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수지 2 단지 ( 지구촌 교회 인근까지 ) 돼지 농장도 있고 도로도 비포장 도로였죠 그리고 판교 가면 낙생고 주변은 ' 보약 팝니다 '이런 간판도 있었습니다 자세히 가서 보면 ' 뱀 고아서 드립니다 ' 이런거 볼수 있었어요 ' 흑염소 진액 팝니다 ' 이런것도 볼수 있었고요 그 당시 부동산 갔더니 거기 부동산 아저씨가 판교에 무슨 놀이동산이 생긴다고 하고 , 국제 학교 생긴다고 하고 , 강남처럼 개발될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진짜 분당 만큼 개발 되었어요 ... 어쩌면 분당보다 더 개발 된거죠 이건 강남 아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도시야사 몰아보기 하다가 유치원(선교원)때까지 살던 동천동 이야기 나와서 너무 반가웠습니다. 부모님이 동천동 입구에 있던 선경마그네틱 CC라 염광피부과 옆 염광교회 부속 선교원에 나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 - ) 옛풍스럽게 잘 꾸며진 교회선교원 마치고 골목골목 가구공장 사이에서 폐목 주워 놀던 또래 친구들 지금도 잘 지내고 있는지..
생거진천 사거용인」은 용인의 대표적인 설화로 세 유형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용인사람이 죽어 진천사람에게 접신하여 진천에 살다 죽은 유형, 두 번째는 용인 남편이 죽자 진천사람에게 재혼하여 진천에 살다 죽은 유형, 세 번째는 용인사람이 죽어 진천사람에게 접신하여 용인에 살다 죽은 유형이 그것이다. 『용인군지』에 실려 있는 「생거진천 사거용인」은 두 편으로 각각 1939년과 1972년에 채록되었는데, 두 본의 내용은 차이가 있다. 1939년에 채록된 이야기가 첫 번째 유형이라면, 후자는 두 번째 유형에 해당한다. 이후 첫 번째 유형의 이야기는 1983년과 2004년에 또 한 번 채록되었으며, 각각 『한국구비문학대계』1-9와 『경기민속지』에 실려 있다. 두 번째 유형의 이야기는 1995년에 세 번, 2004년에 한 번 채록되었으며, 『중부지역의 구비전승』과 『경기민속지』에 수록되어 있다. 세 번째 유형의 이야기는 1995년에 채록되어 『용인 중부지역의 구비전승』에 실려 있다. 이밖에 1980년에 「내 영혼 남의 육신」이라는 이칭으로 채록되어 『내 고장 옛 이야기』에 수록되어 전한다. [내용] 지금으로부터 4백여 년 전, 용인군 이동면 묘봉리에 한 사람이 살았다. 부모도 친척도 없는 사람으로 남의 머슴살이를 하였으나 워낙에 정직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신망을 얻었다. 마을 사람들은 나이 삼십이 되도록 장가를 못 간 총각이 안타까워 그와 처지가 비슷한 여자와 혼례를 치러 주었다. 부부는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부인은 매일 남편을 위해 십 리나 떨어진 산골짜기로 점심을 갖다 주었다. 남편이 점심을 먹는 동안 아내는 고생하는 남편을 돕기 위해 화전을 일궜다. 그 사이 피곤한 남편은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그런데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더니 산 밑으로 돌이 굴러떨어졌다. 놀란 아내는 서둘러 산 아래로 내려갔지만, 이미 남편은 돌에 치어 죽은 뒤였다. 아내는 대성통곡하며 “우리 남편을 살려 달라.”고 울었다. 이 소리를 듣고 마을 사람들이 찾아왔지만 수천 근이나 되는 돌을 치울 수가 없어 돌 밑에 남편을 묻었다. 죽은 남편은 저승에 갔다. 저승의 최참판이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묻자 아무개 몇살이라 했더니, “너는 아직 죽을 때가 안 됐다. 그러니 다시 내려가 살아라.” 하였다. 그리하여 명령을 받고 내려왔으나 시신이 큰 바윗돌에 치어 죽어 있으므로 접신할 수가 없었다. 용인사람은 할 수 없이 전국을 떠돌아다니다 충청북도에 있는 진천의 오백 석 부잣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그 집 아들이 사십이 안 돼 후사를 잇지 못하고 죽자, 그 집 어머니가 혹시나 아들이 살아날까 하는 마음에 일주일이 되도록 장례를 치르지 않고 있었다. 접신을 못하고 있던 용인사람은 죽은 진천사람의 신체에 가서 접신하여 살아났다. 살아난 용인사람은 매일같이, “용인군 이동면 묘봉리에 내 처가 몇 살이고, 아무 아무 해에 장가를 들었습니다.”라는 말만 반복하였다. 이를 이상히 여긴 어머니가 인마를 거느리고 묘봉리를 찾아갔더니, 그곳에 소복을 입은 여자가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부인에게 물을 한 바가지 떠달라고 하여 마신 후, 우는 자초지종을 물었다. “사실 저는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이 집에 시집왔는데 불과 일 년도 안 돼서 남편이 죽었습니다. 믿고 살 사람이 없어 이렇게 매일같이 웁니다.” 이 말을 들은 진천 어머니는, “그러면 당신은 내 며느리요. 당신 남편이 저승에 갔다가 우리 아들한테 접신을 했으니 우리 집으로 같이 갑시다.” 하고는 가마에 태워 진천으로 데리고 갔다. 진천에 도착해 보니, 남편의 얼굴은 다르지만 음성은 틀림없이 같았다. 이렇게 해서 용인사람은 진천사람이 되어 진천부인과 용인부인을 데리고 살게 되었다. 진천 본부인에게 두 아들을 낳고 용인부인에게서는 세 아들을 낳고 칠팔십 년을 살다가 죽었다. 아버지가 죽자 진천아들과 용인아들 사이에 아버지의 혼백을 서로 모시겠다고 분쟁이 일어났다. 결국 명관으로 이름난 진천군수한테 가서 송사를 하게 되었다. “살아서는 어디서 살았느냐?”고 진천군수가 물어 보자 아들들은 한 목소리로 “진천서 살았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진천군수는, “그래? 그럼 생거진천했으니 사거용인해라.” 하였다. 살았을 때는 진천에서 살았으니 죽어서는 용인에 살라는 판결이었다. 그래서 혼백을 용인아들이 모시게 되었다. 이로부터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이 나왔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과천/서울(우면동) 경계지점에 문제가 되는것은 소각장이 아니고 하수처리장 입니다. 과천3기신도시(선바위역주변), 과천주암지구 등 공공택지개발로 인구가 폭증하니 양재천 하류 주암쪽에 하수정화시설을 만들려고 하는데 건너편 아파트 주민들이 근처에 하수처리장 만든다고 반발하면서 서로 싸우는 중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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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수지 2 단지 ( 지구촌 교회 인근까지 ) 돼지 농장도 있고 도로도 비포장 도로였죠 그리고 판교 가면 낙생고 주변은 ' 보약 팝니다 '이런 간판도 있었습니다 자세히 가서 보면 ' 뱀 고아서 드립니다 ' 이런거 볼수 있었어요 ' 흑염소 진액 팝니다 ' 이런것도 볼수 있었고요 그 당시 부동산 갔더니 거기 부동산 아저씨가 판교에 무슨 놀이동산이 생긴다고 하고 , 국제 학교 생긴다고 하고 , 강남처럼 개발될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진짜 분당 만큼 개발 되었어요 ... 어쩌면 분당보다 더 개발 된거죠 이건 강남 아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도시야사 듣다가 김시덕 박사님 책 주문했어요 도시가 형성되기까지의 과정~알아가는 일상의 즐거움 입니다~ 따뜻해지면 삼프로 일프로에서 소개해주신 곳들 다녀보려구요 😀
염광피부과병원을 와이프의 아토피치료로 다녔을때 그때가 인생의 기회였는데 그걸 몰랐네요. 그쪽에 가구공장들 많았는데 엄청 쌌거든요. ^^그땐 여길 누가 사? 했는데. .
선좋아요 후감상합니다👍👍
도시야사 몰아보기 하다가 유치원(선교원)때까지 살던 동천동 이야기 나와서 너무 반가웠습니다. 부모님이 동천동 입구에 있던 선경마그네틱 CC라 염광피부과 옆 염광교회 부속 선교원에 나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 - ) 옛풍스럽게 잘 꾸며진 교회선교원 마치고 골목골목 가구공장 사이에서 폐목 주워 놀던 또래 친구들 지금도 잘 지내고 있는지..
사랑제일교회는 85억을 보상금으로 받고 지금은 563억을 요구하고있다고 하네요
그러니 당연히 안되는거죠
사랑제일교회 부지가 천평이 조금 안됩니다. 평당 계산해 보시면 답이 나옵니다.
동천동 골짜기가 한센병환자들의 마을터지요. 서울이나 수도권의 개발이 진행되는곳을 보면 가구단지나 공장단지의 이동동선을 쫒아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랑제일교회에 대해선 김시덕박사님 의견에 비공감!
생거진천 사거용인」은 용인의 대표적인 설화로 세 유형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용인사람이 죽어 진천사람에게 접신하여 진천에 살다 죽은 유형, 두 번째는 용인 남편이 죽자 진천사람에게 재혼하여 진천에 살다 죽은 유형, 세 번째는 용인사람이 죽어 진천사람에게 접신하여 용인에 살다 죽은 유형이 그것이다. 『용인군지』에 실려 있는 「생거진천 사거용인」은 두 편으로 각각 1939년과 1972년에 채록되었는데, 두 본의 내용은 차이가 있다. 1939년에 채록된 이야기가 첫 번째 유형이라면, 후자는 두 번째 유형에 해당한다. 이후 첫 번째 유형의 이야기는 1983년과 2004년에 또 한 번 채록되었으며, 각각 『한국구비문학대계』1-9와 『경기민속지』에 실려 있다. 두 번째 유형의 이야기는 1995년에 세 번, 2004년에 한 번 채록되었으며, 『중부지역의 구비전승』과 『경기민속지』에 수록되어 있다. 세 번째 유형의 이야기는 1995년에 채록되어 『용인 중부지역의 구비전승』에 실려 있다. 이밖에 1980년에 「내 영혼 남의 육신」이라는 이칭으로 채록되어 『내 고장 옛 이야기』에 수록되어 전한다. [내용] 지금으로부터 4백여 년 전, 용인군 이동면 묘봉리에 한 사람이 살았다. 부모도 친척도 없는 사람으로 남의 머슴살이를 하였으나 워낙에 정직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신망을 얻었다. 마을 사람들은 나이 삼십이 되도록 장가를 못 간 총각이 안타까워 그와 처지가 비슷한 여자와 혼례를 치러 주었다. 부부는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부인은 매일 남편을 위해 십 리나 떨어진 산골짜기로 점심을 갖다 주었다. 남편이 점심을 먹는 동안 아내는 고생하는 남편을 돕기 위해 화전을 일궜다. 그 사이 피곤한 남편은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그런데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더니 산 밑으로 돌이 굴러떨어졌다. 놀란 아내는 서둘러 산 아래로 내려갔지만, 이미 남편은 돌에 치어 죽은 뒤였다. 아내는 대성통곡하며 “우리 남편을 살려 달라.”고 울었다. 이 소리를 듣고 마을 사람들이 찾아왔지만 수천 근이나 되는 돌을 치울 수가 없어 돌 밑에 남편을 묻었다. 죽은 남편은 저승에 갔다. 저승의 최참판이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묻자 아무개 몇살이라 했더니, “너는 아직 죽을 때가 안 됐다. 그러니 다시 내려가 살아라.” 하였다. 그리하여 명령을 받고 내려왔으나 시신이 큰 바윗돌에 치어 죽어 있으므로 접신할 수가 없었다. 용인사람은 할 수 없이 전국을 떠돌아다니다 충청북도에 있는 진천의 오백 석 부잣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그 집 아들이 사십이 안 돼 후사를 잇지 못하고 죽자, 그 집 어머니가 혹시나 아들이 살아날까 하는 마음에 일주일이 되도록 장례를 치르지 않고 있었다. 접신을 못하고 있던 용인사람은 죽은 진천사람의 신체에 가서 접신하여 살아났다. 살아난 용인사람은 매일같이, “용인군 이동면 묘봉리에 내 처가 몇 살이고, 아무 아무 해에 장가를 들었습니다.”라는 말만 반복하였다. 이를 이상히 여긴 어머니가 인마를 거느리고 묘봉리를 찾아갔더니, 그곳에 소복을 입은 여자가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부인에게 물을 한 바가지 떠달라고 하여 마신 후, 우는 자초지종을 물었다. “사실 저는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이 집에 시집왔는데 불과 일 년도 안 돼서 남편이 죽었습니다. 믿고 살 사람이 없어 이렇게 매일같이 웁니다.” 이 말을 들은 진천 어머니는, “그러면 당신은 내 며느리요. 당신 남편이 저승에 갔다가 우리 아들한테 접신을 했으니 우리 집으로 같이 갑시다.” 하고는 가마에 태워 진천으로 데리고 갔다. 진천에 도착해 보니, 남편의 얼굴은 다르지만 음성은 틀림없이 같았다. 이렇게 해서 용인사람은 진천사람이 되어 진천부인과 용인부인을 데리고 살게 되었다. 진천 본부인에게 두 아들을 낳고 용인부인에게서는 세 아들을 낳고 칠팔십 년을 살다가 죽었다. 아버지가 죽자 진천아들과 용인아들 사이에 아버지의 혼백을 서로 모시겠다고 분쟁이 일어났다. 결국 명관으로 이름난 진천군수한테 가서 송사를 하게 되었다. “살아서는 어디서 살았느냐?”고 진천군수가 물어 보자 아들들은 한 목소리로 “진천서 살았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진천군수는, “그래? 그럼 생거진천했으니 사거용인해라.” 하였다. 살았을 때는 진천에서 살았으니 죽어서는 용인에 살라는 판결이었다. 그래서 혼백을 용인아들이 모시게 되었다. 이로부터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이 나왔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과천/서울(우면동) 경계지점에 문제가 되는것은 소각장이 아니고 하수처리장 입니다.
과천3기신도시(선바위역주변), 과천주암지구 등 공공택지개발로 인구가 폭증하니 양재천 하류 주암쪽에 하수정화시설을 만들려고 하는데 건너편 아파트 주민들이 근처에 하수처리장 만든다고 반발하면서 서로 싸우는 중 입니다
아 그게 우면동이군요
너무너무 재밌습니다~
저 사람들은 요구하는 게 너무 말도 안 되서... 아마 그 사실을 모르시는 듯
세입자들은 권리금 내고 들어와서 장사하는데 그게 재개발 재건축하면 다 사라집니다...이주보상금 조금 받고 끝!! 다 먹고사는 문제가 걸려있어서 그렇죠
이프로님 최준영박사 자랑스러워하던 시절 떠 오르네요
요즘 "낙" 입니다^^
교회를 편들기보다는 강압적인 국가개입의 획일적인 철거를 비판하시는듯해요! 옛 모습으로 남아있을 권리!! 에 초점인듯요
도시 개발만이 아니고 천주교 성지 만든다고 순례자들이 은혜입은 절 암자를 밀어버린 사례도 있어요 그것이 성지가 과연 될까한다는.
전광훈 요구 560억 토지보상 85억 이정도면 교회 존치가 아니라 돈 아닌가요?
우와~ 다음번엔 저희 동네 오시는군요
용인 에버라인 어정역 주변도 한센인 정착촌이었습니다.
염광의원 수지 개발전에 성남에서 1번 버스 다녀서 기억이 나네요
교회만빼고한다고 뉴스나왔어요. 그래서 교회가 받은 돈을 내놔야한데요.
진관동은 예뻤는데
골목도 꽃이랑 나무들도 예쁘고
김프로님 말씀하신 카페는 '카페랄로' 네요~
맞습니다
그린벨트제도는 초헌법적이다
자본주의적인가?
와 지금 수지 동천동에 살고 있는데 염광의원과 한빛초가…
그린벨트를 풀라니? 독특하다니요? 국외 사례가 많지 않나요?
꿀잼
시위마다 민#&총.철₩민연합.등등이 개입해서 힘들죠.
뭔가 큰걸 얻어줄것처럼 주민들을 조종. 제대로 안되면 피해는 주민 몫.ㅜ
대장동 신봉동 개발 기대되네요
사랑 뭐시기 교회는 모든 교인들이 순교해도 좋지 아니한가?
용인,동진원
돈 더 달라고 징징거리다가 몰래 투기하다 걸리고 ㅋㅋ 의도한 알박기는 아니겠지만~
하하하하하하하
토지공개념?
사랑제일교회 신자신가요? 탄탄한 스토리에 정무적 감각이 뛰어나서 잼나게 봤는데. 사랑제일교회 애기에는 감정이 섞이시는듯 ㅎㅎ
부유한 지역에서는 위치,크기 협의해서 새로 지어주거나 돈으로 보상해서 진행하는데 재개발지역에서는 쉽지않아보이네요.비난만 하고..조그만 집도 돈에 혈안이 되서 싸우면서..
떼쟁이들이 깽판쳐서 그런거지
몽환적
세종연구소는?
국립공원안에 있는 절들은, 스쳐서 곁으로 지나가는 국민들에게도 문화재관람료라는 명목으로 돈받게 해주는데 교회는 헐값에 쫒아내라고하는건 형평성에 안맞는처사인듯 합니다.
그린벨트 다풀어야해 그리고 정부는 대대적인 택지 개발 신도시 개발 손때고 언제까지 강제로 개발 하냐 그놈에 개발 뭐가좋타고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