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다방이 참 좋은게 전쟁만 집중하는게 아니고 당대의 역사적 경제적 사회적 배경도 분석해주기 때문인데, 오늘 영상보니 애틀란타 전투가 승전보를 가져오지 못했다면 링컨이 재선 못됐을 수도 있거나 되어도 간신히 이겨 수정헌법 개헌을 하지 못했을거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셔먼이 좀 심각한 충격요법을 사용 해서 미움을 받기도 했지만 링컨 그랜트와 더불어 노예해방삼걸에 들어갈 위인인거 같아요.
남북전쟁 때 링컨대통령이 밤마다 악몽을 꾸며 괴로워했다고 하는데 그 심정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전쟁이 잘 안 풀리고, 패전하고 길어지니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괴로웠을까? 전쟁 막판에 그랜트와 셔먼이 승리를 안겨다 주었을 때 마치 오랜 가뭄에 단비가 내린 것처럼, 어두컴컴한 동굴을 벗어나려고 헤메다 한줄기 햇빛을 본 것처럼 반갑고 감동이었으리라 ⭐🤗🤗~🌠💎💎❤❤❤
오늘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링컨"이 소개 되었군요, 그리고 셔먼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비교적 최근 영화인 "해방"(윌스미스 주연)과 "프리스테이트 존스"(매튜 매커너히 주연)도 소개할 기회가 왔으면 저는 정말 더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노르망디, 미군의 코브라 돌파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ruclips.net/video/p-9w2J5s0xU/видео.html 코브라 돌파 직전 까지, 독일 기갑부대 약 80% 및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는 까앵에서 영국군과 교전. 그 빈 틈으로 미군의 돌파. 까앵 최종 함락 단일 작전에서 영국군은 약 500대의 전차 손실. 당시 영국군 총 전차의 약 35%를 단일 작전에서 손실. 까앵 함락 때 독일군 전차 약 600대 및 독일의 거의 모든 판터 및 타이거 전차가 영국군에 붙들려 고착 분쇄되어 나감. 당시 미군 전면에 배치된 독일 전차는 약 150대, 판터나 타이거는 거의 없었고. 노르망디 전역 종결 때 까지 교전국들의 최종 전차 손실. 영국 약 1200대. 독일 보병을 주로 상대했던 미국 역시 약 1200대 손실. 독일은 약 1300대. 당시 미 지상군이 독일 주력을 담당했던 영국과 거의 동일한 전차 손실을 당했다는 것은 미군이 신병 수준이었기에. 독일이 당한 전차 손실은 전차 대 전차 전투 보다는 공중공격 및 함포사격 등 피해나 전차전 때 궤도 손상 후 후퇴할 때 유기 자폭 많음. 즉 전차 대 전차 전투에서 영국과 미국이 독일 전차와 겨루기는 힘들 정도의 압도적 성능 차이. 패튼의 미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던 것 아님. 영국군은 노르망디 전역 독일 주력 기갑부대를 몸빵으로 처절하게 공격하며 독일군을 제거한 것. 미국과 영국은 불행히도 45년 초가 되어서야 타이거와 대등하게 전투할만한 신형 전차를 전선에 투입. 하지만 너무 늦게 투입되어 교전할만한 독일 전차 기갑부대 자체가 소멸해 별 전과 없음. ------------------------------------------------------------------------------------------------ 노르망디 전역 미군의 코브라 돌파에 대한 다큐 링크를 걸면 유튭에서 글이 삭제되곤 해서 간단 소개합니다. 노인이 된 브래들리 장군의 인터뷰 및 코브라 돌파 상세한 과정을 다룬 다큐인데, 그 유튭 영상엔 수 많은 영미권의 댓글들로 넘쳐났습니다. -------------------> 패튼이 코브라 돌파한 것 아닌 것에 놀라고, 패튼이 노르망디 상륙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 놀라고, 그 영상 제목이 영어로 패튼의 코브라 돌파라는 어구도 포함되었는데 내용적으로 패튼은 나오지 않고 브래들리만 나왔기에 영상 제목을 바꿔야한다는 댓글들도 있더군요. 패튼대전차군단 할리웃 영화 영향력 때문인지 미국 일반인들도 패튼이 코브라 돌파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 흔히 패튼이 지휘한 미3군이 코브라 돌파 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패튼이 아닌 브래들리 휘하 미1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냈고 패튼은 그 이후에, 재편성된 신규 미3군의 지휘관으로 투입된 겁니다. 브레들리의 코브라 돌파는 44년 7월 말 이루어진. 노르망디 상륙 당일만이 아니라 상륙 후 1달이 넘어서 까지 패튼은 영국 본토에서 대기. 코브라 돌파를 해낸 미1군 지휘관, 오마 브래들리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해 직접 서술한 내용. 맨 앞 첫 구절만 우리 말로 옮기면 ---------------------------------> (영국군은 독일군을 갈아버리기 위해 깡의 독일 기갑부대로 진입했다, 미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낼 수 있도록.)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압도적 전차 성능 차이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동안 영국군도 갈려나갔습니다. 소개된 뒷 부분을 옮기면 (... ...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격 속도와 전진한 거리로 그 전투의 성공을 평가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즉 영국군의 돌파라는 자부심을 계산하지 않고 몽고메리는 최종 작전 계획에 서명했다... ... 영국군은 인내와 자제력으로 그들에게 부여된 수동적 역활을 견뎌냈다.) -------------------------> 많은 이들은 인용한 원문 마지막 부분 주장과 같이, 군이 적진을 돌파하는 진격 속도와 전진 거리로만 성공과 능력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적 주력을 견제-고착- 섬멸 등을 해야, 그런 돌파가 가능한. 40년 프랑스를 항복시킨 전격전은 적 주력을 견제만 하는 뒤통수 때리는 돌파, 하지만 44년엔 견제만으로는 돌파가 불가능했던. 40년엔 장난감 수준의 전차로도 전격전이 가능했지만, 전쟁 말에는 그 어떤 중무장 전차도 쉽게 뚫을 수 없이 변해버린, 게다가 전차 성능에선 독일의 압도적 우세 상황에서, 누군가는 자신이 갈려나가면서 적 주력을 고착-분쇄시켜야만 했던. --------------------------> 노르망디 전역, 당시 미군은 독일군 주력을 상대할 역량이 없었기에, 영국군이 갈려나가면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별로 폼나지 않는 수동적 역활을 담당했고, 그로 인해 발생한 미군 지역의 독일군 방어력 약화를 이용해 미군이 돌파하도록 상륙 전에 이미 작전 계획을 세웠던 것. ----------------> 오마 브래들리가 얼마나 겸손하고 사려 깊은 지휘관인지 패튼의 알려진 언행과 비교해보길. 만일 패튼이 코브라 돌파를 지휘했고 성공시켰다면, 오마 브래들리와 같이 서술하기는 힘들었을 것. 모든 것이 위대한 미국과 탁월한 자신의 능력으로 독일군을 분쇄한 것이라고 했을 가능성 큰. 그렇다면 패튼은 왜 이렇게 과대 평가되고 널리 알려졌겠습니까? ----------------> 극한의 할리웃 영향력? 또한 벌지 전투는 미국 역사상 가장 결정적 지상전 승리이기에 패튼을 미국의 영웅으로 부각시킬 필요성도 있었을 것. (콰이강의 다리)-(패튼 대전차군단) 두 영화는 모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지만, 영화 내용과 성격은 완전히 상반되죠. 성조기 나부끼고 번쩍이는 별 박힌 철모에 상아 손잡이 권총의 지휘관이 2차대전 독일군 괴멸시킨 것으로 선전하는 영화가 과연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을만한 수준인지 지극 의심스럽지만 받았답니다. 어릴 때는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역사를 좀 알게 된 이후에 그 영화 다시 보니 참... 자잘한 것 하나 더 추가한다면, 강릉에 잠수정 침투했을 때, 소탕전 나선 우리 군 일부 번쩍이는 계급장 때문에 저격당해 전사. (오마 브래들리 서술 관련 펌.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While Collins was hoisting his VII Corps flag over Cherbourg, Montgomery was spending his reputation in a bitter siege against the old university city of Caen. For three weeks he had rammed his troops against those panzer divisions he had deliberately drawn towards that city as part of our Allied strategy of diversion in the Normandy Campaign. Although Caen contained an important road junction that Montgomery would eventually need, for the moment the capture of that city was only incidental to his mission. For Monty’s primary task was to attract German troops to the British front that we might more easily secure Cherbourg and get into position for the breakout. In this diversionary mission Monty was more than successful, for the harder he hammered towards Caen, the more German troops he drew into that sector. Too many correspondents, however, had overrated the importance of Caen itself, and when Monty failed to take it, they blamed him for the delay. But had we attempted to exonerate Montgomery by explaining how successfully he had hoodwinked the German by diverting him toward Caen from the Cotentin, we would have also given our strategy away. We desperately wanted the German to believe this attack on Caen was the main Allied effort. But while this diversion of Monty’s was brilliantly achieved, he never the less left himself open to criticism by overemphasizing the importance of his thrust toward Caen. Had he limited himself simply to the containment without making Caen a symbol of it, he would have been credited with success instead of being charged, as he was, with failure at Caen. For Monty’s success should have been measured in the panzer divisions the enemy rushed against him whilst Collins sped on toward Cherbourg. Instead, the Allied newspaper readers clammered for a place name called Caen which Monty had once promised but failed to win for them. The containment mission that had been assigned Monty in the Overlord plan was not calculated to burnish British pride in the accomplishments of their troops. For in the minds of most people, success in battle is measured in the rate and length of advance. They found it difficult to realise that the more successful Monty was in stirring up German resistance, the less likely he was to advance. For another four weeks it fell to the British to pin down superior enemy forces in that sector while we maneuvered into position for the US breakout. With the Allied world crying for blitzkrieg the first week after we landed, the British endured their passive role with patience and forbearing.)
깨진다면 롬멜 신화 아닌, 패튼의 코브라 돌파 신화가 더 쉽게 깨집니다. ruclips.net/video/34oR2D1GVU4/видео.html : BREAKOUT from NORMANDY: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패튼은 북아프리카에서 별다른 전과 없었고, 노르망디 코브라 돌파 순간에도 전투 지휘하진 못했고. 첨부한 동영상에 달린 댓글에 그런 점에 충격받은 이들의 대화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코브라 돌파 시점 까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상세한 소개 영상인데, 제목은 패튼의 코브라 돌파지만 내용적으로 패튼은 거의 언급도 되지 않고, 패튼 아닌 브래들리 내용이 거의 다라, 혼란스러워하는 댓글들이죠. 44년 7.25일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작전 개시 44년 7.28일~7.31일, 독일군 방어선 붕괴 시작되고. 7.31일, 브래들리 미1군 보카쥬 벗어나 프랑스 내륙으로 돌입.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돌파 이후 신규 편성된 미3군을 패튼이 지휘 시작. 즉 패튼은 코브라 돌파와 아무런 상관 없는. 브래들리 미1군의 코브라 돌파, 영국군이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80% 및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 몸빵하며 고착 분쇄 공세를 펼칠 때 독일의 모든 예비 전력이 영국군 지역으로 투입되어 미군 담당 지역 독일 방어력이 매우 취약해져. 패튼은 할리웃 선전 최대 수혜자 성격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미 기갑부대의 사실상 첫 데뷰전인 캐서린 협곡 전투에서 미군 거의 전멸당하자, 새로운 지휘관으로 패튼이 교체 투입 시점 43년 2월경. 43년 5월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까지 별다른 전과 없는. 시칠리에서도 미군은 별다른 전투 없이 팔레르모 입성, 거의 지프 타고 손들면서 팔레르모 입성.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에서 격결한 전투하며 전진한 영국군과 달리. 공황장애로 의무대 있던 몸 멀쩡한 사병 뺨싸대기 날린 것 언론보도로 사과 및 문책되어 일선 지휘에서 배제. 3군 부임 전까지 노르망디 상륙일만 아니라 그 후 약 1달 후까지도 노르망디에 없었죠. 영국에서 가상 페이퍼 부대 지휘관으로 대기. 코브라 돌파되는 시점까지도 전투 지휘를 하지 못하고 재편성되는 되는 3군의 지휘관으로 돌파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패튼이 실질적으로 능력을 보인 것은 벌지 전투가 처음입니다. 하지만 할리웃 영화 패튼대전차군단, 패튼이 북아프리카, 시칠리, 노르망디 다 한 것 같은 착각 들 정도. 패튼은 사실 롬멜과 단 1번의 교전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할리웃 효과로 패튼이 롬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된. 롬멜은 패튼과는 다릅니다. 적당히 다른 것이 아니라 너무나. 롬멜은 패튼과 같은 여러 실체 없는 승리의 주인공 아닌. 국가 차원 지원에서도 압도적으로 불리했고. 제대로 지원해주지도 못했고, 지원할 능력도 안되었던 독일 최고 지휘부와 독소전 투입 일부 장성들은 롬멜이 독일의 대전략에 혼선을 가져와 전쟁 수행을 어렵게 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롬멜 신화 깨부수기의 시발점임도 인정해야만 할 것. 롬멜 신화는 적인 영국군 장병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롬멜 신화 깨부수기는 롬멜의 조국 독일에서 싹이 텄습니다. 롬멜은 2차대전 파탄난 독일의 대전략 수립할 위치에 없없고, 야전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패했던 것. 부족한 보급을 기다린다고 온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적극적 공세로 토부룩 함락해 대량의 물자 탈취해 엘알라메인 까지 진격. 엘알라메인을 뚫고 수에즈까지 진격해 수에즈 이집트에 집적된 대규모 물자까지 확보하려 했던 것은 전략적 오판 아닌 주어진 결핍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 그런 롬멜에게 전략적 식견 부족 운운은 것 지나친. 독일 국가 차원의 전략적 파탄을 야전지휘관에게 묻는 것은 책임 전가이며 비합리적인 태도. 코브라 돌파 영상 관련 댓글 일부 펌. ( John Emerson 3개월 전 Interesting. General Patton was never mentioned in this video. 22 Carl Welty Carl Welty 2개월 전 Good point - 2 Todd Is god Todd Is god 2개월 전 Because his command of the 3rd army had to wait until they were activated, which was immediately after Cobra 6 John Emerson John Emerson 2개월 전 @Todd Is god Yeah,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and he isn't even there yet. Mis-titled I guess. 7 Jc Wheeler Jc Wheeler 1개월 전 @John Emerson 997ot Ronnie Bishop Ronnie Bishop 21시간 전 He wasn’t involved with this operation it was Bradley all the way. Patton was in England. )
Secret 1944 Mission to Assassinate Germany's Panzer Leaders :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 지휘부 제거 공습 ruclips.net/video/c844En8XvC4/видео.html 미군이 롬멜 공습해 전선 이탈시키지 않았습니다. 미군이 핀포인트 공습으로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군 최고 지휘부 제거한 적 없습니다. 미국이 가지지 못한 영국의 정보능력, 브레칠리 파크의 에니그마 암호 해독으로 얻은 정보 울트라. 울트라 정보로 독일의 역습인 모르탱 반격과 독일 기갑부대 최고 지휘부의 위치 모두 알아냈습니다. 영국 제2전술 공군의 전술기들이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 기갑부대 지휘부를 어떻게 제거했는지 보기를. 동영상 4분50초 이후 참조 (영어 자막만 제공됨) 1944년 6월6일, 노르망디 상륙. 6월8일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 위치를 파악하고, 6월10일 영국 제2전술공군은 호커 타이푼 42대, B-25 72대, 호위 스핏파이어 4개 편대 동원해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를 급습했습니다. 다수 지휘관 참모들이 사망하고, 지휘 통신차량등이 파손되어, 노르망디 상륙지에 대한 독일 서부 기갑군의 반격을 하루 연기하려 했지만 지휘부 희생이 너무 커 파리에서 새로 지휘부 구성하고 반격은 3주 연기되었습니다. 이 동영상 보니 영국은 이미 1차대전 때도 독일 빌헬름2세를 공습으로 암살시도 했던 적이 있었군요. 북아프리카에서 롬멜 암살은 공습 아닌 특수부대 투입으로 시도했지만, 롬멜은 행운으로 마침 숙소에 없어서 실패. 하지만 노르망디에서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 기습은 대성공. 영국이 울트라 정보로 독일의 모든 방어 계획을 훤히 알고 있었지만 독 기갑군 상대 지극히 어려웠죠. 적 정보를 아는 것과 적을 물리치는 것은 별개인 겁니다. 특히 전차전에서 전차의 성능 차이는 정보로 해결 안됨. 격투기 헤비급 챔피온 상대로 그의 약점을 알아냈다고 해도 내가 격투기 선수가 아니면 아무 소용 없는 그런 상황. 영국은 독일 암호 해독으로 독일의 모든 방어계획 반격작전을 파악하고 대응했지만, 그 대응에서 일선의 전차병들과 군인들은 몸빵으로 떼워야 했습니다. 그래도 확연한 이점은 있었죠. 독일군 기갑군 주력이 까앵에 집결하고, 모르탱 반격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대전차 함정을 파서 팔레즈 포켓으로 유인하고, 미군이 그 빈틈을 노려 돌파하도록 미군에게 공세 개시 시점을 지정해준 것. 미국이 2차대전 물주인 것 분명합니다. 영국 보다 북서유럽 상륙군 최종 병력이 3 :1로 훨씬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노르망디 상륙과 그 이후의 전투를 거의 다했고 영국은 들러리라고 하긴 힘들죠. 미군은 파리를 점령하고 그 쪽에서 전진했지만, 영국군은 베네룩스 3국을 경유하면서 해안가를 끼고 전진했죠. 이유는 독일의 v-1, v-2, v-3 기지 제거와 해안 항구 확보로 보급을 해결하기 위해서. v-3는 초장거리 대포입니다. 포신 길이가 과장 좀 보태면 100m대. 영국 입장에선 최우선 목표. 영국 본토가 독일 로켓과 장거리포로 타격당하던 시기라. 영국 공군이 5톤, 10톤 짜리 블록버스터로 우선 독 로켓 기지 예상 지점 폭격하고, 그 뒤에 영국 지상군이 점령해서 위협을 최종 제거. 노르망디 상륙 때 동원된 해군 미군이 많겠습니까? 아니면 영국이 압도했겠습니까? 인공항구, 해저송유관도. 네덜란드의 안트베르펜(영어 발음으로 안트워프) 점령을 영국이 해야 더 합리적이죠. 모든 유지보수 인력은 미국이 아닌 영국이 담당하기 더 편하니까. 또한 독일이 그런 중요한 항구 지역 순순히 내줄 이유 없으니, 항구와 항구 인근 해안과 강 지역에서 소규모의 상륙전도 전개되었습니다. 항구 점령한다고 바로 사용할 수도 없죠. 독일군이 다 폭파시킨 후 점령. 그것 다 치우고 새로 항구 개통도 영국 몫이죠. 미군은 독일군 상대로 전투 주력하며 전진했지만 영국군은 잡다한 일들 함께 하면서 전진했습니다. 영국 본토가 아닌 최전선의 연합군을 향한 독일의 v-2 공격 , 역시 대부분은 미군 지역이 아닌 영국군이 담당한 안트베르펜등 항구 지역이었습니다. 독일의 소중한 전략 자산 v-2, 패튼의 미3군과 같은 곳 보다는 전쟁 수행에 더 치명적인 지역 공격. 미영소 당시 인구 영국은 5000만이 될까 말까, 소련은 1억5천만 이상, 미국도 1억3천만 정도. 그 때문에 영국은 상시적 병력 부족에 시달렸던 겁니다. 미국이 북서유럽에 300만 투입할 때 왜 영국은 고작 100만 밖에 투입하지 못했는지, 왜 영국이 겨우 100만 북서유럽에 투입하면서도, 지중해 북아프리카에 육해공 100만 병력을 여전히 남겼는지 생각할 필요 있습니다. 영국군은 44년부터 그리스에서 빨치산 소탕. 사실 수백만 미군을 대서양 건너 퍼나른 것도 영국이 더 많았죠. 당시 세계 최대 여객선 7만톤 8만톤급이었던 퀸메리와 퀸엘리자벳은 미군 병력 만명 단위로 운반. 퀸 메리호 1척이 2차대전 기간 동안 왕복하며 퍼나른 병력은 80만 조금 넘습니다. 퀸 메리와 퀸 엘리자벳 단 2척이 약 160만 병력 수송. 저 거대 여객선이 미국에서 출발해 대서양 건너다 침몰당했다면, 미군 만명 이상이 한꺼번에 떼죽음 당하는 것. grey ghost 퀸 메리호, 단독으로 2차대전 기간 약 80만 병력 수송. ruclips.net/video/MsoiKnnUskM/видео.html 패튼 북아프리카에서 특별히 내세울 전투 없습니다. 패튼 아니 미 지상군 전체는 북아프리카에서 사실 마지막 순간 숟가락만 얹은 겁니다. 미공군은 지중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나름 역활했지만. 1943년 5월 튀니스 함락 까지 미 지상군과 해군 별로 한 일 없습니다. 영국 해공군은 몰타 방어 및 지중해 제해권, 영 지상군의 보급 유지와 지원 엄청난 전투치뤘죠. 영국 지상군도 탁월한 롬멜을 상대로 고전했지만, 결국은 승리했습니다. 보급을 유지하는 것도 능력. 롬멜이 보급만 충분했다면 승리? 영국의 보급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면 그런 주장 할 수 없을 것. 추축국 해상보급선은 시칠리에서 북아프리카 겨우 250마일, 영국은 최단 지중해 직항로 지브롤타-몰타-알렉산드리아 3,500km, 전황 악화로 직항로 사용 못할 땐 아프리카 우회한 수만km 지구 차원. 최단 3,500km도 집결 후 출발점인 지브롤타 기준입니다. 실제로는 영국-캐나다-미국에서 출발한 선단임을 고려해야. 영국의 해상보급은 룰루랄라 진행된 것 아니죠. 페데스탈 몰타 호송선단 보듯 어마어마한 자원이 투입된 겁니다. 사실 2차대전 영국의 전쟁 수행, 최전방 전투 투입 아닌 보급 지원 운반에도 엄청난 자원 소모. 대서양의 유보트전에서 유보트 1척 잡기 위해 미국과 영국은 함정과 항공기 합해서 약 100대 단위가 투입. 되니츠 회고록, 전황 악화로 유보트를 철수시켜야 했지만 철수시킬 경우, 대잠전에 투입된 막대한 병력과 자원이 독일 침공군의 전차 항공기 병력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손실을 보면서도 잠수함전 지속했다는 내용. 북아프리카의 독일 이태리 추축군은 영국군에 의해 격멸되었습니다. 미군은 횃불 상륙 때 나타났고, 전투다운 전투 해본 적 없고, 캐서린 패스의 미 기갑부대 데뷰전은 전멸. 미 기갑부대가 캐서린 패스에서 노련한 독일군에게 전멸당할 무렵, 영국8군은 튀니지 거점 마랫 방어선을 뚫었고. 시칠리에서도 패튼은 거의 전투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을 전투하면서 전진했고, 패튼은 지프 타고 손흔들면서 전진. 패튼은 또한 노르망디 상륙에 직접 참여한 적도 없습니다. 상륙이 성공한 이후에 추가 투입되었습니다. 패튼은 기만 유령부대 지휘관으로 도버에 있다, 상륙이 성공한 이후 투입됩니다. 패튼이 일선에서 배제된 이유는 패튼대전차군단 영화에도 나오듯 사병 뺨싸대기 날린 후 징계탓도 있었고.
타이거 전차 손실 통계 소개합니다. 북아프리카-이태리-북서유럽전선 합산한 서방연합국과의 교전 중 손실 550대 + 동부전선 손실 1168대. 노르망디 상륙 이후 즉 북서유럽 전선에서의 타이거 손실은 358대. 전투중 손실은 북서유럽전선 148대/총358대 + 동부전선 499대/총1168대. 즉 타이거 전차는 비전투 손실율이 약 60%에 달할 정도로 전차 : 전차 전투에서 막강한 위력, 하지만 기계적 결함과 유지 보수 측면에서 문제가 많았던. 서부전선 전체에서 당한 타이거 손실 550대는 동부전선-독소전에서 당한 타이거 손실의 약 47%. ( 이런 자료도 있더군요. 노르망디 전역에 투입된 독일 전차 약 2300대에, 그 중에서 5호-판터 + 6호-타이거 합이 약 500대라는 ) ( 영국은 종전까지 파이어플라이 약 2,000대 생산, 하지만 노르망디 상륙 때는 생산 초기라 초도 생산분 약 350대 투입했다고 합니다. ) ( 만일 영국이 노르망디 전역 당시 17파운드포 장착한 파이어플라이-크롬웰 등 투입하지 않았다면 전역 돌파는 더욱 힘들었을 것. ) 자료 인용 Tiger Losses By Christian Ankerstjerne - Last modified 2022-08-13 1. 손실 원인별 통계 Detailed Group Tiger I Tiger II Total, detailed Total, group Percentage Combat losses Aircrafts Aircrafts - 30 1 31 2% Bombers Aircrafts 11 3 14 Fighter-bomber Aircrafts 4 12 16 Anti-tank gun Anti-tank gun 38 11 49 49 3% Assault gun Armor 4 4 8 Tank destroyer Armor 2 2 4 Tanks Armor 50 30 80 Artillery Artillery 12 1 13 13 1% Combat Combat 406 89 495 495 29% Infantry Infantry 5 6 11 11 1% Mines Mines 1 - 1 1 0% Total, combat 533 159 692 692 40% Non-combat losses Abandoned Irrecoverable 46 50 96 341 20% Bogged down Irrecoverable 39 11 50 Immobilized Irrecoverable 101 57 158 Irrecoverable Irrecoverable 35 2 37 Unrepairable Mechanical 127 3 130 260 15% Mechanical failure Mechanical 75 55 130 Out of fuel Out of fuel 24 33 57 57 3% Total, non-combat 447 211 658 658 38% Unknown/other losses Friendly fire Accidents 11 - 11 18 1% Road accident Accidents 3 4 7 Blown up Blown up 69 28 97 97 6% Captured Captured 16 3 19 22 1% Surrendered Captured 3 - 3 Converted Other 1 - 1 18 1% Other Other 1 - 1 Out of ammunition Other - 1 1 Stranded Other 7 - 7 Transit Other 8 - 8 Unknown Unknown 139 74 213 213 12% Total, unknown/other 258 110 368 368 21% Total 1238 480 1718 While many of the combat losses are not specified, it is clear from the numbers above that the common myth about Allied aircrafts being the scourge of the Tiger tank has no basis in fact. 2. 전역별 손실 통계 Losses by front ( 전역별 손실, 북아프리카-이태리-동부전선-북서유럽전선 ) Destroyed Tiger I of schwere Panzer-Abteilung 501 at Hunt's Gap in Tunisia. Destroyed Tiger II of schwere SS-Panzer-Abteilung 101 in Jemappes, Belgium. Cause Tiger I Tiger II Total Africa Combat 6 - 6 Non-combat 25 - 25 Total 31 - 31 ---------------------------------> 엘 알라메인 패배 뒤, 튀니지 방어전에 투입된 타이거 손실이 총 31대. Italy Combat 39 - 39 Non-combat 85 - 85 Other/unknown 37 - 37 Total 161 - 161 ---------------------------------> 이태리 전선에서 타이거 손실이 총 161대. Eastern Front Combat 402 97 499 Non-combat 273 125 398 Other/unknown 184 87 271 Total 859 309 1168 ------------------------------> 동부전선에서 당한 타이거 손실 총 1168대. Western Front Combat 86 62 148 Non-combat 64 86 150 Other/unknown 37 23 60 Total 187 171 358 ----------------------------------> 노르망디 상륙 이후 북서유럽 전선에서 타이거 손실이 총 358대.
전쟁은 정치의 가장 폭력적인 형태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 정치를 규정하는 가장 본질적인 틀이 헌법이라고 생각하고요. 링컨은 폭력적인 형태로 정치를 하는 와중에 그 본질을 바꾸어 놓으려고 했었네요. 영화 링컨을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조금은 지루한 세번쩨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작 정도로만 봤었어요. 박태균 교수님의 설명으로 그 당시 링컨의 예리한 판단과 결단이 다시금 느껴지네요. 이 맛에 수요일을 기다립니다.
남북전쟁에서 양면적인 인물로 나단 베드포드 포레스트에 대한 특별편은 어떨까요? 노예상인으로서 성공한(?) 사람이지만 왜 그가 판 노예들의 도망율이 맞앗는지도 흥미로왔구요. 전쟁기간 그의 활약은 리가 가장 직접 만나보고싶은 남군 장군으로 꼽은 것도 재미있고, 그런 전과를 낸 포래스트가 아이러니하게도 사관학교 출신이 아닌것.. 더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가 초대 kkk 그랜드 위져드이었으나 그 활동에 환멸을 가져서 해산명령하고 이후 흑백갈등을 맞는 그의 활동도.. 한번 살펴보면 정말 좋을 인물인 것 같습니다. 물론 박교수님의 그의 성장기나 이후 테네시의 시대상에대한 해설까지 곁들여주신다면 금상첨화겠지요.
남북전쟁은 진짜 "대하드라마"라는 표현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전쟁 속 전투와 전략 전술 및 정치 무기 등에 대하여 집중하고 있지만 많은 영화의 배경이 될 만큼 일반인들 사이의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장장 5년에 걸친 전쟁이니 여기서 다루지 못한 "대하 드라마급" 이야기가 상당히 많을 것 같습니다.
수정헌법 13조 (13th amendment) 가 최근에 논란이 된 이유가 노예제도 폐지 라고 하지만 범법자들에 벌을 주는 경우엔 적용이 안된다는 문항이 있습니다. "Neither or..." 후에 나오는게 "except as a punishment for crime..." 몇 년 전에 넷플릭스에 "13" 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나오면서 수감자들의 인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북군 지휘관들이 물량과 화력 모두 우세인데도 불구하고 당면한 전술적인 이슈들에 급급해서 더 중요한 전략적 목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만약 전략적 목표를 충분히 이해했다면 현장 지휘관들이 망설이거나 시간을 주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결국 더 크고 참혹한 전투를 피할 수 있었겠죠. 그랜트가 위대한 전쟁 영웅인 것은 맞지만 그런 부분을 충분히 현장 지휘관들에게 설명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이 부족하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도 듭니다.
아마 마지막 에피소드 등에서 정리를 한 번 하시겠지만, 남북전쟁은 61년에서 65년까지 기간 동안 미국 본토 내에서, 다른 외적도 아닌 미국인들끼리 싸운 전쟁인데 무려 60만의 전사자가 발생했습니다. 이와 비교하면 제2차세계대전 1941년 말 참전해서 끝까지 싸워 나온 미군 전사자는 40만, 1차 세계대전은 20만명입니다. 트럼프 시절 미국 방역의 처참한 실패로 기록이 갱신되기 전 까지는 미국이 하나의 큰 사건으로 인해 겪은 촤대 사상자를 보인 전쟁입니다. 이 미국인 전사자 60만명이라는 기록은 COVID 사망자 2년 남짓에 100만명 사망하면서 비로서 깨졌습니다. 어찌 보면 전쟁보다도 무서운 게 무능한 행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22:56 조셉 존스턴 장군을 맥래런 장군과 비교하면 화낼 분들이 많을텐데요,,, ㅋ 남군 최선임 장군이였으며 남북전쟁 발발 시기부터 출전하여 그야말로 5년 내내 단 한번도 쉬지 않고 싸웠고 남북전쟁의 종전을 1865.4.7 애포마톡스에서 로버트 리의 북 버지니아 군이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한 것을 종전 시점으로 잡지만 이후로도 4월 내내 소규모 남군들이 계속 저항했고 그중 맨 마지막으로 부대 단위로서 공식적으로 항복한것은 4.26 노쓰 캐롤라이나 베넷 Benett에서 거의 남은 잔존 병력과 함께 항거하던 존스턴 장군이 셔먼에게 항복한것입니다. 따라서 남북 전쟁을 참전한 모든 장군들 중 아마도 가장 긴 종군을 했다고 봐야 할것입니다. 그의 지휘가 공격적이거나 충동적이지는 않았지만 치밀하고 준비에 철저했으며 공격과 방어 모두 잘해내는 유능한 장군이였습니다. 그의 전임 브래그 장군은 전투 지휘가 형편없어서 오죽하면 롱 스트리트가 진절머리를 내면서 동부로 전출시켜달라고 정부에 애원했을 정도였는데 존스턴이 지휘를 맡으면서 그런 문제가 싹 사라졌습니다. 그가 케네소 산까지 지연전 하는 동안 그냥 철수한것도 아니고 지속적인 여러번의 소규모 전투가 있었고 만약 셔먼이 아닌 다른 서투른 북군 장군이 정면 돌격이나 어설픈 기동을 했다면 대번에 유리한 지형만 골라서 야전 축성을 단단히 구축해놓은 존스턴의 방어망에 산산조각 났을 겁니다. 그러나 셔먼은 전략적 우회기동과 돌파에 다른 어떤 장군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기 때문에 어차피 결전은 애틀란타에서 난다는 신념으로 왠만하면 병력의 피해가 가는 결전을 적극 회피하고 후방 우회 기동을 하면서 존스턴의 방어망을 교란했기 때문에 존스턴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그때마다 빠르게 후방 기동을 하여 다시 유리한 방어점을 잡아서 대치하는 것이 최선의 전술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나마 그랜트가 콜드 하버에서 똑같이 저질렀듯, 그 역시 케네소 산 전투에서 방어망을 정면으로 들이 받는 공격을 시도했는데 역시 예상대로 존스턴의 방어 화망에 걸려 큰 피해만 냈던 것이죠. 후임인 "사자" 존 벨 후드 장군도 용감무쌍하고 능동적인 전투 지휘관임은 분명했고 게티스버그에서 맹활약을 했었지만 그를 바로 지켜봤던 로버트 리가 반대한것은 아마 단순히 결전을 앞두고 지휘관을 바꾸는게 안좋다는 모호한 이유라기 보다는 그 역시 도시 방어전을 준비하면서 애틀란타 방어전 역시 전투의 성격상 존벨 후드 보다는 신중하고 치밀한 존스턴 장군이 적임을 갈파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는 심소령님이 언급 하신 바로 그 문제였는데 실제 이 인사 조치는 바로 실패로 드러나버리는데 피터스버그 보다 인구와 물자 집적도, 병력 면에서 유리했던 애틀란타가 불과 42일(1864.7.20-9.1)의 전투만으로 완전 함락된 것을 보면 북군이 애틀란타 북쪽으로 접근하자마자 선빵을 날려댔던 후드의 공세가 패착이였고 이는 그의 공격적인 전투 지휘 성향이 애틀란타 전투에는 적임이 아니였음을 다시 입증해 버린 셈이 됩니다. 반면 로버트 리는 보급도 시원치 않았던 피터스버그에서 참호전으로 무려 8개월이나 버텨내는데 성공하죠. 남북 전쟁 문서, 특히 전투 지도를 볼때 장군들의 이름, 특히 남군측 장군들 이름의 변화가 꽤 많아서 인상적입니다. 그 중 흥미로운것이 이전 전투에서 여단장 보직, 혹은 무명이 시간이 흐를수록 승진하여 사단장, 군단장으로 바뀌는 것이고 사단장, 군단장 중에서 이름이 갑자기 사라진 경우 앞뒤 자료 보면 중간에 전사했음을 알고 숙연해 지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 초기 전역부터 전쟁 말기 까지 내내 이름이 나와 나중에 좀 반가운 느낌마저 드는 사람이 바로 보우리가드와 조셉 존스턴 장군이고 초고속 승진을 한 경우는 개전때 대위였다가 종전때 군단장이 되어 실제로 북 버지니아 군의 마지막 일선 지휘를 맡았던 존 고든 장군이 눈에 띄입니다. 이 분은 전투때마다 보직이 하나씩 승진되어 마지막 해에는 군단장으로 작전 지도 마다 이름을 볼 수 있죠.
당시에는 연임 제한이 없었습니다. 조지 워싱턴이 지지 세력의 청을 뿌리치고 8년 재직한 후에 깨끗하게 물러났고, 그게 일종의 불문율이 되어서 3연임 도전을 불가하게 했습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그 불문율까지 넘어서서 4선 대통령에 올랐습니다. 그러자 미국이 수정헌법을 하나 제정해서 대통령과 부통령 재임 횟수를 최대 2회로 제한했고 그 조항을 트루먼 시기부터 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 여러 번 언급하신 새먼 체이스 재무장관이 대권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는커녕 링컨을 끌어내리려고 막후에서 공작을 했다가 번번이 실패했고 링컨에게도 들통 났으며 끝내 사임했을 정도로, 링컨은 1864년 대선을 치르면서도 정말 고생했습니다.
최제우는 체제에 위협이 되는 개혁 사상 자체만으로, 무능-부패-독재 권력에 의해 1864년 순교 처형되었고 동학농민혁명은 30년 뒤인 1894년에 일어났습니다. ----------------------------------------------> 사용하는 단어는 무의식적으로 가치관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 동학 농민에겐 반란이라는 단어를 배정하고 + 메이지에게 즉위, 단순한 우연이길. 세도정치는 그저 조금 어지러운 정도가 아니었고, 동학 농민의 외침은 정당하기에 반란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동학농민전쟁 또는 동학농민혁명은 사실상 대한민국 민주공화정의 시발점일 수 있습니다. 동학군의 외침은 -------------------------> 반봉건, 오늘날 용어로 바꾸면 반독재-민주화 운동. ----------------------------------------------------> 반외세, 한반도를 침략하려던 외세로 부터 독립을 유지하려던 투쟁. ----------------------------------------------------> 동학이 설치한 집강소는 왕정의 일방적 통치를 견제하는 국민 참여 통치 기구. 최근 동학농민혁명과 4.19 기록물이 세계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 대한민국은 1위 독일, 2위 영국의 뒤를 이어 3위 기록 유산 보유국이 되었습니다. 전세계가 동학의 반봉건-반독재-민주화 투쟁과 반외세-독립 투쟁을 공식 인정했기에, 반란이라는 폄하 의미 포함된 단어 사용은 바람직하지 않은. 특히 동학군 진압을 외세에 부탁한 당시 조선 정부-국왕 및 외세인 일본군과 함께 동학군을 진압한 조선군은 과연 국가-정부-군이 도대체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치명적 의문을 가지게 합니다. -------------------------------------------> 무능-부패-독재 권력이 생존을 위해 국민들을 적으로 돌리는 저런 행위는 국민을 짓밟는 폭정으로 반드시 타도되어야 하는. 1600년대 중반 잉글랜드, 공화정 아닌 왕정 어둠이 판치던 시절에도, 국왕이 의회와 티격태격하다 순간 욱해서 의회 해산 및 세금 좀 멋대로 매겼다고 건수 잡혀, -------------------------------------------------------------------------------------------------------------------------------------------------> 국왕이 반역죄로 도끼로 목 잘려 처형된 나라도. 임진왜란 선조 + 호란 때 인조 + 동학농민군 진압 외세에 부탁한 고종과 조정 + 한국전쟁 초 이기고 있다고 거짓 라디오 방송 틀어 놓고 한강다리 끊고 튄 초대 대통령, 사실 운 무지 무지 좋았던 겁니다. -----------------------------------------------------------------------------------------------------------------------------> 잉글랜드였다면 모조리 다 처형되고 새로운 국가 건설 되었을 것. 만일 외세의 개입이 없었다면, 아마도 동학농민전쟁은 우리 자력으로 공화정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 되었을 겁니다. 미래 언젠가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의 첫 걸음으로 동학농민혁명이 수록될 날이 올겁니다. 단지 시간 문제.
영화 링컨을 보면서 미국의 정치적 유산에 대해 정말 부럽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왜 링컨은 노예제도를 없애기 위해서 노력했는지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는데... 오늘 이 편으로 그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링컨 역시 도덕적인 판단에 일생을 건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명분을 얻기 위한 하나의 큰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정치적 명분이라는 것이 속물적이고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링컨을 마치 성인처럼 알고 살았는데, 그 역시 정치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네요.
드디어 남부 인종차별주의자들이 거품물고 싫어하는 그분이 뜨셨네 BRING THE GOOD OL' BUGLE BOYS WE'LL SING ANOTHER SONG SING IT WITH A SPIRIT THAT WILL START THE WORLD ALONG SING IT AS WE USED TO SING IT 50,000 STRONG WHILE WE WERE MARCHING THROUGH GEORGIA
역전다방이 참 좋은게 전쟁만 집중하는게 아니고 당대의 역사적 경제적 사회적 배경도 분석해주기 때문인데, 오늘 영상보니 애틀란타 전투가 승전보를 가져오지 못했다면 링컨이 재선 못됐을 수도 있거나 되어도 간신히 이겨 수정헌법 개헌을 하지 못했을거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셔먼이 좀 심각한 충격요법을 사용 해서 미움을 받기도 했지만 링컨 그랜트와 더불어 노예해방삼걸에 들어갈 위인인거 같아요.
참 오묘한 조합의 패널인듯 해요..
군사전문가 관점, 언론평론가 관점,
국제관계학자적 관점 그리고 물리학자 관점...
연관이 없을듯 한데 여러 각자의 시각이 같은 주제를 이야기하고 공감하고 서로 이해하고... 그러면서 조화..
참 좋은 듯합니다.
남북전쟁 때 링컨대통령이 밤마다 악몽을 꾸며 괴로워했다고 하는데 그 심정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전쟁이 잘 안 풀리고, 패전하고 길어지니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괴로웠을까? 전쟁 막판에 그랜트와 셔먼이 승리를 안겨다 주었을 때 마치 오랜 가뭄에 단비가 내린 것처럼, 어두컴컴한 동굴을 벗어나려고 헤메다 한줄기 햇빛을 본 것처럼 반갑고 감동이었으리라 ⭐🤗🤗~🌠💎💎❤❤❤
바다로의 행군이 나온다는 거는 이제 남북전쟁도 마무리로 가는 느낌이 드네요
1:29 보우리가드의 기만술. 3:54 명언 4:13 포위전 시작 5:01 땅굴 6:46 부대교체 7:54 크레이터 전투 11:35 책임을 분석 13:18 윌리엄 셔면 소개 18:07 애틀랜타 19:41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21:34 존스턴 투입. 23:21 북군의 진군. 24:52 케너소 마운틴 전투 25:52 남군의 전술 27:01 존 후드로 교체.... 29:02 애틀랜타 전투 30:51 점령 32:44 전투 의미 33:40 1864년 대선실시 38:15 수정헌법 13조 40:44 내용 42:03 개헌
남북전쟁이 끝이 보이네요.
고생하셨습니다.
다음편으론 독소전쟁으로 가시죠😊
역전다방 정말 재미있고 유익한 방송입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그렇게 심도 깊은 작품이었군요. 모두 다시 봐야겠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얼마전 다시봤는데
정말 하나도 안 지겹고 불후의 명작인것 같네요.
오늘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링컨"이 소개 되었군요, 그리고 셔먼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비교적 최근 영화인 "해방"(윌스미스 주연)과 "프리스테이트 존스"(매튜 매커너히 주연)도 소개할 기회가 왔으면 저는 정말 더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오늘도 유익한 방송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감사히 잘 보고 있습니다 머지 않은 시일에 꼭 팬미팅이나 사인회 제발 해주세요 꼭 가겠습니다ㅠㅠ
박원장님 채박사님 샤를기자님 심소령님 허mc 님 너무 팬입니다!
4:17 철도를 바짝 익혔군요
2차대전때에도 남부 출신 병사들중에 셔먼전차 탑승을 거부한 적이 있을정도로 남부에서 셔먼의 악명은 엄청났죠.......
M4에 셔먼이란 이름을 붙인 나라는 영국이었습니다. 잘못된 정보가 사실로 알려진 경우 중 하나죠. 아마 역전다방 태평양전쟁 타라와 전투던가? 썸네일에 셔면있는 편 보시면 다른분이 왜 저런 말이 도는지 상세히 설명한 댓글있습니다
ㅋㅋ 남부기 달고다니던 애들 때문에 군소리 나왔던건 들어본듯
남북전쟁은 게티즈버그 로 전쟁 끝난거로 알고 있었는데 그뒤에도 큰 전투가 많았구나 많이 배우고있습니다. 많은정보 감사드려요
정말 유익하고 훌륭한 전쟁역사 프로그램입니다. 2차대전부터 열씸히 보고 있는데 매회 감탄감탄입니다. 감사합니다.
남부는 이쯤되면 전쟁을 하고있는게 대단한 수준 같네요
물론 모든 사람과 물자를 갈아서 하고 있었겠지만요
무리한 부탁일수도 있는데요. 전쟁 한 편 끝날때마다 연표를 작성해서 국방tv 홈페이지 같은 곳에 올려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카데미 샤만전차 전후좌우 만들던 기억이 새록 새록 하네요.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지만 조지아주나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셔먼이나 그랜트는 거의 입에 담아서는 안되는 이름들. 셔먼이 얼마나 심하게 초토화를 시켰으면…
고맙습니다 ^^*
진정한 승리는 어디서 오는가 에 대한 심도깊은 고민하게 만들어줍니다 즐겁게 잘봤습니다
이제 기억이 잘안나서 매일 정독합니다 잘때나 눈뜰때나 매일 듣는데 걈사드립니다 저를 밀덕으로 만들어주신거에대해~~
이번 회도 너무 감사합니다
남북전쟁이 이렇게 대하드라마처럼 엄청 나네요
오늘도 좋은 동영상&군사정보&군사지식 &군사무기&전쟁역사 잘보고갑니다 역전다방 운영자님 오늘도 좋은 하루 잘보내세요 화이팅입니다 ^^
가슴이 웅장해지는 이름 셔먼...
막가파라면 서러운 패튼도 한 수 접은 막가파의 선조격 승리를 위해 남부를 약탈하고 자산을 파괴하는데 거림낌 없는 그의 막가파적인 기질은 훗날 패튼이 2차대전에 코브라 기동으로 이어집니다
음....과연 그렇군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초콧빵님^^
노르망디, 미군의 코브라 돌파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ruclips.net/video/p-9w2J5s0xU/видео.html
코브라 돌파 직전 까지, 독일 기갑부대 약 80% 및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는 까앵에서 영국군과 교전. 그 빈 틈으로 미군의 돌파.
까앵 최종 함락 단일 작전에서 영국군은 약 500대의 전차 손실. 당시 영국군 총 전차의 약 35%를 단일 작전에서 손실.
까앵 함락 때 독일군 전차 약 600대 및 독일의 거의 모든 판터 및 타이거 전차가 영국군에 붙들려 고착 분쇄되어 나감.
당시 미군 전면에 배치된 독일 전차는 약 150대, 판터나 타이거는 거의 없었고.
노르망디 전역 종결 때 까지 교전국들의 최종 전차 손실.
영국 약 1200대. 독일 보병을 주로 상대했던 미국 역시 약 1200대 손실. 독일은 약 1300대.
당시 미 지상군이 독일 주력을 담당했던 영국과 거의 동일한 전차 손실을 당했다는 것은 미군이 신병 수준이었기에.
독일이 당한 전차 손실은 전차 대 전차 전투 보다는 공중공격 및 함포사격 등 피해나 전차전 때 궤도 손상 후 후퇴할 때 유기 자폭 많음.
즉 전차 대 전차 전투에서 영국과 미국이 독일 전차와 겨루기는 힘들 정도의 압도적 성능 차이.
패튼의 미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던 것 아님.
영국군은 노르망디 전역 독일 주력 기갑부대를 몸빵으로 처절하게 공격하며 독일군을 제거한 것.
미국과 영국은 불행히도 45년 초가 되어서야 타이거와 대등하게 전투할만한 신형 전차를 전선에 투입.
하지만 너무 늦게 투입되어 교전할만한 독일 전차 기갑부대 자체가 소멸해 별 전과 없음.
------------------------------------------------------------------------------------------------
노르망디 전역 미군의 코브라 돌파에 대한 다큐 링크를 걸면 유튭에서 글이 삭제되곤 해서 간단 소개합니다.
노인이 된 브래들리 장군의 인터뷰 및 코브라 돌파 상세한 과정을 다룬 다큐인데, 그 유튭 영상엔 수 많은 영미권의
댓글들로 넘쳐났습니다. -------------------> 패튼이 코브라 돌파한 것 아닌 것에 놀라고, 패튼이 노르망디 상륙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
놀라고, 그 영상 제목이 영어로 패튼의 코브라 돌파라는 어구도 포함되었는데 내용적으로 패튼은 나오지 않고 브래들리만 나왔기에
영상 제목을 바꿔야한다는 댓글들도 있더군요. 패튼대전차군단 할리웃 영화 영향력 때문인지 미국 일반인들도 패튼이 코브라 돌파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
흔히 패튼이 지휘한 미3군이 코브라 돌파 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패튼이 아닌 브래들리 휘하 미1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냈고 패튼은 그 이후에,
재편성된 신규 미3군의 지휘관으로 투입된 겁니다. 브레들리의 코브라 돌파는 44년 7월 말 이루어진.
노르망디 상륙 당일만이 아니라 상륙 후 1달이 넘어서 까지 패튼은 영국 본토에서 대기.
코브라 돌파를 해낸 미1군 지휘관, 오마 브래들리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해 직접 서술한 내용. 맨 앞 첫 구절만 우리 말로 옮기면 --------------------------------->
(영국군은 독일군을 갈아버리기 위해 깡의 독일 기갑부대로 진입했다, 미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낼 수 있도록.)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압도적 전차 성능 차이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동안 영국군도 갈려나갔습니다. 소개된 뒷 부분을 옮기면
(... ...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격 속도와 전진한 거리로 그 전투의 성공을 평가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즉 영국군의 돌파라는
자부심을 계산하지 않고 몽고메리는 최종 작전 계획에 서명했다... ... 영국군은 인내와 자제력으로 그들에게 부여된 수동적 역활을 견뎌냈다.)
-------------------------> 많은 이들은 인용한 원문 마지막 부분 주장과 같이, 군이 적진을 돌파하는
진격 속도와 전진 거리로만 성공과 능력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적 주력을 견제-고착- 섬멸 등을 해야, 그런 돌파가 가능한.
40년 프랑스를 항복시킨 전격전은 적 주력을 견제만 하는 뒤통수 때리는 돌파, 하지만 44년엔 견제만으로는 돌파가 불가능했던.
40년엔 장난감 수준의 전차로도 전격전이 가능했지만, 전쟁 말에는 그 어떤 중무장 전차도 쉽게 뚫을 수 없이 변해버린, 게다가 전차
성능에선 독일의 압도적 우세 상황에서, 누군가는 자신이 갈려나가면서 적 주력을 고착-분쇄시켜야만 했던.
--------------------------> 노르망디 전역, 당시 미군은 독일군 주력을 상대할 역량이 없었기에,
영국군이 갈려나가면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별로 폼나지 않는 수동적 역활을 담당했고, 그로 인해 발생한
미군 지역의 독일군 방어력 약화를 이용해 미군이 돌파하도록 상륙 전에 이미 작전 계획을 세웠던 것.
----------------> 오마 브래들리가 얼마나 겸손하고 사려 깊은 지휘관인지 패튼의 알려진 언행과 비교해보길.
만일 패튼이 코브라 돌파를 지휘했고 성공시켰다면, 오마 브래들리와 같이 서술하기는 힘들었을 것. 모든 것이 위대한
미국과 탁월한 자신의 능력으로 독일군을 분쇄한 것이라고 했을 가능성 큰.
그렇다면 패튼은 왜 이렇게 과대 평가되고 널리 알려졌겠습니까? ----------------> 극한의 할리웃 영향력?
또한 벌지 전투는 미국 역사상 가장 결정적 지상전 승리이기에 패튼을 미국의 영웅으로 부각시킬 필요성도 있었을 것.
(콰이강의 다리)-(패튼 대전차군단) 두 영화는 모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지만, 영화 내용과 성격은 완전히 상반되죠.
성조기 나부끼고 번쩍이는 별 박힌 철모에 상아 손잡이 권총의 지휘관이 2차대전 독일군 괴멸시킨 것으로 선전하는 영화가
과연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을만한 수준인지 지극 의심스럽지만 받았답니다. 어릴 때는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역사를
좀 알게 된 이후에 그 영화 다시 보니 참... 자잘한 것 하나 더 추가한다면, 강릉에 잠수정 침투했을 때, 소탕전 나선 우리 군 일부
번쩍이는 계급장 때문에 저격당해 전사.
(오마 브래들리 서술 관련 펌.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While Collins was hoisting his VII Corps flag over Cherbourg, Montgomery was spending his reputation in a bitter siege against the old university city of Caen. For three weeks he had rammed his troops against those panzer divisions he had deliberately drawn towards that city as part of our Allied strategy of diversion in the Normandy Campaign. Although Caen contained an important road junction that Montgomery would eventually need, for the moment the capture of that city was only incidental to his mission. For Monty’s primary task was to attract German troops to the British front that we might more easily secure Cherbourg and get into position for the breakout.
In this diversionary mission Monty was more than successful, for the harder he hammered towards Caen, the more German troops he drew into that sector. Too many correspondents, however, had overrated the importance of Caen itself, and when Monty failed to take it, they blamed him for the delay. But had we attempted to exonerate Montgomery by explaining how successfully he had hoodwinked the German by diverting him toward Caen from the Cotentin, we would have also given our strategy away. We desperately wanted the German to believe this attack on Caen was the main Allied effort.
But while this diversion of Monty’s was brilliantly achieved, he never the less left himself open to criticism by overemphasizing the importance of his thrust toward Caen. Had he limited himself simply to the containment without making Caen a symbol of it, he would have been credited with success instead of being charged, as he was, with failure at Caen. For Monty’s success should have been measured in the panzer divisions the enemy rushed against him whilst Collins sped on toward Cherbourg. Instead, the Allied newspaper readers clammered for a place name called Caen which Monty had once promised but failed to win for them.
The containment mission that had been assigned Monty in the Overlord plan was not calculated to burnish British pride in the accomplishments of their troops. For in the minds of most people, success in battle is measured in the rate and length of advance. They found it difficult to realise that the more successful Monty was in stirring up German resistance, the less likely he was to advance. For another four weeks it fell to the British to pin down superior enemy forces in that sector while we maneuvered into position for the US breakout. With the Allied world crying for blitzkrieg the first week after we landed, the British endured their passive role with patience and forbearing.)
깨진다면 롬멜 신화 아닌, 패튼의 코브라 돌파 신화가 더 쉽게 깨집니다.
ruclips.net/video/34oR2D1GVU4/видео.html : BREAKOUT from NORMANDY: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패튼은 북아프리카에서 별다른 전과 없었고, 노르망디 코브라 돌파 순간에도 전투 지휘하진 못했고.
첨부한 동영상에 달린 댓글에 그런 점에 충격받은 이들의 대화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코브라 돌파 시점 까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상세한 소개 영상인데, 제목은 패튼의 코브라 돌파지만
내용적으로 패튼은 거의 언급도 되지 않고, 패튼 아닌 브래들리 내용이 거의 다라, 혼란스러워하는 댓글들이죠.
44년 7.25일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작전 개시
44년 7.28일~7.31일, 독일군 방어선 붕괴 시작되고. 7.31일, 브래들리 미1군 보카쥬 벗어나 프랑스 내륙으로 돌입.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돌파 이후 신규 편성된 미3군을 패튼이 지휘 시작. 즉 패튼은 코브라 돌파와 아무런 상관 없는.
브래들리 미1군의 코브라 돌파, 영국군이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80% 및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 몸빵하며
고착 분쇄 공세를 펼칠 때 독일의 모든 예비 전력이 영국군 지역으로 투입되어 미군 담당 지역 독일 방어력이 매우 취약해져.
패튼은 할리웃 선전 최대 수혜자 성격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미 기갑부대의 사실상 첫 데뷰전인 캐서린 협곡 전투에서 미군 거의 전멸당하자,
새로운 지휘관으로 패튼이 교체 투입 시점 43년 2월경. 43년 5월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까지 별다른 전과 없는.
시칠리에서도 미군은 별다른 전투 없이 팔레르모 입성,
거의 지프 타고 손들면서 팔레르모 입성.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에서 격결한 전투하며 전진한 영국군과 달리.
공황장애로 의무대 있던 몸 멀쩡한 사병 뺨싸대기 날린 것 언론보도로 사과 및 문책되어 일선 지휘에서 배제. 3군 부임 전까지
노르망디 상륙일만 아니라 그 후 약 1달 후까지도 노르망디에 없었죠. 영국에서 가상 페이퍼 부대 지휘관으로 대기.
코브라 돌파되는 시점까지도 전투 지휘를 하지 못하고 재편성되는 되는 3군의 지휘관으로 돌파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패튼이 실질적으로 능력을 보인 것은 벌지 전투가 처음입니다.
하지만 할리웃 영화 패튼대전차군단, 패튼이 북아프리카, 시칠리, 노르망디 다 한 것 같은 착각 들 정도.
패튼은 사실 롬멜과 단 1번의 교전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할리웃 효과로 패튼이 롬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된.
롬멜은 패튼과는 다릅니다. 적당히 다른 것이 아니라 너무나.
롬멜은 패튼과 같은 여러 실체 없는 승리의 주인공 아닌. 국가 차원 지원에서도 압도적으로 불리했고.
제대로 지원해주지도 못했고, 지원할 능력도 안되었던 독일 최고 지휘부와 독소전 투입 일부 장성들은 롬멜이 독일의 대전략에
혼선을 가져와 전쟁 수행을 어렵게 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롬멜 신화 깨부수기의 시발점임도 인정해야만 할 것.
롬멜 신화는 적인 영국군 장병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롬멜 신화 깨부수기는 롬멜의 조국 독일에서 싹이 텄습니다.
롬멜은 2차대전 파탄난 독일의 대전략 수립할 위치에 없없고, 야전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패했던 것.
부족한 보급을 기다린다고 온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적극적 공세로 토부룩 함락해 대량의 물자 탈취해 엘알라메인
까지 진격. 엘알라메인을 뚫고 수에즈까지 진격해 수에즈 이집트에 집적된 대규모 물자까지 확보하려 했던 것은 전략적 오판 아닌
주어진 결핍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
그런 롬멜에게 전략적 식견 부족 운운은 것 지나친.
독일 국가 차원의 전략적 파탄을 야전지휘관에게 묻는 것은 책임 전가이며 비합리적인 태도.
코브라 돌파 영상 관련 댓글 일부 펌.
( John Emerson
3개월 전
Interesting. General Patton was never mentioned in this video.
22
Carl Welty
Carl Welty
2개월 전
Good point -
2
Todd Is god
Todd Is god
2개월 전
Because his command of the 3rd army had to wait until they were activated, which was immediately after Cobra
6
John Emerson
John Emerson
2개월 전
@Todd Is god Yeah,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and he isn't even there yet. Mis-titled I guess.
7
Jc Wheeler
Jc Wheeler
1개월 전
@John Emerson 997ot
Ronnie Bishop
Ronnie Bishop
21시간 전
He wasn’t involved with this operation it was Bradley all the way. Patton was in England. )
Secret 1944 Mission to Assassinate Germany's Panzer Leaders :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 지휘부 제거 공습
ruclips.net/video/c844En8XvC4/видео.html
미군이 롬멜 공습해 전선 이탈시키지 않았습니다.
미군이 핀포인트 공습으로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군 최고 지휘부 제거한 적 없습니다.
미국이 가지지 못한 영국의 정보능력, 브레칠리 파크의 에니그마 암호 해독으로 얻은 정보 울트라.
울트라 정보로 독일의 역습인 모르탱 반격과 독일 기갑부대 최고 지휘부의 위치 모두 알아냈습니다.
영국 제2전술 공군의 전술기들이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 기갑부대 지휘부를 어떻게 제거했는지 보기를.
동영상 4분50초 이후 참조 (영어 자막만 제공됨)
1944년 6월6일, 노르망디 상륙.
6월8일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 위치를 파악하고, 6월10일
영국 제2전술공군은 호커 타이푼 42대, B-25 72대, 호위 스핏파이어 4개 편대 동원해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를 급습했습니다. 다수 지휘관 참모들이 사망하고, 지휘 통신차량등이 파손되어,
노르망디 상륙지에 대한 독일 서부 기갑군의 반격을 하루 연기하려 했지만 지휘부 희생이 너무 커 파리에서
새로 지휘부 구성하고 반격은 3주 연기되었습니다. 이 동영상 보니 영국은 이미 1차대전 때도 독일 빌헬름2세를
공습으로 암살시도 했던 적이 있었군요. 북아프리카에서 롬멜 암살은 공습 아닌 특수부대 투입으로 시도했지만,
롬멜은 행운으로 마침 숙소에 없어서 실패. 하지만 노르망디에서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 기습은 대성공.
영국이 울트라 정보로 독일의 모든 방어 계획을 훤히 알고 있었지만 독 기갑군 상대 지극히 어려웠죠.
적 정보를 아는 것과 적을 물리치는 것은 별개인 겁니다. 특히 전차전에서 전차의 성능 차이는 정보로 해결 안됨.
격투기 헤비급 챔피온 상대로 그의 약점을 알아냈다고 해도 내가 격투기 선수가 아니면 아무 소용 없는 그런 상황.
영국은 독일 암호 해독으로 독일의 모든 방어계획 반격작전을 파악하고 대응했지만, 그 대응에서 일선의 전차병들과
군인들은 몸빵으로 떼워야 했습니다. 그래도 확연한 이점은 있었죠. 독일군 기갑군 주력이 까앵에 집결하고, 모르탱
반격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대전차 함정을 파서 팔레즈 포켓으로 유인하고, 미군이 그 빈틈을 노려 돌파하도록
미군에게 공세 개시 시점을 지정해준 것.
미국이 2차대전 물주인 것 분명합니다.
영국 보다 북서유럽 상륙군 최종 병력이 3 :1로 훨씬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노르망디 상륙과 그 이후의 전투를 거의 다했고 영국은 들러리라고 하긴 힘들죠.
미군은 파리를 점령하고 그 쪽에서 전진했지만,
영국군은 베네룩스 3국을 경유하면서 해안가를 끼고 전진했죠.
이유는 독일의 v-1, v-2, v-3 기지 제거와 해안 항구 확보로 보급을 해결하기 위해서.
v-3는 초장거리 대포입니다. 포신 길이가 과장 좀 보태면 100m대. 영국 입장에선 최우선 목표.
영국 본토가 독일 로켓과 장거리포로 타격당하던 시기라.
영국 공군이 5톤, 10톤 짜리 블록버스터로
우선 독 로켓 기지 예상 지점 폭격하고, 그 뒤에 영국 지상군이 점령해서 위협을 최종 제거.
노르망디 상륙 때 동원된 해군 미군이 많겠습니까? 아니면 영국이 압도했겠습니까? 인공항구, 해저송유관도.
네덜란드의 안트베르펜(영어 발음으로 안트워프) 점령을 영국이 해야 더 합리적이죠. 모든 유지보수 인력은
미국이 아닌 영국이 담당하기 더 편하니까.
또한 독일이 그런 중요한 항구 지역 순순히 내줄 이유 없으니, 항구와 항구 인근 해안과 강 지역에서
소규모의 상륙전도 전개되었습니다. 항구 점령한다고 바로 사용할 수도 없죠. 독일군이 다 폭파시킨 후 점령.
그것 다 치우고 새로 항구 개통도 영국 몫이죠. 미군은 독일군 상대로 전투 주력하며 전진했지만 영국군은 잡다한
일들 함께 하면서 전진했습니다.
영국 본토가 아닌 최전선의 연합군을 향한 독일의 v-2 공격 ,
역시 대부분은 미군 지역이 아닌 영국군이 담당한 안트베르펜등 항구 지역이었습니다.
독일의 소중한 전략 자산 v-2, 패튼의 미3군과 같은 곳 보다는 전쟁 수행에 더 치명적인 지역 공격.
미영소 당시 인구 영국은 5000만이 될까 말까, 소련은 1억5천만 이상, 미국도 1억3천만 정도.
그 때문에 영국은 상시적 병력 부족에 시달렸던 겁니다. 미국이 북서유럽에 300만 투입할 때 왜 영국은
고작 100만 밖에 투입하지 못했는지, 왜 영국이 겨우 100만 북서유럽에 투입하면서도, 지중해 북아프리카에
육해공 100만 병력을 여전히 남겼는지 생각할 필요 있습니다. 영국군은 44년부터 그리스에서 빨치산 소탕.
사실 수백만 미군을 대서양 건너 퍼나른 것도 영국이 더 많았죠.
당시 세계 최대 여객선 7만톤 8만톤급이었던 퀸메리와 퀸엘리자벳은 미군 병력 만명 단위로 운반.
퀸 메리호 1척이 2차대전 기간 동안 왕복하며 퍼나른 병력은 80만 조금 넘습니다. 퀸 메리와 퀸 엘리자벳 단 2척이 약 160만 병력 수송.
저 거대 여객선이 미국에서 출발해 대서양 건너다 침몰당했다면, 미군 만명 이상이 한꺼번에 떼죽음 당하는 것.
grey ghost 퀸 메리호, 단독으로 2차대전 기간 약 80만 병력 수송.
ruclips.net/video/MsoiKnnUskM/видео.html
패튼 북아프리카에서 특별히 내세울 전투 없습니다.
패튼 아니 미 지상군 전체는 북아프리카에서 사실 마지막 순간 숟가락만 얹은 겁니다.
미공군은 지중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나름 역활했지만.
1943년 5월 튀니스 함락 까지 미 지상군과 해군 별로 한 일 없습니다.
영국 해공군은 몰타 방어 및 지중해 제해권, 영 지상군의 보급 유지와 지원 엄청난 전투치뤘죠.
영국 지상군도 탁월한 롬멜을 상대로 고전했지만, 결국은 승리했습니다. 보급을 유지하는 것도 능력.
롬멜이 보급만 충분했다면 승리?
영국의 보급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면 그런 주장 할 수 없을 것.
추축국 해상보급선은 시칠리에서 북아프리카 겨우 250마일, 영국은 최단 지중해 직항로
지브롤타-몰타-알렉산드리아 3,500km, 전황 악화로 직항로 사용 못할 땐 아프리카 우회한 수만km 지구 차원.
최단 3,500km도 집결 후 출발점인 지브롤타 기준입니다. 실제로는 영국-캐나다-미국에서 출발한 선단임을 고려해야.
영국의 해상보급은 룰루랄라 진행된 것 아니죠.
페데스탈 몰타 호송선단 보듯 어마어마한 자원이 투입된 겁니다.
사실 2차대전 영국의 전쟁 수행, 최전방 전투 투입 아닌 보급 지원 운반에도 엄청난 자원 소모.
대서양의 유보트전에서 유보트 1척 잡기 위해 미국과 영국은 함정과 항공기 합해서 약 100대 단위가 투입.
되니츠 회고록, 전황 악화로 유보트를 철수시켜야 했지만 철수시킬 경우, 대잠전에 투입된 막대한 병력과 자원이
독일 침공군의 전차 항공기 병력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손실을 보면서도 잠수함전 지속했다는 내용.
북아프리카의 독일 이태리 추축군은 영국군에 의해 격멸되었습니다.
미군은 횃불 상륙 때 나타났고, 전투다운 전투 해본 적 없고, 캐서린 패스의 미 기갑부대 데뷰전은 전멸.
미 기갑부대가 캐서린 패스에서 노련한 독일군에게 전멸당할 무렵, 영국8군은 튀니지 거점 마랫 방어선을 뚫었고.
시칠리에서도 패튼은 거의 전투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을 전투하면서 전진했고, 패튼은 지프 타고 손흔들면서 전진.
패튼은 또한 노르망디 상륙에 직접 참여한 적도 없습니다. 상륙이 성공한 이후에 추가 투입되었습니다.
패튼은 기만 유령부대 지휘관으로 도버에 있다, 상륙이 성공한 이후 투입됩니다.
패튼이 일선에서 배제된 이유는 패튼대전차군단 영화에도 나오듯 사병 뺨싸대기 날린 후 징계탓도 있었고.
타이거 전차 손실 통계 소개합니다.
북아프리카-이태리-북서유럽전선 합산한 서방연합국과의 교전 중 손실 550대 + 동부전선 손실 1168대.
노르망디 상륙 이후 즉 북서유럽 전선에서의 타이거 손실은 358대. 전투중 손실은 북서유럽전선 148대/총358대 + 동부전선 499대/총1168대.
즉 타이거 전차는 비전투 손실율이 약 60%에 달할 정도로 전차 : 전차 전투에서 막강한 위력, 하지만 기계적 결함과 유지 보수 측면에서 문제가 많았던.
서부전선 전체에서 당한 타이거 손실 550대는 동부전선-독소전에서 당한 타이거 손실의 약 47%.
( 이런 자료도 있더군요. 노르망디 전역에 투입된 독일 전차 약 2300대에, 그 중에서 5호-판터 + 6호-타이거 합이 약 500대라는 )
( 영국은 종전까지 파이어플라이 약 2,000대 생산, 하지만 노르망디 상륙 때는 생산 초기라 초도 생산분 약 350대 투입했다고 합니다. )
( 만일 영국이 노르망디 전역 당시 17파운드포 장착한 파이어플라이-크롬웰 등 투입하지 않았다면 전역 돌파는 더욱 힘들었을 것. )
자료 인용
Tiger Losses
By Christian Ankerstjerne - Last modified 2022-08-13
1. 손실 원인별 통계
Detailed Group Tiger I Tiger II Total, detailed Total, group Percentage
Combat losses
Aircrafts Aircrafts - 30 1 31 2%
Bombers Aircrafts 11 3 14
Fighter-bomber Aircrafts 4 12 16
Anti-tank gun Anti-tank gun 38 11 49 49 3%
Assault gun Armor 4 4 8
Tank destroyer Armor 2 2 4
Tanks Armor 50 30 80
Artillery Artillery 12 1 13 13 1%
Combat Combat 406 89 495 495 29%
Infantry Infantry 5 6 11 11 1%
Mines Mines 1 - 1 1 0%
Total, combat 533 159 692 692 40%
Non-combat losses
Abandoned Irrecoverable 46 50 96 341 20%
Bogged down Irrecoverable 39 11 50
Immobilized Irrecoverable 101 57 158
Irrecoverable Irrecoverable 35 2 37
Unrepairable Mechanical 127 3 130 260 15%
Mechanical failure Mechanical 75 55 130
Out of fuel Out of fuel 24 33 57 57 3%
Total, non-combat 447 211 658 658 38%
Unknown/other losses
Friendly fire Accidents 11 - 11 18 1%
Road accident Accidents 3 4 7
Blown up Blown up 69 28 97 97 6%
Captured Captured 16 3 19 22 1%
Surrendered Captured 3 - 3
Converted Other 1 - 1 18 1%
Other Other 1 - 1
Out of ammunition Other - 1 1
Stranded Other 7 - 7
Transit Other 8 - 8
Unknown Unknown 139 74 213 213 12%
Total, unknown/other 258 110 368 368 21%
Total 1238 480 1718
While many of the combat losses are not specified, it is clear from the numbers above
that the common myth about Allied aircrafts being the scourge of the Tiger tank has no basis in fact.
2. 전역별 손실 통계
Losses by front ( 전역별 손실, 북아프리카-이태리-동부전선-북서유럽전선 )
Destroyed Tiger I of schwere Panzer-Abteilung 501 at Hunt's Gap in Tunisia.
Destroyed Tiger II of schwere SS-Panzer-Abteilung 101 in Jemappes, Belgium.
Cause Tiger I Tiger II Total
Africa
Combat 6 - 6
Non-combat 25 - 25
Total 31 - 31 ---------------------------------> 엘 알라메인 패배 뒤, 튀니지 방어전에 투입된 타이거 손실이 총 31대.
Italy
Combat 39 - 39
Non-combat 85 - 85
Other/unknown 37 - 37
Total 161 - 161 ---------------------------------> 이태리 전선에서 타이거 손실이 총 161대.
Eastern Front
Combat 402 97 499
Non-combat 273 125 398
Other/unknown 184 87 271
Total 859 309 1168 ------------------------------> 동부전선에서 당한 타이거 손실 총 1168대.
Western Front
Combat 86 62 148
Non-combat 64 86 150
Other/unknown 37 23 60
Total 187 171 358 ----------------------------------> 노르망디 상륙 이후 북서유럽 전선에서 타이거 손실이 총 358대.
ㅎㅎㅎ 애틀랜타랑 조지아주 나오니까 현기 하청업체 아래서 일하던 때가 생각나네요... 알라바마주에서 일했는디
피터즈버그를 보니 디에비엔푸 전투가 생각이 나네요. 그때도 대량의 화약을 폭파시켜 대구경의 분화구가 생겼죠.
이야 셔먼 불도저내요 이야
전쟁은 정치의 가장 폭력적인 형태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 정치를 규정하는 가장 본질적인 틀이 헌법이라고 생각하고요. 링컨은 폭력적인 형태로 정치를 하는 와중에 그 본질을 바꾸어 놓으려고 했었네요. 영화 링컨을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조금은 지루한 세번쩨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작 정도로만 봤었어요. 박태균 교수님의 설명으로 그 당시 링컨의 예리한 판단과 결단이 다시금 느껴지네요. 이 맛에 수요일을 기다립니다.
제너럴셔먼호의 셔먼이 이 사람이었구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링컨이 이렇게 연결되는군요. 영화 재밌게 봤는데 둘 다 ㅋㅋㅋㅋㅋ
어제 본방사수^^ 오늘 유튜브 시청으로 복습^^
드디어 바다로의 행진이 나오는군요
다음주는 또 어찌 기다리나
마직막 원장님이 해주신 법이야기 너무 잘들었습니다
이 영상을 보기전에는 바다로의 진격작전이 서부를 불살라버렸다해서 지금의 서부를 작살냈다는줄알고 와 엄청 멀리서부터 왔구나했는데 이걸 보고 알았슴다. 아 저기구나 하구요 지금의 서부지역 해안선을 따라 진격한건줄로만 알았어요 ㅋㅋㅋ
2차대전 미군 탱크 전차이름 M-3 그렌트 리 M-4 셔먼 전차 남북전쟁때 장군들의 이름 군함 이름이랑 비슷하네 😂
원래 미국 탱크 이름은 장군들 이름이 맞음. 위에서 말씀하신 전차들은 물론 패튼 전차에서 스튜어트, 퍼싱, 셰리던, 에이브람스 전차까지 모두 미 육군 장성들 이름임.
사실 셔먼이나 그랜트 스튜어트 전차 이름은 그걸 미군에게서 공여받은 영국군이 지은 이름들이에요
당시 미군은 그냥 M4탱크, M2탱크라고 불렀어요
⚠️매일 방구석에서 유튜브 쳐보면서 개소리 어그로 댓글 다는 낼모레 마흔 백수 탁용삼한테 관심가져 주지 마시오.
25:40 롤 할떄 포탑을 왜 지키는걸까요? 어차피 억제기 앞에서 막으면 되는데 이거랑 같은 이유라고 보시면 됩니다 ㅋㅋ
남북전쟁에서 양면적인 인물로 나단 베드포드 포레스트에 대한 특별편은 어떨까요?
노예상인으로서 성공한(?) 사람이지만 왜 그가 판 노예들의 도망율이 맞앗는지도 흥미로왔구요.
전쟁기간 그의 활약은 리가 가장 직접 만나보고싶은 남군 장군으로 꼽은 것도 재미있고, 그런 전과를 낸 포래스트가 아이러니하게도 사관학교 출신이 아닌것..
더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가 초대 kkk 그랜드 위져드이었으나 그 활동에 환멸을 가져서 해산명령하고 이후 흑백갈등을 맞는 그의 활동도.. 한번 살펴보면 정말 좋을 인물인 것 같습니다. 물론 박교수님의 그의 성장기나 이후 테네시의 시대상에대한 해설까지 곁들여주신다면 금상첨화겠지요.
더 길게 해주세요..ㅠㅠ 너무 순삭인데...2시간 어때요?
독소전도 해야하는데.....우리나라 6.25전쟁도 해주세요...
또 일주일을 기다려야 하나...
국방티비에서 방송 해주면 좋겟네요...
한주가 또 시작됨
잘 보겠습니다😂😊
남북전쟁은 진짜 "대하드라마"라는 표현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전쟁 속 전투와 전략 전술 및 정치 무기 등에 대하여 집중하고 있지만 많은 영화의 배경이 될 만큼 일반인들 사이의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장장 5년에 걸친 전쟁이니 여기서 다루지 못한 "대하 드라마급" 이야기가 상당히 많을 것 같습니다.
오호 오늘 테쿰세님 출연이구나 가즈아.......
아!윌리엄 테쿰세 셔먼장군 아시는구나! 감사합니다 ^^
수정헌법 13조 (13th amendment) 가 최근에 논란이 된 이유가 노예제도 폐지 라고 하지만 범법자들에 벌을 주는 경우엔 적용이 안된다는 문항이 있습니다. "Neither or..." 후에 나오는게 "except as a punishment for crime..."
몇 년 전에 넷플릭스에 "13" 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나오면서 수감자들의 인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 공부 합니다.
이 영상은 여러번 복습하면서 봐야 할 것 같네요.
미국 학생들에게 교육용으로 보내주고 싶습니다.
셔먼이 움직이니 이제 남북전쟁도 끝을 향해 가는구나!
다음주에 남부의 진짜 악몽이 시작되겠네요.
사흘간 대행군, 드디어 셔먼이다
어느 위인이 말했지요! "의심이 들때는,공겨억!!!!!!!!!"
역시 전쟁에 정치가 먼저 끼어들면 결과는 패전이군요
일주일을 어떻게 기다리나
북군 지휘관들이 물량과 화력 모두 우세인데도 불구하고 당면한 전술적인 이슈들에 급급해서 더 중요한 전략적 목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만약 전략적 목표를 충분히 이해했다면 현장 지휘관들이 망설이거나 시간을 주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결국 더 크고 참혹한 전투를 피할 수 있었겠죠.
그랜트가 위대한 전쟁 영웅인 것은 맞지만 그런 부분을 충분히 현장 지휘관들에게 설명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이 부족하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도 듭니다.
등장 M4셔먼
아마 마지막 에피소드 등에서 정리를 한 번 하시겠지만, 남북전쟁은 61년에서 65년까지 기간 동안 미국 본토 내에서, 다른 외적도 아닌 미국인들끼리 싸운 전쟁인데 무려 60만의 전사자가 발생했습니다. 이와 비교하면 제2차세계대전 1941년 말 참전해서 끝까지 싸워 나온 미군 전사자는 40만, 1차 세계대전은 20만명입니다.
트럼프 시절 미국 방역의 처참한 실패로 기록이 갱신되기 전 까지는 미국이 하나의 큰 사건으로 인해 겪은 촤대 사상자를 보인 전쟁입니다. 이 미국인 전사자 60만명이라는 기록은 COVID 사망자 2년 남짓에 100만명 사망하면서 비로서 깨졌습니다. 어찌 보면 전쟁보다도 무서운 게 무능한 행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역시 셔먼은 테쿰셰 셔먼이란 이름이 더 어울림!!!
히야~ 시간 순삭됐넹~
남북전쟁 끝나고 베트남 전쟁 나왔으면 좋겠네요
공화국이라는 계념해석을 여기서 들을줄이야 단순 정권교체로만 공화국이 바뀌는것으로 알았는데 정확한 정보 알아갑니다
계념x 개념o
22:56 조셉 존스턴 장군을 맥래런 장군과 비교하면 화낼 분들이 많을텐데요,,, ㅋ 남군 최선임 장군이였으며 남북전쟁 발발 시기부터 출전하여 그야말로 5년 내내 단 한번도 쉬지 않고 싸웠고 남북전쟁의 종전을 1865.4.7 애포마톡스에서 로버트 리의 북 버지니아 군이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한 것을 종전 시점으로 잡지만 이후로도 4월 내내 소규모 남군들이 계속 저항했고 그중 맨 마지막으로 부대 단위로서 공식적으로 항복한것은 4.26 노쓰 캐롤라이나 베넷 Benett에서 거의 남은 잔존 병력과 함께 항거하던 존스턴 장군이 셔먼에게 항복한것입니다. 따라서 남북 전쟁을 참전한 모든 장군들 중 아마도 가장 긴 종군을 했다고 봐야 할것입니다. 그의 지휘가 공격적이거나 충동적이지는 않았지만 치밀하고 준비에 철저했으며 공격과 방어 모두 잘해내는 유능한 장군이였습니다. 그의 전임 브래그 장군은 전투 지휘가 형편없어서 오죽하면 롱 스트리트가 진절머리를 내면서 동부로 전출시켜달라고 정부에 애원했을 정도였는데 존스턴이 지휘를 맡으면서 그런 문제가 싹 사라졌습니다. 그가 케네소 산까지 지연전 하는 동안 그냥 철수한것도 아니고 지속적인 여러번의 소규모 전투가 있었고 만약 셔먼이 아닌 다른 서투른 북군 장군이 정면 돌격이나 어설픈 기동을 했다면 대번에 유리한 지형만 골라서 야전 축성을 단단히 구축해놓은 존스턴의 방어망에 산산조각 났을 겁니다. 그러나 셔먼은 전략적 우회기동과 돌파에 다른 어떤 장군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기 때문에 어차피 결전은 애틀란타에서 난다는 신념으로 왠만하면 병력의 피해가 가는 결전을 적극 회피하고 후방 우회 기동을 하면서 존스턴의 방어망을 교란했기 때문에 존스턴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그때마다 빠르게 후방 기동을 하여 다시 유리한 방어점을 잡아서 대치하는 것이 최선의 전술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나마 그랜트가 콜드 하버에서 똑같이 저질렀듯, 그 역시 케네소 산 전투에서 방어망을 정면으로 들이 받는 공격을 시도했는데 역시 예상대로 존스턴의 방어 화망에 걸려 큰 피해만 냈던 것이죠. 후임인 "사자" 존 벨 후드 장군도 용감무쌍하고 능동적인 전투 지휘관임은 분명했고 게티스버그에서 맹활약을 했었지만 그를 바로 지켜봤던 로버트 리가 반대한것은 아마 단순히 결전을 앞두고 지휘관을 바꾸는게 안좋다는 모호한 이유라기 보다는 그 역시 도시 방어전을 준비하면서 애틀란타 방어전 역시 전투의 성격상 존벨 후드 보다는 신중하고 치밀한 존스턴 장군이 적임을 갈파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는 심소령님이 언급 하신 바로 그 문제였는데 실제 이 인사 조치는 바로 실패로 드러나버리는데 피터스버그 보다 인구와 물자 집적도, 병력 면에서 유리했던 애틀란타가 불과 42일(1864.7.20-9.1)의 전투만으로 완전 함락된 것을 보면 북군이 애틀란타 북쪽으로 접근하자마자 선빵을 날려댔던 후드의 공세가 패착이였고 이는 그의 공격적인 전투 지휘 성향이 애틀란타 전투에는 적임이 아니였음을 다시 입증해 버린 셈이 됩니다. 반면 로버트 리는 보급도 시원치 않았던 피터스버그에서 참호전으로 무려 8개월이나 버텨내는데 성공하죠.
남북 전쟁 문서, 특히 전투 지도를 볼때 장군들의 이름, 특히 남군측 장군들 이름의 변화가 꽤 많아서 인상적입니다. 그 중 흥미로운것이 이전 전투에서 여단장 보직, 혹은 무명이 시간이 흐를수록 승진하여 사단장, 군단장으로 바뀌는 것이고 사단장, 군단장 중에서 이름이 갑자기 사라진 경우 앞뒤 자료 보면 중간에 전사했음을 알고 숙연해 지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 초기 전역부터 전쟁 말기 까지 내내 이름이 나와 나중에 좀 반가운 느낌마저 드는 사람이 바로 보우리가드와 조셉 존스턴 장군이고 초고속 승진을 한 경우는 개전때 대위였다가 종전때 군단장이 되어 실제로 북 버지니아 군의 마지막 일선 지휘를 맡았던 존 고든 장군이 눈에 띄입니다. 이 분은 전투때마다 보직이 하나씩 승진되어 마지막 해에는 군단장으로 작전 지도 마다 이름을 볼 수 있죠.
와 ~ 좋은 부연 설명입니다, 감사해요.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에서 우크라의 반격이 정말 중요하네요.. 바이든도 성과가 없으면 다음 대선에서 어려울것같은데
17:20
😱😱😱😱😱😱😱😰😰😰😰😰😰😰😰😰😰😰😅😅😅😅😅😅😅😅😅😅😅😅😅😅
35:07 폭동이라니요. 부당한 징병에 맞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입니다
건강이 중요합니까 역전다방이 중요하지 2시간 가자~~~
당시에는 연임 제한이 없었습니다. 조지 워싱턴이 지지 세력의 청을 뿌리치고 8년 재직한 후에 깨끗하게 물러났고, 그게 일종의 불문율이 되어서 3연임 도전을 불가하게 했습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그 불문율까지 넘어서서 4선 대통령에 올랐습니다. 그러자 미국이 수정헌법을 하나 제정해서 대통령과 부통령 재임 횟수를 최대 2회로 제한했고 그 조항을 트루먼 시기부터 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 여러 번 언급하신 새먼 체이스 재무장관이 대권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는커녕 링컨을 끌어내리려고 막후에서 공작을 했다가 번번이 실패했고 링컨에게도 들통 났으며 끝내 사임했을 정도로, 링컨은 1864년 대선을 치르면서도 정말 고생했습니다.
셔먼이 아무리 유명해도 나는 티거 탈거다 ...
티거 만성부족이라서 4호전차 보급받을듯
철종에서 고종으로 넘어가는 어지러운 시기. 동학 농민반란으로 최제우 처형. 일본 메이지 즉위. 세도정치의 어지러운 시기였네요.
최제우는 체제에 위협이 되는 개혁 사상 자체만으로,
무능-부패-독재 권력에 의해 1864년 순교 처형되었고 동학농민혁명은 30년 뒤인 1894년에 일어났습니다.
----------------------------------------------> 사용하는 단어는 무의식적으로 가치관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 동학 농민에겐 반란이라는 단어를 배정하고 + 메이지에게 즉위, 단순한 우연이길.
세도정치는 그저 조금 어지러운 정도가 아니었고, 동학 농민의 외침은 정당하기에 반란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동학농민전쟁 또는 동학농민혁명은 사실상 대한민국 민주공화정의 시발점일 수 있습니다.
동학군의 외침은 -------------------------> 반봉건, 오늘날 용어로 바꾸면 반독재-민주화 운동.
----------------------------------------------------> 반외세, 한반도를 침략하려던 외세로 부터 독립을 유지하려던 투쟁.
----------------------------------------------------> 동학이 설치한 집강소는 왕정의 일방적 통치를 견제하는 국민 참여 통치 기구.
최근 동학농민혁명과 4.19 기록물이 세계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 대한민국은 1위 독일, 2위 영국의 뒤를 이어 3위 기록 유산 보유국이 되었습니다.
전세계가 동학의 반봉건-반독재-민주화 투쟁과 반외세-독립 투쟁을 공식 인정했기에, 반란이라는 폄하 의미 포함된 단어 사용은 바람직하지 않은.
특히 동학군 진압을 외세에 부탁한 당시 조선 정부-국왕 및
외세인 일본군과 함께 동학군을 진압한 조선군은 과연 국가-정부-군이 도대체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치명적 의문을 가지게 합니다.
-------------------------------------------> 무능-부패-독재 권력이 생존을 위해 국민들을 적으로 돌리는 저런 행위는 국민을 짓밟는 폭정으로 반드시 타도되어야 하는.
1600년대 중반 잉글랜드, 공화정 아닌 왕정 어둠이 판치던 시절에도,
국왕이 의회와 티격태격하다 순간 욱해서 의회 해산 및 세금 좀 멋대로 매겼다고 건수 잡혀,
-------------------------------------------------------------------------------------------------------------------------------------------------> 국왕이 반역죄로 도끼로 목 잘려 처형된 나라도.
임진왜란 선조 + 호란 때 인조 + 동학농민군 진압 외세에 부탁한 고종과 조정
+ 한국전쟁 초 이기고 있다고 거짓 라디오 방송 틀어 놓고 한강다리 끊고 튄 초대 대통령, 사실 운 무지 무지 좋았던 겁니다.
-----------------------------------------------------------------------------------------------------------------------------> 잉글랜드였다면 모조리 다 처형되고 새로운 국가 건설 되었을 것.
만일 외세의 개입이 없었다면,
아마도 동학농민전쟁은 우리 자력으로 공화정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 되었을 겁니다.
미래 언젠가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의 첫 걸음으로 동학농민혁명이 수록될 날이 올겁니다. 단지 시간 문제.
헌법 개정만으로 다른 공화국이된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교수님 내용의 정정이 필요해 보입니다
난 솔직히 우리나라 개헌 좀 해서 법 좀 바꿨으면 좋겠네...
법은 너무 70-80년대인데 현시대를 못 따라감
영화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를 보면 남군의 부상병들이 아틀란트 역앞에 누워 있는 거 보고 남부에서
" 엥! 저렇게 사람이 많았으면 우리가 이겼지 왜 지냐!"
했답니다. 하하하.
영화는 현실의 참혹함을 100분의 1도 못담는거 같아요 사실 그렇게 비참한건 보고싶지 않기도 해요...
내 수준에서 말하면 슬램덩크 팀이다
강백호 허준
서태웅 심소령
송태섭 샤를님
정대만 박태환 교수님
채치수 채박사님
미드는... 총살감이내..
영화 링컨을 보면서 미국의 정치적 유산에 대해 정말 부럽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왜 링컨은 노예제도를 없애기 위해서 노력했는지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는데...
오늘 이 편으로 그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링컨 역시 도덕적인 판단에 일생을 건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명분을 얻기 위한 하나의 큰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정치적 명분이라는 것이 속물적이고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링컨을 마치 성인처럼 알고 살았는데, 그 역시 정치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네요.
생각해 보니 예전에 미국에서도 "남과 북"(더티댄싱으로 유명한 패트릭 스웨이지 주연) 이라는 미국판 대하드라마를 만들어 방영한 적이 있지요, 국내에도 수입되어 방영했었구요.
주제곡도 참 좋았었죠.
셔먼 장군이 자신의 보급로를 파괴하면서 자급자족하며 진군하는 모습에서 왜 무다구치 렌야가 보이는걸까...........
사실 '보급은 적에게서 취하는 것이다' 라는 렌야 장군님의 말씀은 그 자체론 맞는 말임. 맞는 말이긴 한데....
@@위장염 적의 보급품을 탈취하는 건 정상이지만 기본적인 보급이 이루어지면서 추가적으로 노획하는게 되어야지 노획이 메인이 되면 ㅋㅋㅋ;;
셔먼은 치밀하게 계획해서 갔고 무타구치는 그냥 뜯어 먹으면서 가라한 차이인듯 ㅋㅋㅋ
미드는 정치군인인가???
박태균 원장님.. . 수정헌법 설명하시는데, 우리나라가 왜 그렇게 개헌을 많이 했는지 알면서도 알려주시지 못하는 괴로움... .ㅋㅋㅋ 독재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때문이다 라는 걸 다 알고 있지만 채널이 채널이니 만큼 속시원하게 얘기 못하심... .ㅋㅋㅋ
인간적으로 1시간은 합시다 쫌!!!😢
Pd야 일좀 하자
전쟁과 전투가 정치가 되면 어디에서나 폭망임.
전후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단편적 1차원적으로 사고하면서 인권코스프레하는 인간들의 비난이 두려워서 결국 최악의 선택을 한 사례가 남북전쟁때도 있었구만
역시 학살 방화 약탈은 전쟁의 진리.
으따 우덜이 한거슨 훌륭한 전략이고
느들이 한건 '전쟁범죄'랑께
드디어 남부 인종차별주의자들이 거품물고 싫어하는 그분이 뜨셨네
BRING THE GOOD OL' BUGLE BOYS WE'LL SING ANOTHER SONG
SING IT WITH A SPIRIT THAT WILL START THE WORLD ALONG
SING IT AS WE USED TO SING IT 50,000 STRONG
WHILE WE WERE MARCHING THROUGH GEORGIA
으따 그라제 인종차별은 범죄고 우덜 학살 방화 약탈은 즌략이랑께!
으따 그라제 백년전 남부것들은 상종못할 인종차별주의자고 우구라 네오낙지는 자유민주주의랑께!
대한민국 대통령제 제일 큰 문제는 개인의 목적을 위해 대통령을 할려고 하는게 아닐까?
박원장님 발언권을 좀 보호해주세요 😢😢 자주 인터셉터 당하시는거 같아요
관심없는 남북전쟁 언제까지 하는지요?
전 관심 있는데요?
남북전쟁 너무 오래합니다. 빨리 태평양전쟁AS나 독소전쟁, 중일전쟁 합시다요 제발
남북전쟁이 이렇게 오래할 소재인가...
28:55 ㅋㅋㅋㅋㅋㅋ
애틀란타? 코카콜라 보틀링의 본사가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