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포럼] 월성 서성벽 전문가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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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5 дек 2024

Комментарии • 9

  • @안재호-e1h
    @안재호-e1h 3 года назад +1

    고되고도 어려운 발굴을 풀어내고 수고가 많습니다. 방청객으로서 토론에 참가할 기회를 얻어서 감사드립니다. 발표하신 장기명 학예연구사님, 토론자로 오신 김용성 홍보식 심현철 선생님과는 달리 발표 내용에 이견을 드렸습니다. 서성벽에서 출토된 인골이 월성 축성과 관련된 인신공희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터키의 신석기시대 읍락유적 차탈회위크유적을 발굴한 이안호더교수는 발굴과정을 매일 인테넷으로 공개하여 모든 사람에게서 질문과 새로운 제안을 받아들이며 발굴을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하여 진정한 결론에 이르고자 한 분으로 유명합니다. 일반적인 발굴은 "관계자외 출입금지" 팻말을 붙이는 것이 과거 우리의 발굴풍속이었습니다만.
    월성은 차탈회위크유적만큼이나 중요한 유적지입니다. 신라 500년 아니면 더 오래된 1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도 토론은 끝났으나, 여전히 가시지 않은 의문들을 여기 올려서 발굴담당자들께서 역사(진리)의 길로 나아가실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 @안재호-e1h
    @안재호-e1h 3 года назад +2

    제가 던진 질문(아래 괄호 부분은 아님)은 출토된 인골이 성 축조와 상관없는 일반 무덤이 아닌가? 였습니다. 그 이유를
    1. 인신공희였다면 그 자신이 희생자인데 과연 부장품이 왜 필요한가? -- (인신공희를 주관한 사람은 성을 축성하는 관리였을텐데 과연 그들이 신라인인지 아니면 타국의 노예인지 모르지만 사람을 죽여서 신에게 바치는 제사에서 희생자의 내세를 위한 부장품을 넣었다는 것인가?)
    2. 인신공희의 대상이 인간이라면 더구나 축성을 완성해달라는 기원이라면 인간이라는 제물이 신성하고 깨끗해야만 하므로, 그 대상이 50이나 된 노인(이 시기의 평균연령은 25세전후임)이 아니라 순진무구한 어린애(성덕대왕신종의 설화나, 경주박물관 내 우물의 희생자처럼)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3. 인신공희라면 축성의 시점과 사람의 죽임 시기가 동일해야하는데, 사람은 4세기 중엽에서 5세기 초인데 반하여 성곽의 체성은 5세기 중엽(황남대총 남분시기)이므로 길면 100년 짧아도 3~50년은 차이가 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오시언-e3b
    @오시언-e3b 3 года назад +1

    아빠는 전문가들이 하는 이야기라 이해하기 어려울거라 했지만 권오영선생님을 중심으로 쉽게쉽게 풀어이야기를 해주셔서 재밌고 좋았습니다. 여쭙고 싶은건 월성 서성벽 발굴조사 자료집 마지막페이지에 보면 (2. 이 책에 실린 글과 그림, 사진, 내용을 포함한 제반 사항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동의 없이 무단 전재·복제하거나 변형하여 사용할 수 없습니다.) 라고 써있는데 출력해서 책처럼 만들어서 보면 안되는 건가요? 혹시 동의를 구할 수 있을까요? 목적은 공부하려고 합니다!

    • @gyeongju_nrich
      @gyeongju_nrich  3 года назад

      안녕하세요 장진수님 영상 시청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질문주신 내용에 대해 답변 드리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책처럼 출력해서 보시는 건 괜찮습니다.
      다만, 자료집을 임의로 무단 배포하거나 출처를 밝히지 않는 건 안 됩니다. 또 임의로 수정해서 편집한 내용을 외부에 배포하는 것도 안 됩니다.

    • @오시언-e3b
      @오시언-e3b 3 года назад +1

      @@gyeongju_nrich 우와 감사합니다! 저 혼자만 보면서 공부하려고합니다 잘 공부하겠습니다!

  • @안재호-e1h
    @안재호-e1h 3 года назад +1

    월성의 가능성을 시간적으로 많이 열어둔 채로 다시 인신공희에 대한 저의 질문-의문을 올립니다.
    가. 인신공희라면, 구덩이를 파지 않고 그냥 바닥에다 시신을 안장하였을 것이므로, 인골이 놓인 층서를 살펴야 합니다. 과연 모든 인골이 동일한 층에서 출토되었는지? 이미 나온 인골이 위차한 것은 유기물혼입부식토층이 아주 얇게 퇴적된 곳이므로 층서는 이 얇은 층을 모두 인정해서 매우 치밀한 층위관계를 살펴야 합니다. 만약 각각의 인골이 놓인 층의 제각각이라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또 새로은 문제가 될 것입니다. 층이 모두 다르다면 제 생각은 인신공희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나. 인신공희라면, 피장자의 부장품이 모두 동일한 시기의 것이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여러 시기의 유물이 존재하는지를 밝혀야 합니다. 여러시기의 유물이 나왔다면 인신공희를 여러번에 누차례했다고 해석해버릴 수도 있겠으나, 일반적인 인식은 인신공희가 아니라고 할 수있겠습니다.
    다. 그리고 위의 가 나항의 건을 상관에서 과연 늦은 시기의 유물이 부장된 인골이 상층에 놓여있고, 이른 시기의 인골이 아래 층에 있는지를 밝혀야 할 것입니다. 이렇지 않다면 어떻게 해석하야 할까요? 무덤으로 봐야할 것입니다. 즉 나름대로의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안장한다면 구덩이의 깊이에 따라 놓인 바닥의 층이 다를테니, 시간의 이름 늦음과는 상관성이 없어도 되겠지요.
    놓인 층이 식물질이 많이 혼입된 곳이라 이 식물질이 오랜시간을 흐르면서 그 자체의 부식이 진행되기도 하고 또 상부 성의 압력으로 그 당시 요철을 가진 모든 것이 평편해질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라. 체성을 하기 전에 인골이 놓인 이 식물질의 기반층을 조성했다고 하는데, 과연 성문과 성벽을 쌓기 위해서 식물질을 채워넣는 기반층 조상작업을 했을까요? 사람이 인위적으로 버려서 쌓아 퇴적된 것과 물의 이동에 의해 자연적으로 유기물이 쌓인 것은 쉽게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동안 자연적으로 퇴적된 것이라면 기반층 내에서 최하층의 유기물과 최상층의 유기물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통하여 밝혀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인식공희가 아니므로 이 퇴적층이 어느 한시기에 쌓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마. 인신공희의 부장품에서 4세기 중엽~5세기 초에 해당하므로, 이 시기의 유물층은 성내 조사의 하층에도 있으므로 이 양자와의 관계도 상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내벽 가까이에 성내부의 지층과 시기를 구분할 수 있는 토층트랜치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인신공희의 유물과 인물에 대해서는 동시기의 성내부 하층 양상을 무시하고 성벽만으로 설명해서는 안됩니다.
    바. 인신공희의 인골과 상층부의 시기에 대해서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즉 체성의 시기는 5세기 중엽인데, 이것과 인신공희와의 시간차이는 앞서 말씀드린 바있이다. 그런데 체성이 은 상부에 체성(II-1층)의 가장자리에도 존재하고 또 II-2층이나 3층의 아래나 중간에도 인신공희가 존재한다면, 이 2, 3층은 시기가 더욱 늦은 때이므로 인신공희의 의례가 매우 복잡해진다는 것입니다. 이점은 제 자신도 발굴정황을 모르므로 자세한 질의는 어렵습니다. 자료집을 참조하면 4세기대의 인신공희 중에는 6세기 때에 2차성벽을 쌓아므로서 비로소 인신공희자는 성벽속에 갇혔다는 것이 됩니다만....그렇게 오래동안 피인신공희자가 노출되어있었다고 생각됩니까? 이럴 경우도 인신공희로 설명되는 것인가요? 내 생각으로는 성벽의 역사가 이루어질 때 바로 인신공희를 하는 것이 효과적이고 상식적인 과정일텐데요?
    이상이 추가로 의문을 가져본 것입니다. 아무쪼록 힘든 발굴이지만, 어느 한 개인의 결론으로 발굴이 이끌려 갈 것이 아니라, 최대한 다수가 던진 모든 질문을 해결하고 그 증거나 논리적인 정황을 찾아내어 국민 모두의 발굴이 되길 기대합니다. 그것이 바른 발굴이고 우리의 바른 역사를 찾은 것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안재호-e1h
    @안재호-e1h 3 года назад +2

    월성의 역사, 성곽을 만들 수 있는 역사적 배경은 적어도 목곽묘시기에는 사로국의 토성으로는 가능할 것입니다. 그 연대는 2세기 중엽 혹은 후엽이 되겠지요. 그러다가 다시 3세기 후엽이나 4세기초가 되면 또 하나의 전환기를 맞이 하므로 이 때에도 역시 성곽을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부분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이므로 추측을 할 뿐입니다.
    그러다가 지금의 월성이 된 것은 5세기 중엽 -가장 큰 왕의 무덤(미추왕릉 남분)이 만들어진 시기-입니다.
    저는 월성의 역사가 2세기나 3세기 때는 성이 있었다고 하면 그 각각이 크기가 구조가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5세기의 지금 월성- 해자로 둘러쌓인 모습을 2, 3세기의 월성 그 자체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전 시기의 월성은 아마도 지금의 월성보다 더 한쪽에 치우쳐 있거나 규모가 작은 채로 어딘가 숨어 있겠지요. 지금 발굴하는 서성벽이나 남성벽이 아니라, 그런데 문헌에서의 월성은 5세기보다는 이르므로 이 자체를 그때의 성벽으로 추정해버리는 잘못은 하지말아야 합니다.
    물론 이런 착오를 현재 발굴단에서 주장한 것은 아니고, 주변의 주장 혹은 권위에도 휩쓸리지 않고 철저한 증거 중심의 발굴을 하시기 바라는 마음입니다.

    • @gyeongju_nrich
      @gyeongju_nrich  3 года назад

      늘 경주 연구소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의문은 발굴조사 성과를 정리한 자료집과 전문가 포럼을 통해 해결되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연구소는 이번 전문가 포럼 이전에 각 분야 전문가 20명 이상을 대상으로 6회의 자문회의를 거친 바 있습니다. 이번 포럼 또한 중간 정리를 한 것뿐이며, 앞으로도 여러 차례 전문가 자문을 받을 예정입니다. 부디, 지속적으로 우리 연구소에 관심 가져주신다면, 모든 의견을 청취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