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음악에서 느껴지는 모든 에너지를 그나마 글로서 이해가 조금이나마 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차원적인 개념을 음악의 선율이라는 것을 매개체로서 우리 현실속으로 전달해주는 것... 제가 살고있는 이 시간의 흐름속에서 뛰어나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악기 소리에 대해 탐구하는 과정은 곧 제 내면을 탐구하는 과정과 같다 여기며 취미로 악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간혹 사회적으로 현실적으로 한계에 부딪히며 이게 뭐하는가 싶으면서도 오늘 한 연주자와 선생님의 작곡 의미에 대하여 이야기를 듣고 다시 일어서서 묵묵히 제가 가던 예술 방향데로 가고자 합니다😊
깊이 있는 댓글을 남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악기 연주를 연마하는 것이 내면을 탐구하는 과정과 같다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저 역시 작곡이든 연주든 모든 음악적 활동이 우리 내면의 본질과 연결되는 소중한 통로라고 생각합니다. 음악을 하며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히는 순간이 많지만, 그럴 때마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묵묵히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숙명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앞으로도 음악을 통해 뜻깊고 보람된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무척이나 깊이있고 심오한 사유의 세계를 보여주셨네요. 제가 아는 것이 많지 않아서 뭐라 말해야 좋을지 확신하지는 못하겠지만, 생각이 든 것에 대하여 일단 간단히 적어보려고 합니다. '비물질적 에너지를 청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파동, 즉 물질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작업'으로서의 작곡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고, 제일질료, 에테르, 이데아 등의 개념을 언급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 질료는 순수한 가능태로서 이것이 어떻게 변화하여 물질적인 것이 되는 것으로 보거나, 혹은 '형태 이전의 본질적 에너지'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물론 이를 다소 비유적이고 문학적인 맥락에서 이해하려 한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겠지만요.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제일 질료라는 개념은 무척 복잡한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서 저도 다 아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만, 가능태라는 것의 개념도 다의적인 면이 있고, 중세철학으로 넘어와서는 13세기의 보편적 질료-형상론에 관련된 복잡하고도 난해한 문제가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일 질료'와 '제이 질료'를 구분하는데, 제일 질료가 가능태라면, 제이 질료는 그것이 실체화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요. 그래서 오히려 선생님의 작업이 '제이 질료'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조금만 더 말하자면...제일질료가 순수한 가능태 같은 것인지, 혹은 사실상 어떤 요소들(stoicheia)에 불과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이는 제일 질료에 대한 이해를 많이 바꿔놓을 수 있는 논쟁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물병자리 복음서'에 대하여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른바 '뉴에이지 문헌' 등을 다룰 때 객관적 신뢰성과 관련한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지요. 사실 '에테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에서 지상의 4가지 원소들과는 다른 천체들을 구성하는 물질인 제5원소로서 제시한 것이죠. 이 용어는 그 이후로 세월을 거쳐오며 여러 다양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에테르가 빛의 매질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물질적인 용법으로부터, 신비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각종 esotericism의 용법, 그리고 에테르의 부존재를 주장하는 견해들까지 말이죠. 그리고 이런 논의와는 아주 다른 자연과학적인 맥락에서도 에너지와 물질 간의 관계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E=mc^2라는 공식은 에너지(E)와 물질(m)간의 등가성(Mass-Energy Equivalence)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너지는 비물질적이라고 보고, 이를 '물질화하는 작업으로서의 창작'에 대하여 해주신 말씀은 이러한 것에 비추어 보면 생각할 거리가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앎이 깊지 못해서 더 자세하고 구체적인 말씀을 드리긴 어렵네요. 부디 가볍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께서 남겨주신 세심하고 학문적 깊이가 담긴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 선생님의 고찰 덕분에 제 창작 과정에서 철학적·과학적 개념을 어떻게 차용하는지 다시 한번 명확히 설명해 드릴 기회를 얻게 된 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말씀해 주신 논점에 대해 아래와 같이 학문적·예술적 관점에서 제 견해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제일질료(prime matter)와 예술 창작에서의 가능성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질료(prima materia)를 ‘순수한 가능태(potency)’로 이해하신다는 선생님의 견해에 깊이 공감합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제일질료는 실체화되지 않은 가능성의 상태로, 모든 물질적 존재의 잠재적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이 개념이 창작에 적용될 때는, 순수한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서, 학문적 정의에 얽매이지 않는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술적 차원에서는 학문적 개념이 반드시 고유한 의미에 국한되지 않고, 그 상징성을 통해 새로운 창조적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제일질료가 실체 없는 가능태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예술적 창작의 시작점인 무형의 가능성과 긴밀히 맞닿아 있기에, 이를 ‘창작의 비물질적 가능성’으로 해석하는 데는 상징적 유효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제이질료(materia secunda)를 구체적 형상을 띤 물질적 실체라고 본다면, 예술 창작은 그러한 실체화된 형태가 아니라, 형태 이전의 유동적 상태로서 존재하는 가능성을 발현하는 과정이기에, 제이질료보다는 제일질료의 상징적 의미가 예술적 맥락에서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에테르 개념과 예술적 상징으로서의 정당성 에테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비롯된 철학적 개념, 이후의 물리학적 맥락, 현대 과학에서의 부정에 대해 말씀해 주신 점에 감사드립니다. 에테르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시작해 중세의 신비주의와 근대 과학의 매질 개념을 거쳐 현대에 이르러 부정된 바 있다는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 창작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역사적 변화와 무관하게, 에테르가 상징적으로 ‘비물질적 에너지’를 표현하는 유효한 개념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물병자리 시대의 복음서”에서의 에테르는 신비적 에너지의 상징으로 사용되며, 이는 예술적 상징의 범주에서 충분히 정당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술적 표현에서는 과학적 검증이나 신뢰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상징적 해석과 창조적 영감을 바탕으로 개념을 차용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에테르 개념은 그 역사적·신비적 상징성을 통해 비물질적 에너지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해 왔기에, 이를 예술적 창작에서 차용하는 것은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더불어, 예술 창작에서의 상징적 차용은 과학적·철학적 엄밀함과는 독립적으로, 개념의 본래 의미를 변용하여 창작에 활용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는 특정 사상이나 교리에 대한 종속이 아니라, 예술적 자율성을 토대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 요소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에테르의 개념을 문헌적 신뢰성 문제로 축소하여 평가하는 것은 예술적 차용의 의도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3. 과학적 원리(E=mc²)와 예술 창작에서의 상징적 변환 과학적 원리인 E=mc²을 언급하신 점 또한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해당 공식은 물리학에서 에너지와 질량 간의 관계를 정량적으로 설명하는 공식으로, 물리적 세계의 실체적 변환을 설명하는 데 유용한 수학적 원리입니다. 그러나 예술에서 말하는 ‘비물질적 에너지가 청각적 파동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물리적 실체의 변화가 아니라, 감각적 표현을 위한 상징적 전환에 가깝습니다. 예술에서의 에너지는 구체적·물리적 실체를 뜻하기보다는, 형태 이전의 비물질적 가능성이 감각적 표현으로 발현되는 과정을 상징하며, 이는 과학적 원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접근을 요합니다. 과학적 원리가 정량적 검증에 기반한 엄밀한 법칙으로서 기능하지만, 예술적 변환은 비물질적 에너지가 형태를 초월한 상징적 파동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통해 감각적 경험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과학적 원리와 예술적 변환을 같은 기준으로 비교하는 것은 예술 창작의 본질적 자유와 자율적 해석을 제한할 가능성이 있으며, 창작에서의 에너지 전환은 과학적 개념의 차용과는 별개로 이해될 수 있는 독립적 상징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론 정리하자면, 제 창작 과정에서 제일질료, 에테르, 이데아 등의 개념을 차용한 것은 각각의 개념을 존중하면서도 예술적 맥락에서 창작의 과정과 그 상징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것입니다. 과학적·철학적 개념을 예술에서 적용할 때, 개념의 본래 정의를 엄밀히 유지하기보다는, 그 개념이 상징적으로 가지는 폭넓은 의미와 새로운 해석 가능성을 존중하는 것이 창작의 자율성에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이 논의를 다루고 있는 관련 도서 한 권을 소개해 드립니다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76580 선생님의 깊이 있는 고찰 덕분에 이처럼 다양한 각도에서 상징적 차용의 정당성을 설명할 기회를 얻은 점에 감사드리며, 이러한 해석이 창작의 자유와 자율성을 바탕으로 독립적으로 존중받기를 희망합니다. 다시 한번 귀중한 의견 나누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composerpark 길고 상세하게 쓰신 답변에서 선생님의 깊은 사유와 친절하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창작의 과정과 그 상징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셨다'는 설명으로 제 의문이 해명된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혹자는 '해석은 본질/참뜻을 변경하지 못한다'고 다시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는 않네요. 선생님의 설명에 공감합니다. 선생님의 열정적이고도 깊은 창작의 길에 밝은 빛이 있길 기원하고요, 감사드립니다!^^
@@composerpark 참, 위의 댓글은 선생님께서 댓글을 수정하시기 전의 내용을 반영한 것이지만, 선생님의 견해와 용어들의 사용법에 공감하고 있다는 면에서 그리 수정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저도 이 논의를 통해 새롭게 관점을 취해보고, 공감을 할 수 있었어요. 예술가로서의 창작이라는 컨텍스트에서 생각해 보면 새로이 이 문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창작의 자유와 자율성이라는 관점에서 말이죠. 여기가 예술가의 고뇌와 열정이 아로새겨져 있는 공간이자 위대한 작품이 탄생하는 가능성의 영역일 것입니다.
네 맞습니다 :) 저의 입장에 대해 당연히 혹자는 ‘해석은 본질/참뜻을 변경하지 못한다’라고 반박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선생님께서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하셨지만, 매우 흥미로운 화두이기도 하고, 또 이 영상을 시청하실 다른 시청자분들을 위해 이에 대한 제 생각도 남겨봅니다 :) 1. 해석은 ‘본질’을 확장하거나 새롭게 조명할 수 있다 해석은 단순히 본질을 변경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그 본질을 다른 맥락에서 이해하고,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예술적 차용에서 해석은 개념을 있는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이 주는 감각적·상징적 의미를 확장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제일질료와 같은 철학적 개념이 예술에서 상징적으로 활용되면, 이 개념은 기존의 의미를 보존하면서도 예술적 감각과 창조성을 통해 새로운 층위를 얻게 됩니다. 2. ‘본질’이란 다면적이며 시대·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재해석된다 본질·참뜻이라는 개념 자체도 고정된 불변의 진리라기보다는, 다양한 해석을 통해 입체적으로 드러나는 특성이 있습니다. 철학적·과학적 개념의 본질 또한 시대와 맥락에 따라 새롭게 해석되고 이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질료 역시 철학과 과학의 발전에 따라 여러 해석이 겹쳐 왔습니다. 예술적 차용 역시 이처럼 고유한 ‘참뜻’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해석과 의미를 덧붙일 수 있습니다. 3. 해석을 통해 기존 개념이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된다 해석은 개념을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개념의 미묘한 측면을 조명하고 그 의미를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예술에서 철학적·과학적 개념을 차용하는 것은 이러한 개념이 제공하는 통찰을 재해석하고, 그 의미를 창의적 형태로 전환하는 작업입니다. 예술적 해석을 통해 본질은 더 풍부한 맥락을 제공하며, 이는 새로운 차원의 인식과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결론 해석은 본질을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의 다면성을 풍부하게 드러내고, 그 의미를 다양한 시각에서 재조명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술적 창작에서의 해석은 개념의 참뜻을 바꾸기보다는 그것을 확장하고,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하며,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더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항상 좋은 말씀을 해주시고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composerpark 선생님의 설명에 무척 공감합니다.^^ '상징'은 단순한 지시적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이루어내거나 창조하는 '힘'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해요. 해석은 원개념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상징은 개념에 고정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 자유 내지 자율성이 예술의 본질적 존재형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음악에서 느껴지는 모든 에너지를 그나마 글로서 이해가 조금이나마 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차원적인 개념을 음악의 선율이라는 것을 매개체로서 우리 현실속으로 전달해주는 것...
제가 살고있는 이 시간의 흐름속에서 뛰어나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악기 소리에 대해 탐구하는 과정은 곧 제 내면을 탐구하는 과정과 같다 여기며 취미로 악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간혹 사회적으로 현실적으로 한계에 부딪히며 이게 뭐하는가 싶으면서도 오늘 한 연주자와 선생님의 작곡 의미에 대하여 이야기를 듣고 다시 일어서서 묵묵히 제가 가던 예술 방향데로 가고자 합니다😊
깊이 있는 댓글을 남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악기 연주를 연마하는 것이 내면을 탐구하는 과정과 같다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저 역시 작곡이든 연주든 모든 음악적 활동이 우리 내면의 본질과 연결되는 소중한 통로라고 생각합니다. 음악을 하며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히는 순간이 많지만, 그럴 때마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묵묵히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숙명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앞으로도 음악을 통해 뜻깊고 보람된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무척이나 깊이있고 심오한 사유의 세계를 보여주셨네요. 제가 아는 것이 많지 않아서 뭐라 말해야 좋을지 확신하지는 못하겠지만, 생각이 든 것에 대하여 일단 간단히 적어보려고 합니다.
'비물질적 에너지를 청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파동, 즉 물질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작업'으로서의 작곡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고, 제일질료, 에테르, 이데아 등의 개념을 언급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 질료는 순수한 가능태로서 이것이 어떻게 변화하여 물질적인 것이 되는 것으로 보거나, 혹은 '형태 이전의 본질적 에너지'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물론 이를 다소 비유적이고 문학적인 맥락에서 이해하려 한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겠지만요.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제일 질료라는 개념은 무척 복잡한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서 저도 다 아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만, 가능태라는 것의 개념도 다의적인 면이 있고, 중세철학으로 넘어와서는 13세기의 보편적 질료-형상론에 관련된 복잡하고도 난해한 문제가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일 질료'와 '제이 질료'를 구분하는데, 제일 질료가 가능태라면, 제이 질료는 그것이 실체화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요. 그래서 오히려 선생님의 작업이 '제이 질료'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조금만 더 말하자면...제일질료가 순수한 가능태 같은 것인지, 혹은 사실상 어떤 요소들(stoicheia)에 불과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이는 제일 질료에 대한 이해를 많이 바꿔놓을 수 있는 논쟁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물병자리 복음서'에 대하여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른바 '뉴에이지 문헌' 등을 다룰 때 객관적 신뢰성과 관련한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지요. 사실 '에테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에서 지상의 4가지 원소들과는 다른 천체들을 구성하는 물질인 제5원소로서 제시한 것이죠. 이 용어는 그 이후로 세월을 거쳐오며 여러 다양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에테르가 빛의 매질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물질적인 용법으로부터, 신비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각종 esotericism의 용법, 그리고 에테르의 부존재를 주장하는 견해들까지 말이죠.
그리고 이런 논의와는 아주 다른 자연과학적인 맥락에서도 에너지와 물질 간의 관계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E=mc^2라는 공식은 에너지(E)와 물질(m)간의 등가성(Mass-Energy Equivalence)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너지는 비물질적이라고 보고, 이를 '물질화하는 작업으로서의 창작'에 대하여 해주신 말씀은 이러한 것에 비추어 보면 생각할 거리가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앎이 깊지 못해서 더 자세하고 구체적인 말씀을 드리긴 어렵네요. 부디 가볍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께서 남겨주신 세심하고 학문적 깊이가 담긴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 선생님의 고찰 덕분에 제 창작 과정에서 철학적·과학적 개념을 어떻게 차용하는지 다시 한번 명확히 설명해 드릴 기회를 얻게 된 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말씀해 주신 논점에 대해 아래와 같이 학문적·예술적 관점에서 제 견해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제일질료(prime matter)와 예술 창작에서의 가능성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질료(prima materia)를 ‘순수한 가능태(potency)’로 이해하신다는 선생님의 견해에 깊이 공감합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제일질료는 실체화되지 않은 가능성의 상태로, 모든 물질적 존재의 잠재적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이 개념이 창작에 적용될 때는, 순수한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서, 학문적 정의에 얽매이지 않는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술적 차원에서는 학문적 개념이 반드시 고유한 의미에 국한되지 않고, 그 상징성을 통해 새로운 창조적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제일질료가 실체 없는 가능태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예술적 창작의 시작점인 무형의 가능성과 긴밀히 맞닿아 있기에, 이를 ‘창작의 비물질적 가능성’으로 해석하는 데는 상징적 유효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제이질료(materia secunda)를 구체적 형상을 띤 물질적 실체라고 본다면, 예술 창작은 그러한 실체화된 형태가 아니라, 형태 이전의 유동적 상태로서 존재하는 가능성을 발현하는 과정이기에, 제이질료보다는 제일질료의 상징적 의미가 예술적 맥락에서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에테르 개념과 예술적 상징으로서의 정당성
에테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비롯된 철학적 개념, 이후의 물리학적 맥락, 현대 과학에서의 부정에 대해 말씀해 주신 점에 감사드립니다. 에테르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시작해 중세의 신비주의와 근대 과학의 매질 개념을 거쳐 현대에 이르러 부정된 바 있다는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 창작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역사적 변화와 무관하게, 에테르가 상징적으로 ‘비물질적 에너지’를 표현하는 유효한 개념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물병자리 시대의 복음서”에서의 에테르는 신비적 에너지의 상징으로 사용되며, 이는 예술적 상징의 범주에서 충분히 정당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술적 표현에서는 과학적 검증이나 신뢰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상징적 해석과 창조적 영감을 바탕으로 개념을 차용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에테르 개념은 그 역사적·신비적 상징성을 통해 비물질적 에너지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해 왔기에, 이를 예술적 창작에서 차용하는 것은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더불어, 예술 창작에서의 상징적 차용은 과학적·철학적 엄밀함과는 독립적으로, 개념의 본래 의미를 변용하여 창작에 활용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는 특정 사상이나 교리에 대한 종속이 아니라, 예술적 자율성을 토대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 요소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에테르의 개념을 문헌적 신뢰성 문제로 축소하여 평가하는 것은 예술적 차용의 의도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3. 과학적 원리(E=mc²)와 예술 창작에서의 상징적 변환
과학적 원리인 E=mc²을 언급하신 점 또한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해당 공식은 물리학에서 에너지와 질량 간의 관계를 정량적으로 설명하는 공식으로, 물리적 세계의 실체적 변환을 설명하는 데 유용한 수학적 원리입니다. 그러나 예술에서 말하는 ‘비물질적 에너지가 청각적 파동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물리적 실체의 변화가 아니라, 감각적 표현을 위한 상징적 전환에 가깝습니다.
예술에서의 에너지는 구체적·물리적 실체를 뜻하기보다는, 형태 이전의 비물질적 가능성이 감각적 표현으로 발현되는 과정을 상징하며, 이는 과학적 원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접근을 요합니다. 과학적 원리가 정량적 검증에 기반한 엄밀한 법칙으로서 기능하지만, 예술적 변환은 비물질적 에너지가 형태를 초월한 상징적 파동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통해 감각적 경험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과학적 원리와 예술적 변환을 같은 기준으로 비교하는 것은 예술 창작의 본질적 자유와 자율적 해석을 제한할 가능성이 있으며, 창작에서의 에너지 전환은 과학적 개념의 차용과는 별개로 이해될 수 있는 독립적 상징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론
정리하자면, 제 창작 과정에서 제일질료, 에테르, 이데아 등의 개념을 차용한 것은 각각의 개념을 존중하면서도 예술적 맥락에서 창작의 과정과 그 상징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것입니다. 과학적·철학적 개념을 예술에서 적용할 때, 개념의 본래 정의를 엄밀히 유지하기보다는, 그 개념이 상징적으로 가지는 폭넓은 의미와 새로운 해석 가능성을 존중하는 것이 창작의 자율성에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이 논의를 다루고 있는 관련 도서 한 권을 소개해 드립니다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76580
선생님의 깊이 있는 고찰 덕분에 이처럼 다양한 각도에서 상징적 차용의 정당성을 설명할 기회를 얻은 점에 감사드리며, 이러한 해석이 창작의 자유와 자율성을 바탕으로 독립적으로 존중받기를 희망합니다. 다시 한번 귀중한 의견 나누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composerpark 길고 상세하게 쓰신 답변에서 선생님의 깊은 사유와 친절하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창작의 과정과 그 상징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셨다'는 설명으로 제 의문이 해명된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혹자는 '해석은 본질/참뜻을 변경하지 못한다'고 다시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는 않네요. 선생님의 설명에 공감합니다. 선생님의 열정적이고도 깊은 창작의 길에 밝은 빛이 있길 기원하고요, 감사드립니다!^^
@@composerpark 참, 위의 댓글은 선생님께서 댓글을 수정하시기 전의 내용을 반영한 것이지만, 선생님의 견해와 용어들의 사용법에 공감하고 있다는 면에서 그리 수정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저도 이 논의를 통해 새롭게 관점을 취해보고, 공감을 할 수 있었어요. 예술가로서의 창작이라는 컨텍스트에서 생각해 보면 새로이 이 문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창작의 자유와 자율성이라는 관점에서 말이죠. 여기가 예술가의 고뇌와 열정이 아로새겨져 있는 공간이자 위대한 작품이 탄생하는 가능성의 영역일 것입니다.
네 맞습니다 :) 저의 입장에 대해 당연히 혹자는 ‘해석은 본질/참뜻을 변경하지 못한다’라고 반박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선생님께서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하셨지만, 매우 흥미로운 화두이기도 하고, 또 이 영상을 시청하실 다른 시청자분들을 위해 이에 대한 제 생각도 남겨봅니다 :)
1. 해석은 ‘본질’을 확장하거나 새롭게 조명할 수 있다
해석은 단순히 본질을 변경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그 본질을 다른 맥락에서 이해하고,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예술적 차용에서 해석은 개념을 있는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이 주는 감각적·상징적 의미를 확장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제일질료와 같은 철학적 개념이 예술에서 상징적으로 활용되면, 이 개념은 기존의 의미를 보존하면서도 예술적 감각과 창조성을 통해 새로운 층위를 얻게 됩니다.
2. ‘본질’이란 다면적이며 시대·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재해석된다
본질·참뜻이라는 개념 자체도 고정된 불변의 진리라기보다는, 다양한 해석을 통해 입체적으로 드러나는 특성이 있습니다. 철학적·과학적 개념의 본질 또한 시대와 맥락에 따라 새롭게 해석되고 이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질료 역시 철학과 과학의 발전에 따라 여러 해석이 겹쳐 왔습니다. 예술적 차용 역시 이처럼 고유한 ‘참뜻’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해석과 의미를 덧붙일 수 있습니다.
3. 해석을 통해 기존 개념이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된다
해석은 개념을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개념의 미묘한 측면을 조명하고 그 의미를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예술에서 철학적·과학적 개념을 차용하는 것은 이러한 개념이 제공하는 통찰을 재해석하고, 그 의미를 창의적 형태로 전환하는 작업입니다. 예술적 해석을 통해 본질은 더 풍부한 맥락을 제공하며, 이는 새로운 차원의 인식과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결론
해석은 본질을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의 다면성을 풍부하게 드러내고, 그 의미를 다양한 시각에서 재조명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술적 창작에서의 해석은 개념의 참뜻을 바꾸기보다는 그것을 확장하고,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하며,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더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항상 좋은 말씀을 해주시고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composerpark 선생님의 설명에 무척 공감합니다.^^ '상징'은 단순한 지시적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이루어내거나 창조하는 '힘'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해요. 해석은 원개념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상징은 개념에 고정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 자유 내지 자율성이 예술의 본질적 존재형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