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 인문학] 동서양 철학을 갈아 넣은 K철학 _2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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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Опубликовано: 8 фев 2025
- 철학을 갖고 놉시다.
제가 주장한 것은 쉬운 철학이어야 된다는 거예요.
어려운 철학은 가라. 쓸데없이 어려운 철학들 싹 가라.
서양철학도요, 이 안에 다 들어있으니까 안 어려워요.
안 어려우면서 유불선, 서양철학.
최소 4대 성인은 다 만났습니다, 여기서.
제가 목숨 걸고 자부합니다, 4대 성인 다 만났고
거기에 빠진 뭐 힌두교니, 우리 천부경, 대종교 철학이니,
홍익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런 모든 가르침들이 하나로 다 녹아 있습니다.
보시면, 요게 1인칭 자리라는 거죠, 1인칭.
이 1인칭 자리를 이게 다 지금 체험 가능하니까 괜찮아요.
체험 가능하니까 안 어려운 거예요.
말만 하면 힘들어요. 체험 가능하니까 안 어려워요.
여러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여러분 마음을 한번 쪼그라트리면 뭐가 남느냐?
이것밖에 안 남아요. '지금 여기 나너 이렇게'
실제로 하면 그런지 보세요.
이게 쪼그라든 겁니다. 한 점으로 쪼그라든 거예요.
'지금 여기 나너 이렇게'로.
왜냐? 우리 삶은 더 복잡 다단하잖아요.
그리고 과거 미래를 막 헤매고 다니잖아요.
과거 현재 미래가 만나서 헤매고 있는데. 보세요,
지금 어떻게 해야 이게 알아지냐?
호흡 하나만 볼까요.
본인 지금 들이쉬는지 내쉬는지 한번 보세요.
호흡만 알아차려보세요. 들이쉬나? 내쉬나?
호흡만 알아차려보세요.
그러면서 1인칭 관점을 유지해 보세요.
호흡 하나를 보면서, 내가 보고 있죠.
아니면, 제 주먹 보셔도 돼요. 저의 주먹만 보세요,
주먹이 2인칭으로 보이시나요?
주먹을 보고 있는 1인칭 느껴지죠? 주먹 보이세요?
무슨 현상이 일어나냐? 이때.
몰라! 괜찮아! 하면서 보셔야 돼요.
'몰라! 괜찮아!'하면서 보세요.
주먹만 보세요. 본인 호흡만 보셔도 되고요.
무슨 현상이 일어나냐?
천지사방으로 흩어졌던 마음이 확 쪼그라듭니다.
어떻게 쪼그라들어요?
지금, 여기서, 나너, 나 주먹
아니면 나 호흡, 이렇게, 알아차리고 있었죠.
생각, 감정, 오감이 최소화됩니다.
생각, 감정, 오감이 쪼그라들어요.
이 '이렇게'라는 것은 생각, 감정, 오감이거든요.
이게 쪼그라들면서 어땠어요?
최소의 감각만 느껴지죠.
생각도 멈추고, 알아차리고 있느라고.
감정도요, 요동할 일이 없죠.
호흡만 보고 있는데. 주먹만 보고 있는데
쭉 쪼그라듭니다.
무량한 과거, 무량한 미래, 동서남북 상하 사방천지.
흩어져 있던 마음이 확 쪼그라듭니다, 여기로, 확~!
과거 미래를 헤매고 다니는, 나 앞으로 어떻게 살까?
과거에는 어땠는데, 지금 나는 어떻게 해야 되지? 하다가
그거 딱 하나 보느라고 딱 정신이 쪼그라들었죠.
'지금'으로. '여기'로. 쪼그라들었죠.
수많은 복잡한 인간관계가
나랑 그 주먹, 나랑 그 호흡밖에 없었죠.
그 다음 뭐 했죠?
복잡다단한 생각 감정 오감이 많이 쪼그라들고
보이는 그 시각적 대상이나 촉감의 대상에만 집중했죠.
확 오감도 쪼그라들었죠.
생각도 말을 잃고, '몰라! 괜찮아!' 하니까.
생각 감정이 모르고 괜찮은 상태가 되면서.
어때요? 확 쪼그라뜨려 보니까.
이게 내 마음에 최소 단위더라 이겁니다.
이 최소 단위 안에 갖출 건 다 갖췄더라, 알고 보니까.
뭡니까? 이게 시간성, 이건요? 공간성,
이거는요? 이원성! 분명히 나와 너가 있어요.
상대가 있어요 .주객이 있고.
입자가 있으면 반입자가 있듯이 항상 쌍생쌍멸합니다.
쌍으로 나타나서 쌍으로 사라집니다.
'이렇게'는요? 이 쌍생쌍멸하는 이 주객 간에,
이 두 입자 간에 분명히 상호작용이 일어납니다,
그게 '이렇게'.
주체가 대상을 보고 뭔가 의식작용을 일으킵니다,
생각 감정 오감에.
또 이 두 세상들 간에 뭔가 치고 받고를 합니다,
투쟁을 하건, 화합을 하건,
이게 다 '연기'예요. '인과작용'이 일어나요,
이것밖에 없어요.
물리학적으로도 심리학적으로도 이것밖에 없습니다.
이걸 물리에 적용해도 이대로입니다.
시간, 공간 안에, 두 물질 입자 간에
어떤 상호작용이 일어나는가?
상호작용이 양자역학까지 가면,
상호작용이 없이는 두 물질이 측정 자체도 안 된다.
두 물질이 있다는 것은 상호작용으로 드러난다.
상호작용이 관측되기 때문에.
'관측되는 것만 존재한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몰고 가는
양자역학적 논리가 철학에서는 별거 아니에요. 왜냐?
주객이라는 것도요, 주객도 서로 생각 감정 오감의
상호작용을 일으킬 때 파악이 되는 거예요.
그 전에는 파악이 안 돼요, 어떤 존재인지.
생각 감정 오감으로 서로 주고받아야 돼요.
즉 관측된 것만 존재한다는 게,
양자역학만 그런 게 아니에요, 철학도 그래요.
우리 심리학도 그래요.
내 의식에 지금 알아차려진 것들이
그 대상과 내가 서로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이것도 상호작용입니다.
이런 모양의, 이런 색깔로,
지금 여러분과 상호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이 어떤 존재인지 여러분이 아는 거예요.
그리고 나도 이 존재를 알아차리는 자로서 규정됩니다.
상호 규정을 하는 거예요. 이게 '연기법'입니다.
너가 있어서 내가 있고 내가 있어서 너가 있다.
어떠세요? 이게 다예요.
'연기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철학이건 과학이건.
그런데 재미있는 건 뭐예요?
우리는 1인칭이라는 이 참나자리, 이 하느님 자리, 신의 자리,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정신의 극치 자리, 이것을 인정하고
여기에 이 세계에서 펼쳐지는 나툼으로
'지금 여기 나너 이렇게'를 보자는 겁니다.
그리고 이게 재미있는 게,
이게 '한 찰나'라는 겁니다. 폭을 가진 '한 찰나'.
지금 보세요. 지금 '한 찰나'였죠? 지나갔죠. 또 새 찰나.
여기서 바로 이 '지금'이라는 게 어때요?
바로 과거로 가버립니다.
또 지금이에요. 또 지금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된다는 거예요?
이런 게 끝도 없이 새로 새로 생겨난다는 거예요.
쭉 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끝없이.
여기라는 공간에서 끝없이.
위치가 또 옮겨 다닐 수 있겠지만 끝없이.
이 마음 안에서 찰나 찰나 진행되어 간다는 겁니다,
'여기'라는 위치를 가지고.
그럼 내 옆에 또 다른 애들이 있겠죠.
그럼 타자들이 나와요, 타자들이 등장하고.
나 외에 타자들이 등장해서, 이 타자들과 같이
계속 또 상호작용을 하면서, 상호작용을 하면서 가는 겁니다.
'나와 너'간에 또 '이렇게 저렇게' 상호작용을 해 가면서
이렇게 흘러가 버린 과거는 어떻게 되겠어요?
나의 이 참나 밖에 하나 더 설정한 무의식,
이게 무의식에 업보로 저장됐다가
다음에 또 펼쳐지는 거예요. 영향을 주고 받는 거예요.
이 과거에 있었던 게 그대로
무의식으로 '종자화'돼서 저장됐다가 다시 영향을 준다.
새로운 내가 펼쳐질 때,
새로운 내 마음이 펼쳐질 때 영향을 준다.
이 큰 뼈대만 그려본 겁니다. 찰나
찰나 이런 일이 계속~. 언제까지요? 영원히.
무한한 과거, 무한한 미래가 우리에게 놓여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한 찰나 한 찰나 가는데
한 찰나, 한 찰나가 깨어서 이 참나자리에 중심을 잡고
우리가 '지금 여기 나너 이렇게'를 올바르게 경영해야겠죠.
내 안에 참나 자리의 중심을 잘 잡고 가자.
무한하게 펼쳐지는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어떠세요? 끝없이 나아가야 돼요, 요 하나밖에 없지만.
재밌는 게, 우리 봉우 선생님은 이러셨어요.
이렇게 불변의 축이 있고, 불변의 우리 본성이 있으면,
시간이 계속 바뀌는 건요,
시간이 계속 바뀌니까, 찰나 찰나에 또 생기죠.
그때그때 계속 '중'을 잡아라, '중'을 잡아야 된다.
이게 중용 철학의 핵심이다.
이렇게 그때그때 계속 '중'을 잡는 것은 '시중(時中)'
그때그때의 '중'을 잡는 거, 유교의 '시중사상'이 이거다.
그래서 이 중심 자리, 변하지 않는 이 축이 불변의 축이고.
이거는 계속 변하는 축이죠,
시시각각, 찰나 찰나 찰나 변하죠.
이게 중용의 핵심이에요, 중용사상의.
이 가운데 축, 중심축이 '중'이고, 이게 그때그때 조화롭게
그때그때 상황에 순응해 가지고 조화를 이루자예요.
균형을 잡자. 이게 중용 철학이다.
이게 봉우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겁니다.
후설과 화이트헤드도 결국 똑같은 얘기를 해요.
그런데 후설, 화이트헤드의
그 지리한 이야기는 결국은 오류가 나요.
지리한데 따라가다 보면 결국 오류가 나요. 왜?
화이트헤드는요, 신을,
형이상학적 신을 정확하게 규정을 못해요.
신을 형이하학적으로 규정해버리려고 합니다, 화이트헤드는.
왜? 형이상학적으로 하면 플라톤 같아질까 봐.
고전철학 무서워가지고.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못 담그는 것처럼 고전 철학을 두려워해요.
'플라톤 철학의 각주다, 모든 철학은', 이런 소리 외쳐놓고도
고전철학으로 돌아갈까 봐, '나는 새로워야 된다'는.
'20세기의 과학시대를 맞아서
내 철학은 더 새로워야 된다, 고전철학보다'.
그게 아집입니다.
고전철학이 진리를 말해놨으면 진리를 따라가야지
뭘 새롭게 해요. 서양철학의 문제가요,
나만의 독창적인 새로운 철학을 하려고 그래요.
그러다 망하는 겁니다.
후설도요, 다 비슷한 답을 내놓고는요,
거기서 멈춰요, 고전철학 같아질까 봐.
그런데 고전철학 같아져야 진짜 철학인데..
이 얘기를 해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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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수: 소나무향, 자막: 선비
(241121 양덕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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