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문장으로 주름을 연습했다. by 안상훈
HTML-код
- Опубликовано: 5 ноя 2024
- 이미지 시대의 회화
이 종이를 손에 넣기까지 당신은 두 개의 문을 통과해야 했다. 두 개의 문은 외부에서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열어젖힌 문 하나와, 계단 바로 앞에 선 또 다른 문을 말한다. 그리고 이 종이를 받아 든 당신 앞에는 다른 문 하나가 더 등장한다. 거듭 등장하는 문은 예상 가능하던 공간을 한 번 더 비틀어 보이고, 시간 역시 기대하던 것과 다르게 흐르도록 한다.
안상훈 개인전 (반복되는 문장으로 주름을 연습했다)는 수 년 전 독일에서 완성한 작업들을 주로 선보이는 지하층과, 올 해 새로 그려진 작업들이 전시된 2층으로 나뉜다. 하지만 복수의 문들을 거치면서 강조되는 것은 두 작업 군 사이에 놓인 몇 해의 시간 차보다도, 전시의 특별하게 고유한 시간과 세계이다.
이미지 세계, 그리고 그 안에서 활성화되는 시간이 있다. 이미지 세계에서 시간은 가소적이다. 가소성(plasticity)이란, 고정되면서도 움직임을 전제로 하는 상태이다. 이미지 세계에서 시간은 포착되고 축적되지만, 다른 한편 시선이 돌아다니는 방향에 의해서 변모한다. 한 캔버스 안에서도 시선은 서로 다른 색, 획, 결을 발견하고 이동하며, 이를 따라 겹치고 흩어지는 시간의 궤적을 만든다. 마찬가지로 시선은 이 캔버스에서 저 캔버스로 옮겨지는 동안에도 새로운 시간을 조형한다. 같은 방식으로 작가는 전시장 안에서 이미지 세계의 시간을 운용한다. 캔버스 밖 임의의 제스처를 공간에 끼워 넣어, 수 년 전 만들어진 그림(기억)과 현재의 장소(상상)를 한 데 섞는 것이다.
빌렘 플루서는 『피상성 예찬』에서, 죽은 것이 다시 살아나기도 하고 삶 안에 죽음이 겹쳐 있기도 한 마술적인 것으로 이미지 세계의 시간을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인 시간을 언어의 세계에서 발견한다. 언어 세계에서 시간은 분리와 단절을 통해 만들어진 직선으로 간주된다. 가령, ‘어제’ 혹은 ‘그날’ 이라는 말과 이 말에 뒤이어 조직되는 문장에서, 시간은 ‘맺음과 그 다음’, ‘죽음과 새로운 시작’이라는 관념으로 결합한다. 언어 세계에서 시간은 경험의 구체성으로부터 멀어지고, 탈구되며, 점점 ‘추상적’이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이미지 세계는 언어 세계와 달리 구체적이며, 순환적이고, 유동적이며, 마술적으로 구성된다.
안상훈의 회화는 언어의 세계가 아니라, 이미지 세계에 속한다. 그의 그림 앞에 머물러 본 사람이라면, (누군가는 그것이야말로 완성이라고 여길) 형상은 지우고 캔버스를 덮은 색들이 엉키는 가운데 난데없이 검은색 획이나 보라색 면이 등장하는 이미지의 운동을 경험했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만드는 회화적 요소들은 다음을 예견하게 하거나 맺음을 시사하지 못하는 대신, 계속해서 이어지는 상상과 시선을 생성한다. 때문에 캔버스를 규정하고 지시하는 날짜나 문장(제목)이 있을지라도, 보는 이는 언어 세계에 속하는 분명하고 분절적인 의미(connotation)를 획득하지 못한다. 회화가 이미지 세계에 속한다는 말이 동어반복이 아닌 이유는, 회화가 언어 세계에 속하는 방식으로도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상훈은 의식적으로 주어진 회화가 언어 세계에 속할 (불)가능성을 실험하면서도, 이미지 세계로 향하기를 택한다.
최근 여타의 회화 실천들에서 두드러지는 기계적 자동성, 즉 특정한 플랫폼/소프트웨어의 알고리듬을 따르거나 무작위적인 수집-편집-복제의 메커니즘을 따르는 이미지 생성 방식을 주목해보자. 이러한 시도들은 직선으로 작동하는 시간과 의미를 급진적으로 무용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문자 세계가 아닌 이미지 세계로 회귀하는 동시대 경향을 증명한다. 안상훈의 시도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작가는 구글링으로 나타난 문자들을 임의로 수집하고 조합해 작품 완성 후에 붙일 제목으로 삼고, 휴대전화 사진첩의 이미 버려진 이미지들에서 출발하여 그림을 그리거나, 구체적인 형상이나 문자를 그려 놓고는 지워 나간다.
이윽고 문자 세계를 떠나, 그는 자기 눈 앞에 생경한 이미지와 제스처를 펼쳐 놓는다. 즉흥과 기계적 자동성을 오가는 운동이 캔버스 위에 쌓이고, 최종적인 화면에서도 그러한 운동은 유지된다. 작가가 캔버스 사방의 서로 다른 방향에서 몸을 움직여 그림을 그리고, 또 완성된 화면을 여러 차례 방향을 바꾸어서 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그가 캔버스를 어느 방향으로 돌려 보아도 만족스러운 상태를 찾는다고 할 때, 이미지는 다시 한번 선형적인 언어의 세계를 벗어난다. 말 그대로 어떤 관점이나 방향에서 보아도 열릴 수 있는 가능성은, 주어진 이 캔버스에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구체성을 보증한다.
전시의 제목, 작품 제작 시기를 가리키는 숫자, 더불어 이 서문의 문장들은 결코 작품의 시작점이 아니었거니와 종착점이 될 수 없다.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선, 뭉개 뭉개 피어오르는 형상, 벽을 타고 나타난 제스처들, 밝은 노란빛 사이로 뽀얗게 드러나는 맨 캔버스, 겹겹이 덧입혀진 질료의 층, 붓의 갈라진 결을 따라 만들어진 흔적, 하나의 색과 또 다른 색, 넓게 펼쳐진 색면과 그 위의 날카로운 선…… 그의 회화를 따라가는 시선이 발견하는 것은, 의미를 떠올릴 수 없음, 의미가 사라지는 상태, 적어도 둘 이상의 의미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는 상태일 따름이다. 그러한 상태는 추상적이기 보다 구체적인 실체로 당신의 눈 앞에 놓인다. 그 구체성 앞에 붙들림으로써 당신은 그림 앞에 좀 더 오래 머무르게 될 것이다. 펼쳐진 이미지의 세계에서, 시선의 궤적과 시간은 회화를 다시 구성한다.
글 허호정
프리즈에서 작품보고 감동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