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2일 인조는 자신의 출성만을 제외하고 청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였지만 우물거렸습니다. 이제 청은 직접 공격에 나섰습니다. 병사들은 척화파들을 내보내라고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25,26일 서문과 동문에서 격전이 벌어졌고 방어는 성공했지만 병사들은 청군의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감지했습니다. 사신으로 간 홍서봉은 청군이 강화도를 함락했다는 사실과 증거를 가져왔습니다. 최명길도 넋이 나간 인조를 위로하기보다 그간 정세판단을 그르쳐서 세자를 인질로 보내야하고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현실도 지적했습니다. 척화파들은 홍서봉이 청에 속았다고 하였지만 병사들은 분노하여 시위를 벌였고 결국 인조는 실패를 인정했습니다.
1월 30일 항복을 앞두고 인조는 고위 관료나 흑근을 희생시킬 마음은 없었습니다. 영악한 왕은 후유증을 최소화할 희생양을 물색하였습니다. 인조는 척화신 윤집, 오달제와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나머지 한 명은 평양서윤으로 발령받아 평양에 있던 홍익한이었습니다. 실록에 선정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과거에 올린 격렬한 상소로 추리하고 있습니다. 두 신하에게 술을 내리고 마지막 작별의 말을 하면서 나라를 위해 행동을 진중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저들의 분노를 촉발하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청에 끌려간 홍힉한은 심양에 도착한 3월 5일, 윤집과 오달제는 4월 19일에 처형되었습니다. 홍익한의 처형소식은 곧 알려졌지만 다른 두 사람의 소식은 1790년 사신으로 간 서호수가 최후에 관한 정확한 기록을 발견하였습니다. 훗날 이들은 영웅으로 추앙받아 영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 1688년 숙종 시절 남한산성에 이들을 기리는 현절사 사당이 세워져 지금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인조는 처음 소현세자를 인질로 청에 보내는 것을 우려하였으나 세자를 만난 청의 장수들이 세자의 늠름한 태도를 칭찬하기 시작하자 의심병이 들기 시작하여 세자의 동태를 전해줄 첩자를 함께 보냈습니다. 소현세자에 대한 평가가 높고 때로 청의 사신들이 인조를 압박할 목적으로 세자의 즉위 가능성을 언급하자 인조의 시기심은 폭발하였고 결국 귀국한 세자 일가족은 인조에 의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장남인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포로 귀환에 노력하며 백성들의 민심을 얻고 신망을 얻어가자 이를 시기한 인조는 귀국한 세자를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어 며느리도 독살혐의를 씌어 죽이고 손자 3명도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 결국 2명을 죽게 만들어가는 비극의 연출자가 되었습니다.
남한산성의 인조가 유도대장 심기원의 동생 심기성을 무관직인 초토사로 임명하여 성밖에 나가 병력을 수습하고 팔도근왕병을 모집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차일피일 미루던 심기성은 며칠 후 관직과 임무를 반납합니다. "신은 양반답지 않게 걸음이 나는 듯했다지만 그건 옛날일입니다. 근래 큰 병을 앓은 터라 신체기능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승려나 백성들은 혼자도 움직이므로 포위망을 빠져 나가지 쉽지만 신은 양반입니다.~" 심기성의 사직서를 본 인조는 너무 괘씸해서 다시 명령을 내립니다. "다 용서할 테니 다시 출발하라." 인조시절 당시 양반들은 배낭을 멜 수 없다고 왕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유교사회에서 천대받던 승려였던 경운은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산성과 밖을 수시로 통과하였습니다. 당시 남한산성의 관리는 몇 개의 사찰이 나누어 맡았고 승려들의 네트워크는 당시 양반들이 할 수 없는 다양한 역활을 쉽게 수행하였습니다. 또 남한산성 수어청의 노비였던 서흔남은 나무꾼으로 주변의 지리에 밝다보니 특수임무를 담당하였습니다. 인조가 찾던 도원수 김자점, 전라감사 이시방과 접촉한 사람도 노비 서흔남이었습니다. 훗날 인조는 그를 면천시키고 과거급제 자격까지 주었습니다. 전쟁상황에서 반상의 규율보다 당장의 절실한 능력이 빛을 발한 것입니다. 최근 계엄 사태 속에서 고위 법률가들의 행동과 일반 시민들의 행동은 상반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마치 조선왕조가 망할 때 전주이씨 왕족들과 고위직 양반들은 일제가 주는 귀족제에 감사하며 공작, 후작, 백작을 하사하는 일본 천황에 감사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일반 민중들은 목숨을 걸고 의병에 참여하던 사실이 기억나게 하던 현실이었습니다. 계층사회가 고착화되어 계급사회로 전환되어가는 현 시점에서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국가 위난 시에 양반사회에서도 남겨두었던 계층이동의 사다리를 잔존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궁궐 공사는 임진왜란 이후 선조 시절부터 광해군 때까지 추진하면서 백성들의 고생이 많았습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수리했으나 그곳의 전력이 좋지않다고 다시 경희궁과 인경궁을 재건하였고 한양이 마음이 들지않아 교하(일산)으로 천도를 추진하면서 원성을 샀지만 외교에 있어서는 인조처럼 강경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인조반정의 명분 중에 명나라를 받들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인조가 척화를 주장할 수는 있다고 보는데 그러려면 전쟁 준비를 보다 철저하게 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호란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청나라의 정치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전통적인 호란사에 대한 이해는 청나라 사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단지 조선의 대응만 가지고 이해를 하니 정작 중요한 핵심을 놓치고 있습니다. 홍타이지는 칸에 올랐지만 아버지 누르하치와 같은 권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버일러(대족장)로 있는 형제들과 권력을 나눠 갖는 과두정 체제에서 칸을 했습니다. 공식 행사에는 홍타이지와 3명의 형들이 나란히 옥좌에 앉아서 진행할 정도였어요. 그러나 홍타이지는 뛰어난 정치 수완을 발휘 3명의 형들을 결국 모두 숙청하고 1인자가 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1인 권력 구도가 형성되자, 홍타이지는 이를 공고히 하기 위해 과두정 체제였던 '칸 체제'를 중원식 '황제 체제'로 바꾸려 했습니다. 그리고 홍타이지가 황제로 등극하는 명분으로 "만주, 조선, 몽골을 평정하는 위업을 달성함으로서 하늘의 선택(천명)을 받았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조선은 화약을 맺은거지 평정한거라 하기에 애매한 위치였습니다. 정묘화약 이후에도 조선은 후금(청)의 동의 하에 명과도 여전히 군신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조선을 확실히 제압해 조선 평정을 완료하고 홍타이지가 황제에 등극하는 것. 그것이 병자호란의 근본 원인이자 목적이였습니다. 그리고 청의 이런 사정을 전혀 몰랐던 조선은 '정묘화약'으로 마무리된 문제를 다시 들쑤시는 청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적절한 대응을 못한 겁니다. 조선은 전쟁나기 직전까지도 청과 외교 협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물론 조선의 이런 사정을 1도 헤아리지 않고 일방적 통보만 하고 그냥 힘으로 뭉개버린 청의 야만스런 외교 방식이 더 문제였구요.
맞는 말씀입니다. 홍타이지의 남한산성 포위는 1631년 명나라 대릉하성 포위작전과 유사했습니다. 10월 28일 출성한 명장 조대수는 82일을 버티나 극도의 기근으로 성문을 열었고 홍타이지는 비슷한 전략을 선택한 것입니다. 다만 예상외의 변수가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1월 16일 청군진영에서 천연두가 발생하자 홍타이지는 해빙기까지 전선을 건조하여 압록강을 거쳐 강화도를 공격하러던 계획에서 조선에서 44척의 소형선에 홍이포를 싣고 강화도를 점령하였고 왕족과 대신들이 포로가 된 사실이 전해지자 인조는 항복을 결심하였습니다. 조선 입장에서는 여진 추장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으나 항복을 마치자 홍타이지는 활쏘기와 잔치를 베풀고 홍타이지 좌측 상석에 인조를 앉히고 최고의 대접을 해주었습니다. 한양에도 들리지 않고 성급하게 심양으로 철수한 것은 천연두에 대한 공포였습니다. 당시 여진족은 천연두를 마마로 불렀고 홍타이지가 몽골 차하르부를 공략할 당시에 차하르부에 퍼진 천연두 덕을 보았지만 훗날 청나라도 3대 황제 순치제가 24세의 젊은 나이에 10대 동치제가 18세의 나이에 죽은 것도 천연두 때문으로 천연두에 대한 공포가 극심하였습니다. 마마를 하늘이 내린 재앙으로 알던 만주족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조선의 죄악을 징계하는 전투에서 마마를 앓는 다는 것이 명분을 상실하는 것이기에 이를 사서에도 은폐했으나 그 흔적은 남아 홍타이지의 기이한 철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월 22일 인조는 자신의 출성만을 제외하고 청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였지만 우물거렸습니다. 이제 청은 직접 공격에 나섰습니다. 병사들은 척화파들을 내보내라고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25,26일 서문과 동문에서 격전이 벌어졌고 방어는 성공했지만 병사들은 청군의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감지했습니다. 사신으로 간 홍서봉은 청군이 강화도를 함락했다는 사실과 증거를 가져왔습니다. 최명길도 넋이 나간 인조를 위로하기보다 그간 정세판단을 그르쳐서 세자를 인질로 보내야하고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현실도 지적했습니다. 척화파들은 홍서봉이 청에 속았다고 하였지만 병사들은 분노하여 시위를 벌였고 결국 인조는 실패를 인정했습니다.
1월 30일 항복을 앞두고 인조는 고위 관료나 흑근을 희생시킬 마음은 없었습니다. 영악한 왕은 후유증을 최소화할 희생양을 물색하였습니다. 인조는 척화신 윤집, 오달제와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나머지 한 명은 평양서윤으로 발령받아 평양에 있던 홍익한이었습니다. 실록에 선정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과거에 올린 격렬한 상소로 추리하고 있습니다. 두 신하에게 술을 내리고 마지막 작별의 말을 하면서 나라를 위해 행동을 진중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저들의 분노를 촉발하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청에 끌려간 홍힉한은 심양에 도착한 3월 5일, 윤집과 오달제는 4월 19일에 처형되었습니다. 홍익한의 처형소식은 곧 알려졌지만 다른 두 사람의 소식은 1790년 사신으로 간 서호수가 최후에 관한 정확한 기록을 발견하였습니다. 훗날 이들은 영웅으로 추앙받아 영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 1688년 숙종 시절 남한산성에 이들을 기리는 현절사 사당이 세워져 지금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인조는 처음 소현세자를 인질로 청에 보내는 것을 우려하였으나 세자를 만난 청의 장수들이 세자의 늠름한 태도를 칭찬하기 시작하자 의심병이 들기 시작하여 세자의 동태를 전해줄 첩자를 함께 보냈습니다. 소현세자에 대한 평가가 높고 때로 청의 사신들이 인조를 압박할 목적으로 세자의 즉위 가능성을 언급하자 인조의 시기심은 폭발하였고 결국 귀국한 세자 일가족은 인조에 의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장남인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포로 귀환에 노력하며 백성들의 민심을 얻고 신망을 얻어가자 이를 시기한 인조는 귀국한 세자를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어 며느리도 독살혐의를 씌어 죽이고 손자 3명도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 결국 2명을 죽게 만들어가는 비극의 연출자가 되었습니다.
사법시험 부활하라 사법시험 부활하라 사법시험 부활하라 사법시험 😮😮😮
남한산성의 인조가 유도대장 심기원의 동생 심기성을 무관직인 초토사로 임명하여 성밖에 나가 병력을 수습하고 팔도근왕병을 모집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차일피일 미루던 심기성은 며칠 후 관직과 임무를 반납합니다. "신은 양반답지 않게 걸음이 나는 듯했다지만 그건 옛날일입니다. 근래 큰 병을 앓은 터라 신체기능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승려나 백성들은 혼자도 움직이므로 포위망을 빠져 나가지 쉽지만 신은 양반입니다.~" 심기성의 사직서를 본 인조는 너무 괘씸해서 다시 명령을 내립니다. "다 용서할 테니 다시 출발하라." 인조시절 당시 양반들은 배낭을 멜 수 없다고 왕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유교사회에서 천대받던 승려였던 경운은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산성과 밖을 수시로 통과하였습니다. 당시 남한산성의 관리는 몇 개의 사찰이 나누어 맡았고 승려들의 네트워크는 당시 양반들이 할 수 없는 다양한 역활을 쉽게 수행하였습니다. 또 남한산성 수어청의 노비였던 서흔남은 나무꾼으로 주변의 지리에 밝다보니 특수임무를 담당하였습니다. 인조가 찾던 도원수 김자점, 전라감사 이시방과 접촉한 사람도 노비 서흔남이었습니다. 훗날 인조는 그를 면천시키고 과거급제 자격까지 주었습니다. 전쟁상황에서 반상의 규율보다 당장의 절실한 능력이 빛을 발한 것입니다.
최근 계엄 사태 속에서 고위 법률가들의 행동과 일반 시민들의 행동은 상반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마치 조선왕조가 망할 때 전주이씨 왕족들과 고위직 양반들은 일제가 주는 귀족제에 감사하며 공작, 후작, 백작을 하사하는 일본 천황에 감사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일반 민중들은 목숨을 걸고 의병에 참여하던 사실이 기억나게 하던 현실이었습니다. 계층사회가 고착화되어 계급사회로 전환되어가는 현 시점에서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국가 위난 시에 양반사회에서도 남겨두었던 계층이동의 사다리를 잔존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대규모 궁궐공사로 병자호란을 촉발시킨 인물은 광해군인데 중립외교 운운하면서 미화되는게 안타깝다.
궁궐 공사는 임진왜란 이후 선조 시절부터 광해군 때까지 추진하면서 백성들의 고생이 많았습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수리했으나 그곳의 전력이 좋지않다고 다시 경희궁과 인경궁을 재건하였고 한양이 마음이 들지않아 교하(일산)으로 천도를 추진하면서 원성을 샀지만 외교에 있어서는 인조처럼 강경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인조반정의 명분 중에 명나라를 받들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인조가 척화를 주장할 수는 있다고 보는데 그러려면 전쟁 준비를 보다 철저하게 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호란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청나라의 정치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전통적인 호란사에 대한 이해는 청나라 사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단지 조선의 대응만 가지고 이해를 하니 정작 중요한 핵심을 놓치고 있습니다.
홍타이지는 칸에 올랐지만 아버지 누르하치와 같은 권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버일러(대족장)로 있는 형제들과 권력을 나눠 갖는 과두정 체제에서 칸을 했습니다. 공식 행사에는 홍타이지와 3명의 형들이 나란히 옥좌에 앉아서 진행할 정도였어요.
그러나 홍타이지는 뛰어난 정치 수완을 발휘 3명의 형들을 결국 모두 숙청하고 1인자가 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1인 권력 구도가 형성되자, 홍타이지는 이를 공고히 하기 위해 과두정 체제였던 '칸 체제'를 중원식 '황제 체제'로 바꾸려 했습니다.
그리고 홍타이지가 황제로 등극하는 명분으로 "만주, 조선, 몽골을 평정하는 위업을 달성함으로서 하늘의 선택(천명)을 받았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조선은 화약을 맺은거지 평정한거라 하기에 애매한 위치였습니다. 정묘화약 이후에도 조선은 후금(청)의 동의 하에 명과도 여전히 군신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조선을 확실히 제압해 조선 평정을 완료하고 홍타이지가 황제에 등극하는 것. 그것이 병자호란의 근본 원인이자 목적이였습니다.
그리고 청의 이런 사정을 전혀 몰랐던 조선은 '정묘화약'으로 마무리된 문제를 다시 들쑤시는 청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적절한 대응을 못한 겁니다. 조선은 전쟁나기 직전까지도 청과 외교 협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물론 조선의 이런 사정을 1도 헤아리지 않고 일방적 통보만 하고 그냥 힘으로 뭉개버린 청의 야만스런 외교 방식이 더 문제였구요.
맞는 말씀입니다. 홍타이지의 남한산성 포위는 1631년 명나라 대릉하성 포위작전과 유사했습니다. 10월 28일 출성한 명장 조대수는 82일을 버티나 극도의 기근으로 성문을 열었고 홍타이지는 비슷한 전략을 선택한 것입니다. 다만 예상외의 변수가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1월 16일 청군진영에서 천연두가 발생하자 홍타이지는 해빙기까지 전선을 건조하여 압록강을 거쳐 강화도를 공격하러던 계획에서 조선에서 44척의 소형선에 홍이포를 싣고 강화도를 점령하였고 왕족과 대신들이 포로가 된 사실이 전해지자 인조는 항복을 결심하였습니다.
조선 입장에서는 여진 추장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으나 항복을 마치자 홍타이지는 활쏘기와 잔치를 베풀고 홍타이지 좌측 상석에 인조를 앉히고 최고의 대접을 해주었습니다. 한양에도 들리지 않고 성급하게 심양으로 철수한 것은 천연두에 대한 공포였습니다. 당시 여진족은 천연두를 마마로 불렀고 홍타이지가 몽골 차하르부를 공략할 당시에 차하르부에 퍼진 천연두 덕을 보았지만 훗날 청나라도 3대 황제 순치제가 24세의 젊은 나이에 10대 동치제가 18세의 나이에 죽은 것도 천연두 때문으로 천연두에 대한 공포가 극심하였습니다.
마마를 하늘이 내린 재앙으로 알던 만주족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조선의 죄악을 징계하는 전투에서 마마를 앓는 다는 것이 명분을 상실하는 것이기에 이를 사서에도 은폐했으나 그 흔적은 남아 홍타이지의 기이한 철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