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이란이 친밀했던 시기는 1978년 12월까지이다. 즉 팔레비 왕조(1979.1월 미국으로 망명)때까지인데, 이 때까지만 해도 이란은 親서방 국가였고, 서구의 자유 문명을 지향하는 사회였으며, 미국이 원유를 수입하는 핵심 국가였다. 親美 국가인 한국 역시 이란에서 원유를 수입했다. 중동 전쟁(제4차 중동戰, 욤 키프르戰)이 발발해서 원유價가 1973년부터 폭등했을 때 이란은 1975년에 원유가를 인하했다. 한국은 이 덕을 봤다. 그래서 우호의 상징으로 1977년 각각 서울에 테헤란路, 테헤란에 서울路라는 도로명을 부여했다. 하지만, 1979년 2월 신정일치 종교 독재 혁명이 성공해 팔레비 왕조가 붕괴하면서 이란은 反美국가로 돌아 섰고, 12월에 이란내 한국인을 전원 추방했다. 또한, 한국에 수출하는 원유 가격을 1년에 2번이나 인상해서 한국 경제에 타격을 줬다. 그후 한국도 미국을 따라서 다른 중동 국가들로 원유 수입線을 옮겼다. 1975년 일시적으로 원유인하의 혜택을 한국이 본 것은 미국 덕분이지 한국에 대한 산유국 이란의 사랑? 측은지심? 시혜?의 결과가 아니다. 무심코 절 모르고 시주하듯이 고마워해야 할 상대를 이란으로 잘못 생각하는 愚를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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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이란이 친밀했던 시기는 1978년 12월까지이다. 즉 팔레비 왕조(1979.1월 미국으로 망명)때까지인데, 이 때까지만 해도 이란은 親서방 국가였고, 서구의 자유 문명을 지향하는 사회였으며, 미국이 원유를 수입하는 핵심 국가였다. 親美 국가인 한국 역시 이란에서 원유를 수입했다. 중동 전쟁(제4차 중동戰, 욤 키프르戰)이 발발해서 원유價가 1973년부터 폭등했을 때 이란은 1975년에 원유가를 인하했다. 한국은 이 덕을 봤다. 그래서 우호의 상징으로 1977년 각각 서울에 테헤란路, 테헤란에 서울路라는 도로명을 부여했다. 하지만, 1979년 2월 신정일치 종교 독재 혁명이 성공해 팔레비 왕조가 붕괴하면서 이란은 反美국가로 돌아 섰고, 12월에 이란내 한국인을 전원 추방했다. 또한, 한국에 수출하는 원유 가격을 1년에 2번이나 인상해서 한국 경제에 타격을 줬다. 그후 한국도 미국을 따라서 다른 중동 국가들로 원유 수입線을 옮겼다. 1975년 일시적으로 원유인하의 혜택을 한국이 본 것은 미국 덕분이지 한국에 대한 산유국 이란의 사랑? 측은지심? 시혜?의 결과가 아니다. 무심코 절 모르고 시주하듯이 고마워해야 할 상대를 이란으로 잘못 생각하는 愚를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잘 이해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지선할매여행기 ,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