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북경에서 건국했다는 증거 조선왕조실록 명실록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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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1 окт 2024
  • • 고려개경이 자금성 위치라는 증거 고려왕궁...
    • 고려는 송나라와 금나라 중간에 있다 는 ...
    • 조선영토 동서 이천리 남북 사천리 대한제...
    고려 개경이 북경이고 조선이 고려개경 북경에서 건국했다는 증거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고려사 안주·압록·용천·대동 등 요충지에 파절관과 참부를 두다
    공양왕(恭讓王) 3년(1391) 정월 안주(安州)·압록(鴨綠)·용천(龍泉)·대동(大同)의 여러 요해처에 파절관(把截官)과 참부(站夫)를 설치하였다. 에서 유튜브로 기 밝힌 바와 같이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때도 고려 개경은 북경에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조선의 건국은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7월 17일 병신 1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태조가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다 에서 태조 이성계는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고 명나라에 국호를 받아오는 과정을 보면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1월 29일 병오 1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국호를 화령과 조선으로 정하여 황제의 재가를 청하는 주문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한상질(韓尙質)을 보내어 중국 남경에 가서 조선(朝鮮)과 화령(和寧)으로써 국호(國號)를 고치기를 청하게 하였다.에서 1392년 11월 29일 명나라에 국호를 받으러 갑니다,
    명실록 태조고황제 223권 도약 홍무 25년 12월 9일 1번째 기사 /
    이유 고려권은 국정을 알고 이성계가 국호 를 바꾸고 싶어 사신을 보냈는데..
    고려권 이유는 국명을 바꾸고 싶어 사신을 보내 명을 구했는데 , 동이의 이름은 우리나라 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었다 .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는 게 낫겠다
    에서 10일후 1392년 12월9일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국호를 받습니다,
    1392년 11월 29일 개경에서 출발하여 12월 9일 중국 양자강 남경에 도착 10일만에 남경에 도착합니다 한반도 개경에 중국난징에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고려개경이 북경임을 알수 있습니다,
    조선은 북경에서 건국하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고려개경이 자금성 위치라는 증거와 고려는 송나라와 금나라 중간에 있다 더보기에 올려 놓았습니다, 다른의견 있으시면 관련동영상 20개 이상 만들어 놓았습니다,
    원본 보기
    太祖高皇帝實錄 卷二百二十三 洪武二十五年 閏十二月 九日 1번째기사 1392년
    ○乙酉高麗權知國事李成桂欲更其國號遣使來請命 上曰東夷之號惟朝鮮之稱最美且其來遠矣宜更其國號曰朝鮮태조 고(大祖) 동계는 만주쌍성 고려국경 서북계 자동적으로 대륙고려
    쌍성총관부를 옮겨으면 동녕부 서경도 방향에 맞게 같이 이동해야 정상
    군역과 요역 및 국방의 지역별 분담체계를 규정한 공민왕 5년의 개혁교서
    고려사 원문이미지
    일자
    1356년 06월 미상 (음)
    공민왕(恭愍王) 5년(1356) 6월 교(敎)하기를,
    “각지에서 별초(別抄)를 추가로 정하면서 노약자나 단정(單丁)을 막론하고 강제로 멀리 가서 수자리 서게 하니, 오가는 데 지쳐서 잇달아 도망을 간다. 〈그래서〉 연해의 군민(軍民)은 모두 방수(防戍)에 충당하여 요역을 면제해주고, 먼 지역의 민(民)은 그 역(役)을 대신 부담하여 수자리하러 가지 않게 하면 양쪽이 모두 편안해질 것이다. 또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습속이 그러한 것이니 마땅히 동계(東界)와 교주도(交州道)의 군사는 쌍성(雙城)을 지키게 하고, 북계(北界)와 서해도(西海道)는 압록강을 지키게 하며, 양광도(楊廣道)·전라도(全羅道)·경상도(慶尙道)는 왜(倭)를 방어하는 것을 맡기되 재주와 용맹함이 있는 자는 어느 곳에서나 선발하여 쓰게 하라.”
    라고 하였다.

Комментарии • 24

  • @등천월
    @등천월 Час назад +5

    조선도 북경에서 건국했구나.. 어찌 이런 사실을 감쪽같이 감췄나.

  • @three.empires
    @three.empires 2 часа назад +7

    개경에서 남경을 가는데 10일이 걸렸다! 당시 교통수단으로 10일만에 가려면, 북경이 고려의 수도가 되어야 설명이 가능하네요. 대제국 고려의 대륙영토가 조선초에도 유지됐음을 알 수 있네요. 좋은 동영상 감사합니다.

  • @user-konglish
    @user-konglish Час назад +2

    으쌰 ~~~~~~~~~~~~~~~~~

  • @어쩔꼰대-s2c
    @어쩔꼰대-s2c 13 минут назад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 @happyhan608
    @happyhan608 2 часа назад +3

    😊👍

  • @SeungHyeopLee
    @SeungHyeopLee Час назад +3

    이제 남은건 언제 지금의 서울로 천도했는지만 찾으면 되겠네요.

  • @윤현월-x9s
    @윤현월-x9s Час назад +4

    선생 최소한 고려 개경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알려면 1360년 이전의 고려사의 기록만을 인용을 해야 할 것입니다. 어설프게 명나라 기록이나 중국사에 기록된 기록을 인용하거나 시점을 달리하면 역사 촛점이 흐려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최소한 이성계가 등장하는 시점부터는 고려의 영토가 줄어드는 과정에서 기록한 것이고, 그 시기의 영토에 관한 기록을 고려사 전체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경계해야만 할 것입니다. 일찌기 고려는 현재 한반도 개성까지 새로운 궁궐을 지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기록이 곡주라는 기록과 연결되어 있으니 곡주를 찾으시면 현재 한반도에 있는 개경을 언제부터 터를 잡고 지었는지가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 고려사에 나와 있는 곡주가 현재 한반도의 개성일대를 말하는 겁니다.

    • @On_horiz
      @On_horiz Час назад

      그게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 일본학자 주장이지요

    • @On_horiz
      @On_horiz Час назад

      고려사 기록부터 고려말 개경 북쪽에 원나라 남쪽에 홍건적이라 되어있으며 송사에 송나라 수도가 압록과 마주보고 있다고 했는데요 ㅋㅋ

  • @곰발바닥-h6u
    @곰발바닥-h6u Час назад +3

    북평(大都)의 도착
    (대명여지도 초기본,초중본,중초본)
    上都의 도착 (중초본) 북송 북편이 고려의 북방에 도착 (몽고가 지나치게 비대해지고 부풀어남.)
    출하점전투~ 현재의 내외몽골에 도착
    (대명여지도 중기본)

  • @곰발바닥-h6u
    @곰발바닥-h6u Час назад +2

    빈주,등주,래주가
    산동에 도착 (대명여지도 초중본).
    낙수와 낙양이 하남에 도착 명나라 초기 20년이 고려의 중부에 도착 (명나라가 대성 한만큼, 원나라(몽고)의 과거가 비대해짐)
    (대명여지도 중중기본,중중초본)
    황하가 大河에 도착 (중초본)

  • @윤현월-x9s
    @윤현월-x9s 13 минут назад

    제가 요즘 천하고금대총편람도라는 지도를 연구하다 깜짝 놀란 사실도 하나 알아냈는데, 명나라가 동이족과 한족의 역사 속에 나오는 항우의 역사를 지우기 위해 항우의 근거지나 고향으로 추정되는 역산을 실제로 뽑아버렸다는 증거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자는 다르지만 우리식으로 하면 그 역발산기개세에서 나오는 역산은 실제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유방이 한족들의 영웅이고, 동이족들의 영웅이 항우입니다. 그 항우가 태어났을 가능성이 많은 역산을 명나라는 황하의 수계가 바뀌자 실제로 자그마한 야산이였던 역산을 밀어 황하의 저지대를 메꾸는데 사용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당시 황하는 그 역산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그래놓고 그 지명도 태산 옆으로 다시 옮겨놨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개성위에 있어야 할 자그마한 야산이였던 송악이나 북악 같은 산들도 그 때 당시에 역산과 함께 없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요즘은 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저들은 악락한 짓을 하면서까지 중원에서 고려와 고구려 백제 신라와 그 이전 동이족들의 영웅이기도 했던 항우의 역사까지 모두 없애버리고자 노력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는 황산에 있어야만 될 광개토대왕의 비문까지 압록강 입구까지 옮겨놨을 가능성도 많습니다. 응...니들의 역사는 여기까지니까 선 넘지마. 이럴 생각으로 그러한 역사조작이 이루어졌을 가능성까지 있습니다.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요

  • @천군만마
    @천군만마 Час назад +2

    (수창궁)壽昌宮이 베이징 에 수강궁(寿康宫)인지는 의문이네요...
    이름을 고쳤는지......모르겠음

    • @hanhan4980
      @hanhan4980  Час назад

      수녕궁(壽寧宮) 한자 복사해서 구글에서 검색하면 자금성이 나와요
      자금성에 꺼꾸로 영수궁이 있어요
      건축시기도 자금성과 22년 정도 차이 명이 남경에서 북경천도 1406년 수창궁 수녕궁 - 건축년도 1384년 = 22년
      왕이 대비와 함께 수녕궁으로 옮기다 고려사 원문이미지
      열전 권제50
      날짜 | 1388년 07월 미상
      창왕이 대비(大妃) 이씨(李氏)를 받들고 수녕궁(壽寧宮)으로 옮겼는데, 〈이곳은〉 곧 수창궁(壽昌宮)이니, 〈창왕의〉 이름을 피해 고친 것이다.
      1384년 최영은 일찍이 이성림(李成林)·이자송(李子松)·염흥방 등과 함께 조성도감판사(造成都監判事)가 되어
      수창궁(壽昌宮)을 지었다. 궁궐이 완성되어 최영 등이 하례하자 신우가 환관 이광(李匡)을 시켜 말하기를, “큰 궁궐을 5년이나 걸려 완성하였으니 무엇으로 경들에게 보답하겠는가 에서 한양 조선 궁궐 건축 20년전에 자금성에 궁궐을 5년이나 걸려 건축하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영수궁이 동북쪽에 있어요 기이한 돌도 많고
      동북쪽 모퉁이에 전각[閣]을 하나 짓고 충허각(沖虛閣)이라 편액하였는데, 단청[金碧]이 선명하고 화려한 장식이 비할 데 없이 아름다웠다. 또 내전[內閤] 별실(別室)에 좋은 약을 비치해 두었는데 여러 병을 널리 치료하고자 하는 뜻에서 ‘선구보(善救寶)’라고 편액하였다. 또 그 옆에 정자를 짓고 기이한 돌과 이름난 꽃을 모아두고 ‘양성(養性)’이라고 편액하였다.
      에서 현재 자금성 어화원에 정자도 있고 기이한 돌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 @User-gjursfjo567bj
    @User-gjursfjo567bj Час назад +1

    한반도 평양이나 개성에서 난징으로 배타고 서해건너서 못가나요?

    • @jangmi486
      @jangmi486 56 минут назад

      지금은 걍가고도 남죠 근데 무동력선으로 바다를 건넌다고요?그때당시 배는 물길따라 즉 해안선타고 돌아가거나 눈앞에보이는 섬따라서 이동하죠 생각해보시길 10일안에 절대 못갑니다

  • @김재현-z6r2e
    @김재현-z6r2e Час назад +1

    이성계는 주원장메게 쫄았나.?

    • @jangmi486
      @jangmi486 53 минуты назад +2

      쫄았죠 그당시 고리말 가장두려워하는 몽골을 쳐부순곳이 명나라인데 절대강자를 눌러버린곳이니 주눅들수밖에 없었겠죠 스스로 하대하는게 이씨와 그무리들은 살아남기위해 택한방법이 이리도 긴 시간 한반도 구석탱으로 보내는 역사상가장 잘못된 착오로 남는 동이역사상 가장치욕적인 거죠

  • @KiKi-zo9fc
    @KiKi-zo9fc Час назад

    난징이 중국대륙 동쪽 끝에 있으니 배타고 서해바다 건너면 10일이면 뒤집어 씁니다.

    • @On_horiz
      @On_horiz Час назад

      해류 때문에 난징에서 서해바다 건너는건 빠르지만 반대로 오는건 느림

  • @윤현월-x9s
    @윤현월-x9s 34 минуты назад

    선생 고려 황성은 서경이나 개경이나 남경이나 한반도에 지은 개경이나 궁이름은 똑같은게 너무 많습니다. 궁이름으로 저곳이 서경인지 개경인지 남경인지 한반도 개성인지를 착각하시고 인용을 하거나 이해를 하고 넘어가고 대충 보면서 확정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제가 왜 이전 글에서 명나라나 중국의 다른 사서를 인용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냐면 저 대명일통지부터 시작해서 중국의 모든 역사왜곡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청나라의 지도나 역사서를 인용해서는 절대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명나라가 왜곡한 역사 위에 또 자신들의 역사를 덮어 써버렸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의 학자들이 고려의 비밀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이유는 중국의 명나라나 청나라 혹은 원사를 인용하다가 깊은 늪에 빠져 버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급적 고려사만의 내용 안에서 개경의 위치를 찾는게 좋고 대충의 위치를 찾거나 참고할 것이 있을 때는 대명일통지 같은게 유효할 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