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굴착기
고대사 굴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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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 편집]일식논쟁, 그리고 고구려=북위 2편
자막을 처음으로 달아봤는데, 라이브 편집은
자막이 크게 필요치 않은듯 합니다.
의견 주시면 반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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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in park 출간 책(일식기록으로 추정한 역대 왕조의 실제 위치) bookk.co.kr/bookStore/6601198ac66fdcc2c679f605 - 시나브로님 최근 후원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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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омментарии

  • @전미숙-w6u
    @전미숙-w6u 2 дня назад

    백제땅이다 신라가 아니고

  • @sayminlee1128
    @sayminlee1128 2 дня назад

    야 이놈아 사기 그만 쳐라. 벌 받는다.

  • @아넷-p7b
    @아넷-p7b 5 дней назад

    타이 중국발음 무에타이 다이 성조음 중공의 화하족의 뿌리는 동남아계열이네요

  • @아넷-p7b
    @아넷-p7b 5 дней назад

    좋은 방송 감사합니다

  • @소리터기
    @소리터기 5 дней назад

    응원합니다. 우리 사학자들 병폐가 공부 안하고 연구 안합니 다. 인간 쓰레기들이지요 최우선 척결 대상 입니다

  • @소리터기
    @소리터기 5 дней назад

    고구려는 대 제국 서쪽으로 유럽,동쪽으로 러시아 끝, 남쪽으로 중국 전지역 베트남까지 따라서 일식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나타나고 우리 사서 중국 사서로만 고구려를 연구하면 안됨 중앙아시아,인도,이란, 터어키.스리랑카,동남아 국가들의 역사를 연구 해야 함

  • @소리터기
    @소리터기 6 дней назад

    대륙 신라 기록이 수도 없이 존재하는데 아직도 눈 감고 귀 막고 아니라고 하는 친일사대 쓰레기들 많네.

  • @user-konglish
    @user-konglish 6 дней назад

    그럼 니딩 전젱이 없엇느거넹???

  • @윤현월-x9s
    @윤현월-x9s 8 дней назад

    10. 송사와 고려사 혹시 중국의 역사를 들여다 보신분들이 얼마나 되실지 모르겠지만 이 고려사는 그냥 역사서가 아닙니다. 송나라의 역사서를 혹시라도 들여다 본다면 당시 고려사와 영토와 일부 역사까지 완벽하게 일치하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겁니다. 두 사서의 진위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둘 중 하나는 치명상을 입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고려사는 그 당시 동아시아 역사서라고 불러야 할 만큼 오지랖이 넓은 역사를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종대왕이 얼마나 꼼꼼히 기록을 해놓았는지 고려의 모든 영토는 이 왜곡의 끝판왕같은 역사서에도 나름대로 담담하게 최대한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고집스럽게 기록을 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 고려사를 읽다 보면 최소한 고려의 영토 만큼은 절대 양보하지도 않고 건드리지 않겠다는 세종대왕의 강한 의지의 표현같은게 남아 있습니다. 고려사 본문은 읽어보면 고려사 서문과는 내용이 완전 다릅니다. 제가 언젠가 명나라 사서와 송나라 역사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모든 역사서들까지 샅샅이 뒤져 그들의 행적을 낱낱이 세상에 고발할지도 모릅니다.

  • @윤현월-x9s
    @윤현월-x9s 8 дней назад

    9. 고우성전투 이후의 고려의 선택 고려 중앙정부가 전쟁 이후 강남 지역의 황도를 포기하고 수도를 지금의 북경 지역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당시 상황의 긴박함과 변화의 규모를 잘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원나라와 명나라 간의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고려의 영향력도 자연스럽게 약화되었고, 공민왕이 암살되면서 고려는 더욱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에 따라 고려는 점차 동력을 상실하고, 결국 한반도로 철수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공민왕의 죽음은 고려의 정통성과 지도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이후 고려는 동아시아의 정치적 중심에서 밀려나면서 자국 내 혼란을 수습하고자 한반도로의 철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고려는 대륙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후 조선이 개국되면서 한반도 중심의 체제를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국제적인 상황속에서 공민왕을 도대체 누가 살해를 했느냐는 역사의 커다란 논란거리입니다. 당시 원나라는 고려의 공민왕이 절대로 필요한 상황이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고려사에서는 그 책임을 원나라에 돌리고 있지만 고려사를 직접 작성한 붓을 쥔자들의 말들을 곧이 곧대로 믿기도 힘든 상황이였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단순히 왕조의 몰락이 아니라, 고려가 대륙에서 철수하면서 동아시아 역사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정치적, 군사적, 문화적 지형이 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 @윤현월-x9s
    @윤현월-x9s 8 дней назад

    8. 고려사와 명사에서도 등장하는 왜에 대한 해석 고려사와 명사에서도 왜가 똑같이 등장하는데 거의 모든 전투에서 고려사 명사 모두 상대방 혹은 적들을 왜로 기록을 하고 있어서 이 당시 전쟁의 실제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고 해석을 하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하다못해 고려의 동계 세력들과 이후 명나라의 역사 거의 전반에 명나라가 망할 때까지 등장하는 군대도 모두 왜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건 건국 이후부터 거의 임진왜란이 벌어지는 시점까지도 끊임없이 왜는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은 일본의 군대나 단순한 해적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어쩌면 끊임없이 저항했을 고려와 동계의 일부 군사들의 조직적인 저항운동의 역사를 그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윤현월-x9s
    @윤현월-x9s 8 дней назад

    7. 고우성 전투의 진행 과정 특히, 달단(몽골의 다른 파벌)의 고위 지휘관이 탈탈의 지휘 아래에서 고려군의 공로가 두드러지는 것을 견제하고, 심지어 탈탈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독단적으로 퇴각함으로써 전투의 흐름을 흐트러뜨렸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군대 내의 통일된 전략 부재와 각 세력 간의 불신으로 인해 연합군의 결속력을 약화시켰고, 결국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 기회를 놓치게 했습니다. 탈탈은 이 내분의 여파로 인해 결국 면직되었고, 이는 원나라 중앙 정부의 권력 재편과 군 내부의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우 전투에서의 패배는 탈탈의 정치적 몰락을 초래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원나라 내부에서 고우 전투 패배에 대한 책임을 탈탈에게 돌렸고, 그의 면직과 귀향 조치는 그가 정치 무대에서 사실상 퇴장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히 군사적 패배로 인한 처벌을 넘어, 원나라 중앙 권력 내에서 탈탈을 제거하고 권력을 재편하려는 의도도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우 전투에서의 실패와 그 이후의 탈탈 면직은 몽골 지배층 내부의 정치적 갈등과 권력 투쟁이 군사적 실패와 맞물려 벌어진 사건입니다. 탈탈의 몰락은 원나라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더욱 가중시키면서, 중앙 권력의 쇠퇴와 명나라 홍건적 세력의 부상에 한층 더 무력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는 원나라의 승상 탈탈이 고려군과 연합사령관으로 전투를 지휘하며 명나라 홍건적에 맞섰지만, 고우 전투 중에 발생한 원나라의 내부의 갈등과 군 내부의 불화를 드러낸 사건 중 하나입니다. 특히, 몽골 고위 지휘관들 사이의 갈등과 고려 병력의 공로를 시기한 달단(몽골의 한 파벌) 군대의 방해로 인해 승기를 놓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이 내분은 단순한 전투의 실패가 아니라, 원나라 황실 내부에서 몽골 귀족 간의 권력 투쟁과 전략적 불일치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당시 전투중에 연합군사령관을 맡았던 탈탈의 삭탈관직은 이러한 갈등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으로, 내전 중에 원나라 중앙 정부가 직할 통치 구역에서부터 통제력을 잃어가고, 각 지역 군사 세력 간의 대립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결과였습니다.

  • @윤현월-x9s
    @윤현월-x9s 8 дней назад

    6. 고우성전투(高郵城戰鬪) 고우성 전투(高郵城戰鬪)는 1355년 원나라 말기에 장사성의 난으로부터 시작된 이 전쟁은 명나라의 창시자인 주원장(朱元璋)이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한 후 고우성(高郵城)을 점령한 사건을 말합니다. 이 전투는 홍건적과 주원장이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명나라의 공식 역사서인 『명사(明史)』에는 주원장의 고우성 점령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특히, 주원장이 고우성을 점령함으로써 강남 지역에서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이후 명나라 건국의 기반을 다졌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명사』 외에도 『명태조실록(明太祖實錄)』 등 명나라 초기의 역사서에서도 고우 전투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이들 기록은 주원장의 군사 전략과 전투 과정,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명나라의 역사 기록에는 고우 전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당시의 군사적 상황과 주원장의 행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우전투에서 몽골과 고려의 연합사령관이였던 탈탈이 지휘한 몽골군이 전혀 힘을 쓰지 못했는데, 그 전쟁에서 몽골과 고려연합군이 패배한 이유도 바로 원나라 군대의 내부 분열 때문이였습니다. 탈탈은 원나라의 중요한 군사 지도자로 연합사령관 역할을 맡았지만, 몽골 내에서는 그의 권위와 지휘력을 두고 다른 군벌과 귀족들이 시기와 반감을 품고 있었던 것이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고우전투는 명나라와 고려 원나라 또 하나의 세력 고려의 동계가 전쟁을 벌인 고려사의 거의 최대 전쟁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큰 국제전이였습니다. 이 승기로 명나라 주원장은 최대 승기를 잡았다고 명사에도 분명하게 기록이 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당시 명나라 군대는 10-15만과 홍건적 일당 35만명 이상이 전국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고 있엇고, 고려 중앙정부는 고려사에 2만3천명을 파견했다고 사서에 그 기록을 남기고 있고, 최영 장군도 이 당시 이 전쟁에 참여해 그 명성을 날렸다고 합니다, 고려사에는 원나라 군대가 8백만명이라고 나와 있으나, 이는 오기이거나 명나라 주원장의 공을 높이기 위해서 적들의 숫자를 과장한 표현일 가능성이 많고, 실제로는 원나라의 10만-15만명 정도의 정예 병력을 투입시겼다고 보는게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이 전투는 명나라 주력부대와 고려 원나라 연합세력들의 주력부대가 맏붙은 최대의 전쟁이였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명나라가 건국은 했지만 이들의 역사를 모두 지우지 않고는 자신들의 역사를 단 한줄도 제대로 쓰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전투 이후부터 고려는 그의 수도를 강남 지역에서 북경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고, 공민왕 사후에는 한반도로까지 밀려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윤현월-x9s
    @윤현월-x9s 8 дней назад

    5. 고려의 동계의 해상전투력 사서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고우성전투에 명나라와 원나라 고려 이 세나라 말고도 정체불명의 왜라는 세력이 하나 더 있었는데, 이 세력은 고려의 동계세력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고려의 동계는 이후에 이성계에게 멸망당하는 것으로 보이며, 현재의 한반도가 그 동계의 일부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 명나라가 이성계가 고려의 동계를 칠 때 명나라는 자신들의 건국에 지대한 도움을 주었던 이 동계세력을 지원하지 않았는지는 미스테리입니다만, 이 세력들은 역사를 아주 깊숙히 들여다보면 동아시아 전체 역사에서 가장 껄끄러운 세력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명나라의 건국에 도움을 주었지만 결정적일 때 팽당했을 가능성도 열려 있습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 왜는 결코 일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당시 일본은 자신들의 코가 석자였기 때문에 해외로 눈돌릴 틈조차 없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냥 옥저의 후예들이라고 밖에 말을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자세히 말씀드릴지도 모르겠지만 이 세력들은 동아시아 모든 나라가 두려워했고 실제로 이들은 수천년동안 동아시아의 거의 모든 역사를 좌지우지 했던 오지랖 넓은 세력들이라고 밖에 말씀을 드릴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고려 동계 세력, 옥저 출신 해상 세력은 당시 동아시아의 해상 역사에서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이들은 오오츠크해를 비롯한 북방의 바다에서부터 남방의 바다까지 해상 활동을 장악하며, 그 능력은 단순히 내륙 수로에 의존하던 명나라나 고려의 중앙정부와는 차원이 다른 해상 전력이었습니다. 고대로부터 고래를 사냥하고 거친 해양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해상 기술력과 적응력은 당대 어떤 세력도 쉽게 맞설 수 없는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동시베리아 벌판까지 이어진 이들의 영토는 육상전투력도 결코 몽골에 뒤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큽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박살낸데서도 볼수 있듯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만큼 동아시아에서 이들의 해상전투력은 고대로부터 독보적이였다고 보는게 정확할 것 같습니다. 고구려나 고려 발해 몽골 모두 이들이 함께 할때 가장 그 전투력이 빛이 났을 겁니다. 몽골조차 최강의 기마군단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이 전력에서 이탈하자마자 그들은 금방 허수아비가 되어 무너지는 그러한 역사의 궤적도 볼 수가 았습니다. 이들이 명나라를 지원한 것은 동아시아 해상 패권과 지형 변화 속에서 명나라와의 협력을 통해 이익을 얻고자 했던 전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성계의 등장과 함께 한반도 본토를 잃고 명나라로부터도 토사구팽을 당하게 된 상황은 일부 귀족들이나 군인들에게 큰 전환점이 되었을 것입니다.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세력과도 연결고리가 있었던 이들은 결국 본토와 근거지를 잃고 새로운 기반을 찾아야 했고, 동아시아 바다를 떠돌거나 새로운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어디로 향했는지는 동아시아 모든 역사서들을 꼼꼼이 들여다 봐야 조금씩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징기스칸의 몽골제국이 처음 일어나 금나라를 칠때부터 이 동계세력은 징기스칸을 지원하면서 몽골의 역사와 함께 하기 시작했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그러다가 몽골이 일본을 친다고 할때부터 몽골의 연합에서 빠지고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런 측면을 이해하고 일본사서들을 들여다보면 이들이 일본 막부의 역사에도 개입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건 일본사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아직도 그들의 그 흔적이 조금씩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들이 명나라의 수군을 도와줬을 것이라는 추정은 당시 명나라 수군은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에 거의 연전연승을 하던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수군이란 하루이틀만에 완성되는 그런 군대가 아닙니다. 그리고 명나라의 수군은 이들을 훈련시키거나 정예병으로 키울 시간조차 없었던 군대들이였다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명나라의 수군이 고려와 원나라 정예병들이 이끌던 수군을 연파하면서 연전연승을 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역사가 모두 기록을 하지 않고 당시 명나라와 고려의 동계와 이성계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뒷거래가 있었는지도 현재로선 그 내막을 정확하게 알 길이 없습니다. 고려의 동계 세력들이 명나라와 원나라 간의 갈등에 관여했다면, 그 동기는 원나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동아시아 세력의 재편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 @윤현월-x9s
    @윤현월-x9s 8 дней назад

    4. 고려의 5도 양계(북계 동계) 고려사와 고려의 영토를 설명하기 위해서 편의에 따라 최초 고려 왕건이 개국을 하면서 확보한 이 고려의 영토가 분할되기 시작하면서 나누어진 이 세지역을 고려의 중앙정부(5도), 양계(고려의 북계, 고려의 동계)로 나누어 부를 생각입니다. 고려의 북계는 금나라와 몽골의 역사가 그 자리에서 시작되면서 차지했고, 고려의 동계는 고려사보다 더 베일에 쌓여 있을만큼 그 비밀이 많은 지역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중국이야 영토가 걸려 있어 그렇다고 치더라도 별로 상관도 없을 것 같은 일본 몽골 청나라의 모든 역사서에서조차 이 고려의 동계의 역사는 철저하게 지워 버렸기 때문입니다. 다만 고려사에는 자세히 들여다 보면 군데군데 그들의 역사가 어떻게 흘렀는지를 그나마 약간은 추정이라도 가능하게 사서 몇 줄씩은 남겨뒀습니다. 어쩌면 세종대왕이 고려사를 마무리를 할 때 거란 금나라 몽골의 역사처럼 이 동계의 역사도 아주 상세하게 남겼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특정 세력들에 의해 이후 이 동계의 모든 역사는 철저하게 배제되었고, 지워져 버렸다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한 역사의 수정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초기 승정원일기가 소실될 때까지 계속되었을 가능성이 많으며, 그 조선 초기 왕들의 승정원 일기가 사라진 이후부터 고려사의 수많은 페이지가 수정이 되거나 왜곡이 더욱 심화되거나 가속화되었을 가능성이 더 많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명나라 일본의 모든 사서들도 마찬가지다.

  • @윤현월-x9s
    @윤현월-x9s 8 дней назад

    3. 고지도를 통해 본 중국의 지질과 지형의 변화 당시 황하는 지금의 태주시와 저 고우성을 사이에 두고 흐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고우성은 당시에는 황하가 흐르던 주요 길목에 있었던 곳으로 전략적으로 아주 가치가 있던 곳이였습니다. 저 고우성 전투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666년 전에 황하의 주요 길목에서 벌어진 전투인데 그 기준으로 황하의 위치 변동을 계산해보면 400년도 안돼 거의 정확하게 직선거리로 530km나 북상한 것입니다. 이 황하의 흐름의 변화는 동아시아 모든 역사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되는데 그건 천하고금대총편람도를 보시면 어느 정도 이해가 올 것입니다. 동아시아 모든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중국의 지질이 엄청나게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중국의 남부 지역에 있는 남령산맥 주변은 매년 5.8cm 정도 치솟고 있는 중입니다. 과거 1천년동안 58m가 치솟아 올랐고 2천년동안은 거의 120m 정도가 치솟아 올랐습니다. 중국의 서부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 과정을 고대 수천년간 혹은 만년 이상 지속해 오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면서 지금 중국의 농토는 과거2천년 전에 비해 서남부는 지형이 치솟아 산으로 변했고 해안은 침식이 심화돼 농토가 절반 가까이가 사라졌습니다. 황하는 불과 18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저 태행산맥에 가로막혀 낙양 근처에서부터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천하고금천대총편람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더 이전 과거 삼국시대 초기에는 아마도 더 남쪽으로 흘러 동정호 근처에서 장강과 합류해 동해로 빠져나갔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황하는 삼국시대가 열릴 무렵부터 황하와 장강이 함께 현재의 위치에서 함께 흐르다 분리가 되기 시작했는데, 그 시점도 생각보다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불과 400년도 안돼 황하가 530km를 북상했다는 걸 감안하면 어쩌면 삼국시대가 시작될 무렵부터 황하와 장강이 함께 흐르다 분리되기 시작했을 가능성마저 있습니다. 그렇게 계산해보면 황하는 실제 지난 2천년동안 800km를 이상을 북상하고 있다고 보는게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최근 황하가 지난 3천년동안 오르락내리락 했다는 이야기를 중국학자들도 말하고 있고, 한국의 많은 연구자들도 중국의 그러한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인용을 하고 있는데, 그건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건 제가 중국의 가장 최근의 지질보고서의 데이터를 입수해 들여다 보면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중국의 황하의 위치는 이 천하고금대총편람도와 청나라의 대청광여도 그리고 지금의 구글지도를 보면 그 변화가 얼마나 빠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청나라 사서를 들여다보면 언제 황하의 위치가 지금의 위치로 바뀌었는지 자세히 알 수가 있는데, 18세기 중반 이후에 생긴 거대지진과 홍수로 인해 현재의 위치에 자리를 잡았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황하가 벌써 오르도스를 휘감아 돌면서 흐르다 지금은 벌써 그 북쪽으로 흘러 후허하오터까지 흘러 남쪽으로 흐르면서 지금의 북경쪽으로 일부 수계가 변경이 되고 있고, 그건 최근 몇년동안 북경이나 화북성 지역의 홍수가 늘어나고 있다는데서 찾을수도 있을 만큼 황하의 북상속도는 우리의 예상을 훨씬 벗어날 정도로 빠르게 북상중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마 조만간 내몽골 사막은 이 황하의 수계가 북쪽으로 이동되면서 모두 농토로 변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 @윤현월-x9s
    @윤현월-x9s 8 дней назад

    2. 천하고금대총편람도와 고려의 영토 다음은 천하고금대총편람도라는 지도인데 이 지도의 원제작자는 김수홍이라는 인물로 고려시대 왕건의 최측근이였던 김선평이라는 신라왕족 출신의 고창성주의 직계 후손이 목판인쇄본으로 만든 지도인데, 이 지도는 고대 동이족의 거의 모든 역사가 담겨 있을 가능성이 많은 지도입니다. 제가 전세계 지도와 중국의 모든 지도를 샅샅이 찾아 봤는데 이와 같은 고대의 중국의 지도는 단 한장도 찾아 볼 수 없는 아주 독특한 지도였고, 이 지도는 역사지도라고 불러도 될만큼 동이족들의 역사가 담겨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연구해서 나름대로 지도해석을 30% 가까이 하고 있는 중인데 그정도만 가지고도 저 지도가 9세기까지의 중원의 주요 지리 정보를 담고 있고, 업데이트는 12세기 역사까지 업데이트 된 지도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까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지금 시점에서 연구가 아직 덜 끝난 상태에서 더 이상의 언급은 이정도까지만 할 생각입니다. 다만 한가지 지금까지 제가 확인한 고려의 국경지역에 있던 도시들을 나름대로 확인하고 있는 바로는 저 고지도는 고려의 중앙정부를 그린 지도일 가능성이 많으며 고려의 양계를 합한 영토는 저보다 두 배 정도는 더 클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측 상단에 그려진 지도가 윤관의 동북9성이 지어진 이후 고려의 북계에서 독립한 금나라의 위치일 가능성이 많고 좌측 상단에 그려진 영토가 고려사에서 서여진이라고 불리우는 서하나 거란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참고로 고려사에서 말하는 동여진은 저 북계와 동계를 모두 합쳐 부르는 명칭일 가능성도 많습니다. 고려 동계의 지도는 이 김수홍이 남긴 조선팔도대총편람도라는 한반도의 지도가 한 장 더 남아 았는데 그게 이 동계의 일부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지도의 화면이 해상도가 너무 낮아 흐릿한데다 그림을 확대하지 못하도록 고정까지 해 놓아서 글자들을 읽을 수 없게 만들어놔서 이 한반도 지도는 더 이상 일반인들은 연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나라 역사학자들은 뭐가 두려운지 감추는게 너무 많습니다. 지은 죄가 너무 커서 감당을 할 수 없는 정도까지 이르게 된 탓도 있겠지요. 결론… 천하고금대총편람도는 고려시대의 고려의 영토를 그렸을 가능성이 많은 지도로 고려의 왕들만 볼 수 있었던 지도일 가능성이 많다. 몽골이 들이닥치기 전에 고려왕의 믿을만한 측근을 통해 빼돌려 사저에 보관되다가 최근에야 공개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천하고금대총편람도> museum.seoul.go.kr/archive/archiveNew/NR_archiveView.do?ctgryId=CTGRY782&type=C&upperNodeId=CTGRY782&fileSn=300&fileId=H-TRNS-72611-782 <조선팔도고금총람도> museum.seoul.go.kr/www/board/NR_boardView.do?bbsCd=1182&seq=20221208144310257&sso=ok

  • @윤현월-x9s
    @윤현월-x9s 8 дней назад

    1. 고려사를 읽기 전에… 고려는 왕건이 개국한 이후 대략 200년 동안 거란과의 전쟁도 있었지만 고려사에 쓰여 있는 것보다는 황금기와 태평성대를 누리다 고려의 북계에서 금나라가 개국을 하면서부터 세갈래로 나뉘어 본격적으로 천하 대란에 가까운 혼란의 시기로 빠져들었습니다. 몽골의 간섭기에도 세계를 제패한 몽골 덕분에 세계의 심장이 된 고려의 경제는 우리의 생각보다는 괜찮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고려사에 기록된 거란과의 전쟁과 몽골과의 전쟁 그리고 몽골과의 불편한 동거 등이 모두 고대 한국의 역사를 왜곡하고자 하던 세력들이 이간질을 목적으로 더 역사를 왜곡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한 점들도 유념을 하면서 가급적 진실만을 읽으려고 노력을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고려사엔 선악도 정의도 니편 내편도 존재하질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권력만을 위해 이합집산을 하고 역사왜곡까지 서슴치 않았던 우리의 조상들과 이웃 나라들의 조상들의 역사만 기록되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질문빌런-f5i
    @질문빌런-f5i 8 дней назад

    타이완 어원이 야마토 한자로 하면 대왜(大倭)를 일본어로 음독하면 DAIWA가 되기 때문에 타이완과 비슷하고 왜가 작은 나라인 것도 타이완 섬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함

  • @user-konglish
    @user-konglish 8 дней назад

    햐.... oㅋ...

  • @여행자-t3w
    @여행자-t3w 9 дней назад

    그러면 대륙신라의 신라 말기 초입까지의 분석도 병행되어야 설득력이 더해 질꺼라 봅니다. 단지 한반도에 국한된 분석은 미흡하다 생각됩니다

  • @삼족오-n7f
    @삼족오-n7f 9 дней назад

    그냥 호족이나 귀족 무덤...

  • @한산-v8s
    @한산-v8s 10 дней назад

    역사를 짜집기해서 짜 맞추니까 엉망진창이 된 것으로 보임. 신라 사로 계림 등 나라이름이 많이 나오는것은 여러나라를 한개의 나라 신라로 짜맞추다 보니 시대별로 천문관측기록이 이쪽으로 갔다가 저쪽으로 갔다나 난리를 치는 것으로 해석함. 하대신라는 경상도 경주에 있던 어떤 정치세력의 역사를 신라로 둔갑시켜 하나로 짜 맞추어서 역사를 만든 것으로 이해함. 신라는 항상 그자리(안휘성 합비시)에 이었다고 생각함.

  • @아넷-p7b
    @아넷-p7b 10 дней назад

    신라 박혁거세는 부여계 신라 김씨는 소호김천의 후예 당나라 이씨는 소호김천의 후예. 같은 뿌리죠 그래서 나당 연합으로 고구려 백제 왜를 멸망시켰죠

  • @무한자유-p1q
    @무한자유-p1q 12 дней назад

    대지진이 고대에 있었다면 치명타를 입었을듯 나라를 포기하진 않더라도 수도를 경주로 옮겨갈수도 있었겠죠. 신라시대 당시 경주와 인근지역의 집이 10만호나 된다는 것이 고대의 도시로 한반도에서 있기에는 엄청난 규모죠. 외부에서 많은 사람과 물자가 유입이 되었고 그럴 이유가 있었다는 거겠죠.

  • @이성재-n5r
    @이성재-n5r 13 дней назад

    숙제가 풀리는 듯 속이 후련합니다. 감사합니다.

  • @윤현월-x9s
    @윤현월-x9s 15 дней назад

    동아시아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왜(倭)”의 재평가 서론 동아시아 역사에서 “왜(倭)”라는 용어는 다양한 세력과 불확실하거나 껄끄러운 집단들이거나 상대방의 정체를 정통성 등을 이유로 숨기고자 하는 목적 등으로 수천 년간 사용되어 왔습니다. 이는 한반도, 중국, 일본 등의 여러 사서에 걸쳐, 각기 다른 시기와 지역에서 정체를 명확히 알 수 없는 집단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왜(倭)”라는 명칭이 특정 세력을 지칭하는 것이라기보다, 정치적 목적이나 상황에 따라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쓰인 점을 고려할 때,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동아시아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본 논의에서는 "왜(倭)"라는 용어가 왜곡된 역사를 형성하는 데 기여한 과정을 고찰하고, 이를 재평가하는 과정이 동아시아의 숨겨진 역사를 복원하는 열쇠가 될 수 있음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1. "왜(倭)"의 역사적 의미와 기원 “왜(倭)”라는 용어는 기원전 2세기 한나라 시기에 처음 등장하여, 기원후 3세기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더 구체적으로 기록됩니다. 여기서 “왜(倭)”는 일본 열도에 거주하던 작고 미개한 집단을 지칭하는 폄하적 용어로 쓰였으며, 이는 한자 자체가 가진 ‘왜소하다’는 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 중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왜(倭)는 동방의 이질적 집단을 의미하며, 일정한 왕조나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로 간주되었습니다. 이후, 일본에서 "왜(倭)"라는 명칭이 불쾌하게 여겨지면서 8세기경 "일본(日本)"이라는 국명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나, "왜(倭)"는 여전히 중국 사서에서 정체 불명의 외부 세력을 지칭하는 용어로 널리 쓰였습니다. 2. 왜(倭)의 모호성: 정치적, 사회적 의도 “왜(倭)”라는 용어가 동아시아 역사에서 다양한 시기와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된 이유는 단순히 특정 집단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기록자들이 알기 어렵거나 민감한 세력들을 한데 묶어 설명할 수 있는 편리한 명칭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고려, 명나라, 조선 등 동아시아 모든 역사서에서 등장하는 왜(倭)는 때로는 정통성 등이 문제가 될만한 적군, 해상 세력, 때로는 반란군, 또는 망국의 유민들을 지칭하며, 그 모호성 때문에 정체를 감추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에도 부합했습니다. 특히, 당시의 기록자들은 기록을 통해 정통성을 부여하거나, 외부 세력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과정에서 “왜(倭)”라는 용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특정 세력의 실제 역할과 중요성을 축소시키고자 했을 가능성도 큽니다. 3. 왜(倭)의 재해석: 고려사 후반부에 등장하는 왜(倭)의 실체 고려사 후반부에 등장하는 공민왕과 이성계의 정벌 이야기에서 "왜(倭)"로 기록된 세력은 실제로 몽골 초기부터 징기스칸 부대와 합류한 고려 동계 지역의 군대나 동여진 군대를 의미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고려사는 특정 시기와 상황에 따라 “왜(倭)”라는 용어를 다양한 군사 집단이나 정체 불명의 외부 세력을 지칭하는 방식으로 사용했으며, 이는 외부 세력의 실체를 모호하게 표현하는 역할을 했을 수 있습니다. 특히 고려 동계 지역의 군대나 동여진의 세력은 고려와 몽골 간의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군사적, 정치적 긴장을 유발했던 세력들로, 이러한 세력들이 “왜(倭)”로 불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기록 방식은 동아시아의 복잡한 정치적 관계와 갈등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장벽이 됩니다. 왜냐하면 "왜(倭)"라는 용어가 실체를 명확히 설명하지 않고, 오히려 적대 세력을 모호하게 묘사함으로써 역사 속에서 이들의 존재와 역할이 불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고려사에서 등장하는 중국 남서부 내륙의 세력, 홍건적과 연관된 명나라 군대, 그리고 한반도나 만주 혹은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한 집단들까지 모두 "왜(倭)"로 기록된 것을 보면, 이 용어가 정치적 반대 세력이나 피정복지를 묘사하는 데 광범위하게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명사도 고려사와 마찬가지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고려의 군대나 최영 이성계의 군대조차 모두 왜(倭)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들의 패잔병들이 모여든 대만이나 기타 동남부 여러 섬들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역사속에서도 모두 마찬가지로 왜(倭)라는 단어를 사용해 진실을 숨기고자 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4. 왜(倭)의 재해석: 동아시아 역사의 왜(倭) 기원전 2세기부터 등장해서 거의 20세기까지 중국과 한국의 모든 시대의 역사마다 등장하고, 지역도 일본부터 중국과 한반도 동남아까지 등장하는 엄청나게 기나긴 역사와 엄청나게 넓은 동아시아의 모든 땅의 역사 속에서 그 모든 역사에 등장하는게 "왜(倭)"라는 존재다. 이를 두고 일본조차 자신들에게 유리할 때는 이를 자국의 역사로 주장하고, 불리할 때는 부정하는 역사 해석이 반복되어, 동아시아의 모든 역사의 이해에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의 역사는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던 "왜(倭)" 세력과 관계된 사건을 때로는 국가 정체성의 일부로 포함하는 반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부분이나 복잡한 정치적 갈등이 연루된 사건에서는 "왜(倭)"와 일본의 연관성을 차단하려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기록된 모든 왜(倭)의 역사는 그 당시 주류였지만 정통성 등의 이유로 숨기고자 했을 패자들의 역사를 모두 모아놓은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이들의 역사는 모두 동아시아 전체의 시대와 땅의 역사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호한 접근은 결국 동아시아 역사 전체의 복잡성을 더욱 심화시키고, "왜(倭)"라는 용어가 내포한 원래의 의미와 배경을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이 “왜(倭)”라는 용어를 고찰하고, 객관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재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는 "왜(倭)"와 연관된 역사의 명확한 해석을 통해 동아시아의 진실된 역사를 복원하고, 나아가 국제적인 역사적 오해를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대동아전쟁의 역사가 일본이 이 모든 왜(倭)의 역사를 어떻게 왜곡하고 자산들의 것으로 만들었는지를 이해하면 이는 소름돋는 역사 왜곡의 가장 비극적인 한 장면이라는 것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5. 왜(倭)의 재해석: 동아시아 역사의 실체에 다가가는 열쇠 "왜(倭)"의 의미를 재평가하지 않고는 동아시아 역사 속에 숨겨진 다양한 세력 간의 복잡한 관계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倭)"라는 용어는 단순한 적대적 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왕조의 후예나 부흥을 꿈꾸는 세력이 그 본래의 땅을 되찾으려는 과정에서도 사용되었으며, 이들은 역사의 여러 층위에서 모호하게 통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고려가 망한 이후 부흥을 꿈꾸며 다시 일어난 세력들 역시 명나라와 조선의 사서에서 모두 “왜(倭)”로 기록되며 정체가 감춰졌고, 그로 인해 이들의 실체가 정확히 드러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말갈도 이 왜(倭)와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는데, 중국 역사서가 종종 동아시아와 북방 민족들을 말갈과 여진이라는 하나의 좁고 단일한 영역의 집단으로 묶고자 하는 시도는 이들을 한 문화권 내에 편입하여 통합적인 역사관을 정립하고 흡수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갈과 여진은 각기 다른 언어적, 문화적 특성을 가진 독립적인 집단으로, 어쩌면 대흥안령산맥과 태행산맥을 중심으로 동과 서로 나뉘어 동시베리의 광대한 지역을 포괄하는 광휘의 종족 개념이라고 볼수 있으며, 비슷한 시기 혹은 같은 비슷한 지역에서 존재했다고 해서 동일한 민족적 정체성을 가졌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6. 결론 결국, 동아시아 역사 속 “왜(倭)”라는 명칭의 재평가는 단순히 용어의 의미를 밝히는 것을 넘어, 왜곡된 역사를 복원하고 숨겨진 진실을 찾는 데 중요한 시작점이 됩니다. “왜(倭)”가 동아시아 역사 기록에서 정체 불명의 세력을 일관되게 지칭함으로써 정치적 편의성과 모호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왜(倭)”라는 명칭을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하고 이해하는 작업은 동아시아의 숨겨진 역사적 관계와 흐름을 파악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한서 위지 동이전의 기록에서 시작하여 왜(倭)의 본래 의미와 정체를 밝히는 것은 동아시아 역사 전체의 진실을 밝히는 문을 여는 첫 단계가 될 것입니다.

  • @윤현월-x9s
    @윤현월-x9s 15 дней наза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왜(倭)의 분석 기사 아래는 신라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지만 이는 고구려 백제사도 신라의 역사 서술과 다르지 않다. 이건 한국의 고대사만 그러한 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모든 사서와 거의 모든 일본사에도 똑같이 이 왜는 등장한다. 신라사에 나오는 왜에 대한 기사는 대부분 자신들이 후에 병합한 가야나 낙랑 혹은 우산국 등를 지칭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신라사에 나오는 왜는 때론 자신들의 반란 세력을 지칭할 때에도 사용하고 있다. 신라사에 나오는 왜는 때론 고구려나 백제를 지칭하기도 한다. 신라사에 나오는 왜는 때론 망한 고구려나 백제 혹은 가야나 이미 병합된 소국들의 부흥군을 지칭하기도 한다. 신라사에 나오는 왜는 때론 당나라나 망한 당나라의 부흥군을 지칭하기도 한다. 신라사에 나오는 왜는 때론 위촉오의 군대나 혹은 5호16국의 군대를 지칭하기도 한다. 신라사에 나오는 왜는 때론 발해군을 지칭하기도 한다. 신라사에 나오는 왜는 때론 자신들의 뒤에 흡수한 알 수 없는 수많은 소왕국들이였던 번국을 지칭하기도 한다. 신라가 병합한 주변 소왕국들만 12개 정도다. 이들을 모두 왜라고 표기했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의 역사 기록을 분해해서 자세하게 그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잃어버린 고대사를 영원히 복구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이 왜라는 단어를 동원해 그 누군가 우리의 모든 고구려 백제 신라 고대 역사 혹은 고려사까지 거의 초토화 시켜버렸기 때문이다.

  • @ElidasTV
    @ElidasTV 18 дней назад

    화하족들이 다 지들거라 우기며 사기치는 습성은 그들의 DNA자체가 유사인류라 그런듯?!

  • @ElidasTV
    @ElidasTV 18 дней назад

    걍 베꼈네 베꼈어

  • @박문수-q7o
    @박문수-q7o 19 дней назад

    여기 역사 국뽕들이 득실득실하네. 아무런 고고학적 증거도 없이 뇌피셜 역사관으로 역사를 재단하고 추론하려고 하나? 자랑스럽던 부끄럽든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봐야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 마치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임나일본부설 처럼 아무런 증거없이 역사왜곡을 일삼는 이들과 뭐가 다른가?

  • @bluediamond1261
    @bluediamond1261 20 дней назад

    역사를 제대로 안다면 이 영상은 충분히 납득 할 수 있는 자료가 됩니다 지금은 영적으로 깨어나는 시기이고 그 주기가 약 26000년 주기 맞습니다 26000년 사이클로 지구의 어센션이 일어 나는데 딱 떨어 집니다. 인정을 하고 안 하고 믿고 안믿고의 문제가 안니라 과학 철학에서 영성을 빼고 입증 하려니까 분리된 사상이죠 지금은 인간에게 있는 신성을 깨우치라는 스피리추얼의 끝 자락에 와 있습니다 고대사는 우주 즉 신과 연결된 영적 시대 였으니까요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 @모니-f5z
    @모니-f5z 23 дня назад

    첨성대가 있는 이유가 되는 듯요. 한반도는 중국과 싸울 필요없는 천연의 요새라고 해도 될 것 같은 생각입니다 .

  • @jky780
    @jky780 27 дней назад

    영상은 왜 없음

  • @jky780
    @jky780 27 дней назад

    그냥 환빠

  • @Bongo3262
    @Bongo3262 28 дней назад

    말되네..

  • @dioxin2768
    @dioxin2768 29 дней назад

    1편의 백제비석에 씌여진 한자의 서체로 단서를 얻을 수는 없을까요?

  • @bamas26
    @bamas26 Месяц назад

    백제는 경기도 충청도에 있었고 그나마 그 경기도 땅도 고구려에 빼았겨 충청도에 존재하던 나라에요. 경기도 황해도 인근이 영토였을때 백제는 우리가 낙랑의 땅을 차지했으니 책봉해달라고 해서 낙랑 태수가 됩니다. 이후 5세기까진 전라도도 제대로 못 먹었던 것으로 보여지며 신라정도 되는 나라와도 치열하게 다투었죠. 이러면서 대륙에 갔다면 정신이 이상한것이죠 이게 중국에 관련 기록들이 다 남아 있어요. 동시대 왜의 왕들은 백제의 종주권을 달라고 남송에 사신을 보냅니다. 이들은 대대로 백제까지 얻지 못했어요. 백제를 제외한 한반도 남부 전체에 주인으로 책봉을 받아요. 또 알다시피.. 백제는 왕자를 일본에 인질로 보낸 나라입니다. 부정할길은 조작이라고 모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일본 중국이 우리를 갈아마시려고 4000년동안 조작한거죠... 이런걸 우리는 정신병이라고 합니다.

  • @bamas26
    @bamas26 Месяц назад

    그니까. 무슨 합당한 근거를 대세요. 위의 영상은 그냥 뇌피셜이잖아요. 1. 호태왕비문을 보지도 못한 이진희가 탁본들을 가지고 문제를 삼았던 것인데 2. 원본탁본이 다 나와버리는 바람에 종료 된 사건 입니다. 일본인 발견자는 그냥 군인이에요. 그 사람이 애초에 호태왕비문을 변조할 능력이 없어요.. 금석학은 당대 석학들이 하는 것이에요. 군인이 지나가다 발견해서 아.. 저 글자 몇개 고치면 되겠다.. 이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탁본과 그보다 오랜된 탁본이 동일하며 석회를 바르지 않은 원본까지 나왔는데 뭘 어쩌란 것인지 이해가 안가네요.

  • @이-c6y
    @이-c6y Месяц назад

    한나라 사서가 베낀거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