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역사] 무사도의 정신, 추신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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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19 янв 2025

Комментарии • 37

  • @cacophony236
    @cacophony236 Год назад

    47로닌이니 하는 영화가 많던데 다 이 내용이었군요. 예전에 보다가 만 후카사쿠 긴지의 아코성 어쩌고 하는 영화도 이에 관련된 것이었구나.

  • @shikin9644
    @shikin9644 Год назад

    저 겐로쿠 아코사건이 당시 화제가 된 이유는 비록 그들이 막부의 판단을 거스르는 일종의 하극상을 일으켰으나 이게 사도(부시도)에는 지극히 부합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함
    분위기따라 여론따라 잘 한 거라고 장하다며 살려주기에는 권위가 안 서겠고 또 괘씸하다고 죽이자니 욕이란 욕은 다 먹겠고...
    결국 할복자살시켰지만 아마 결정을 내려야 할 당시에는 막부도 골치가 아프지 않았을까 싶음
    무사의 나라 일본이었기 때문에 언젠가 한번은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사건이라고 봄

  • @sjeoendiowksbsjsel
    @sjeoendiowksbsjsel 5 лет назад +5

    에도 막부시절에는 유럽의 봉건제 같은 지방분권 사회 아니었나요? 다이묘가 독자적으로 영지를 다스리고 쇼군은 간섭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추신구라는 어케 다이묘도 그렇고 휘하의 사무라이들도 그렇고.. 막부의 쇼군이 할복을 명령하니까 제깍제깍 할복하는게 좀 의아한데요.
    마치 무슨 강력한 중앙집권제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내가 생각했던 막부시절이랑 좀 다른 느낌
    봉건제 막부 시절에도 쇼군의 권위는 그렇게 강력했던 건가요

    • @조현준-h2k
      @조현준-h2k 5 лет назад +10

      아시는대로 다이묘가 다스리는 지방영지에 대한 간섭은 하지 않는것을 원칙으로 삼고있었습니다. 일본이 이 제도를 벤치마킹한 중국에서도 황제국이 번국의 상전이지만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는것처럼 말이죠.(명나라-조선)
      그런데 그럼에도 쇼군, 즉 정이대장군은 모든 사무라이의 수장입니다. 속으론 어떨지몰라도 원칙적으로는 모든 사무라이는 쇼군의 부하입니다. 특히 밑바닥 낭인들이 아닌 추신구라사건의 번주쯤 되는 다이묘로 가면 이런 관계가 극명하게 드러나죠.
      추신구라사건(아코사건)에서 아사노는 번주였음에도 쇼군의 막부를 위해 일하는 처지이기도 했고, 심지어 임무 수행중 에도성에서 칼을 뽑는 중죄를 저질러 상관을 살해했으니 심각성은 알만하죠.
      (사실 하타모토는 3000~5000석쯤 되어야 다이묘와 동급이라고 하겠지만 여기선 아사노도 채 수십만석이 되지 않는 작은 번주였던데다가 에도에서 근무하는 레벨상으로도 키라가 아사노보다 위에였죠. 비교하자면 대기업 과장-하청업체 사장같은느낌.)
      흔히 일본의 무가사회를 유럽의 봉건사회에 빗대 이해하시는데,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이야기입니다. 실제로 3번 있었던 무사정권에서 1번째와 2번째의 가마쿠라, 무로마치에서는 쇼군과 막부가 별다른 권위를 지니지 않는 예비군 동대장같은느낌이었다면, 에도막부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구축한 완성형 막부체제였습니다. 그래서 다른건 몰라도 '에도성에서 칼뽑지마라' 정도의 무사정권 대원칙을 어기는것에대한 처벌은 확실하게 할 수준의 권위와 행정력을 모두 갖추고있었습니다.
      그런 주종관계에 있음에도 아사노가 칼을 뽑았던 이유는 (개인적인 관점,판단에서) 모욕을 당했을 때 이를 참고 넘어가면 사무라이가 아니라는 당대의 통념에 기인합니다. 가령 지방의 사무라이들이 서로 어깨빵을 당하고도 서로 질까봐 무서워서 도망갔다는 소문이 퍼지면 이는 개인적으로는 매장당할일이고 가문에도 큰 수치였죠. 그러니 번주쯤되는 지체높은 사무라이에게 이는 참을수없는 모욕이었을것입니다.
      하지만 에도막부에서는 이러한 사무라이의 통념을 알고있었음에도 막부의 권위를 유지하고 전국시대의 유산을 청산하고자 번주에게 할복을 명하는 리스크를 감당했고, 아사노 역시 그 정도의 각오는 되어있었기에 할복을 실행했습니다. 문제는 아사노의 가문이 개역당했다는 것인데, 이는 멸문까지는 아니더라도 더 이상 사무라이, 특히 지체높은 번주노릇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번주 밑에서 일하던 가신들(비서들)까지 모두 실직자를 만드는 일이기에 막부로써는 부담이 컸을 것이지만 막부는 이를 다급히 시행해버리죠. (그래도 번주 본인이 할복을 했으니 가문은 동생이 잇게 해주고, 아사노 가문은 하타모토, 즉 막부 비서관으로 채용해줘서 체면치레는 하게 해줬습니다)
      그런데 이런 리스크를 통해 기강을 잡고자 했던 막부의 의도와는 달리 아사노 휘하에서 일하다가 졸지에 실직자가되어버린 가신들은 집단으로 칼부림을 하여 또다시 막부의 권위를 실추시키는데, 막부는 아예 이 사건 자체를 덮어버리고 더이상 복수니 뭐니 하며 칼부림을하는 부담스러운 풍습을 없애버리고자 이들 모두에게도 할복을 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굳게 다짐한채 일을 벌였고, 이에 할복도 불사했죠. 할복이라고 해도 실질적으론 배를 가르기도 전에 목을 쳐버리는 사실상 참수형에 가까운 것인데, 이들 중 일부는 정말로 자기 배를 갈라버리는걸 보고 막부사람들도 기겁했다고합니다.
      말이 길어졌는데요, 결국 요약해보자면
      1. 지방분권으로 내정간섭은 안하는 사회 맞습니다
      2. 그래도 모든 사무라이는 쇼군 부하입니다.
      3. 쇼군의 명령을 어긴다면 사무라이가 아니게 되죠.
      4. 그래서 쇼군&막부가 작정하고 할복시키면 냉큼 따라야했죠.
      5. 하지만 할복 자체는 막부의 권위를 세우는 측면도 있지만, 할복자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자신의 행위가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떳떳하다는 증명이될수도 있기에 많은 지사들은 할복을 기꺼이 실행하였답니다.
      도움이 되었을까요?

    • @hyoobee
      @hyoobee 4 года назад +1

      봉건제를 기초로 했으나 오닌의 난과 일제 사이에 그나마 표면적으로라도 중앙집권을 구축했던 게 에도막부였으니까요.
      다만 완벽했던 건 아니어서 저~ 멀리 구주나 사국지방까지는 행정력이 닿진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이건 일본사를 좀 알아야 하는데, 본래 일본 서부는 율령시대가 끝난 이후에는 중앙정부의 통제가 잘 미치지 않았던 지역이었고 풍신수길도 그랬고 덕천가강마저 일본의 통일 과정에서 서일본의 가문들을 표면적으로만 복속시켰을 뿐이었기 때문이죠)
      덕분에 무진전쟁 당시 유신삼번이라고 불리우는 살마 장주 토좌(지금은 각각 녹아도현 산구현 고지현이 되었죠)가 모두 이쪽지역에 위치해있습니다.

    • @Odyss2023
      @Odyss2023 2 года назад +1

      번이 약 270개 즉 다이묘가 270명이라
      힘이 약한 다이묘는 막부 맘대로 처분할 수 있는데
      힘깨나 쓰고(경제력, 군사력) 멀리 떨어진 다이묘는 막부도 함부로 못건드립니다.
      조폭조직 생리하고 비슷합니다. 원리원칙보단 힘과 파벌이 우선입니다.
      그래서 막부 말기에 조슈와 사츠마번이 드디어 뒤집어 엎죠.

    • @doki6980
      @doki6980 2 года назад

      참근교대제 검색해보세요 , 영지에 사는거 부터 , 성벽 수리까지 1도 마음대로 할수있는거 없었습니다 쇼군허락없이는. 그래서 메이지 유신때 조슈번 지사들이 죽자고 달려들었죠

    • @호두구속
      @호두구속 6 месяцев назад

      그때는 전국시대고 도쿠가와가가 일본열도를 통일한 에도 막부는 말만 봉건제인 중앙집권 사회로 접어듭니다. 영주들은 일년은 자기 영토 일년은 에도에서 생활(사실상의 인질) 생활을 했습니다

  • @수오채널
    @수오채널 2 года назад

    막번체제(1619)는
    에도막부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1581~1632) 연간인
    겐나5년(1619년)에 실시한것으로
    말그대로 쇼군(장군)이 막부의 직할지만
    다이묘는 영지를 다스리는 체제를 말한다

  • @JAEWANKIM-k3e
    @JAEWANKIM-k3e 6 лет назад +5

    도쿄 센가쿠지 가보시면 실제 무덤이 있음

  • @역사잼
    @역사잼 6 лет назад +5

    키라 저거 돈 밝히다가 지도 죽고
    가문도 사실상 멸문함 ㅎㅎㅎ

    • @ssangchuuuu
      @ssangchuuuu 6 лет назад

      키라의 핏줄은 우에스기 그리고 호조가문으로 살아남죠.

    • @pisik_like
      @pisik_like 6 лет назад

      데스노트잘못써서?

    • @의사-s3g
      @의사-s3g 4 года назад

      @@pisik_like .

    • @hyoobee
      @hyoobee 3 года назад

      당시 기라 고즈노스케는 에도 저택에서 가문을 아들한테 넘겨준 후에 은퇴 상태였는데, 아들도 아버지 집에서 칼부림난 상황에서 뭘 했냐고 불효했다고 해서 유배형..
      그리고 기라 직계는 끝장나고, 방계가문에서 기라성을 허락받아서 대정봉환까지 쭉 가죠.. 그래도 무로마치 시대부터 이어지던 뼈대있던 가문이었어서요.
      가문의 격, 벼슬의 위치, 나이 모두 기라가 아사노 다쿠미노가미보다 압도적이었습니다. 다만 기라가 하타모토고 아사노가 다이묘였다는 차이만 있을 뿐.
      제가 아사노였다면 모욕을 당했어도 가족들과 가신들을 생각해서 끝까지 참았을 거 같네요.

  • @함께라면-t2u
    @함께라면-t2u 6 лет назад +5

    막부의결정이문제였네.

  • @lonewolf1014
    @lonewolf1014 6 лет назад +3

    로닌의 난

  • @增田千和增田千代增田
    @增田千和增田千代增田 3 года назад

    아사노 나가노리,오이시 구라노스케

    • @hyoobee
      @hyoobee 3 года назад

      보통 영주나 가로나 하타모토정도 되면 높으신 분이라 휘로는 안 부릅니다. 보통 다쿠미노카미랑 구라노스케, 고즈케노스케 이런식으로...

  • @냐금-n8j
    @냐금-n8j 3 года назад +1

    설명이 좀 부족하네요 디테일도 아쉽고 아코로닌이 기라를 토벌할수 있었던건 아사노가 기라의 이마에 흉터를 만들어서 아코로닌이 기라를 죽일수 있던겁니다. 그 전까지 아코로닌은 기라가 누군지 몰랐어요. 이 이야기가 꽤 중요한데 빠졌네요. 카케무사 얘기까진 바라지않지만

  • @사람-h5b4z
    @사람-h5b4z 3 года назад

    홀로라이브 구라 볼려고 구라쳤는데...

  • @천병문-g3l
    @천병문-g3l 3 года назад +2

    일본이라.과연당신들이천하에중심이라말할수있나
    이강간범들아

  • @user-Korean-Samurai
    @user-Korean-Samurai 5 лет назад +14

    박정희 때도 주신구라가 있었지. 전두환에의한 12.12 결단. 어릴적 일이지만 조선에도 의리가 있었다는게 지금도 자랑스럽다.

    • @gghk9755
      @gghk9755 5 лет назад +6

      12.12 군사반란. 결단은 무슨.

    • @user-Korean-Samurai
      @user-Korean-Samurai 5 лет назад +15

      @@gghk9755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군사반란 성공 못했으면 김대중대통령됬고. 언론자유. 주48시간 근무제도입돼서 경제 폭망하고 공산화 안됐어도 필리핀수준으로 살고있을것임. 어느것을 선택할거요??

    • @gghk9755
      @gghk9755 5 лет назад

      @@user-Korean-Samurai ㅎㅎ, 재밌네. 역사에 가정은 없다는것도 모르시고.
      그리고 상상속의 그 경제 폭망이라면 비슷한게 97년도에 하나 있었던걸로 기억하는데,,,
      그리고 사람이 사는데 돈(경제발전)이 먼저인가, 자유(민주주의)가 먼저인가는 사람마다 다른거라 이건 패스하겠습니다.

    • @user-Korean-Samurai
      @user-Korean-Samurai 5 лет назад +10

      @@gghk9755 그럼 오늘 부터 샤워 냉수로 하고... 아니 한달에 한번 대중목욕탕가서 그걸로 샤워 끝내요. 그리고 대변후 신문지 구겨서 뒤처리하고. 이쯤되면 민주화와 경제 어느게 우선이고 필수인지 그때 다시 만나 토론 해요. 두달 후에 연락줘요.

    • @김수인-b3o
      @김수인-b3o 5 лет назад +3

      @@user-Korean-Samurai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