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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연과 고구리의 공방전과 수도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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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9 июн 2024
  • 후연 모용황의 침입과 고국원왕이 환도성에서 이동한 평양 동황성의 위치는 어디인가?

Комментарии • 8

  • @user-le6mj3se3t
    @user-le6mj3se3t Месяц назад +2

    1388년 이전의 현재의 만주와 한반도는
    그저 조용하고 평화롭고 안전한 고려의 안전지대.

  • @user-le6mj3se3t
    @user-le6mj3se3t Месяц назад +2

    남송의 수도는
    대명여지도 초중본에서 도착지 표기가 늦여짐.
    아직까지는 출발지에만 표기.

    • @historyreadman
      @historyreadman  Месяц назад +1

      댓글 감사합니다.
      의견 감사합니다.

  • @user-le6mj3se3t
    @user-le6mj3se3t Месяц назад +2

    북송의 수도는
    중초본에서 삭제. 이후로 개봉표기로 도착.

  • @user-le6mj3se3t
    @user-le6mj3se3t Месяц назад +2

    1368년부터 1388년까지의
    명나라의 중심지가 지워짐(중기본).

  • @user-ce6sn9eq4j
    @user-ce6sn9eq4j 29 дней назад +1

    고국양왕 광개토왕은 모용황 피를 받은 연나라 후손

    • @historyreadman
      @historyreadman  29 дней назад

      댓글 감사합니다.
      다만 사실관계는 잘 못 알고 있으신듯 합니다.
      15대 미천왕(고을불) 301~331 13대 서천왕(고약로)의 차남 고돌고의 장남
      16대 고국원왕(고사유) 331~371 미천왕의 장남
      17대 소수림왕(고구부) 371~384 고국원왕의 장남
      18대 고국양왕(고이연) 384~391 고국원왕의 차남
      19대 광개토왕(고담덕) 391~412 고국양왕의 장남
      고국양왕은 고국원왕의 둘째 아들이며, 광개토왕은 복수의 기록들에 의할 때 고국원왕의 아들이고,
      광개토왕릉비를 근거로 한다 해도 6촌 조상인 대주류왕의 아들이란 이야기도 존재하나
      양자로 갔다고 가정해도, 또 장수하는 집안이란 걸 감안해도 350년의 시차로 연대가 맞지 않습니다.
      광개토왕릉비는 유리명왕의 아들인 '선대인 대주류왕' 또는 대무신왕과 같은 영토확장의 공적을 기록한 것이므로
      이 문맥에서 보는 것이 비석을 세운 연혁과도 뜻을 같이 한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으로 적절 합니다.
      거기다 342년 전란으로 잡혀간 고국원왕의 돌아오지 않은 왕비는 기록들이 없어 잡혀간 뒤 어떤 방식으로든 잡혀간 곳에서 죽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고국원왕의 아들들인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은 이미 최소 2~30대를 넘긴 상태입니다.
      342년 전란이후 부정부패와 지배층의 분열로 370년 전연은 부견의 전진에 의해 처참하게 멸망당했는데, 당시 전연의 모용씨 섭정인 태부(태재) 모용평이 망명해오자 고국원왕은 그대로 묶어 전진에 갖다 바칩니다.
      따라서 고국양왕과 광개토왕은 연나라와 전혀 상관이 없으며 한 하늘을 두고 살 수 없는 철천지 원수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따라서 연나라 후손이란 이야기는 전혀 근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