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4kesn0w55 세키야마지마 해전에서의 일본측의 피해는 최대한 견적해도 300명 정도다.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죽어 거의 전멸했고,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살해되어 완전히 무력화됐다. 히로시마·나가사키에서는 조선인 10만명 가까이 피폭해 2만명 이상이 죽었다. 한국인은 조상의 불행을 웃는 세계에서 유일한 활기찬 민족이다.
일본수군 주력함이 아다케부네(안택선)인줄 잘못알고 있는분들이 많은데, 일본수군에서 가장많은 주력함은 아다케부네보다 크기가 작고 빠른 세키부네입니다. 세키부네는 접근전이기때문에 가볍고 빠르지만 약한선체이고, 아다케부네가 큰편이지만 목재재질이 가벼운 삼나무라 대포적재가 안되서 배 처마에 메달아서 쏘는 방식으로 운용했음.
조선이 가지고 있던 대포는 제조정도가 낮은 청동제였다. 일본에 현물이 보존되어 있다. 연기가 새고 명중정도도 사정거리도 낮았다. 화살이 멀리 날아갔다. 한산도 해전에서는 조류가 빨랐기 때문에 이순신은 해안에 배를 들고 불을 붙인 화살을 쐈다. 일본 측은 좌초를 두려워 해협 중앙을 나아가 조수에 흘러 조선의 화살을 받았다. 일본 수군은 이에 반성해 화살대책을 하고 곶에 포대를 건설했다. 그러자 이순신은 무력해졌다.
임진년의 일본수군과 정유년의 일본 수군은 전술과 사용하던 전선까지 달라졌음. 임진년 패배의 교훈을 이용해 조선 수군의 전술에 대응하는 전술을 만들었고 판옥선과 비슷한 크기의 전선도 수백척을 만들어 배치했으며 전력도 대대적으로 증강햇음. 이것은 귀선과 판옥선이 있다고 해결될 수 있는게 아님 당시 조선 수군의 입장은 전술적으로나 전력면에서 모두 일본 수군에 열세였고, 공세를 펼 상황이 아니라 수세로 버티며 새로운 전술을 모색해야 할 때였으나, 이런 상황을 전혀 이해 못하던 조정이 무모하게 수군 작전권을 행사하며 공격을 강요하다가 대참사를 빚은 것. 원균은 칠천량 전투 전에 몇번의 교전을 통해 일본 수군의 새로워진 전술과 전력을 경험했지만 당장 이에 대응되는 새로운 전술을 내놓지 못한체 조정에서 출격하라고 닥달만 하니 전 병력을 올인해 공격하는 선택을 해버린 것.
임진왜란은 하필이면 당시 경상 우수영 통제사였던 원균이 수군을 해산하고 50여척에 달하는 판옥선과 최소 1000문 이상의 화포를 불태우고,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그 덕분에 조선의 방어 시스템을 붕괴시켜 초동조치 실패로 전쟁이 전국토로 퍼져버린 것입니다. 정유재란은 칠천량에서 원균이 박살나면서 히데요시가 좋아서 미쳐날뛰며 벌어진 전쟁입니다. 원균처럼 무능해서 역사의 흐름을 틀어버리는 자는 세계사에서도 보기 힘들죠.
아무것도 모르는데 알고 있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밤과 담의 강도 차이는 불과 몇 %입니다. 재료보다 목공 기술의 차이가 크다. 2층건물이 없었던 조선보다 5중의 탑이 있던 일본이 기술이 뛰어나다는 것은 당연하다. 원래 조선은 충돌전략을 취하지 않았다. 멀리서 화살을 쏘는 것이 조선의 전법이다. 세키야마시마 해전에서는 성공했지만, 그 후의 전투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또한 거북선이 준공한 증거는 없고 일본 수군과 싸운 기록도 없다. 모두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건담이 굳이 판자위에 달리는게 닌자들이 날아갈수 있는 높이가 8미터였지. 작은검으로 손가락이나 팔을 잘라서 부상자를 많이 만드는게 목적이였지. 그러니 판자로 거북선처럼 된거지. 닌자가 오르지 못하는 높이로 크게 만들었지. 일본배는 원래 작은 상선이였으니 나중에 히데요시가 크게 만들라고 지시했지. 3차원정은 히데요리의 죽음으로 실패했지. 무조건 소나무로 했을까? 소나무 구하기 힘든데
확실히 영화와는 현실이 달랐죠 하지만 명중률은 상대적으로 상당히 높았습니다.. 어차피 판옥선은 둔중하고 무거워서 속도는 느렸지만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의 특성상 좌우 회전은 상대적으로 훨씬 빠르고 자유로웠습니다(동남아시아의 바구니배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보인 전술은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적을 근거리 100보(50~60미터) 이내로 끌어들여 좌우로 기민하게 회전하며 대포로 적을 파괴하는 전술 이었습니다, 이정도 근거리면 명중률은 사실상 의미가 없습니다.. 더구나 적의 배를 폭파 하기 위한 철구를 발사하는 탄 이외에도 좀 과장하면 전봇대 만한 화샇로 배를 꿰뚫어 버리는 대장군전, 뱃전에서 조총 사격을 해대는 적을 쓸어 버리는 조란탄(조약돌, 쇠못, 마름쇠 등을 화포에 채워 화약으로 발사하는 일종의 산탄)등을 함께 사용 하였으니 조총만을 믿고 접근하던 일본군들이 무력화 된 것이지요 특히 당시 조총의 파괴력으로는 조선 판옥선의 두터운 소나무 선체는 물론 방패도 관통하지 못했습니다, 이 두텁고 큰 소나무 방패는 워낙 무겁고 덩치가 커서 육군이 들고 다니기는 불가능 했었으나 수군의 경우는 뱃머리 난간에 세워두고 그 뒤에 숨는 형태라 재수없이 몸을 내밀다가 총에 맞지 않는 한 안전 했지요..
하여 진법을 활용하였지요. 학익진이 좀 더 타격점이 모이는 형태! 그것을 보완한 것이 거북선입지요. 거북선이 충돌용으로만 인식하지만 적진으로 침투하여 확실한 명중률을 확보한 뒤 방포하여 적의 대장선을 타격하여 지휘체계 마비나 선봉을 작살내어 예봉을 꺾는 역힔이었다 합니다. 침투시 자연 발생하는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일이벴지요?
@@dudrak7575 학익진은 보자기전법으로 타격점이 모이는 형태 맞는듯.. 상대의 바위 전법에 강하고 상대가 측면에 기동력과 명중률이 좋은 가위전법으로 나오면 학익진은 나쁜 작전임. 학인진의 약점을 보안한 것이 거북선도 맞는듯.. 상대 입장에서 보면 중앙에서 보면 거리가 일정하니 한척 부수고 다음척 조준이 개쉬움. 측면에서 보면 일렬로 보이니 고각을 어떻게 잡아도 쉽게 명중됨. 거북선은 근접이라ㅣ 판옥선을 조준할지 거북선을 조준할지 고민하니 거리 약점이 보안 됨..
임진년 일본 수군의 임무는 병력 수송 및 부산-대마도 사이 수송로 확보였음. 수륙병진은 조선의 착각 및 고니시의 허세였을 뿐 이를 위한 계획도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음. 임진년 일본 수군으로 편제된 병력은 기록상으론 1만에 못미침. 이는 조선 수군보다도 적은 병력이였음.
옛날의 해상전은 대부분 배를 불태우는 화공전입니다. 화약통을 던져서 화염을 일으켰음... 딱히 이순신의 독창적인 전술은 아닙니다. 안그러면 배를 어떻게 침몰시킬수 있나..그렇기 때문에 거북선에 일본측이 공격하는 화공에 불붙지 말라고 철판을 덧댄것임, 그러면 철갑선에 대한 논란은 끝남
배를 침몰 시키는 것은 홀수선 아래에 구멍을 내거나 선체가 부력을 잃을 정도로 박살이 나거나.. 실제 배에 불 지르면 물 위에 떠서 탈 뿐 침몰 안 됨. 거북선은 판옥선에 뚜껑을 덮은 건데 그건 일본놈들이 승선해서 육박전을 주로 하니까 아예 배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한 방책이지. 물론 화공도 어느 정도 방어했겠지. 그리고 화약통을 던졌다고? 그런 기록이 있기나 함?
지형적 특성도 고려해야지 항상 이런영상류에서 너무 조선의 뛰어남 이런것만 하면서 국뽕을 할려고하는데 승패를 가른건 단순히 무기때문만 있는게아님 그 무기를 어떻게 잘 사용했느냐가 중요함 그렇게따지면 최신무기를 남발하는 미군이 베트남이라던가 아프가니스탄게릴라들 이런애들한테 왜 시달렸을까 ? 우리나라역시 마찬가지 이순신장군이 대단한건맞지만 그런 이순신장군조차도 훤한 바다로나가는건 상당히꺼려함 그래서 부산에 안가려고 난리를 쳤고 남해안의 복잡한 지형을 이용해 상대의 공격경로를 제한하게끔하고 거기서 그야말로 정면으로만 쏘면 다맞는 구도를 만들어냄 그리고 조선은 전쟁이끝날때까지 수군의 절대적인 숫자에서는 항상 열세였음 그래서 항상 내가원하는전장에서 내가원하는 전투를한다 이건 명장의 기본적인 원칙인데 여기에 충실했던게 이순신장군임 만약 몇번이겼다고 신나서 후방을끊겠다면서 부산앞바다 생각없이 기어나갔어봐 그냥 칠천량꼬라지나는거지 만약 저당시 수군의 배나 무기운용이 반대였다면 이순신장군은 절대 남해안섬사이에서 전투안했음 어떻게든 넓은바다로나가 쌈싸먹기좋게끔 포진하려고했을거임
@@저는기어다닐거에요 일본은 가볍고 적합성이 뛰어나 명중 정도도 높은 철포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육상전에서는 연전 연승이었다. 해전에서도 한산도 해전보다 후의 전투에서는 일본 수군이 모두 이기고 있다. 일본군이 유일하게 곤란한 것은 식량이었다. 로지스틱스의 문제가 아니라 명군이 조선의 식량고를 굽기 때문에 식량 자체가 부족한 것이다. 그러니까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더 곤란해, 굶주림에 의한 사망자가 많이 나왔다.
판옥선과 화포의 이점을 가지고도
조선수군을 몰살시킨 원균.
같은 함선, 같은 무기, 이순신에 의해 훈련된 병사들을 고스란히 넘겨받고도 결과는 정반대였지.
우수한 무기체계도 중요하지만
똑같은 조건을 가지고도
어떤 지휘관이 어떻게 운용하는가에 따라 결과는 정반대다.
이순신도 그 후의 전투로 조선수군을 전멸시키고 있지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hiroono1 あなたの先祖たちも閑山島の沖合いで全部水葬されたんじゃないのww
@@hiroono1 広島と長崎にFat-Manが落ちたのは大丈夫? wwwwww
@@fl4kesn0w55 세키야마지마 해전에서의 일본측의 피해는 최대한 견적해도 300명 정도다.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죽어 거의 전멸했고,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살해되어 완전히 무력화됐다.
히로시마·나가사키에서는 조선인 10만명 가까이 피폭해 2만명 이상이 죽었다. 한국인은 조상의 불행을 웃는 세계에서 유일한 활기찬 민족이다.
@@hiroono1 뭔 소리? 이순신 장군이 조선수군을 전멸시킨 전투가 뭔데? 대답해봐?
일본수군 주력함이 아다케부네(안택선)인줄 잘못알고 있는분들이 많은데, 일본수군에서 가장많은 주력함은 아다케부네보다 크기가 작고 빠른 세키부네입니다.
세키부네는 접근전이기때문에 가볍고 빠르지만 약한선체이고,
아다케부네가 큰편이지만 목재재질이 가벼운 삼나무라 대포적재가 안되서 배 처마에 메달아서 쏘는 방식으로 운용했음.
배처마가 아니고 앞에다 2문만 단거임. 그 왜 대포 처마설이 나왔는지 모르지만.. 그건 대포가 아니고 돛을 만거라는게 정론임
@@유정덕-u4x그게 맞는듯.
상식적으로 줄에 매단 화포가 제대로 운용될 수 있을까?
작용반작용 법칙만 이해해도 줄에 매단 강력한 화포는 쉽사리 납득 안간다.
반동 때문이라면 앞에다 한 두 개라도 배치하는 게 오히려 상식적이지 않은가.
조선이 가지고 있던 대포는 제조정도가 낮은 청동제였다. 일본에 현물이 보존되어 있다. 연기가 새고 명중정도도 사정거리도 낮았다. 화살이 멀리 날아갔다. 한산도 해전에서는 조류가 빨랐기 때문에 이순신은 해안에 배를 들고 불을 붙인 화살을 쐈다. 일본 측은 좌초를 두려워 해협 중앙을 나아가 조수에 흘러 조선의 화살을 받았다.
일본 수군은 이에 반성해 화살대책을 하고 곶에 포대를 건설했다. 그러자 이순신은 무력해졌다.
한국인은 재료만 보고 구조에 대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평저로 보강이 없는 조선선과 용골이 있는 일본선에서는 구조의 강도에 큰 차이가 있다. 충돌하면 조선선에는 큰 구멍이 비었을 것이다.
@유정덕-u4x 맞죠... 대포를 처마에 매달아서 쏘면 포신이 미친듯이 튕겨 날아다닙니다. 아주 위험한 행위죠
왜군도 정유재란이후에는 화포를 쓰고 싶어 아다케부네 지휘소 천장에 매달아서 화포를 쏴보았으나 지붕이 무너져버림...
뛰어난 귀선과 판옥선을 이끌고도 칠천량에서 대패한 원모씨 이름 부리는것조차 역겹다
원균은 ㅂㅅ였음.
전쟁에서 가장 무서운게 무능한 상관
임진년의 일본수군과 정유년의 일본 수군은 전술과 사용하던 전선까지 달라졌음. 임진년 패배의 교훈을 이용해 조선 수군의 전술에 대응하는 전술을 만들었고 판옥선과 비슷한 크기의 전선도 수백척을 만들어 배치했으며 전력도 대대적으로 증강햇음. 이것은 귀선과 판옥선이 있다고 해결될 수 있는게 아님
당시 조선 수군의 입장은 전술적으로나 전력면에서 모두 일본 수군에 열세였고, 공세를 펼 상황이 아니라 수세로 버티며 새로운 전술을 모색해야 할 때였으나, 이런 상황을 전혀 이해 못하던 조정이 무모하게 수군 작전권을 행사하며 공격을 강요하다가 대참사를 빚은 것.
원균은 칠천량 전투 전에 몇번의 교전을 통해 일본 수군의 새로워진 전술과 전력을 경험했지만 당장 이에 대응되는 새로운 전술을 내놓지 못한체 조정에서 출격하라고 닥달만 하니 전 병력을 올인해 공격하는 선택을 해버린 것.
임진왜란은 하필이면 당시 경상 우수영 통제사였던 원균이 수군을 해산하고 50여척에 달하는 판옥선과 최소 1000문 이상의 화포를 불태우고,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그 덕분에 조선의 방어 시스템을 붕괴시켜 초동조치 실패로 전쟁이 전국토로 퍼져버린 것입니다.
정유재란은 칠천량에서 원균이 박살나면서 히데요시가 좋아서 미쳐날뛰며 벌어진 전쟁입니다. 원균처럼 무능해서 역사의 흐름을 틀어버리는 자는 세계사에서도 보기 힘들죠.
@@agm1144 ㅈㄹ 하네 스스로 불태우고 도망친놈인데 ㅋㅋ
구독합니다.
영상 감사합니다 😊
조선의 판옥선은 재질이 튼튼한 소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무거운 화포를 실을 수 있지만, 일본의 안택선은 재질이 약한 삼나무와 전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무거운 화포를 실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알고 있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밤과 담의 강도 차이는 불과 몇 %입니다. 재료보다 목공 기술의 차이가 크다. 2층건물이 없었던 조선보다 5중의 탑이 있던 일본이 기술이 뛰어나다는 것은 당연하다.
원래 조선은 충돌전략을 취하지 않았다. 멀리서 화살을 쏘는 것이 조선의 전법이다. 세키야마시마 해전에서는 성공했지만, 그 후의 전투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또한 거북선이 준공한 증거는 없고 일본 수군과 싸운 기록도 없다. 모두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거북선은 무거운 가시를 갑판에 얹어서 뒤집어 버렸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이 재현을 시도했지만, 뒤집어 버렸다. 우스꽝스럽다.
대포하나못버티는 배로 대한해협을 어캐건너왓노
소나무 중에서 바닷가에서 자란 해송을 판옥선 주재료로 건조 했읍니다
@@전두광장군정확히는 실을 수는 있는데 그걸 바닥에 놓고 쏘면 반동을 못버티고 바닥이 깨짐
하지만 원균이 다 말아먹었지
I hope there are english subtitles
함포 거리가 5~6미터 이내에서 적의 배가 구멍이 뚤렸다고 합니다 거리가 멀어지면 명중률 제로 주로 불화살로 불질렀을 듯
기밀 유출을 위해 기록이 축소 되어 기록 되었을 수도 있어요
이순신 장군님 만세
그리고 왜선의 재료는 삼나무로 만 배임니다
여담으로 조선은 화포를 사용했기 때문에 조총에 병사들이 놀라 졌다는 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음 왜냐면 이 논리대로 가면 공성전마다 포격 맞은 일본군도 멘탈 터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
그렇다면 왜 이딴 주장이 나왔느냐? 당시 조선이 그냥 전쟁 수행능력이 부족했다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할 목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임 이건 6.25전쟁 때 전차가 없어서 초반에 졌다는 거랑 비슷한 거임 (정작 기갑전력이 부족했던 중공군은 잘 싸웠지)
200년 가까이 전란이 없었기 때문에
총통을 쏠 경우가 없었다고 봐야겠지요?
그러니 총통보다 작은 소리의 조총에도 놀라지 않았을까요?
대장군전의 정확한 크기는 얼마인가요? 여기선 2.3m로 나오는데 어디선 2m 또는 2.9m란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판옥선이나 거북선처럼 시대마다, 군영마다 크기가 달랐던 걸까요?
또 누가 고의로 불낸것 아냐?
건담이 굳이 판자위에 달리는게 닌자들이 날아갈수 있는 높이가 8미터였지. 작은검으로 손가락이나 팔을 잘라서 부상자를 많이 만드는게 목적이였지.
그러니 판자로 거북선처럼 된거지. 닌자가 오르지 못하는 높이로 크게 만들었지. 일본배는 원래 작은 상선이였으니 나중에 히데요시가 크게 만들라고 지시했지.
3차원정은 히데요리의 죽음으로 실패했지. 무조건 소나무로 했을까? 소나무 구하기 힘든데
문제는 명중율인데.. 재정이 좋지 못한 조선이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쏘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확실한건 현실에서는 영화보다 아군 피해가 훨씬 더 적었다는 것이죠. 오히려 영화에서는 아군 피해가 크게 나오죠.
@@kbs-s2v 원래 저런식의 공격의 문제가 충격으로 깨진 목재가 파편처럼 아군을 쓸어 버리면 문제임.
저게 오랜세월 쌓인 세균으로 인한 2차 감염으로 손발을 잘라야 하는 상황이 오거나 현대인 처럼 영양상태가 다들 좋질 못하니 출혈로 많이 죽었음.
확실히 영화와는 현실이 달랐죠 하지만 명중률은 상대적으로 상당히 높았습니다.. 어차피 판옥선은 둔중하고 무거워서 속도는 느렸지만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의 특성상 좌우 회전은 상대적으로 훨씬 빠르고 자유로웠습니다(동남아시아의 바구니배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보인 전술은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적을 근거리 100보(50~60미터) 이내로 끌어들여 좌우로 기민하게 회전하며 대포로 적을 파괴하는 전술 이었습니다, 이정도 근거리면 명중률은 사실상 의미가 없습니다..
더구나 적의 배를 폭파 하기 위한 철구를 발사하는 탄 이외에도 좀 과장하면 전봇대 만한 화샇로 배를 꿰뚫어 버리는 대장군전, 뱃전에서 조총 사격을 해대는 적을 쓸어 버리는 조란탄(조약돌, 쇠못, 마름쇠 등을 화포에 채워 화약으로 발사하는 일종의 산탄)등을 함께 사용 하였으니 조총만을 믿고 접근하던 일본군들이 무력화 된 것이지요 특히 당시 조총의 파괴력으로는 조선 판옥선의 두터운 소나무 선체는 물론 방패도 관통하지 못했습니다, 이 두텁고 큰 소나무 방패는 워낙 무겁고 덩치가 커서 육군이 들고 다니기는 불가능 했었으나 수군의 경우는 뱃머리 난간에 세워두고 그 뒤에 숨는 형태라 재수없이 몸을 내밀다가 총에 맞지 않는 한 안전 했지요..
하여 진법을 활용하였지요.
학익진이 좀 더 타격점이 모이는 형태!
그것을 보완한 것이 거북선입지요.
거북선이 충돌용으로만 인식하지만
적진으로 침투하여 확실한 명중률을 확보한 뒤 방포하여 적의 대장선을 타격하여 지휘체계 마비나 선봉을 작살내어 예봉을 꺾는 역힔이었다 합니다.
침투시 자연 발생하는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일이벴지요?
@@dudrak7575 학익진은 보자기전법으로 타격점이 모이는 형태 맞는듯..
상대의 바위 전법에 강하고 상대가 측면에 기동력과 명중률이 좋은 가위전법으로 나오면 학익진은 나쁜 작전임.
학인진의 약점을 보안한 것이 거북선도 맞는듯..
상대 입장에서 보면 중앙에서 보면 거리가 일정하니 한척 부수고 다음척 조준이 개쉬움.
측면에서 보면 일렬로 보이니 고각을 어떻게 잡아도 쉽게 명중됨.
거북선은 근접이라ㅣ 판옥선을 조준할지 거북선을 조준할지 고민하니 거리 약점이 보안 됨..
소나무에 무거운 화포 ᆢ
격군이 너무 힘들었을듯
영상 보는내내 발사된 대장군전이 적선을 관통해 내부에서 폭발하는 지연신관 체계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 란 생각이 영상보는 동안 계속들더라구요.
아니.
@@hiroono1 아니. 뭐요? 무슨말을 하시려고요?
@@박우진-s5b 당시 조선의 기술에 폭발하는 포탄은 없다.
@@hiroono1 "비격 진천뢰"
@@박우진-s5b 쟤 위에쓴글도그렇고 어눌한것도그렇고 걍 왜인인듯
그에반에왜선은못을박아서 많든참조선이었다😢😢😢
지금이 딱 그런것같네요 국론분열!
대부분의 사극은 왜란때 일본군만 조총을 운영하는거로 표현하는데 개전1년후에는 조선도 명나라에서 화승총 대량수입해서 대규모로 운용했고 기존에 갖고있던 화포와 총통들로 일본조총부대를 조기에 무력화시킨 전투가많았다네요.. 조명연합군도 개인화기를 대량으로 운용했는데 사극은 일본군만 조총들고 싸웠다는식으로 표현을해서 왜곡을하는지 이해가안가네
거짓말이다. 일본은 자국에서 철포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공급량은 훨씬 많았다.
그니까 원균은 배틀크루저 끌고 나가서 마린 탄 드랍십에 개쳐발리고 뒈졌단거지?
대장군전을 본 일본 놈들은 조선 해군은 기둥을 뽑아서 쏜다고 했지.
임진년 일본 수군의 임무는 병력 수송 및 부산-대마도 사이 수송로 확보였음. 수륙병진은 조선의 착각 및 고니시의 허세였을 뿐 이를 위한 계획도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음.
임진년 일본 수군으로 편제된 병력은 기록상으론 1만에 못미침. 이는 조선 수군보다도 적은 병력이였음.
삼나무는 사람 크기 옷장도 성인 남성이라면 한손으로 들 수 있습니다
당파에 분열~~~ 이때나 지금이나... 제발 좀 국가의 이득의 길에는 분열이 없어지기를
당파싸움은 왜식 표현이며,
우리는 붕당이라는 표현을 더 선호한다합니다.
사정거리 유지 했다는 것은 적에 대해서 꽤고 계셨다는 거.
옛날의 해상전은 대부분 배를 불태우는 화공전입니다. 화약통을 던져서 화염을 일으켰음... 딱히 이순신의 독창적인 전술은 아닙니다. 안그러면 배를 어떻게 침몰시킬수 있나..그렇기 때문에 거북선에 일본측이 공격하는 화공에 불붙지 말라고 철판을 덧댄것임, 그러면 철갑선에 대한 논란은 끝남
배를 침몰 시키는 것은 홀수선 아래에 구멍을 내거나 선체가 부력을 잃을 정도로 박살이 나거나.. 실제 배에 불 지르면 물 위에 떠서 탈 뿐 침몰 안 됨.
거북선은 판옥선에 뚜껑을 덮은 건데 그건 일본놈들이 승선해서 육박전을 주로 하니까 아예 배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한 방책이지. 물론 화공도 어느 정도 방어했겠지.
그리고 화약통을 던졌다고? 그런 기록이 있기나 함?
가만 생각해보면 의문점이 넘 많음.
과연 조선이 화포에서는 앞섰을까?
조총을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받았는데
화포도 이미 서양이 앞섰을텐더
왜 화포가 조선이 앞서지?
일본이 서양 기술자 초청해서 인수인계 받은 게 아니라 그냥 상인이 들고 있는 조총 하나 산 게 다니까요
@@저는기어다닐거에요 그게 의문아님?
이미 명나라에 원숭환이 누르하치 대포로 막을때 불량기포는 수입품인데 (1600년대초)
왜 일본은 조총밖에 수입안함?
배에 장착된 대포는
팔생각을 안했다고?
왜요?
@@세상어렵네 왜 당연하게 상인들 배에 대포가 장착돼있을거라 생각하시는 거지...
@@저는기어다닐거에요 그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상선에 대포가 없었을까요?
@@세상어렵네 동인도 회사랑 아무 상관도 없는 중국 배인데다가 네덜란드 인도 아닌데요...
이순신장군이 불화살 때문에 이겻어요, 이룰성,
소총 과 대포 는 월등 하다, 대포 알 위치 알고 쏜다,
이순신이 훌륭했던것도 있지만 무기가 압도적으로 강했던것도 맞음. 막말로 t55랑 k2전차가 맞붙은 게임
하지만 숫자가...
이순신이 뛰어난것도 있지만 기술이 일본을 능가한듯 이순신이 무적 무패인 이유가 있었구나
공부를잘한다고뛰어난 스승이아니고 무예를잘한다고 뛰어난 지휘관은아님 공부를잘하는거랑 리더쉽이랑은 다른거임
일본은 서진만 계속했기 때문 동진우로 강룰 속초애 상륙 동에서 서로 축셩허고 한양까지 천리장성 식으로 쌓고 싸워 치고 올라갔다묜 충분히 숭산은 있지.
판옥선에가장큰장점은재자리에서선회가가능했고남우을끼워맛처서재작했다이것이조선수군판옥선에큰장점이다
지금애여당이나야당이나똑갔다😢😢😢😢
정신차려라 그잘난 대포로 원균은 전멸했다
덕분에 화포 빨로 조선군이 이긴다는 논리는 없어졌지 순수하게 이순신 힘으로 이겼다는 게 입증됐으니까
동의합니다.
사자가 이끄는 양 떼가 양이 이끄는 사자 떼를 이기는 법이다
어떤 역사학자는 선조가 위대한 영웅 이란다
공부를 독학 했나보다
그러려니 한다
지형적 특성도 고려해야지 항상 이런영상류에서 너무 조선의 뛰어남 이런것만 하면서 국뽕을 할려고하는데
승패를 가른건 단순히 무기때문만 있는게아님 그 무기를 어떻게 잘 사용했느냐가 중요함
그렇게따지면 최신무기를 남발하는 미군이 베트남이라던가 아프가니스탄게릴라들 이런애들한테 왜 시달렸을까 ?
우리나라역시 마찬가지 이순신장군이 대단한건맞지만 그런 이순신장군조차도 훤한 바다로나가는건 상당히꺼려함
그래서 부산에 안가려고 난리를 쳤고
남해안의 복잡한 지형을 이용해 상대의 공격경로를 제한하게끔하고 거기서 그야말로 정면으로만 쏘면 다맞는 구도를 만들어냄
그리고 조선은 전쟁이끝날때까지 수군의 절대적인 숫자에서는 항상 열세였음
그래서 항상 내가원하는전장에서 내가원하는 전투를한다 이건 명장의 기본적인 원칙인데 여기에 충실했던게 이순신장군임
만약 몇번이겼다고 신나서 후방을끊겠다면서 부산앞바다 생각없이 기어나갔어봐 그냥 칠천량꼬라지나는거지
만약 저당시 수군의 배나 무기운용이 반대였다면 이순신장군은 절대 남해안섬사이에서 전투안했음
어떻게든 넓은바다로나가 쌈싸먹기좋게끔 포진하려고했을거임
사기꾼들 짜맞추느라 애쓰네 휘어진 나무로 배를 만든다고? 한 두대도 아니고 한숨 휴우우우우우
난중일기나 임진장초를 보면
아다케부네(안택선)이 거북선보다 크고 높은 경우가 많았나보더군요.
앙방포 파층각(대포를 치쏘아 층각을 부수었다!)는 글에서 위쪽으로 쏘았다하니...
판옥선도 대.중.소선으로 나뉘고
주로 소선을 개량하여 만들었다 하더군요.
단병접전에서는 가망이없었다
칠천량을 보면 안다
태합전하의 천병들은 소드
마스터였다
조선군은 오직 화망을 만들어
미리 부수는것밖에는 답이 없었다
물리적으로 이순신을 포함한 조선군의 대부분은 죽었다. 한국인의 조상은 살아남은 민중이다. 민중은 일본군에 협력하고 있었다. 앞으로 합리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은 이순신은 한국인 조상의 적이었다는 것이다. 한국인 조상의 아군은 일본이다.
사격전에서는 가망이 없었다
이순신이 지휘한 모든 전투를 보면 안다
조선의 군병들은 화포 마스터였다
일본군은 오직 닿지도 않는 칼을 휘두르며 느릿느릿 기어오는 수 밖에 없었다
@@저는기어다닐거에요 그 시대의 조선의 화포는 무기로서 갈락타이다. 사거리가 짧고 명중 정밀도도 낮다. 이순신의 주요 무기는 화살이었다.
@@hiroono1 그 시대의 일본도는 무기로서 탈락이다.
사거리는 바닥을 기고 명중 시도조차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렇게 따박따박 답변할 줄 알면 내가 쓴 댓글에 대답이나 하는 게 좋을 것.
@@저는기어다닐거에요 일본은 가볍고 적합성이 뛰어나 명중 정도도 높은 철포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육상전에서는 연전 연승이었다. 해전에서도 한산도 해전보다 후의 전투에서는 일본 수군이 모두 이기고 있다. 일본군이 유일하게 곤란한 것은 식량이었다. 로지스틱스의 문제가 아니라 명군이 조선의 식량고를 굽기 때문에 식량 자체가 부족한 것이다. 그러니까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더 곤란해, 굶주림에 의한 사망자가 많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