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무령왕릉은 과연 진짜인가? 1. 7세기 백제와 왜의 영토 2. 무령왕(501∼523) 무령왕릉 벽돌 430~610년 만들어졌다. 무덤양식은 502~557년까지 50년 존속했던 대륙의 강자 백제에 밀려 내륙에 있던 약소국 양나라가 쓰던 무덤꼴로 알려져 있다. 3. 훼손된 무덤 무령왕릉은 훼손되지 않은 채 발견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여러 정황상 이미 훼손된 무덤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우선, 무덤 안에서 발견된 비석은 백제인이 만든 것이라 볼 수 없다. 대륙의 약소국인 양나라가 외교상 주변국 왕들에게 붙인 '영동대장군'이라는 이름을 백제인이 직접 썼다는 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또한 왕이 죽고 '무령'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생전 이름인 '사마왕'을 쓴다는 것 또한 납득하기 힘들다. 무령왕릉에 놓여져 있던 비석은 백제인이 쓴 게 아닐 것으로 본다. 발견 당시 무덤문을 막고 있는 벽돌들은 얼기설기 엉망이었다. 왕의 무덤 마무리를 이런 식으로 해놓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누군가 문을 열고 '영동대장군 사마왕'이라는 비석을 놓고 갔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배수구의 벽돌이 유실되어 엉망으로 놓여져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외부침입'의 흔적!! p.s 충청권 무덤을 1000기나 도굴했던 가루베 지온이라는 자는 일제강점기에 선생질하면서 총독부의 허락을 얻어 수많은 고분을 도굴해서 유물을 일본으로 빼돌렸다. '백제 전문가'로 알려졌으나, 실은 '역사 왜곡' 전문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총독부 입장에서, 이 무덤을 '사마왕'의 것으로 만들어 역사왜곡을 할 필요성이 있었던 건 아닐까? 역사왜곡을 위해 가짜 유물(비석)을 놓은 건 가루베 지온, 이 자의 짓은 아닐까?
백제가 멸망 이전에 이미, 일본 열도가 22담로에 속한 지역이여서 잘 알고 있었고 측근도 있고 다이센 고분 역시 백제인과 긴밀한 듯 합니다. 백제는 이미 일본 열도를 자치구의 하나 처럼 다스렸기에, 백제가 망한뒤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서 신라에 복수하늘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겠지요...
2편은 2003년에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을 기초로 제작하려합니다. vod.kbs.co.kr/index.html?source=episode&sname=vod&stype=vod&program_code=T2000-0107&program_id=PS-0000742575-01-000§ion_code=05&broadcast_complete_yn=Y&local_station_code=00
수민님 무녕왕릉에 관련된 특이한 내용이 있어서 링크해봅니다. blog.naver.com/casahoo/20001640816 무녕왕릉의 무덤에 유골이 없는것이 조작의 근처중 하나일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대한화사전 절강성 금송문구는 찾는대로 올려드리겠습니다 2주정도 걸릴것 같습니다
왕릉의 규모로 보면 너무 작죠.. 그리고 사마라는 것은 무령왕의 어렸을때 부르던 명칭이에요.. 명색이 왕릉 지석인데.. 부르던 이름을 앞에 적어 사마왕이라니..말도 안되죠..정식 왕 명칭을 안쓰구요.. 일본서기에도 사마 라고 언급합니다. 한자가 서로 다름. 마 자가요..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사마중에 마자가 틀립니다.. 글자를 틀리는 실수를 할리가 없죠..
저의 생각도 같습니다. 일식등 천문 기록으로 볼때 삼국이 현 중국 동해안에 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1990년대에 정용석 선생이 쓰신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중원'이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제는 흥미를 넘어서 중국 동해안에 삼국이 있었다고 해야 삼국의 역사지리의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새해에도 더욱 알찬 내용의 설명 있기를 바라며 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아주 예리한 관찰과 분석입니다. 덕분에 님이 지적해주신 부분을 다른 문헌이나 사료를 읽을 때 잊지 않고 기억해서, 님의 지적을 반영하여 해석해보겠습니다. 지금 당장 스치는 생각으로는 우선 문제의 그 비석은 비석이라기 보다는 지신(똔 산신)에게 피장자가 무덤자리를 매입?하는 형식의 글귀가 적혀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따라서 무녕왕이 산신께 자신을 낮추어서 부르는 형식을 취한 글귀이다보니 '사마왕'이라 칭하는 문체가 아닌가싶습니다.
영상 재밌게 잘 봤습니다. 2편이 너무 기대가 되네요. 기다리느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 그렇다면 양나라가 신라 아래에 위치했다라는 것인가요? 아니면 신라인데 , 양나라 무덤 양식이라고 알려져 있기때문에 표현을 그렇게 사용한것인가요? 또 삼국이 대륙에 있었다면 중원국가들은 어디에 있었는지도 궁금한데 , 이후 영상에서 차차 나올예정인지도 궁금합니다. 영상 너무 재밌게 잘봤습니다.
저 구멍을 지적하는 분들이 좀 되네요..왕의 지석인데 구멍을 낸다는건 있을수 없죠.. 게다가 지석을 누워서 놓고..저건 일부러 여길 발견하면 보라고 놓은듯 합니다.. 비석이면 세워서 놓아야 하는데..위에 오수전도 놓여있고..저건 중도에 한번정도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놓고 나온거 같습니다.. 메꿀때 너무 조잡하게 막아놔서... 백제시대이후에 다시 침입을 한두번은 한거 같음
3편이 나오지 않았는데 1, 2편은 모두 잘 봤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현재 알려진 무령왕릉이 남조의 무덤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글쎄요... 역사전공이 아니라 잘 모르지만 왕의 무덤양식은 원래의 고유의 양식을 따른다고 알고 있습니다. 역대 백제왕릉이라고 알려진 다른 왕릉은 어떤 양식인지 전부 남조의 양식으로 되어 있는지 궁금합니다. 고구려와 백제야 부여계인데 구지 남조의 무덤양식을 쓴다? 글쎄요... 만약 다른 백제왕릉이 남조양식을 쓰지 않고 다른 양식을 썼다면 현재 무령왕릉이라고 불리는 남조양식의 무덤은 왕의 무덤이라고 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gulchakgi 2편에서 공개하시겠지만 미리 여쭤봅니다. 무령왕 사후 지금의 충남 공주땅에 양나라 벽돌양식으로 영동대장군 사마왕. 무령왕의 가묘?가릉? 을 만들었다면 굳이 왜 만들었을까요? 지석까지 후대에 일부러 만들었다면..물론 저 역시 22담로가 인도차이나반도까지 확장했다고 생각하고 대륙백제를 인정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와우!! 저는 요 근래에 와서야 대륙 사서와 개인 리서치를 하다가 왜가 대륙 동남부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후 몇 일 되지않아 마침 올라 온 책보고님의 동영상과, 일식기록 등을 통해 거의 확신하고 있었는데 님의 동영상에서 역시 왜를 같은 위치에 놓으신 걸 보게 되니 (오늘 발견, 오늘 구독) 참으로 따따블로 흐믓하고 뿌듯 합니다. 이어 8:00 부터 말씀하시는 야마토는, 이미 서기 270년대 부터 일본에 나타난다는 가야인의 유전학적 증거로 미루어 봤을때 어쩜 가야인이 야마토 정권의 핵심 인물들이 아니었을까 추측을 해 봤습니다. 제가 추측하는 것이 조금 더 확고해진 계기가 있었는데 이는 최인호 작가가 김수로왕과 가야의 건국과 관련 구지봉에 있는 똑같은 유적이 일본에도 있어 이를 방문하는 프로그램을 본 후 였습니다. 그러니까 한반도의 구지봉이 일본에도 있다는 것이죠. 나아가 일본의 구지봉 근처에는 사당도 잘 꾸며 놓았더라고요. 아직 선생님의 다른 동영상들을 다 보지 못한 상태라 야마토 정권의 대한 설립 부분을 이미 다루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직 다루신 바 없고 혹시 가야-야마토-가야/백제/왜/야마토-가야/백제/왜/일본으로 열도의 정권이 연결 되는지 연구해 주실 의향이 있으신지 있으시다면 연구 부탁드립니다. - 제가 여기다 왜를 넣는 이유는, 왜는 본래 수나라에서 나와 오나라로 이어 존속하다가 대륙의 백제와 대륙의 신라와도 교류를 했거나 흡사 조폭?세력으로 뒷 일을 봐 주던건 아닌지 가정해 봤는데 후에 백제를 따라 열도까지 진출했던건 아닐까 합니다. 영상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송산리에 발견된 전축분은 6호분과 무령왕릉뿐 이 없다고 합니다. 순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만일 본국에서 공수하지 않고 한반도에 있는점토로 만들었다면 필시 본국의 토기장인이대동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본래 이곳의사람이 점토를 구워 기와형식으로 만들었다면어떤식으로든 이 지역에 저런 유형의 건축물이많이 존재했어야 한다는 것 이지요
혹은 중국 대륙의 진짜 무령왕릉에서 무령왕의 유골을 꺼내와 비석과 함께 한반도 남쪽 무덤들중 하나에 넣어둔 것일수도.. 수많은 무덤들이 이름이 없는데 굳이 이 무덤에는 비석에 소상히도 적어둔걸 보면 치밀하게 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ㅋㅋㅋ 중국이 벌인 짓이라면 이렇게까진 안했을텐데 일본이라면 가능 ㅇㅇ
저의 생각이지만.. 지석을 보면은 두개 다 구멍을 뚫어놓았구요..왕의 비석이라면 세워서 고정시켜놓아야 하는데..저건 발견당시 눞혀놓았습니다..그리고 가장 중요한건 오수전.. 지석위에 올려놓은거라면..처음 조성했을당시부터 눞혀놓은거죠.. 무령왕 사후에 바로 지석을 놓은게 아니고..나중에 발견될때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보라고...놓은걸로 생각됩니다... 무령왕릉 발견 당시 벽돌로 위부분이 너무 조잡하게 메꾸었습니다..저건 누군가 한번 침입하고..다시 메꿔야 되는데...시간이 넉넉치 않으니 저렇게 조잡하게 막은걸로 추정됩니다..유물은 많이 나온건 인정합니다만 ...지석의 진위여부는 확실히 가짜라고 생각됩니다... 사마왕이란건 일본서기에도 나오는데..곤지의 아들로 나옵니다.. 삼국사기엔 동성왕의 아들로 나오죠.,무령왕이요..사마왕이라고 표기한건 일본서기의 내용과 더 유사하다고 봅니다..사기에서는 동성왕아들로 나오고,.. 무령왕의 출생지가 일본 섬이라고 알고 있거든요...일본과 관계깊은 사람이 지석을 놓음걸로 합리적 추정이 가능합니다... 무령이란 글자는 한개도 안나옵니다..서기에도 사마라는 글자가 나오죠..이부분을 잘 봐야 됩니다..
같은 생각입니다. 일본의 경우는 말씀하신 얘기에 동의 하지만 백제가 밀려났다 기 보다 신라 말 8세기 즘으로 큰 난이 일어나서 왕실에서 관리를 못해 방치하고 있던 중국 지역이 오대십국시대를 거치면서 그 나라들에게 묻혀버리고 자연스럽게 송나라로 의도치 않게 흡수된 거 같습니다.
보고 싶은것만 보면 이렇게 됩니다 ruclips.net/video/OceviQExzxE/видео.html 6:50 부터 보시면 됩니다 저런 상황이 아니다 하더라도 일본의 도굴이 있었다면 무령왕릉에서 나온 어마어마한 유물들은 왜 두고 갔을까요?? 다 퍼가고 남은것일까요?? 첫단추부터 잘못 되었으니 그 뒤는 볼 필요도 없습니다
해박한 지식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군요. 저도 수민님 논리에 대략 동의합니다. 다만 지석에 새겨진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은 조금 달리 해석하고 싶습니다. 양직공도를 보면,, 普通二年其王餘隆遣使奉表云 累破高麗 治所城曰固麻謂邑檐魯於中國郡縣 有二十二檐魯 分子弟宗族爲之 旁小國有 叛波 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等附之,, 라고 기술되어 旁小國有 - 주변에 소국이 있어, 叛波 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等附之 - 반파국, 탁국, 다라국, 전라국, 사라국, 지미국, 마련국, 상기문국, 하침라국 등의 부용국을 거느렸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령왕 21년 조에,, 冬十一月 遣使入梁朝貢 先是爲高句麗所破 衰弱累年 至是 上表稱 累破高句麗 始與通好 而更爲强國,, 고구려를 여러차례 이겨 비로소 양과 교류를 하게 되었으니 다시 강대국이 되었다,, 라고 하면서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 칭호를 받습니다. 물론 이러한 기록이 당시 실제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외교적 실리와 국력과시를 위해 필요한 대내외적 수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반도사관 이병도 류에 동조하는 논리라고 볼 수도 있겠고, 또한 수민님이 말씀하신 자주성 훼손 논리도 있겠지만,, 강대한 고구려와 경쟁하는 관계였던 백제로서는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 칭호를 대내외에 과시함으로써, 주변 소국에 대한 무령왕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양직공도에 그려진 백제의 위상이 고구려보다 앞서열에 위치해 있는 점이나,,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 칭호를 대내외에 드러내어 경쟁국 고구려의 위상보다 백제의 위상을 한층 드러내어, 주변국에 대한 영향력 제고에 차용한 점을 간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양군사마 언급하신 대한화사전이 1917년 발행된것으로보아, 금송이 중국 절강성 대주에서 자란다는 내용은 무령왕릉이 만들어진 6세기 당시가 아닌, 1917년 당시의 정보를 담은것으로 보입니다. 혹시 원문을 발췌해주실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무령왕릉 목관이 일본산이란 주장은 경북대 교수 박상진에 의해 1991년 최초 제기된 것으로써, 그 주장의 근거를 살펴보면, 무령왕릉 목관의 세포배열과 나이테를 분석한 결과 이것은 일본산 금송, 그것도 나이가 300년이 넘는 초대형 금송으로 밝혀진것이고, 그정도의 오래된 나무라면 필시 일본 금송의 주산지이며, 고대일본 최대의 금송 산지였던 고야산의 금송일것으로 추정한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개인적으로 무령왕릉 목관은 일본산이 맞다고 여겨집니다.
무령왕 발견자 인터뷰에서 꿈에서 해태가 나와서 파봤더니 입구에 진짜 해태상이 지키고 있더라는 kbs 다큐가 있지 않았나요? 어릴때 본거라 그게 무령왕 발굴 다큐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맞다면 위치를 본인이 알고 있었던지 누군가 알려줬던지 했을 가능성이 있을거 같습니다.
참 심각하네요. 묘지비석을 저렇게 적을 수 없죠. 영동대장군은 백제 입장에서는 바보나 마찬가진데, 게다가 이름을 그대로 박는다? 무령왕 아들이 누군지 모르겠는데 아버지 무덤은 자식이 챙겼을거니까 아들이 아버지묘에다가 바보 아빠본명 죽다라고 적은 미친놈은 아니겠지요. 게다가 무령왕릉은 도난흔적이 없는 왕릉으로 국사에서 배우고 가르쳤을텐데 도굴흔적이 있네요. 국사편찬집단이야말로 가장 쓰레기집단 아니겠습니까?
양나라 기술자들이 초빙됐을 확률도 분명 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무덤의 외적인 설계에만 관여했을것입니다. 저는 당시 백제가, 자기나라 왕릉 지석에 들어갈 문구마저 스스로 새길 힘이 없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일은 백제가 양나라의 실질적인 속국정도는 되어야 가능했을 일인데, 현 역사학계에서 조차 백제를 양나라의 속국으로 여기진 않습니다.
제가 홀로 답사를 가서 왕릉에 가보니 지석이었는지 벽돌이었는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카타카나 같은 일본 근대 필체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걸 분석한 자료는 없더군요. 사진자료도 당시 인터넷에 아무러지 않게 나뒹굴고 있어서 사진을 찍지 않았는데, 다시 생각나서 찾아보려하니 힘드네요.
왜 그랬냐가 없다 동기가 없다는 것 따라서 과도한 추정이다 묘파손은 커다란 재앙으로 알고 있는데 부장품은 그대로 있고 무엇하러 무덤 주인을 바꿀까? 북경이 주무대인데 왜 한반도에 묘을 만들었을까 그 당시 정치상황을 조사해야 조선 이전 한반도에 유일한 주인이 있는 왕능이다 나머지 왕능은 추정 가짜다
백제 무령왕릉은 과연 진짜인가?
1. 7세기 백제와 왜의 영토
2. 무령왕(501∼523)
무령왕릉 벽돌 430~610년 만들어졌다. 무덤양식은 502~557년까지 50년 존속했던 대륙의 강자 백제에 밀려 내륙에 있던 약소국 양나라가 쓰던 무덤꼴로 알려져 있다.
3. 훼손된 무덤
무령왕릉은 훼손되지 않은 채 발견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여러 정황상 이미 훼손된 무덤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우선, 무덤 안에서 발견된 비석은 백제인이 만든 것이라 볼 수 없다. 대륙의 약소국인 양나라가 외교상 주변국 왕들에게 붙인 '영동대장군'이라는 이름을 백제인이 직접 썼다는 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또한 왕이 죽고 '무령'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생전 이름인 '사마왕'을 쓴다는 것 또한 납득하기 힘들다. 무령왕릉에 놓여져 있던 비석은 백제인이 쓴 게 아닐 것으로 본다.
발견 당시 무덤문을 막고 있는 벽돌들은 얼기설기 엉망이었다. 왕의 무덤 마무리를 이런 식으로 해놓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누군가 문을 열고 '영동대장군 사마왕'이라는 비석을 놓고 갔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배수구의 벽돌이 유실되어 엉망으로 놓여져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외부침입'의 흔적!!
p.s 충청권 무덤을 1000기나 도굴했던 가루베 지온이라는 자는 일제강점기에 선생질하면서 총독부의 허락을 얻어 수많은 고분을 도굴해서 유물을 일본으로 빼돌렸다. '백제 전문가'로 알려졌으나, 실은 '역사 왜곡' 전문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총독부 입장에서, 이 무덤을 '사마왕'의 것으로 만들어 역사왜곡을 할 필요성이 있었던 건 아닐까? 역사왜곡을 위해 가짜 유물(비석)을 놓은 건 가루베 지온, 이 자의 짓은 아닐까?
수민박님, 아주 예리하십니다😊
묘지의 이름 해석만으로도, 명쾌합니다.
백제인이 왕을 그리 서술 할순 없지요~~!
최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백제 초기부터 말갈이 쳐들어오고 낙랑과도 시끄럽죠. 고로 백제는 일식 기록이 보여주듯 북경처럼 북쪽에 위치해야 맞지요~!!!
😊
백제가 멸망 이전에 이미, 일본 열도가 22담로에 속한 지역이여서 잘 알고 있었고 측근도 있고 다이센 고분 역시 백제인과 긴밀한 듯 합니다. 백제는 이미 일본 열도를 자치구의 하나 처럼 다스렸기에, 백제가 망한뒤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서 신라에 복수하늘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겠지요...
누가 왕의 무덤을 마무리하는데 저렇게 엉망으로 쌓아요 죽을라고... 제일 솜씨 좋은 장인이 최고의 솜씨로 하죠...
저런식이면 초등학생도 하겠네요~
이런걸 보믄, 강단사학자 인간들은 진짜 쓰레기입니다.
@@ILovekorea365 유사 역사 중독 환자 발견!
책보고님 채널을 통해 알게 되었고 이 영상을 제일 먼저 보고 있는데 감탄의 연속이네요~ 잘보았습니다~! ^^
2020년 첫번째 방송이닷!
넘 흥미로운 방송!
올해도 재미난 방송 부탁드립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편은 2003년에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을 기초로 제작하려합니다. vod.kbs.co.kr/index.html?source=episode&sname=vod&stype=vod&program_code=T2000-0107&program_id=PS-0000742575-01-000§ion_code=05&broadcast_complete_yn=Y&local_station_code=00
예전에 봤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릴적 이름 사마라고 불린 이유가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었습니다. 섬=시마=사마, 왕비께서 일본으로 배를 타고 가던 중 산통이 오자 급히 각라도(가카라시마)에 정박하여 출산을 하게 되었는데 태어난 아기를 사마라고 지었답니다.
무령왕릉의 목곽은 일본산 적송이라고 방송에서 소개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인데, 쉽게 얘기하면 모두 수입품이라는 얘기가 되죠. 양나라 양식의 벽돌과 일본산 적송 목재 기존과 다른 무덤 양식.
언제쯤 업로드되려나요
수민님 무녕왕릉에 관련된 특이한 내용이 있어서 링크해봅니다. blog.naver.com/casahoo/20001640816 무녕왕릉의 무덤에 유골이 없는것이 조작의 근처중 하나일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대한화사전 절강성 금송문구는 찾는대로 올려드리겠습니다 2주정도 걸릴것 같습니다
@@양군사마 네 알겠습니다
앗 드디어 오랜만에 영상이 ~~
저도 옛날에 무녕왕릉 입구사진을 보고 왕릉치곤 볼품없지않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ㅎㅎ..
사마왕이라는 표현도 그렇고 여러 가능성을 추론해 볼만 할 것 같네요
2편도 기대합니다!
왕릉의 규모로 보면 너무 작죠.. 그리고 사마라는 것은 무령왕의 어렸을때 부르던 명칭이에요.. 명색이 왕릉 지석인데.. 부르던 이름을 앞에 적어 사마왕이라니..말도 안되죠..정식 왕 명칭을 안쓰구요.. 일본서기에도 사마 라고 언급합니다. 한자가 서로 다름. 마 자가요..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사마중에 마자가 틀립니다.. 글자를 틀리는 실수를 할리가 없죠..
영상 흥미롭게 잘 감상했습니다
다음편이 상당히 기대가 됩니다.
님의 추리영상을 보니 이해가 갑니다.
식민사관의 피해가 이 정도인 지 몰랐군요.
우리 나라 역사학자들은 모두 뭐하고 있는지 울화가 터집니다.🥶🥶🥶
응원합니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을 매국강단사학자라고 불리는 이유가 다 있겠죠.
반도사학자들 모두 묻어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많은 분들이 같은 심정일듯 싶습니다...
와 역사를 좋아하는 21살 청년이지만 추론이 대단하시네요 감탄했습니다 요즘 우환폐렴때메 난리인데 몸 건강하시고 새해복 많이받으세요
다시봐도 감탄이 나오는 추론이고 결론입니다!
벽돌입구가 조잡했다는건 왕릉에 누군가 침입해 비석을 넣었다가 맞는 것같다
동의합니다.
중간부분부터 상단까지가 우겨 넣은 모습입니다.. 이 양식 무덤이 중국에 대부분있는데 거기 입구 막아놓은 사진보면..가지런히 잘 정리해서 막았습니다..한번 보시길..한두번정도는 들어왔다는 증거입니다..
정말 대단한 추리십니다.
이런 내용은 몰랐어요.
아... 벽돌과 배수로~
실제로 백제는 요서 지역을 경략했고, 22담로 체제였음. 영상에서 파란색 지역이 정확히 일치함. 지금도 백제의 흔적이 남 있는 곳들임.
정말 흥미롭게 잘 봤습니다.
예리한 추론과 논리,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배운 역사는 과연 진실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존 역사학자 단 한분도 이런 합리적 의구심을 갖는 학자가 없었던 걸까요?!
무녕왕릉의 금송은 일본에서 편찬된 대한화사전 (1917년) 11권에서는 중국 절강성 대주에서 자란다고 나옵니다. 대륙백제가 존재했던 지역입니다. 금송, 적송이 일본에서만 난다고 하는것은 식민사관입니다
흥미진진합니다 감사합니다
저의 생각도 같습니다.
일식등 천문 기록으로 볼때 삼국이 현 중국 동해안에 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1990년대에 정용석 선생이 쓰신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중원'이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제는 흥미를 넘어서 중국 동해안에 삼국이 있었다고 해야 삼국의 역사지리의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새해에도 더욱 알찬 내용의 설명 있기를 바라며 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대단하시네요. 사진 자료를 통한 정확인 분석력
합리적 추론.
저도 무령왕릉 입구의 그 벽돌이 20년 전 교과서나 한영우 다찾우에서 처 음 봤을때부터 이상하다 생각했었는데... 침입가능성.. 동감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한번정도는 들어간걸로 생각됩니다.왕릉 입구를 벽돌로 저렇게 막을리가 없죠..지석 가운데 구멍을 냈는데.. 이런 조잡한 돌에 글자도 조잡하게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말도 안됨.. 직함이 나라이름앞에 적는다는건 있을수 없죠..
아주 예리한 관찰과 분석입니다.
덕분에 님이 지적해주신 부분을 다른 문헌이나 사료를 읽을 때 잊지 않고 기억해서, 님의 지적을 반영하여 해석해보겠습니다.
지금 당장 스치는 생각으로는
우선 문제의 그 비석은 비석이라기 보다는 지신(똔 산신)에게 피장자가 무덤자리를 매입?하는 형식의 글귀가 적혀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따라서 무녕왕이 산신께 자신을 낮추어서 부르는 형식을 취한 글귀이다보니 '사마왕'이라 칭하는 문체가 아닌가싶습니다.
허 참 산신께 낯추어 사마왕이라 칭하는 문제라...... 이거 완전무뇌아 시키네 이분은 분명 교수일듯
잘 듣고 있습니다~~
흥미진지하네요 잘보았습니다
정말 냉철한 분석입니다.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역사들.. 우리가 얼마나 안일하게 역사를 대해왔는지 보여주네요. 다시한번 썩어버린 사학계에 통탄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상 마지막까지 잘 시청하겠습니다
지석이 백프로 가짜임을 확신하는 근거는 사마왕의 마자가 한자가 틀림 어떻게 임금의 이름을 틀리게 판각할수 있을까요 마자 한자비교요망(삼국사기 원문 사마왕 확인)
백제는 대만을 통해서 오키나와 열도를 매우 빈번하게 이용했을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한반도의 7세기이전 유물들 자체만 보면 3개에서 4개의 나라의 유물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흡사하여 이 유물들마저 다 백제 유물로 보는게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다음내용이 기다려집니다~~
영상 재밌게 잘 봤습니다. 2편이 너무 기대가 되네요. 기다리느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 그렇다면 양나라가 신라 아래에 위치했다라는 것인가요? 아니면 신라인데 ,
양나라 무덤 양식이라고 알려져 있기때문에 표현을 그렇게 사용한것인가요?
또 삼국이 대륙에 있었다면 중원국가들은 어디에 있었는지도 궁금한데 , 이후 영상에서 차차 나올예정인지도 궁금합니다.
영상 너무 재밌게 잘봤습니다.
늘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
양나라는 신라 아래에 위치한것으로 추정되며, 실제 양나라의 영토는 현재 알려진 크기보다 더 작았을 것으로 봅니다.
또한 당시 한족의 국가와 삼국의 영토 경계선은 아직은 확실히 규명할수 없기에, 이번 영상에선 구체적으로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gulchakgi 답변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첫 영상 올려주신 이후부터 매일 기다리면서 올라오면 챙겨보고 있습니다.
다음영상이 또 너무 기다려 지네요 ㅎㅎ
무덤이 만들어진 연도를 추측했듯이 비석이 만들어진 연도는 대략적으로 나온게 없는건가요??
발굴 당시 3시간만에 덮은걸로 압니다
삼국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먼저 왕궁터나 찾아내야 할듯요
동성왕 왕궁이라고 추정하는 곳이 있어서 가보긴 했는데, 규모가 그냥 제 생각에 어느 권문세도가 저택이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영상 잘보았습니다. 보다보니 궁금증이 생기네요. 중국 동부해안지역을 백제가 멸망 당시까지 장악하고 있었다면 배타고 온 소정방의 당나라 군대는 어디에서 출발했다고 봐야할까요?
후대에 편집을 거치면서 전투과정 또한 한반도 지형에 맞게 각색된것이 아닐까합니다.
와, 감탄입니다. 한국사,동아시아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시네요. 부족함이 많이 느껴집니다.
무령왕릉 지석을 보면. 가운데 드릴로 뚫은거 같은 구멍도 있죠.. 그리고 저기 막은 벽돌도 너무 조잡하네요..근대에 다시 조성한듯합니다..
저 구멍을 지적하는 분들이 좀 되네요..왕의 지석인데 구멍을 낸다는건 있을수 없죠.. 게다가 지석을 누워서 놓고..저건 일부러 여길 발견하면 보라고 놓은듯 합니다.. 비석이면 세워서 놓아야 하는데..위에 오수전도 놓여있고..저건 중도에 한번정도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놓고 나온거 같습니다.. 메꿀때 너무 조잡하게 막아놔서... 백제시대이후에 다시 침입을 한두번은 한거 같음
전 영상들에 나와있는 대륙신라의 영토와 양나라의 영토가 겨비는 부분이 많은데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지...
다 좋은데요. 영상에서 보여준 지도만 놓고 보면 신라의 영토는 어디일까요? 설마 한반도 동쪽 끝에 몰아 넣지는 않겠지요??
왕릉치고는 입구벽돌막음이 허접한게 사실임 조작 가능성에 동의함
3편이 나오지 않았는데 1, 2편은 모두 잘 봤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현재 알려진 무령왕릉이 남조의 무덤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글쎄요... 역사전공이 아니라 잘 모르지만 왕의 무덤양식은 원래의 고유의 양식을 따른다고 알고 있습니다. 역대 백제왕릉이라고 알려진 다른 왕릉은 어떤 양식인지 전부 남조의 양식으로 되어 있는지 궁금합니다. 고구려와 백제야 부여계인데 구지 남조의 무덤양식을 쓴다? 글쎄요... 만약 다른 백제왕릉이 남조양식을 쓰지 않고 다른 양식을 썼다면 현재 무령왕릉이라고 불리는 남조양식의 무덤은 왕의 무덤이라고 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석에 적힌 사망년월이 삼국사기 기록과 일치하는것도 우연일까요 ? 저도 궁금합니다. 혹시 그것도 답변 가능할까요
제 가정대로 비석을 후대에 만들었다면, 당시 존재했던 기록을 참고하여 무령왕의 사망년월을 알아내는건 그다지 어려운일이 아니었을것으로 생각합니다.
@@gulchakgi 2편에서 공개하시겠지만 미리 여쭤봅니다. 무령왕 사후 지금의 충남 공주땅에 양나라 벽돌양식으로 영동대장군 사마왕. 무령왕의 가묘?가릉? 을 만들었다면 굳이 왜 만들었을까요?
지석까지 후대에 일부러 만들었다면..물론 저 역시 22담로가 인도차이나반도까지 확장했다고 생각하고 대륙백제를 인정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백제사에 대해 궁금한게 참 많습니다. 좋은 자료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일본서기에 나온 무령왕 출생기록(아키섬)과 청동거울?에 적힌 부여사마 이름도 2편에서 그 미스터리가 풀릴까요?
@@Coree_연합 저는 무령왕릉의 피장자가 사실 무령왕이 아닌 중국계 백제인으로 추정하고있습니다.
1편 백제영토 부분 설명은 매우 탁견입니다. 매우 합리적이고 근거에 기초한 의견이라고 저도 동의합니다. 백가제해 그래서 백제고 실제로 요서경략한 근초고왕과 그이전 시조 온조왕과 소서노 황후가 북부여에서 나와 처음 도착한 곳을 요서로 저도 보고 있습니다
그냥 비석을 가져다가 남의 무덤에 가져다 놓은 것.
그렇지 않고서야 고고학자가 무덤을 열자마자 덮었다는게 이해가 않됨.
와우!!
저는 요 근래에 와서야 대륙 사서와 개인 리서치를 하다가 왜가 대륙 동남부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후 몇 일 되지않아 마침 올라 온 책보고님의 동영상과, 일식기록 등을 통해 거의 확신하고 있었는데 님의 동영상에서 역시 왜를 같은 위치에 놓으신 걸 보게 되니 (오늘 발견, 오늘 구독) 참으로 따따블로 흐믓하고 뿌듯 합니다.
이어 8:00 부터 말씀하시는 야마토는, 이미 서기 270년대 부터 일본에 나타난다는 가야인의 유전학적 증거로 미루어 봤을때 어쩜 가야인이 야마토 정권의 핵심 인물들이 아니었을까 추측을 해 봤습니다. 제가 추측하는 것이 조금 더 확고해진 계기가 있었는데 이는 최인호 작가가 김수로왕과 가야의 건국과 관련 구지봉에 있는 똑같은 유적이 일본에도 있어 이를 방문하는 프로그램을 본 후 였습니다. 그러니까 한반도의 구지봉이 일본에도 있다는 것이죠. 나아가 일본의 구지봉 근처에는 사당도 잘 꾸며 놓았더라고요. 아직 선생님의 다른 동영상들을 다 보지 못한 상태라 야마토 정권의 대한 설립 부분을 이미 다루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직 다루신 바 없고 혹시 가야-야마토-가야/백제/왜/야마토-가야/백제/왜/일본으로 열도의 정권이 연결 되는지 연구해 주실 의향이 있으신지 있으시다면 연구 부탁드립니다. - 제가 여기다 왜를 넣는 이유는, 왜는 본래 수나라에서 나와 오나라로 이어 존속하다가 대륙의 백제와 대륙의 신라와도 교류를 했거나 흡사 조폭?세력으로 뒷 일을 봐 주던건 아닌지 가정해 봤는데 후에 백제를 따라 열도까지 진출했던건 아닐까 합니다.
영상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처음엔 저기가 개방이 되어잇었는데..누군가가 조작 유물을 넣고 저렇게 벽돌로 막아버린거 같네요..1.벽돌 조잡하게 막음.. 2. 배수로 돌이 유실됨.. 침임하면서 뒷처리를 깔끔하게 못하고 나간걸로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겠습니다.
듣다보면 은근 그럴듯하네
제작자님 중국 공안 조심하세요
집 앞에 검은 봉고차 올지도.
우리나라라 다행ㅋㅋㅋ그리고 그럴듯하다기보단 증거와 실제에 근거한 추론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에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은 백제 수도가 부여였음을 말하고 있고 미륵사지 석탑 내 발견된 금제사리봉영기 글씨체가 서체가 비슷하니 한 번 참고해 보세요.
제생각이지만.. 무령왕릉은 양나라인이 만든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아보니 벽돌중에 일부분에서 양나라인이 만들었다는 한자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진묘수...저것도 중국양나라 무덤 양식에서 나오는 석상이죠..
무령왕릉과 똑 같은 무덤이 중국에서도 발견되는데.. 규모가 몇배에 이릅니다..
백제는 왕릉이라면 그것 이상이 가야 하는데..
중국에서 발견된건 귀족묘 였습니다..
지석의 내용을 보면 토지매입권 글이 나오는데 본인 본토에서 묻었다면 이런게 나올리가 없죠.. 이건 다시 이장해서 묻은 가묘라고 생각합니다... 이영상의 12분쯤에 한번 보셨음 합니다..이거 보시는분들..딱 봐도 한번은 들어갔다는 증거에요..왕릉인데 저렇게 막을리가 없죠..
의견감사드립니다.
@@gulchakgi 아이고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저도 이 영상 보기전부터 조금은 의심이 갔었네요..지석의 글씨가 조잡, 양나라 무덤양식을 본땄지만 규모에서 귀족 규모보다 작음. 지석의 가운데가 구멍이 뚫려있음.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에서..백제라는 나라명보다 직함이 더먼저 나온것.. 벽돌로 막은 입구 가운데부터 위까지 조잡하게 다시 막은 흔적. 처음이라고 자칭 그런시기에 들어가니 이미 유물이 어지럽게 늘여놨다는 사진. 침임흔적 추정. 사마라는 글자는 생전쓰는 무령왕의 이름. 지석에 생전이름을 적는게 이해안됨.. 지석의 내용. 토지매입권 토지를 사서 여기다 묻겠다는.. 본인 영토라면 토지매입을 할리없음. 왕의 무덤이라고 보기엔 너무 작음. 그리고 송산리 고분들 사이에 껴서 있음. 왕릉인데 다른사람들 무덤사이에 묻을리가 없음. 지석은 조작된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백제인들의 솜씨가 저리 조잡할리가 없음
1,2번째 추정생각..
1. 양나라양식으로 만들었고 벽돌에서 양나라인이 만들었다는 기록 한자나옴 양나라 입장에서 무덤을 가묘로 이장한거라고 추정
2. 일제시대에 입구를 벽돌 부분해제하고 지석을 놓았다는 추정.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순서에서..사마는 일본서기에도 기록되있음.. 서기의 역사책은 이 시기보다 몇백년후임..
백제라고 그린 중국의 지도는 신 라의 땅이고 그 서쪽이 백제입니다.만주원류고를 보세요. 백제가 패망시 660년 백제 성 밖 백성이 돌궐과 말갈로 투항했다는 기록이 만주원류고에 나옵니다. 하루만에 발굴했다는 것은 조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설명이 안됩니다.
나도이게맞는듯
저희가 하나 잊고 있는게
백제시대는 황해가 없거나
지금보다 해수면이 낮아 땅으로
이어져 있을 가능성도 있는듯 해요
적당히 하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지질학 공부라도 좀 댓글 다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막 싸지르지 말고
ruclips.net/video/lgPeTovH1fI/видео.html
영상 38" 전후 백제 자치지역이 나옵니다. 참조 드립니다.
❗무슨목적으로 비석만넣고 벽돌로폐쇄?
백제를 한반도로 축소하고자 한 조선총복부 사악한 행위죠...
일본 식민학자가 중국에서 수 많은 유물과 비석등을 구매해서
조선총독부로 어마어마한 양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무덤 입구를 다시 막는 과정에서 파괴된 벽돌을 구하기 위해 배수로에 있는 벽돌을 뜯어다가 썼겠네요. 무덤 입구를 막은 벽돌의 사이즈가 배수로의 벽돌이랑 같은지 유사한 모양인지 보면 알 수 있겠죠?
저도 그러한 가능성을 염두하고 있습니다. 공주박물관 보고서에 따르면, 무령왕릉 폐쇄벽돌엔 무덤내부에선 쓰이지 않은 색다른 형식의 벽돌들이 포함돼있었다고 합니다. 그 벽돌들과 배수로 벽돌의 연관성은 아직 확인할수 없으나 분명, 가능성이 있는 얘깁니다.
이건 뭐 어디서 부터 손대야할 지 견적도 안나오네..
ㅎㅎㅎㅎㅎㅎ
리얼해요~~~
@@ILovekorea365 몇백년동안 손댔으니 뭐😅😅
양나라가 50년정도 존속했네요?? 우째 50년 존속한 나라에 무덤양식이 존재 할수 있는지 의문,,, 또 700년 존속한 나라의 무덤양식을 50년 존속한 나라의 양식을 ㄸ랐다고 하는 무뇌아 들은 뭐 하는 짐승들인지 저런 짐승들이 교수네 하니 참 어이 가 없네
5:53 저기서 양나라위치가 앞영상에서 신라위치라 했던거 같은데 어떻게된거죠
혹여 제 이전영상을 보시지 않은 분들을 위해 혼동되시지 않도록, 기존사관에 맞춰 표현했습니다.
저 무덤양식이 50년 지속한 양나라 양식일까요 양식이 분명 동이족 양식입니다
저 건축자재는 장강의 점토를 구워 만든 것 일텐데시신을 귀장형식으로 축자에 매장하였다면 그 건축자재 역시 본국에서 공수해 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따라서 재료가 한정적 이다 보니 허투루 쓸 수 없었을것 이라 생각됩니다.
당시 점토는 한반도내에서도 충분히 구할수있었다 사료되는데, 장강의 점토를 공수해온 것으로 보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송산리에 발견된 전축분은 6호분과 무령왕릉뿐 이 없다고 합니다. 순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만일 본국에서 공수하지 않고 한반도에 있는점토로 만들었다면 필시 본국의 토기장인이대동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본래 이곳의사람이 점토를 구워 기와형식으로 만들었다면어떤식으로든 이 지역에 저런 유형의 건축물이많이 존재했어야 한다는 것 이지요
@@대광성 공주대학교에서 2013년 발간한 '백제 무령왕릉 벽돌의 고고과학적 특성과 태토 산지 해석' 에 따르면 무령왕릉 벽돌은 부여 정동리 토양을 사용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정동리 가마터에서 발견된 벽돌과 무령왕릉 벽돌의 절대연대 범위가 거의 같고, 세부성분마저 동일하며, 결정적으로 무령왕릉 벽돌의 원소함량이 정동리 토양의 것과 일치하여, 무령왕릉 벽돌은 정동리 토양을 사용, 정동리 가마터에서 생산된것으로 판단됐습니다. 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176606773
양나라 존속기간...55년...나라라고 해야하나요??? ㅎㅎㅎㅎ 양나라 양식은 개뽈......
무령왕릉이 발견됬을때 그 사마라는 비문때문에 일본사학자들이 많이 좋아 했었죠.
일본 서기의 기록을 증명할수 있다는건데 뭔간 그쪽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군요.
유물을 왜곡 이용해 역사를 바꾸려는건 일본인들에겐 흔한일이니까요.
됐
혹은 중국 대륙의 진짜 무령왕릉에서 무령왕의 유골을 꺼내와
비석과 함께 한반도 남쪽 무덤들중 하나에 넣어둔 것일수도..
수많은 무덤들이 이름이 없는데 굳이 이 무덤에는
비석에 소상히도 적어둔걸 보면 치밀하게 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ㅋㅋㅋ
중국이 벌인 짓이라면 이렇게까진 안했을텐데 일본이라면 가능 ㅇㅇ
저의 생각이지만.. 지석을 보면은 두개 다 구멍을 뚫어놓았구요..왕의 비석이라면 세워서 고정시켜놓아야 하는데..저건 발견당시 눞혀놓았습니다..그리고 가장 중요한건 오수전.. 지석위에 올려놓은거라면..처음 조성했을당시부터 눞혀놓은거죠.. 무령왕 사후에 바로 지석을 놓은게 아니고..나중에 발견될때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보라고...놓은걸로 생각됩니다...
무령왕릉 발견 당시 벽돌로 위부분이 너무 조잡하게 메꾸었습니다..저건 누군가 한번 침입하고..다시 메꿔야 되는데...시간이 넉넉치 않으니 저렇게 조잡하게 막은걸로 추정됩니다..유물은 많이 나온건 인정합니다만 ...지석의 진위여부는 확실히 가짜라고 생각됩니다... 사마왕이란건 일본서기에도 나오는데..곤지의 아들로 나옵니다..
삼국사기엔 동성왕의 아들로 나오죠.,무령왕이요..사마왕이라고 표기한건 일본서기의 내용과 더 유사하다고 봅니다..사기에서는 동성왕아들로 나오고,.. 무령왕의 출생지가 일본 섬이라고 알고 있거든요...일본과 관계깊은 사람이 지석을 놓음걸로 합리적 추정이 가능합니다... 무령이란 글자는 한개도 안나옵니다..서기에도 사마라는 글자가 나오죠..이부분을 잘 봐야 됩니다..
묘비석을 탄소 연대 측정한다면 ? 언제 묘비석이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돌은 탄소측정이 불가한것으로 압니다.
돌이 틴소측정이 되는지... 안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된다고 해도 몇억년전의 돌에다가 새기면 어쩌실겁니까?
아주 탁월한 추론입니다!
이 정성으로 소설집필에 노력해보면 더 돈이 될듯
기가 막히네요
그렇다면 만주일대나 평양의 고분군은 백제왕릉이 된다는 말이네요
여지껏 백제를 고구려로 알았다니....헐
평양 남사리 벽돌 무덤을 검색하시면 무령왕릉과 같은 양식으로 조성한 무덤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현재론 낙랑무덤이라고 모든 학계에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고학계는 눈을 뜨고 다니긴 하는 건지 한심할 노릇입니다.
5개월 전에 봤는데 지금 다시 보네 백제국 왕대비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자국에서 썻다고 보면 안되는 거 같고. 외국인이 썻다고 보이는데 내가 볼때 왕대비에서 조선시대 한반도 남서부에 백제국을 만들기 위해서 조작된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고구려와 흉노의 저자인 송동건 교수 또한 이 무덤은 사마왕의 무덤이지 무령왕의 무덤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으로 삼국은 대륙에 있었고 한반도와 일본은 중국 세력에 밀려 도피한 피난처 내지 식민지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생각입니다. 일본의 경우는 말씀하신 얘기에 동의 하지만 백제가 밀려났다 기 보다 신라 말 8세기 즘으로 큰 난이 일어나서 왕실에서 관리를 못해 방치하고 있던 중국 지역이 오대십국시대를 거치면서 그 나라들에게 묻혀버리고 자연스럽게 송나라로 의도치 않게 흡수된 거 같습니다.
삼국 영토경계는 아직까지 많은 논란과 보다 연구를 해야할 과제로 보입니다.
백제 22담로 중 하나가 한반도 서남쪽과 일본인데..일본의 담로는 규슈 지방이고 규슈는 일본이 통일되기 전에는 야마토정권과는 협력적 경쟁관계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를 찾길 바랍니다
항상잘보고있습니다 하루빨리 식민사관 식민사학자들이 사라지고 실증적이고 자주적인 사관이 활성화되길..
역사를 전공하신 건가요?? 추론하는 능력이 대단하십니다..
벽돌 입구의 해석은 아주 신빙성이 높은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덤안이 난잡하게 흩어져있었다는 것도 의심을 해야 되는 것이지요
우와......대단. 님 판단이 맞는거 같아요.....조작의 흔적이 딱.
ruclips.net/video/hj0DPh6_r1M/видео.html
이건 전주KBS 방송내용입니다.
예전엔 이런 역사 스페셜등 우리나라 역사를 제대로 알려고 하는 노력이 많았는데 이제는 아예 없어졌네요!
보고 싶은것만 보면 이렇게 됩니다
ruclips.net/video/OceviQExzxE/видео.html
6:50 부터 보시면 됩니다
저런 상황이 아니다 하더라도
일본의 도굴이 있었다면
무령왕릉에서 나온 어마어마한 유물들은 왜 두고 갔을까요??
다 퍼가고 남은것일까요??
첫단추부터 잘못 되었으니 그 뒤는 볼 필요도 없습니다
다른 무령왕릉 영상보니, 당시 유물들이 나뒹굴고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사실 저 정도 규모에 더 많은 유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급하게 비싼것만 다 챙기고 나온 도굴 흔적으로 보입니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고급에도 나왔더군요... 씁쓸하네요
해박한 지식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군요. 저도 수민님 논리에 대략 동의합니다.
다만 지석에 새겨진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은 조금 달리 해석하고 싶습니다. 양직공도를 보면,,
普通二年其王餘隆遣使奉表云 累破高麗 治所城曰固麻謂邑檐魯於中國郡縣 有二十二檐魯 分子弟宗族爲之 旁小國有 叛波 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等附之,, 라고 기술되어 旁小國有 - 주변에 소국이 있어, 叛波 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等附之 - 반파국, 탁국, 다라국, 전라국, 사라국, 지미국, 마련국, 상기문국, 하침라국 등의 부용국을 거느렸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령왕 21년 조에,, 冬十一月 遣使入梁朝貢 先是爲高句麗所破 衰弱累年 至是 上表稱 累破高句麗 始與通好 而更爲强國,, 고구려를 여러차례 이겨 비로소 양과 교류를 하게 되었으니 다시 강대국이 되었다,, 라고 하면서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 칭호를 받습니다.
물론 이러한 기록이 당시 실제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외교적 실리와 국력과시를 위해 필요한 대내외적 수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반도사관 이병도 류에 동조하는 논리라고 볼 수도 있겠고, 또한 수민님이 말씀하신 자주성 훼손 논리도 있겠지만,, 강대한 고구려와 경쟁하는 관계였던 백제로서는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 칭호를 대내외에 과시함으로써, 주변 소국에 대한 무령왕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양직공도에 그려진 백제의 위상이 고구려보다 앞서열에 위치해 있는 점이나,,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 칭호를 대내외에 드러내어 경쟁국 고구려의 위상보다 백제의 위상을 한층 드러내어, 주변국에 대한 영향력 제고에 차용한 점을 간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상기문이 아니고 상사문 고쳐
죽어서 그짓거리를 아무도 볼수 없는 무덤에다가 하면 뭐~~~ 합니까?
하ㅡ 우리가 배운 역사는 가짜다.
관은 금송으로 왜열도에서만 자라는 겁니다. 그런데 중국계 백제계라고 추정 근거는요?
저는 중국계 '백제인'이라했지 '중국인'이라 하지않았습니다. 금송관을 쓴것으로 보아 당시 일본열도와 백제가 밀접한 관련이 있던것으로 추정됩니다.
@@gulchakgi 무녕왕릉의 금송은 일본에서 편찬된 대한화사전 (1917년) 11권에서는 중국 절강성 대주에서 자란다고 나옵니다. 대륙백제가 존재했던 지역입니다. 금송, 적송이 일본에서만 난다고 하는것은 식민사관입니다
@@양군사마 언급하신 대한화사전이 1917년 발행된것으로보아, 금송이 중국 절강성 대주에서 자란다는 내용은 무령왕릉이 만들어진 6세기 당시가 아닌, 1917년 당시의 정보를 담은것으로 보입니다. 혹시 원문을 발췌해주실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무령왕릉 목관이 일본산이란 주장은 경북대 교수 박상진에 의해 1991년 최초 제기된 것으로써, 그 주장의 근거를 살펴보면, 무령왕릉 목관의 세포배열과 나이테를 분석한 결과 이것은 일본산 금송, 그것도 나이가 300년이 넘는 초대형 금송으로 밝혀진것이고, 그정도의 오래된 나무라면 필시 일본 금송의 주산지이며, 고대일본 최대의 금송 산지였던 고야산의 금송일것으로 추정한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개인적으로 무령왕릉 목관은 일본산이 맞다고 여겨집니다.
일제가 조선사편수회 주관하에 무덤을 파고 묘지석을 갖다 놓은 후에 다시 덮어 조작했다.
발굴단이 나중에 실토 했음 확인없이 며칠만에 발굴을 끝냈다고 그들은 확인도 없이 무조건 안에 것을 꺼내왔다고 그래서 후회한다고 발굴단장이
저건 발굴단이 완전 파보기 전 단계에서 사진을 찍은 건데요.
무령왕 발견자 인터뷰에서 꿈에서 해태가 나와서 파봤더니 입구에 진짜 해태상이 지키고 있더라는
kbs 다큐가 있지 않았나요? 어릴때 본거라 그게 무령왕 발굴 다큐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맞다면 위치를 본인이 알고 있었던지 누군가 알려줬던지 했을 가능성이 있을거 같습니다.
동아시아사는 지록위마다 중국 25사 삼국사기 조선왕조실록까지
1편 입구가 난잡하다는 내용에 딱 결말 감이 오네요...일제의 역사 조작...훗날 자연스럽게 사마왕과 일본 사마왕을 연결하여 만주,반도, 대륙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일제판 다빈치코드 라는 거네요.
예리하십니다.
돌에 세겨진 문헌을 인정해야지 왜 의문을 갖습니까.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요 비문의 몇글자만 보지말고 비문의 재질이나 글씨체 등을 다양하게 분석해보면 진실에 한발짝 다가갈 수도 있는 것이지요 고구려 백제 신라의 기록이 너무 미미하죠
흥미진진하지만 딱 거기까지 어차피 달라질건 없는 현실 약소국 헬조선
가짜입니다.
고구려 유민 풍습이 멕시코에서 발견되었다는 내용입니다
ruclips.net/video/0Hm_gByCjhg/видео.html
그러면 백제인들도 멸망하고나서 유럽이나 멕시코 이동 가능성은 없을까요?
일본으로 다 건너 갔을까요?
연구 좀 해주세요
참 심각하네요. 묘지비석을 저렇게 적을 수 없죠. 영동대장군은 백제 입장에서는 바보나 마찬가진데, 게다가 이름을 그대로 박는다? 무령왕 아들이 누군지 모르겠는데 아버지 무덤은 자식이 챙겼을거니까 아들이 아버지묘에다가 바보 아빠본명 죽다라고 적은 미친놈은 아니겠지요.
게다가 무령왕릉은 도난흔적이 없는 왕릉으로 국사에서 배우고 가르쳤을텐데 도굴흔적이 있네요. 국사편찬집단이야말로 가장 쓰레기집단 아니겠습니까?
조선시대때 지석을 넣었다고 본다 나는
그래서 발굴을 하룻밤만에
해치운건가?
벽돌에 양나라양식을 따랐다고 명문이 새겨진걸 보면 무덤,지석 모두 양나라기술자를 초빙해서 만들었다고 볼수있음..따라서 영동대장군이라는 호칭도 양나라 기술자가 새겨놓은것임..
양나라 기술자들이 초빙됐을 확률도 분명 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무덤의 외적인 설계에만 관여했을것입니다. 저는 당시 백제가, 자기나라 왕릉 지석에 들어갈 문구마저 스스로 새길 힘이 없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일은 백제가 양나라의 실질적인 속국정도는 되어야 가능했을 일인데, 현 역사학계에서 조차 백제를 양나라의 속국으로 여기진 않습니다.
저 무덤이 무령왕 무덤도 확실하지 않는데 지석보고 무령왕릉이라고 확정 한거 아닌가 싶은데
제가 홀로 답사를 가서 왕릉에 가보니 지석이었는지 벽돌이었는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카타카나 같은 일본 근대 필체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걸 분석한 자료는 없더군요. 사진자료도 당시 인터넷에 아무러지 않게 나뒹굴고 있어서 사진을 찍지 않았는데, 다시 생각나서 찾아보려하니 힘드네요.
와...추론쩐다....반박불가네요ㅡ...
무령왕의 묘지석과 무령왕비의 묘지석은 국보 제1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하고 공주 송산리 고분군
대한민국의 사적 제13호
왜 그랬냐가 없다 동기가 없다는 것 따라서 과도한 추정이다 묘파손은 커다란 재앙으로 알고 있는데 부장품은 그대로 있고 무엇하러 무덤 주인을 바꿀까? 북경이 주무대인데 왜 한반도에 묘을 만들었을까 그 당시 정치상황을 조사해야 조선 이전 한반도에 유일한 주인이 있는 왕능이다 나머지 왕능은 추정 가짜다
야구선수 박찬호도 어렸을때 발굴되기전에 들어가봤다고 하더라고요 도굴된흔적도 보였다했구요.
야구 선수 박찬호요? 박찬호 나이가 몇인데요? 발굴이 1971년이라고 하는데~ 뭔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네요.입에서 욕 나올려고 하네~
예리합니다
다른 왕들의 무덤은 어디에?
중국 동남부에...이게 뭡니까
한반도는 백제의 담로중 하나였다 으이구
동영상 기다리게 하지마세요
동영상 늦게 올리시면
경찰에 고소해서 잡아가도록하겠습니다ㆍ
왜도 백제의 분국이 있었을것이다