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해보면 몸이(업장) 모든 경험 정보를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의 상처을 치유하고 정화 하면 저절로 본성이 드러나기에 먼저 몸을(업장) 치유 하면 이치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게됩니다 그 아픔과 함께 아파 하고... 고통과 함께 고통속에머물러 주고... 두려움을 느껴 주고... 모든 에너지가 충분히 빠져나가도록 부정적인 어둠속에 숨죽이며 기다려주고... 에너지가 충분히 빠져나가면 몸과 마음이 변하면서 본성이 드러나기에 저절로 이치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훌륭한 법문은 그 에너지들과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저항하는 힘들을 내려놓고 받아들이게 합니다 법문이 아주 큰 힘이 됩니다~^^
자신의 깨달음이 삶에 일치하도록 살아내는것이 수행아닐까요..날마다. 깨달음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잘못 깨달았거나 스스로에게 속은것 아닐까요 자신이 다 깨달았다고 착 각한것이죠 그래서 진실로 깨달은 사람은 그의 삶을 보면 알수있다고 했지요. 깨달은 사람이 타인의 본이 되는 행실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스님의 말씀은 에고의 경계를 말 하는 것이고, 붓다는 깨침 본질 그대로를 말씀 하신 것이다. 이런 문제를 켄월버 식으로 착각, 오해하신 분들이 많기에.... 이런 관점은 붓다의 가르침을 왜곡한다. 많은 분들이 켄월버식 사고 관점에 동조하나, 그것은 에고의 한계로 불(붓다), 조사의 깨달음과는 전혀 다르다. 깨침을 에고에서 바라보는 것은 많은 문제가 따른다. 아직 까지도 나가 주,객으로 나뉘어져 있으니까 계속해서 문제(번뇌망상)가 발생하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초등학생은 더하기 빼기를 배우고, 중학생은 인수분해를 배우고 고등학생은 미분적분을 배우지요.. 그 자신의 삶에서 가장 최선인 것이 최선입니다. 그래서 미분적분을 배운다고 초등학생 보다 높다고 말할 수 없고 인수분해를 배운다고 중간단계가 아닙니다... 사실 파자소암은 각자 자기 자신의 식과 경계에 따라 해석되어집니다.
@@foolBuddha 저는 대승과 소승에 대해 잘모르지만 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성욕이나 물욕이 떨어져 나갈것같습니다 부처님이 파순의 딸을 물리친것은 욕정이 완전히 떨어진 경계이고 수행승의 신도 딸에게 한행동은 욕정을 참는 경계인것같습니다 제가 수행승이라면 이쁜 나비가 무릅에 앉아있는것같다라고 답했을것같습니다 짧은 소견입니다^^
부처님은 세 여자를 보고 받는 감각의 현상의 실체를 알아서 그것을 단지 관찰하여 그저 경계에 머무를 수 있었고 다른 스님은 현상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단순히 마음의 절제만을 실행하여 억지로 계율을 지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봅니다 그래서 차가운 고독나무 같은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는거고 만약에 깨달음을 이루었다면 사랑과 자비심을 느껴야했을겁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신에게 부여 받은 사고조절자를 경험적으로 인식하여 깨달음을 성취한 분이므로 현상의 실체를 꿰뚫는 힘이 강했을거라 생각됩니다
부처님께서 파순의 세 딸을 항아리에 담긴 똥덩어리라고 한 것은, 결국 유혹하는 세 딸 또한 부처의 마음 속에 있음을 말한 것이나, 파자소암의 스님은 자신과 자신을 유혹하는 딸을 차가운 고목과 매미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현실과 유사한 모습 그대로 빗대어서요.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항아리와 똥덩어리라는 분별된 단어를 쓸 수밖에 없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흔들리는 마음을 하나로 보았느냐 나와 대상으로 구분했느냐, 경계를 두었냐 두지 않았냐가 가장 큰 차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부처님이나 그 스님이나 한 행동은 똑같죠. 다만 보살이 깨달은 자라면 어떻게 해야한다라는 상이 있었던거고 그 상은 자유롭게 뭐 여자를 취하는 액션이었던거고 그거에 반하니 그 스님이 깨달은 자가 아니라고 판단한거고요. 부처님은 신성시 되니 무슨행동을 하더라도 그거에는 다 합당한 연유가 있으리라는 상이 있으니 부처님의 행동에는 토를 달지 않는것이죠. 우리는 그니까 부처님과 다른 스님들 중생들이 다르다는 상을 가지고 있는겁니다. 그런 상을 가지고 있는한 자유는 요원한 일입니다.
황진희는 늘가진 불성의 덧없음을 알고 측은지심에 지족의 불성을 덮어주려 했고, 지족은 불성이 소멸되더라도 오는 인연 받아줌으로 초불성을 얻은 것 같소이다. 다 가지고 있는 불성을 버릴 줄 알아야 또 다음 단계로 넘어가나 봅니다. 누군가 만든 게임에 던져진 존재이라 끝이 없겠지만요. 에전에 우월적이거나 초월적인 존재들이 한계를 느끼고 차라리 독수리나 사자로 태어나겠다고 독백을 했겠죠.
파자소암 : 이 역시 아래 붓다의 상태와 흡사합니다.....자신을 거두어서 온전히 진리증득 할수있도록 모든것을 쏟아 부어 지원하는 노파의 딸이 와서 무릎에 앉는다면.......노파의 크나큰 은혜를 생각하여 안아주면서 은혜에 감사한 마음을 표시했다면.....그는 이미 진리 자체가 되어 진리로 살고있음이 증명되었을텐데, 아직 깨우침이 부족하여 머리로 얻은 선지직으로 미혹에 흔들리지 않는 듯한 행위를 하였음을 노파는 간파하고 스님을 쫒아냈던것입니다. 사실상 여기서는 스님보다 노파가 더 깊이 깨운친 사람이며, 이런 이야기는 후일에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스토리로 보여집니다. 진여상태에서는 선과 악, 깨끗하고 더러움, 행과불행 등의 구별이 없습니다 이는 모두 상대성 세상의 분별일뿐입니다 자무스님의 법문 즐겨듣고 있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네 맞습니다..후대에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내용이죠.. 수행과 계행, 자신의 청정함에 갇힌 수행자를 한 단계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노파를 설정한 우화라 할 수 있습니다. 죽어있는 선을 하자 말라는 뜻이죠. 선과..대승적 가르침이 어우려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선의 안목과 법의 안목은 높다하여도 대승적 삶과 어우려 지지 못하면 안된다는 의미이기도 하죠. 차가운 바위위에 떨어진 나뭇잎이나 고목나무의 매미는 곧 죽은 선이라는 뜻입니다. 경계와 모양만 흉내낸 허식으로 대승적 싦천이 아닌...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관념적인 경계심으로 수행이란 틀에 갇히지 말고 어서 나오라는 것이죠.
부처님은 말씀 뿐만 아니라 본인의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가르침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혹 시시비비가 있다면 부처님의 언행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자신의 깨달음에 의문이 있다면 미진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혹시 자신의 깨달음 이상의 것이 있는 지 모든 존재계 비존재계를 다 뒤져 보신 후 더 이상의 것이 없음을 확인 후 무상정등각을 선언하셨다고 합니다 성철스님도 오매일여가 되지 않으면 아직 안 된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명확한 기준이 있음에도 딴소리가 나오는 것을 경계하시기 위해 부처님은 깨닫지 못한 자는 설법하면 안된다는 금기까지 내리셨죠 부처님 열반 후 칠엽굴의 1차결집 때 부처님을 평생 곁에서 시봉한 아난이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이유로 쫓겨난 일화를 보더라도 깨달음의 기준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아시고 용맹정진 하십시다
▌파자소암의 이야기를 듣고 본디 답이 없음이다. 그 답은 이것을 보고 듣는 자기자신에게 있다. 자기자신이 부처이면 부처이고 자기자신이 부처가 아니면 부처가 아니다. 답은 이 노승의 잘잘못도 아니고 노파의 잘잘못도 아니고 그 딸의 잘잘못도 아니다. 이 노승도 아니고 이 노파도 아니고 그 딸도 아니다. 있다면 오직 이것을 받아들이는 나에게 있다. 이것도 옳다면 이것이 옳고 저것도 옳다면 저것이 옳다. 아무것도 변하거나 바뀐것은 없다. 있다면 내가 변한것이다. 누구에게도 답은 없다. 단지 그러함이다. 그러니 이렇게 된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 화두는 그저 우리의 마음을 떠보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야기에 심취 되어 재미있어 하는 당신이나, 이것이 맞다 저것이 맞다 고뇌하는 당신이나 다 같은 당신이지만 끌려가지 않고 항상 같이 있는 너는 무엇이냐 "무엇이 중한디" 를 알라는 말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항하는 것은 지속될 뿐 위에 이야기를 듣고 몇마디 적어보니 이런 생각도 불현듯 떠오릅니다. 저항하는 것은 지속될 뿐, 칼융의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처럼 유튜브를 보거나 이야기를 듣거나 즉 어떤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면 우리는 이것을 회피하거나 극복하거나 아니면 비우려 합니다. 즉 다가오는 온갖 상황들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실상은 회피 극복 비울 수 있을까요 핑크 코끼리 생각 하지마 하면 무조건 핑크 코리를 생각하는 것이 현상의 법계입니다. 현상으로서의 나는 이 현상계의 법칙에 의해 무조건 지킬 수 밖에 없음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나(현상으로서의)가 듣는다면 이것은 끓임없는 이야기 이지만 이 이야기를 듣는 나(전체로서의)나가 듣는다면 이것은 거짓도 진실도 아닌 이야기라는 것 이지요 이 파자소암의 이야기에서 저가 느낀점은 이 마음(주체로의 자기에서 생기는 생각)을 하게하는 마음(전체로의 자기있음)에서 이 마음(주체)을 이 마음(전체)로서 보아야 모든 현상의 무상함을 알아야 된다는 교훈으로 다가옵니다. 스님덕분으로 이런 인연을 받아갑니다. 감사합니다.
법다은 견해이십니다... 초등학생은 더하기 빼기를 하는게 최선이고 고등학생은 미분적분을 푸는게 최선입니다. 여기에 무엇이 옳고 그름은 없습니다. 무엇이 높고 낮음도 없습니다. 그 자신의 삶에서 가장 최선의 삶이 무엇인가? 그것이 명답입니다. 초등학생은 더하기 빼기를 하는게 법다운 법입니다. 보살이 스님을 쫒아낸 것애 대한 답변 부처님이 세 여인을 관한 답변에는 수 없는 공식과 답이 나오지만...거기에 꼭 이거다라는 정답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 자신의 식대로 답은 풀어집니다.
어제 밤에 스쳐 지나가는 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술을 먹고 운전해서 사고를 내어 사람을 다치게 한 경우 술이 문제인가 사람이 문제인가? 돈 많은 부자가 사람을 다치게 한 경우 돈이 문제인가 사람이 문제인가? 신통력이 뛰어난 무당이 사람을 다치게 한 경우 신통이 문제인가 사람이 문제인가? 타력의 신을 받은 스님이든, 도사든, 목사든, 신부든, 무당이든 그 사람이 병신이면 모시는 신도 병신으로 평가 받겠지요? 결국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죽기전까지 온 지구에 있는 물질을 다 이용해서 자유의지로 선택하여 체험하면서 그 경험의 끝에, 결국 죽을 때 가져가는 영에 가까워진 혼의 완성, 의식의 수준만이 남을테니깐. 모든게 지극히 개인적 차원의 성장만 있을 뿐 타인의 평가는 의미가 없습니다. 지구에 78억개의 우주가 있고 우리 모두는 각자 성장하는 우주인겁니다.
스님이 말씀하시는 께달았다는 사람중에 정말 께달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뭉둥병 걸린 여자랑 잔분은 분명 께달은 사람이 맞을 가능성이 높구요 이분은 여자의 요구를 들어 준것이지 성욕때문에 여자랑 잔것이 아니구요 달라이 라마는 그냥 바지사장 이죠 어릴때부터 수도승으로 지냈다면 아무리 늦어도 20대가 되기 전에 전생을 기억 했어야 함니다 어릴때 전생이 기억 있었는데 지금은 모른다? 이거 완전 전생자를 본적도 없단 소리죠 전생의 기억이 점점더 선명해 진다고 말해야 함니다 스님께서 께달은자를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께달은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께달은자가 아닌데 그들을 보고 잘못 판단하신거라 생각함니다 불지른 이야기는 따님을 무시해서 화난거죠. 정확한 답변은 당신의 몸은 따스하고 이쁘지만 당신에게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대답해야 함니다
부처의 언행 : 아름다운 여인을 똥항아리에 비유한 것은 똥은 더럽다는 분별이 전제된 것입니다......똥이 방에 있으면 오물이지만 밭에가면 소중한 거름입니다 똥은 똥일 일뿐입니다.....본인은 똥항아리 아닌지요? 그 여성들중 누구는 후일 왕비가 되었을때 똥항아리라고 말한 업보때문에 부처는 큰 곤욕을 치르게 됩니다 이당시 부처는 견성후 아직 보림이 부족하여 온전한 진리 자체로 살고 있지 못했던듯 합니다....... 양변의 경계를 넘어 온전하고 확고한 진리로 살고 있다면......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 그대들의 외모는 꽃보다 아름답구나 그러나 우리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고하여 상대여인들을 칭찬하면서 동시에 진리에 대한 구도의 마음이 일게 하였다면 후일 악담에 의한 업보도 없었을 뿐더러 어쩌면 출가 제자가 몇명 늘어났을지도 모릅니다........아름다움을 아름다움 그 자체로 보지 못하고 당사자앞에서 그런 악담을 하는것은 아직 진리로 살고있지 못함을 드러내는 것일뿐입니다. 붓다의 권위에 눌리지 말고, 진여에 머물러 세상을 바라보면 똥보 붓다도 모두 진리의 한부분에 불과합니다.
이런 얘기들도 다 후대에 지어낸 얘기일 것입니다. 실제로 여인을 볼때 아홉구멍을 통해 나오는 똥과 오줌과 고름과 피를 생각하라며 부정관 수행을 강조하셨지만... 인간의 몸..자신의 몸과 너무 혐오한 나머지 자살한 수행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후에..부처님은 자비관 수행을 가르치셨습니다. 부처님의 많은 설법도 여러 문제점들을 보완하며... 그 자신의 45년의 세월동안 갈고 닦여진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몇 천년을 이어오며 더 다듬어지면서...부처의 원음이 아닌 경전들이 다수 출연하지요
여러분들 제발ᆢ 내면에 성품을 보세요. 이 육신은 법당,성당,교회 ᆢ와 같아서 그안에 부처님,하나님,예수님ᆢ들이 모셔져 있듯이 우리 육신 내면에 우주를 초월한 순수 절대가 있습니다. 이 성품을 보시면 모든 의문이 풀립니다. 한번 해보세요. 단, 머리로 생각하면 않됩니다. 머리로하면 성품을 볼수없어요. 절대로 ᆢ
본성의 자리에선 분별이 일어남을 알뿐 분별과는 무관하기에 분별로 인한 결과는 일어나지 않음. 세여자가 나타남을 알지만 인연에서 벗어나 계심으로 과가 일어나지 않음. 계율의 지킴은 옳고 그름의 분별을 만들고 지키려는 의지와 생각을 만들어 결국 인과를 만들어냄. 석가모니부처님은 인과의 세계를 벗아나 계시고 스님은 아직 인과의 세계에 머물고 계십니다.
스님. 질문이 있습니다. 조금 다른 면에서 본다면.. 부처님께서 ‘항아리에 담긴 똥덩어리’라 하셨다고 했느데 이걸 ‘화두’라고 혹 본다면 ’항아리에 담긴 똥덩어리‘라는 말에 걸려 우리가 분별에 떨어진다면 진리를 보지못함이요, 만약 그 말에 떨어지지 않으면 본성을 보게 되는거 아닙니까? ’항아리기 마음이요 똥덩어리가 여인이다‘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본성에선 멀어지지 않습니까? ‘‘말라죽은 고목에 붙은 매미 같다’도 마찬가지라고 본다면 결국 부처님이나 그 스님이나 ‘본성’을 말하고 있는데 지금 받이들이는 우리나 그 보살이 망상과 분별에 빠져 ‘본성’을 보지 못하는게 아닙니까? 결국 지금 즉시 보지 못하는 우리가 문제아닙니까? ‘화두’라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솔직히 전 부처님께서 저렇게 ‘분별’을 일으켰다는게 믿겨지지 않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관하셨다고 하시면 이해가 되겠는데 굳이 저런 ‘망상’을 만드셨다는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뭔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궁금해서 여쭙니다. 그리고..늘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법다운 견해이십니다 우리는 이미 그 승려와 부처님과는 다를거라는 분별로 그 상황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항아리에 담긴 똥덩어리로 관했다는 것은 후대에 어떤 목적으로 지어낸 우화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이라는 권위에 눌려 법의 실상을 바로 관하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 있는 것이죠.. 하루는 부처님께서 법문을 마친후 사부대중에게 너희는 내 말에 신심을 갖느냐는 말에 모든 사람들이 믿습니다 라고 했지만 오직 사리불만이 부처님께 일단 바르게 사유해보고 따르겠습니다 라고 답변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옳다 역시 너는 지혜제일이구나!" 부처님이든 부처 할애비든 항아리에 담긴 똥덩어리로 관했다면 초등학생 수준인거죠.. 물론 애욕에 빠진 중생에겐 방편으로 부정관 수행을 하라고 말씀하셨을 겁니다
이절,저절
시간 날때마다
절집 밟은지가 30년이
훌쩍,넘었는데
이제서야,의문하나가
풀렸으니 ................
몇년전에 입적하신
스님이 이십 여년전에
독대,법담중에 하시는
말씀이 ㅡ
김 처사
이길, 가려면
기생도 되어야하고
기생 오라비도
되어야 한다.
😮💨그 말씀의 뜻을
(파자소암)의 인연
으로 깨닫게 되었습니
다,그 시절에는
그냥,옛날 이야기로
뜻도 모르고 넘겼습니다. 🙏🙏🙏
경험해보면
몸이(업장) 모든 경험 정보를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의 상처을 치유하고
정화 하면 저절로 본성이 드러나기에
먼저 몸을(업장) 치유 하면
이치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게됩니다
그 아픔과 함께 아파 하고...
고통과 함께 고통속에머물러 주고...
두려움을 느껴 주고...
모든 에너지가 충분히 빠져나가도록
부정적인 어둠속에 숨죽이며
기다려주고...
에너지가 충분히 빠져나가면
몸과 마음이 변하면서
본성이 드러나기에
저절로 이치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훌륭한 법문은 그 에너지들과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저항하는
힘들을 내려놓고 받아들이게 합니다
법문이 아주 큰 힘이 됩니다~^^
공부가 다 되었으니 이만 하산하셔서 중생구제에 힘 쓰소서.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있으면 절받고 돈받고 우러름 받는 달콤한 유혹이 있는데, 입전수수한다고 세간에 나와서 깨지는 위험을 감당할 지 의문
그래도 오랜만에 승려다운 승려를 보네. 본인을 소승이라 칭하는 걸 보니, 바탕과 기초는 확실히 되었어.
귀한 법문 감사합니다...🙏
파자소암이라는 화두에
문뜩~~~
백장회해스님의~~~
아까는 슬퍼서 울었고
지금은 기뻐서 웃는다~는 말씀이 생각나네요~~~🌿🎶🥰
ㅎㅎㅎ~~~
오랜만에 야식이 생각나
라면에 파송송 계란 탁~~~마지막에 식은밥 반공기!!~~~바로 이맛이에요~~~오늘도 고생하셨네요, 편한 밤 되셔요~~~✨🙏
초견성한지 3년여 지났지만 아직은 확연하지도 못하고
경계가 나를 집어삼키니 그저 모를 뿐입니다.
그저 이번 생에 본성을 확인한 것 만으로도 감사할 뿐입니다.
오직 모를뿐.. 그리고 오직 할뿐입니다.
두분다 선각자임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저의 소견으로는
두분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인연법을통해 부동심을 유지하려했던게 아닌가 싶어집니다
저의소견도 여러가지 드는 생각들이 스쳤지만
확고함에는 자신이 없어집니다
말씀 감사드립니다🙏
부처가보면
도 아닌게없고
범부에게는
업 아닌게 없다
나무아미타불 ㅡ😂
자무스님...
좋은인연입니다
파자소암...
깊어가는 가을날 아침
ㅈㄱㅎㄴㄷ _()_
스님은 객체로써에 경계 이고,
부처님은 실상에 바라봄 입니다.
자신의 깨달음이 삶에 일치하도록 살아내는것이 수행아닐까요..날마다.
깨달음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잘못 깨달았거나 스스로에게 속은것 아닐까요
자신이 다 깨달았다고 착 각한것이죠
그래서 진실로 깨달은 사람은 그의 삶을 보면 알수있다고 했지요. 깨달은 사람이 타인의 본이 되는 행실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적인 깨달음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육바라밀의 대승적 가르침과 어우려져야 원만한 인격완성이 나타나고
중생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라한과 부처의 차이이기도 하죠..
간단하네 수십년의 깨달음에 대한 집착을 마음에서 내쭟고 불로 태워 흔적조차도 없는 무아가 되라
다가온 중생하나 제대로 보지못하니 어찌 공부했다 할까요.
나에게 일어난 현상이 아닌 고통스런 중생으로 봤더라면 합니다.
나무 관세읗보살()()()
이 스님이 한 법문을 마무리하는 듯
모두 인연일 뿐이라는
눈 밝은 인연을
감사합니다 스님 ㅎ
이번생에는
수다원 과위도 만족함
니다,,복과 덕이 부족
하니,,,ㅎㅎ ❤❤❤
자신을 수다원에 가두지 마십시오 ㅎ
스님
감사합니다❤❤❤❤❤
부처님은 이해할수없는
불가사의한 분임니다,,,
좋은인연...좋은말씀...
고맙습니다 ~_()_
스님, 고맙습니다.😊
스님감사합니다
❤
스님은 경계를 설하시고
부처님은 본질 그대로를
말씀 하신것은 아니신지...
아직까지도 나가 주,객으로 나뉘어져 있으니까 계속해서 문제(번뇌망상)가 발생하는 것이다.
가도 가도
간것이 없고
해도 해도
한것이 없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인로왕보살 임종영가영접
옴제세제야 도미니 도제삿다야 훔바탁~항마 감사합니다
진짜 깹니다.
후학들의 아전인수식
해석으로
재물 수집에 집착하여
혹세무민하면
따르는 무리들을
세뇌시켜 가스라이팅
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하다가 종치는 것들.
항상,경계하여
두루 널리,인간 세상을
이롭게하는 삶을
살다,인연따라
흘러가야 할것입니다.
파자소암,스님의 경지는
정해진 공식대로 흉내를
냈기때문에 아직은 미숙
한 경계이며,살아있는
활활발발한 경계가 아님
니다,,저라면 뽀뽀한번하
고,히히웃으며 농을 하겠
읍니다,,
부처님의 경계는 모르겠
읍니다,,, ❤❤❤
스님의 말씀은 에고의 경계를 말 하는 것이고, 붓다는 깨침 본질 그대로를 말씀 하신 것이다. 이런 문제를 켄월버 식으로 착각, 오해하신 분들이 많기에.... 이런 관점은 붓다의 가르침을 왜곡한다.
많은 분들이 켄월버식 사고 관점에 동조하나, 그것은 에고의 한계로 불(붓다), 조사의 깨달음과는 전혀 다르다. 깨침을 에고에서 바라보는 것은 많은 문제가 따른다. 아직 까지도 나가 주,객으로 나뉘어져 있으니까 계속해서 문제(번뇌망상)가 발생하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육체가 온전한
부활체가 되느냐
10년 공부가
헛되이 고목이 되느냐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인다는 말이 그 사람의 영성지능에 따라 다른 것같네요.
초등학생은 더하기 빼기를 배우고, 중학생은 인수분해를 배우고 고등학생은 미분적분을 배우지요..
그 자신의 삶에서 가장 최선인 것이 최선입니다.
그래서 미분적분을 배운다고 초등학생 보다 높다고 말할 수 없고
인수분해를 배운다고
중간단계가 아닙니다...
사실 파자소암은 각자 자기 자신의 식과 경계에 따라 해석되어집니다.
🙏
저도 꼭가고싶은 식당이네요❤감사합니다_()_
공부를 할수록 인격도 좋아지는것이 올바른 공부라 생각됩니다
신도와 신앙인들은 많은데 사회가 갈수록 이기적이고 타락해간다면 부처나예수가 된다한들 무슨의미가 있을까요
짧은 소견입니다^^
그래서 선불교와 대승이 합쳐져야 원만한 인격완성이 된다고 얘기합니다...선에만 빠져 대승(자리이타의 가르침)을 소홀히 하면...선의 안목과 법의 깨우침이 있어도..실질적으로 중생들에겐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혼란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foolBuddha 저는 대승과 소승에 대해 잘모르지만 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성욕이나 물욕이 떨어져 나갈것같습니다
부처님이 파순의 딸을 물리친것은 욕정이 완전히 떨어진 경계이고 수행승의 신도 딸에게 한행동은 욕정을 참는 경계인것같습니다 제가 수행승이라면 이쁜 나비가 무릅에 앉아있는것같다라고 답했을것같습니다 짧은 소견입니다^^
노파가 의도한 시험임을 알아차리고 따듯하게 차한잔하며 정담을 나누고 돌려 보냈으면 어떠 했을까 싶네요~😅😅😅
해석하기 나름 이겠지요. 어찌 그때 그당시 그분들의 상황을 그누가 판달할수 있을가요.. 그저 오늘 지금 이순간을 제대로 살고 있는 지가 더 중요하겠죠^^;
자유자재로 (공과 색)을 ~악공취가 아닌 ~
깨달(체험으로)은 후 수행이란걸 절실히 느낍니다 어제 제기준 크게 무너진 모습도 여여히 ~~
오늘 법문 저에게 위로가 됐습니다.
불취어상 여여부동
아무것도 없는 것이 좋은 것이다
있는 그대로가 좋은 것이다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니
답이 없는 것이
참 공부다
20년동안 먹여주고 재워주고 보살펴줬으니
큰 절을 하고 편안히 하산하리
스님 ~
지금 비가 옵니다
결국 나라는 相을 버리지 못하다보니...
스님 법문 듣는것만으로도 견성할 수 있나요? 오늘도 좋은말씀 감사합니다🙏🙏
네 .. 법문듣고도 자신의 본래있음을 깨칩니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부지기수로 아라한을 증득합니다.
@@foolBuddha 답변 감사합니다스님🙏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야 시험을 통과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수행해서 견성을 했다면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최초 득력(힘)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득력해야 대답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스님
덕분에 요즘ㅈ자주 접하고 있는 법문입니다
파자소암에서
보살의 행위에 솔직히 전 이해가 안됩니다
전 스님이 공부가 되었다생각하였건만
아직도 ...
림보체도 그려러니 봐야 되는건가요
한번 더부연설명? 듣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아직공부중이라모르는게많습니다🎉
부처님은 세 여자를 보고 받는 감각의 현상의 실체를 알아서 그것을 단지 관찰하여 그저 경계에 머무를 수 있었고 다른 스님은 현상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단순히 마음의 절제만을 실행하여 억지로 계율을 지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봅니다 그래서 차가운 고독나무 같은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는거고 만약에 깨달음을 이루었다면 사랑과 자비심을 느껴야했을겁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신에게 부여 받은 사고조절자를 경험적으로 인식하여 깨달음을 성취한 분이므로 현상의 실체를 꿰뚫는 힘이 강했을거라 생각됩니다
대단하신느낀점입니다
선지가 있는 법안이십니다.
전에 저의 일상의 경험과 지금 선생님의 덕글이 오버랩되어 순간 현실자각타임(현타)~아~이거구나~ 하는 앎의 희열을 일깨워 주셔서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신에게 부여받은 사고조절자..
사고조절자는 신에게 부여받는것입니까?
멋진글 잘 읽었습니다.
단지 위에 내용이 저는 걸려서, 글 남겨봅니다.^^
1. 내 할일이 끝났도다.
2. 내 마음을 모르는 구나...
3. 알았으면 이끌었어야제...
문 밖 이야기,
해오 만이 가득하구나...
파자소암 고사에서 스님이 계를 지키는 데에 충실한 나머지, 중생에게 자비심을 베푸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음주식육 막행막식하며 깨달은 자의 무애행인 양 하는 가짜들이 적잖은 세상에, 그 정도의 성취도 대단한 것이라 평가해드리고 싶습니다.
스닝설법의. 진목을면. 알아들었다면. 공부가 익어 가고 있는 사람이죠 ㆍ 그래서 보조는. 깨달은. 후에도 목우행을 강조. 하지요
부처님께서 파순의 세 딸을 항아리에 담긴 똥덩어리라고 한 것은, 결국 유혹하는 세 딸 또한 부처의 마음 속에 있음을 말한 것이나,
파자소암의 스님은 자신과 자신을 유혹하는 딸을 차가운 고목과 매미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현실과 유사한 모습 그대로 빗대어서요.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항아리와 똥덩어리라는 분별된 단어를 쓸 수밖에 없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흔들리는 마음을 하나로 보았느냐 나와 대상으로 구분했느냐, 경계를 두었냐 두지 않았냐가 가장 큰 차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만약 만물이 불성의 힘으로 작용한다면 불성자체에는 선악이 없습니다
다만 인과가 있음으로 다시 나지않음을 목표로하는 수행자라면 8정도를 지키는것이 맞다고봅니다
짧은 소견적어봅니다
부처님이나 그 스님이나 한 행동은 똑같죠. 다만 보살이 깨달은 자라면 어떻게 해야한다라는 상이 있었던거고 그 상은 자유롭게 뭐 여자를 취하는 액션이었던거고 그거에 반하니 그 스님이 깨달은 자가 아니라고 판단한거고요. 부처님은 신성시 되니 무슨행동을 하더라도 그거에는 다 합당한 연유가 있으리라는 상이 있으니 부처님의 행동에는 토를 달지 않는것이죠. 우리는 그니까 부처님과 다른 스님들 중생들이 다르다는 상을 가지고 있는겁니다. 그런 상을 가지고 있는한 자유는 요원한 일입니다.
법다운 안목이십니다...
우리는 부처님과 그 스님은
다를 것이다..라는 상을 세우고 이미 문제를 풀고 있는 것이죠.
소승이 다른 것처럼
얘기하였기 때문에..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사실 이 공안에는 수 없는 풀이가 있습니다.
저 마다의 식과 경계에 따라 달라지죠..
글쎄요 ㅠㅠ. 뭔차이가있는지요. 아리송합니다
스님 견해를 듣고싶습니다 ❤❤❤❤❤
황진희는 늘가진 불성의 덧없음을 알고 측은지심에 지족의 불성을 덮어주려 했고, 지족은 불성이 소멸되더라도 오는 인연 받아줌으로 초불성을 얻은 것 같소이다. 다 가지고 있는 불성을 버릴 줄 알아야 또 다음 단계로 넘어가나 봅니다. 누군가 만든 게임에 던져진 존재이라 끝이 없겠지만요. 에전에 우월적이거나 초월적인 존재들이 한계를 느끼고 차라리 독수리나 사자로 태어나겠다고 독백을 했겠죠.
파자소암 : 이 역시 아래 붓다의 상태와 흡사합니다.....자신을 거두어서 온전히 진리증득 할수있도록 모든것을 쏟아 부어 지원하는 노파의 딸이 와서 무릎에 앉는다면.......노파의 크나큰 은혜를 생각하여 안아주면서 은혜에 감사한 마음을 표시했다면.....그는 이미 진리 자체가 되어 진리로 살고있음이 증명되었을텐데, 아직 깨우침이 부족하여 머리로 얻은 선지직으로 미혹에 흔들리지 않는 듯한 행위를 하였음을 노파는 간파하고 스님을 쫒아냈던것입니다. 사실상 여기서는 스님보다 노파가 더 깊이 깨운친 사람이며, 이런 이야기는 후일에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스토리로 보여집니다. 진여상태에서는 선과 악, 깨끗하고 더러움, 행과불행 등의 구별이 없습니다 이는 모두 상대성 세상의 분별일뿐입니다 자무스님의 법문 즐겨듣고 있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네 맞습니다..후대에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내용이죠..
수행과 계행, 자신의 청정함에
갇힌 수행자를 한 단계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노파를 설정한 우화라 할 수 있습니다.
죽어있는 선을 하자 말라는 뜻이죠.
선과..대승적 가르침이 어우려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선의 안목과 법의 안목은 높다하여도
대승적 삶과 어우려 지지 못하면
안된다는 의미이기도 하죠.
차가운 바위위에 떨어진 나뭇잎이나
고목나무의 매미는
곧 죽은 선이라는 뜻입니다.
경계와 모양만 흉내낸 허식으로
대승적 싦천이 아닌...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관념적인 경계심으로
수행이란 틀에 갇히지 말고 어서 나오라는 것이죠.
십년十年공부
>>> 심념心念공부
도로 아미타불
응무소주 이생기심
스님의 법문에 생각을
개입시키지 않음 됩니다.
부처님은 말씀 뿐만 아니라 본인의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가르침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혹 시시비비가 있다면 부처님의 언행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자신의 깨달음에 의문이 있다면 미진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혹시 자신의 깨달음 이상의 것이 있는 지 모든 존재계 비존재계를 다 뒤져 보신 후
더 이상의 것이 없음을 확인 후 무상정등각을 선언하셨다고 합니다
성철스님도 오매일여가 되지 않으면 아직 안 된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명확한 기준이 있음에도 딴소리가 나오는 것을 경계하시기 위해
부처님은 깨닫지 못한 자는 설법하면 안된다는 금기까지 내리셨죠
부처님 열반 후 칠엽굴의 1차결집 때 부처님을 평생 곁에서 시봉한 아난이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이유로
쫓겨난 일화를 보더라도 깨달음의 기준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아시고 용맹정진 하십시다
😅 일수사견의
이현령 비현령 😜
▌파자소암의 이야기를 듣고
본디 답이 없음이다. 그 답은 이것을 보고 듣는 자기자신에게 있다.
자기자신이 부처이면 부처이고
자기자신이 부처가 아니면 부처가 아니다.
답은 이 노승의 잘잘못도 아니고 노파의 잘잘못도 아니고 그 딸의 잘잘못도 아니다.
이 노승도 아니고
이 노파도 아니고
그 딸도 아니다.
있다면 오직 이것을 받아들이는 나에게 있다.
이것도 옳다면 이것이 옳고
저것도 옳다면 저것이 옳다.
아무것도 변하거나 바뀐것은 없다.
있다면 내가 변한것이다.
누구에게도 답은 없다.
단지 그러함이다. 그러니 이렇게 된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 화두는 그저 우리의 마음을 떠보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야기에 심취 되어 재미있어 하는 당신이나, 이것이 맞다 저것이 맞다 고뇌하는 당신이나
다 같은 당신이지만 끌려가지 않고 항상 같이 있는 너는 무엇이냐
"무엇이 중한디"
를 알라는 말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항하는 것은 지속될 뿐
위에 이야기를 듣고 몇마디 적어보니 이런 생각도 불현듯 떠오릅니다.
저항하는 것은 지속될 뿐, 칼융의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처럼 유튜브를 보거나 이야기를 듣거나 즉 어떤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면
우리는 이것을 회피하거나 극복하거나 아니면 비우려 합니다.
즉 다가오는 온갖 상황들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실상은 회피 극복 비울 수 있을까요
핑크 코끼리 생각 하지마 하면 무조건 핑크 코리를 생각하는 것이 현상의 법계입니다.
현상으로서의 나는 이 현상계의 법칙에 의해 무조건 지킬 수 밖에 없음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나(현상으로서의)가 듣는다면 이것은 끓임없는 이야기 이지만
이 이야기를 듣는 나(전체로서의)나가 듣는다면 이것은 거짓도 진실도 아닌 이야기라는 것 이지요
이 파자소암의 이야기에서 저가 느낀점은
이 마음(주체로의 자기에서 생기는 생각)을 하게하는 마음(전체로의 자기있음)에서
이 마음(주체)을 이 마음(전체)로서 보아야 모든 현상의 무상함을 알아야 된다는 교훈으로 다가옵니다.
스님덕분으로 이런 인연을 받아갑니다. 감사합니다.
법다운 말씀 감사합니다
노파는 부동의 경지를 이룩한 스님을 한차원 높은 경지 즉 보살 의 삶으로의 인도하고자 한 것입니다.
좋은 견해십니다..
스님은 감관의 통제가 가능해진 계청정을 이룬 단계의 수행자이고, 부처님의 경우 아직 확철대오 전이라고 하더라도 위빠사나 통찰지를 이미 얻어셔서 아름다운 여체와 불같은 욕망의 무상, 고, 무아를 반야지혜로 꿰뚫어보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짧은 소견입니다:08
법다은 견해이십니다...
초등학생은 더하기 빼기를 하는게 최선이고 고등학생은 미분적분을 푸는게 최선입니다.
여기에 무엇이 옳고 그름은 없습니다.
무엇이 높고 낮음도 없습니다.
그 자신의 삶에서 가장 최선의 삶이 무엇인가? 그것이 명답입니다.
초등학생은 더하기 빼기를 하는게
법다운 법입니다.
보살이 스님을 쫒아낸 것애 대한 답변
부처님이 세 여인을 관한 답변에는
수 없는 공식과
답이 나오지만...거기에 꼭 이거다라는 정답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 자신의 식대로 답은 풀어집니다.
밥과 잠은 먹지 않으면 죽어 버리니
수행할 수 없지만
성적욕망은 다른것 아닌가요?
성적인 욕망을 승화시키지 못하면 일반적으로 삼계중 가장 낮은 단계인 욕계도 못 벗어난다고 얘기를 합니다. 색계와 무색계는 성이 사라진 세계이구요.
26:28 26:28
본디경계가없는디 파리는똥을 찿아가고 나비는 꽃을 찿아가고
스님 개인적 연락이 가능할까요?
아직 개인적인 연락은 취하지 않습니다. 인연길이 열리겠지요..감사합니다
어제 밤에 스쳐 지나가는 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술을 먹고 운전해서 사고를 내어 사람을 다치게 한 경우 술이 문제인가 사람이 문제인가?
돈 많은 부자가 사람을 다치게 한 경우 돈이 문제인가 사람이 문제인가?
신통력이 뛰어난 무당이 사람을 다치게 한 경우 신통이 문제인가 사람이 문제인가?
타력의 신을 받은 스님이든, 도사든, 목사든, 신부든, 무당이든 그 사람이 병신이면 모시는 신도 병신으로 평가 받겠지요?
결국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죽기전까지 온 지구에 있는 물질을 다 이용해서 자유의지로 선택하여 체험하면서 그 경험의 끝에, 결국 죽을 때 가져가는 영에 가까워진 혼의 완성, 의식의 수준만이 남을테니깐.
모든게 지극히 개인적 차원의 성장만 있을 뿐 타인의 평가는 의미가 없습니다. 지구에 78억개의 우주가 있고 우리 모두는 각자 성장하는 우주인겁니다.
결국 인간이 되어야 술을 마셔도 술이 문제가 없고, 돈이 많아도 돈에 걸림이 없고, 육신통이 있어도 신통을 잘 쓰겠지요.
우리 모두는 하나의 우주속에서 서로 다른 우주를 만들어 갑니다.
《파자소암》에
등장하는 선승이
인도의 (카마수트라)
책을 마스터했으면
훌륭한 선승으로
법명을 날렸을지도
모를일.
그냥,그렇게 생각해
봅니다.😅
하하하 ~~ _()_
노파가 경지가 높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부처와 스님의 차이는 지혜입니다.
돌부처는 필요가 없죠~
그냥 소견이었습니다.^^ㅋ
노파를 통해 '죽은 선을 닦지말라' 는...얘기라 할 수 있습니다.
대승적 삶이 결여된 삶은 그 선이 아무리 높아도 죽은 선이란 것이죠
스님은 남여라는 성적인
분별심에 걸려서
인연의 경계를 아직 넘지못한것이고.!
부처님께서는 아무런 경계심이 있고 없고가 없는 무유정법 이지만.!
단지 깨달지못한. 중생들의 어리석은 생각을 보고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스님이 마음의 장애에 걸린거 아닌가요? 아상? 수자상?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내지 못했다?
노파는 그동안 자신의 지극정성한 수행
뒷바라지에 대한 스님의 보답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했고...그래서 스님이 딸과 결혼하기를 간청하기를 원했을것이다
그런데 딸을 품지조차안하고 내쳤으니 배은망덕하게 여겨서...ㅎㅎ
중생의 근기가 본성
마하반야바라밀 _()_
하하하..😊
하하...
오늘 최고의 명답입니다.
사위 삼으려고,
스님 봉양을 했더니만
이 돌중이 모른체 쌩까네.^^
어려은 문제이긴 한데,
그 스님이 그 처녀를
안아도 안되고,
내쳐도 안되고,
어중간해도 안되는데
어떻게 해야 할꼬?
여기에 틀린 말 한 마디가 있으니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문제에서
많은 사람들이 문제가 해결된 문 밖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많아도,
나가는 문을 통과하는 바로 그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은 드물지요
그 문을 나서는 순간을 드러내지 못하면
문 밖 답을 맞추어도 해오자에 불과하지요.
기생 황진이의교태에
지족선사는 파계했다
하여 스스로 어딘가에서?
천불 천탑을 세우면서
남은 여생을보냈다고
전해지고,
조선중기의학자
서경덕 선생은
황진이의 온갖교태
에도 끄덕없자
황진이는 서경덕 선생
을 평생의 스승으로
존경하며,살았다
하는데, 그렇다고
누가 지족선사한테
돌을 던질것이며,
서경덕 선생한테는
손뼉을 칠것인가?
야유와 환호는
사람마다 틀릴것.
아마도,서경덕선생은
고자 였을지도모를일🤣 🤣
마음이 어린후이니
하난일이 다어리다
만중운산에 어느님
오리오마는
지는잎 부는 바람에
행여긘가 하노라.
ㅡ 서 경덕 ㅡ
찾아오던 황진이의
발길이 뚝 끊겨버리자.
환장할것같은
마음을 달래면서
서경덕이 지은시조
입니다.
😅 😅
푸 하 하 하...
그래서 춘원 인지가 소설에서
새벽에 황진이가 보니 그 물건이 크게 일어나 있더라 하고 써놨더군요.
황진이가 스승으로 모실 정도면
그것에 경험많은 황진이가 그것도 확인 안해봤겠어요?^^
파자소암에서
얻어야할 교훈.
중생제도에는 유도리와 텐션,
테크닉이 필요하다.
방편을 모르면
승려로써 낙제점.
좋은 말씀입니다. 유도리와 텐션이 없는
관념의 경계에만 묶인 교과서적인 행동은 죽은 선이죠..파자소암은 죽은 선을 닦지 말고
대승으로 나아가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습니다.
스님이 말씀하시는 께달았다는 사람중에 정말 께달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뭉둥병 걸린 여자랑 잔분은 분명 께달은 사람이 맞을 가능성이 높구요
이분은 여자의 요구를 들어 준것이지 성욕때문에 여자랑 잔것이 아니구요
달라이 라마는 그냥 바지사장 이죠
어릴때부터 수도승으로 지냈다면 아무리 늦어도 20대가 되기 전에 전생을 기억 했어야 함니다
어릴때 전생이 기억 있었는데 지금은 모른다? 이거 완전 전생자를 본적도 없단 소리죠
전생의 기억이 점점더 선명해 진다고 말해야 함니다
스님께서 께달은자를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께달은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께달은자가 아닌데 그들을 보고 잘못 판단하신거라 생각함니다
불지른 이야기는 따님을 무시해서 화난거죠. 정확한 답변은
당신의 몸은 따스하고 이쁘지만
당신에게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대답해야 함니다
선의 안목과 법의 깨우침이 있다해도..사실 대승적 삶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반쪽 깨달음이죠...
자무스님 ᆢ 스님은 산것 입니까?
죽은것 입니까?.
여기에 많은 분들이 글을 올리셨는데.
여러분들은 산것 입니까? 죽은것 입니까?
죽도 않고
살도 않고
중간도 아닌 이것은
이뭐꼬?
여기에 틀린 말 한 마디가 무엇이오?
@@jungchaeheejung8207
이미 틀리셨습니다.
예끼 여보슈 ~~^^
@@주경란-c2h 틀렸습니다.
예끼 여보시요~~~^^ 하셔야죠.
@@거목-q9j
갑남을녀도 다 하는 그런
문 밖 소리는 하지말고,
문 나가는 소리를 해보시오.
부처의 언행 : 아름다운 여인을 똥항아리에 비유한 것은 똥은 더럽다는 분별이 전제된 것입니다......똥이 방에 있으면 오물이지만 밭에가면 소중한 거름입니다 똥은 똥일 일뿐입니다.....본인은 똥항아리 아닌지요? 그 여성들중 누구는 후일 왕비가 되었을때 똥항아리라고 말한 업보때문에 부처는 큰 곤욕을 치르게 됩니다 이당시 부처는 견성후 아직 보림이 부족하여 온전한 진리 자체로 살고 있지 못했던듯 합니다....... 양변의 경계를 넘어 온전하고 확고한 진리로 살고 있다면......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 그대들의 외모는 꽃보다 아름답구나 그러나 우리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고하여 상대여인들을 칭찬하면서 동시에 진리에 대한 구도의 마음이 일게 하였다면 후일 악담에 의한 업보도 없었을 뿐더러 어쩌면 출가 제자가 몇명 늘어났을지도 모릅니다........아름다움을 아름다움 그 자체로 보지 못하고 당사자앞에서 그런 악담을 하는것은
아직 진리로 살고있지 못함을 드러내는 것일뿐입니다. 붓다의 권위에 눌리지 말고, 진여에 머물러 세상을 바라보면 똥보 붓다도 모두 진리의
한부분에 불과합니다.
이런 얘기들도 다 후대에 지어낸 얘기일 것입니다.
실제로 여인을 볼때 아홉구멍을 통해 나오는 똥과 오줌과 고름과 피를 생각하라며
부정관 수행을 강조하셨지만...
인간의 몸..자신의 몸과 너무 혐오한 나머지
자살한 수행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후에..부처님은
자비관 수행을 가르치셨습니다.
부처님의 많은 설법도
여러 문제점들을 보완하며... 그 자신의 45년의 세월동안
갈고 닦여진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몇 천년을 이어오며
더 다듬어지면서...부처의 원음이 아닌 경전들이 다수 출연하지요
세상은 알수가 없으니 딸이 그와같이 한데에 화가 났는지? 고목이란 표현에 자신과 비유해 나이비하로 받아 들였는지? 아님 자신의 뜻을 제대로 공감하지 않는 것에 마지막 시험에 역시나 였는지? 궁금증만 일으키려는 알수 없는 이야기 인 듯~~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성욕이 안난다면
그 놈이 바로
마귀지요
성 행위를 하든
좋다 나쁘다
비교 판단하지 않는게
부처지요^^_^^
마음장상도 몰라요?
왕건 동상을 발견했는데,
고추가 어린애 그것만해서
이상하다했는데,
수행을 잘해서
부처님 32상처럼 마음장상이 되었답니다.
내같으면 뽀뽀를 하고나서 *너는 어떠냐* 라고 묻겠다
여러분들 제발ᆢ
내면에 성품을 보세요.
이 육신은 법당,성당,교회 ᆢ와 같아서
그안에 부처님,하나님,예수님ᆢ들이
모셔져 있듯이 우리 육신 내면에
우주를 초월한 순수 절대가 있습니다.
이 성품을 보시면 모든 의문이 풀립니다. 한번 해보세요.
단, 머리로 생각하면 않됩니다.
머리로하면 성품을 볼수없어요.
절대로 ᆢ
그냥 분별일뿐
거기에 무슨 뜻이 있는냥 얘기해서 사람들을 또 분별속으로 몰아 넣습니까
그냥 그자리에서 일어난 연기 작용일뿐인데
스님은 계를중시했고 인위적으로 욕정을눌러 자신을황폐화했지요 깨달음은 어떠한목표나 수행해서 도달해야하는 종착지가 아니지요 그냥 이대로일뿐인걸요 부처님은 보이는그대로 말씀하신듯해요 겉모양은 항아리처럼 매끈하고 이뻐보이나 속마음은 애욕으로 유혹하고있으니...똥으로비유한듯 조금과한듯 그냥요즘말로 쌩까면 됫을것을...
실제로 여인의 몸을 볼때 똥과 오줌과 고름으로 관해서 애욕을 없애라는 부정관 수행이 있지만.. 싯다르타가 실제로 그롷게 관했다는 것은 다 후대사람들이 지어낸 얘기일 겁니다..
본성의 자리에선 분별이 일어남을 알뿐 분별과는 무관하기에 분별로 인한 결과는 일어나지 않음. 세여자가 나타남을 알지만 인연에서 벗어나 계심으로 과가 일어나지 않음.
계율의 지킴은 옳고 그름의 분별을 만들고 지키려는 의지와 생각을 만들어 결국 인과를 만들어냄.
석가모니부처님은 인과의 세계를 벗아나 계시고 스님은 아직 인과의 세계에 머물고 계십니다.
파자소암
스님. 질문이 있습니다. 조금 다른 면에서 본다면..
부처님께서 ‘항아리에 담긴 똥덩어리’라 하셨다고 했느데 이걸 ‘화두’라고 혹 본다면 ’항아리에 담긴 똥덩어리‘라는
말에 걸려 우리가 분별에 떨어진다면 진리를 보지못함이요, 만약 그 말에 떨어지지 않으면 본성을 보게 되는거 아닙니까? ’항아리기 마음이요 똥덩어리가 여인이다‘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본성에선 멀어지지 않습니까? ‘‘말라죽은 고목에 붙은 매미 같다’도 마찬가지라고 본다면 결국 부처님이나 그 스님이나 ‘본성’을 말하고 있는데 지금 받이들이는 우리나 그 보살이 망상과 분별에 빠져 ‘본성’을 보지 못하는게 아닙니까? 결국 지금 즉시 보지 못하는 우리가 문제아닙니까? ‘화두’라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솔직히 전 부처님께서 저렇게 ‘분별’을 일으켰다는게 믿겨지지 않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관하셨다고 하시면 이해가 되겠는데 굳이 저런 ‘망상’을 만드셨다는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뭔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궁금해서 여쭙니다.
그리고..늘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법다운 견해이십니다
우리는 이미 그 승려와 부처님과는 다를거라는
분별로 그 상황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항아리에 담긴 똥덩어리로
관했다는 것은 후대에
어떤 목적으로 지어낸 우화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이라는 권위에 눌려
법의 실상을 바로 관하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
있는 것이죠..
하루는 부처님께서
법문을 마친후 사부대중에게 너희는
내 말에 신심을 갖느냐는 말에 모든 사람들이
믿습니다 라고 했지만
오직 사리불만이
부처님께 일단 바르게 사유해보고 따르겠습니다 라고 답변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옳다 역시 너는 지혜제일이구나!"
부처님이든 부처 할애비든
항아리에 담긴 똥덩어리로 관했다면
초등학생 수준인거죠..
물론 애욕에 빠진 중생에겐 방편으로
부정관 수행을 하라고 말씀하셨을 겁니다
@@foolBuddha 감사합니다~👍
글쎄요 ㅠㅠ. 뭔차이가있는지요. 아리송합니다
스님 견해를 듣고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