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나무이다.(2) _ 총무원 기획국장 석두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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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1 сен 2024
  • 금강정사 9월 넷째주 일요법회 석두스님 법문영상입니다.
    - 일시 : 불기2568(2024)년 9월22일(일)
    - 법사 : 총무원 기획국장 석두스님
    - 법문 : 나무는 나무이다. (두번째)
    나무는 나무이다.
    절언절려(絶言絶慮) - 말과 생각이 끊어지면
    무처불통(無處不通) - 어느 곳인들 통하지 않으리오
    귀근득지(歸根得旨) -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수조실종(隨照失宗) - 비춤을 따르다 보면 종취를 잃으리라
    수유반조(須臾返照) - 모름지기 잠깐이라도 돌이켜 비춰보는 것이
    승각전공(勝脚前空) - 세상의 공함을 아는 것보다 수승하다
    앞 절의 多言多慮(다언다려) 轉不相應(전불상응) 뜻과 반대되는 내용이다
    ‘끊을 절(切)’을 쓰지 않고 ‘끊을 절(絶)’을 쓴 이유는 왜일까?
    같은 의미 같지만 앞의 ‘切’은 칼과 같은 것으로 어떤 사물을 잘라낸다는 뜻이 강하지만, 하던 일을 멈추거나, 더는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강할 때는 ‘絶’을 쓴다.
    가는 실 사(絲), 칼 도(刀), 꼬리, 바랄, 땅이름 파(巴)이거나 혹은
    알 란/난(卵)의 오른쪽(병부 卩)이 붙어있다고 보는 것인데,
    ‘사(絲)’ ‘도(刀)’는 당연히 연결된 상태를 끊는다는 점에서 ‘끊을 절(絶)’이라는 글자 그대로라 할 것이다. 문제는 巴나 卩인데, 이는 두 글자 모두 사람이 꿇어앉아 있는 모양에서 온 것이다. 이렇게 보면 ‘끊을 절(絶)’은 무릎 꿇고 앉아 정성을 다해 무엇인가를 끊어낸다거나, 아니면 무릎을 꿇고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람으로써만 끊어지는 어떤 것이다.
    말과 생각은 오랫동안의 반복, 지속된 결과로 무의식적, 자동적으로 작동한다.
    단호하게 지금 이 자리에서 결심한다고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마음이 될 정도로 간절해야 변화의 조짐을 볼 수 있다.
    말이 생각을 만들고 생각이 말을 만든다. 그리고 그 말과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출가 초에 행자들은 일정 기간 묵언을 강제적으로 시킨다.
    속가에서 익혀온 습관적인 말과 생각을 끊어내고 새로운 말과 생각을 익히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동적, 습관적 말과 생각이 끊어진 새로운 곳에 그동안 보지 못하고 하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고 느껴지게 하기 위한 것이다.
    비워진 공간이라야 새로운 것들이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소통’이란 내 견해를 가지고 의견조율 하는 것이 아니라
    무채색의 텅 빈 마음으로 온전히 수용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 외부경계가 있는 그대로 드러나고,
    그래야 정견(正見)이 설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정견은 내면의 나와 소통과 숙고를 통해서만이 깊어진다.
    밖으로의 시선을 안으로 돌리고, 내적 통찰을 깊이 익혀갈 때,
    나의 생각은 내려지고 타인의 목소리가 들리게 된다.
    들리는 만큼 넓어지고 깊어진다. 주장하지 않아도 근본에 벗어나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뜻과 의미에서 어긋나지 않게 된다.
    그래야 통하지 않는 곳이 없게 된다.
    나무의 근본은 뿌리다. 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리석은 이는 보이는 가지가 나무의 전부일 것이라 여긴다.
    현명한 이는 가지에 물을 주지만 뿌리가 생명의 원천임을 잊지 않는다.
    어리석은 이는 멋진 가지를 만들기 위해서 가지만을 가꾼다.
    근본은 뿌리이고, 생명은 뿌리에 있다. 가지는 지말 이지만 그 또한 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 가지와 뿌리는 둘이지만 하나이다.
    이러한 안목이 생긴다면 그는 도인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은 진실이며 근본이다.
    이러한 근본을 놓치면 지금 현존하는 것에 애착과 탐착을 갖게 된다.
    괴로움은 근본을 망각하는 것에서 온다.
    비춤은 가지이다. 가지는 생명 현상의 일부이다.
    종취는 뿌리이다. 뿌리는 생명 현상의 근원이다.
    육근에 의해 탐지되고 육내입처에 의해 조작된 이 세계는 생명현상의 연기적인 모습일 뿐이다. 그것은 마치 중생의 눈에는 물만 보이지 근원적인 수소원자와 산소의 결합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물, 얼름, 수증기
    모습은 다르지만 근본은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의 결합이다.
    우리는 비춤을 볼 뿐, 비춤의 근본 자리는 볼 수 없다.
    마음으로 마음을 볼 수는 없다. 마치 눈이 눈을 볼 수 없듯이,...
    마음의 연기적 현상을 통해서 우리는 마음을 가늠할 뿐이다.
    뿌리와 가지를 둘로 나누어 볼 수 없듯이,
    이 세계에서 현상과 본질이 둘로 드러나 보이지만,
    현상을 떠난 본질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본질을 떠난 현상은 신기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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