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은 무엇이고 왜 느끼는걸까요. 책임이라는 말을 해석하면 내부적으로 느껴지는 뜨거운 감정일 뿐 의식적으로 해석하면 그 무엇도 아니고, 악행이라는 것은 배우지도 않고 당연히 아는 것이면서 선행이라는 것은 왜 배워야 하는걸까요. 우리가 자유로울까요; 포유류 양서류 파충류 항상 정해진 형태라는 것이 있고, 이것들이 겉으로 이루어진 형태이면 내부적으로도 같은 양상을 띈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들일까 궁금해지기도 하네요. 사람은 왜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넘어가기 전까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까요
인간은 목적 그자체로 대해야한다는것이 어떤의미죠... 목적 그자체가 누군가가 세워야하는것이아닌 이미 세워져있는것 선험적으로 존재하는것, 본질이란것인가요?... 40분동안 에이포용지에 따라적고 이해하려해도 이해가 안됩니다... 그리고 경험을 만들기위해 이미 그 조건이 정해져있다는건가요? 특정 개념이? 선험적으로 정해져있다는것인가요? 어질어질..
영상 정말 잘 봤습니다. 부끄럽지만 칸트에 대해 아는 거라곤 대학 교양 수업이 전부인 사람입니다. 궁금한 점이 있어 몇 자 적어봅니다. 칸트의 주장에 의하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정언 명령을 포함한 실천이성비판 등의 지식 또한 선험적이고 보편적인 개념과 경험에 의해 얻은 지식을 종합한 것일 겁니다. 하지만 가령 정언명령에서 말하듯이 "모든 인간을 목적 그 자체로 대해야 한다"를 생각하더라도 경험하는 주체에 따라 다르게 받아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명제 자체에 대해 다르게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라는 언어적 대상을 말이죠. 태아, 클론(인간 복제) 등의 문제에서 사람들은 각기 다른 대답을 내놓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단 현재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칸트의 시대 혹은 그 이전에서 당연하게 해온 인종차별, 아니 애초에 흑인에 대해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던 시기에 어떤 백인은 자신의 선의지를 바탕으로 정언명령에 맞게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인의 시각에서 봤을 때 그의 행동이 미쳤다고 판단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칸트의 주장이 칸트의 논증에 의해 비판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무지한 철학도에게 깨달음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생님들.
저도 아직 학생이라 부족한 부분이 많으나 학교 윤리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말씀드리자면 칸트는 인간뿐만이 아닌 이성적 존재을 목적 자체로 보아야한다고 주장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당시 흑인을 이성적 존재로 보지않았을 수도 있지만 이성적 존재가 아닌 것에도 간접적 의무가 있다고 했었으니 그 부분에 대한 비판점은 조금은 사그러들지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제 지식이 틀릴 수 있으니 감안하고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aaannui2009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인간이 아니라 이성적인 존재라는 것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나보군요. 다만 칸트가 생각한 '이성적 존재'라는 것이 누군가 그렇게 보거나 그렇지 않음에 영향을 받을까요? 그 시대에 인정받아야 이성적 존재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칸트의 생각이 시대와 문화적 요인에 영향을 받는 것을 넘어서 의존한다는 것을 시인하는 꼴이니까요. 간접적인 의무가 무엇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아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생각을 함께 고민해주셔서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odg200059 간접적인 의무는 예를 들어 들판에 꽃이 있다고 하였을 때 그것을 함부로 꺾지않는 것, 길에 있는 동물을 함부로 해치지 않는 행위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칸트의 미학에 대해 알아보시면 이해하시는데에 도움이 될 것 같기는 한데 제 앎이 부족하여 말씀드리기가 힘들 것 같네요..
@@haaannui2009 아하, 간접적인 의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이해가 되네요. 이성적 주체가 아닌 이들에게 왜 의무가 부여되는지, 왜 이성적 주체와는 다른 간접적인 의무가 부여되는지 등의 따라오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가 조금 더 찾아봐야 할 것 같네요. 두서없는 질문에도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선생님!
칸트는 도덕적 근본을 제시해서 널리 읽히는데, 은어적인 소통이 전제되면 이마저도 이용됩니다. 사용 방식으로 논의하는 체제가 있는데, 책임감이나 자신의 특정 판단에 대해 경험독립성을 유난히 강조하는 경우, 체험주의적인 이해도 가능합니다. 가다머의 정의로움이나 책임감의 논증대로만 칸트가 사용되는게 아니라서 경험 영역의 차이로 난국을 경험한 소년을 구명하는 체제입니다. 경험독립성이 지닌 본래의 의미에 기대어, 소년의 체험을 다른 것으로 대치하는 것에도 칸트가 쓰여서 이를 비판하는 체제입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칸트의 도덕성이 포스트모던이나 여타 사람을 내치는 시도에 대한 반례로서 여겨지는데, 이를 비틀어 사람을 내치는 시도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칸트의 정언명령이 쓰이면, 그 적용 대상이 된 사람의 조건화된 인생이 논리 반전이 되어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듀이와 다마지오를 따르도록 하는 체제가 있습니다. (체험주의) 모든 언어의 이해구조는 은유적이고, 이를 한 경험 영역에서 다른 경험 영역으로 이어가서 이해하는 것이라, 이로부터 은어적인 소통에 칸트의 정언명령이 경험독립성을 유난히 강조한다면 칸트의 본의가 왜곡된 것이고, 이를 구명해야 합니다. blog.naver.com/run_loop/221658346951 그러나 칸트를 은어적으로 왜곡되게 이해한 것이 시정된다면 체험주의와 칸트의 도덕적인 목표는 같습니다.
지금 순수이성비판 읽는중인데 다 읽고 한번 봐야겠네요. 독해를 잘했다면 머리에 남은 표상과 개념들이 이 영상의 내용과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겠죠.
칸트 입문서는 읽어도 칸트 저서는 못 읽겠다...
서울대철학과 재학중인 학폭가해자사건으로 이것저것 보다 보물같은
유트브를 찾아서 기쁩니다
어쩜 젊으신데 이런 신선한 지성유트버가 되신건지
아주 반갑고 고맙네요
책임은 무엇이고 왜 느끼는걸까요. 책임이라는 말을 해석하면 내부적으로 느껴지는 뜨거운 감정일 뿐 의식적으로 해석하면 그 무엇도 아니고, 악행이라는 것은 배우지도 않고 당연히 아는 것이면서 선행이라는 것은 왜 배워야 하는걸까요. 우리가 자유로울까요; 포유류 양서류 파충류 항상 정해진 형태라는 것이 있고, 이것들이 겉으로 이루어진 형태이면 내부적으로도 같은 양상을 띈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들일까 궁금해지기도 하네요. 사람은 왜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넘어가기 전까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까요
대철학자의 내공이 느껴집니다 짧은 시간안에 칸트의 주요 개념들을 관통하는군요
와 가다머 말하는거 영상으로 처음 봄
감사합니다! 잘 보겠습니다
와 잘 정리되었네요! 근데 '개념'이 뭔지도 더 설명되면 더 명료할거라 생각합니다. 언제 한번 인식론 쫘르륵 시리즈 어떠세요?
인간은 목적 그자체로 대해야한다는것이 어떤의미죠...
목적 그자체가 누군가가 세워야하는것이아닌 이미 세워져있는것 선험적으로 존재하는것, 본질이란것인가요?...
40분동안 에이포용지에 따라적고 이해하려해도 이해가 안됩니다...
그리고 경험을 만들기위해 이미 그 조건이 정해져있다는건가요? 특정 개념이? 선험적으로 정해져있다는것인가요?
어질어질..
좋은강의 감사합니다 ~~
이 영상을 인용해서 영상을 제작해도 될까요?
아직 영상의 주제를 정해 놓은건 아니고
건축에 이런 질문이 많아서 철학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는데
이 영상을 인용해서 사용하고 싶네요.
예. 말씀 안 하시고 사용하셔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chungco_phil 평소 영상 잘 보고 있습니다.
채널을 통해서 철학 공부를 하곤 했었는데
잘못한 것처럼 조금 머슥하네요. ㅎㅎ
제가 실수를 한건가요?
아니요. 전혀 아닙니다ㅎㅎㅎㅎ
제가 조금 차갑게 느껴졌나요
그냥 편하게 사용하시라는 뜻이었습니다
@@chungco_phil 그렇군요. ㅎㅎ
다행이네요 ㅎㅎ
제가 잘못했을때 기억이 오버랩 되었나 보네요 ㅎㅎ
좋은 영상 많이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렵네요
ㅎㅇ
영상 정말 잘 봤습니다. 부끄럽지만 칸트에 대해 아는 거라곤 대학 교양 수업이 전부인 사람입니다. 궁금한 점이 있어 몇 자 적어봅니다.
칸트의 주장에 의하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정언 명령을 포함한 실천이성비판 등의 지식 또한 선험적이고 보편적인 개념과 경험에 의해 얻은 지식을 종합한 것일 겁니다. 하지만 가령 정언명령에서 말하듯이 "모든 인간을 목적 그 자체로 대해야 한다"를 생각하더라도 경험하는 주체에 따라 다르게 받아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명제 자체에 대해 다르게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라는 언어적 대상을 말이죠. 태아, 클론(인간 복제) 등의 문제에서 사람들은 각기 다른 대답을 내놓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단 현재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칸트의 시대 혹은 그 이전에서 당연하게 해온 인종차별, 아니 애초에 흑인에 대해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던 시기에 어떤 백인은 자신의 선의지를 바탕으로 정언명령에 맞게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인의 시각에서 봤을 때 그의 행동이 미쳤다고 판단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칸트의 주장이 칸트의 논증에 의해 비판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무지한 철학도에게 깨달음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생님들.
저도 아직 학생이라 부족한 부분이 많으나 학교 윤리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말씀드리자면 칸트는 인간뿐만이 아닌 이성적 존재을 목적 자체로 보아야한다고 주장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당시 흑인을 이성적 존재로 보지않았을 수도 있지만 이성적 존재가 아닌 것에도 간접적 의무가 있다고 했었으니 그 부분에 대한 비판점은 조금은 사그러들지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제 지식이 틀릴 수 있으니 감안하고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aaannui2009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인간이 아니라 이성적인 존재라는 것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나보군요. 다만 칸트가 생각한 '이성적 존재'라는 것이 누군가 그렇게 보거나 그렇지 않음에 영향을 받을까요? 그 시대에 인정받아야 이성적 존재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칸트의 생각이 시대와 문화적 요인에 영향을 받는 것을 넘어서 의존한다는 것을 시인하는 꼴이니까요. 간접적인 의무가 무엇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아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생각을 함께 고민해주셔서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odg200059 간접적인 의무는 예를 들어 들판에 꽃이 있다고 하였을 때 그것을 함부로 꺾지않는 것, 길에 있는 동물을 함부로 해치지 않는 행위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칸트의 미학에 대해 알아보시면 이해하시는데에 도움이 될 것 같기는 한데 제 앎이 부족하여 말씀드리기가 힘들 것 같네요..
@@odg200059 칸트의 인식론과 목적의 나라라는 개념에 대해 탐구해보시면 원하시는 답을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으실 것 같습니다 미천한 지식이라도 감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haaannui2009 아하, 간접적인 의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이해가 되네요. 이성적 주체가 아닌 이들에게 왜 의무가 부여되는지, 왜 이성적 주체와는 다른 간접적인 의무가 부여되는지 등의 따라오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가 조금 더 찾아봐야 할 것 같네요. 두서없는 질문에도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선생님!
칸트는 도덕적 근본을 제시해서 널리 읽히는데, 은어적인 소통이 전제되면 이마저도 이용됩니다. 사용 방식으로 논의하는 체제가 있는데, 책임감이나 자신의 특정 판단에 대해 경험독립성을 유난히 강조하는 경우, 체험주의적인 이해도 가능합니다. 가다머의 정의로움이나 책임감의 논증대로만 칸트가 사용되는게 아니라서 경험 영역의 차이로 난국을 경험한 소년을 구명하는 체제입니다. 경험독립성이 지닌 본래의 의미에 기대어, 소년의 체험을 다른 것으로 대치하는 것에도 칸트가 쓰여서 이를 비판하는 체제입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칸트의 도덕성이 포스트모던이나 여타 사람을 내치는 시도에 대한 반례로서 여겨지는데, 이를 비틀어 사람을 내치는 시도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칸트의 정언명령이 쓰이면, 그 적용 대상이 된 사람의 조건화된 인생이 논리 반전이 되어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듀이와 다마지오를 따르도록 하는 체제가 있습니다. (체험주의) 모든 언어의 이해구조는 은유적이고, 이를 한 경험 영역에서 다른 경험 영역으로 이어가서 이해하는 것이라, 이로부터 은어적인 소통에 칸트의 정언명령이 경험독립성을 유난히 강조한다면 칸트의 본의가 왜곡된 것이고, 이를 구명해야 합니다.
blog.naver.com/run_loop/221658346951
그러나 칸트를 은어적으로 왜곡되게 이해한 것이 시정된다면 체험주의와 칸트의 도덕적인 목표는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