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서옹스님의 그 말씀에 동의하고 의문이 있습니다. 스님이 화면에 죽비소리를 내면 그걸 알아차리는 뭔가 있다는건 알겠지만 분명 이 소소영령한 이 놈은 전신마취를 했을때는 작동하지 않았거든요. 그럼 이 놈이 불생불멸의 그놈이 맞습니까. 분명 생일 이전에도 이 놈은 있어야하는데도 전 그 소소영령함의 그 놈이 되어본적이 없거든요. 그런 경험이 없는데. 이 놈이 그놈 맞습니까 스님. 이건분명하게 지금 오온이 성성히 느껴지는 인연이 작동하고 있을때만 나타나는 놈이 아닌가요? 인연이 다하면 우리는 경험할수없는데 ..이 점이 제일 의문점입니다. ..
사실 오온이 공하다고 알아보는 그것도 오온이 하는 일입니다. 사념처 수행에서 몸이 공하고 마음이 공하고 느낌이 공하고 법이 공함을 알아보는 것도... 그것도 다 의식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편의상, 각이다. 알아차림이다..주시자다, 관찰자다 하지만 그것도 사실은 하나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다시 알아차림 하는 것입니다. 공은 공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공은 공이기 때문에 공의 부재를 공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공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잠들었다 해도..그것은 의식이 잠든 것이지 소소영영한 그것은 사실 깨어있습니다. 다만 그 깨어있는 그것을 알기까지는.... 공이 공임을 알려면 ..색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깨어나면 나는 잠을 잤다..그것을 경험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온을 빌려서 오온의 공함을 보고 깨치고 색을 빌려서 공에 다가가지만 공에 이르면 그 색은 사라집니다. 달리 말하면 법신은 법신 그 스스로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소소영영한 그것은 반드시 색을 통해서 인식(인식이라는 말도 틀리지만) 되어집니다. 오온으로 형성된 연기적 자아를 통해...그것은 보여집니다. 보여진 그것을(말로 설명할 수 없는) 통해 우리는 비로소 오온이 내가 아님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색을 통해서 공이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유를 통해서 무를 관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의 의식이 있어서 의식 너머의 그것을 유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식이 벌이는 모든 일은 아무리 정교한 말과 언어를 빌려도..한계가 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모를뿐입니다. 오직 모를뿐이 되면..대상도 의식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이 선이 되고 진리가 됩니다.
저는 정말 깨달음 종교 자체에 아무 관심도 없었는데 나무사이에서 태양빛이 저를 따뜻하게 비춰줘서 그순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깨달음은 정말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올지 정말 모르죠 내삶을 제대로 보는법을 몰랐던 나를 발견하는 순간 시작됐던거 같습니다 저는 그랬던거 같습니다 🙏🏻
처음 직장에 들어가면 긴장도 되고 잘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구성원들과 잘 지내야겠다는 생각도 들어 간절하게 집중해서 최선 을 다합니다 내 생각이 일어날 틈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면 직장에서 인정도 받고 보람도 느끼고 만족하니 행복이라는 환상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일이 익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편해지면 그때부터 자기의 비교 판단 평가가 작동합니다 그 생각이 본인도 괴롭고 타인도 괴롭게합니다 그렇다고 아예 생각을 안 하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생존욕구 인정욕구가 거의 전부입니다 나 역시도 그러할진데 타인은 그렇지 않겠느냐 라는 긍정적 생각을 일으켜 타인을 위한 안심법문과 지혜로운 작용으로 살아갑시다 생각은 괴로움의 근본이나 생각은 삶을 살아가는 희망을 주고 원동력이 됩니다 동전 앞뒤, 밝음 어둠, 손바닥 손등과 같이 생각은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하루를 간절 집중 최선으로 살아갑시다 그걸로 족합니다 바보스님이 아니시고 대박스님 이신데요😄❤👍🙏
육체의 고통은 느낌이며 자연스런 것이며 고통을 없애서 특별한 경지를 얻는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고통을 느낍니다. 깨달아도 고통은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고통을 아는 이것은 고통을 스스로 알지만 고통에는 물들지 않습니다. 특별한게 아니며 지금 누구나 다하고 있는데 이걸 자각하지 못할뿐 입니다. 그림속에서 불타는 장면을 보더라도 뜨겁지 안듯이 고통을 보는 이것은 고통에서 자유롭습니다.
소승도 그 영상을 보면서 너무도 흐트러짐 없는 초연한 자세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아래 댓글의 수수님 말씀처럼 고통을 자각하지 못하는 마취상태가 아니라 고통에 다만 물들지 않을뿐입니다. 우리나라의 충담스님도 장작을 쌓고 스스로 몸을 태운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이 사실을 이론적으로 깨쳤다해도 그처럼 초연한 자세를 갖기란 쉽지 않습니다. 감히 흉내낼일도 아닙니다 아픈건 아픈거고 고통스러운건 것은고통스러운 것이니까요. 그래서 실질적인 돈오가 매우 중요합니다 본성에 대한 그 자각이 뚜렸하여 경계에 여여하면 깊은 삼매의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틱광득 스님도 가부좌를 틀고 깊은 정에 들어 불타는 자기 몸에도 여법할 수 있었던 것이죠. 간단하게 실험하자면 자기 살을 한번 꼬집어 보세요. 누가 아픕니까? 자각하는 그것은 여여하지 않습니까? 그 여여함은 늘 언제나 여기에 주어져 있습니다. 그 여여함이 심화되면 습에 물든 몸과 마음의 동일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됩니다. 그것이 열반이고 해탈이라 할 수 있죠
지금이자리에서 알아차리는 그러니까 뭔가 생생한게 있다 왜냐하면 꿈이든 뭐든 눈앞에 펼쳐져있으니 뭔가가 작동하고 있다라는것 까지는 이해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알아차림의 시작전과 종료후에 이 알아차림이 어떤 상태로 있는지는 모르는거 아닌가요? 즉 불가지론 아닌가요? 우리는 우리의 부재를 경험할 수 없으니까요. 부재를 경험하면 그건 부재가 아니라 뭔가 있는 유재라는건데. 우리가 이런 알아차림이 뭔지 아닌지 깨달음을 전하고 맞다 아니라 이렇게 이야기할수있는것도 지금 우리가 꿈이라는 인연의 매개체를 바탕으로 조건으로서만 가능한 이야기인데, 이 꿈이라는 조건이 사라지면 그 알아차린다는 상황도 사라지는거죠. 전 여기까지밖에 이해를 못했습니다. 각자분들은 이 조건이 사라진 상태에서도 뭔가 없는데 묘하게 있다 이런식으로 말씀하시는데 그건 아무도 증명 못한거죠. 왜냐면 부재를 경험하지 못하고 또 부재를 경험한상태에서 지금 꿈의상태로 돌아온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지금 묘하게 있다 이런식으로 말하는건 오직 지금 꿈을 꾸고있을때만 꿈의 힘을 빌려 그 안에서 말을 할수있는거 아닌가요..
주시자는 주시하는 대상이 있음으로서 주시할 수 있고 주시의 대상 또한 주시자가 주시를 하기 때문에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연기함으로써 나타나고 인연이 끝나면 동시에 같이 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시자 또한 불변하지 않고 공하기 때문에 자성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누구나 첨엔 집 밖에서 수없이 헤매고 찾지요~ 수없이 실패하고 찾아봐야 아니라는것을 알고 내면으로 들어가지 않을까요? 몸과 생각과 감정에 붙어있는 의식을 어떻게 깨울 수 있을까요? 내안의 상처를 지켜보고... 명상하고... 그러다보니 서서히 지켜보는 힘이 생기고... 그러면서 몸과 생각 감정에 붙어있던 의식이 조금씩 분리되고.. 의식이 점점 강해지면서 내 정체성이 몸과 마음에서 벗어나 지켜보는자로 옮겨가지요 ~
저도 서옹스님의 그 말씀에 동의하고 의문이 있습니다. 스님이 화면에 죽비소리를 내면 그걸 알아차리는 뭔가 있다는건 알겠지만 분명 이 소소영령한 이 놈은 전신마취를 했을때는 작동하지 않았거든요. 그럼 이 놈이 불생불멸의 그놈이 맞습니까. 분명 생일 이전에도 이 놈은 있어야하는데도 전 그 소소영령함의 그 놈이 되어본적이 없거든요. 그런 경험이 없는데. 이 놈이 그놈 맞습니까 스님. 이건분명하게 지금 오온이 성성히 느껴지는 인연이 작동하고 있을때만 나타나는 놈이 아닌가요? 인연이 다하면 우리는 경험할수없는데 ..이 점이 제일 의문점입니다. ..
불생불멸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군요.
비슷하게 불상부단이란 말과 비추어 보세요.
사실 오온이 공하다고 알아보는
그것도 오온이 하는 일입니다.
사념처 수행에서 몸이 공하고 마음이 공하고 느낌이 공하고 법이 공함을 알아보는 것도...
그것도 다 의식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편의상, 각이다. 알아차림이다..주시자다, 관찰자다 하지만
그것도 사실은 하나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다시 알아차림 하는 것입니다.
공은 공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공은 공이기 때문에 공의 부재를 공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공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잠들었다 해도..그것은 의식이 잠든 것이지
소소영영한 그것은 사실 깨어있습니다.
다만 그 깨어있는 그것을
알기까지는....
공이 공임을 알려면 ..색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깨어나면
나는 잠을 잤다..그것을 경험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온을 빌려서
오온의 공함을 보고 깨치고
색을 빌려서 공에 다가가지만
공에 이르면 그 색은 사라집니다.
달리 말하면
법신은 법신 그 스스로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소소영영한 그것은
반드시 색을 통해서 인식(인식이라는 말도 틀리지만) 되어집니다.
오온으로 형성된
연기적 자아를 통해...그것은 보여집니다.
보여진 그것을(말로 설명할 수 없는) 통해
우리는 비로소 오온이 내가 아님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색을 통해서 공이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유를 통해서 무를 관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의 의식이 있어서
의식 너머의 그것을 유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식이 벌이는 모든 일은
아무리 정교한 말과 언어를 빌려도..한계가 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모를뿐입니다.
오직 모를뿐이 되면..대상도 의식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이 선이 되고 진리가 됩니다.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junholee3249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답변이 너무 명쾌하십니다. 눈은 눈을 볼 수 없지만 바라본다는 경험을 통해서 그 존재가 드러난다. 감사합니다. @@foolBuddha
형식속에서 내용이 일어난다 깨달음없다고 수행안하면 깨달음은 없는것이고 수행을 계속하면 언젠가 지혜의 깨달음이 올것이다 법문듣고,염불하고 기도하고 경전읽고 하는것만으로도 얼마나 축복된일이고 소중한것인가 ~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스님의 참다운 진리법을 들을 수 있는 시절인연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정말 깨달음 종교 자체에 아무 관심도 없었는데 나무사이에서 태양빛이 저를 따뜻하게 비춰줘서 그순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깨달음은 정말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올지 정말 모르죠 내삶을 제대로 보는법을 몰랐던 나를 발견하는 순간 시작됐던거 같습니다 저는 그랬던거 같습니다 🙏🏻
태양빛
광명은
법화경을
손가락으로 가르침 입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싯점,
귀이한 말씀 감사히 경청합니다 🙏🙏🙏
핵심을 바로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중한 인연에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만사형통 하시옵소서!
아이고.. 대박 ❤👍😊
스님 훌륭하십니다 ❤👍😊
멋지십니다 ❤👍😊
스님의 귀한법문 ^^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
깨달음이란각자삶속에있다고봅닏ᆢ
각자에 깨달음이틀리기에 누구도모방할수없는 자기자신을 아는것아닐까요?
본인만이 할수있고 알수있는 내안에 힘이 있음을 아는거아닐까요?
깨달음에정의는 절에있지않다는겁니다.
짅
스님
삼배올립니다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
무명역무무명진
법문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함께 걷는 도반입니다
관세음보살 ᆢ
달을 보는게 아니라 달을 보고 일어나는 마음을 정확히 보는것ᆢ
편안한 마음으로
스님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오늘도 활기차고 평안한 하루 되시길 소망합니다...🙏
스님, 고맙습니다.🌳
좋은인연...좋은말씀...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처음 직장에 들어가면 긴장도 되고 잘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구성원들과 잘 지내야겠다는 생각도 들어
간절하게 집중해서 최선
을 다합니다
내 생각이 일어날 틈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면 직장에서 인정도
받고 보람도 느끼고 만족하니
행복이라는 환상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일이 익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편해지면
그때부터 자기의 비교 판단 평가가 작동합니다
그 생각이 본인도 괴롭고 타인도 괴롭게합니다
그렇다고 아예 생각을 안 하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생존욕구 인정욕구가 거의 전부입니다
나 역시도 그러할진데 타인은
그렇지 않겠느냐 라는
긍정적 생각을 일으켜 타인을
위한 안심법문과 지혜로운 작용으로 살아갑시다
생각은 괴로움의 근본이나
생각은 삶을 살아가는 희망을
주고 원동력이 됩니다
동전 앞뒤, 밝음 어둠, 손바닥 손등과 같이
생각은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하루를 간절 집중 최선으로 살아갑시다
그걸로 족합니다
바보스님이 아니시고
대박스님 이신데요😄❤👍🙏
_()_ 법문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인연입니다
감사합니다
어렵다.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꺼지지 않은 등불처럼 스님에 법비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ㅡ스님 거처하는 절이 어디신지 답글 부탁드려도 되는지요
소승의 수행처는 아직 오프라인에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바로 스님
법문 듣고 있는 그놈인가요
나마스테~()
오직 모를 뿐! _()_
부처님이 본무생사라 하셨거늘 본래 생사가 없는데 무엇을 생사라하는가?
이것이 일대사 인연을 직시하는 정견입니다.
모든 것은 이론, 이치로 되어 있지 않고, 이론, 이치로 설명해서 깨달은 사람이 나오면 되는 것이고, 그 이론 이치는 버리는 뗏목일 뿐이지요.
잠을 잘때 인식못하는것은 물질이 마음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물질이전부터 있는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마음이 물질과 연결되면 잠을 자기도 하지요 그렇다고 마음의 성질이 전혀 없다고
할수는 없습니다
아상이 엄청 강하더라고요 소승이 멍청해저서 듣고 있다가 인연을 끊었습니다
구할 것도
찾을 것도
얻을 것도 없는
보는 것도
보고 있는 것도
생각임을 깨달을 때
그냥 그대로의
삶이 그 자체로
완전한 깨달음이죠
잘 듣고 있습니다
스님께선 어디 어느 절에 계신지 알고 싶습니다
소승의 수행처는 아직 공개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후원계좌알수있나요?
깨달음에 너무 조바심 내지 마라. 깨닫고 보면 깨달은 자나, 깨닫지 못한자나 구분할게 없다. 그걸 아는냐, 모르느냐의 차이만 있을뿐 이니라.
항아리속 물에 비친 달 정도는 보고 있는 듯 합니다.😅😅😅
전 제가 첫기억을 기억하기전에도 즉 의식을 경험하기전 아기때도 나라는 존재ㅡ 참나는 여전히 있었구나를 통해서 자각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법문에 감사~♡
근디
하택신회는 혜능에 의하면 선사는 못될거라 했는데요?
법이 법다우면 오직 법을 논할뿐이지요.. 감사합니다
스님 어떻게 하면 틱광득스님처럼
육체의 고통을 뛰어넘을 수 있나요??? 무슨수행을 해야 그런경지에 오를 수 있는지 궁금해요
내가 죽으면 된다
육체의 고통은 느낌이며 자연스런 것이며 고통을 없애서 특별한 경지를 얻는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고통을 느낍니다.
깨달아도 고통은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고통을 아는 이것은 고통을 스스로 알지만 고통에는 물들지 않습니다.
특별한게 아니며 지금 누구나 다하고 있는데 이걸 자각하지 못할뿐 입니다.
그림속에서 불타는 장면을 보더라도 뜨겁지 안듯이 고통을 보는 이것은 고통에서 자유롭습니다.
@@수수-p8g 헤엑;ㅠㅠ 그럼 고통에 물드지않아도 느끼면 .어쨌든 고통이 느껴지니까 몸부림 쳐야 되는거 아닌가여 ;;ㅠㅠ틱광득 스님은 그렇지않던데 어떻게 한건지 ㅜㅜ
소승도 그 영상을 보면서
너무도 흐트러짐 없는 초연한 자세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아래 댓글의 수수님 말씀처럼 고통을 자각하지 못하는 마취상태가 아니라
고통에 다만 물들지 않을뿐입니다.
우리나라의 충담스님도 장작을 쌓고
스스로 몸을 태운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이 사실을 이론적으로 깨쳤다해도
그처럼 초연한 자세를 갖기란 쉽지
않습니다. 감히 흉내낼일도 아닙니다
아픈건 아픈거고 고통스러운건 것은고통스러운 것이니까요.
그래서 실질적인 돈오가 매우 중요합니다
본성에 대한 그 자각이 뚜렸하여
경계에 여여하면 깊은 삼매의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틱광득 스님도 가부좌를 틀고 깊은
정에 들어 불타는 자기 몸에도 여법할 수
있었던 것이죠.
간단하게 실험하자면
자기 살을 한번 꼬집어 보세요. 누가 아픕니까?
자각하는 그것은
여여하지 않습니까?
그 여여함은
늘 언제나 여기에 주어져 있습니다.
그 여여함이 심화되면
습에 물든 몸과 마음의 동일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됩니다.
그것이 열반이고 해탈이라 할 수 있죠
@@foolBuddha 스님 말씀 감사합니다🙏🙏
지금이자리에서 알아차리는 그러니까 뭔가 생생한게 있다 왜냐하면 꿈이든 뭐든 눈앞에 펼쳐져있으니 뭔가가 작동하고 있다라는것 까지는 이해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알아차림의 시작전과 종료후에 이 알아차림이 어떤 상태로 있는지는 모르는거 아닌가요? 즉 불가지론 아닌가요? 우리는 우리의 부재를 경험할 수 없으니까요. 부재를 경험하면 그건 부재가 아니라 뭔가 있는 유재라는건데. 우리가 이런 알아차림이 뭔지 아닌지 깨달음을 전하고 맞다 아니라 이렇게 이야기할수있는것도 지금 우리가 꿈이라는 인연의 매개체를 바탕으로 조건으로서만 가능한 이야기인데, 이 꿈이라는 조건이 사라지면 그 알아차린다는 상황도 사라지는거죠. 전 여기까지밖에 이해를 못했습니다. 각자분들은 이 조건이 사라진 상태에서도 뭔가 없는데 묘하게 있다 이런식으로 말씀하시는데 그건 아무도 증명 못한거죠. 왜냐면 부재를 경험하지 못하고 또 부재를 경험한상태에서 지금 꿈의상태로 돌아온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지금 묘하게 있다 이런식으로 말하는건 오직 지금 꿈을 꾸고있을때만 꿈의 힘을 빌려 그 안에서 말을 할수있는거 아닌가요..
주시자는 주시하는 대상이 있음으로서 주시할 수 있고 주시의 대상 또한 주시자가 주시를 하기 때문에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연기함으로써 나타나고 인연이 끝나면 동시에 같이 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시자 또한 불변하지 않고 공하기 때문에 자성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깨닫기 위해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스님 말씀대로라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즉시 깨달아서 이 세상이 극락정토가 되었겠지요. 노력없이 이루어지는게 어디 하나라도 있나요? 노력+시절 인연이 맞아야 하는게 아니가 싶은데, 이 견해도 우매한 중생의 한낱 어리석은 생각인가요?
누구나 첨엔 집 밖에서 수없이 헤매고 찾지요~
수없이 실패하고 찾아봐야 아니라는것을 알고 내면으로 들어가지 않을까요?
몸과 생각과 감정에 붙어있는 의식을
어떻게 깨울 수 있을까요?
내안의 상처를 지켜보고...
명상하고...
그러다보니 서서히 지켜보는 힘이
생기고...
그러면서 몸과 생각 감정에 붙어있던
의식이 조금씩 분리되고..
의식이 점점 강해지면서
내 정체성이 몸과 마음에서 벗어나
지켜보는자로 옮겨가지요 ~
노력없이 이루어 지는 일은 없다. 이게 고정관념이라고 합니다.
남과 나는 달라 그 남을 인정하면 이성이 드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