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 Видео 348
  • Просмотров 1 903 958
사로국 시기 월성 취락 전문가포럼
사로국 시기 월성 취락 전문가포럼
전체 영상입니다
자료집은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홈페이지에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타임라인
0:00 사로국 시기 월성 취락이 제기하는 쟁점 - 장기명 학예연구사
01:00:59 토론 시작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학술대회 #고고학
----------------------------------------------------------------------------
☑️ 이 영상은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에서 제작한 영상입니다. 영상의 활용은 공공누리 4유형에 따라서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영상 사용 시에는 국립경주문유산연구소로 사전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
COPYRIGHT ⓒ 2024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ALL RIGHTS RESERVED.
저작자와의 협의 및 동의가 없는 영상의 사용을 금합니다.
Просмотров: 410

Видео

발굴 도구 소개와 안전수칙 ! | 금척리 고분군 발굴체험 행사
Просмотров 184День назад
지난 10월 19일 진행된 금척리 고분군 발굴체험 행사에서 일일 고고학자들에게 발굴 체험의 과정과 도구를 간략하게 소개하기 위해 제작된 영상입니다. 발굴 과정이나 도구가 궁금하시다면 영상을 시청해주세요 ! #경주행사 #행사 #발굴체험 #금척리고분군 ☑️ 이 영상은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에서 제작한 영상입니다. 영상의 활용은 공공누리 4유형에 따라서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영상 사용 시에는 국립경주문유산연구소로 사전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COPYRIGHT ⓒ 2024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ALL RIGHTS RESERVED. 저작자와의 협의 및 동의가 없는 영상의 사용을 금합니다.
금척을 찾아라 ! | 금척리 고분군 발굴체험 행사 | 스케치 영상
Просмотров 143День назад
지난 10월 19일 진행된 금척리 고분군 발굴체험 행사 스케치 영상입니다 !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일일 고고학자가 되어본 우리 친구들에게 격려와 응원의 박수 부탁드립니다 👏🏻 #발굴체험 #행사 #경주행사 #금척리고분군 ☑️ 이 영상은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에서 제작한 영상입니다. 영상의 활용은 공공누리 4유형에 따라서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영상 사용 시에는 국립경주문유산연구소로 사전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COPYRIGHT ⓒ 2024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ALL RIGHTS RESERVED. 저작자와의 협의 및 동의가 없는 영상의 사용을 금합니다.
🤫 은밀한 공간, 신라 왕경의 측간 l 대담신라
Просмотров 17014 дней назад
#신라 #고고학 #발굴 2024년 9월 26일에 진행 된 대담신라 '은밀한 공간, 신라 왕경의 측간' 스케치 영상입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 #연구 #측간 ☑️ 이 영상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제작한 영상입니다. 영상의 활용은 공공누리 4유형에 따라서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영상 사용 시에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로 사전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COPYRIGHT ⓒ 2024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ALL RIGHTS RESERVED. 저작자와의 협의 및 동의가 없는 영상의 사용을 금합니다.
2024 세계국가유산산업전 | 현장 스케치
Просмотров 174Месяц назад
2024 세계국가유산산업전 | 현장 스케치
신라왕경 핵심유적 해석과 설명 전략과 적용 학술대회 | 현장 스케치
Просмотров 255Месяц назад
신라왕경 핵심유적 해석과 설명 전략과 적용 학술대회 | 현장 스케치
EP.2🎵난 대학시절 고고학을 전공했단 사아실~🎶 | 2024 대학생 발굴현장실습 | 발굴캠프
Просмотров 3733 месяца назад
EP.2🎵난 대학시절 고고학을 전공했단 사아실~🎶 | 2024 대학생 발굴현장실습 | 발굴캠프
미래의 고고학자 ! 전국에 있는 고고학 관련 학생들이 발굴현장 실습을 위해 경주에 왔습니다 #발굴실습 #고고학 #발굴현장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Просмотров 8223 месяца назад
미래의 고고학자 ! 전국에 있는 고고학 관련 학생들이 발굴현장 실습을 위해 경주에 왔습니다 #발굴실습 #고고학 #발굴현장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신라 왕경인의 생활환경 학술대회
Просмотров 2673 месяца наза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신라 왕경인의 생활환경 학술대회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x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 고고미술사학과 I 2024 공동 발굴조사 스케치 영상
Просмотров 3533 месяца назад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x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 고고미술사학과 I 2024 공동 발굴조사 스케치 영상
(이벤트 참여 하세요) 못된 아저씨들의 이재성 선수 속이기 | 명예 월성인 위촉식 현장 이재성 선수 사인회 | 슛포러브 비하인드
Просмотров 2,1 тыс.3 месяца назад
(이벤트 참여 하세요) 못된 아저씨들의 이재성 선수 속이기 | 명예 월성인 위촉식 현장 이재성 선수 사인회 | 슛포러브 비하인드
신라월성연구센터 준공 기념식
Просмотров 3424 месяца назад
신라월성연구센터 준공 기념식
금척리 고분군 고유제 l 금척에 대한 설화
Просмотров 3404 месяца назад
금척리 고분군 고유제 l 금척에 대한 설화
🎥금척리 고분군 고유제 l 스케치 영상
Просмотров 4535 месяцев назад
🎥금척리 고분군 고유제 l 스케치 영상
대담신라 '지도 위에 펼쳐진 신라 왕경 사찰' 스케치
Просмотров 2695 месяцев назад
대담신라 '지도 위에 펼쳐진 신라 왕경 사찰' 스케치
금척리 고유제 홍보영상 l 금척리 고분군 이야기 속으로
Просмотров 4,2 тыс.5 месяцев назад
금척리 고유제 홍보영상 l 금척리 고분군 이야기 속으로
✍️새롭게 쓰는 신라사, 금척리 고분군 | 대담신라
Просмотров 3557 месяцев назад
✍️새롭게 쓰는 신라사, 금척리 고분군 | 대담신라
🎥 금척 고분군 학술대회 현장 스케치 🎬 | 금자 ? 📏
Просмотров 5437 месяцев назад
🎥 금척 고분군 학술대회 현장 스케치 🎬 | 금자 ? 📏
또다른 신라 이야기, 금척(金尺) 고분군
Просмотров 5 тыс.7 месяцев назад
또다른 신라 이야기, 금척(金尺) 고분군
🔬아주 작은 금박 속 황금빛 예술 | 선각단화쌍조문금박
Просмотров 6058 месяцев назад
🔬아주 작은 금박 속 황금빛 예술 | 선각단화쌍조문금박
고려와 조선시대 사람들이 바라본 신라 고적 | 대담신라
Просмотров 34510 месяцев назад
고려와 조선시대 사람들이 바라본 신라 고적 | 대담신라
44호 축조공정 실험 착수보고회 스케치 영상
Просмотров 29110 месяцев назад
44호 축조공정 실험 착수보고회 스케치 영상
울진 성류굴의 명문 발견 현황과 앞으로 과제
Просмотров 35310 месяцев назад
울진 성류굴의 명문 발견 현황과 앞으로 과제
제 47회 한국고고학 전국대회 | 고고학으로 본 권력과 공간
Просмотров 95611 месяцев назад
제 47회 한국고고학 전국대회 | 고고학으로 본 권력과 공간
2023년 대담신라 3회차|신라 미술 속의 용과 그 상징 스케치
Просмотров 291Год назад
2023년 대담신라 3회차|신라 미술 속의 용과 그 상징 스케치
2023 '빛의 궁궐, 월성' |7번째 이야기
Просмотров 511Год назад
2023 '빛의 궁궐, 월성' |7번째 이야기
신라 마립간의 시간을 '탐'하다 | 신라고분문화축제편
Просмотров 401Год назад
신라 마립간의 시간을 '탐'하다 | 신라고분문화축제편
신라 왕경 토기문화의 흐름과 변화 학술대회 | 현장 스케치
Просмотров 716Год назад
신라 왕경 토기문화의 흐름과 변화 학술대회 | 현장 스케치
4년만에 열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조사 연구 발표회
Просмотров 683Год назад
4년만에 열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조사 연구 발표회
경주 쪽샘 44호분 신라 공주묘 온라인 현장 설명
Просмотров 3,5 тыс.Год назад
경주 쪽샘 44호분 신라 공주묘 온라인 현장 설명

Комментарии

  • @20111261
    @20111261 5 дней назад

    보물....

  • @권병성-d2y
    @권병성-d2y 7 дней назад

    좋은 영상이었습니다 도움이 많이되었어요!

  • @gyeongju_nrich
    @gyeongju_nrich 8 дней назад

    0:00 사로국 시기 월성 취락이 제기하는 쟁점 - 장기명 학예연구사 01:00:59 토론 시작 자료집 portal.nrich.go.kr/kor/originalUsrView.do?menuIdx=1046&info_idx=9003&bunya_cd=3014&totalYn=Y

  • @dezhenrhee2512
    @dezhenrhee2512 8 дней назад

    영상 감사합니다.

  • @aura4d
    @aura4d 11 дней назад

    진짜 유물을 캐는건가여

  • @제임스웹-p3q
    @제임스웹-p3q 18 дней назад

    복원은 언제하나....

  • @들녂의밤
    @들녂의밤 21 день назад

    금척리 고분군 발굴 지역에 현재 상황은 바로옆에 민가도 있고 밭과 과수원도 있는데 토질 레이져? 조사에서 배제 되었다고 했습니다만 고분군 군락의 경계가 될만한 근거가 되는 표식이 있어서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구역을 좀더 확대해서 보아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만 예를 들어 북천과는 가까운 곳엔 유적이 없다는 전제는 아니라봅니다. 인접한 현재의 사유지도 또한 조사대상이라 봅니다.

  • @koreanajussi9332
    @koreanajussi9332 Месяц назад

    우와...저도 이런 현장 설명회 가보고 싶은데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까요? 요즘 부쩍 이런 데 관심이 많이 가서 시간이 날 때마다 국립박물관이나 성, 고분군에 갔다오곤 하네요! 이런 현장 설명회도 꼭 참여해보고 싶네요!

    • @라이언-p5v
      @라이언-p5v Месяц назад

      문화유산연구소나 국가유산청 SNS에 소식이 업로드 되고, 국가유산청 홈페이지에서도 발굴현장공개 소식을 확인할 수 있어요

    • @koreanajussi9332
      @koreanajussi9332 Месяц назад

      @@라이언-p5v 참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RainbowCalligraphy
    @RainbowCalligraphy Месяц назад

    여기는 신라귀족이거나 신라외척들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라구요.. 경주에서 대릉원및 대릉원일대와 금척리고분군, 서악동고분군, 중기때부터 흩어져있는 신라왕릉이 유명하지만.. 일제시대때 사셨던 할머니의 말씀을 20년전에 들어본적이 있는데... 경주남산이나 토함산, 힌등산, 소금강산, 선도산, 망산등... 경주시내를 둘러싸고 있는 주요산에 능선마다 크고작은 고분군들이 널렸었다고 합니다. 그당시는 나무를 땔깜이나 집짓는 용으로 많이 써서 민둥산이 많았고 고분군을 많이 확인했지만 지금은 무너진곳도 많고 숲이 우거지고 나무나 풀이 많아서 전문가가 아니면 상당수 고분군인지 그냥 흙더미인지, 언덕인지를 구분하고 확인하기 힘들다고 하네요. 경주시내중심산으로만 따져도 최소 몇만개는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경주외각지로 가면 수량도 추정하지 못할 정도구요.. 정말 조선시대부터 특히 일제시대때 도굴도 많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경주에 있는 산을 등산하다보면 나무가 우거지고 언덕비슷하게 무너져내려서 안에 있던 돌들이 흩어지고 깨진 토기나 기와가 나오는 곳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는게 대부분 언덕아니라 고분이라고 하더라구요. 참고로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지금 대릉원끝지점인 봉화대와 서봉황대넘어 경주역쪽이나 시내, 경주시장, 경주법원쪽으로도 민가나 밭에 있던 큰 고분군이 군데군데 있었다고 하구요. 아마 경주시내재개발들어가 공사들어가면 건물아래 묻혀있는 왕릉급 고분들도 많이 나올거라 생각이 듭니다.

  • @sl8hf_may
    @sl8hf_may Месяц назад

    신라때는 경주라는 도시가 없었지.. 그리고 지금의 경주는 신라의 동경이다. 그래서 그곳에서 백날 신라 금성 월성 신월성 찾아봐야 안나온다.

  • @user-likejaesung17
    @user-likejaesung17 Месяц назад

    멋져 역시 이재성 선수👍

  • @노을-l6j
    @노을-l6j Месяц назад

    월지 발굴때 나온 황금 장식품들은 왜 복원때 사용안하는거죠..

  • @euijinkim7209
    @euijinkim7209 Месяц назад

    신라공주라는 묘지석이라도 나왔는가ㅛ ?

  • @스위티-g9s
    @스위티-g9s Месяц назад

    ■금으로 만든 자(金尺)의 전설이 내려오는 금척리 고분군과 손씨고읍 무산대수촌 모량부의 고찰■ ========== ■최근 경주시는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와 함께 건천읍 금척리 고분군을 발굴조사 한다고 한다. 금척리일원은 孫氏古里인 무산대수촌 지역이다. 금척리고분에는 "신라시조 박혁거세왕이 하늘로 부터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병든 사람을 고칠 수 있는 금자(金尺)를 받았는데, 중국에서 이를 탐내므로 이것을 숨기기 위해 40여개의 가짜무덤을 만들어 여기에 감추었다"는 전설이 있어서 '금척리'라 부른다고 하였다. 이곳에 일제강점기까지는 50여기의 크고 작은 고분이 있었다고 하며 현재는 30여기가 모여 있다고 한다. 이곳에 1952년 파괴된 무덤 2기를 발굴조사를 한바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당시 발굴자료에 의하면 금척리고분들은 경주시내 대형 고분들보다는 규모가 작고, 무덤의 구조는 5~6세기에 조성된 신라 특유의 적석목곽분이었으며 출토된 유물로는 금귀고리와 굽은옥, 은제허리띠, 철편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부장품 등에서도 경주시내의 고분과는 차이가 있어서, 왕족이 아닌 비교적 낮은 신분을 가진 귀족들의 무덤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금척리고분에 대해서 몇가지 추론해 보고자 한다. 먼저, 박혁거세와 금척(金尺)의 이야기를 분석해 보자. 박혁거세의 사로국 시절은 1세기전의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한 사회였다. 따라서 그당시의 부장품은 청동검과 청동거울, 구슬옥으로 만든 목걸이,돌화살촉이 부장품으로 발견된다. 그런데 금척리고분은 5~6세기 조성된 적석목곽분으로 박혁거세 의 시대와는 조성시기가 전혀 다르다. 금을 재료로 해서 만든 부장품이나 금을 증요하게 여기던 신라의 김씨왕조 시절과는 500년의 시간적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박혁거세가 살던 때는 대외적으로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할수 있던 시대가 아니었으며, 견재와 협력이 이루어지던 시기도 아니었던 점을 고려하면 중국이 금자(金尺)를 탐내었다는 말은 온당치 않다. 박혁거세는 지금의 경주시내인 양산촌 지역출신의 사람이다. 모량부 즉 무산대수촌지역과는 무관한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박혁거세와 금자(金尺)의 이야기는 설정부터 잘못된 것이다. 시대적으로도 맞지 않고, 지역적으로도 맞지 않다. 사람의 머리에 사자의 몸통을 하고 있는 현실성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금척설화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신라 김씨왕조시절에 조성된 고분에서는 금으로 만든 부장품들이 함께 매장되어 있음를 알고 도굴을 의식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모량부는 어떤 곳인가? 모량부는 신라 6부중 하나였던 무산대수촌에 속한 지역으로 손구례마를 중심한 후손들의 세거지였으며, 국효 손순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6부를 중심한 행정조직과 골품제도라는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까지는 비교적 지역적인 특징과 특색이 유지되어 왔다고 할수 있다. 따라서 금척리고분은 신라의 6부 가운데 하나인 무산대수촌의 손씨들을 중심한 6두품 출신의 모량부 귀족들의 수장층 무덤들로 짐작해볼수 있다. 이산(구미산)의 사라리 유적에서는 기원 후 1세기 무렵의 대형 널무덤이 조사되었고, 여기에서는 많은 청동제품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손구례마를 중심한 신라 성장에 한 축이 되었던 집단의 소재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스위티-g9s
    @스위티-g9s Месяц назад

    ■금으로 만든 자(金尺)의 전설이 내려오는 금척리 고분군과 손씨고읍 무산대수촌 모량부의 고찰■ ========== ■최근 경주시는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와 함께 건천읍 금척리 고분군을 발굴조사 한다고 한다. 금척리일원은 孫氏古里인 무산대수촌 지역이다. 금척리고분에는 "신라시조 박혁거세왕이 하늘로 부터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병든 사람을 고칠 수 있는 금자(金尺)를 받았는데, 중국에서 이를 탐내므로 이것을 숨기기 위해 40여개의 가짜무덤을 만들어 여기에 감추었다"는 전설이 있어서 '금척리'라 부른다고 하였다. 이곳에 일제강점기까지는 50여기의 크고 작은 고분이 있었다고 하며 현재는 30여기가 모여 있다고 한다. 이곳에 1952년 파괴된 무덤 2기를 발굴조사를 한바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당시 발굴자료에 의하면 금척리고분들은 경주시내 대형 고분들보다는 규모가 작고, 무덤의 구조는 5~6세기에 조성된 신라 특유의 적석목곽분이었으며 출토된 유물로는 금귀고리와 굽은옥, 은제허리띠, 철편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부장품 등에서도 경주시내의 고분과는 차이가 있어서, 왕족이 아닌 비교적 낮은 신분을 가진 귀족들의 무덤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금척리고분에 대해서 몇가지 추론해 보고자 한다. 먼저, 박혁거세와 금척(金尺)의 이야기를 분석해 보자. 박혁거세의 사로국 시절은 1세기전의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한 사회였다. 따라서 그당시의 부장품은 청동검과 청동거울, 구슬옥으로 만든 목걸이,돌화살촉이 부장품으로 발견된다. 그런데 금척리고분은 5~6세기 조성된 적석목곽분으로 박혁거세 의 시대와는 조성시기가 전혀 다르다. 금을 재료로 해서 만든 부장품이나 금을 증요하게 여기던 신라의 김씨왕조 시절과는 500년의 시간적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박혁거세가 살던 때는 대외적으로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할수 있던 시대가 아니었으며, 견재와 협력이 이루어지던 시기도 아니었던 점을 고려하면 중국이 금자(金尺)를 탐내었다는 말은 온당치 않다. 박혁거세는 지금의 경주시내인 양산촌 지역출신의 사람이다. 모량부 즉 무산대수촌지역과는 무관한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박혁거세와 금자(金尺)의 이야기는 설정부터 잘못된 것이다. 시대적으로도 맞지 않고, 지역적으로도 맞지 않다. 사람의 머리에 사자의 몸통을 하고 있는 현실성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금척설화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신라 김씨왕조시절에 조성된 고분에서는 금으로 만든 부장품들이 함께 매장되어 있음를 알고 도굴을 의식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모량부는 어떤 곳인가? 모량부는 신라 6부중 하나였던 무산대수촌에 속한 지역으로 손구례마를 중심한 후손들의 세거지였으며, 국효 손순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6부를 중심한 행정조직과 골품제도라는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까지는 비교적 지역적인 특징과 특색이 유지되어 왔다고 할수 있다. 따라서 금척리고분은 신라의 6부 가운데 하나인 무산대수촌의 손씨들을 중심한 6두품 출신의 모량부 귀족들의 수장층 무덤들로 짐작해볼수 있다. 이산(구미산)의 사라리 유적에서는 기원 후 1세기 무렵의 대형 널무덤이 조사되었고, 여기에서는 많은 청동제품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손구례마를 중심한 신라 성장에 한 축이 되었던 집단의 소재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스위티-g9s
    @스위티-g9s Месяц назад

    ■금으로 만든 자(金尺)의 전설이 내려오는 금척리 고분군과 손씨고읍 무산대수촌 모량부의 고찰■ ========== ■최근 경주시는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와 함께 건천읍 금척리 고분군을 발굴조사 한다고 한다. 금척리일원은 孫氏古里인 무산대수촌 지역이다. 금척리고분에는 "신라시조 박혁거세왕이 하늘로 부터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병든 사람을 고칠 수 있는 금자(金尺)를 받았는데, 중국에서 이를 탐내므로 이것을 숨기기 위해 40여개의 가짜무덤을 만들어 여기에 감추었다"는 전설이 있어서 '금척리'라 부른다고 하였다. 이곳에 일제강점기까지는 50여기의 크고 작은 고분이 있었다고 하며 현재는 30여기가 모여 있다고 한다. 이곳에 1952년 파괴된 무덤 2기를 발굴조사를 한바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당시 발굴자료에 의하면 금척리고분들은 경주시내 대형 고분들보다는 규모가 작고, 무덤의 구조는 5~6세기에 조성된 신라 특유의 적석목곽분이었으며 출토된 유물로는 금귀고리와 굽은옥, 은제허리띠, 철편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부장품 등에서도 경주시내의 고분과는 차이가 있어서, 왕족이 아닌 비교적 낮은 신분을 가진 귀족들의 무덤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금척리고분에 대해서 몇가지 추론해 보고자 한다. 먼저, 박혁거세와 금척(金尺)의 이야기를 분석해 보자. 박혁거세의 사로국 시절은 1세기전의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한 사회였다. 따라서 그당시의 부장품은 청동검과 청동거울, 구슬옥으로 만든 목걸이,돌화살촉이 부장품으로 발견된다. 그런데 금척리고분은 5~6세기 조성된 적석목곽분으로 박혁거세 의 시대와는 조성시기가 전혀 다르다. 금을 재료로 해서 만든 부장품이나 금을 증요하게 여기던 신라의 김씨왕조 시절과는 500년의 시간적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박혁거세가 살던 때는 대외적으로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할수 있던 시대가 아니었으며, 견재와 협력이 이루어지던 시기도 아니었던 점을 고려하면 중국이 금자(金尺)를 탐내었다는 말은 온당치 않다. 박혁거세는 지금의 경주시내인 양산촌 지역출신의 사람이다. 모량부 즉 무산대수촌지역과는 무관한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박혁거세와 금자(金尺)의 이야기는 설정부터 잘못된 것이다. 시대적으로도 맞지 않고, 지역적으로도 맞지 않다. 사람의 머리에 사자의 몸통을 하고 있는 현실성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금척설화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신라 김씨왕조시절에 조성된 고분에서는 금으로 만든 부장품들이 함께 매장되어 있음를 알고 도굴을 의식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모량부는 어떤 곳인가? 모량부는 신라 6부중 하나였던 무산대수촌에 속한 지역으로 손구례마를 중심한 후손들의 세거지였으며, 국효 손순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6부를 중심한 행정조직과 골품제도라는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까지는 비교적 지역적인 특징과 특색이 유지되어 왔다고 할수 있다. 따라서 금척리고분은 신라의 6부 가운데 하나인 무산대수촌의 손씨들을 중심한 6두품 출신의 모량부 귀족들의 수장층 무덤들로 짐작해볼수 있다. 이산(구미산)의 사라리 유적에서는 기원 후 1세기 무렵의 대형 널무덤이 조사되었고, 여기에서는 많은 청동제품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손구례마를 중심한 신라 성장에 한 축이 되었던 집단의 소재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스위티-g9s
    @스위티-g9s Месяц назад

    ■금으로 만든 자(金尺)의 전설이 내려오는 금척리 고분군과 손씨고읍 무산대수촌 모량부의 고찰■ ========== ■최근 경주시는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와 함께 건천읍 금척리 고분군을 발굴조사 한다고 한다. 금척리일원은 손씨고리(孫氏古里)인 무산대수촌 지역이다. 금척리고분에는 "신라시조 박혁거세왕이 하늘로 부터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병든 사람을 고칠 수 있는 금자(金尺)를 받았는데, 중국에서 이를 탐내므로 이것을 숨기기 위해 40여개의 가짜무덤을 만들어 여기에 감추었다"는 전설이 있어서 '금척리'라 부른다고 하였다. 이곳에 일제강점기까지는 50여기의 크고 작은 고분이 있었다고 하며 현재는 30여기가 모여 있다고 한다. 이곳에 1952년 파괴된 무덤 2기를 발굴조사를 한바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당시 발굴자료에 의하면 금척리고분들은 경주시내 대형 고분들보다는 규모가 작고, 무덤의 구조는 5~6세기에 조성된 신라 특유의 적석목곽분이었으며 출토된 유물로는 금귀고리와 굽은옥, 은제허리띠, 철편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부장품 등에서도 경주시내의 고분과는 차이가 있어서, 왕족이 아닌 비교적 낮은 신분을 가진 귀족들의 무덤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금척리고분에 대해서 몇가지 추론해 보고자 한다. 먼저, 박혁거세와 금척(金尺)의 이야기를 분석해 보자. ●박혁거세의 사로국 시절은 1세기전의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한 사회였다. 따라서 그당시의 부장품은 청동검과 청동거울, 구슬옥으로 만든 목걸이,돌화살촉이 부장품으로 발견된다. ●그런데 금척리고분은 5~6세기 조성된 적석목곽분으로 박혁거세 의 시대와는 조성시기가 전혀 다르다. ●금을 재료로 해서 만든 부장품이나 금을 증요하게 여기던 신라의 김씨왕조 시절과는 500년의 시간적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박혁거세가 살던 때는 대외적으로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할수 있던 시대가 아니었으며, 견재와 협력이 이루어지던 시기도 아니었던 점을 고려하면 중국이 금자(金尺)를 탐내었다는 말은 온당치 않다. ●박혁거세는 지금의 경주시내인 양산촌 지역출신의 사람이다. 모량부 즉 무산대수촌지역과는 무관한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박혁거세와 금자(金尺)의 이야기는 설정부터 잘못된 것이다. 시대적으로도 맞지 않고, 지역적으로도 맞지 않다. 사람의 머리에 사자의 몸통을 하고 있는 현실성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금척설화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신라 김씨왕조시절에 조성된 고분에서는 금으로 만든 부장품들이 함께 매장되어 있음를 알고 도굴을 의식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모량부는 어떤 곳인가? 모량부는 신라 6부중 하나였던 무산대수촌에 속한 지역으로 손구례마를 중심한 후손들의 세거지였으며, 국효 손순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6부를 중심한 행정조직과 골품제도라는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까지는 비교적 지역적인 특징과 특색이 유지되어 왔다고 할수 있다. 따라서 금척리고분은 신라의 6부 가운데 하나인 무산대수촌의 손씨들을 중심한 6두품 출신의 모량부 귀족들의 수장층 무덤들로 짐작해볼수 있다. 이산(구미산)의 사라리 유적에서는 기원 후 1세기 무렵의 대형 널무덤이 조사되었고, 여기에서는 많은 청동제품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손구례마를 중심한 신라 성장에 한 축이 되었던 집단의 소재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스위티-g9s
    @스위티-g9s Месяц назад

    ■금으로 만든 자(金尺)의 전설이 내려오는 금척리 고분군과 손씨고읍 무산대수촌 모량부의 고찰■ ========== ■최근 경주시는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와 함께 건천읍 금척리 고분군을 발굴조사 한다고 한다. 금척리일원은 손씨고리(孫氏古里)인 무산대수촌 지역이다. 금척리고분에는 "신라시조 박혁거세왕이 하늘로 부터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병든 사람을 고칠 수 있는 금자(金尺)를 받았는데, 중국에서 이를 탐내므로 이것을 숨기기 위해 40여개의 가짜무덤을 만들어 여기에 감추었다"는 전설이 있어서 '금척리'라 부른다고 하였다. 이곳에 일제강점기까지는 50여기의 크고 작은 고분이 있었다고 하며 현재는 30여기가 모여 있다고 한다. 이곳에 1952년 파괴된 무덤 2기를 발굴조사를 한바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당시 발굴자료에 의하면 금척리고분들은 경주시내 대형 고분들보다는 규모가 작고, 무덤의 구조는 5~6세기에 조성된 신라 특유의 적석목곽분이었으며 출토된 유물로는 금귀고리와 굽은옥, 은제허리띠, 철편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부장품 등에서도 경주시내의 고분과는 차이가 있어서, 왕족이 아닌 비교적 낮은 신분을 가진 귀족들의 무덤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금척리고분에 대해서 몇가지 추론해 보고자 한다. 먼저, 박혁거세와 금척(金尺)의 이야기를 분석해 보자. ●박혁거세의 사로국 시절은 1세기전의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한 사회였다. 따라서 그당시의 부장품은 청동검과 청동거울, 구슬옥으로 만든 목걸이,돌화살촉이 부장품으로 발견된다. ●그런데 금척리고분은 5~6세기 조성된 적석목곽분으로 박혁거세 의 시대와는 조성시기가 전혀 다르다. ●금을 재료로 해서 만든 부장품이나 금을 증요하게 여기던 신라의 김씨왕조 시절과는 500년의 시간적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박혁거세가 살던 때는 대외적으로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할수 있던 시대가 아니었으며, 견재와 협력이 이루어지던 시기도 아니었던 점을 고려하면 중국이 금자(金尺)를 탐내었다는 말은 온당치 않다. ●박혁거세는 지금의 경주시내인 양산촌 지역출신의 사람이다. 모량부 즉 무산대수촌지역과는 무관한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박혁거세와 금자(金尺)의 이야기는 설정부터 잘못된 것이다. 시대적으로도 맞지 않고, 지역적으로도 맞지 않다. 사람의 머리에 사자의 몸통을 하고 있는 현실성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금척설화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신라 김씨왕조시절에 조성된 고분에서는 금으로 만든 부장품들이 함께 매장되어 있음를 알고 도굴을 의식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모량부는 어떤 곳인가? 모량부는 신라 6부중 하나였던 무산대수촌에 속한 지역으로 손구례마를 중심한 후손들의 세거지였으며, 국효 손순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6부를 중심한 행정조직과 골품제도라는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까지는 비교적 지역적인 특징과 특색이 유지되어 왔다고 할수 있다. 따라서 금척리고분은 신라의 6부 가운데 하나인 무산대수촌의 손씨들을 중심한 6두품 출신의 모량부 귀족들의 수장층 무덤들로 짐작해볼수 있다. 이산(구미산)의 사라리 유적에서는 기원 후 1세기 무렵의 대형 널무덤이 조사되었고, 여기에서는 많은 청동제품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손구례마를 중심한 신라 성장에 한 축이 되었던 집단의 소재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스위티-g9s
    @스위티-g9s Месяц назад

    ■금으로 만든 자(金尺)의 전설이 내려오는 금척리 고분군과 손씨고읍 무산대수촌 모량부의 고찰■ ========== ■최근 경주시는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와 함께 건천읍 금척리 고분군을 발굴조사 한다고 한다. 금척리일원은 손씨고리(孫氏古里)인 무산대수촌 지역이다. 금척리고분에는 "신라시조 박혁거세왕이 하늘로 부터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병든 사람을 고칠 수 있는 금자(金尺)를 받았는데, 중국에서 이를 탐내므로 이것을 숨기기 위해 40여개의 가짜무덤을 만들어 여기에 감추었다"는 전설이 있어서 '금척리'라 부른다고 하였다. 이곳에 일제강점기까지는 50여기의 크고 작은 고분이 있었다고 하며 현재는 30여기가 모여 있다고 한다. 이곳에 1952년 파괴된 무덤 2기를 발굴조사를 한바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당시 발굴자료에 의하면 금척리고분들은 경주시내 대형 고분들보다는 규모가 작고, 무덤의 구조는 5~6세기에 조성된 신라 특유의 적석목곽분이었으며 출토된 유물로는 금귀고리와 굽은옥, 은제허리띠, 철편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부장품 등에서도 경주시내의 고분과는 차이가 있어서, 왕족이 아닌 비교적 낮은 신분을 가진 귀족들의 무덤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금척리고분에 대해서 몇가지 추론해 보고자 한다. 먼저, 박혁거세와 금척(金尺)의 이야기를 분석해 보자. ●박혁거세의 사로국 시절은 1세기전의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한 사회였다. 따라서 그당시의 부장품은 청동검과 청동거울, 구슬옥으로 만든 목걸이,돌화살촉이 부장품으로 발견된다. ●그런데 금척리고분은 5~6세기 조성된 적석목곽분으로 박혁거세 의 시대와는 조성시기가 전혀 다르다. ●금을 재료로 해서 만든 부장품이나 금을 증요하게 여기던 신라의 김씨왕조 시절과는 500년의 시간적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박혁거세가 살던 때는 대외적으로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할수 있던 시대가 아니었으며, 견재와 협력이 이루어지던 시기도 아니었던 점을 고려하면 중국이 금자(金尺)를 탐내었다는 말은 온당치 않다. ●박혁거세는 지금의 경주시내인 양산촌 지역출신의 사람이다. 모량부 즉 무산대수촌지역과는 무관한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박혁거세와 금자(金尺)의 이야기는 설정부터 잘못된 것이다. 시대적으로도 맞지 않고, 지역적으로도 맞지 않다. 사람의 머리에 사자의 몸통을 하고 있는 현실성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금척설화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신라 김씨왕조시절에 조성된 고분에서는 금으로 만든 부장품들이 함께 매장되어 있음를 알고 도굴을 의식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모량부는 어떤 곳인가? 모량부는 신라 6부중 하나였던 무산대수촌에 속한 지역으로 손구례마를 중심한 후손들의 세거지였으며, 국효 손순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6부를 중심한 행정조직과 골품제도라는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까지는 비교적 지역적인 특징과 특색이 유지되어 왔다고 할수 있다. 따라서 금척리고분은 신라의 6부 가운데 하나인 무산대수촌의 손씨들을 중심한 6두품 출신의 모량부 귀족들의 수장층 무덤들로 짐작해볼수 있다. 이산(구미산)의 사라리 유적에서는 기원 후 1세기 무렵의 대형 널무덤이 조사되었고, 여기에서는 많은 청동제품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손구례마를 중심한 신라 성장에 한 축이 되었던 집단의 소재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 @혼자왔어
    @혼자왔어 Месяц назад

    산 전체가 고분군인가봐요 ... ㅎ

  • @혼자왔어
    @혼자왔어 2 месяца назад

    책땡기내요. 동영상보는걸로 만족해야겠죠 ... ㅎ

  • @yj5040b
    @yj5040b 2 месяца назад

    저는 지난 7뤌 숭문대 다녀왔어요 역시 관람은 혼자 조용히 해야 제대로 느끼고 배울 수 있는것 같습니다 참 좋았어요 늘 응원합니다

  • @학교망해라
    @학교망해라 2 месяца назад

    😮😮😮

  • @이현숙-c6t
    @이현숙-c6t 3 месяца назад

    조계종단을 비롯한 범 불교계가 나서서 황룡사 구층탑울 비롯한 전체 황룡사 복원을 완공후에는 서울의 조계사 기능을 이곳으로 옮기면 어떨까 싶네요..... 흔히들 복원을 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하다고들 하는데 완벽하게 복원을 하지않아도 지금이라도 그 옛날의 황룡사비슷하게라도 복원을 하면 이 또한 우리 후손세대에 물려줄만한 소중한 문화유산이 되지 않을까요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 @노을-l6j
      @노을-l6j Месяц назад

      저게 그냥 상상복원 한다고 끝인줄아나ㅋㅋ 정확한 자료없이 복원하면 유네스코 박탈임

  • @Hyuchan1002
    @Hyuchan1002 3 месяца назад

    귀부가 쓸쓸하네요 빈비석이라도 세워 놓으면 좋겠네요

  • @jaijoonyoo2651
    @jaijoonyoo2651 3 месяца назад

    이런거 4학년은 안돼나요? 옛날부터 진짜 해보고싶어서요...😂😊

  • @goindol-eu1yo
    @goindol-eu1yo 3 месяца назад

    한국 경주는 고려말,조선초에 한반도에 갖다붙힌 이름이며, 낭산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제를 공격할때 당나라 고종이 김춘추에게 하사한 직책이 "우이도"행군총관. 그 우이도가 바로 백제가 있었던 산동지역이며, 옛고조선의 땅입니다.

  • @goindol-eu1yo
    @goindol-eu1yo 3 месяца назад

    진짜 낭산은 중국 양자강유역 안휘성인근에 있습니다. 경주,팔공산,함산,9층목탑,사로6부.우산국. 모두 그곳에 1980년대까지 중국의 역사관은 중국 동부지역과 만주, 한반도를 동이문화권. 중국 서쪽지역을 한족문화권 중국 남부지역을 남만문화권. 이렇게 3개의 문화권으로 나뉘서 역사를 인식하고 학교에서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이후부터 동북공정이 시작되면서 중국 동부지역을 지배했던 고조선, 부여, 고구려,백제, 발해 역사를 중국역사로 편입해서 가르치고 있고, 전 세계의 주요도서관에 책을 배포해서 홍보하고 있습니다. 즉 중국 사학계는 알고있습니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주활동 무대는 중국 동부지역이고, 한반도는 고구려와 왕망의 신라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고구려는 중국 황하이북, 산서성, 요동지역(황하 이북지역)의 지배자였습니다. 역사기록을 보도록하겠습니다. <梁書(양서)>, <南史(남사)>의 기록에 고구려는 사방 2천리이며 국토 가운데 요산(遼山)이 있어 요수가 그곳에서 흘러나오며 도읍지는 환도산의 꼬리부분에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요산은 산서성 지역입니다. <삼국사 기록>에 "고구려 모본왕때 북평,어양,상곡,태원을 점령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냐? 중국 태행산맥 즉 산서성 전체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 .................................................................. 또한 2개의 신라 기록이 삼국유사등 몇몇 기록이 등장합니다. <한반도 신라>는 후한시대 왕망이 세운 신나라가 망하고, 이 세력이 고구려에 투항하여 한반도 남부로 이주하여 신라가 세워졌고, 고구려의 제후국으로 왕의 호칭을 마립간이라 했으며, <대륙신라>는 진나라 유민이 동쪽으로 이주하여 백제에 의탁하니, 백제(초기 백제의 위치 : 낙양, 숭산, 태산 일대)가 동쪽 땅(산동반도 일대, 양자강 안휘성 일대)을 할해하여 내줘서 그곳에 세워진 대륙신라.(왕 칭호) 이 두개의 신라가 있었는데, 김부식이 삼국사를 짜집기하면서 2개의 신라기록을 하나로 합치면서 엉망이 된것입니다. ""부여는 대동시(북경 서북쪽)인근에, 고구려는 하북지역,산서성까지 백제는 산동과 요서지역 신라는 양자강 안휘성 유역, 우산국, 산동반도까지 다스렸습니다."" 즉 대륙에는 대동시(북경 서북쪽) 인근에 있었던 졸본부여. 졸본부여에서 남하하여 산서성, 황하이북 지역을 주 활동무대로 삼고, 만주 한반도 북부지역까지 다스렸던 고구려. 졸존부여에서 남쪽으로 이주하여 황하인근의 하북지역, 하남지역으로 이주한 소서노 세력의 백제. 신라는 진나라 유민이 백제땅으로 이주하여, 백제의 동쪽땅. 즉 양자강 안휘성 유역, 우산국, 산동반도까지 다스렸습니다. 양자강 이남지역에 있었던 대륙가라와 왜국. (신당서,구당서,남제서,송서 기록 참고) ......................................................................... 한반도에는 삼국시대 고구려,백제,신라의 묘지석이 단 한개도 없습니다.~!!!! ...왜일까요?? 충남 공주가 웅진이었다는 기록이 단 한개라도 있나요? 충남 부여가 사비였다는 기록이 단 한개라도 있나요? 충남 금강이 백마강이었다는 기록이 단 한번이라도 있나요? 없습니다. 조선 초기, 일제강점기때 붙여진 것들입니다. 그리고 소정방은 서해를 타고 부여에 오지 않았습니다. 중국 서안에서 황하를 군수물자 땟목을 타고 황하 하류, 황산(황하 옆에 있는산 황산) 인근에 덕물도(가탐도리기 참고)라는 섬에 집결하여, 황산벌(황하 강가옆)에서 전투를 한것입니다. 그당시 사서기록을 보면 황하를 海라 기록했습니다. 중국 산동지역에는 지금도 백마강, 황하옆 황산(벌), 웅진성, 사비, 탄현, 제녕, 제남 그리고 양자강 안휘성 인근에 경주, 팔공산, 함산, 낭산, 계림, 9층목탑, 박혁거세 묘와 후손들이 사는 마을 등등 고구려,백제,신라의 지명과 유물들이 너무 많습니다. 당연히 한반도 신라무덤은 왕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몰라 전부 "총"입니다. 공주의 무령왕릉은 기회되면 직접가서 보세요. 사마왕의 지석은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것처럼 지석에 구멍이 나있고, 글씨체도 부인 지석과 다르게 조잡하게 씌여있으며, 왕릉의 위치는 옆의 고분들 사이에 끼여있는 형세로서 왕의 무덤이라 할수 없습니다. 이미 누군가에 의해 도굴되어 되메어진것을 1971년 다시 발굴했던 것이며, 발굴당시 이미 내부는 어지럽게 훼손된 상태였습니다. 부인의 관 밑에서 발견된 반지에는 왕비가 아니고 다리작 부인이라는 글씨가 씌여있으며, 다리작은 고구려계 대부인이 쓰는 호칭이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 기록에 부여와 정림사는 등장하지 않으며, 사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림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밝혀졌으며 소정방이 썼다는 석탑의 대당평백제비는 사서 기록과 다르며, 후대에 조작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구당서 기록에는 탑이 아니고 비석에 승전내용을 기록한것으로 되어 있으며, 위치 또한 다릅니다. ..................................................................... 은(상)나라 시대에 동이족의 거주지는 산서성(태행산맥 지역), 하북지역(황하 이북), 산동지역, 절강성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동이족이라 하였으며, 고조선, 은나라, 고죽국도 동이족 국가였습니다. 후대에 당나라때 "구당서 기록"과 많은 중국의 정사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백제,신라,왜국,일본은 동이족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고조선의 주활동 무대는 하북지역, 산동지역 있었습니다. 중국측 사서기록에 산동에 "구이"(아홉개의 동이국가)가 있어 단군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라고 기록 <중국측 사서인 "사고전서", "명의고" 기록> 산동의 구이가 조선이다.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조상의 나라, 동이. 그곳이 바로 산동지역을 주무대로 했던 고조선이다. <"우공추지" 기록> 동이 9족이 곧 "우이"이고, 우이가 곧 "조선"이다. <"사서혹문" 기록> 구이는 현토, 낙랑, 구려를 말한다. <"구당서" 기록> 당나라와 신라가 백제를 공격할때, 김춘추를 "우이도" 행군총관 으로 임명합니다. 그 "우이도"가 바로 백제가 있었던지역이고, 과거 산동지역 우이의 땅입니다. 또한 발해는 북경을 중심으로 나라를 건국했습니다. 산동지역의 백제와 하북지역의 고구려가 망한후, 북경유역에 자리잡은 발해는 통일신라와 당의 공습으로 북경 유역을 빼앗기고 만주지역으로 이주하였다가 거란에 망하게 됩니다. 참고로 거란은 지금의 중국 산서성지역에 있던 나라입니다. 북경 서쪽 태행산맥에 자리잡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거란이 고구려가 차지했었던 산서성 지역에서 일어났기때문에 스스로를 고구려의 후예라고 자칭했던 것입니다.(서희 담판) 발해가 망한이후 북경유역은 고려의 땅이 되었고, 고려.거란 전쟁의 무대가 바로 하북성과 산서성에서 벌어졌던 것입니다. (전투지역: 안문관, 흥화진, 통주 등등 전부 하북성, 산서성 지역임) 참고로 사서기록을 보면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할때도 그랬고, 발해를 공격할때도 태행산맥 동쪽 석문(석가장) 인근에서 전투가 벌어집니다. 바로 북경 서쪽, 즉 황하이북에 있는 지역입니다. 이후 중국 동부지역은 후삼국 시기가 도래하고, 절강성, 양자강 유역에서 왕건이 견훤을 수군으로 대파한 이후, 안휘성 인근 경주에 있던 신라는 왕건에 복속하게 되고, 중국 동부지역은 왕건의 고려가 시작하게 된것입니다. 최근 TV에서 방영된 "고려-거란 전쟁"의 무대는 한반도가 아니고, 서경(북경), 그 오른쪽에(개주, 개경), 태행산맥 인근의 흥화진, 안문관, 석문(석가장), 통주(북경 바로 아래)에서 치러진 전투입니다. 지금도, 그리고, 고지도에 그 지명들이 하북지역(황하이북)을 중심으로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한반도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안나오죠! 이후 신라인 김함보가 건국했던 김(금)나라는 중원에 진출했다가 원나라에 패배하고, 원나라의 중원 침략, 원이 고려에게 중국 중부지역의 황건적 토벌요청, 산동지역의 제주 삼별초 전쟁, 산동반도 아래 강화도 천도, 원의 북송점령, 다시 원나라의 퇴각, 농민반란으로 고려의 남경(양가강 유역)에서 일어선 명나라의 북경유역 점령 등으로 고려 후기에 중국동부를 지배했던 고려는 심양, 만주, 한반도로 대거 이주하게 된것이고, 동북면(만주,한반도)에 기반을 두고 관할했던 이성계에게 쿠데타로 나라가 망하게 된것입니다. 진짜역사는 많은 중국측 사서와 고려사, 삼국사 원문을 해석해서 확인해야 합니다. 현재 삼국사 해석은 오류 투성이 입니다.

  • @최훈-z1y
    @최훈-z1y 3 месяца назад

    책을 읽던 설명듣던 이후 문화재 답사하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이는 재미가 쏠쏠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 @yj5040b
    @yj5040b 3 месяца назад

    그제 경주 일정에 숭문대 잘 보고 왔습니다 월성해자 실감영상 보면서 그 시절로 돌아간것같은 그래서 그 뜨거운 열기도 잠시 잊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라이언-p5v
    @라이언-p5v 3 месяца назад

    와 기러기만 있으면 찐 雁鴨池네

  • @gyeongju_nrich
    @gyeongju_nrich 3 месяца назад

    ***댓글 이벤트 당첨자 발표*** (2024.07.31)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려두었으니 확인 부탁 드립니다~!!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멋쟁이신사3
    @멋쟁이신사3 3 месяца назад

    😊

  • @factoryguide
    @factoryguide 3 месяца назад

    촬영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히 보겠습니다

  • @딸-e1v
    @딸-e1v 3 месяца назад

    이: 이세상에 재: 재(제)일가는 성: 이재성! 그리고 국가유산청,,, 그리고,,, 경주소,,, 알라뷰!

  • @이재권-t2z
    @이재권-t2z 3 месяца назад

    국가유산청 출범 축하~ 이재성 프로데뷔 10주년 축하해요. 월성 명예 홍보대사 문화유산 사랑합시다.

  • @jbs3327
    @jbs3327 3 месяца назад

    늦게나마 국가 유산청 출범, 월성 재조사 10주년과 더불어 이재성 선수의 프로 데뷔 10주년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 뜻깊은 자리뿐만 아니라 행사 이후 다양한 컨텐츠와 이벤트를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에 이재성 선수의 월성 명예 홍보대사로 위촉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어떤 연관이 있을까 굉장히 궁금해하며 위촉식과 사인회에 참석했습니다. 덕분에 위촉식 장소로 가는 길에 경주 월성 탐방로에 있는 안내판도 자세히 읽어보게 되고 여행으로 자주 방문했던 곳이지만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게 됐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열일해주신 모든 관계자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이번 계기로 저도 좀 더 문화재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되어보겠습니다! 물론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와 이재성 선수 모두 열심히 응원할게요!

  • @남서방-p7u
    @남서방-p7u 3 месяца назад

    발굴 안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