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 한국사 156회] 고려 고수 vs 송나라 고수 바둑대결 문종 송과 국교를 맺다! feat 고려판 타짜 스토리 / 양반전시과 경정전시과 양전보수법 예성강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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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5 дек 2024

Комментарии • 56

  • @stevenrhee8398
    @stevenrhee8398 26 дней назад

    저때 수출품이었던 인삼은
    사실 산삼이었을겁니다.
    산삼을 인공재배한것이 인삼인데 그 기술은 조선때와서야 가능했으니까요.

  • @박영귀-k9x
    @박영귀-k9x Год назад +1

    펙스토리 님 평소 역사도 좋아 하는데 넘 재미있게 설명해 주시네요 재치 위트 그림도 같이 있어니 더 잼있어요

  • @jowoohada
    @jowoohada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문종만큼은 후사를 남겼어야하는데

  • @rin4827
    @rin4827 8 месяцев назад

    제가 찾아봤습니다 김남원 어쩐지 이상하게 안 나오더라니 김난원이 맞습니다 잘못 쓰셨어요

  • @이름없음-w6n
    @이름없음-w6n 8 месяцев назад

    거래품목에서 볼수있듯, 대부분 사치품 위주이고 그때당시의 국제교역이라는것도 결국 현대 자유무역적 시각에 기반한 재해석에 가까움... 실상은 외교 교류하는 와중에 간간히 귀족들 사치품 교역이나 소규모로 하는것이라 봐야함.

  • @canopusmr.1748
    @canopusmr.1748 2 года назад +8

    문종. 매력적이네요. 나래이션의 센스에 은근 빵빵 터지네요.

  • @kimsun8275
    @kimsun8275 Год назад +1

    ㅋㅋㅋ관리는이후 해를보지못했다 아 너무 재미따~ㅋㅋㅋㅋㅋㅋㅋ

  • @history2281
    @history2281 2 года назад +14

    태평성세. 국력 향상. 문화 융성. 백성 부유. 상업 활발. 영토 확장. 그야말로 태평성대.

    • @vivivi3865
      @vivivi3865 2 года назад +6

      고려 문종은 고려 역사상 영토를 가장 크게 확장시킨 임금입니다... 숙종~예종 때 별무반을 설치하고 17만 대군을 동원하여 9성을 쌓았다면 이미 그 이전 문종 때부터 여진의 수많은 영역을 기미지배하면서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습니다...
      "만일 국경을 정하고 관방을 설치하려 할 경우... “광활한 땅(壤地)의 넓이가 끝이 없고 번인(제후국의 백성) 가구도 넓게 거주하고 있는 만큼 변방 끝까지 모조리 요새를 설치할 수 없으니, 요청하건대 영외의 여러 번인이 모두 우리의 주현이 됨을 기다려서 그 뒤에 점차 멀리 있는 번인까지 미치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고려사, 문종 27년 6월 23일 기사』

      "귀부(영토를 바치며 항복)해 온 동여진인들을 귀순주(歸順州)에 소속시키다... 한림원에서 아뢰기를, “동여진의 대란(大蘭) 등 11개 내부자(內附者)들이 11개 주(州)가 되기를 요청하니 각각 주기(朱記)를 하사하고 귀순주에 소속시키십시오.”라고 하자, 이를 받아
      들였다." 『고려사, 문종 27년 9월 4일 기사』
      "요나라 황제가 말하길, 고려는 바다 모퉁이에 사직을 세워 그 영토가 북쪽으로는 용천(龍泉)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압연(鴨緣)에 닿았으며..." 『고려사, 숙종 2년 12월 13일 기사』

      *용천): 발해(渤海)의 상경(上京) 용천부(龍泉府)를 가리킨다. 용천부는 지금의 중국 길림성(吉林省) 용안현 동경성(東京城)이다.

    • @history2281
      @history2281 2 года назад +1

      @@vivivi3865 제가 밑 댓글에서 다른 분께 설명한 글과 취지가 동일하군요. 문종이 영토를 넓힌 것은 맞지만, 과연 두만강을 넘어갔는지에는 의문이 있습니다. 금사 고려열전에 따르면 고려(기미주)와 여직(여진) 사이에 을리골령(현 길주)에 웅거하던 부족이 고려를 배반하고 완안부에 투항했습니다. 즉 길주가 고려 기미주의 최북단이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고려사에 의하면 소지즐로부터 700리나 떨어진 곳에서도 귀부를 청했지만, 받아들이지 않고 가까이 있는 애들부터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700리 떨어진 부족이 귀부했는지 아닌지는 모르는 것이죠. 즉 기미주의 범위를 아직 모르기 때문에 그 범위가 두만강을 넘어간 것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선이 더 강합니다. 만약 문종이 길주까지 영토를 넓혔다면, 경효왕(공민왕)이 쌍성부를 수복하고 길주까지 넓혔으니 공민왕이 가장 영토를 크게 넓힌 왕이 아닐까요?

    • @vivivi3865
      @vivivi3865 2 года назад

      ​@@history2281 글쎄요, 조선 전기 세종 때의 기록을 보면 그 "길주"가 그 "길주"인지도 확실하지 않거니와 그 기사를 꼭 길주가 고려 경계의 최북단이라고 해석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여러 기록들을 종합해 봤을 때 최북단은 공험진으로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말씀하신 "소지즐로부터~"의 기록은 문종 27년 6월의 기사인데, 동년 9월에 11개의 주를 귀순주에 소속시켰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관련 기록을 시기별로 정리해 본다면
      ①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동북 변방(東北邊) 15주(十五州) 밖(外)의 제후국 백성(蕃人)들이 잇달아 귀부(歸附: 영토를 가지고 와서 항복)해 오면서 우리[고려] 군현(郡縣)에 편입시켜 달라는 간청이 지금에도 끊이지 않으니, 이는 실로 종묘와 사직의 신령 덕분이다. 재신(宰臣)으로 하여금 먼저 종묘와 사직에 사유를 고하게 하고, 멀고 가까운 번인들이 모두 귀순하기(畢納)를 기다려서 주현(州縣)을 넓혀 정한 뒤에 몸소 종묘와 사직에 감사를 행하려고 한다. 그 행례(行禮)와 태자가 대행하는 의식 절차를 유사(有司)는 자세히 논의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고려사, 문종 27년 4월 3일 기사』
      ② "삼산(三山)‧대란(大蘭)‧지즐(支櫛) 등 9개 촌(村)과, 소을포촌(所乙浦村) 번장(蕃長) 염한(鹽漢), 소지즐전리(小支櫛前里) 번장 아반이(阿反伊), 대지즐(大支櫛)과 나기나(羅其那)‧오안(烏安)‧무이주(撫夷州)‧골아이(骨阿伊) 번장(蕃長) 소은두(所隱豆) 등 1,238호(戶)가 와서 우리[고려]의 호적에 편입(附籍)하기를 요청합니다. 대지즐로부터 소지즐(小支櫛) 요응포(褭應浦) 해변까지는 700 리에 걸쳐 장성이 수축되어 있으며 지금 여러 제후국(諸蕃)들이 줄을 이어 귀부(歸附: 영토를 가지고 와서 항복)해오고 있는 마당에 관방(關防)을 설치하여 그들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고려사, 문종 27년 6월 6일 기사』
      ③ "만일 국경을 정하고 관방을 설치하려 할 경우... “광활한 땅(壤地)의 넓이가 끝이 없고 번인(제후국의 백성) 가구도 넓게 거주하고 있는 만큼 변방 끝까지 모조리 요새를 설치할 수 없으니, 요청하건대 영외의 여러 번인이 모두 우리의 주현이 됨을 기다려서 그 뒤에 점차 멀리 있는 번인까지 미치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고려사, 문종 27년 6월 23일 기사』 ← 말씀하신 내용
      ④ "9월 갑진 한림원(翰林院)에서 아뢰기를, “동여진(東女眞)의 대란(大蘭) 등 11개 촌의 내부자(內附者)들이 빈주(濱州)‧이주(利州)‧복주(福州)‧항주(恒州)‧서주(舒州)‧습주(濕州)‧민주(閩州)‧대주(戴州)‧경주(敬州)‧부주(付州)‧완주(宛州) 등 11개 주(十一州)가 되기를 요청하니, 각각 주기(朱記)를 하사하고 귀순주(歸順州)에 소속시키십시오.”라고 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고려사, 문종 27년 9월 4일 기사』
      ⑤ "동방 제후국(東蕃)이 반란을 일으키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문정(文正)을 판행영병마사(判行營兵馬事)로,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최석(崔奭)과 병부상서(兵部尙書) 염한(廉漢)을 병마사(兵馬使)로, 좌승선(左承宣) 이의(李顗)를 병마부사(兵馬副使)로 삼아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가서 그들을 치게 하였는데, 431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밤에 길을 나누어 적의 소굴로 곧장 진군해 이른 새벽에 도착했는데 북소리와 고함소리에 땅이 진동하니 적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군사들을 휘몰아 맹렬히 공격해 392명의 목을 베고 장수 39명을 사로잡았으며 소·말 1백여 필을 노획하였다. 적이 버린 무기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쳐부순 촌락이 무릇 십여 곳이었다. 『고려사 열전, 문정』)" 『고려사, 문종 34년 12월 1일 기사』
      ⑥ "이 달에 동방 제후국(東蕃) 반적의 우두머리 장향(張向) 등 14인을 산남도(山南道)의 먼 지역으로 유배 보냈다." 『고려사, 문종 36년 8월 미상 기사』
      이렇게 되는데요. ①의 기록을 통해 당시 문종이 동북 15주 "밖"의 지역까지 확장 의사를 내비치는 등 영토 확장을 부단히 열망해왔음을 알 수 있으며 ③에서도 그저 후속 조치에 대한 기록이 누락됐을 뿐이지 "받아들이지 않고"라는 문구가 전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무위키라든지 각종 커뮤니티에서는 이것을 무조건 축소적으로 해석하여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라고 왜곡하여 거짓부렁을 퍼트려 놨더군요. 하지만 ④이하의 기록에서 11개의 주를 완전히 확보하고 동여진에 대한 반란을 진압하면서 그 영향력을 견고히 한 것으로 보아 최소한 위 기록들에서 제시된 영역만큼은 고려가 전부 차지하였다고 봐야 마땅할 것입니다.
      더불어 문종 치세 이후에 남겨진 이러한 기록들 역시 궤를 같이 한다고 보여집니다.
      "이에 따라 우리[고려]의 강역은 서쪽으로는 화표주(華表柱)가 있는 ​​요동성(鶴柱) 건너 강안(岸江)으로부터 동쪽으로는 옛 고주몽(高朱蒙)이 건넜던 개사수(蓋斯水)로 확정되었습니다." 『고려사, 선종 5년 9월 미상 기사』
      *개사수): 고구려 태조(高句麗 太祖) 주몽(鄒牟)이 물고기 다리(魚鱉橋)로 강을 건넜다는 곳이다.​​
      "요나라 황제가 말하길, 고려는 바다 모퉁이에 사직을 세워 그 영토가 북쪽으로는 용천(龍泉)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압연(鴨緣)에 닿았으며..." 『고려사, 숙종 2년 12월 13일 기사』
      *용천): 발해(渤海)의 상경(上京) 용천부(龍泉府)를 가리킨다. 용천부는 지금의 중국 길림성(吉林省) 용안현 동경성(東京城)이다.
      다만 그 범위가 어디까지였는지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는 말씀에는 동의하는 바입니다.

    • @history2281
      @history2281 2 года назад +1

      @@vivivi38651. 길주는 현 길주가 맞습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과 고려사 지리지를 보시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2. 공험진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고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았으나, 9성의 최북단은 길주였으며 공험진은 길주 이남에 있었습니다. 조선 전기 기록물이 모조리 고려 최대 강역을 두만강 너머로 적어놔서 오해하기가 쉬우나, 모두 거짓으로 이를 믿으셔서는 안됩니다. (오연총이 길주로 가다가 공험성에서 여진과 싸웠는데 길주는 길주가 맞는데 공험의 위치가 말이 안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길성현 항목에 보시면 북으로 궁한촌(길주)까지 확장해 경계를 정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다른 항목에서는 또 9성이 뭐 두만강 넘어라는둥 나옵니다. 즉 기록이 한 사서 내에서 충돌하는데, 이를 설명하는건 생략하겠습니다. 1101년에 만들어진 은병은 고려의 영토를 본땄는데, 찾아보시면 아실 수 있듯이 우리가 아는 고려 천리장성과 비슷합니다. 다만 그 모양을 보건대 길주까지라면 비슷합니다. 3. 서쪽으로 요동성~ 은 현 평북 의주인 당시 보주 지역을 요가 먹고 있어서 확장이 불가하며(제가 고려사 보니까 요동성 언급은 없었습니다), 4. 용천이 꼭 그 용천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1073년에 복속된 11주중에 복주가 훗날 9성의 복주와 한자까지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두 복주 사이에 연관성을 증명할 순 없는 것처럼 말이죠. 5. 고려 기미주의 범위는 정말 자료가 없습니다. 1073년에 삼살(현 함남북청)을 포함한 11주를 예속시킨 뒤로는 자료가 없습니다. 그런데 동북변방 15주를 보면 (정주 요덕 맹산 등등) 그 범위가 그다지 넓지 않습니다. 11주니까 15주랑 비슷하거나 더 범위가 작을 것입니다. 근데 이와중에 11주 이후에 더 귀부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즉: 최소 1073년에 복속시킨 삼살(함남 북청)을 넘어섰으며 금사 고려열전으로써 나오는 을리골령(길주) 까지가 그나마 자료를 댈 수 있는 범위인 것입니다. 저도 그 이북으로 뻗어나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허나, 증거 없는 뇌피셜은 사학계에서 인정될 수 없습니다.

    • @vivivi3865
      @vivivi3865 2 года назад

      @@history2281 할 말은 많지만... 결국 피차 추정일 뿐 언쟁해 봐야 의미 없는 대화가 될 듯하여 전부 일일이 따지지 않겠습니다. 일부 학자의 견해를 읊는 수준에 그친 본인의 추정은 역사적 사실이라 확언하시면서 온갖 지명까지 마음대로 정해놓고 상대방의 추정은 그저 뇌피셜일 뿐이라 단언하시니 참 기적의 화법이로군요. 아무튼 그렇구요, 고려사 선종 5년 기록에 요동성 언급이 없다구요?ㅋㅋ 그럼 제가 고려사 기록을 창작이라도 했다는 겁니까? 딱 보니 국편위 데이터베이스 들어가셔서 대~충 검색해 보셨나 본데 네이버 국역 고려사에 다시 들어가셔가지고 주석까지 꼼꼼하게 읽고 오세요... 티 좀 그만내시구요. 용천이 그 용천이라는 것도 제가 자의적으로 확정한 게 아니라 다 주석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또한 기록에서 분명히 동북 15주 "밖"의 지역이라고 했는데 11주니까 15주보다 비슷하거나 작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혹시 한글을 이해하는데 살짝 어려움이 있으신가요? 더군다나 만주 답사 한번 다녀오지 않은 분이 왜 자꾸 제멋대로 과거 지명을 확정하십니까? 학계의 해석을 벗어난 새로운 해석을 기존에 학계가 찍어준 지명을 가지고 하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장문 쓰실 때는 문단 나눠서 띄어쓰기 좀 해주세요. 읽기에 매우 불편합니다. 님이 안해서 저도 안했으니 그리 아시고요. 예... 열심히 연구하셔서 꼭 성과를 내주시길 부족한 제가 부탁드립니다.

  • @js2850
    @js2850 2 года назад +15

    문종이 진짜 대단하네요 나라 안으로는 백성과 신료를 나라 밖으로는 송나라와 거란을 이 균형을 잡는게 쉽지 않았을텐데

  • @habureage
    @habureage 2 года назад +5

    가슴이 뜁니다 일주일에 두번^^

  • @안타리아
    @안타리아 2 года назад +14

    관리는 이후 해를 보지 못했다..ㅋㅋㅋㅋㅋ
    현대에 바삐사는 우리같아 동정심이 드네요~ㅠㅠ 햇빛을 못보니(다크서클이..)

    • @LF-mz5if
      @LF-mz5if Месяц назад

      저도 빵 터져서 댓글 쓰러 달려왔어요 ㅋㅋ 컴퓨터 스마트폰 생기면서 일처리가 빨라지니 일이 더 많아진 거 같애요 그래도 주말에는 해를 볼 수 있네요

  • @whcho8466
    @whcho8466 2 года назад +11

    진짜 척준경시리즈가 다가오니 기대가 엄청됩니다

  • @임준성-x8g
    @임준성-x8g 2 года назад +14

    문종은 영토를 넒히진 못해도 고려의 태평성대 를 이루니 참 대단한거 같아요 영토까지 넒히면 더 좋을거 같은데

    • @history2281
      @history2281 2 года назад +12

      문종 인효대왕은 영토도 확장시켰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고 연구도 많이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이지만, 1073년에 고려는 최소 함경남도 북청을 넘어 여진 지역에 기미주를 설치해 영토로 편입시켰습니다. 또 고려는 이 기미주가 고려의 영토라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흑수부 여진 고가서로가 동번(동여진을 의미하며 고려의 외왕내제 체제를 엿볼 수 있습니다.)을 타일러 우리의 주,군이 되게 하였으니 이에 맹이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감문위산원의 벼슬을 제수한다."
      [고려사절요/1073/7월]
      1080년에는 3만의 대군을 휘몰아 반란을 일으킨 여진을 진압해서 기미주를 더욱 공고히 설치하였습니다. 이렇게 설치된 기미주는 안타깝게도 그 범위가 정확히 어디까진지 모릅니다. 최소 북청을 넘어섰으며, [금사/고려열전]을 보면 지금의 길주 부근까지 기미지배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두만강을 넘어섰을수도 있습니다. 고려로부터 7백리나 떨어진 곳에 기미주를 설치해달라고 구걸한 여진도 있었거든요. 이 기미주는 1103년부터 완안부에게 조금씩 뜯기다가 1104년에 완전히 완안부에게 함몰됬고(임간이 패한게 이때죠. 기미주가 무너지고 장성까지 쳐들어온 것입니다.) 이에 분노한 고려가 1107년 17만의 대군을 휘몰아 길주 이남에 9성을 쌓았습니다.
      이 영상에 이 부분이 나오지 않은 것은 조금 아쉽네요 ㅜㅜ.

    • @임준성-x8g
      @임준성-x8g 2 года назад +1

      @@history2281 ㅎㅎ 깜빡했어요

    • @임준성-x8g
      @임준성-x8g 2 года назад +2

      @김용빈 뭐 언젠가는 발해땅 까지 되찾는 날이 올지도 모르죠

    • @임준성-x8g
      @임준성-x8g 2 года назад +1

      언젠간 되찾는날이 꼭올거에요

    • @vivivi3865
      @vivivi3865 2 года назад +3

      고려 문종은 고려 역사상 영토를 가장 크게 확장시킨 임금입니다... 숙종~예종 때 별무반을 설치하고 17만 대군을 동원하여 9성을 쌓았다면 이미 그 이전 문종 때부터 여진의 수많은 영역을 기미지배하면서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습니다...
      "만일 국경을 정하고 관방을 설치하려 할 경우... “광활한 땅(壤地)의 넓이가 끝이 없고 번인(제후국의 백성) 가구도 넓게 거주하고 있는 만큼 변방 끝까지 모조리 요새를 설치할 수 없으니, 요청하건대 영외의 여러 번인이 모두 우리의 주현이 됨을 기다려서 그 뒤에 점차 멀리 있는 번인까지 미치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고려사, 문종 27년 6월 23일 기사』

      "귀부(영토를 바치며 항복)해 온 동여진인들을 귀순주(歸順州)에 소속시키다... 한림원에서 아뢰기를, “동여진의 대란(大蘭) 등 11개 내부자(內附者)들이 11개 주(州)가 되기를 요청하니 각각 주기(朱記)를 하사하고 귀순주에 소속시키십시오.”라고 하자, 이를 받아
      들였다." 『고려사, 문종 27년 9월 4일 기사』
      "요나라 황제가 말하길, 고려는 바다 모퉁이에 사직을 세워 그 영토가 북쪽으로는 용천(龍泉)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압연(鴨緣)에 닿았으며..." 『고려사, 숙종 2년 12월 13일 기사』

      *용천): 발해(渤海)의 상경(上京) 용천부(龍泉府)를 가리킨다. 용천부는 지금의 중국 길림성(吉林省) 용안현 동경성(東京城)이다.

  • @임준성-x8g
    @임준성-x8g 2 года назад +17

    이때 무신한테 잘대해줬는데 나중에까지 무신한테 잘대해 줬으면 무신의난 이 안일어 났을 수도 있었을텐데

  • @ExploreAnimalsTV
    @ExploreAnimalsTV 2 года назад +8

    문종 때가 고려 문화의 르네상스네요

  • @niro8002
    @niro8002 2 года назад +5

    고려는 민주주의국가네
    조선은 개막장 왕이 수두룩한데

  • @정도영-o1p
    @정도영-o1p Год назад +1

    해설자ᆢ진짜 설명 잘한다ᆢㅎㅎ
    시간가는줄 모르겠네ᆢ

  • @김일남-x8y
    @김일남-x8y 2 года назад

    재밌는 역사공부 즐거워요 ㅎㅎ

  • @rocksan9353
    @rocksan9353 Год назад +1

    난 이걸 보느라고 해를 보지 못했다~

  • @무지개-l8y8f
    @무지개-l8y8f Год назад +1

    말해 보던가? ----> 말해 보든가.

  • @younghuh9203
    @younghuh9203 2 года назад +4

    기회 가 되신다면 고려 가 송 에게 갑질 한것 한번 올려 주실수 있는지요.갑질 시작 은 지금 부터 약 50년 후에 시작 되니까.

  • @일차일라
    @일차일라 2 года назад +1

    오도짜세 해병돌격머리 스타일로 해주세요!!!

  • @뭐먹지-t9s
    @뭐먹지-t9s Год назад

    장례문화가 조선만 좀먹은게 아니네,,, 조선 문종만 안쓰러졌어도 고려문종만큼의 전성기를 누렸을텐데

  • @킹밍-b4j
    @킹밍-b4j 2 года назад +2

    독살 같은데 증거없는독살이 많았지
    젊은 나이에 급사 왜그리많아

  • @seounggyupark4286
    @seounggyupark4286 2 года назад +5

    문종이나 세종이나 워커홀릭이란ㅋㅋㅋ

  • @iii2864
    @iii2864 Год назад

    주인장 아뇽``

  • @하느낌
    @하느낌 2 года назад +1

    척준경 공유 나오네 ㅎ

  • @markshin1090
    @markshin1090 Год назад

    어떤 스타일 ㅋㅋㅋ

  • @한도경-n2i
    @한도경-n2i 2 года назад

    이자겸,척준경,kingzazie 나오는구나

  • @구독자500명되면이같은

    알파고를 뇌에 탑재하고 타임머신 가면 어케 됨?

  • @고재현-f8p
    @고재현-f8p 2 года назад

    삭발이 스타일이 있어요??ㅋㅋ

    • @facstory
      @facstory  2 года назад +1

      미묘한 차이가 있사옵니다^^

  • @oxunjonsanaqulov676
    @oxunjonsanaqulov676 2 года назад

    NTR ㅅㅂ

  • @김강우강우
    @김강우강우 2 года назад

    너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