 당과의 전쟁에서 그만큼 버틴거지
@@티라노사우루스렉스trx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인건 맞지
대당 강경책의 입안자이기도 하고
자식들의 분열역시 연개소문의 쿠데타와 권력 세습으로 인해 유발된거니까
고구려가 일시적으로라도 숙이고 당태종~측천무후 집권까지 약 60년만 버텼으면
그 다음은 당나라도 슬슬 개판나기 시작하기 때문에 훨씬 더 오래 생존했을걸..
@@티라노사우루스렉스trx 연개소문 쿠테타이후 당나라와 적대적인 정책을 핀게 고구려 멸망의 원인임 연남생이 당에 투항한건 아주 나중문제고
@@darkkjw그렇게 본다면 영류왕의 책임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함. 당에 대한 저자세 때문에 국론이 분열됨.
좋은 영상 잘 봤고 감사합니다 그냥 궁금해서 그런데 해당 내용은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되는 내용인가요 아니면 여러 내용과 정황을 종합해서 채널 주인장님이 내린 결론이신가요?
연개소문이 등장하기 이전에 신라의 진흥왕 시절 이미 고구려는 약화되었습니다 그증거가 고구려 땅이던 지금의 함경도(원래 옥저땅)와 강원도 북부
(지금의 원산 과 금강산 부근) 이 모조리 신라영토로 되었습니다 신라와 전투마다 패한것입니다 물론 고구려의 군사들은 당시 선비족이나 북위등의 침
략을 막아야 하기에 서쪽에 많은 병사들을 배치해야 하니 신라까지 신경을 못섰을 수도 있으나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 가까이 신라군이 진격해 영토를 넒
히는 상황에서 중국쪽만 방어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죠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것도 중국쪽 세력이던 한나라 위나라 공손씨 들의 침략이 무
서워서 중국세력들에서 먼쪽으로 옮긴것인데 ... 그당시 지도를 보면 신라가 마음만 먹었다면 원산 쪽에서 현재의 북한땅 원산 평양 고속도로 길을 따라
평양으로 진격하면 평양은 며칠만에 떨어질수도 있었습니다 동해안은 함경도 까지 신라가 먹었으니 ..
소리가 안들려요
연개소문을 보면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생각나네요
둘다 강대국에 맞선 용맹한 장군이었으나 전투에서 패하고 나라가 멸망해버리고..
연개소문은 후계자 관리를 제대로 못한 점도 있지만
결국 본인이 마지막 방어선이었던것 같아요
연개소문은 전투에서는 다이겼음. 천하에 이세민도 연개소문을 두려워했다는 얘기도 있음
@@한도경-n2i 그럼 연개소문 설인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건 뭔가요?
@@flanderscat 그건 당연히 허구죠
@@flanderscat 그런 말은 정사 어디에도 없는데요? 소설 내용을 착각하신 건 아닌지? 뭐 소설 내용에 당태종을 위협하는 연개소문을 설인귀가 무찔렸다는 말은 있는데 죽였다는 건 없습니다.
@@flanderscat당태종과 개소문이 다투다가 태종이 밀려 도망가다가 설인귀가 나타나 태종을 구해줌. 태종이 중국 역사에서 1위나 2위 하는 성군으로 추앙 받아, 그에 대한 무슨 위대한 작품을 남기고 싶었던 중국인들이 재미로 허구처럼 지어낸 이야기.
형수 취수혼 ... 국경이 넓어서 전쟁이 많았던 고구려에서 수시로 대량으로 많은 남자들이 죽었습니다 특히 귀족들은 재산도 있었는데 본인이 죽으면 남편이 죽고 부인이
재혼하면 귀족의 재산은 다른가문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아이들이 없거나 어릴경우는 더욱 그렇죠 그래서 재산이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지 않게 하고 형의 자식들이나 동생
의 자식들이 다른 가문의 남자에게 핍박받는 것을 막을려고 형수나 사별한 제수와 결혼하는 풍속이 생긴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당시 수명도 길지 않았던 시대 이지
만 형수처럼 대하다가 부인이 되어 합방하게 되면 참 아이러니 할것 같습니다 제수씨도 마찮가지구요 허구헌날 전쟁 하면 일할사람도 없고 고구려에는 농사도 많지 않았던
반농 반유목 국가였습니다 만주에 쌀농사는 조선말기에서 일제시대때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고구려 시대에는 면적당 수확량이 작은 콩과 수수(옥수수 아님) 조 귀리 같은
작물들 주로 심었다고 합니다 조선말 선교사들이 조선에와서 한반도 북쪽에는 쌀밥이 없었고 조밥이나 보리밥과 수수를 주로 먹는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9분29초 에 연정토가 비친인구는 4000명이 아니라 4000호라하네요
7세기 고구려는 그냥 땅덩이만 컸지 애초부터 비옥한 농토도 별로 없고 영토 대비 가성비 떨어지고 그나마 영토 넓고 인구 많으니까 특유 군사력으로 백제랑 신라 누를 수 있었던거지
그래서 전성기때도 북쪽으로 그렇게 많이 확장했지만 남진정책도 포기할 수 없었던거고
고구려가 한반도를 먹을거였으면 광개토장수문자왕때 확실하게 백제신라 복속했어야했는데 때를 놓친거임
오히려 땅덩이에 비해 갓성비였던게 평야도 있고 철도 많이 생산된 한반도 중남부 국가들이고 바다까지 넓어서 자급자족도 되고 말년에 백제가 쌉질만 안했어도 남부지방에서 신라랑 양강구도 펼칠 수 있었는데 신라한테 먹힌거임
신라보고 외세 지원받은 양아치&불완전 통일이라고 평가하는데 그 당시 상황으로선 고구려랑 백제는 이미 내정 자체가 개판나있었고 신라는 급식때부터 진흥왕때가 전성기라고 배웠는데 어디까지나 영토넓이 기준일 뿐이고 그 이후로 더 똘똘 뭉치고 강해져서 신라가 통일할 수밖에 없는 그림이었다
급식때는 고구려가 통일했어야 지금보다 땅도 더 넓었을거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급식스러운 생각이었던거같고 심지어 고구려보다 북쪽으로 영토 더 넓었던 발해도 얼마안가 작살난거보면 그냥 만주~연해주 땅덩이 차지하는건 그리 중요해보이지 않음
고구려가 대단한 국가로 알고 있는데 실상은 다릅니다 우선 고구려의 인구는 150만명을 넘어선 적은 거의 없었구요 보통 100만명 정도로 .. 신라나 백제 마져도 완전히
점령해서 먹을수있는 국력이 안되었습니다 그당시에는 민족개념도 없었고 그냥 힘이 정의였고 점령해서 병합하면 그만이었던 시대 입니다 물론 그때도 그들나름대로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것은 힘앞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시절입니다 당나라나 수도는 장안이고 고구려에서는 아주 멀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까지 원정오려면 전투병
력보다 식량과 화살및 공성무기 부품 공급 병력이 더많아야 했습니다 산성을 치려면 전투병력만 해도 적어도 수비의 3배에서 5배의 병력이 필요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또 고구려는 5개의 부족들이 연합해서 만든 나라여서 언제나 내부다툼과 권력투쟁이 심했습니다 신라나 백제도 마찮가지였지만 ... 결국 연개소문과 그아들들이 고구려를
망쳤습니다 연개소문의 장남이 고구려의 군사력과 고위층들의 많은 비밀들을 가지고서 당나라에 투항해서 앞장서서 당나라 군의 선봉장으로 고구려로 진격해 왔으니..
형수 취수혼 ... 국경이 넓어서 전쟁이 많았던 고구려에서 수시로 대량으로 많은 남자들이 죽었습니다 특히 귀족들은 재산도 있었는데 본인이 죽으면 남편이 죽고 부인이
재혼하면 귀족의 재산은 다른가문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아이들이 없거나 어릴경우는 더욱 그렇죠 그래서 재산이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지 않게 하고 형의 자식들이나 동생
의 자식들이 다른 가문의 남자에게 핍박받는 것을 막을려고 형수나 사별한 제수와 결혼하는 풍속이 생긴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당시 수명도 길지 않았던 시대 이지
만 형수처럼 대하다가 부인이 되어 합방하게 되면 참 아이러니 할것 같습니다 제수씨도 마찮가지구요 허구헌날 전쟁 하면 일할사람도 없고 고구려에는 농사도 많지 않았던
반농 반유목 국가였습니다 만주에 쌀농사는 조선말기에서 일제시대때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고구려 시대에는 면적당 수확량이 작은 콩과 수수(옥수수 아님) 조 귀리 같은
작물들 주로 심었다고 합니다 조선말 선교사들이 조선에와서 한반도 북쪽에는 쌀밥이 없었고 조밥이나 보리밥과 수수를 주로 먹는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다 좋은데 가끔 소설을 쓰시는군....
연개소문이 정변에 반대한 안시성을 공격했다고 그리고 패했다고???
당태종이 요동의 살벌한 겨울추위도 다가오고 안시성 공략 실패를 감추기위한 거짓말 이라는 것이 중론이고
고구려 최전선 요동의 중심은 말 그대로 대성인 요동성이고 안시성은 산악지형의 중소규모의 성이지....ㅋㅋㅋ
이 아재 말이 맞음
10대20대에는 고구려 멸망이 참 안타까웠고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지금 30대에 다시 생각해보니 망할만 하니까 망했구나 라고
생각이듬 그래서 더이상 안타까움과 아쉬움은 없음 어찌됐건 머가리
잘 쓴 신라가 저 시대 위너 👍
연개소문이 안시성 공격했다는 기록출처 알려주세요. 처음 듣는거라 궁금하내요.
이거 그냥 영화 안시성만 봐도 나옴
당태종이 안시성 공격할때 안시성주가 연개소문의 쿠데타에 반대해 연개소문이 쳤는대 못이겼다고 직접 말했음
전 수험공부하다 알았는데 ㅎ
@@Werner4voss역사의 기록은 맞지만, 무기 들고 싸웠다고는 생각되지 않고 말다툼 수준이 아닐까...
고구려가 대단한 국가로 알고 있는데 실상은 다릅니다 우선 고구려의 인구는 150만명을 넘어선 적은 거의 없었구요 보통 100만명 정도로 .. 신라나 백제 마져도 완전히
점령해서 먹을수있는 국력이 안되었습니다 그당시에는 민족개념도 없었고 그냥 힘이 정의였고 점령해서 병합하면 그만이었던 시대 입니다 물론 그때도 그들나름대로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것은 힘앞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시절입니다 당나라나 수도는 장안이고 고구려에서는 아주 멀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까지 원정오려면 전투병
력보다 식량과 화살및 공성무기 부품 공급 병력이 더많아야 했습니다 산성을 치려면 전투병력만 해도 적어도 수비의 3배에서 5배의 병력이 필요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또 고구려는 5개의 부족들이 연합해서 만든 나라여서 언제나 내부다툼과 권력투쟁이 심했습니다 신라나 백제도 마찮가지였지만 ... 결국 연개소문과 그아들들이 고구려를
망쳤습니다 연개소문의 장남이 고구려의 군사력과 고위층들의 많은 비밀들을 가지고서 당나라에 투항해서 앞장서서 당나라 군의 선봉장으로 고구려로 진격해 왔으니..
형수 취수혼 ... 국경이 넓어서 전쟁이 많았던 고구려에서 수시로 대량으로 많은 남자들이 죽었습니다 특히 귀족들은 재산도 있었는데 본인이 죽으면 남편이 죽고 부인이
재혼하면 귀족의 재산은 다른가문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아이들이 없거나 어릴경우는 더욱 그렇죠 그래서 재산이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지 않게 하고 형의 자식들이나 동생
의 자식들이 다른 가문의 남자에게 핍박받는 것을 막을려고 형수나 사별한 제수와 결혼하는 풍속이 생긴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당시 수명도 길지 않았던 시대 이지
만 형수처럼 대하다가 부인이 되어 합방하게 되면 참 아이러니 할것 같습니다 제수씨도 마찮가지구요 허구헌날 전쟁 하면 일할사람도 없고 고구려에는 농사도 많지 않았던
반농 반유목 국가였습니다 만주에 쌀농사는 조선말기에서 일제시대때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고구려 시대에는 면적당 수확량이 작은 콩과 수수(옥수수 아님) 조 귀리 같은
작물들 주로 심었다고 합니다 조선말 선교사들이 조선에와서 한반도 북쪽에는 쌀밥이 없었고 조밥이나 보리밥과 수수를 주로 먹는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삼국시대에 제갈공명이 고구려의 훍어보더니 글을 적으며 뭐라했냐하면 외부로붇어는 무너지지않고 내부로 무너뜨니라고 병법에 적었음 그러니깐 당 태종이 그걸보고 그대로 무너뜨린걸로 알고있음
ㄷㄷㄷㄷ;;; 제갈량이 결국 高句麗멸망의 머나먼 빅픽쳐 대선조 중원오랑캐 원인이었던 것인가;;;; 소름
당 태종은 실패하고 죽었고
고종 때 멸망시킴
다음영상은 미스터리인발해와 신라인가요?
연남생이 10만호의 무리와 함께 투항해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연정토가 12개 성과 함께 투항
연남생이 투항했기 때문에 보급 문제가 해결.
그후 당나라는 최소 50만명의 대군을 파병합니다.
이때 당나라는 모든 국력을 다 쏟아부었는데..
만약 고구려가 큰 피해 없이 버티고 역공을 가했다면 당나라는 수나라처럼 멸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연개소문도 없고 후방 방어선들이 줄줄이 무너지거나 항복하는 상태에서...
신라군이 20만명이나 왔고 평양 인근 모든 남부 전선이 다 뚫렸는데도.......
평양성이 함락이 안됬죠;
만약 이때 고구려가 버텼다면 당나라나 신라 둘중 하나는 100% 멸망이었을것이고...
신라가 멸망당했다면 삼국통일 확정이죠.
고구려도 복수를 하기 위해 모든 국력을 다 쏟아부어서 칠테니깐요.
그점이 참 아쉽습니다.
이때 평양성에서 성문 열지말고 끝까지 버텨냈다면.....
역사는 달라지지 않을까요?
적어도 고구려가 3차 침입을 버텼다면...
4차 침입때 멸망을 당했다 해도..
신라가 요동 일부라도 차지했을 것이고...
최소한 그때부터 쭉 유지한다면..
적어도 고려시대-조선시대를 겪으면서
지금보다는 넓은 영토가 되지 않았을까..생각이 듭니다.
연개소문 아들끼리 내전 났음
아들끼리 내전 난게 "소문"났군
그소문이 "경이롭게"났군요
영상보려고 들어왔다가 글보고나감 ㄱㅅㄱㅅ
영개소문들끼리 싸웠었구나
@@음-z7s2y그런소문이 있음
고구려는 신라때문이 아니라 당나라때문에 멸망함. 당시 신라의 국력으로는 불가능 했음. 나당연합이 고구려를 침공할때 신라가 기다린건 고구려 멸망보다 당나라가 힘을 빼주길 기다린게 아닐까 함. 고구려 멸망하고 신라까지 집어삼켜 한반도 전체를 당나라 관할구역으로 편입하는걸 저지하기 위해......
고구려도 신라를 단독으로는
이기지 못함 그래서 여제동맹 맺은거고..
@@sdj-jn7up 순수 1대1이면 고구려가 개바르지 ㄷㅅ아 실질적으로 고구려는 국경선도 많고 적도 많아서 신라에만 군대 보낼순 없으니 여제동맹한거고
@@sdj-jn7up ㅈㄹㄴ
@@ridkdkdhbc 백제 멸망이후 시점이면 그렇지도 않음...
당장 백제를 먹은 신라의 인구 호수와 생산력이 고구려를 압도함
고구려는 땅은 넓지만 땅크기에 비해 인구가 적었음
만주지역은 지금과 달리 개발이 거의 안되어 있던 땅이기도 했고
대왕의꿈 드라마가 ㄹㅇ 존잼이엿는데
안시성성주랑 연개소문이랑 내분은 출처어딥니까?
이거 야사로알고있는데 정사처럼 얘기하는게 맞나요?
정치적 대립+외부세력과 전쟁 때문에 멸망.. 근데 당나라와 전쟁 여파로 황해도 해안가 몇십리에 인적을 볼수 없었다는 글은 본적 있는데 이미 거의 그로기 상태긴 했음 다만 정치적 문제만 없고 최대한 존버 했으면 달라졌을지도?
고구려가 한국역사라는 근거 중 하나 내분...격화...ㅠㅠ 슬프군요...
조선사 오천 년 특징 : 분열성, 타율성, 停滯性(정체성).
엽전은 안 된다. 오래된 생각이다.
참내 그게 뭔 근거예요
똑바로 아셔야겠네
모든 나라의 마지막은 내분인 거 모르시죠?
@@수분-g3g ㄹㅇㅋㅋ 유럽은 중국보다도 작은 대륙에서 단 한번도 통일된적이 없는데
@@배달의기수-w7e 응 니가 제일 문제
이런 생각을 하는 너 때문에 안된다
@@kkkkmmmmmjjjjj 유럽이 단일 국가냐?^^
고구려도 발해도, 전부 내부에서 무너지기 시작함. 근데 같은일이 한국에도 일어나는거같음... 남녀 갈등, 세대갈등에 에휴 모르겟다
국가의 흥망성쇠는 인접국과의 상호작용입니다. 단순히 집권층 내분이 일어났다고 망하진 않습니다. 중국이 분열되었을때 고구려가 강했던거고, 중국이 통일된후 그 국가를 번영시킬 황제가 나오면 고구려는 못버팁니다. 그 공식대로 이루어진것 뿐입니다.
동이(고구려)는 산지 많고, 성이 산을 따라 형성되어있다. 백성들은 예의를 알고, 전시에는 단결도 잘한다.
따라서 이런 민족은 함부로 도모하기 힘들다.
이 민족을 도모하려면, 내분의 조짐이 보일때 첩자를 보내 충신을 제거하고, 민심을 벌려놓으면 알아서 내분으로 무너지니, 그때 공격하면 쉽게 도모할 수 있다.
- 촉한 승상 제갈양
고대 국가는 중앙집권 이 아닌 귀족들의 연합체 라고 보는것이 맞겠네요 대게 고구려 백제가 망한것이 국력이 약한것이 아니었군요 ... 귀족들과 연합이 얼마나 되느냐 차이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멸망 이후 고구려도 백제도 부흥운동이 이루어진걸 보면 영상의 내용이 공감이 됩니다
사실 중앙집권이 확립되는건 조선시대 라는 말도 있죠 ㅎㅎ.....
중앙 집권 국가라도 국경 인근 군 사령관이나 최고 지도자를 호위 하는 집단이 변절 하면 답이 없음.
그 해석이 틀리지 않은 부분은, 백제는 상좌평이 귀족들의 최고 위치였는데 의자왕이 아들들을 전부 상좌평에 앉힘으로써 귀족 민심이 이반됐고, 결국 신라가 5만 군대 이끌고 쳐들어올 때 부랴부랴 동원할 수 있었던 게 겨우 계백의 5천 결사대였으니 귀족을 얼마나 왕이 잘 규합시키느냐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죠.
연개소문은 반정으로 친당 세력 영류왕과 100여 명의 귀족을 전부 제거한 뒤 대막리지에 올라 순전 본인의 카리스마와 역량으로 당나라의 침략을 저지시켰지만 그가 떠난 뒤 그만한 인물이 나오지 않으면 그 공백은 굉장히 크게 다가오죠.
연개소문만은 고구려를 강성하게 이끌었다고 말하고 싶을지 모르나 그가 권력을 잡았던 기간 동안 왕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외세에 싸운다는 대의도 약해졌고, 귀족이 왕의 권한을 행세하는 꼴이 된 데다 자식 간의 내분까지 일어나버렸으니... 귀족이 왕의 권한을 행사한 국가, 귀족이 왕을 버린 국가가 고구려와 백제의 말로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네요.
연개소문이 아들 정리 못한게
고구려 최대의 잘못임
연남건 연남산을 제거했어야됐음 걔네때문에 연남생이 당나라로 가게됨
아들이 아니라. 왕에게 권력을 돌려줘야 국가가 제대로 돌아감.
@@에스카노르-i8j 그렇지~고대국가는 국가가 곧 왕이고 왕이 곧 국가인 그런 시대였는데 왕에게서 모든 권력을 강탈해버렸으니 나라가 어떻게 안망해~고구려 역사를 살짝만 들어가서 보면 소수림왕(광개토대왕의 선왕이자 아버지)때도 그의 멸망직전 까지 갔었고 국내성이 함락되고 태왕비가 적국에 끌려가고 위기의 순간이 수도없이 많았지만 고구려는 그걸 다 뚫고 나왔는데 그게 바로 왕을 구심점으로 똘똘 뭉쳤기때문이라고 보는데 연개소문은 그런 구심점이 되어줄 왕을 없애버리고 자기가 왕의 자리에 앉았으니 나라가 어떻게 안망해
원소사후 원가가 조조에게 무너진과정과 비슷하죠
고구려가 아들들의 분열때문에 무너진건 맞지만 연개소문은 당나라를 물리쳤고 그 아들이 와서 먹었고, 고구려는 당나라보다 국력이 강하지 않았고 신라라는 강력한 동맹군이 있었죠
연씨가족의 권력싸움에 인한
내부분열
그리고 온건파와 강경파싸움에 인한 왕권약화가 그 이유가 아닐련지
고구려가 대단한 국가로 알고 있는데 실상은 다릅니다 우선 고구려의 인구는 150만명을 넘어선 적은 거의 없었구요 보통 100만명 정도로 .. 신라나 백제 마져도 완전히
점령해서 먹을수있는 국력이 안되었습니다 그당시에는 민족개념도 없었고 그냥 힘이 정의였고 점령해서 병합하면 그만이었던 시대 입니다 물론 그때도 그들나름대로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것은 힘앞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시절입니다 당나라나 수도는 장안이고 고구려에서는 아주 멀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까지 원정오려면 전투병
력보다 식량과 화살및 공성무기 부품 공급 병력이 더많아야 했습니다 산성을 치려면 전투병력만 해도 적어도 수비의 3배에서 5배의 병력이 필요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또 고구려는 5개의 부족들이 연합해서 만든 나라여서 언제나 내부다툼과 권력투쟁이 심했습니다 신라나 백제도 마찮가지였지만 ... 결국 연개소문과 그아들들이 고구려를
망쳤습니다 연개소문의 장남이 고구려의 군사력과 고위층들의 많은 비밀들을 가지고서 당나라에 투항해서 앞장서서 당나라 군의 선봉장으로 고구려로 진격해 왔으니..
고구려 멸망을 다룬 드라마 대조영 추천합니다 나라를 잃었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나라를 부활시킨 스토리
고구려 특성상 전쟁을 안할 수는 없었지만, 지나치게 믾은 전쟁을 한 건 좋지 않았음. 특히, 수당과 장기간 전쟁으로 인하여 국토가 황폐해지고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어서 나라가 정상적으로 운영하기가 어려워 졌음.
수, 당과의 전쟁은 불가피하긴 했죠.. 외세의 침략을 무조건 막아야 하는 전쟁이었으니까요
고구려는 지정학적으로 전쟁을 피하기 어려웠죠 북방에 유목민족들한테 털린적이 있어서
@@kevinkim7833 영류왕이 한거처럼 당나라한테 낮추고 사대했으면 어땠으련지.
10년만 버텼으면 당나라는 고구려 못 쳐들어갔을텐데.
고구려가 지도로 보면 강대국으로 보이지만 사실 쓸모잇는 땅은 그렇게 크지 않음.
백두산 주변은 다 높은 산이엇을꺼고, 만주도 남쪽은 습지대라 쓸모가 없엇을꺼임.
그렇게 보면 서해를 끼고 잇는 평지만이 쓸모잇는 땅이엇을꺼임.
그럼 전체적으로 평면지도상의 영역보다 축소해서 봐야 됨.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강대국도 대국도 아닌어서
고구려가 3국을 통일할 능력이 되지 않은거임.
만주지역에 철이 많이 생산되잖아요.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은 철이 많이 나왔는데 그 중 철이 많이 나왔던건 만주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만주지역을 빼앗기고 나서 철기병을 대규모로 운영한 기록도 사라졌고요.(견훤이후로 한국 역사상 대규모 철기병의 기록은 사라졌죠)
고당전쟁때 주필산전투에서 동원된 고구려군의 일부가 15만정도였던것을 보면
다른 세력을 견제할 필요가 없었다면 백제와 신라를 멸망시킬수 있었을겁니다.
고구려가 삼국의 통일할 찬스는 광개토대왕때 였고 백제 아신왕도 항복 시키고 신라는 알아서 굽신거렸으니
그냥 이때 밀어버렸으면 됐는데 제후국 정도로 삼은게 다 였죠
일단은 삼국 중 땅은 제일큰데 땅에비해 인구가적고 땅이크도 사람이 살만한 땅은 적은걸로 들어음
저때는 기후가 온화해서 그린란드서 가축도 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각보다는 국력이 좀 있던거 같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왕, 귀족들 무덤 짓는데 너무도 많은 힘을 들인 것도 한몫했을 듯. 각종 산성 짓는거랑...
고구려의 영광스러웠던 황금기만을 보고서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었으면.. 이라는 if를 생각한다. 하지만 이 if는 좋지않은 결과를 초래했을 수 있다. 이는 고구려의 특성 때문인데 완벽한 중앙집권이 아닌 다양한 파벌이 있었으며 또한 고구려는 상업기반의 국가라는 점이다. 신라, 백제는 농업기반이었지만 고구려는 농업, 목축업, 약탈등의 기반경제를 가지고 삼국을 통일했을 시 상업기반으로 바뀌었을 것임.
이런 상업기반에 귀족이 득세하기 쉬운 이런 사회구조는 잦은 반란을 야기한다. 실제로 고구려가 쇠약해진 이유는 각 기반의 귀족들과 왕의 견제와 내전때문이었다.
이런 잦은 내전은 기반을 흔들고 왕이 고씨를 벗어나는 신라와 같은 행보가 이어진다면 망하는건 순식간임. 그렇게 되면 한민족은 황금기를 맞이할지는 모르나. 자연스레 중국의 소수민족들 처럼 중국과 융화되어 중국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의 두 개 통일왕조와 50년 넘게 총력전을 치뤘는데 그 이전에도 북주, 돌궐과 전쟁 상태였슴.
그런 고구려가 수와 당 보다 국력이 미약했던 중국의 남북조시대 때 남조와 북조에 각각 조공칭신 했다는 게 의아스러움.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다
고서들중 많은 중국역사서에서도 기록된 것이 많다고 한다
즉 대륙서쪽이라는 기록을 자세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부여성 이야기도 해주시면 좋겠네요
부여성은 충남 부여에 위치
@@헛소리잘함 그 부여성말고요 고구려 최북단 부여성
아무래도 고구려가 땅도크고 군사력이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보니까 멸망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아쉽긴하지만 고구려가 멸망을 안했고 지금까지 계속 이어졌다면 한국이 통일이 안되고 3국으로 나뉘어져서 지금까지도 계속 지속되었을수도있겠죠!!
맞습니다 아마 한반도에 두나라가있을겁니다.
@@Song-o9q지금도 한반도는 두나라로 갈라진 상태잖아요.
한반두는요?
@@younghwanjang4558 북괴는 나라가 아닙니다 불법무장단체입니다.
만약 연개소문의 쿠데타가 실패하고 영류왕정권이 그대로 이어졌다면 고구려는 어떠했을까? 또 그렇게 됐으면 삼국통일은 누가 했을까?
연개소문이 왕중심 체제에서
신하가 왕권을 빼았아서
국가의 시스템이 망가졌다고 봄
고려 처럼
힘의 차이가 월등하면
금나라에 사대하고 내치를 다졌어야
수, 당과의 오랜 전쟁에 버틸 수 없었지요. 정복하지 않으면 정복당하지요..
국가가 망하는 가장큰 이유는 내분이지......
원래 강대국이 망하는건 내부에서 시작이 됨.....
연남생이 권력을 잡았으면 ....
그를 중심으로 뭉쳣어야 맞는거지......
자신을 죽이려 하면.....
과연 어느누가 나죽여라 할 사람이 있을까...??
연남생 욕할것 없음.....
욕먹을 자들은 내분 일으킨 귀족들의 책임임....
고구려 나라 컸을때 중국인 멸망시켰어야댔는데 ㅈㄴ아깝다 ㄹㅇ
ㅋㅋㅋㅋ 위나라 추정 인구수가 대략 5천만 정도임 ㄹㅇㅋㅋ 고구려는 끽 해봐야 300만에서 700만 추정이고 될 거 같음?
현 아시아의 어떤 국가도, 중원을 차지한 나라랑 싸울 능력은 없었다…
궁금한게 있는데 고구려.신라,백제도 나름 한민족아니였나요?? 북한,남한처럼 같은민족,언어를 쓴거잖아요!!
동영상에 오류 내용이 있습니다.실록에서는 연남생은 측천무후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서 일가족이 모두 처형이 되었습니다.연남생이 당나라에서 버틸수있었던건 번장제도의 힘을 얻은 백제출신의 장수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고구려는 망하는 날 까지도 군사력도 건재했고 많은 성들이 멀쩡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음.
근데 내부에서 일어난 내전과 수도에서 항복을 때려버려 급속도로 체계가 무너져 멸망함.
내분이 크긴한데 부수적인 요인으론 고구려의 동맹국이 대거 사라진 영향도 큼 북쪽에선 돌궐이나 그런 유목민족이 고구려와 동맹관계라 당나라를 적절히 견제했는데 다 당나라한테 정복당하고 남쪽으론 백제는 진작에 멸망당하고 거기에 내분까지 터지니 안망할수가 없는데.그와중에도 고구려는 1년이상이나 버팀
고구려 멸망은 사실 중국의 운하와 당시 항해술과 조선술의 발달임
중국이 고구려를 쉽게 못건든게 엄청난 원정임 특히 요하 주변의 늪과 뻘이 원정을 더 힘들게함 원정에서 제일 중요한건 보급임
보급이 가능해야함
근데 중국에 운하가 생기고 중국 남부 양쯔강에서의 엄청난 경제력이 이제 북 중국까지 올 수 있게 됨
또한 그전까지 중국은 오직 육로로 고구려를 침공함 아직 대군을 이동시킬 항해술과 조선술이 겸비가 안됨 근데 수나라 때부터 중국은 이제 육군 해군이 동시 출병이 가능해짐
원래 중국이 고구려 쳐들어가려면 마음 크게 한번 먹고 가야했음
근데 수나라부터 당나라까지 위에 서술한 이유로 연속 침공이 가능해짐
결국 물량전 못 버틴 고구려는 국력이 회복이 안되서 멸망한거임
네 이상 닉넴님의 뇌피셜 잘 들었습니다.
영상에서 소개 했듯 내분으로 인해 고구려의 중요 성 들을 (열어주어) 다이렉트로 수도가 함락된거 아닌가요?
@@용민김-e8d위 댓글이 말하는건 중원국가들의 고구려 공격방식이 훨씬 효과적으로 바뀌어 고구려가 비록 내분에 의하긴 했지만 수당과의 전쟁에 꽤 고생했다는 내용임
요동에 방어선 박아두고 비교적 후방인 평양을 안전한 수도로 생각했지만 수나라부터 서해로 바로 수군을 보내 평양성 직공이 가능해짐
사수전투로 유명한 당의 2차 침공도 백제가 멸망했던것처럼 10만이 넘는 군대가 한번에 서해를 건너 평양을 직격한거임. 비록 연개소문이 사수전투로 당군을 격멸시켰지만 고구려 입장에선 엄청난 위기였음
상대적 후방인 서해안 지역이 공격받는다는건 고구려의 몇안되는 곡창 지역이 공격받는다는 걸 뜻했고 결국 병력이 분산되어 당의 2차 침공 당시 고구려는 한강에서 평양까지 쌀배달온 김유신도 못막음
즉 아무리 내분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했다고 해도 수당의 수륙 양공 작전이 고구려의 국력을 엄청나게 소모시켰다는건 부정할 수 없음
@@Werner4voss 한나라도 평양성직공으로 고조선을 멸망시킴
문제는 고구려가 중앙집권 국가가 아니었다는 점. 그렇기에 수도직공이 가능했음. 임진왜란 때 선조처럼 도망치며 버틸 수가 없었음. 의자왕처럼 될까봐
강남 경제력은 당나라때도 쩔었나요? 전 송나라부터인줄 알았는데...
고려는 안망했음 우리가슴속에 살아있어여 우리가 고려 직계후손들 어차피 바로 발해 생기고 250년후에 고려 유민 후손 왕건이 다시 세웠고 전세계가 한국을 코리 라고 부르니깐 용비어천가에도 고려를 고리 라고 발음해여 진정한 통일은 고려 신라는 민족의식 통합도못햇고 이북지역은 간접통치햇고.. 이성계도 고려 이북 출시ㄴ이고.. 서울사투리도 개성어 삘나고 이북말.. 조선시대 문학 들도 황해도 말투로 써져있고
그래도 중국왕조+유목민족과 싸우면서 700년역사를 썼다는게 대단한듯.
중화와 신라의 역사로 쓰여진 역사서를 어찌 그대로 믿을수 있는가....
저는 고구려의 멸망은 연개소문이 원인이라고 봅니다
미래의 사람이 고구려 시대를 가서 고구려 삼국 통일한 미래보다 암울하지만..신라가 통일하고...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쳐야 하는 미래가 필요했기때문!!수백만 분에 1의 확률에서 오로지 이 역사를 거쳐야 하는 이유가 있어서임.이래야 미래의 타이머신을 만들어서 인류를 지킬수 있는 역사가 만들어지는 하나의 선택.
외부보다 내부가 위험.. 고구려 연남생놈이 고구려 제2수도 국내성포함 40개성이 항복해서 부여성쪽길과 남하길이 뻥 뚫림..
여러가지 이유지... 수나라 러쉬에 타격이 큰데 되돌릴만한 인구수도 농경기술도 부족하니... 거기에 연개소문이 욕심을 부려서 일할사람들도 부족해짐... 그 와중에 아들농사도 폭망...
욕심이 아니라 부응이었음
평양의 위치나 그런 건 학설이 많으니 차치 하더라도, 동영상 중에 국내성이 500년 간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설명은 너무나도 잘못 됐네요. 역사 유튜버 분이 이런 기본 적인 것도 모르시면.... 삼국 사기 한 번만 읽어 봤어도 다 알 수 있는 건데,
고구려는 의무려산에서 시작됨
근데 고구려 700년 역사중 저렇게 자멸할 일은 분명 그전에도 있었을듯
근데 그 타이밍에 나당연합이 침공을 한거고
인생은 타이밍이란게 천년전 역사에도 존재한 사실 아닐까
내분이 원래 많긴 했음
고구려가 삼국통일 했음 영토는 광활할지 모르나 정치 체제 기반은 지금 북한 중국보다 더 못한 사람 취급 받을수 있을듯
고구려도 백제나 신라처럼 특정 국경선 일대가 전부 바다로 에워싸여 있다거나 남쪽만을 주요 국경선으로 두는 형태였다면 광개토대왕 혹은 장수왕 대에 말씀하신 무력으로 밀어버리는 것이 가능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후의 역사가 꼭 고구려가 통일을 이뤄낼 만한 전개로 흘러가지만은 않았어요.
우선 광개토대왕 때에 통일하지 않은 것은 요동 일대를 아직 완전히 강역 안으로 두기 전이었고, 요동을 완전히 장악한 뒤로도 북쪽에서 얻어낼 것들이 훨씬 많았기 때문입니다.
철, 소금, 병마 등... 이건 남쪽보다 한반도 북쪽 혹은 요동과 만주 일대에 훨씬 풍부하기 때문에 남쪽은 고구려 입장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하지 않게 돌아갈 정도로 관리하고 북쪽을 공략하려던 거였죠. 비려나 말갈 등 제압해야 할 유목 민족들이 더러 있었다는 것도 이유고요. 그들이 수도인 국내성을 백제와 신라 이상으로 훨씬 더 위협할 존재인 데다 그들은 국가 형태를 띄고 있지 않으니 더 쉽사리 제압하는 게 가능했습니다. 이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남쪽은 고구려에 "불리하지 않게 돌아가게끔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어요. 그래서 백제 아신왕이 왜를 끌어 들여 신라 금성까지 유린했을 때 급히 5만 기병 보내서 구원했던 거고요. 당시 신라 수도인 금성(경주)이 털릴 정도였는데, 그걸 살려내고 왜군 전부 축출한 뒤 낙동강 넘어서 초기 가야의 맹주였던 금관가야를 털었죠. 이렇게 충분히 밀어놔야 다시는 신라(당시 신라의 위치는 고구려의 우방 국가이자 후방이 완전히 백제화되는 것을 막아줄 국가)를 쉽게 흔들지 못할 것이라 여겼으니까요. 이때 신라는 세력이 너무 약해 백제는 커녕 왜한테도 쩔쩔매는 수준이었는데, 고구려의 주적은 백제였고, 백제가 가야, 왜와 연합해 호시탐탐 신라 지역을 집어삼킬 궁리를 하고 있었으니, 고구려 입장에서는 신라를 살려놔야 후방이 안전해지는 겁니다. 백제가 신라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취한다면,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포위되었던 것 같은 국제 정세가 조기에 형성되었을 거예요. 고구려가 남방 정세에 있어 가장 경계했던 상황도 바로 이것이었구요.
그리고 장수왕이 결과적으로 평양 천도를 이루지만 이 계획은 광개토대왕 때부터 차근차근 준비되고 있었기 때문에 수도를 옮기려는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남쪽의 두 국가와 대전쟁을 치룬다는 건 말이 안 되고요.
장수왕의 경우는 평양 천도를 성공시키지만 오랫 동안 수도 귀족으로서의 지위를 누려 온 국내성파 귀족들의 반발로 최소 수 년 정도는 내전 혹은 그와 유사한 거센 저항에 부딪쳤을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때 고구려의 대외 활동 기록이 거의 전무하거든요. 내부에서 해결할 문제가 있어 해외 원정이나 영토 팽창을 하지 못했다는 거죠.
이렇게 장수왕이 평양 천도한 게 427년이고, 나제동맹은 고구려의 영향 하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신라와 고구려를 꺾고 싶어했던 백제의 연합으로 433년부터 554년(이때 나제동맹으로 한강 빼앗지만 신라 진흥왕이 뒤통수 치고 백제 성왕 죽임으로써 나제동맹 해체)까지 이어지는데, 장수왕 입장에서도 중원 왕조들과 북방 이민족들을 두고 함부로 나제 동맹군을 공격하긴 어렵죠. 한반도는 압록강 이북 대륙에 비해 폭이 상대적으로 좁고(선택할 수 있는 길이 제한적이란 뜻), 산지와 강이 많기 때문에 수비하는 쪽에서 준비를 잘하고 있으면 치고 들어가기가 어려워요. 그럼에도 장수왕이 백제를 한 번 확실히 꺾어야겠다고 결심했던 건 472년 개로왕이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함께 공격하자고 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475년에 한성을 급습해 개로왕을 죽임으로써 백제도 한성백제시대가 끝나고 충청도에 수도를 두기 시작하는 거죠. 장수왕이 당시 백제 수도였던 한성 함락 때 동원한 군사 수가 단 3만 명이고, 개로왕 처형 후 부랴부랴 군대 추가해 밀고 내려간 게 아니라 차근차근 확장해 나갑니다. 이유는 나제동맹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도 있지만 수도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남쪽으로 천도됐으니 평양 이남으로 좀 더 국경선을 넓혀 수도를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에요. 평야를 충분히 확보하고, 중국으로 가는 뱃길을 안정적으로 장악하려는 것도 이유였지만요. 어쨋든 한성 함락으로 장수왕이 백제를 크게 약화시킨 건 맞지만 백제와 신라 지역을 한 번에 집어삼킬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정적으로 영토 확장하면서 최대로 넓힌 게 우리가 역사 시간 때 본 충청도 아산만~경상도 죽령 지역까지의 영토입니다. 고구려가 세력을 확장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백제&신라 입장에서 보면 영토가 좁아진 만큼 더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로 내부 단결이 돼 더욱 강하게 저항하니 고구려 입장에서도 정말 작정하고 대군을 휘몰아 통일 전쟁을 시작할 것이 아니라면 굳이 그들과 전쟁을 벌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이 시점부턴 영토로나,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고구려의 위상과 국력이 백제와 신라를 확실히 앞섭니다. 하지만 고구려 단독으로 백제와 신라 지역을 단숨에 점령할 만큼 두 국가가 호락호락하지는 않습니다. 이 묘한 힘의 질서가 고구려가 더 이상의 전쟁 비용을 치르려 하지 않았던, 다르게 말하면 백제와 신라를 점령하지 못했던 이유입니다. 광개토대왕 때부터의 활발한 영토 확장으로 장수왕 치세 때의 고구려는 확고부동한 동방의 1인자라는 지위를 얻었고, 한반도 남부 세력으로부터 심각한 위협 또한 없으니 이제부턴 평화를 누리며 실익만 챙기면 되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 시기부터는 한반도 남부 정세에 있어 고구려에 큰 위협이 될 만한 상황이 펼쳐지지 않는 한 굳이 대군을 동원해 전쟁을 벌일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냉정하게 본다면 백제는 한성백제시대가 끝난 뒤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치더라도 신라는 이전에 비해 국력이 확실히 신장된 상태였다는 겁니다. 백제와 신라 각각의 국토가 고구려에 비해선 현저히 작으니 두 국가를 각각 상대할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는 있어도, 나제동맹군 전체를 고구려가 홀로 상대해야 했던 당시 상황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정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가 김유신과 김춘추가 그러했듯 다른 두 나라를 멸망시키고 홀로 이 땅의 주인이 되어야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품었다면 전성기 고구려가 역사적인 삼국통일을 이뤄내는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지만... 역사에 만약이란 없으니까요.
544년의 귀족 다툼 기록은 그 신빙성에는 정설이라 보기 힘듭니다.
일본서기의 기록으로 알고 있는데
일본서기라는 책 자체가 신빙성이 부족한 책입니다.
대체로 6세기 중반을 귀족연합정권이라 칭하지만 직 후 고구려 왕들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전쟁에 나가는 모습도 보이는데
이는 왕권이 군권을 장악한 모습으로
6세기 고구려의 국력 약화 근거로 보기 힘듭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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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개로왕의 편지 역시 고구려를 치기 위한 내용의 기록이며
북위는 빈번하게 고구려와 사신 교류를 했습니다. 북위가 그 백제의 내용에 답장 조차 하지 않은 사실은
당시 고구려와 북위가 서로 남쪽을 바라보며 그들의 국경 지역에 대한 우호를 맺었고, 그것인 즉 고구려가 내란 상태의 직면으로 보기 힘듭니다.
또한 단 7일만에 (개로왕이 북위에 편지를 보내고 3년만에 쳐들어가) 한성을 무너뜨린 고구려가 당시 귀족과 장수왕 같은 내전이 참혹했다믄 것 역시 사실로 보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나라의 멸망은 내부분열로 다 무너짐
중국의 통일이 큰 이유기도 할겁니다. 그리고 백제의 멸망과 연개소문 사후 자식들간의 세력다툼으로 국론이 분열된 것도 크고요. 하지만 한 나라가 망하고 그 민족이 30년만에 다시 나라가 만들어진 최초의 발해 왕국이 건국되기도 하였고요. 영류왕이 온건파였던건 오랜 전쟁으로 나라 사정이 말이 아니여서였을겁니다. 우선 전쟁이 일어나면 주변의 논밭은 다 태워버리고 성문을 잠그고 항전하는거니깐요. 이런게 지속되다보면 농사 지어야 하는 백성들이 징집되고 악순환의 반복이었을겁니다. 국내성파와 평양파의 지역감정도 국론을 분열시킨 원인이었을거고요. 또한 왕이 절대적인 권한을 갖는 고려, 조선때와는 다르게 여러 부족의 결집으로 이루어진 국가이다보니 자신들에게 분리하게 여겨지면 결국은 왕이 원하는대로 군사와 식량을 내주는 것도 쉽지 않았을거라고 생각되고요. 그래도 국력이 수십배 차이가 나는데도 오랜기간 버티고 수 차례 승리한 고구려는 우리의 자랑스런 역사라고도 생각되고요.
여기 저기 들은 거 합치신 것 같은데 왕이 절대적인 권한 갖는 고려, 조선이라 하셨는데 거기서 고려 빼셔야 합니다.
고려 왕이 수도 나가면 백성들 중 누가 강도가 되어 금품 갈취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국가였습니다.
단적으로 일본군 쳐들어왔을 때 선조가 의주로 피난가는 동안 백성들이 공격한 예 없죠?
고려는 거란이 쳐들어왔을 때 현종이 나주까지 튀어갈 동안 받은 산적들과 지방 귀족들의 공격이 어떠했는지는 아세요???
고려가 왕이 절대적 권한을 갖고 있었다고 어디 가서 말하면 무식하단 소리 들을 겁니다
내분이 제일 문제..
연개소문 쥬니어들이 개짓거리..
거기에 오래된 전쟁에 농사 나가리..
운도 없었고
타이밍이 신라 .나당에 유리했져
특히 백제도 망하고
고구려 멸망은 연개소문때문이고요. 강력한 왕권을 유지만 해도 고구려는 안망했을건데 연개소문이라는 쿠테타세력이 국정을 농단을 해서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였기때문에 망할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고대 역사는 왕권이 강하면 부흥하고 왕권이 약하고 신권이 약하고 꼭 망합니다. 왕권이 약하고 신권이 강하다는것은 이미 시스템이 무너졌다는겁니다. 군벌시대라고 봐야지 청나라말기도 많은 군벌들이 왕의 영향권에서 벗어서 지역을 통치했었지요. 역사상 어느시대든간에 신권이 강해지면 나라가 망할 징조로 보면 될겁니다..
연개소문이 고구려 귀족을 쓸어 버리고 왕도 죽이고 하니 전쟁시 가용 장수가 없었고 아들들도 별 장수기질이 없어서 연개소문 사후 아들끼리 내분으로 위쪽은 당에 붙고 아래쪽은 신라에 붙고 이러니 안망하냐. 연개소문 당대에는 안망했지만 망하는게 필연이었던거지.
고구려가 수나라를 먼저 쳤던 이유
수가 중국 통일 후 고구려에게 조공을 요구했으나 고구려 왈"니가 뭔데?" "한 대만 맞자"
고구려도 그때 거기 패권국인데 만주 지배권 다 뺏어 갈려고 하니까 그런거임요
근데 사실상 당나라만 막아오던 국가가 신라 당나라가 양각으로 공격하면 그것만으로도 멸망위기인데 내부사정까지 곱창이났으니....
한국인은 자존심 상하겠지만 고구려를 마치 자멸했다고 말하는건 역사를 왜곡하는거 그냥 당나라한테 결국은 패배해서 멸망했다 그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내분으로 멸망한거지 내분 없었으면 당나라에 지지 않았을것 이라는건 역사를 왜곡하는거라 생각함
고구려가 당나라 잘 막을때 고구려가 강해서 그런거지 그걸 가지고 중국애들이 당나라가 그당시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라고 우기면 그게 얼마나 추잡스럽나
그동안 연개소문의 3아들이 분열된 이유에 대해서 서로에 대한 질투심이라고 생각했는데 꾹내성귀족과 평양성귀족간의 세력 다툼이라는 관점이 신선하네요 여기에 살을 붙인다면 연남생의 부인이 국내성에 강한 세력을 가진 호족이고 연남생이 대막리지가 되자마자 부인의 출신인 국내성 호족을 회유하기 위해서 수도를 옮긴다던지 지방순시를 했었으며 여기에 반발한 평양성 호족이 결집하여 연개소문 2남을 필두로 연남생을 위시한 국내성의 유력귀족을 몰아낸건 아닌가 싶네요. 물론 소설 한번 지어봤네요
고구려가 멸망한 이유:1.내분과 분열(한민족 멸망공식) 2.두개의 전선(아무리 강국이라도 전선을 두개 만들면 힘들다) 3.명장및 성왕의 맥이 끊임(소수림왕,영양태왕,호태왕,장수태왕,문자명태왕,양만춘,온달,을지문덕,연개소문같은 위인들이 말년에 없었다.)
연개소문 죽고 2년뒤에 고구려가 멸망했으니 존나 말년인데
고구려는 아무리 북방 위협이 강했어도 어떻게든 최소한 한반도부터 통일하고 북방을 잡든지 했었어야됨. 삼국중에 가장 어리석은 나라가백제임
신라 혼자 힘으론 고구려 멸망 못시켜요 당나라도 혼자선 안되니 신라까지 끌어들였는데 당나라가 거의 다 해치웠고 신라는 밥숟가락 얹은정도로만 생각됩니다
연개소문의 사실상 막부체제였는데 연개소문이 죽고 자식들이 사분오열해버린 상태에서 나당연합이 침공...
근데 진짜 역사 교육 배우면서 왕이 힘이 쎈지 귀족이 힘이 쎈지는 뒤지게 알려주면서 어케 망했는지는 뒤지게 안알려줌 ㅡㅡ
고구려는 왜 신라와 백제를 냅뒀을까
장수왕대에 고구려의 남하를 두려워 한 신라와 백제가 나제동맹을 맺으니 고구려가 맥을 못춤. 그래서 이후로도 신라와 백제를 같이 상대하기에는 항상 역부족이라고 스스로 느껴서 둘 중 어느 한 나라를 정벌할 생각을 못함.
중국 왕조가 신라, 고려, 조선을 정벌하여 합병하기보다는, 그냥 놔두고 조공이나 받게 한 점과 비슷한 것임
@@gyusikkim 하긴 맨날 쳐들어오니 바뻣겠군요 백제나 신라는 그것에 조금 안전했던것?
고구려의 침략전쟁 주 타깃은 강대국인 중국이지 신라 백제같은 약소국이 아니었으니요
만약 양학한다 힘빼고 그러면 중국이 가만히 있겠어요?
@@wonsukchoi4523 광개토태왕 때도 안한거보면 그냥궁금해서요
화면첫장 삼국의 지도를 보니 일제식민사학을 바탕으로 만든것 같은데,유투브 책보고를 시청후 역사해석을 추천합니다.
민족의 방파제 고구려…요새 대조영 다시 보고 있는데 자멸이 딱 맞는 표현인듯
왕이 실권잃고 특정세력이 힘을 가지면 곧 무너졌다.
말라죽은거지
고구려 대중전쟁 패턴이 청야전술, 수성전, 역습섬멸인데
청야전술 하면서 토지 황폐화되고
수성전하면서 거점 황폐화되고
대규모 한타 하면서 인구 갈려나가고
이짓을 수십년 반복하고 갈려나가니 결국 말라죽은거
약해졌을때 나당연합 아닌가요?
현명하고 강력한 지도자는 정치 파벌이나 지역 군벌의 불만도 다 잠제우고 강성한 국가 체재로 운영하는데 연개소문 집권기에는 그게 먹혔지만 그 자식 놈들은 권력만 집착하는 소인배에 무능한 권력가들이라 고구려를 파멸로 이끌었다
내분이 젤크지ㅋㅋㅋㅋ 현재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않아 ㅋㅋㅋㅋㅋ
오늘날의 북한처럼 유연성이 없는 강경 일변도의 외교도 큰 문제라 봅니다
결국 통일된 중원의 힘, 그 힘을 효율적을로 활용할 줄 아는 상대에게 망한거
왜? 고구려가 부족벌 파벌 싸움으로 망했는지에 대해 이해가 안된다면, 지금 대한민국을 보면 됩니다. 이 작은 땅에 지역, 나이, 성별, 정치성향으로 아직도 편 갈라 싸우는데 아무도 해결 못하는 거랑 같아요. 이러다 나라 또 망하겠죠.
지금의 대한민국 같구나. 정치하라고 뽑은 정치인들은 자신들 표 얻으려고 맨날 상대 헐뜯기만 바쁘고 내전 아닌 내전만 쳐 하는데... 어휴
보장왕이라 연남산이 항복한게 아니라 고구려승려출신 신성이 항복한거임
역사좀 제대로 알고 얘기하셈
보장왕은 끝까지 싸우려했고
당으로 압송되고 돌아와서도 부흥운동 꽤하다가 잡혀간거임
고구려는 망한게 아님
대조영과 그 아버지가 다시 고려(고구려)를 계승해 이어졌고
중국도 전한,후한을 한나라로 보고 후한의 멸망이 한나라의 멸망으로 치듯
고려(고구려)는 668년이 아닌 926년 멸망임
발해라는 명칭은 당나라와 신라에서 고구려가 망하지 않은것으로 감추려한것뿐 일본이나 중국내 기록에도 분명 고려는 존재함 고려왕과 고려의 사신이.
고구려는 23대왕이었던가 2왕자와 3왕자의 왕위다툼 싸움으로 귀족 2000여명 죽었다는데요 배다른 이복왕자의 왕위다툼 그당시 중국은 5호16국 혼란시대
집안싸움.. .. 결정적으로 그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국가가 아니라 영토를 지키기위한 176개의 성을 다스리는 국가라서 망한거에요
살아남은 놈이 강한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