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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썰이주석
Добавлен 10 май 2020
육해공,해병대... 대한민국의 군복을 입었던 모든 예비역들의 현역 시절 에피소드를 가지고... 잠깐 웃을 수 있는 즐거운 방송을 지향합니다. 적당한 썰은 양념입니다만 말도 안 되는 뻥은 지양합니다. 여러분의 적극적인 사연 제보를 기다립니다. ^^
해병대 마크의 비밀
해병대 마크가 2종류인 이유... 장교는 은메달, 사병은 금메달? 다른 집은 애들이 속을 썩인다는데 우리집은...? 해병대 마크의 비밀
#해병대 마크 #해병대는 역시 병이야 #해병대 앵카
1.해병대 마크는 장교용과 사병용이 다르다
2.해병대 마크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3.장교용과 사병용이 다른 이유
4.다른 집은 애들이 속을 썩인다는데 요즘 우리집은…
5.해병의 정체성은?
#해병대 마크 #해병대는 역시 병이야 #해병대 앵카
1.해병대 마크는 장교용과 사병용이 다르다
2.해병대 마크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3.장교용과 사병용이 다른 이유
4.다른 집은 애들이 속을 썩인다는데 요즘 우리집은…
5.해병의 정체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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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해병대 신병 수료식에는 70세 동기들이 참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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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해병대 신병 수료식엔 70세 동기들이 참석한다. 1302기와 302기가 함께 하는 수료식… 75년 해병대 역사에 새로운 전통이 시작되다. #해병대 신병수료식 #해병대 1308기 #해병대 1309기 1.해병대 신병 기수 어느덧 1300기 돌파 2.1000기 선임이 1000기 후임 해병들을 축하하는 자리 3.75년 해병대 역사에 새로운 전통이 시작되다
백령도 해병대 역사 총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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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파드 기지 #동키부대 #8240부대 백령도와 해병대의 인연… 백령도 최초의 부대는? 1951년 41중대가 6여단이 되기까지의 전 과정... 백령도 해병대 역사 총정리
김포반도의 해병대 역사 총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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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강화 #서부전선 서울을 3번 빼앗길 순 없다. 해병대를 서부전선으로…! 해병대와 김포의 인연. 여단에 수색대대가? 해병대 2사단의 철책 100km는 육군 4개 사단과 같다. 1.김포반도 최초의 해병대는 51년 2월의 독립5대대 2.그래도 이승만 대통령은 서부전선이 불안했다 3.서울을 3번 빼앗길 수 없다는 대통령은 4.중동부전선의 해병대 1연대를 서부전선에 배치하도록 미8군사령관에게 요청했다 5.장단지구에 증강된 해병대 1연대 6.계속된 증강을 통해 최종 1사단을 창설하다 7.1사단의 포항 이동에 따라 김포에는 1개 연대가 남고 8.그 연대는 제1임시여단에 배속되었다 9.포항1사단에서 1년 주기로 연대를 교체 배속시키던 시절 10.월남전 참전에 따라 김포에는 5여단이 11.5여단은 또 2여단으...
김포 애기봉 북파공작원의 마지막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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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파공작원 #김포 애기봉 #애기봉 점등식 북파되는 순간 소주 두 잔… 김포 애기봉에서 출발한 그의 마지막 모습… 북파와 남파가 겹치던 60년대 그때 거기선 무슨일이… 애기봉 철탑의 역사 등 1.애기봉에서 복무한 해병 178기의 사연 2.애기봉에서 본 북파공작원의 마지막 모습은 3.또 무장공비가 남파되던 그 지역 4.애기봉의 전설은 5.애기봉 비석과 박정희 대통령 6.애기봉 철탑의 역사 등
월남전 미공개 사진 3탄. 북한군심리전, 그 결정적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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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물풍선 #심리전 #전단살포 월남전 미공개 사진 3탄. 북한군의 정글 속 심리전 그 결정적 증거는… 확성기 방송 원점을 타격하라! 베리아 상륙작전 및 월남전 전시 탈영병, 공개재판 사형판결 이후의 사연 등... 1.월남전 미공개 사진 3탄 2.월남전 청룡부대 사진병의 임무는 3.북한군의 정글 속 심리전, 그 결정적 증거는 4.특이했던 전단 살포 방법 5.확성기 방송의 원점을 타격하라 6.한국인으로 위장한 북한군 7.그를 색출하기 위한 청룡부대의 조치는 8.대한민국 해병대 최초의 해외 상륙작전 베리아 9.월남전 전시 탈영병은 공개재판 및 사형판결 후 어디로?
1973년 해병대 무장탈영병의 참회록... 자살하기 위해 발가락으로 방아쇠를 눌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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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탈영병 #33대대 #김포 고촌 천둥고개 1973년 해병대 김포 2여단 무장 탈영병의 참회록… 자살하기 위해 발가락으로 방아쇠를 눌렀으나… 3일간의 쫒고 쫒기는 추격전 전과정 그리고 50여년간의 참회... 1.1973년 당시 해병대 김포 2여단의 분위기는 2.그가 무장탈영을 하게 된 이유는 3.도피 기간 중 수색부대의 결정적 실수는 4.도피 기간 중 탈영병의 모습 5.자살하기 위해 발가락으로 방아쇠를 눌렀으나 실패한 이유 6.쫒고 쫒기는 추격전 장면을 통해 50여년 전 김포 여단의 모습을 그려본다 7.전역후 50여년간 이어지는 참회 8.당시 고생한 전우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월남전 미공개 사진 2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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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고노이 #베트콩 #월남전 물속에서 빨대 문 베트콩은 어떻게 생포할까? 도자로 땅굴을 갈아 엎으면 일어나는 일... 포로 100% 활용법. 크레모아에 맞고 나면? 1.월남전 해병대 청룡부대 사진병의 미공개 사진들 2.베트콩 포로와 관련한 각종 사진과 사연들 3.승룡12-1 고노이 작전의 모습들 4.물속에서 빨대 물고 숨을 쉬는 베트콩을 생포하는 법 5.불도자로 땅을 갈아 엎으면 땅굴속의 적은 어떻게 될까? 6.포로 활용법 7.크레모아에 맞은 적은 8.지금까지 한번도 공개된 적 없는 사진들을 공개한다
월남전 미공개 사진들... 채명신 장군이 해병대 위장복을 입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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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신 장군 #청룡 위장복 #월남전 최초 공개… 월남전 미공개 사진들… 청룡부대 사진병의 기록… 채명신 장군이 해병대 위장복을 입은 이유는? 월남전 청룡의 기기묘묘한 위장복 패션… 1.월남전 참전 사진병의 기록 2.미공개 사진을 최초로 공개한다 3.채명신 장군이 해병대 위장복을 입은 이유는 4.해병대 위장복은 월남 최고의 패션이었다 5.전투현장 해병대원들의 기막힌 위장복 패션들 6.복장군기는 논하지 말라
미스코리아 출신까지 참가한 미스해병 선발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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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코리아 #미스해병 #Miss USMC 미스코리아 출신까지 참가한 미스해병 선발대회... 당대 최고의 미녀들 중, 미스해병은 성신여고 출신 18세 김미자. 당시의 동영상 및 기사... 1.해병대 창설 10주년 기념 미스해병 선발대회 2.대회에는 전년도 미스코리아 출신까지 몰려들었다 3.미스해병에 선발된 3인은 자동으로 미스코리아 본선에 직행했다 4.이는 미스해병 대회가 미스코리아에 준하는 대회였음을 의미한다 5.미스해병 선발이 1959년 딱 1회만 개최된 이유 6.당시 촬영된 동영상 및 신문의 보도내용을 통해 50년대말 해병대의 모습을 본다
해병대 6호차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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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6호차 #해병대 지프차 #해병대 지휘관 해병대 6호차의 비밀… 해병대 지휘관은 1호차를 안 탄다. 해병대 찝차만의 특징은? 그 정신 만큼은 영원하라. 1.해병대 지휘관 찝차는 6호차이다 2.대대장부터 사령관까지 모두가 6호차 3.그럼 1호차는 누가 타는가? 4.해병대 지프차 번호 체계는? 5.이런 방식은 언제 어디에서 유래됐는가? 6.해병대 차량 번호판에 얽힌 사연
해병대 준위의 전설, 북한군 포로가 해병대 준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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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준위 #털보준위 #북한군 포로 해병대 전설의 준위들... 포로에서 해병대 준위까지. 해병대는 왜 북한군 포로를 해병으로 만들었을까? 해병대 준위의 역사... 1.해병대 전설의 준위 3명을 소개한다 2.인민군 1개 소대를 이끌고 귀순했다는 털보준위의 정체는 3.또 인민군 포로에서 해병대 준위가 된 사람 4.그리고 육군상사에서 해병대 준위가 된 사람까지... 5.해병대가 북한군 포로를 수용소로 보내지 않고 해병으로 만든 이유 6.해병대 준사관 1기는 언제?
1984년 망치부대 요원 2명의 연쇄 자살사건과 해병대의 명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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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북파응징부대인 해병대 망치부대 요원 2명의 연쇄 자살사건... 최근 나는 왜 해병대의 명예를 생각할까? 당시 현장을 지켜본 재미교포 예비역의 한탄 #해병대 망치부대 #대북응징부대 #북파부대 1.1984년 72대대 5중대의 망치부대는 2.병장이 먼저 자살하다 3.그의 자살후 장례조차 소홀했던 당시 분위기는... 4.하지만 그의 명예는 왜 생각 못 했을까? 5.며칠후 바로 뒤따라서 자살을 한 그의 소대선임하사 6.그 역시 망치부대 팀장이었다 7.사단장 이하 전 지휘관이 모인 가운데 그가 죽기전 마지막으로 한 소리는 8.망치부대 팀장은 죽은 팀원의 명예를 지켜주고 싶었다 9.그럼 최근의 해병대 사태와 관련한 해병대의 명예는 10.재미교포 예비역이 생각하는 해병대의 명예란?
해병대 독립41중대, 대동강 하구 남포 앞바다를 봉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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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도서부대 #진남포 #견습사관 해병대 독립41중대, 대동강 하구 남포 앞바다를 봉쇄하다. 석도, 초도 그리고 백령도엔 언제 해병대가? 독립 41~43중대 등 한국전쟁 기간 해병대 전투부대는…? 해간 12기 93세 노병의 기억 1.한국전쟁 기간 중 서해 석도, 초도, 백령도 등에선 무슨 일이 2.해병대가 도서부대를 편성한 이유 3.동해와 서해 전략도서에 대한 해병대의 상륙 4.정전 이후 도서부대를 모체로 2연대 창설 5.지금의 6여단에 이르기까지의 백령도 해병대 역사 6.한국전쟁 중 한때 존재했던 해병대의 견습사관 제도 등
해병학교 및 해병대 간부후보생 해간 역사 총정리... 위조 대학졸업장으로 75%가 퇴교당한 기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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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학교 #해병대사관후보생 #해병대간부후보생 해병학교 및 해병간부후보생 해간 역사 총정리... 위조 대학졸업장으로 75%가 퇴교당한 기수 등... 1.해병대 간부후보생 해간 1기는 언제 어떤 교육을 받았나? 2.초창기 육군 위탁교육을 받은 기수는 몇기까지? 3.해병학교 설립후 해병대 자체 교육기수는 몇기부터? 4.해병학교 마지막 기수는...? 5.해병대 초창기 간부후보생의 역사 총정
1989년 강화 교동도에서 북으로 넘어간다며 해병대 OP를 찾아온 북파부대 요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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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강화 교동도에서 북으로 넘어간다며 해병대 OP를 찾아온 북파부대 요원들...
해군첩보부대의 도전을 서해 이작도 해병들은 어떻게 받아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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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첩보부대의 도전을 서해 이작도 해병들은 어떻게 받아줬을까?
해뱅이고 공수고 복싱한 사람한탠 안됨
월남 주월사 소속으로 MIG요원은 정보,첩보활동 하셨다함~~
나훈아 예기는 박일남씨의 허풍일 겁니다..나훈아는 '68년 중반이 데뷔년도라 인지도가 없을 때 입니다. 나훈아 인터넷 프로필상으로 1947년생으로 되어있으나 나이가 어려 얕보일까봐 나이를 올렸다는설과 남진과의 라이벌 관계 때문에 나이를 올렸다는 설이 있는데..호적상으로 1951년생으로 만17세이니까 군대 갈 나이가 되지 않았지요.. 나훈아는 5년후인 '73년7월에 공군에 입대했지요... 그리고 남진은 204기이고 진송남 태원 박일남은 205기 였지요.. 남진 진송남 입대 동기 아닙니다. '69년6월에 남진 진송남 박일남 태원 이명진 등 가수들이 사병신분으로 영외에서 숙식하면서 연예활동하고 있다고 신문에 나고 떠들썩할 때 서수남은 언급도 없었는데 연예대 사병이었다고 하는게 이상하네요..월남 차출도 없었고요. 박일남씨는 야로가 았는 사람입니다..월남간다고 같이 훈련 받았으면서 최종적으로 혼자 빠졌지요..사연은 ?? 당시 일반사병들은 월남에 파병되어 죽어나가기도 하는 마당인데 일부 해병대 소속 연예인들이 군인복무규정을 어기고 영외 연예활동하고 있다고 여론이 극도로 안 좋아지다보니 해병대 당국에서 연예대로 입대하면 군 연예대 행사나 군 관계 행사에 참여하고 나머지 시간은 영외 연예활동을 보장한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여론 무마 를 위해 월남으로 파병 할 수 밖에 없었지요..더불어 유명 연예인 사병 월남파병 선전효과를 노렸을 수도 있고요..
오우~ 진해 해병대사령부와 해병진해훈련소가 내려다 보이는 진해 천자봉!! 그리고 해*병*혼!!! 진해에서 동쪽산 꼭대기를 보면 해병혼의 글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2024년 지금도 여전히 해병혼은 해병의 탄생지 진해의 천자봉에서 영원히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해병!! 그대가 해병이라면 평생 최고의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된다. 조국을 위해 찬란한 공을 세운 해병! 해병대는 가장 충성스런 위대한 군대! 해병대는 영원히 영광있으라!
87년도 가납리..추억의 젊은시절 그때가 생각난다
저도 해군 의무병으로 95년 입대해서 후반기 10주 받고 김포2사단 1연대1대대3중대 본부중대에서 근무했네요 의무하사님들은 제가 근무당시엔 대대의무실에서 계시다 제대하신걸로 알고요 저같은 병들은 거의 중대파견가서 모든 훈련을 같이 받았습니다. 참 힘들었던 기억은 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재밌던 기억도 많았습니다. 근무할때는 해병기수도 754기 받아서 근무했었네요 공감가는 영상이라 댓글 답니다.
ㅎ~~~~추억이죠.ㅎ
필승!72대.6중대.
나도해병대인데해병몇기요
필123씅. 해병대 하후 263기입니다. 오늘 구독했습니다. 선배님의 옛 군썰 시간가는줄 모르고 재밌고 과거의 해병대에 대해 잘 알게 되서 좋고 유머일번지 동작그만 분위기같아서 힐링되고 편안합니다! 그럼 수고하시고 건승 하십시오! 필123씅! 🙇🏻♂️
당시 그 곳에서 군인신분으로 구조활동했습니다. 운영자님의 내용은 사실과 많이 다릅니다. 당시 관할 경찰서, 파출소에 재직했던 해병출신 분들을 찾아 사실확인을 추가로 하시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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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기수 병386기 79년 8월 15일 입대해서 붙은 815기수 박정희 사망, 부마사태, 광주518 근대사의 격랑기를 모두 군대에서 보낸 기수입니다
역시 국민을 섬기는 정규군 특수 국가전략 기동부대 해병대 자랑스럽습니다!
특전사 위인 전두환(육사)👎 해병대 위인 이인호(해사)👍 (아들도 해병장교(1986:소위))
707특임대에 의해 저격사살 되었으며 해당저격수는 명령을 따랐고 이에 고통을 호소하다 조기전역 하였습니다. 해당 작전엔 2개 소대병력이투입되었던걸로 압니다. -단결-
저는해병5여단9중대3소대에서근무해어는데.그때만해도너무나무서위서요신병대소대근무하면으남에는공
서중사의 무장탈영 원인으로 부인의 단순가출로 설명하셨는데 그건 좀 부족하다고 보입니다. 당시 해안방어의 브라보지역은 경주근처라 출퇴근이 불가능했고, 서중사가 근무했던 흥해중대는 알파 지역에 속했으나 매일 출퇴근하기엔 임무의 일정상 불가능했으나 기혼자의 경우 자주 귀가를 시켜줬어야 함에도 3개월에 한번 쓸 수 있는 연가를 눈치보면서 사용하여 1박 2일정도 겨우 다녀 올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서중사가 버스를 청와대로 몰고 갈려고 했던 이유는 부인 가출 후 수소문 끝에 거의 집에 못오는 동안에 벌어진 부인의 불륜으로 불륜남과 동반 가출하면서 벌어진 사건으로, 이 사건 이후에 7연대가 교대하였을때는 기혼자의 경우 훈령으론 주 1회 퇴근이었으나 대부분 한달에 1~2회를 눈치보면서 귀가하는 것으로 기혼자들이 그나마 만족하면서 서중사 덕분에 이렇게라도 됐다면서 명복을 빌던 생각이 납니다.
80년대초 해병대를 보면 급식이나 보급품이 정말 한심한 수준이였음 강화에 작전 나가서 해병대 부대에서 한동안 밥을 먹어야 했는데 한끼 먹고는 다시는 먹지 않음 강화도 일대 작은 섬에서 해병대 들과 일화를 여기서 이야기 하면 욕먹을까 패스 일반 해병들은 해안경계근무만 주로 하는데 무슨 전투력이 어쩌고 하는것도 우스웠음 일반 해병들이 밖에 나와서는 마치 해병특수수색대 인척 한다는게 팩트 해병대 부심을 부린다고 할수록 다른 사람들에게 오히려 배척 당함. 제발 김흥국이처럼 해병대 망신 시키는 짓은 하지 맙시다.
소설을 쓰고 있네요.
우연히 와서 듣고 갑니다. 신기하네요 후임들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고 선임들에게만 대들었다. 나름대로 색깔이 있는 해병인듯.
한강기동대 몇달전 전역했슴다.. 1여단직할
군썰 이주석 예비역 해병대위님! 유튜브방송 즐겨 듣고있습니다 ~~~ 저는 해군하후17기 위생하사로 해병하교 83기 병233기와 비슷한 시기에 입대한 위생사로 해병부서에서만 4년여를 근무하다 전역했습다 ~~~ 이대위님의 썰 100%공감합니다 해병병영에서 위생하사로 위생병으로 근무하며 재미있는 추억도 많았지만 아프고 상하고 고뇌했던 일들 일일이 열거 안 해도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70중반인 나이에도 해병이 더 가깝고 익숙한걸 어찌 하오리까 ~~~ 해병전우회에 속함을 원한다면 응해 줘야 타당하지 않을까요~~~ 해병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법무 의무 군종 등등 자체병과를 둬야 완전체 해병이 되지 않을까 사료됩니다 ~~~
잘 챙겨두었다가 아직도 보관하고 있습니다.해병은 군번이아니고 기수라고했던기억이 있습니다.물론 한번도 걸어보지 않았구요. 벌써 35년된 일이네요
1사단 항공대대 앵그리코중대 632기 입니다. 팀스프리트 훈련시 미군과 함께 훈련했으며 상륙전시 꼭 필요한 부대입니다, 통신병이 많이 있었으며 규모는 중대급 이었읍니다... 1사단 항공함포통제중대 앵그리코중대 다루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필승
89년초 공수가서 선임한테 들은예긴데 그때 선착순시킨 지역대장 타군으로 전출갔다고 들었어요 하여튼 군대 선착순은 없어져야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공수교육단부터 심심하면 선착순 정말 치가떨리네요 지금은 좀없어졌을레나~~ 아무쪼록 같이고생하는 처지에 마주치면 고생한다는 말한마디 위로라도 해주는 그런 군대가되었어면 좋겠네요 특전사 해병대 화이팅♡ 단~결
89년 5공수여단 병출신입니다 집이 포항 흥해바닷가쪽이라 해병이나 동네형들 그리고친구들 50프로정도가 해병방위들 출신이라서 휴가나오면 군복있고 같이 술얻어먹고 잘지냈는데 저희는 인천 부평쪽이라 해병과 마주칠일은 잘없지만 김포1여단쪽은 해병과 시비가좀있었던걸로 알아요 지나고나서보면 다같이 고생하는 같은군인인데 ~~~ 제기억으로 휴가때 전라도 광주쪽애듵은 사복입고 휴가간거로 기억하네요 제 아들놈이 3년전에 김포 해병대 전역했는데 아무튼 해병대 화이팅입니다~~
해병대위답게. 좀점잖아봐. 사병도아니고
내 국민학교 동창놈도...해병대갔는데...형친구와 동기라...나는 형친구 한테 존대말쓰는데..이놈은 해병대 동기라고 야자트고 지내더만...
오른쪽것은67년도에도.뒤집어있을수도있던.위장복이었고.중대보급반창고에.60벌쯤.있던걸..내가보급병이라서.몰래갖고.휴가를나와서.입고다닌기억이있네요
해병대는 원래 상병제대 였지(24개월 근무..연예인들이 해병대지원한 이유중 하나)..1968년 1월 북한 124군 청와대 습격사건으로 복무기간이 30개월 연장되는 바람에 ..1개기수가 군번순으로 제대시키는 바람에 중대에 병장들이 바글바글....난 221기인데 .집합하면 쫄병(이병)은 나혼자고 전부 병장이었음...병장 기수별로 줄섬.그땐 정말 살벌했슴...내가 일병 고참될때까지..월남갔다온 병장들만 바글바글 했슴...사단에서 1년근무후 월남참전 ..고참 군화 훔쳐신고 갔더니..중대에서 난리난닸고...동원훈련 받으로 온 고참이 말해서 알았지만...
86 지상전 87 상륙전 두번 T S 참가 86년때 2연대장님 이덕길 연대장님 엊그제 같은데...
금강산 맞은 편 수색대대에서 85년 군번 근무했음ㅡ 86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살벌하던 시기에 선임하사와 작전 들어가고 싶었지 소위 중위와는 들어 가기 싫었다 ㅡ 육군 하사 이하사
35년 전 1사단 사단본부 본부중대 근무 할 때 사단장 보다 군수참모 보좌관이 선임 이었다. 사단장 소장 군수참모 대령 군수보좌관 소령 자칭,타칭 국방부 최고참 소령 이라고 했음. 22대대 출신 이라 중대장 이 높아 보였는데 사단본부 전출 가니 중령도 개쫄로 보임 G4 는 237연대장 다음으로 고참 G4 이후 연대장 보직 코스 해사2 연대장,갑종1명 국방부,해간1명 6여단장 으로 보냄~ 웃긴 건 갑종출신 대령은 인사기록철 봤는데 육군 소위로 임관후 어떻게 해병대로 왔는지 의문임 거기다 대령 까지 진급 한 것이 대단~ 예하부대 근무 할 때 중대장 2사7기 마지막 기수 인데 준장 진급 해서 부사령관 됐음~
숱하게 들었던 민사작전의 예를 보는듯 합니다. 돌에 맞고 싸리비로 거리를 쓰는 등, 이런거 보면 진압작전에서 시위대에 대한 접근방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드러납니다. 전에 쌍용자동차 지붕에 올라간 경찰 병력이 지붕 위의 오갈데 없는 종업원들을 몽둥이로 패죽이듯 하는거 보고 참 대가리 안돌아가는구나 느꼈지요. 카메라가 사방에 있는데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주기도 하는 꾸며낸 연출도 못하는가 싶어 안타까웠던 기억...
제가 1980년정도에 경의선 그 당시 기차죠 육군 헌병도 검문한다고 기차에 걸어 다니고도 했었죠 문산발 서울행 기차를 초등학교때 그당시는 국믹학교 udt인지 udu인지 기억이 가물한데 udt가 맞는듯 빨간 명찰 달고 해병 팔각모 쓰고 눈이 안 보이게 눌러 쓰고 앉아 있던 그 해병 1명 있는 기차 칸에는 육군 군복 입은 병사는 단 한명도 없었죠 다른 옆칸에는 떼로 휴가 나온 육군 병사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지만 그 해병 1명 탄 칸에는 빈자리도 남아 돌지만 육군 군복 입은 병사들은 한명도 없었죠 나는 그 당시는 나이 어려서 이유를 몰랐고 단지 외모어서 풍기는 카리스마는 느낄수 있었죠 군 입대할 나이되니깐 그 당시 왜 그랬는지 알게 되었죠 난 93년 군번 육군 8사단 81mm 박격포 출신입니다
잘보고갑니다 공식.비공식 군조직에서 활동은 있을수있겠지요 서류상 과 현장의 차이점 .첩보부대가 활동하는중이니까
91년 한여름 김포 원보루 개뻘(근처에 소농장이 많아 시궁창)해안에서 IBS훈련(육상2주, 해상2주)을 받은 해안공병입니다. 보트15대로 강화도까지 해안 찍고 선착순, 1등, 3등을 공병이 차지하니, 보병 대대장(83)이 열받아 상으로 준 축구공을 던진 기억이 ... ... ^^* 그 당시 보병은 좀 기합이 빠진 ... ... 우리 부대(공병대대 해안**중대)는 구타가 심해 살벌했는데... .... (그 당시 저는 병장) 하물며, 우리 중대는 공병1중대와도 비교 당해 엄청 맞았다. 중대 병이 23명 정도 밖에 안됐는데... ... 공병1중대와는 임무부터 다르다. 우리 중대 아래 옆 시멘트창고에 시멘트 천(1,000) 포가 들어오면 그 날은 죽은 거다. 🤔 그 시절 89~91년 우리 중대의 기재고(창고)에는 무시무시한 쟝글도끼, 널린 건 오파운드(곡괭이자루), 다 다른 삽자루, 오함마 망치, 미장칼, 냉가고데 ... .... 등등 종류가 엄청 많음, 90년 초 분임토의실에서 선임하사의 요즘 애들은 빠졌다는 한마디에 중대는 피바다... ... 오파운드는 선임하사한테도 맞아 봤음. 선임들이 하는말이 우리 중대는 화성 수색대 얘들보다 군기가 써다이다. 제 맏 선임은 어깨뼈가 부러졌고, 저는 개버리판으로 광대뼈를 맞아 조금 들어갔다. 휴가나오면 얼굴에 상처가 많으니까, 어머님께서 너 그려다 맞아죽겠다고해서 태평양한가운데 떨어트려도 살아나올 자신있다고 말했던 기억이... ...
해병구호는 충성이었다 년도는 1977년10월전역까지도했습니다 근무지는 묵호헌병대 기수 285기 늦게나마 증언합니다 간혹 헌병대출입구에서는 멋으로 하는지는몰라도(오가는상관들한테) 충성이아니고 충~~~으로 마무리했슴 참고하시기바랍니다
89년도 한여름 김해공병학교 폭파반(8주) 1499기 육군 50명, 해병 2명 육군 동기들은 경상도 쪽 대학 재학 중 입대한 애들로 덩치도 크고 1,2살 많음.저랑 해병동기랑 둘이서 50명을 상대로 4주 동안 반말 못하게 함. 개기면 새벽 2, 3시에 깨워서 팸. 윗 기수들이 다 실무로 간 뒤부터는 서로 반말하고 친해짐. ^^*
필씅! 넘재미나요ㅋㅋ
억울하게 사형 당한 대통령 경호실장 곽영주와 내무부장관 최인규가 지하에서 통곡한다. 2편 그런데 이게 왠일이니, 해병대에 대한 극찬이 쏟아졌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해병대 병사들의 자발적 의지로 데모진압한 것이라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그는 병사들에게 최고의 대우와 최고의 급식을 제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후 한달에 한번 먹기도 힘든 돼지고기 찌개와 닭고기 찌개가 매일같이 나왔다. 비록 지나간 낡은 영화이지만 저녁마다 영화상영이 이루어졌다. 또한 해병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들어 주겠다고 말했다. 부마 사태와 5.18 광주사태 문제로 나는 과거사 진상 위원회에 불려가 증언한 바가 있다. 당시 계엄사령관인 별 4개도 불려와 함께 조사 받았다. 당시 군 법규정은 현역군인이며 근무자에게 대항하면 지휘고하룰 막론하고 즉각 사살하라는 군 복무 규정이 있다. 계엄군은 전시법 적용받는 전시군인이다. 근무자는 왕이다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학생 데모대가 우리의 소중한 학생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하지만 학생이든 뭐든 현역 군인을 공격하는 자는 즉석에서 처형하는게 옳바른 법 집행이었다. 군사정부의 언론 통제로 광주 사태가 베일에 싸여 계엄군인 나도 몰랐는데 폭도들이 무기고와 탄약을 강도질한 곳은 군대 무기고가 아니라, 경찰서 예비군 무기고와 탄약고가 털린 것이라고 허화평 장군이 증언헤 주어 알게 되었다. 예비군은 군인이 아니기에 경찰에서 예비군 무기와 탄약을 관리하고 있었다. 전남 경찰서 총책임자인 안병화는 경찰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폭도들이 난입하면 대항하지 말고 해달라는대로 다해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무기를 털어가든지 탄약을 털어가든지 가만히 내 버려두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무기고 털린게 이해가 안가니까 북한 특수부대가 침투했다고 하는 것이다. 모두 어떻게 데모대가 무기고를 강탈하느냐고 믿지 않는다. 국정원 출신도 그런 말을 하는걸 보고 깜짝 놀랬다. 당시 미국이 지원하는 북파공작원은 김일성 목 따오라고 명령하면 곧바로 목 따올만큼 강력한 첩보 능력을 자랑했다. 북한이 미국 첩보원들의 그런 실력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북한은 해달라는데로 다 해줄테니 제발 북파공작을 하지 말라고 통 사정하고 있었다. 북파공작원 증언에 의하면 뷱한에서 활동하눈게 너무도 쉽다고한다. 북한 최고 지도자 죽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북한은 미국 정보부에 제발 최고지도자를 죽이지 말라고 통 사정하고 있었다. 최고 존엄 김일성이 죽을수도 있는데 북한 입장에선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북한은 첩보전에서 패배해 눈치만 살살 보는 비참한 입장인데 북한 특수부대를 광주사태에 밀파할 생각을 하겠는가, 이승만 정권시절 경호실장 곽영주와 내무부 장관 최인규가 4.19 학생 데모대에게 발포했다고 사형 당했다. 그 사형을 시킨 인물이 박정희 대통령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학교 선생님 출신이다. 그러기에 학생들을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모든 학생들이 자신의 제자처럼 사랑스러우니까, 데모학생들을 절대 다치게 해선 안된다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계엄령은 전시법 적용하여 명령 불복종은 사형이다. 광주는 공수부대가 학생 데모대에게 일주일에 3번 도망치는 수모를 겪은 이후 데모대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자신들이 공수부대보다 훨씬 강하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데모학생들은 우리의 소중한 학생들이니 절대 다치게 해선 안된다는 말도 안되는 명령 때문에 얻어 맞아 타박상 입고 상처 연고 바르면 끝날 일을 죽고 죽이는 살육으로 비화되었다. LA 폭동을 보라, 언론이 연일 경찰의 과도한 체포를 비난하자,시민들은 폭도가 되었고 경찰은 비판받지 않기 위하여 폭력을 방관하자, 우리 교민 상가는 불타 올랐다. 지휘관들이 보신주의에 입각한 명령이 철없는 젊은이들을 광분하게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게 광주사태이다. 1979년 10월 8일 서면로타리 3만명 폭도를 불과 400명 해병대 대원이 격파한 후 나의 대대가 데모 한다는 첩보를 입수 한후 출동하면 아예 데모할 생각을 안했다. 너무도 해병대가 두렵다고 나타나지도 않았다. 서면 로타리의 단 한번 데모진압이 처음이자 마지믹 데모진압이었다. 그후 해병대 ㅣ데모진압군에게 꽃길이 장엄하게 펼쳐졌다. 데모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출동하면 데모대는 그림자도 볼수 없었다.해병대가 무섭다고 대항할 생각조차 못했다. 이런 일로 가장 분통 터트린 사람들이 공수부대이다. 해병대는 저렇게 데모진압 잘하는데 우리는 왜 뒤로 밀려 난 거야, 열받아 미치겠다. 이런게 공수부대 지휘관들 마음이었다. 부산 마산에서 해병대를 피해 광주로 자리를 옮긴 데모대는 광주 청년 학생들을 모으고 데모에 돌입했다. 그 첩보를 접하고 마산 경남대학에 주둔해 있던 나의 대대에 광주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당시 해병대는 공수부대를 대신하여 대한민국 전체 데모진압을 맡고 있었다. 광주 사태가 벌어지자, 나의 대대는 오늘 광주 가느냐 내일 광주 거는냐 초 일기에 들어갔다. 그런데 광주 출동이 취소되었다고 한다. 데모 진압에서 밀려난 공수부대가 다시 데모 진압에 나섰다고 한다. 공수부대 사령관 정호용 장군 체제가 되며 방심한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 절친인 정호용 장군이 공수부대 사령관이 되었다. 정호용 장군은 공수부대가 광주에 투입하여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게 해달라고 요청한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공수부대는 광주에서 부마사태처럼 데모대에게 쫓겨다니는 일이 재현되며 광주는 겉잡을수 없이 커다란 폭력 사태로 비화되고 무기고와 탄약을 탈취하여 공포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학생 폭력 데모를 성공적으로 막아내던 해병대 계엄군은 실로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해병대를 보낼 것을 왜 공수부대 보내 유혈 사태를 만들었냐고 계엄사령부는 땅을 치고 후회했다고 한다. 부마 사태에서 공수부대 경찰 지역 계엄군등 무려 2만명이 투입되고 못 막은 유혈폭동이 광주에서 재현된 것이다. 폭력을 막는것은 오로지 폭력 밖에 없다. 우리의 소중한 학생들이니 절대로 다치게 해선 안된다는 말도 안되는 계엄 사령부 명령이 많은 죽음을 불러 일으켰다. 아승만 정권의 4.19, 억울하게 사형당한 대통령 경호실장 곽영주와 내무부장관 최인규가 지하에서 통곡한다. 부하들의 빚발치는 요구에 어쩔수 없이 발포명령 내렸다고 책임을 묻고 사형 시킨 것은 누가 봐도 큰 잘못이다. 그 여파가 부마 사태와 광주 사태를 일으킨 원흉이다. 글/이강석
억울하게 사형 당한 대통령 경호실장 곽영주와 내무부장관 최인규가 지하에서 통곡한다. 1편 광주 사태와 부마사태의 무력 진압을 비판하는 글은 많지만 진압군 입장에서 쓴 글은 나 밖에 없다. 5.18 주제로 노벨상 까지 받았다고 하니 기가 막힌다. 노벨위원회도 작가가 무식하여 거짓 선전 선동인걸 알면 과연 노벨상 주겠는가, 계엄군은 전쟁터 군인과 같이 전시법이 적용된다. 일상적으로 영창가는 가벼운 처벌도 전시법 적용되면 중형이다. 기본이 사형이다. 계엄군으로 출동하고 난 후 전시법 적용된다고 통보해주었다. 외출 외박 면회 휴가 일절 없다. 영외 거주자도 영내 거주해야한다. 결혼한 직업군인이 마누라와 자식들 만나는 것도 금지되었다. 군인에게 적용되는 전시법이 얼마나 무서운 법인가를 살펴보자, 명령불복종 사형 근무 이탈 사형 강간 사형이다. 6.25 전쟁 영웅 장도영장군은 사단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자기들 멋대로 후퇴해버린 강원도 현리 전투 지휘관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군법 회의에 회부했다. 체포된 지휘관들은 전시법 적용되어 사형이다. 전시법은 그토록 무서운 것이다. 그후 마음대로 후퇴하면 죽음이 기다리기에 지휘관 명령없이 후퇴하지 않아 용문산 대첩이 이루어 졌으며 파라호에서 중공군 5만명이 수장되었다. 아군 피해 150명이다. 세계 전쟁 역사에 처음 있는 신기록을 수립했다. 중공군으로선 땅을 치고 통곡할 뼈 아픈 패배를 맛보았다. 데모학생은 우리의 소중한 학생들이다. 절대로 다치게 해선 안된다. 불가피하게 가격할때 허벅지만 때려라, 이 명령이 1979년 10월 초에 부마 사태 진압을 위해 계엄군에게 하달된 계엄 사령관의 명령문이다. 해군본부 헌병대장을 지낸 법률 전문가인 나의 대대장 곽규석 해뱡대 중령은 말도 안되는 명령문이 기분 나빠 중대장 시켜 명령문 낭독 시켰다. 계엄군으로 출동했던 공수부대와 경찰과 지역 육군 부대는 계엄사령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고 결과는 속수무책으로 대 참패를 당했다. 이리 쫓겨 다니고 저리 쫓겨다니며 눈 뜨고 볼수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우리의 소중한 대학생들이니 데모학생들 절대로 다치게 해선 안된다는 계엄 사령관 명령문은 계엄군으로 출동한 나의 입장에선 우박처럼 쏟아지는 돌멩이와 화염병에 맞아 죽으라는 명령과 같다. 폭력 시위에 자신의 부하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데 지휘관이 내릴수 있는 명령은 단 한가지 후퇴하라는 명령 밖에 없다. 계엄군이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폭도들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지휘관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자식같은 부하들은 어떻게 눈 뜨고 본단 말인가, 부마 사태 당시 데모 못 막는다는 누명을 쓰고 계엄군에서 배제된 공수부대 자리를 포항 1사단 2연대 1대대 해병대인 나의 대대가 투입되었다. 해병대 1사단 전체가 데모진압에 투입할 예정인데 나의 2연대 1 대대가 선발대로 투입된 것이다. 당시 직업군인들이며 대한민국 최강의 부대인 공수부대가 못한 일인데 어떻게 의무병들인 해병대가 데모를 막느냐고 모두 불만을 나타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군 지휘부가 내린 추상같은 명령인데 감히 그 명령을 누가 거부하겠는가, 휴교령이 내려진 부산 대학교에 출동하여 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출동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산 서면 로타리에서 학생 데모대가 데모를 위하여 구름처럼 모여들었다는 첩보가 입수되고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당시 나는 군대 생활 3개월 밖에 안된 신참 이병이기에 막사를 지키는 잔류 인원으로 빼 버렸다. 500명 부대 대원중 50명은 잔류 인원으로 빠졌다. 제대 한달 남긴 최고참 병장과 어리버리한 이등병은 텐트를 비롯한 각종 집기를 지키는 보초병으로 뺀 것이다. 그때 나는 인원을 선발하던 고참 상병 선배에게 건의했다. 나도 데모 진압에 참여하게 해 달라고 졸랐다. 해병대 역사상 처음 있는 데모진압이며 반정부 투쟁하는 역사적 순간이기에 빠질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박처럼 쏟아지는 돌멩이와 화염병을 얻어 맞는 데모진압인데 그게 뭐가 좋은 일이기에 따라 나서는 거냐고 하겠지만 당시 내 피는 뜨거웠다. 고참 선배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 산더미 처럼 쌓인 텐트를 비롯한 부품은 누가 지키겠는가, 잔류 인원이 있어야 지킬게 아니겠는가, 옳은 소리 아닌가, 잔류 인원으로 남아 부산대학교 연병장의 부대 부품을 지켰던 나는 데모진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동한지 6시간만에 돌아온 부대원들 표정이 어둡다. 모두 시무룩한 표정이다. 나는 출동했던 동기를 붙잡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데모진압 어떻게 된거야 동기는 내 질문에 어두운 표정을 바꾸며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가 이겼어 이기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는 데모대를 개 패듯이 두들겨 팼다고 말했다. 어떻게 두들겨 팬거니 동기는 자랑스러운 무용담을 들려주듯이 신이 나 설명했다. 3만명 데모대와 대치했는데 돌멩이와 화염병이 우빅처럼 날아 오고 군인들 향하여 욕설이 쏟아졌다. 30분 동안 이리저리 몸을 피하며 얻어 맞기만 했는데 지휘관들은 말이 없고 이러다가 흥분한 데모대에게 맞아 죽겠구나 하는 공포에 휩싸였다고 한다. 그리고 대열 뒤에 있던 지휘관들을 휠끗 쳐다보자 분대장을 비롯하여 50명 지휘관들이 단 한사람도 없었다.병사들만 남겨두고 모두 퇴각한 것이다. 그래도 병들은 돌멩이와 화염병을 맞으며 온갖 욕설을 들으며 해병대의 자존심이 짓밟히는 기막힌 일을 당하며 울분에 휩싸여 치를 떨었다. 해병대원들 가슴마다 오늘 여기가 내가 죽을 자리다. 해병대 답게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으리라 다짐했다. 그때 침묵을 깨고 전역을 불과 두달 남겨둔 고참 병장이 소리쳤다. 저 개새끼들 죽여라 죽여 이 욕설 한마디가 신호탄이 되어 400명 해병대는 앞에총을 하고 3만명 폭도들속으로 돌진했다. 아무나 붙잡고 공격하는게 아니라 가까이 까지 접근하여 돌멩이 던지고 회염병 던지며 공격하던 악질 데모꾼이 표적이었다. 일대일 추격전이 시작되고 그토록 용감하던 데모대는 엄마야 날 살려달라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전혀 겪어 보지 못한 새로운 데모 진압 방식에 데모대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공수부대와 지역 욱군 계엄군과 전투 경찰은 함께 줄지어 모여 폭도들에게 돌멩이와 화염병으로 마냥 얻어 맞는게 데모 진압 방식이다. 해병대 데모 진압방식은 오늘날 경찰 특공대 진압 방식과 같다. 데모대 속으로 파고들어 함께 뒤엉커 싸우는 방식이다. 우발적으로 진행된 전혀 색다른 데모진압 방식은 3만명 폭도들을 공포에 질리게 했다. 공포에 질린 폭도 데모대는 인파에 막혀 포위된 형태였다. 워낙 다급하게 도망치다보니 주변 상가로 뛰어들고 당구장 다방으로, 심지어 속이 훤히 보이는 공중전화 박스로 뛰어들었다. 해병대는 장소를 블문하고 끝까지 쫓아가 개패듯이 패 버렸다. 곧 죽일 것 같은 해병대의 무시무시한 공격, 폭도는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얻어 맞았다. 이렇게 얻어 맞다가 죽을수도 있겠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폭도는 무릎 꿇고 싹싹 빌기 시작했다. 해병대 형님 목숨만 살려주세요 두번다시 데모하지 않겠어요.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그때 만일 싹싹 빌지 않았다면 폭도는 그 자리에서 맞아 죽었을 것이다. 폭도나 해병대나 나이가 비슷한 같은 또래들이다. 두손 모아 싹싹 비니까 마음이 약해져 두번 다시 데모하지 말라는 엄포를 하고 플어 주었다고 한다. 잡아 가 봐야 경찰서 뒷마당에서 토끼뜀 몇번하고 풀어 주기에 풀어 준 것이라고 한다. 당시 경찰도 강력히 법집행한게 아니라 부처님같은 사법집행을 하여 폭력 시위를 부추기고 있었다. 이런 소동이 일어난 후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달려오고 도지사와 시장 군 수뇌부 해병대 사단장등 내노라 하는 사람들이 모두 달려왔다. 대대장을 비롯하여 우리 대대는 잔뜩 겁을 먹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폭력 진압하지 말라고 명령 했는데 폭력 진압했으니 처벌받는게 아닌가 걱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글이 길어 2편으로
나는 당시 1사단 2연대 1대댜 해병대 계엄군이 되어 부마사태 진압을 위히여 부산 대학교에 출동했습니다. 공수부대 대신 부마사태에 투입되어 성공적으로 데모를 진압하여 갑자기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되어 김재규 정보부장 지시로 최고 대우를 받았습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해병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 준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헸습니다.
중대장님 저는 72년부터 75년까지 육군 알보병 출신인데 후배 한녀석이 강화 어름 어디선가 근무했던 해병출신인데 한다는 야그가 자기 선임한명이 그곳 바다에는 사람 만한 숭어떼가 우굴우굴해서 낚시하다 숭어한테 끌려들어가 익사했다고 구라를 쳐서 황당하게 생각했는데 방송시청하다보니 진짜라는 생각이 드네요 ㅎㅎ
UDT는 정규군으로 해군깃수가있지만 UDU는 게릴라부대로 그출신들이 다양하다고합니다. 그중에는 무기수들도있다고들었습니다. 월미도에서 훈련받는 현장을봤는데 같은훈련생끼리도 나이차가 많았습니다. 아뭏든 그들 허벅지하나가 보통사람,허리통만했습니다..
해간 68기 문동헌입니다. 영상 잘 보고 있습니다. 이 영상 가운데(8분49초) 83년 임관 장교 인원표 중 해간 138명은 오류이고 134명이 임관했습니다.
자국군끼리 지랄을 했네
1974년 6월 마산 벽암지 조별과업 이나 석별과업시 마산수출 자유구역의 한일 합섬 부근까지 왕복 구보한 기억이 납니다 그당시 공순이 구경 하는것만으로기분이 째졌죠 ㅎㅎ 막사에 104명 정도가 취침을 하니 변소 갔다오면 잠자던 자리가 없어져서 그다음 부터는 잠 자리 빼길까봐 소변을 참았던 기억이 나네요~~
정말 재미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